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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우타 Ceuta | |||||
시기 | 휘장 | ||||
상징 | |||||
표어 | Siempre Noble, Leal y Fidelísima Ciudad de Ceuta(항상 고귀하고, 정직하고 충성스러운 도시 세우타) | ||||
노래 | Ceuta, mi ciudad querida (세우타, 나의 사랑하는 도시) | ||||
면적 | |||||
18.5㎢ | |||||
인문환경 | |||||
국가 | [[스페인| ]][[틀:국기| ]][[틀:국기| ]] | ||||
공용어 | 스페인어 | ||||
인구 | 84,777명(2019년) | ||||
인구밀도 | 4,582.5명/㎢ | ||||
정치 | |||||
정치체제 | 의원내각제, 단원제 | ||||
시장[1] | 후안 헤수스 비바스[2] | | |||
시의회 | 여당 | 9석 | | ||
지지 | 7석 | | |||
야당 | 4석 | | |||
2석 | [[존엄성과 시민권을 위한 운동| 운동 ]] | ||||
1석 | [[고등어 연합| 고등어 ]][3] | ||||
2석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
경제 | |||||
통화 | 유로(€) | ||||
ISO 3166-1 | |||||
ES-CE | |||||
시간대 | |||||
UTC+1(스페인 시간대) UTC+2(서머타임) |
위치 | ||
베르베르어: ⵙⴰⴱⵜⴰ, Sebta
아랍어: سبت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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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로코와의 국경에서 바라본 세우타 시가지 전경 |
2. 역사
고대 카르타고인들이 건설한 항구 도시에서 시작되었다. 고대 지명은 아빌라 (Abyla) 혹은 세프툼 (Septum)이었다. 이후 고대 로마, 게르만의 반달 왕국, 동로마 제국 등의 지배를 번갈아 가면서 받았고 711년에는 아랍인들에게 정복되었다. 이후 지명은 세프톤 (Σέπτον)에서 사브타 혹은 세브타 (سبتة)로 바뀌어 700여년간 이슬람 지배를 받으며 유지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세프톤 총독 율리아노스가 서고트 왕국의 군주 로데리크에게 아내를 뺏긴 후 앙심을 품고 우마이야 왕조와 내통, 지브롤터 해협을 건널 함대를 제공함으로써 이베리아 반도가 정복될 수 있었다 한다.2.1. 이슬람 지배기
1328년 아부 사이드 우스만 2세가 세운 육지 성벽
740년대 베르베르 대항거 당시 파괴된 세브타는 9세기 들어 마즈카사 베르베르 부족에 의해 재건되었고 무슬림과 기독교도가 공존했다. 이드리스 왕조와 동맹하여 4대째 이어지던 마즈카사 부족의 바누 이삼 후국은 931년, 칼리파를 칭한 후우마이야 왕조에 항복하며 병합되었다. 다만 1031년 후우마이야 조가 멸망한 후 한동안 혼란에 휩싸였던 세브타는 압바드 왕조 (세비야 타이파국)에 속했다가 1084년 무라비트 왕조령이 되었다. 무라비트 시기 및 1147년에 시작된 무와히드 왕조 시기 세브타는 두 베르베르 제국에 있어 안달루스 원정의 교두보로써 중시되었다.
무와히드 조가 쇠퇴하던 1232년, 무르시아의 호족 이븐 후드가 세브타를 점령했다가 곧 튀니지의 하프스 왕조가 도시를 얻었다. 다만 1249년, 주민들이 하프스 조를 축출하며 재차 무와히드 령이 되었으나 명목적인 지배에 그쳤다. 그러던 1257년, 현지 호족 아불 카심 알 아자피가 총독을 축출한 후 바누 알 나자피 후국을 세웠다. 이들은 1273년 마린 왕조에 형식상으로 복속했지만, 1304년 반란을 일으켜 완전히 독립했다. 1306년 5월, 그라나다 나스르 왕조의 무함마드 3세가 마린 왕조의 대립 술탄 우스만 이븐 아빌 울라 편에서 세브타를 점령했다. 하지만 위기를 느낀 마린 왕조가 기독교 국가들과 연합하자 정변이 일어나 폐위되었다. 뒤이어 즉위한 나스르는 세브타와 함께 론다, 알헤시라스를 마린 조에 넘겼다. (1309년) 그 무렵 우스만의 반란도 진압되었다.
