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9-21 21:10:45

페르디난드 마젤란

<colbgcolor=#392929><colcolor=#fff> 페르디난드 마젤란
Ferdinand Magellan
파일:attachment/Ferdinand_Magellan.jpg
본명 포르투갈어
페르낭 드 마갈량이스
Fernão de Magalhães
스페인어
페르난도 데 마가야네스
Fernando de Magallanes
출생 1480년 2월 4일
포르투갈 왕국 트라수우스몬트스이알투도루 사브로자
사망 1521년 4월 27일 (향년 41세)
필리핀 막탄 섬
국적 파일:포르투갈 왕국 국기.png 포르투갈 왕국파일:스페인 제국 국기.svg 스페인 왕국
직업 항해사, 탐험가
종교 로마 가톨릭

1. 개요2. 생애
2.1. 젊은 시절2.2. 세계일주 항해2.3. 죽음
3. 기타4.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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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해양 지도에 가장 정통한 마젤란은 진정한 항해 기술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 더 잘 알았다. 마젤란은 참고할 만한 사례를 제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천재성과 용맹성에 의존해 지구 일주를 시도하는 방법을 알아냈으며, 지구 일주에 거의 성공했다.
-안토니오 피가페타
포르투갈 왕국 출신의 항해사로, 스페인에 귀화하여 국왕 카를로스 1세(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후원으로 세계 최초지구 일주 항해에 도전한 모험가이다.

마젤란 본인은 중도에 필리핀 막탄 섬에서 사망하여 세계 일주 항해에 실패하였으나, 마젤란이 인솔하였던 함대가 세계 일주에 성공하였고 또한 마젤란이 그로부터 10여년 전에 동쪽으로 항해하여 필리핀에 도달했었다는 점 등을 감안하여 두 번에 나누어 하기는 했지만 처음으로 지구를 한 바퀴 돈 인물이므로 최초 세계 일주자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 다만 한번의 항해로 지구를 한 바퀴 돈 사람은 스페인의 후안 세바스티안 데 엘카노로 스페인에서는 엘카노를 더 쳐주기도 한다.
인류 최초의 세계일주 항해가, 마젤란
선배인 바르톨로뮤 디아스, 바스쿠 다 가마,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조반니 카보토(존 캐벗) 등과 더불어 대항해시대를 대표하는 모험가이자 항해자로, 사실상 대항해시대의 정점을 장식한 인물이다. 마젤란 이후 바다에는 모험가보다는 군인/해적, 선교사, 상인, 학자들이 득세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2. 생애

2.1. 젊은 시절

마젤란은 1480년 포르투갈 사브로자(Sabrosa)에서 태어나 아홉 살 때 부모님을 여의었다. 마젤란의 집안은 대대로 왕실과 연결되어 있어 마젤란은 12살 때 왕궁시종으로 발탁되었다. 1505년 당시 인도 총독이던 프란시스쿠 드 알메이다의 함대의 일원으로서 아프리카, 인도로 갔고 1509년 디우 해전에도 참전했다. 이후 디오고 로페스 데 세케이라가 이끄는 포르투갈 무장상선대의 일원으로 향료제도 탐험에 종사하고, 아폰소 데 알부케르케의 부하로써 1511년에는 동남아시아의 요충지인 말라카 정복에 참가하기도 한 베테랑 항해자 겸 모험가 겸 군인이었다. 이 때 몰루카 제도의 암보이나에서 현지인 여자와 통혼하고, 트르나테술탄고문관으로 근무하는 등 현지화의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아마도 이 때 신대륙에서 서쪽으로 대양을 가로질러 아시아로 항해할 수 있다는 생각을 처음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마젤란은 뛰어난 능력에도 모나고 차가운 성격으로 인해 적이 많아서 상관과 동료들과는 관계가 좋지못했고 늘 불화상태에 있었다. 그래서 항상 그들에게 심심찮게 모함당하는 신세였다. 거기에 1513년 모로코에서의 아자모르 전투 중, 무어 족의 진지를 공격하다가 무릎에 부상을 입어 상이군인[1]으로 퇴역, 결국 포르투갈로 반강제적으로 귀환하여, 한동안 실업자 상태로 지내는 안습한 처지에 놓이기도 하였다.

