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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백국 Condado Portucalense | |||
<rowcolor=white> 국기 | 국장 | ||
868년 ~ 1139년 | |||
<colbgcolor=#0b6db7><colcolor=white> 위치 | 포르투갈 북부 | ||
수도 | 포르투스 칼레 (868년~1096년?) 기마랑이스 (1096년? ~ 1139년 |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 | ||
국가원수 | 백작 (Conde) | ||
주요 백작 | 초대: 비마라 페레스(868~873) 말대: 아폰수 1세(1112~1139) | ||
언어 | 갈리시아포르투갈어 | ||
종교 | 가톨릭 | ||
민족 | 포르투갈인 | ||
주요 사건 | 868년 성립 1139년 왕국 선포 | ||
왕국 선포 이후 | 포르투갈 왕국 |
언어별 명칭 | |
포르투갈어 | Condado Portucalense Condado de Portucale Condado de Portugal |
갈리시아어 | Condado Portucalense |
스페인어 | Condado Portucalense |
카탈루냐어 | Primer Comtat de Portugal |
프랑스어 | Comté de Portugal |
이탈리아어 | Contea di Portucale |
라틴어 | Comitatus Portucalensis |
영어 | County of Portuga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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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투갈 백국은 포르투갈 왕국 이전에 포르투갈 북부에 있었던 국가를 말한다. 명칭을 Portucalense(포르투칼렌스) 또는 Portucale(포르투칼레) 백작령이라고도 한다.국가원수였던 백작은 아스투리아스 왕국과 레온 왕국의 봉신으로 있었으며, 이 시기에 포르투갈의 국가 정체성이 확립되기 시작했다.
현재 포르투갈이 최초로 성립된 국가이며 국토면적은 현재의 포르투갈의 절반 정도 되었다. 현재의 포르투갈은 이 포르투갈 백작령에서 남쪽으로 계속 넓힌 형태이다.
2. 역사
2.1. 포르투갈 제1백국
868년, 갈리시아 귀족 비마라 페레스는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국왕 알폰수 3세의 지시에 따라 도우로 강 하구의 포르투를 공략하고 초대 포르투갈 백작에 선임되었다. 이후 아랍군을 상대로 지속적인 공세를 벌인 끝에 871년 몬데구 강변의 코임브라를 공략했다. 약 5천의 인구를 지녔던 코임브라는 아스투리아스 왕국이 '재정복'한 첫 대도시였다.873년 비마라 페레스가 사망한 후, 비마라의 아들로 추정되는 루시디오 비마라네스가 알폰수 3세에 의해 포르투갈 백작에 선임되었다. 878년 후우마이야 왕조군이 오포르토와 코임브라를 공격해오자, 갈리시아 귀족 헤르메네길도 구티에레스와 함께 물리쳤다. 헤르메네길도 구티에레스는 갈리시아인들을 브라가, 비세우, 라멩고 등지에 이주시켰다. 이후 헤르메네길도 구티에레스의 후손들은 대대로 코임브라 백작을 칭했다. 루시디오 비마라네스는 910년 루고 일부를 영지로 삼았고, 이듬해에는 두메의 감독관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왕실 의회의 일원으로서 887년에서 917년 사이에 아스투리아스 헌장에 여러 번 이름을 실었다.
922년경 루시디오 비마라네스가 사망한 뒤, 레온 왕국의 귀족 데자 백작 곤살로 베토테스의 아들인 헤르메네길도 곤살베스가 포르투갈 백작에 선임되었다. 그의 통치에 대한 기록은 943년까지 포르투갈 지역의 성당과 수도원에 여러 차례 기부했다는 것 외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루시디오는 생전에 카스티야 백작령에서 포르투갈 백작령으로 이주한 귀족 디오고 페르난데스의 딸 무마도나 디아스와 결혼했는데, 무마도나가 남편 사후 여백작으로 취임하여 포르투갈 백국을 통치하다가 950년 후반에 여섯 자식에게 영지를 골고루 양도하면서 장남 곤살루 멘데스를 포르투갈 백작에 선임했다.
