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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율리아누스 (Ιουλιανός) |
출생 | 미상 |
사망 | 미상 |
직위 | 아프리카 총독 (비정통) |
1. 개요
동로마 제국 아프리카 총독부의 비정통 총독.아프리카 총독부 붕괴 이후에 잔존한 동로마 제국 요새와 영토를 수비하며 이슬람의 침공을 격퇴한 인물로 정식으로 임명받지만 않았으나 아프리카 총독부의 마지막 총독을 역임했다.
그러나 709년에 우마이야 왕조에 항복한 후 이슬람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면서 이베리아반도를 침공하는 길을 열어줌에 따라 서고트 왕국이 멸망하고 이베리아반도를 이슬람이 지배하는 시대를 열어주었으며 781년에 걸치는 장기간의 국토회복운동인 레콩키스타가 발생하는 원인을 제공했다는 모순적인 생애를 산 인물이다.
2. 특징
돈 훌리안이 실존인물인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당대의 기록을 전부 살펴봐도 해당인의 가문, 인종, 가족관계, 직책, 사생활등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실존인물이지만 생애가 자세하게 나타나지는 않는다.#돈 훌리안의 이름부터가 불명확하다. 가장 잘 알려진 명칭은 스페인어로 세우타 백작인 돈 홀리안(Don Julián, Conde de Ceuta)이지만 애초에 Don(돈)이라는 명칭 자체가 해당 인물이 살아가던 시대보다 한참 뒤에나 유행하던 명칭이므로 당대에 사용된 이름은 아니다. 아랍어로는 يليان, (Īlyan)이라고 발음하며 일리안이라고 부른다. 율리아누스라는 명칭은 이런 식으로 파편화된 기록들을 살펴보고 조합한 결과로 나온 이름이며 로마 황제인 율리아누스와 겹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잘 사용하지 않으며 보통은 앞서 설명한 스페인어 명칭이나 동일한 뜻의 영어 명칭인 Julian, Count of Ceuta로 부른다.
돈 훌리안의 인종도 명확하지 않다. 해당 지역의 특성을 생각해봤을 때 혈통적으로는 베르베르인이겠지만 몇 대에 걸쳐서 로마화하여 도시에 거주하고 로마 시민권을 획득하고 기독교를 믿는 베르베르계 로마인이라는 것이 유력하다.
돈 훌리안의 가족관계는 서고트 왕국의 국왕인 로데리크에게 겁탈당했다고 전해지는 딸 1명을 제외하고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해당 딸의 이름인 플로린다 라 카바(Florinda la Cava)도 후대에 붙여진 이름으로 실제 이름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다. 그리고 가족관계는 딸 1명의 존재라도 알려졌지 사생활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돈 홀리안의 직책의 경우에는 세우타의 요새 사령관임은 확실하며 세우타와 탕헤르등을 지배하는 타그마(Tagma)의 사령관을 겸임하면서 서쪽에 잔존한 동로마 제국의 아프리카 총독부 영토를 통합하여 방어하는 직위에 있었다고 분석된다. 콘스탄스 2세가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시행중인 테마 제도의 유용성에 감탄하며 기존의 총독부나 공작령등의 내부 구조를 테마 제도처럼 변경했다는 기록이 나오며 돈 훌리안이 지배하던 지역은 과거에 마우레타니아 왕국이 있던 지역이고 지브롤터 해협이 포함되기 때문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이베리아반도 지역에는 서고트 왕국이 등장하고 고대 카르타고 지역에는 반달 왕국이 건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지화한 로마인과 로마 수비대가 요새와 도시를 지키면서 독자적으로 생존하다가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고토 수복 전쟁인 반달·고트 전쟁으로 다시 동로마 제국의 영토로 재편입된 역사가 있기 때문에 테마 제도의 도입 및 운용과 유지가 손쉬웠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백작의 경우에는 동로마 제국에도 비슷한 작위가 있긴 하지만 그것과 함께 서고트 왕국의 변경백으로의 작위가 합쳐진 가능성이 높다. 원래 변경지대는 쓰시마섬의 영주 가문인 소씨(宗氏)처럼 양 국가의 직위를 동시에 겸임하는 상태가 나타나며 서유럽에서 봉건제가 나타나던 시절이므로 충분히 다른 국가의 직위를 동시에 겸임하는 것이 인정받을 상황이기도 하다.