다만 마린 왕조는 이번에도 세브타를 직접 통치하지 않고 1311년 야흐야 알 아자피를 총독으로 삼았다. 1316년, 반란을 일으켜 완전히 자립해버린 그는 1317년 나스르 왕조의 지브롤터 탈환 시도를 돕기도 했다. 다만 1328년 야흐야의 사후 어린 아들 아불 카심이 계승하자, 마린 술탄 아부 사이드 우스만 2세는 군대를 보내 세브타를 점령했다. 이로써 도시는 마린 왕조의 직할령이 되었고, 새 성벽이 둘러졌다. 1374년 마린 왕조는 지브롤터와 세브타를 나스르 왕조에 할양했지만, 1387년 세브타는 아라곤 왕국의 도움으로 수복한다. 하지만 1415년, 내분을 틈타 함대 200여 척에 4만 5천 대군을 이끌고 침공한 포르투갈 왕국의 항해왕자 엔히크에게 하루만에 정복되었다. 아부 사이드 우스만 3세가 수복에 나섰지만, 패하고 죽으며 마린 조는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4]
2.2. 포르투갈령 세우타
1572년의 세우타
점령 당시 기존 주민들은 대부분 도주하거나 학살되었기에 도시는 빠르게 기독교화되었고, 세우타라 불리게 된다. 다만 세우타 영유는 포르투갈에 있어 오히려 세금 낭비였고, 항해왕자 엔히크는 사하라 횡단 교역의 종착지인 상업 도시 탕헤르 점령을 위해 8천 병력과 나아갔다. 하지만 1437년 여름, 탕헤르를 포위하던 포르투갈 군은 역으로 (세우타를 뺏긴 옛 총독) 살라 벤 살라와 재상 아부 자키리야 야흐야 알 와타시가 이끄는 마린 왕조 군에게 포위되었다. 마린 군대는 강력한 포르투갈 군과 직접 대결하는 대신 봉쇄만 지속했고, 아사 직전에 놓인 엔히크는 세우타 반환을 대가로 겨우 철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보증을 위해 모로코 측에 인질로 남겨졌던 왕의 동생은 결국 옥사하였다. 이렇듯 포르투갈에 있어 세우타는 소중한 거점이었다.
1540년, 세우타 섬과 육지 사이에 세워진 레알 성벽
포르투갈은 세우타를 거점으로 하여 1458년 크사르 엣사기르를 점령하는 등 점차 모로코 북부를 잠식해갔다. 특히 1465년, 탕헤르의 구원자인 야흐야의 손자 앗 셰이크 무함마드가 와타스 왕조를 세우자 1471년 8월, 포르투갈 군은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다. 이로써 안파 (카사블랑카), 아실라가 함락되었고 탕헤르 역시 학살을 피하고자 항복했다. 1494년, 스페인은 토르데시야스 조약에서 자국 건너편의 세우타를 포르투갈 령으로 인정했다. 1540년, 포르투갈 당국은 세우타 반도 끝 부분을 섬으로 만들고 왕립 성벽을 둘러 요새화하였다. 하지만 포르투갈의 지배도 오래 가지 못했다. 1580년부터는 포르투갈의 왕위를 스페인 국왕이 겸하게 되었는데 형식상 계속 포르투갈에 소속된 지역이었지만 사실상 스페인 영토가 되었다.