곤살루 멘데스는 964년 아내 일두아나 파이스와 함께 모레이라 데 코네고스 와 카스타 네이라 마을을 어머니 무마도나가 세운 기마랑이스 수도원에 기부했다. 한편 레온 왕국에서 오르도뉴 4세와 산추 1세의 내전이 한창 벌어졌을 때 오르도뉴 4세를 지원했다가, 후우마이야 왕조의 지원에 힘입어 내전에서 승리한 산추 1세에게 미움을 사고 말았다. 966년, 산추 1세는 그의 영지로 쳐들어가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고 그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그러나 그해 12월 19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레온 왕국의 성직자이자 학자였던 삼피로의 연대기에 따르면, 신추 1세는 곤살루가 바친 독이 든 사과를 먹고 독살당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인지, 뜬 소문을 그대로 믿고 적은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968년 갈리시아의 귀족 로드리고 벨라스케스의 친척이자 산 마르티뇨 데 파소의 수녀원장인 군트로다가 산타 콤바 수도원을 강제로 빼앗았다. 이 수녀원의 본 주인이던 오도리노가 도움을 요청하자, 무마도나는 아들 곤살루와 라미루를 통해 군트로다에게 "volens nolens(원하든, 원하지 않든)" 수도원을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군트로다가 이에 불응하고 로드리고에게 구원을 요청하면서 두 가문의 전쟁이 벌어졌고, 곤살루가 로드리고를 아귀온차 전투에서 격파하면서 종결되었다. 982년 레온 왕위에 오른 베르무두 2세는 로드리고의 아들이자 이리아 프라비아 교구의 주교인 펠라요 로드리게스를 해임했는데, 그가 이 일에 관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981년, 라미루 3세가 루에다 전투에서 후우마이야 왕조의 사령관 알 하지브 알 만수르에게 참패했다. 만수르는 여세를 이어가 레온 왕국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고, 982년에 수도인 레온에 입성하여 철저히 파괴했다. 알 만수르의 침략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는 왕을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한 곤살루는 갈리시아와 포르투갈 귀족들을 규합해 982년경 오르도뉴 3세의 사생아 베르무두 2세를 갈리시아 왕으로 옹립하며 반기를 들었다. 베르무두 2세는 982년 봄과 여름에 갈리시아 전역을 공략하며 위세를 떨쳤다. 라미루 3세는 이를 진압하고자 출진했고, 983년 초 양자는 갈리시아의 안타스 데 울라 근처 포르텔라 데 아레나스에서 격돌했지만 양측 모두 막심한 피해를 입었을 뿐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베르무두 2세는 이후에도 갈리시아 왕을 자처하다가 985년 라미루 3세가 사망하자 레온과 카스티야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레온 국왕에 선임되었다.
997년, 알 하지브 알 만수르가 이끄는 후우마이야 왕조군이 레온 왕국의 서부 영토를 관통하여 포르투갈과 갈리시아를 파괴하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진입한 뒤 그곳의 대성당을 비롯한 도시 전체를 파괴하고 성당 대문을 가지고 가서 코르도바 모스크에 내걸었다. 곤살루는 이때 사망했다고 전해지나, 만수르와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는지 병에 걸려 사망했는지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포르투갈 백작에 서임된 멘도 곤살베스는 999년부터 레온 왕실 헌장에 포르투갈 백작으로 언급되며, 그 해에 5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알폰수 5세의 가정교사를 맡는 동시에 알폰수 5세의 어머니 엘비라 가르시아와 함께 왕국의 섭정을 맡았다.
멘도 곤살베스는 섭정 초기엔 레온 왕국을 연이어 침략하는 알 만수르의 침략에 맞서 싸웠지만 1002년 알 만수르가 사망한 후 1003년 만수르의 뒤를 이어 후우마이야 왕조의 실권을 잡은 아브드 알 말리크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아랍 측 기록에 따르면, 1004년 레온 귀족 산초와의 분쟁에 시달리던 멘도가 알 말리크에게 분쟁을 중재해달라고 청원했고, 아브드 알 말리크의 대리인이자 코르도바의 판사인 아스바그 빈 아브드 알라 빈 나빌이 멘도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고 한다. 1007년 산 페드로 데 로카스 수도원에 기부한 사실이 수도원 기록에서 확인되었다.