실제로도 아프리카 총독부의 중심인 카르타고가 함락당하면서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과의 해상통로가 단절되어가던 시기이므로 돈 훌리안이 서고트 왕국의 변경백 직위를 받고 형식상으로 서고트 왕국의 영토가 될 가능성이 높던 시기다. 그래서인지 서고트 왕국의 후기 지도에서 세우타가 서고트 왕국의 영토로 표시되는 경우가 많다.
3. 생애
3.1. 최후의 아프리카 총독
아프리카 총독부가 붕괴된 후 서쪽에 남은 잔존 지역에서 유일하게 저항을 이어나가는 존재가 돈 훌리안이었다. 돈 훌리안은 베르베르인과 손을 잡고 진격해오는 우마이야 왕조의 이슬람 침공군을 상대로 저항을 지속했다.그러나 무사 이븐 누사르가 탕헤르까지 함락시켰고 그의 해방노예 출신 부하인 타리크 이븐 지야드가 발레아레스 제도를 포함한 동로마 제국의 섬 지역에 설치된 요새와 도시를 모조리 함락시키면서 세우타는 고립되었다. 하지만 세우타의 저항도 만만치 않아서 이슬람은 대서양까지 도달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지브롤터 해협을 손에 넣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세우타가 위기를 맞이하고 있을 때 서고트 왕국은 세우타를 도울 생각은 안하고 자기네들끼리 치열한 왕위 계승 전쟁을 하고 있었다. 최종적으로는 로데리크가 승리했으나 아직까지는 전임 국왕인 위티자의 아들 중 하나인 아길라 2세가 아버지의 심복을 포함한 지지자들과 함께 서고트 왕국의 영토 북부에 웅거하고 있었으며 로데리크가 최종 진압을 위해 진군하던 상황이라 내전이 완전히 끝난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데 내전이 종료된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반대파를 탄압할 목적이었는지 그냥 성욕이 폭발했는지는 모르지만 서고트 왕국 본토에 인질 겸 수학하려고 체류중인 돈 훌리안의 딸인 플로린다 라 카바를 로데리크가 겁탈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안그래도 전임 국왕인 위티자와 관계가 양호했던 돈 훌리안과 로데리크간의 관계는 좋지 않았는데 해당 사건을 계기로 급전직하했고 709년에 돈 훌리안은 복수를 위해서 이슬람 세력에 세우타를 바치며 투항한다. 이와 함께 최후의 아프리카 총독부령이 사라지면서 아프리카 총독부의 역사가 확실하게 끝난다.
물론 돈 훌리안의 투항은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동맹자인 베르베르인도 서서히 이슬람화되면서 떨어져나가는 상황이며 본국인 동로마 제국은 이미 연락두절 상태라 세우타가 아직 살아있는지 여부도차 모르며 설령 알더라도 국력이 쇠약해지고 내부 분열이 심해서 도와줄 여력이 없었다. 그리고 서고트 왕국도 변경백인 돈 훌리안을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국왕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딸을 겁탈하기까지 하니 답이 없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최후까지 항전하는 것은 의미가 없기에 이슬람에게 투항할 명분이 생긴 것이다.[1]
3.2. 이슬람의 선봉
우마이야 왕조는 처음에는 돈 훌리안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710년 7월에 타리크 이븐 말루크(Tarif ibn Malik)에게 이베리아반도 해안을 정찰하고 정보를 수집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여기서 돈 훌리안은 안내자 겸 사절로 참여하여 타리크 이븐 말루크가 현지 기독교인의 환대를 받도록 주선했으며 이들은 서고트 왕국의 왕위 계승 전쟁에 동맹으로 참여해서 좋은 성과를 얻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여기서 나온 현지 기독교인은 돈 훌리안의 친인척, 친구, 지지자들로 구성되었다고 한다.이런 과정을 거쳐서 우마이야 왕조의 신임을 얻은 돈 훌리안은 711년에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갈 충분한 수송선을 마련했으며 타리크 이븐 지야드에게 충분한 수준의 브리핑을 했다. 이런 정보를 바탕으로 해서 타라크 이븐 지야드는 약 17,000명의 병력을 711년 4월 30일에 이베리아반도에 상륙시켰으며 해협의 이름을 기존의 헤라클레스 해협에서 지브롤터 해협으로 바꾸게 만들었다.