2.3. 스페인령 세우타
1640년 포르투갈 귀족들의 주도로 브라간사 왕조를 옹립하여 포르투갈 독립 전쟁이 터지면서 상황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는 대부분의 지역은 브라간사 왕조를 지지해 주앙 4세와 그 뒤를 이은 아폰수 6세를 포르투갈 국왕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세우타는 포르투갈인보다 스페인인이 많이 넘어온 탓에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포르투갈 국왕 필리프 3세)를 포르투갈 국왕으로 간주했다. 포르투갈 독립 전쟁은 1668년 리스본 조약을 체결하면서 끝나는데 이에 따라 스페인은 브라간사 왕조의 포르투갈 지배를 인정하고 포르투갈은 세우타를 공식적으로 스페인(정확히는 카스티야 연합 왕국)[5]에 양도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때부터 공식적으로도 스페인의 영토가 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문장과 깃발에는 아직도 포르투갈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세우타의 문장(깃발 가운데에 그려진 것이 문장이다)은 변형된 포르투갈 문장[6]을 사용하고 깃발의 배경 부분은 수도 리스본를 비롯한 여러 포르투갈 도시에서 사용하는 깃발의 배경과 동일한 디자인이다.한편 모로코는 알라위 왕조 시기 안정을 회복하자 재차 세우타 수복을 시도했다. 유명한 술탄 물라이 이스마일은 1684년 탕헤르 회복에 고무되어 1694년 ~ 1727년까지 무려 33년간 세우타를 봉쇄, 공격했다. 비록 역사상 가장 길었던 포위는 1727년 물라이 이드리스 본인의 죽음으로 풀리고 실패했지만, 스페인 측이 세우타 구원에 나서는 틈에 당시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에 뛰어든 영국이 어부지리로 지브롤터를 공격해 점령했다. 한편 포위를 거치며 세우타는 포르투갈 특성이 얕아졌고, 스페인 도시로 변모해 갔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인 1810년, 스페인은 이번에는 동맹이던 영국에게 일시적으로 세우타를 내어주며 지브롤터 해협의 완전한 통제권을 맡기기도 했다. 세우타는 1815년에 스페인에게 반환되었다. 1859년에는 세우타의 국경 문제로 스페인-모로코 전쟁에 벌어졌는데, 스페인의 압승으로 귀결되며 알라위 왕조는 스페인의 세우타 및 멜리야 지배권을 인정했다.
본래 카디스 주에 속해 있던 세우타는 1925년, 별개의 도시로써 안달루시아 지방에 속하게 되었다. 1936년 7월,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세우타에서 아프리카 군단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고 도시를 장악했다. 이에 공화국 해군과 공군이 반격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이는 스페인 내전의 첫 교전이었다. 그 후 프랑코는 독일과 이탈리아가 제공한 항공기로 병사들을 본토로 날랐고, 3년의 내전 끝에 승리하여 집권했다. 내전 초기 프랑코 세력의 근거지였기에 현재까지 세우타는 애국주의가 강하고 보수 정당의 세력이 큰 편이다. 1947년에는 인도-파키스탄 분할 후 일부 파키스탄계 힌두교도들이 도시에 정착하기도 했다. 1956년 모로코 독립 후, 세우타는 모로코와 스페인의 분쟁지가 되었다. 2007년, 후안 카를로스 1세가 도시를 방문하자 큰 환영식 및 모로코 측의 반발이 있었다.[7] 2010년, 일종의 유화책으로 세우타와 멜리야는 이슬람 명절인 이둘 아드하 (희생절)를 공휴일로 지정했다.[8]
3. 특징
스페인계와 아랍-베르베르 계가 각각 절반 정도인 인구 분포를 보이고 아랍어도 잘 통한다. 2019년 기준으로 기독교도가 60%, 무슬림이 36%였다. 그외에도 세파르딤 유대교도, 힌두교도 등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공존하고 있다.EU의 일부로 유로가 통용되지만, 본토와 달리 EU 관세동맹의 적용을 받지 않고 EU법 적용에 있어서 일부 예외가 있다. 또 솅겐 조약 적용에도 예외가 있는 특수영토이다. 프랑스령 마르티니크나 기아나, 레위니옹과 같은 해외 레지옹과 비슷한 지위에 있다.
