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05 14:16:36

이베리아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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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해외 식민지3. 둘러보기

1. 개요

1580년부터 1640년까지 약 60년간 존속한 스페인포르투갈동군연합. 대부분의 시기 동안 마드리드가 수도였다.

1578년 포르투갈세바스티앙 1세가 무리한 북아프리카 원정 중에 크사르 엘케비르 전투에서 결혼조차 안한 채로 24살 나이로 갑작스럽게 전사하자[1] 세바스티앙의 삼촌 추기경 엔히크가 환속 이후 왕위에 올랐지만 엔히크도 노환으로 죽고 아비스 왕조[2]가 단절되면서 포르투갈 왕위는 공석이 되었다. 이 와중에 가짜 세바스티앙이 여럿 나타나 서로가 주장하면서 난리법석이 나고 공석이 된 왕위 자리를 두고 여러 귀족들이 서로들 가짜 세바스티앙을 지원하거나 이걸 이용해먹으려고 하는 터라 온갖 난리가 벌어졌다.

세바스티앙과 엔히크는 직계 자손이 없었기 때문에 혈연상으로 가장 가까운 왕위 계승 후보는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였다. 그는 아버지 카를 5세 때의 혼인 동맹으로 자신에게 포르투갈 왕가의 혈연성이 있다는 근거를 들어 포르투갈 왕위를 계승했다.

사실 이건 이미 선왕 카를 5세가 물밑 작업을 해 놓은 공도 컸다. 당시 포르투갈의 섭정이 카를 5세의 누이인 오스트리아의 카타리나였고 이들이 포르투갈의 배후에서 암약했기 때문에 포르투갈은 지속적으로 스페인의 영향에 물들어갔던 것이다. 결국 펠리페 2세 때에 가서는 펠리페의 왕위 계승에 대해 변변한 반발 세력조차 없게 되었다. 아비스 왕조의 방계인 브라간사 가문안토니우가 있었지만 안토니우는 왕위를 주장하다가 1580년, 알바 공작 페르난도 알바레즈 데 톨레도가 이끄는 스페인군에게 쫓겨났다.

포르투갈은 동군연합으로서 자치권을 부여받긴 했지만 이때는 스페인의 위세가 전 서유럽을 휘감던 최강의 시기였으므로 비중상 카스티야아라곤보다 아래에 위치했고 이 시대는 (해외 식민지 경영 면에서는) 스페인의 황금기라고 칭해진다. 이 때는 (비록 서류상일지라도) 남아메리카 전체가 스페인의 것이었다. 이 동군연합의 판도는 실로 대단한 것이어서 아메리카 대륙의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며 아프리카, 인도, 동남아시아의 포르투갈 무역소들이 이베리아 연합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의 무절제한 대외 간섭으로 재정이 탕진되었고 반란을 일으켜 독립한 네덜란드의 카리브, 브라질, 동인도에서의 해외 식민지 강탈 등이 겹치면서 국내에서는 점점 불만이 쌓여갔다. 특히 포르투갈 상인계층은 자신들의 식민지가 차례대로 네덜란드에게 공격당하는 와중에도 스페인 중앙정부가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것에 큰 불만을 가졌다.

또한 포르투갈이 충실히 쌓아오던 대외관계가 박살났다. 공식적으로 스페인과 동군연합을 이루면서 포르투갈의 외교권이 박탈되었고, 스페인과의 적대국가 = 포르투갈의 적대국가 관계가 되버렸다. 특히 1386년부터 이어져 온 포르투갈의 가장 오래된 동맹국인 잉글랜드와의 관계를 악화 시켰고,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은 사파비 왕조에 의해 1622년 인도양의 중요 거점 호르무즈를 잃었다.

펠리페 3세, 4세의 무리한 중앙 집권화 시도는 결국 포르투갈이 브라간사 가문을 왕가로 추대, 독립을 선언해 스페인과 전쟁을 벌이게 만들었다.(포르투갈 독립 전쟁) 여기에 카탈루냐, 안달루시아, 나폴리 왕국의 독립 시도가 겹쳤고 더구나 이 때는 30년 전쟁의 한복판이었으므로 스페인과 전쟁 중이던 프랑스가 포르투갈을 지원하고 나섰다. 1643년 로크로아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스페인군을 격파하며 30년 전쟁의 형세가 기울기 시작했고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의 체결 후 이베리아 연합은 실질적으로 붕괴했다. 포르투갈과의 전쟁은 1660년대까지 이어졌지만 이미 승산은 없어졌다. 결국 포르투갈이 독립하면서 이베리아 연합은 해체되었고 스페인은 포르투갈로부터 세우타를 할양받는 조건으로 포르투갈의 분리 독립을 인정했다.