1514년 11월 포르투갈에 귀환한 후로는 아시아에서 자신이 구상한대로 대서양태평양(물론 이 때에는 아직 태평양이란 이름을 얻기 전이었다. 태평양 명칭은 바로 그 마젤란의 대항해 때 명명)을 가로질러 아시아의 향료 제도로 가는 모험 항해를 후원받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결국은 실패. 그 모난 성격 탓에 국왕인 돈 마누엘 1세를 들이받는 기행[2]을 벌인 끝에 1517년, 스페인으로 도주 이주하여 스페인 국적을 얻고 스페인 여자와 결혼하여 정착하게 되었다.[3]

사실 당시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남단을 지나 인도양을 가로질러 인도와 동남아시아에 이르는 정기항로가 비교적 순조롭게 정착 중이었던데다가, 마젤란의 계획에 따르려면 토르데시야스 조약에스파냐 제국 세력권인 남아메리카를 통과해야하는 떨떠름한 상황 탓에, 마젤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어쨌거나 스페인에서 마젤란은 같은 포르투갈 출신 지리학자 루이 팔레이루[4]의 협력 덕분에 당시 스페인이 보유하고 있던 남아메리카의 해도를 열람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고, 해도를 샅샅히 뒤지면서 남아메리카의 남단을 회항하여 태평양으로 진출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5]

어렵사리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훗날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를 알현한 마젤란은 현란한 프레젠테이션으로 카를로스 1세의 흥미를 끌 수 있었고, 결국 5척의 선박[6]을 포함한 항해자금 전액 지원, 발견한 영토에 대한 총독 직위(마젤란이 '발견'한 영토의 크기를 생각해보자!) 약속, 항해 수익의 20% 분배 등 엄청난 조건으로 항해에 대한 승인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이렇게 좋은 조건으로 모험항해를 낙찰받을 수 있었던 배경으로, 당시의 국제 관계를 들 수 있다. 당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세계의 바다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이미 동방 항로를 통해 향료제도에 도착, 전 인도양에 걸친 무역망을 건설중이던 포르투갈에 비해, 스페인이 신대륙에서 거두고 있는 수익은 별 볼일 없는 수준이었다. 아직은 포토시 은광도, 플랜테이션 농장 건설도 본격화되기 전이었으니 당연한 이야기. 하지만 이미 땅따먹기는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정리된 상황….

그러다보니 스페인은 새로운 수익원을 찾아야 할 필요성이 절박했고,[7] 이러한 상황에서 마젤란의 제안은 스페인에게는 포르투갈과의 관계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포르투갈이 독점하고 있는 아시아 무역에 한 몫 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 물론 마젤란의 제안이 당시 스페인이 보유하고 있던 지리 정보에 비추어보아도 어느 정도 합리적이었던 것도 이유의 하나였다.

뒤늦게 정신차린 포르투갈 정부는 함대와 스페인 주재 영사까지 동원한 방해 공작을 펼쳐서 마젤란에게 포르투갈로의 귀환과 원정포기를 강요했다. 하지만 마젤란은 단호히 거절하고 1519년 9월, 스페인 함대를 지휘하여 세계 일주 항해를 시작하였다.[8]

2.2. 세계일주 항해

마젤란 함대의 세계일주 항해는 험난했는데 수많은 역경을 돌파하며 이뤄낸 드라마틱한 사건으로 이름높다.

1519년, 5척의 배와 270명의 선원으로 스페인을 출발한 마젤란의 함대는 라플라타 강(지금의 우루과이)까지는 수월하게 도착했지만 루이 팔레이로의 계산에 따르면 라플라타 강이 바로 마젤란 해협이었어야 했다.[9]

여기서부터 최초로 일이 꼬이기 시작하는데 두 달 가까이 폭풍에 시달려 항해가 어려웠고 마젤란 특유의 모난 성격 때문에 다른 함장들의 자율권을 박탈하다시피하며 위압적으로 대하는데다 모든 정보를 틀어쥐고는 다른 사람들에게 전혀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함대의 다른 함장들과 갈등과 충돌이 일어났다.[10] 특히 왕의 측근으로 마젤란을 감시하기 위해 원정에 동행한 후안 데 카르타헤나는 마젤란의 독선적인 처사에 화가 나 노골적으로 마젤란의 명령에 불복했다. 그러자 분노한 마젤란은 카르타헤나를 체포했다가 다른 선장들의 만류로 풀어주었는데, 이는 머지않아 더 큰 반란의 불씨가 되었다. 결국 1520년 겨울이 되도록 마젤란 해협을 발견하지 못하자 선원들은 불만을 품고 최초의 반란[11]이 발생했다.[12] 마젤란은 휘하 선원들을 지휘하여 이 반란을 신속하게 진압하고 주동자들을 처형[13]하게 된다.