멜리야와 달리 별도의 공항은 없고, 주요 교통편은 알헤시라스와의 배편에 의존한다.
3.1. 난민 문제
유럽 난민 사태의 영향으로 세우타를 통해 유럽으로 몰래 입국하려다 적발된 난민들이 늘어나고 있고 2017년 초에 난민 1,100여명이 장벽을 넘으려다 모로코, 스페인 군경과 충돌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2018년 7월에도 아프리카 출신 난민 수백명이 세우타를 급습했다.#이렇게 밀입국자들이 스페인 영토로 진입하는 통로이기 때문에 스페인에서 모로코를 상대로 책임을 묻기도 하는데 이에 대해 모로코측에서는 비웃는다. 모로코도 자국민이 아닌 아프리카 각지에서 온 밀입국자들이 유럽으로 가고자 엄청 몰려오기에 심각한 골칫거리이기 때문이다. 모로코도 거대 장벽을 곳곳에 쌓아둘 지경. 이러니 아프리카 각지에서 온 밀입국자들이 모로코에서 숨어들어 살면서 돈을 모으거나 기회를 노려 모로코에서도 여러 문제가 된다.
2021년 5월 17일에 모로코인 1천 명 이상이 세우타에 들어가기 위해 바다에 뛰어들었다.# 스페인 정부는 세우타에 몰려든 모로코인 8,000명 중 절반을 돌려보냈다고 발표했으며 보안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2024년 8월에는 안개가 낀 사이 수백 명의 난민이 수영해서 왔다는 사건이 발생했다.#
4.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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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서 국민당 지지율이 가장 높은 지역 중 하나다. 유럽 난민 사태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극우정당 VOX도 지지율이 점점 오르고 있다.
그렇다고 사회주의노동자당의 험지까지는 아니라서 하원, 상원에서는 당선되기도 하고, 시의회에서도 주요 정당을 차지한다.
5. 영토 분쟁
영토 분쟁 | |
실효 지배 | 스페인 |
영유권 주장 | 모로코 |
지리적으로 모로코와 가까워 모로코도 역사적, 지리적 이유를 삼아 세우타의 영유권을 주장해 멜리야와 함께 영토 반환을 요구하지만, 스페인은 모로코가 국가 개념을 세우기 이전부터 스페인의 영토였다면서 거부하고 있다. 좀 더 나중에 먹은 스페인령 모로코는 20세기 들어 탈식민지가 대세가 되자 비교적 순순히 돌려줬지만 여기는 나머지 모로코 지역과 역사적 맥락이 다르다는 주장이다. 현지에 거주하는 스페인인 시민들 대부분도 모로코가 종교, 문화적으로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과 다른 이슬람 국가에다 경제적으로 스페인보다 더 떨어진다는 근거를 내세우며 모로코로의 귀속을 반대, 스페인령 잔류를 주장하고 있다.
현재 스페인 영토이지만 과거에 비해 크게 중요성이 떨어진 데다 경제마저 쇠락해 그다지 전망이 밝지는 않다. 사실 양차 세계대전 이후 서유럽 열강들이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을 식민 지배하던 시기가 끝나고 아랍계 독립 국가들이 들어섰고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스페인 본토와 멀리 떨어져 적대적인 모로코 영토에 둘러싸였으니 도시 확장 등을 생각할 수도 없는 상황. 식량이나 필수품도 모로코에 의존하므로 모로코가 마음만 먹으면 말려 죽일 수 있다. 다만 모로코측도 영유권 주장을 하는 것과는 별개로 스페인과 EU로 통하는 길목이라 경제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인건비가 싼 모로코인들이 국경을 넘어 일하는 경우가 많아서 모로코도 딴지를 걸기 어렵고 스페인 또한 세우타에 이들의 저임금 노동으로 이뤄지는 산업 비중이 커서 여기 영토 문제로 서로 전쟁을 벌일 분위기까지는 아니라고 한다.
