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01:00:03

페드루 2세(포르투갈)

파일:포르투갈 왕국 국장.svg
포르투갈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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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098><colcolor=#fff> 포르투갈 왕국 브라간사 왕조 제3대 국왕
페드루 2세
Pedro II
파일:D._Pedro_II_(c._1780)_-_Série_Régia_de_Miguel_António_do_Amaral.png
출생 1648년 4월 26일
포르투갈 왕국 리스본 히베이라 궁전
사망 1706년 12월 9일 (향년 58세)
포르투갈 왕국 리스본 팔랴바 궁전
재위 포르투갈 왕국의 국왕
1683년 9월 12일 ~ 1706년 12월 9일
배우자 사부아느부르의 마리 프랑수아
(1668년 결혼 / 1683년 사망)
팔츠노이부르크의 마리 조피 (1687년 결혼 / 1699년 사망)
자녀 루이자, 주앙, 주앙 5세,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카, 안토니오, 테레사, 마누엘, 프란치스카
아버지 주앙 4세
어머니 루이자 데 구스만
형제 테오도시우, 조아나, 카타리나, 아폰수 6세
서명 파일:페드루 2세(포르투갈) 서명.svg
1. 개요2. 생애3.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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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투갈 왕국 브라간사 왕조 3대 국왕. 별칭은 평화왕(o Pacífico)이다.

2. 생애

1648년 4월 26일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 리스본의 히베이라 궁전에서 포르투갈 국왕 주앙 4세와 스페인 귀족 후안 마누엘 페레즈 데 구즈만의 딸인 루이자의 4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테오도시오, 안나, 주아나, 카타리나, 마누엘, 아폰수 6세가 있었다. 1653년 큰 형이자 왕위 계승자였던 테오도시우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 작은 형인 아폰수 6세가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었고 1656년 주앙 4세가 사망한 뒤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아폰수 6세는 3~4살 때 심각한 열병에 시달린 여파로 온 몸의 오른쪽 부위가 마비되었고 정신 질환에 시달렸기 때문에 통치를 제대로 할 수 없어서 루이자 왕비가 섭정을 맡았다.

1662년 6월, 아폰수 6세는 총신인 루이스 데 바스콘켈로스로부터 루이자 왕비가 자신을 폐위시키고 별궁에 유페할 거라는 참언을 듣고 루이자의 섭정 자격을 박탈한다는 칙령을 반포했다. 루이자는 아구스티노스 데스칼로스 수녀원에 은퇴한 뒤 여생을 보내다 1666년 2월 27일에 사망했다. 그 후 루이스가 국정을 총괄하며 포르투갈이 스페인 왕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크게 기여했지만, 자신의 측근들을 요직에 앉히고 권력을 독점하는 행보를 보이면서 많은 귀족들의 반감을 샀다. 정신적으로 좋지 않은 형을 대신해 왕이 되려는 야심을 품고 있던 페드루는 이들을 은밀히 포섭하며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1665년 2월 24일, 아폰수 6세와 느무르 공작 카를로 아마데오의 딸이며 프랑스 국왕 앙리 4세의 증손녀인 사보이아의 마리 프랑수아의 결혼 계약이 파리에서 체결되었다. 결혼식은 6월 27일 라로셸 에서 대리로 거행되었고, 왕비는 8월 2일 리스본에 도착했다. 그러나 왕비는 왕을 만난지 불과 이틀 만에 고해사제인 예수회 프란시스코 데 빌라에게 "왕의 성 기술이 너무 부족하고 무력하다"고 불평했다. 그녀는 몇달 간 왕과 성관계를 가지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자, 1667년 초 "Nossa Senhora da Esperança(희망의 성모님)" 수녀원으로 은퇴한 뒤 교황청에 아무리 노력해도 '결합'이 성사되지 않았다며 결혼 무효를 요청했다.

1667년 11월, 페드루는 궁정 쿠데타를 일으켜 루이스 데 바스콘켈로스를 축출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이후 마리 프랑수아 왕비와 밀회해 그녀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1668년 3월 27일 교황청의 결혼 무효 승인이 리스본에 도착하자, 페드루는 아내와 관계를 갖지도 못할 정도로 무기력한 왕이 나라를 이끌 수 있을 리 없다며, 자신이 직접 통치하겠다고 선언했다. 리스본에서 소집된 코르테스는 아폰수 6세를 폐위시키지 않는 조건하에 그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 후 페드루는 섭정으로 군림하고 마리 프랑수아 왕비와 결혼했고, 아폰수 6세는 테르세이라 섬에 유폐되었다.

한편, 포르투갈을 굴복하기 위해 연이은 침공을 감행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던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가 1665년 9월 17일에 붕어한 후 새 국왕으로 카를로스 2세가 옹립되었다. 그러나 나이가 어린 데다 신체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에 모후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가 섭정했다. 그녀는 포르투갈과의 전쟁을 이어가봐야 얻을 게 없다고 판단하고 1667년 잉글랜드와 마드리드 협약을 체결해 그들에게 여러 무역 특혜를 주는 대가로 평화 협상을 중재하도록 했다.