2. 해외 식민지

파일:Philip_II's_realms_in_1598.png
1598년 경 펠리페 2세 지배하의 영토
초록색: 카스티야 | 노란색: 아라곤 | 빨간색: 서인도 식민지 | 파란색: 포르투갈 본토 및 식민지
적갈색: 합스부르크령 이탈리아 | 분홍색: 합스부르크령 플랑드르(연합주 분쟁영토 포함)

위 지도가 당시 이베리아 연합의 판도를 보여준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 하에 놓였던 아메리카의 많은 원주민 입장에서는 탄압과 학살의 시기였다. 특히 엔코미엔다(Encomienda) 정책 등을 통해 원주민들의 재산과 노동력을 착취하였고 대가로 제공되어야 할 땅, 음식, 교육 등은 제대로 제공되지 않아서 원주민들은 노예와 다를 바가 없는 생활을 했다. 이 제도는 공식적으로는 1531년 카를로스 1세(=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에 의해 폐지되었지만 18세기까지 아메리카 일부 지역에서 영향을 미치며 원주민들의 권리를 억눌렀다.

그래도 스페인 정부는 의외로 원주민을 그럭저럭 사람 대접은 해주려고 애쓰던 편[3]이고 부르고스 법(1512)과 바야돌리드 법(1513) 등을 제정해 원주민을 보호하려고 했다. 시대적 한계상 원주민을 타자화했다는 비판이 있고 식민지 유럽인들이 원주민을 착취하는 것이 끝나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유럽에서는 가장 선진적인 원주민 보호법이었다. 스페인 가톨릭 신학자인 프란치스코 데 비토리아(Francisco de Vitoria)는 저서 인디아 문제(De Indis, 1538)에서 스콜라 철학과 법학에 근거해 원주민의 권익을 옹호했고 이것은 국제법의 기원이 된다. 이후 1550년 바야돌리드 논쟁을 통해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노예로 부리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기도 했다.[4]

오히려 훗날의 라틴 아메리카에 신생 독립 국가들이 생기면서 원주민의 권리는 더 추락한다. 물론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가 남미 원주민들에 대해서는 온건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에서 독립한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콜롬비아, 페루,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온두라스 같은 남아메리카와 중앙아메리카의 신생 국가들이 자국 내 원주민들에게 저지른 학살, 추방, 토지 강탈 등의 탄압보다는 나았다.[5] 물론 실제로도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원주민 탄압은 잔인하고 악랄했지만 그것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중앙정부보다는 중앙정부 통제가 미치지 않는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 현지의 스페인인포르투갈인 이주민들의 행패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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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로코와의 전투에서 포르투갈군 23,000명중 8000명이 전사하고, 15,000명이 포로가 된 포르투갈 역사상 대참패였다. 저기서 전사한 병사들도 대부분 농민 등을 대충 징발한 것이 아니라 유명한 공작 가문의 장남 등의 포르투갈 귀족단의 핵심 인물들이었다. 참고로 당시 세바스티앙의 시신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한동안 포르투갈에서는 세바스티앙이 살아서 돌아올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2] 정확히는 아비스 왕조의 2대 국왕 두아르트 1세의 아들인 인판트 페르난두의 후손인 아비스-베자 왕조[3] 신부들이 직접 가서 임신부조차도 채찍으로 맞아가며 일해야 하는 원주민들 모습에 경악하여 이들은 이제 같은 스페인 백성이라고 하소연하며 왕가에 탄원했다. 스페인 왕실도 이들은 왕국 백성이니 노예화를 금한다고 하자, 농장주들이 반란을 일으키까지 하여 분노한 왕실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이들 농장주들이 학살당하기도 했다.[4] 물론 노예상들은 "인디오를 노예로 삼지 못한다고? 그럼 아프리카 흑인들을 노예로 부리면 되지!"라는 답을 찾고, 이후 아프리카 흑인들이 대거 아메리카로 넘어오는 노예무역이 흥행하는 계기가 된다.[5] 중남미 국가들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에서 독립 국가로 독립한 배경에도 식민지 현지의 백인 기득권층(크리요오)들이 식민 지배를 하면서 식민지 출신 백인들을 차별하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몰아내고 국가를 세워 자기들만의 기득권을 강화하려는 목적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