서고트 왕국의 로데리크 국왕은 황급하게 군대를 집결시켜서 711년 7월 19일에 과달레테 전투를 진행했으나 참패하고 서고트 왕국의 중앙정부가 붕괴된다. 여기에는 로데리크의 친척인 시스베르와 오스베르가 지휘하는 부대가 탈영하거나 진영을 바꾸면서 로데리크의 중앙부 부대가 포위당하며 전황이 역전된 것이 주요 원인이었다.
돈 훌리안은 타라크 이븐 지야드의 상륙군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이후에 벌어진 과달레테 전투에서 서고트 군대의 배신을 사주하거나 수비가 견고한 요새에 기독교군 지원군인척 위장하고 잠입하여 내부를 장악하고 성문을 열게 만드는 등 적극적으로 이슬람 침공군을 도와주었다. 그 답례로 돈 훌리안은 우마이야 왕조 휘하의 이슬람 영주가 되었고 봉토도 충분히 받은 것으로 보이며 더 이상의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돈 훌리안이 이슬람의 선봉에 선 기록은 상당수가 전설이긴 하지만 상당한 신빙성을 가지고 있다. 서고트 왕국이 혼란스럽긴 했으나 과달레테 전투에서 쉽게 참패하거나 테오도미르 같은 이슬람에 협조하는 귀족이 나타나거나 10년도 지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나름대로의 세력을 유지하던 아길라 2세나 아르도가 쉽게 토벌당하고 이베리아반도의 대부분이 빠르게 함락되었으며 722년에 펠라요가 이끄는 잔존세력이 코바동가 전투에서 승리할 때까지 이슬람의 거침없는 진격이 이어진 것은 내부 사정을 제대로 알고 있는 고위급 인사가 이슬람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4. 평가
자신이 소속된 세력에 열정과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서 큰 공적을 달성한 인물이며 이베리아반도의 역사를 결정한 인물에 속한다. 그러나 기독교와 이슬람교라는 양대 세력에 모두 소속되었기에 기독교의 수호자가 이슬람의 선봉이 되는 모순이 발생한 인물이기도 하다.일단 능력 자체는 매우 훌륭한 인물이 맞다. 아프리카 총독부의 본진이 함락당한 시점에서 잔존한 지역과 붕괴된 전력으로 709년까지 밀려오는 우마이야 왕조의 군대와 싸우면서 버틴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다. 형식상 동로마 제국과 서고트 왕국에 모두 소속되기는 했으나 동로마 제국은 7세기의 위기로 인해 자신의 생존조차 어려운데다가 연락두절상태고 서고트 왕국은 자기네들끼리 내전이나 치루면서 해군 양성이나 지브롤터 해협 방위같은 중대사안을 고작 변경백 정도의 칭호 하나 주고 돈 훌리안에게 담당하게 한 것을 보면 둘 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돈 훌리안의 능력이 매우 좋았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딸이 겁탈당했다는 이유로 폭발하여 이슬람에 투항한 다음에도 돈 훌리안이 큰 능력을 발휘해서 이베리아반도가 순식간에 이슬람의 손에 넘어갔다는 것도 어찌 보면 참 대단한 일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소극적인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서서 이슬람의 침공을 도와주었기에 이슬람의 입장에서도 우마이야 왕조 휘하의 이슬람 영주로 인정해주고 원하는 수준의 봉토도 수여할 정도로 공적을 세운 것을 보면 당대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씁쓸함이 충분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래서인지 돈 훌리안에 대해서는 기독교측 기록보다는 이슬람측 기록이 좀 더 자세하게 나온다.
이런 점을 생각해볼 때 적이 된 아군의 무서움을 잘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1] 상황을 보면 참고 참다가 결국 터져버린 것 같다. 이후에 돈 훌리안이 이슬람의 선봉에 서서 적극적인 활동을 하는 것을 보면 심정이 이해가 갈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