페드루 2세는 잉글랜드 정부의 설득을 받아들여 스페인과 평화 협상을 벌였고, 1668년 2월 13일 리스본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스페인은 브라간사 왕조의 정당성을 인정하며, 스페인에 충성을 맹세한 세우타를 제외한 포르투갈의 모든 식민지 영토에 대한 주권을 인정했으며, 포로를 교환하고 무역 거래를 회복하기로 했다. 포르투갈은 세우타를 스페인에 할양했고, 탕헤르봄베이를 잉글랜드 국왕 찰스 2세와 결혼하는 누이 카타리나의 지참금 형식으로 잉글랜드에 넘기기로 했다. 이리하여 28년간 지속되던 포르투갈 독립 전쟁은 막을 내렸다.

이와 별도로, 포르투갈은 고아, 코친, 디우, 바이아, 페르남부쿠, 리우데자네이루에 잉글랜드인들을 위한 주거 지역을 신설하고 포르투갈인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잉글랜드는 이에 대한 대가로 리스본과 포르투 해안에 있는 포르투갈 선박을 보호하는 등 포르투갈에 군사적 지원을 해주기로 했다. 1671년, 페드루 2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포르투갈에 거주하는 잉글랜드인에게 무역의 자유를 부여했다.

이리하여 포르투갈은 유럽의 강대국인 잉글랜드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지만, 잉글랜드의 우수한 섬유 상품이 별다른 규제를 받지 않은 채 쏟아져 들어오면서 국내의 섬유 산업이 고사할 위기에 몰렸다. 이에 페드루 2세는 국내 섬유 산업을 지키기 위해 지방 관료들에게 뽕나무를 심고 누에 번식을 장려하라고 명령했으며, 잉글랜드와 이탈리아의 섬유 기술자를 고용하고 포탈레그레, 푼당, 코빙량, 트라스-오스-몬테스에 양모, 실크 등을 전문적으로 생산하게 했다.

1674년, 페드루 2세는 국경 수비대의 훈련도를 강화하고 무기 체계를 개선하며, 성 및 해양 요새를 보수하는 등 왕국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코르테스에 기부금을 요청했다. 코르테스는 요청 전체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인도와 브라질에서 오는 상선들이 해적들의 약탈을 받지 않도록 11척의 선박으로 구성된 토벌 함대를 건조하기로 결의했다. 이 함대는 1675년 7월 21일 페드루 야스케스 데 마갈헤스의 지휘하에 타구스 항에서 출항한 뒤 대서양과 인도양 경비를 맡았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676년, 페드루 2세는 교황청의 승인을 받고 바이아 주교구를 대주교구를 격상시키고 올린다와 리우데자네이루 주교구를 창설했다. 또한 1686년 브라질 북부 오지에서 활동하는 예수회의 특권을 제한한다는 내용의 칙령을 반포하는 등 식민지 행정을 재조직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기를 싫어하는 타푸이아스(Tapuias: 투피어를 사용하지 않는 브라질 현지 원주민)들이 1680년대에 북동부 여러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포르투갈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상당한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페드루 2세는 아내 마리 프랑수아와의 사이에서 외동딸 이자벨 루이자를 낳았다. 그는 딸을 일찌감치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으며, 1678년 사보이아 공국의 공작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와 결혼시키려 했다. 1640년 라메코에서 열린 코르테스에서는 포르투갈 상속녀와 외국 왕자의 결혼을 금지한 바 있었지만, 1679년 11월 1일에 소집된 코르테스는 왕의 요청에 따라 이번 결혼을 허용하기로 결의했다. 사보이아 측도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사절단을 리스본에 파견해 결혼 협상을 이어갔다. 그러나 1682년 5월 토리노로 파견된 카디발 공작의 사절단은 프랑스 왕국의 강한 압력을 받은 사보이아 공국으로부터 속시원한 응답을 얻지 못하고 귀환했다. 그 후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1684년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조카딸인 마리 도를레앙과 결혼했다.

1683년 9월 12일, 테르세이라 섬에 유폐되었다가 5년만에 리스본으로 송환된 뒤 산트라 궁전에 9년간 갇혀 지내던 아폰수 6세가 사망했다. 그동안 섭정으로 군림하던 페드루 2세는 즉시 포르투갈 국왕으로 등극했다. 그 해 12월 27일 마리 프랑수아 왕비가 사망하자, 그는 자식이 딸 하나 뿐인 게 걱정되니 자식을 더 낳아야 한다며 재혼을 추진했다. 카디발 공작, 폰테 데 리마 자작 등은 프랑스 왕실과 결혼을 협상하자고 제안했지만, 그는 서유럽 최강의 국력을 자랑하는 프랑스 왕국이 포르투갈을 좌지우지하려 들 것을 우려해 팔츠 선제후 필리프 빌헬름의 딸 마리 조피와 결혼하기로 했다. 결혼식은 1687년에 성립되었고, 두 사람 사이에서 주앙 5세를 포함한 8명의 자식이 태어났다.