중세 아랍 역사가 이븐 할둔(Ibn Khaldun)에 따르면, 멘도는 1008년경 '폭력적인 상황'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포르투갈의 중세 역사학자 호세 마토수(1933 ~)는 그가 권력 분쟁에 휘말려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일부 학자들은 후기 아이슬란드 사가 <헤임스크링글라>에 바이킹 지도자 올라프 하랄드손이 군발드스보르그(Gunnvaldsborg)를 공격했다는 문구에서 군발드스보르그가 "곤살레스의 도시(Gundisalvus-burgus)를 의미하고, 멘도가 통치하던 도시 투이를 나타내는 지명이라고 보고, 멘도가 바이킹의 침략으로 피살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주장을 명확하게 증명할 명확히 증명하는 기록이나 유적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근거없다고 간주한다.
멘도 곤살베스 사후 2대 포르투갈 백작인 루시디오 비마라네스의 아들 알비토 루시디스의 손자 알비토 누녜스가 백작에 선임되었다.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은 1016년 바이킹의 침략을 받고 베르모임으로 피신했다가 그곳에서 살해당했다는 것뿐이다. 장남 누누 알비테스가 뒤이어 백작에 올랐고, 모종의 시기에 결혼한 일두아라 멘데스를 공동 백작으로 세워 백국을 함께 다스렸다. 1028년 누누 알비테스가 사망한 후, 일두아라 멘데스는 장남 멘도 누녜스를 포르투갈 백작에 선임하고 1043년까지 섭정했다. 멘도 누녜스는 1050년에서 1054년 사이까지 포르투갈 백국을 통치했는데, 그의 치세 동안 레온 국왕 페르난도 1세가 포르투갈 백국의 중심지인 기마랑이스 일대에서 고메스 엑타스와 디오고 트루크테신데스 등 하급 귀족들을 행정직에 선임하는 방식으로 포르투갈 백국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멘도 누녜스의 아들로서 포르투갈 백작에 취임한 누누 멘데스는 1062년 페르난도 1세가 고디노 베네가스를 포르투갈 총독으로 선임해 직할 통치를 실시하는 것에 대해 강한 불만을 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065년 페르난도 1세가 사망한 뒤 그의 세 아들 산초 2세, 알폰소 6세, 가르시아 2세가 아버지의 영역을 세 개로 나눠서 통치했다. 이때 갈리시아와 포르투갈 백국은 가르시아 2세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 세 형제가 서로를 꺾고 영역을 확장하려는 야심을 품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자, 누누 멘데스는 이 때를 틈타 독립하기로 마음먹고 1070년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1071년 페드로소 전투에서 가르시아 2세의 진압군에 참패하고 전사했다. 그의 영지는 몰수되었고, 나중에 페르난도 1세의 영토를 통합한 알폰소 6세가 포르투갈의 총독으로 임명한 부하 시스난도 다비데스에게 넘겼다.
2.2. 포르투갈 제2백국
누누 멘데스 사후 레온 왕국의 직할 통치를 받던 포르투갈 백국은 1096년 알폰소 6세가 딸 테레사 데 레온과 사위 엔히크 드 보르고냐를 포르투갈 공동 백작으로 세우면서 부활했다. 엔히크와 테레사 부부는 이베리아 반도 서북부의 작은 영지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영토와 이권을 챙기고자 노력했다. 1109년 알폰소 6세 사후 전히스파니아의 황제를 공동으로 칭한 알폰소 1세와 우라카 부부가 서로 심각한 갈등을 벌인 끝에 내전을 벌이자, 엔히크는 상황을 관전하다가 1111년 군대를 일으켜 레온으로 진군했다.엔히크는 처음에는 우라카를 도우려 했지만, 알폰소 1세가 사절을 보내 갈리시아와 포르투갈 일대를 가지게 해줄 테니 자기 편을 들라고 설득했다. 엔히크는 이에 혹해 알폰소를 지지하기로 했다. 1111년 10월 15일, 엔히크가 이끄는 포르투갈군이 카데스피나 전투에서 카스티야 백작이자 우라카 여왕의 애인인 고메스 곤살레스를 처단했다. 우라카는 패전 소식을 듣자 부르고스에서 탈출한 뒤 또다른 지지자인 페드로 곤살레스 데 라라와 합류했다. 그 후 우라카 측은 엔히크에게 "우리 편을 들면 카스티야의 일부 영토와 레온의 사하군 북쪽에 있는 사모라, 케이아 등지를 추가로 갖게 해주겠다"고 제안했고, 엔히크는 이를 받아들여 우라카와 연합하여 알폰소를 공격했다. 알폰소는 엔히크의 갑작스러운 배신에 상당한 피해를 입고 페냐피엘로 후퇴한 뒤 엔히크와 우라카 연합군의 포위공격을 받았지만 끝까지 버텨냈다.