남아메리카 연안에서 겨울을 지낸 뒤 이듬해 봄 마젤란은 결국 마젤란 해협[14]을 발견한다. 그야말로 위대한 발견이었지만, 마젤란 해협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산티아고 호가 난파되고, 메스키타가 지휘한 산 안토니오 호[15]는 결국 함수를 돌려 함대에서 탈주하고 만다.[16] 두 척의 배를 잃은 상태에서 나머지 세 척은 마젤란 해협을 돌파[17], 태평양에 진입한다.

마젤란 해협의 혹독한 기후와 정 반대되는 고요한 태평양의 광경을 본 마젤란은 평화로운 바다라는 뜻의 'Mare Pacificum'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이후의 항해는 그야말로 '굶주림'[18]과 '괴혈병'과의 사투. 세계지도의 태평양 부분을 보면 그래도 수백개의 섬들이 존재하고, 마오리족같은 비교적 발달한 원주민들이 거주하는 섬도 상당했지만 참으로 운이 없게도 이들이 지나간 항로에 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얼마나 상황이 참담했는지 피가페타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우리는 가루가 다 된 오래된 비스킷밖에 먹을 게 없었다. 벌레가 득실거리고 쥐가 음식을 먹고 그 위에 싸놓은 오줌 냄새가 지독했다. 한 조각에 은화 반냥이 거래되는 쥐도 없어서 못 먹을 지경이었다.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이런 여행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남아있는 물과 식량이 아예 없었던건 아니지만 태평양 횡단 막바지에 이르자, 매우 부실한 상황이였고 그 마저도 서서히 동이나고 있었다. 물은 그나마 빗물을 받아 어느정도 해결할 수 있었지만 탄수화물에만 치우쳐진 식량은 그렇지 않았다.

무인도라도 나와야 물과 식량을 보급받을텐데 그런 것조차 없으니, 심리적으로 매우 압박된 상황이였다. 태평양 횡단 막바지엔 마스트를 묶은 쇠가죽도 뜯어먹으며 단백질을 보충하는 등 그야말로 막장이었다고 한다.그나마 폭풍이라도 불지 않았기에 몰살당하지 않은게 망정이다.

굉장히 운좋게 가까스로 섬에 상륙해 물과 식량을 보급 받았고, 이들의 배를 처음 본 차모로 원주민들이 보트를 훔쳐가버리는 바람에 원주민들과 옥신각신했다. 참고로 '괌'이란 이름도 원주민인 차모로족 추장이 "우리 부족 중 도둑놈이란 없다!" 라고 발뺌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차모로어로 없다라는 뜻의 단어가 'Guaham' 이기 때문. 이 때문에 괌 섬은 한동안 스페인어로 "도둑 섬"이라고 불렸다(...).

괌 섬을 거쳐 필리핀 민다나오 섬 동부에 위치한 불교계통의 부투안 왕국(Butuan)에 닿게 되었다.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물과 식량을 얻을 수 있었고, 부투안은 가진 영토에 비해서 매우 부유한 편이였고 또한 이곳의 왕은 새로온 스페인 이방인들에게 친절한 편이였다. 일반 백성들의 집과 생필품도 각종 금과 비취 등 귀금속 공예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부투안은 무역로를 크메르, 중동, 인도, 중국일본, 참파까지 가장 광범위한 국제 무역로를 형성해 필리핀 제도 내에서 뿐만 아니라 각종 귀금속을 가장 많이 보유한 부유한 왕국이였다. 마젤란은 쉽게 이들과 친선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이곳은 몇 십년 후에 스페인군이 필리핀 곳곳의 토착왕국들을 회유, 정복을 하며 필리핀 도독령으로 흡수할때 초창기부터 로마 가톨릭으로 쉽게 개종하며 스페인을 지지한다. 이후 몇 백년간 이어지는 갈레온 무역에도 많은 도움을 준다.