17세기 말 브라질 북동부 페르남부쿠 주의 카에테스에서 금광이 발견된 이래 수많은 이민자가 금을 캐려고 몰려들면서 브라질은 급속도로 발전했다. 페드루 2세는 광산 탐사를 장려하기 위해 바바세나 자작을 브라질의 총독으로 선임했고, 1693년 상파울루와 미나스 제라이스 등 여러 항구 도시를 건설했다. 1694년에는 바이아에서 브라질 최초의 조폐국이 설립되어 독자적으로 은화를 주조했다. 브라질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막대한 금은 오랜 전쟁으로 피폐했던 포르투갈 경제가 빠르게 회복되고 번영을 누릴 수 있게 해줬지만, 외국에서 몰려온 이민자들과 기존의 주민들간의 심각한 분쟁이 브라질에서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부작용이 있었다.

1700년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가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카를로스 2세는 생전에 앙주 공작 필리프를 새 국왕으로 지명했지만, 루이 14세의 손자인 필리프가 스페인 국왕이 되면 프랑스와 스페인이 머지않아 통합되리라 여긴 잉글랜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 네덜란드는 오스트리아 대공 카를을 스페인 국왕으로 내세웠다. 페드루 2세는 처음엔 중립을 표명했지만, 프랑스와 협상한 끝에 1701년 6월18일 파리 협약을 체결해 필리프를 스페인 국왕으로 인정하고 프랑스와 동맹을 맺기로 했다. 그러나 이후 벌어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프랑스군이 이탈리아와 라인강에서 합스부르크 왕조군에게 패배하자, 그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이어가야 할 지 고심했다.

1702년, 잉글랜드 정부는 페드루 2세에게 프랑스와 동맹을 끊고 자신들과 연합하여 스페인을 공격하자고 제의했다. 이에 페드루는 당장 그럴 수는 없고 영국의 우위를 확인하는 대로 진영을 바꾸겠다는 뜻을 비쳤다. 그해 10월 23일 비고 만 해전에서 잉글랜드 함대가 스페인 함대를 상대로 승리하자, 그는 프랑스와의 동맹 협약을 파기하고 잉글랜드와 협상했다. 그 결과, 1703년 5월 16일 리스본에서 잉글랜드와 상호 방위 협약을 체결했다. 또한 오스트리아, 네덜란드와 별도로 스페인을 공동으로 공격하기 위한 비밀 협약을 맺었는데, 이에 따르면 포르투갈은 카를 대공이 스페인 국왕이 되는 것을 도와주는 대가로 바다호스, 엘베케르케, 발렌시아 데 알칸타라, 투이, 바이오나, 비고 등 국경 도시들과 라플라타 강 북쪽 기슭의 영역을 영구적으로 가지기로 약속받았다.

1704년 3월 9일 리스본에 상륙한 카를 대공은 앞서 맺은 협약을 준수하겠다고 약속했고, 포르투갈군은 즉시 공세를 개시해 베이라와 알렌테호, 바르셀리아 데 알칸타라를 어렵지 않게 공략했다. 이후 1705년 10월 19일 영국-네덜란드-오스트리아 연합군은 스페인 북동부 카탈루냐 지방의 대도시인 바르셀로나를 2개월간 공격한 끝에 공략하고 그해 12월 카탈루냐 전역을 석권했다. 연합군은 여세를 이어가 스페인-프랑스 동맹군을 연이어 격파하며 스페인 내부로 깊숙이 침투했고, 1706년 6월 25일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 입성했다. 포르투갈군은 사흘 후 마드리드에 들어온 뒤 카를 대공을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3세'로 받들었다. 그러나 스페인 귀족과 국민들은 여전히 펠리페 5세를 자신들의 국왕으로 지지하며 저항을 이어갔다.

1703년부터 후두염으로 고통받던 페드루 2세는 1706년 12월 5일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4일 후인 12월 9일에 숨을 거두었다. 사후 상 비센트 드 포라 성당에 안장되었고, 심장인 알칸타라의 '침묵의 성모(Nossa Senhora da Quietaçã)' 수녀원에 안장되었다. 이후 아들 주앙 5세가 포르투갈의 새 국왕으로 등극했다.

3. 가족관계

  • 전처 사부아느무르의 마리 프랑수아즈 (1646 ~ 1683) - 본래는 형수였다.
    • 이사벨 루이사 (1669 ~ 1690)
  • 후처 팔츠노이부르크의 마리 조피[1] (1666 ~ 1699)
    • 주앙 (1688)
    • 주앙 5세 (1689 ~ 1750) - 왕위 승계
    • 프란치스코 (1691 ~ 1742)
    • 안토니우 (1695 ~ 1757)
    • 테레사 마리아 (1696 ~ 1704)
    • 마누엘 (1697 ~ 1766)
    • 프란치스카 요제파 (1699 ~ 1736)

[1] 팔츠 선제후 필리프 빌헬름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