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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우 샹팔리모 | 안토니우 로부 안투느스 | 질 비센트 | 마리아 헬레나 비에이라 다 실바 | 미겔 토르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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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colbgcolor=#005098><colcolor=#fff> 포르투갈 왕국 아비스 왕조 제7대 국왕 마누엘 1세 Manuel I | |
출생 | 1469년 5월 31일 |
포르투갈 왕국 알코셰트 | |
사망 | 1521년 12월 13일 (향년 52세) |
포르투갈 왕국 리스본 | |
재위 | 포르투갈 왕국의 왕 |
1495년 10월 25일 ~ 1521년 12월 13일 | |
배우자 | 아스투리아스 여공 이사벨 (1497년 결혼 / 1498년 사망) |
아라곤의 마리아 (1500년 결혼 / 1517년 사망) | |
오스트리아의 레오노르 (1518년 결혼) | |
자녀 | 미겔, 주앙 3세, 이자벨, 베아트리스, 루이스, 페르난두, 아폰수, 엔히크 1세, 두아르트, 카를루스, 마리아 |
아버지 | 비세우 공작 페르난두 |
어머니 | 포르투갈의 베아트리스 |
형제 | 주앙, 디오구, 레오노르, 이사벨 |
종교 | 가톨릭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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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투갈 왕국 아비스 왕조 7대 국왕. 별칭은 '행운왕(O Venturoso)'이다.2. 생애
1469년 5월 31일 포르투갈 왕국 알코셰트에서 제2대 비세우 공작 페르난두[1]와 포르투갈 국왕 주앙 1세의 아들 주앙의 딸인 베아트리스 사이의 막내로 태어났다. 형제로 주앙[2], 디오구[3], 레오노르[4], 이사벨[5], 두아르트[6], 시마우[7], 카탈리나[8], 디니스[9]가 있었다. 당시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 리스본에서는 중세 흑사병이 종종 발생해 수많은 이들이 죽어나갔기에, 왕족들은 인적이 드문 알코셰트로 거주지를 옮겨 자식들을 돌봤다.1484년, 마누엘의 형이자 비세우 공작인 디오구는 주앙 2세가 세루발 해변으로 행차했을 때 등 뒤에서 단검으로 찌를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주앙 2세가 해변이 아닌 육지로 여행하기로 결정하면서 작전은 무산되었고, 기밀이 샐 것을 우려한 공모자 몇 명이 왕에게 밀고했다. 주앙 2세는 디오구를 궁전에 소환한 뒤 그를 단검으로 직접 찔러 죽였다. 그 후 비세우 공작의 어머니 베아트리스에게 2명의 사절을 보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대로 알리게 했고, 디오구의 형제인 마누엘 1세에게도 서신을 보내 "그를 죽이고 싶었기 때문에 찔렀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자신의 아들 아폰수가 죽고 더 이상 합법적인 자녀가 없다면 마누엘이 국왕 직위를 상속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1491년, 주앙 2세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아폰수가 타구스 강을 따라 산책하던 중 낙마한 여파로 사망했다. 이후 주앙 2세는 사생아인 호르헤를 합법화하고 후계자로 삼으려 노력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에 1493년 마누엘에게 왕궁으로 출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마누엘은 자신을 죽이려는 게 아닐까 염려했지만, 주앙 2세는 그를 양자로 삼고 왕위 계승자로 확정지었다. 1495년 10월 25일 주앙 2세가 사망하면서, 마누엘이 '마누엘 1세'로서 포르투갈의 새 국왕에 등극했다.
마누엘 1세는 주앙 2세의 왕권 강화 정책을 이어갔다. 리스본에서 코르테스를 3차례 개최해 귀족, 성직자, 상인 계급으로부터 충성서약을 새롭게 받아냈다. 또한 20년간 작성된 모든 헌장을 수집한 뒤 새롭게 정한 양식에 따라 체계화한 <Forais Novos(새로운 헌장)>을 반포하면서, 앞으로는 이 양식에 맞춰 헌장을 작성하게 했다. 그리고 1504년부터 1522년까지 법률을 편집 및 개정한 <마누엘 조례>를 제정 및 반포했다. 이중 1514년판 조례에 등장하는 6개의 판화에서, 그는 오른손에 "DEO IN CELO TIBI AVTEM IN MVNDO("하늘에 계신 하느님은 땅에 계신 당신을 영원히 축복한다")라는 라틴어 문구가 적힌 리본이 달린 왕실 홀을 들고 있다. 이 판화는 자신이 하느님에게 선택된 왕이라는 것을 과시함으로써 왕권 행사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삽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공공 재무부를 개편하고 행정 구조를 체계적으로 조직했으며, 정국의 도시, 마을 및 주요 시설 관리를 담당한 위원회를 설치했고, 회계 및 식민지 관리에 필요한 행정 및 법률 집행에 관한 서류들 역시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마누엘 1세는 주앙 1세 이래 역대 포르투갈 왕들이 추진한 해상 진출에도 힘썼다. 1498년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로 가는 항로를 발견했고, 1500년 페드로 알바레스 카브랄이 브라질 해안가에 처음 상륙했다. 1505년 프란시스코 데 알메이다가 인도 방면 초대 포르투갈 총독에 선임되었고, 아폰수 데 알부케르케 제독이 인도양 무역로의 통제권을 확보하는 임무를 수행해 페르시아만과 믈라카, 고아, 호르무즈 등 무역에 필요한 여러 요충지를 공략했다. 또한 모로코의 사피, 이자모르, 아가디르 등 항구 도시들을 추가로 공략했으며, 아울러 그의 치세에 중국, 페르시아와 성업 조약 및 외교 관계를 맺었다.