얼마 후, 우라카는 엔히크가 더 많은 영토를 달라고 요구한 것에 반감을 품고 알폰소 1세와 비밀 협상을 시작했다. 엔히크가 자모라를 접수하기 위해 출진한 사이, 우라카는 알폰소 1세와 내통해 팔렌시아를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 알폰소는 즉시 팔렌키아로 진군하다가 사하군에서 우라카 및 엔히크의 아내 테레사와 마주쳤다. 사하군은 곧 함락되었고, 테레사는 알폰소 1세의 마수로부터 가까스로 탈출했다. 한편 우라카는 남편과 잠시 합류했다가 그의 위세를 두려워한 나머지 갈리시아 산맥으로 도피했다.
우라카가 갈리시아 산맥 깊숙히 숨은 뒤, 알폰소 1세는 레온, 카스티야 등지를 돌며 지지자들을 규합하려 했다. 그러나 1112년 5월 아스토르가로 찾아갔다가 엔히크의 갑작스런 급습을 받았다. 짧은 공성전 끝에 아스토르가가 함락되었고, 그는 케리온 강변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엔히크는 아스토르가 공성전 도중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아스토르가에서 사망했고, 포르투갈군은 본국으로 물러났다. 이후 테레사가 막내아들 아폰수 1세를 포르투갈 공동 백작으로 옹립하고 백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했다.
1116년, 테레사는 코임브라를 무슬림으로부터 지켜내는 데 성공한 뒤 교황 파스칼 2세로부터 "용감한 여왕"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그러자 그녀는 이를 근거삼아 자신을 "알폰소의 딸이자 신에게 선택된 자"라고 명시한 문서를 발간했으며, 1117년부터는 아예 대놓고 여왕이라고 내세웠다. 이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그녀를 포르투갈의 첫번째 군주로 보기도 한다. 우라카는 자신에게 반기를 든 테레사를 응징하기 위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군대를 모집했다.
이때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주교 헬미레스와 산티아고 시의회가 세금 수취 문제로 갈등을 벌이자, 우라카는 이를 중재하려 했다. 그러나 불리한 처우를 받을 것을 두려워한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대성당의 탑에서 우라카 일행을 포위했다. 그녀는 폭도들 앞으로 끌려간 뒤 옷이 찢겨지고 돌에 얻어맞는 수모를 당했다. 그러다 군대가 투입되어 폭도들을 해산시키면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그녀는 자신에게 수모를 준 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여 처형했다. 이후 원정을 감행했지만 오히려 테레사의 추종자들에 의해 소브로소 성에서 포위되었다가 가까스로 탈출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철수했다. 다만 이 원정에서 토로와 사모라가 우라카의 수중에 넘어갔다.
1121년, 우라카는 갈리시아로 진군한 뒤 그곳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페드로 프루엘라스의 추종자들을 헬미레스 주교와 함께 탄압했다. 그녀의 군대는 여세를 몰아 미뇨 강을 건너 테레사의 영지로 진입했다. 테레사는 레온-카스티아 연합군에게 참패한 뒤 브라가의 북동쪽에 있는 란호소 성에서 포위되었고, 우라카의 군대는 두오로 강 일대까지 평정했다. 하지만 우라카가 자신의 심복이었던 디에고 헬미레스를 숙청하려 했다가 디에고의 추종자들의 거센 반발을 산 덕분에, 테레사는 패망 위기를 가까스로 넘길 수 있었다. 여기에 아라곤의 알폰소 1세가 두에로 강 남쪽의 레온 왕국 영토인 올메도를 접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우라카와 알폰소 7세는 테레사와 휴전을 맺기로 했다. 이리하여 테레사는 레온 왕국의 가신으로서 매년 공물을 바치는 조건으로 포르투갈 백작 직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1124년 여름, 테레사는 휴전 협약을 파기하고 갈리시아로 쳐들어가 각지에서 약탈을 자행했다. 우라카는 이를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테레사는 1126년 3월 8일에 우라카가 사망할 때까지 지금의 포르투갈 북부와 갈리시아 일대를 석권하는 등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우라카의 뒤를 이어 레온 왕위에 오른 알폰소 7세가 대대적인 반격에 착수해 포르투갈 백국 각지를 파괴하고 빼앗겼던 영토를 탈환했다. 이에 전의를 상실한 테레사는 알폰소 7세에게 항복했고, 이후로는 레온 국왕의 충실한 봉신이 되겠다고 맹세했다.