2.3. 죽음

1521년 마젤란은 필리핀세부 섬에 상륙해 현지인과 교류해 식량과 물을 공급받고 가톨릭을 전파하려 노력했다. [19]세부 국왕인 라자 후마본은 부투안 국왕의 사촌이자 동맹관계에 있었다. 세부섬은 항구가 2개 있었고, 중부 비사야 지역의 중심지이자, 필리핀 제도 중앙에 위치해 있어 북부 루손섬과 남부 민다나오 사이의 중계 무역로여서 나름 부유한 왕국이기도 했다. [20]

16세기 비사야 지역은 철제갑옷을 다량 보유하였던 루손, 민다나오 국가들과 다르게 철이 부족하여 다양한 재료를 가공한 갑옷을 만들어 입었다. 16세기 스페인 기록에는 이러한 다양한 갑옷들이 상상외로 단단하고 방어력이 높았다고 되어 있는데, 현재는 모두 썩어 남아있지 않다. [21] 16세기에 마젤란과 싸울때 맨몸으로 싸웠다는 상상화들은 모두 허구이다.

막탄 전투를 설명하기에 앞서, 세부에서 있었던 사건은 당시 살아남은 각 생존자들의 증언이 일관되지 못하다. 왕실의 지원을 받은 원정을 실패한 만큼, 각 생존자들은 무언가 숨기는게 있었고 뒤늦게 발설한 내용(막탄 전투에서 마젤란 사망)도 많았으며, 이러한 내용들도 당시 스페인과 사이가 안좋던 프랑스에서 변조가 이루어진게 많았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다양한 추측이 일어난다. 한가지 진실은 마젤란 원정 이후에도 스페인은 4번의 필리핀 정복원정에 모두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는 아메리카 정복과 달리 꽤나 애먹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마젤란은 포르투갈의 방식을 따라[22], 지역 통치자와 친밀관계를 형성하고 그의 정적을 제거함으로써 지역의 호응을 얻고자 하였다. 그래서 우선 세부 섬에서 통합국을 다스리던 국왕 라자 후마본과 의형제 관계를 형성하고, 막탄 섬 지배를 두고 경쟁하던 막탄 섬 부족연합 촌장인 라푸라푸(Lapu-Lapu)를 죽이겠다고 약속했다. 사실 라푸라푸 촌장은 힌두교, 불교계인 라자 후마본과 달리 무슬림이였다. 즉, 자신이 속한 왕국의 국왕과 다른 종교를 믿고 있었다. 필리핀은 왕권이 낮은 상업 봉건제였고 대규모 침략을 당하거나 각자의 이익이 하나로 일치된 전투가 아닌 이상, 군사동원력 또한 일반적인 전투에서는 영 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16세기부터 필리핀 제도는 인도계통의 세력들과 이슬람계 세력들이 무역으로 협력, 공존하면서도 세력다툼이 일어나는 양상이 지속되고 있었다. 마젤란은 라푸라푸를 조그만한 막탄 섬의 소영주이니 쉽게 이길 것이라고 오판하였고, 첫번째 전투에서 제대로 된 정보도 없이 스페인인 60여명과 세부인 200~300명이라는 소수 병력만 이끌고 갔다.

그렇다고 마젤란이 닥치고 쳐들어간 것은 아니고 먼저 세부인을 사신으로 보내 항복과 같이 라자 후마본의 막탄 섬 지배를 인정하고 스페인 국왕에 대한 충성을 요구했다. 물론 무슬림이였던 라푸라푸는 비웃음과 함께[23] 요구에 대해 세부인 사신을 두들겨 패서 보내는것으로 답변했다. 그리고 부족들에게 전투 준비를 지시했다. 이렇게 비상령을 걸고 준비했거늘, 소수 병력을 이끌고 막탄 섬으로 쳐들어오니 해안에서 마젤란의 예상과 달리 준비되어 있는 1,500여명의 전사들과 맞닥뜨리고 만다.

결국 병력 수에서 불리한 이들은 압도적인 수의 라푸라푸 군대에게 참패했고 마젤란은 끔살당했다. 라푸라푸 측의 사상자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나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24] 원주민군의 창과 검에 끔살된데다 원주민들 측에서 시신을 돌려주지 않아 시체마저 수습하지 못했다(...). 몇 번의 전투가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그것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피가페타의 기록에 따르면 원주민 촌장 라푸라푸에게 원하는 만큼 재물도 주고 수습할테니 시신을 인계해 달라 했지만 거절당했다고 하며 라푸라푸가 오히려 그의 시신을 전승기념물로 사용하였다.

