최근 수정 시각 : 2023-05-11 14:31:03

과달레테 전투

파일:과달레테 전투.jpg

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젼력
3.1. 우마이야군3.2. 서고트군
4. 전투 경과5. 결과

1. 개요



서기 711년 타리크 이븐 지야드가 이끄는 우마이야 왕조군과 로데리쿠스 왕이 지휘하는 서고트 왕국군이 맞붙은 전투. 이슬람 세력의 스페인 정복의 서막을 알린 역사적인 전투이다.

2. 배경

451년 이베리아 반도에 자리를 잡은 서고트족은 서고트 왕국을 건설한 뒤 수에비족, 반달족과 치열한 경쟁을 벌인 끝에 이베리아 반도의 패권을 확립하고 아키텐을 포함한 프랑스 남부 일대도 장악했다. 그러나 507년 부이예 전투에서 클로도베쿠스 1세프랑크 왕국에게 참패하면서 아키텐을 상실했고, 서로마 고토 수복을 기치로 내건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동로마 제국의 침략을 받아 이베리아 남부 일대를 빼앗겼다. 이후 서고트 왕국은 극심한 내전에 시달렸지만, 625년경 내전을 어느 정도 수습하고 갈리아 일부, 히스파니아 전체를 장악하고, 북아프리카의 세우타를 다스리는 동로마 총독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서고트 왕국이 다스리는 히스파니아 일대는 여러 주로 분할되어 국왕이 파견한 공작이 다스렸지만, 나중에 이 공작들이 각 주의 지배권을 세습하면서 사실상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또한 수도 톨레도에서는 공작과 고위급 관료들이 참석한 왕실 자문회가 입법권과 사법권을 행사하고, 산 타 레오카디아 성당에서의 종교 회의는 단순히 종교적 문제만 다루지 않고 국왕의 선출과 폐위에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런 상황에서 국왕의 권한은 제약되었고, 대귀족 간의 내전은 빈번하게 벌어졌다.

그러던 서기 710년경, 서고트 왕국의 국왕 위티자가 승하했다. 알안달루스 시기 익명의 아랍인 역사가[1]가 집필한 《754년 연대기》에 따르면, 로데리쿠스가 왕실 자문회의 권유를 받고 왕위를 찬탈했다고 한다. 위티자가 자연사했는지, 로데리쿠스에게 시해되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서 확실하지 않지만, 로데리쿠스의 집권이 정상적인 계승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집권한 직후, 아길라 2세가 히스파니아 북동부(타라코넨시스 및 나르보넨시스)에서 반기를 들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은 아길라 2세가 위티자의 아들이었으며, 로데리쿠스의 찬탈로 왕위를 잇지 못하게 되자 반발했다고 주장한다.

이후 로데리쿠스와 아길라 2세가 서고트의 왕위를 놓고 내전을 치르고 있을 때, 타리크 이븐 지야드가 이끄는 우마이야군이 이베리아 반도 공략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보다 앞서, 북아프리카에서 이슬람군의 침략을 번번이 막아내던 세우타의 동로마 제국 총독 율리아누스는 돌연 우마이야 왕조에게 귀순했다.[2] 율리아누스는 우마이야군에게 바다를 건널 선박을 제공하고, 서고트 왕국의 지리, 정치, 군사 등 유용한 정보를 제공했다. 우마이야군은 이에 따라 이베리아 반도 침공을 개시했다.

이슬람측 기록에 따르면, 로데리쿠스에게 반감을 품은 서고트 귀족이 북아프리카의 총독 무사 이븐 누사이르에게 밀사를 보내 로데리쿠스를 타도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무사는 가장 신뢰하는 장군인 타리크 이븐 지야드에게 7,000명을 맡겨서 이베리아 반도로 파견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이 애초에 이베리아 반도를 공략할 마음이 있었다는 정황이 있다. 이슬람에 귀의한 베르베르군은 705년경부터 이베리아 해상에 수시로 침입해 약탈을 일삼았고, 《알폰소 3세의 연대기》에는 왐바 왕의 재위기간(672~680) 동안 이슬람군이 에르위그라는 귀족의 청탁에 따라 이베리아 반도에 침입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무튼 율리아누스의 도움을 받아 바다를 건넌 타리크는 병사들이 탈영하는 걸 막기 위해 상륙하자마자 배를 불태웠다. 이후 지브롤터에서 출발하여 카르타헤나 해안 일대를 돌며 약탈을 자행했다. 뒤이어 무사가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카디스 해협을 건너 15개월 동안 히스파니아에 머무르며 약탈과 학살을 자행했다고 전해지지만, 그가 과달레테 전투에 참여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이 당시 로데리쿠스는 바스크족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스페인 북동부에 있었는데, 이슬람군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자 즉시 남하하면서 왕국 전역에 자신에게 합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타리크는 카르타헤나에서 코르도바로 진군하던 중 과달레테 강 인근에서 로데리쿠스의 서고트 군대와 마주쳤다. 이리하여 이베리아 반도의 패권이 결정될 역사적인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젼력