이리하여 포르투갈은 인도양 무역을 독점했으며, 자연히 막대한 재원이 포르투갈에 쏟아져 들어왔다. 마누엘 1세는 이 막대한 재원을 산타 마리아 데 벨렘 수도원, 벨렘 탑 등 여러 건물을 짓는 데 사용했다. 그의 치세에 지어진 화려하고 웅장한 건축물들의 건축 양식은 훗날 마누엘 양식(Manueline)으로 일컬어진다. 또한 유럽 각지의 인재들을 대거 불러모아 과학, 예술, 철학 등을 마음껏 탐구하도록 물신양면으로 지원했다. 그 덕분에 다방면의 학문이 발전할 수 있었는데, 특히 항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항해술, 천문학, 수학 분야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한편,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마누엘 1세는 새롭게 확보한 식민지에 가톨릭 선교사를 파견하고 교회와 수도원을 지음으로써 가톨릭을 전파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역대 포르투갈 국왕들의 전례에 따라 유대인들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박해를 피해 포르투갈로 달아난 유대인들을 보살펴주고 세금 수취 및 관리를 맡기기도 했다. 그러던 1496년, 마누엘 1세는 카스티야-아라곤 연합 왕국의 공동 국왕 이사벨 1세, 페르난도 2세의 장녀인 이사벨과 결혼했다. 이때 그는 이교도 추방 정책에 동참하라는 공동 왕들의 압력에 직면했고, 두 국왕이 아들을 낳지 못하는 상황을 이용해 자기가 아라곤과 카스티야 국왕까지 겸임함으로써 이베리아 전역의 지배자가 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던 그는 두 사람에게 후계자로 인정받기 위해 그 뜻에 따르기로 했다.
이리하여 카스티야-아라곤 연합 왕국 전역에서 가톨릭 개종을 거부한 무슬림과 유대인들이 강제 추방되는 상황이 포르투갈에서도 1497년에 벌어졌다. 다만, 그는 인구 유출을 최소화하기 위해 항구를 일정 기간 동안 폐쇄해 놓고 기독교로의 개종 기간을 카스티야-아라곤 연합 왕국이 설정한 것보다 훨씬 길게 잡았고, 이번에 개종한 자들이 20년간 종교재판소의 조사를 면제받도록 했다. 이러한 조치 덕분에 포르투갈에서 추방된 인원은 카스티야-아라곤 연합 왕국에 비해 매우 적었다. 그러나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이 거짓으로 개종했을 거라고 여기고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1506년 4월, 기독교인들은 당시 극심했던 가뭄과 역병을 종식해달라고 기원하기 위해 상 도밍고스 수녀원을 찾아갔다. 그들은 미사에 참여했다가 제단 위에 설치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얼굴에 빛이 비추는 것을 목격했다. 수도자가 "하느님께서 계시를 내렸다"고 주장하자, 한 유대인이 "저건 단순히 빛이 반사된 것뿐이다"라고 반박했다. 그러자 군중이 "하느님의 계시를 부정한다"며 그를 잡아다 때려죽였다. 이 이야기는 삽시간에 리스본 전역에 퍼졌고, 곧 "가뭄과 역병의 원인은 거짓으로 개종하고 하느님의 뜻을 왜곡하는 유대인들에게 있다"는 소문이 확산되었다. 이에 리스본 시민들은 1506년 4월 19일부터 4월 21일까지 사흘 동안 4,000명 이상의 유대인을 학살했다. 당시 알코셰트에 있던 마누엘 1세는 이 소식을 듣자 즉각 군대를 파견해 폭동을 진압하고 폭동을 선동한 수도자들을 모조리 잡아다 처형했으며, 도미니코 수도회에 책임을 물어 8년 동안 문을 닫게 했다. 하지만 이 조치에도 불구하고 반유대주의는 포르투갈 각지에서 기승을 부렸고, 크고 작은 폭동이 산발적으로 일어나면서 많은 유대인들이 희생되었다.