그 후 테레사는 갈리시아 귀족이자 트라스타마라 백작인 페르난도 페레스 데 트라바를 애인으로 삼고 포르투갈 백국을 통치했다. 그러나 자신이 성년으로 인정받는 18살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아들 아폰수 1세는 브라가의 파이오 멘데스 대주교와 손잡고 대 야고보의 유물이 브라가에서 발견되었으며, 이는 신께서 포르투갈의 독립을 원하는 징표라고 주장해 귀족들을 끌여들었다. 1128년 6월 24일, 테레사는 페드로 페르난데스 및 레온 왕국 장성들과 함께 진압에 나섰다가 상 마메데 전투에서 아들에게 참패했다. 이후 그녀는 두 딸 우라카, 산차와 함께 페드로 페르난데스를 따라 갈리시아로 망명했고, 1130년 11월 11일 몬테데라모 수도원에서 사망했다.
이후 아폰수 1세는 포르투갈 '프린스'를 칭하면서 기회를 엿보다가 1139년 무라비트 왕조를 상대로 오우리케 전투에서 승리한 후부터 포르투갈 왕을 자칭하기 시작했다. 이후 레온-카스티야 연합 왕국, 아라곤 왕국과 교황청으로부터 포르투갈 왕국을 승인받고자 수년간 외교 활동을 전개했다. 1143년 교황 특사인 귀도 데 비코 추기경에게 라틴어로 적힌 서신을 보내 "기독교를 수호하고자 이교도들과 최선을 다해 싸울 테니 포르투갈의 왕으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결과 1179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로부터 포르투갈의 독립을 인정받고 주변 국가들에게도 용인받으면서, 포르투갈 왕국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3. 역대 백작
3.1. 제1백국
포르투갈 제1백국 백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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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두아라 멘데스 | |||||
제2백국 · 왕국 · 포르투갈 공화국 | }}}}}}}}} |
- 비마라 페레스 (868 ~ 873)
- 루시디오 비마라네스 (873 ~ 922)
- 헤르메네길도 곤살베스 (922 ~ 943)
- 무마도나 디아스 (943 ~ 950): 헤르메네길도 곤살베스의 부인. 남편이 죽은 후 950년까지 포르투갈 백국을 통치하다가 장남 곤살루 멘데스에게 양도함.
- 곤살루 멘데스 (950 ~ 997)
- 멘도 곤살베스 (997 ~ 1008)
- 알비토 누녜스 (1008 ~ 1016)
- 누누 알비테스 (1016 ~ 1028): 아내 일두아라 멘데스와 함께 포르투갈 백국을 공동 통치함.
- 일두아라 멘데스 (? ~ 1043): 남편 누누 알비테스와 함께 포르투갈 백국을 공동 통치함. 아들 멘도 누네스의 섭정을 맡음.
- 멘도 누녜스 (1028 ~ 1050/1054): 1028년부터 1043년까지 어머니 일두아라 멘데스의 섭정을 받음. 1043년부터 직접 통치함.
- 누누 멘데스 (1050/1054 ~ 1071): 갈리시아 왕국의 가르시아 2세에게 패망함.
3.2. 제2백국
포르투갈 제2백국 백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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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 아폰수 | |||
보르고냐 왕조 | ||||
엔히크 | 아폰수 | |||
제1백국 · 왕국 · 포르투갈 공화국 | }}}}}}}}} |
- 엔히크 드 보르고냐 (1096 ~ 1112)
- 테레사 데 레온 (1096 ~ 1128): 1116년부터 1128년까지 포르투갈 여왕을 자칭함.
- 아폰수 엔히크스 (1112 ~ 1139): 1112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어머니에 의해 포르투갈 백작에 선임됨. 1128년 상 마메데 전투에서 어머니 테레사 데 레온을 꺾고 실권을 잡음. 1139년부터 포르투갈 왕국의 국왕을 칭했고 1179년 교황청으로부터 승인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