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4 02:27:15

엔히크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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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098><colcolor=#fff> 포르투갈 왕국 아비스 왕조 제10대 국왕
엔히크 1세
Henrique I
파일:Ritratto_di_Enrico_I_del_Portogallo_(1587)_-_Cristofano_dell'Altissimo_(Galleria_degli_Uffizi).png
출생 1512년 1월 31일
포르투갈 왕국 리스본
사망 1580년 1월 31일 (향년 68세)
포르투갈 왕국 알메이링
재위 포르투갈 왕국의 왕
1578년 8월 4일 ~ 1580년 1월 31일
아버지 마누엘 1세
어머니 아라곤의 마리아
형제 주앙 3세, 이자벨, 베아트리스, 루이스, 페르난두, 아폰수, 두아르트, 카를루스, 마리아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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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투갈 왕국 아비스 왕조 제10대 국왕겸 마지막 국왕, 별칭은 '순결한 왕(o Casto)' 또는 '추기경 왕(o Cardeal-Rei)'이다. 본래 가톨릭 성직자로 살았으나 형의 후손들이 전부 요절하여 대가 끊겨버려 늦은 나이에 환속하고 즉위한 진귀한 기록을 갖고 있다.

2. 생애

1512년 1월 31일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 리스본에서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1세와 카스티야-아라곤 연합 왕국의 공동 군주 페르난도 2세이사벨 1세의 3녀인 마리아 왕비의 6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미겔, 주앙 3세, 이자벨, 베아트리스, 루이스, 페르난두, 아폰수, 두아르트, 마리아가 있었다. 그는 형제들과 함께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수학, 철학, 신학, 승마 등 다방면의 교육을 받았다.

여러 형들이 있었기에 왕위 계승권이 한참 밀렸던 그는 14살 때 성직자가 되어 코임브라 산타 크루즈 수도원장이 되었다. 이후 브라가의 대주교, 에보라의 초대 대주교, 리스본의 대주교를 역임했으며, 1539년 주앙 3세에 의해 종교재판소의 최고 권위자가 되었다. 1546년 추기경에 발탁된 그는 도미니코회의 수도사인 루이스 데 그라나다가 라틴어로 집필한 <우리 구세주의 생애의 신비와 거룩한 복음의 일부 장소에 대한 묵상과 강론>을 안토니우 리베이루와 함께 포르투갈어로 번역, 편집했다. 또한 포르투갈이 식민지로 삼은 지역에 예수회 지부를 설립하여 가톨릭을 전파하는 데 힘썼다.

한편, 엔히크는 1549~1550년 콘클라베에 참석해 교황 율리오 3세를 선출하는 데 관여했으며, 율리오 3세가 선종한 뒤 1555년 4~5월 콘클라베에도 참석해 교황 직위를 계승할 유력 후보 중 하나로 거론되었다. 주앙 3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스페인 왕국의 국왕이며, 자신의 처남인 카를 5세에게 동생을 교황으로 세우는 데 힘써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의 간섭을 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 추기경들은 그가 아닌 마르첼로 2세를 선출했고, 마르첼로 2세가 22일만에 사망하자 바오로 4세를 새 교황으로 선출했다. 그 후 엔히크는 두 번 다시 콘클라베에 참여하지 않았다.

1557년 6월 11일, 주앙 3세가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당시 주앙 3세의 아들들은 모두 사망했기에 3살의 손자 세바스티앙 1세가 포르투갈의 새 국왕이 되었다. 주앙 3세의 왕비이자 세바스티앙 1세의 할머니인 오스트리아의 카탈리나 황후가 5년간 섭정을 맡았다가 "외국인 여자가 포르투갈 왕의 섭정을 맡아서는 안 된다"는 여론에 밀려 1562년에 사임했고, 엔히크가 1568년까지 섭정을 맡았다. 이후 세바스티앙 1세가 국정을 친히 다스릴 동안 성직 활동에 전념했다.

1578년 8월 4일, 세바스티앙 1세가 이끄는 포르투갈군이 크사르 엘케비르 전투에서 사드 왕조군에게 완패했다. 세바스티앙 1세가 후사를 남기지 못한 채 종적이 묘연해지자, 리스본에서 소집된 코르테스에서 장시간 논의한 끝에 마누엘 1세의 아들들 중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엔히크를 왕으로 추대하기로 결의했다. 엔히크는 성직자 직을 사임하고 대관식을 거행한 뒤 아비스 왕조를 지속하기 위해 신부를 맞이하기로 하고 교황청에 성직 서약을 해제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인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같은 가문 출신이자 스페인 국왕인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 왕위를 겸임하길 원했기에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엔히크는 크사르 엘케비르 전투에서 사로잡힌 15,000명의 병사들과 장군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몸값을 협상했으며, 세바스티앙 1세가 실종된 후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후계자를 지명하라는 요구는 끝까지 응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왕위 계승권자로 인정해달라는 안토니우의 요구를 사생아라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던 1580년 1월 30일 알메이링 궁전에서 68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에 리스본 대주교 주제 데 알마르다, 주앙 테요, 프란치스코 데 사 데 메네세스, 디오구 로페스 데 소우사, 주앙 데 마스케르나스 등 5명의 대신들로 구성된 섭정 위원회를 세우게 했다.

엔히크 1세 사후 안토니우가 지지자들을 끌어모아 산타렘에서 포르투갈 국왕으로 즉위했지만, 섭정 위원회는 포르투갈의 영토를 병합하지 않고 광범위한 자치권을 부여하며 귀족과 성직자들의 특권과 상인들의 무역 활동에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겠다는 펠리페 2세의 약속에 따라 펠리페 2세를 포르투갈 국왕으로 옹립하기로 결의했다. 1580년 11월, 펠리페 2세의 명령을 받들어 포르투갈로 진군한 알바 공작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 톨레도는 알칸타라 전투에서 안토니우의 추종자들을 격파하고 리스본을 장악했다. 이리하여 포르투갈 국왕을 겸임한 펠리페 2세는 1582년 알메림에 안장된 엔히크 1세의 유해를 리스본에 있는 예로니모 수도원으로 이장했다. 안토니우는 해외로 망명한 뒤 포르투갈 왕위를 쟁취하기 위해 생애 내내 항전했지만 끝내 실패했고, 포르투갈 왕국은 60여 년간 이베리아 연합에 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