1498년 이사벨 왕비가 미겔 왕자를 낳다가 사망하고 미겔 다 파스 왕자마저 1500년에 2살의 나이로 사망하자, 마누엘 1세는 이사벨의 여동생인 마리아를 새 왕비로 들임으로써 카스티야-아라곤 연합 왕국의 차기 국왕을 겸임하려는 계획을 이어갔다. 마리아는 1517년 사망하기 전에 8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그 중 차남 주앙 3세와 6남 엔히크 1세가 훗날 포르투갈의 국왕이 되었다. 마리아가 사망한 후에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군주이자 카스티야 국왕 펠리페 1세와 카스티야-아라곤 연합 왕국의 여왕 후아나의 장녀인 엘레오노르와 결혼하여 아들 카를로스와 마리아를 낳았다. 그러나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 사후 합스부르크 가문의 일원이자 후아나의 장남인 카를 5세가 스페인 왕국의 '카를로스 1세'로 등극한 뒤 합스부르크 가문이 스페인 국왕 직위를 독점하면서, 마누엘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1521년 12월 리스본에서 흑사병이 창궐하자 리베이라 궁전으로 피신한 마누엘 1세는 그 해 12월 4일 심한 열병을 앓기 시작했고, 9일간 고통에 시달린 끝에 12월 13일에 52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다음날 그의 시신은 검은 벨벳으로 덮인 관에 담겨 리스본의 벨렘 지구로 이송되었고 많은 애도자들이 뒤따랐다. 그는 레스텔로 교회에 잠정적으로 묻혔다가 1551년 2번째 왕비인 마리아와 함께 제로니모스 수도원에 이장되었다. 사후 생존한 자식들 중 연장자인 주앙 3세가 포르투갈 왕국의 새 국왕에 등극했다.
3. 가족관계
3.1.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자녀 |
아스투리아스 여공 이사벨[10] (Isabella, Princess of Asturias) | ||||
1남 | 포르투갈 공 미겔 다 파스 (Miguel da Paz, Príncipe de Portugal) | 1498년 8월 23일 | 1500년 7월 19일 | |
아라곤의 마리아[11] (Maria of Aragon) | ||||
2남 | 주앙 3세 (João III) | 1502년 6월 7일 | 1557년 6월 11일 | 오스트리아의 카탈리나[12] 슬하 6남 3녀[13] |
1녀 |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 이자벨라 (Isabella, Holy Roman Empress) | 1503년 10월 24일 | 1539년 5월 1일 |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 슬하 1남 2녀[14] |
2녀 | 사보이아 공작부인 베아트리체 (Beatrice, Duchess of Savoy) | 1504년 12월 31일 | 1538년 1월 8일 | 사보이아 공작 카를로 2세 슬하 1남[15] |
3남 | 베자 공작 루이스 (Louis, Duke of Beja) | 1506년 3월 3일 | 1555년 11월 27일 | 비올란테 고메스 슬하 1남 |
4남 | 구아르다 공작 페르난두 (Ferdinand, Duke of Guarda) | 1507년 6월 5일 | 1534년 11월 7일 | 구이오마르 쿠티뉴 슬하 1녀 |
5남 | 추기경 아폰수 (Afonso, Cardinal of the Holy Roman Church) | 1509년 4월 23일 | 1540년 4월 21일 | |
6남 | 엔히크 1세 (Henrique I) | 1512년 1월 31일 | 1580년 1월 31일 | |
7남 | 기마랑이스 공작 두아르테 (Duarte, Duke of Guimarães) | 1515년 10월 7일 | 1540년 9월 20일 | 브라간사의 이자벨 슬하 1남 2녀[16] |
오스트리아의 레오노르[17] (Eleanor of Austria) | ||||
8남 | 카를루스 왕자 (Infante Carlos) | 1520년 2월 18일 | 1521년 4월 14일 | |
3녀 | 비제우 여공작 마리아 (Maria, Duchess of Viseu) | 1521년 6월 18일 | 1577년 10월 10일 |
[1] 두아르트 1세 왕의 3남.[2] 1448 ~ 1472, 제3대 비세우 공작[3] 1450 ~ 1484, 제4대 비세우 공작[4] 1458 ~ 1525, 포르투갈 국왕 주앙 2세의 왕비.[5] 1459 ~ 1521, 브라간사 공작 페르난두 2세의 부인[6] 1462 ~ 1476, 요절[7] 1465년 또는 1470년 출생하자 마자 사망[8] 1465 ~ 1470, 요절[9] 1468 ~ 1470, 요절[10] 카스티야-아라곤 연합 왕국의 공동 군주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1세의 장녀.[11] 카스티야-아라곤 연합 왕국의 공동 군주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1세의 3녀.[12] 펠리페 1세와 후아나 1세의 4녀이다.[13] 아스투리아스 공비 마리아 마누엘라, 주앙 마누엘 등.[14] 펠리페 2세, 신성 로마 제국 황후 마리아 등[15]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16] 딸 브라간사 공작부인 카타리나가 주앙 4세의 할머니이다.[17]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군주이자 카스티야 국왕 펠리페 1세와 후아나 1세의 딸. 마누엘 1세가 사망한 후 수 년간 미망인으로 지내다 1530년에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와 재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