한편 스페인이 영국에 지브롤터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면 영국 측은 세우타와 멜리야를 문제 삼으며 '스페인도 모로코 영내에 있는 멜리야와 세우타를 지배하는데 우리가 왜 지브롤터를 돌려줘야 하냐?'라면서 맞서기도 한다. 사실 이 문제가 없어도 어차피 지역 주민들의 확고한 영국령 잔류 지지를 받는데다 실효 지배만 3세기가 지난 영국의 입장에서 굳이 지브롤터를 스페인에 돌려줘야 할 이유가 없기도 하다. 물론 스페인의 입장에서도 실효 지배만 3.5세기가 지난 세우타와 5세기가 지난 멜리야를 모로코에 돌려줘야 할 이유가 더더욱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다.[9]
6. 기타
세우타의 주요 볼거리는 구도심과 육지 사이에 있는 난공불락의 성벽인데, 해자는 선박 운행이 가능하고 성문은 배를 타고 사다리를 내려야 입성이 가능하다. 이러한 성벽 덕에 30년 넘게 이어진 알라위 왕조의 포위를 버틸 수 있었다. 그외에 내륙의 마린 왕조 성벽, 섬 북부 각지의 스페인 시기 요새 및 포대 등 세우타는 그야말로 불침 항모처럼 요새화되었다.
옛 성채와 시가지 외에도 헤라클레스의 기둥을 형상화 한 동상이 유명하다. 관광객들은 주로 건너편에 보이는 지브롤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대항해시대 게임에서도 이름이 나온다. 대항해시대 2에서 주인공 조안 페레로로 플레이할 시 제일 먼저 방문하는 항구다. 항해의 기본을 배울 수 있는 튜토리얼 격 항구.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는 중급 항해자 양성 학교가 있다. 포르투갈의 영토였다가 스페인의 영토가 되었으므로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는 그 전의 포르투갈령의 세우타로 나오다 현재는 그냥 포르투갈이 동맹인 경우가 많은 동맹 도시다.
지역 축구팀으로는 AD 세우타 FC가 있는데 3~4부 리그를 전전하는 약체 팀이다.
7. 관련 문서
[1] 시의회 의장을 겸직한다.[2] Juan Jesús Vivas[3] 장난이 아니라 진짜로 정당 명칭이 고등어를 뜻하는 Caballas다. 생태주의 정당인 Equo와 제휴를 맺은 지역 정당이다. Caballas는 고등어란 뜻도 있지만, 구어체로는 세우타 주민들을 부르는 단어이기도 하다.[4] 세우타 점령 당시 부상을 입으며 활약했던 엔히크 왕자는 이때도 원군을 이끌고 와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5] 스페인이라는 통합된 국가가 법적으로 탄생한 것은 보르본 왕조가 들어선 18세기 이후였다. 영어 위키백과에서 Nueva Planta decrees를 참조하면 된다. 압스부르고 왕조의 지배를 받던 시기의 스페인은 아직 형식상 카스티야, 아라곤 등이 명목상의 독립 국가로서 존재하면서 동일 군주의 지배를 받는 형태(동군연합)로 되어 있었다. 물론 실질적으로는 그때도 스페인이라는 국가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취급된다.[6] 포르투갈 문장에는 방패 붉은 가장자리 위쪽에 성이 3개 이지만, 세우타는 중간의 성이 방패 아래에 위치한다. 그리고 변경지역인 세우타를 다스린 변경백=후작을 나타내는 후작의 관이 위에 그려져 있다.[7] 이는 스페인 주권자가 80년 만에 세우타를 방문한 것이었다.[8] 이는 스페인 영토에서 비기독교 축일을 공식적으로 기념한 첫 사례이다.[9] 영국의 지브롤터 획득은 1713년이며 스페인의 세우타 획득은 1668년, 멜리야 획득은 1497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