3.1. 우마이야군

《알폰소 3세의 연대기》에 따르면, 전투에 투입된 무슬림의 숫자는 187,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과장이며, 이슬람측 기록에 따라 실제 병력은 타리크가 당초 7,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바다를 건넜고, 무사로부터 5,000명의 병력을 지원받아 총 12,000명의 병력을 갖추고 전장에 임했다고 한다. 현대 역사가들은 이슬람측 기록이 사실에 더 가까울 것으로 추정한다.

3.2. 서고트군

이슬람측 기록에 따르면, 로데리쿠스는 100,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이는 과장에다 터무니없이 높은 수치라고 간주한다. 역사가 데이비드 루이스는 서고트군의 규모를 33,000명으로 추산하며, 다른 역사가들도 대체로 서고트 군쪽이 우마이야군보다 2배 이상의 병력을 갖췄다는 것에 동의한다.

4. 전투 경과

과달레테 전투가 개시되었을 때, 서고트군은 3개 부대로 나뉘었다. 로데리쿠스 국왕은 그 중 중앙 부대를 지휘했다. 한편 타리크가 지휘하는 우마이야군은 언덕 위에 포진했다. 로대리쿠스는 적을 언덕 아래로 끌어내기 위해 기병대를 파견하여 유인하게 했지만, 타리크는 기병대를 격퇴한 뒤 부하들이 언덕 아래로 내려가는 걸 엄하게 금지했다. 적이 유인에 넘어가지 않자, 로데리쿠스는 수적 우위를 활용해 적을 압도하기로 하고, 전군에 돌격 명령을 내린 뒤 친히 적지로 돌격했다.

그러나 좌익과 우익의 서고트군은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관망하기만 했고, 베르베르 기병대가 이 틈을 타 홀로 공격해 온 서고트 중군의 후방을 급습했다. 뒤이어 이슬람군이 서고트의 중군을 에워쌌다. 결국 서고트군은 궤멸되었고, 로데리쿠스는 최후의 순간까지 싸우다가 끝내 목숨을 잃었다.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서고트군 지휘관들은 국왕의 군대가 궤멸되는 걸 지켜본 뒤 철수했다. 이리하여 과달레테 전투는 우마이야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5. 결과

로데리쿠스를 죽게 내버려둔 서고트 귀족들은 나중에 이슬람 세력과 협상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슬람 세력은 그들과 협상할 생각 따윈 전혀 없었다.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세력은 추가 병력을 파견하여 이베리아 반도의 완전 정복을 개시했다. 먼저 711년 툴레도가 함락되었고, 713년 사라고사를 거점으로 삼아 대항하던 아길라 2세를 잡아 죽였다. 서고트 귀족들은 이슬람군의 조직적인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테오도미르 같은 몇몇 귀족은 아예 이슬람군과 동맹을 맺고, 자치권을 누리는 대가로 침략자들을 도와주기도 했다.

이리하여 이슬람군은 10년도 안 되어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석권했고, 기독교 세력은 서고트 귀족 출신 펠라요코바동가 전투에서 이슬람군을 격퇴한 뒤 북부 산악지대인 아스투리아스에 세운 아스투리아스 왕국에서 가까스로 버텼다. 이슬람군은 여세를 몰아 갈리아까지 침략하지만, 732년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크 왕국의 궁재 카롤루스 마르텔이 이끄는 프랑크군에게 패배했다.


[1] 모사라베(이슬람으로 개종한 기독교인)로만 알려졌을 뿐 신원은 불명이다.[2] 자기 딸인 플로린다 라 카바가 로데리쿠스 왕에게 강간당하자 복수하기 위해 귀순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