피가페타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적들은 모두 마젤란에게 달려들었다. 적들 중 한 사람이 크기만 조금 큰 언월도와 비슷하게 생긴, 칼몸이 흰 넓적한 장검으로 마젤란의 왼쪽 다리를 베었다. 그 공격에 마젤란은 앞으로 고꾸라졌고, 적들은 철창과 죽창, 칼몸이 흰 넓적한 칼로[25] 마젤란에게 달려들어서 우리의 거울이자, 빛, 위안을 주는 사람이자 진정한 안내자를 죽였다."

마젤란 자신은 비명에 죽었으나 마젤란이 이끌던 선박들은 항해를 계속해 결국 세계 일주에 성공했다. 필리핀은 유라시아 지역권에 속했고, 이미 나머지 귀항로는 이전에 포르투갈이 개척했던 항로였기 때문에 본국까지 비교적 수월하게 도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본국에 돌아온 사람은 총 18명, 남은 배는 1척이였다.

마젤란의 충직한 노예이던 엔리케[26][27]는 마젤란이 죽은 이유가 선원들이 멍청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마젤란의 목숨값을 받아내기 위해(!!) 세부의 술탄을 충동질하였고, 술탄의 식사 초대에 아무 생각 없이 응한 많은 베테랑 선원들이 독살당하여 불귀의 객이 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남은 선원들도 공격받아 겨우 탈출했다. 탈출한 다음 모아보니 배 세척을 운용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고, 결국 콘셉시온에 불을 질러 자침시키기에 이른다. 이렇듯 엔리케와 엘카노의 주장이 각각 다르고, 각 생존자들의 증언도 모두 다르기 때문에 진실을 알기 어렵다.

남은 두 척의 배 트리니다드와 빅토리아는 항해를 계속하여 목적지인 몰루카 제도[28]의 티도르 섬에 상륙했다. 티도르 왕의 비호 속에서 대량의 향신료를 싣고 이제 귀향길에 오르려는 순간, 이번에는 마젤란 함대의 기함이었던 트리니다드의 함체가 오랜 항해로 파손되어 항해가 불가능해졌다[29] 결국 트리니다드 호는 티도르 섬에 남았고, 마젤란 함대에서 가장 작은 배였던 빅토리아만이 스페인으로의 귀환길에 오른다. 그런데 이 귀향길도 고난의 항로였다. 애초에 마젤란이 동쪽이 아닌 서쪽을 택한 이유가, 귀항로가 포르투갈 제국 영역이기 때문이다. 항로 인근 지역 주민들에게 뇌물로 적재한 향료를 뿌려대 식량을 교환했다. 다행히 인근 원주민들은 적대적이지 않아서 교역은 성공적이었고 항해하기에 충분한 식량과 물을 얻을 수 있어 식량문제를 해결했다.

함대가 스페인을 출발한 지 3년만인 1522년, 마젤란 함대 중 빅토리아 호 단 1척[30]과 18명의 선원만이[31] 최초의 세계일주라는 대기록을 세우며 스페인으로 돌아온다. 배 3척[32]이 침몰하고 250여명의 선원을 잃었지만, 빅토리아 호 한 척에 실린 향료만으로 모든 항해 비용을 상쇄하고도 이윤이 남았다.[33] 항해한 거리는 약 54,000 km 로 , 지구를 1.3바퀴 정도 도는 거리이다.

마젤란의 업적이 이후 생존한 후안 세바스티안 데 엘카노와 칼바리요에 의해서 증거가 인멸되었다가 안토니오 피가페타(Antonio Pigafetta, 1491~1534)가 자신의 고향인 베니스로 돌아간 후 이 기록을 '최초의 세계일주에 대한 기록(Relazione del primo viaggio intorno al mondo)'이라는 책[34]으로 엮었기 때문에 극적으로 마젤란의 행적이 알려질 수 있었다...라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한국어 위키백과에도 적혀 있는 이 이야기[35]는 신빙성이 지극히 의심스럽다.[36] 그리고 당시는 항해기술이나 지식이 완숙해진 단계의 시대도 아니였고, 첫 세계일주로 인한 고된 항해와 예상치 못한 상황들로 인한 시간 지체, 그로 말미아은 식량과 식수문제 등으로 상술했듯 증거들이 인멸되고 이야기가 각색되는 말들이 있는 등 당시 원정대 안에서 무슨일이 벌어 졌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살아남은 생존자들도 그 지옥같은 상황속에서 무슨 짓을 해서 돌아온 것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우선 칼바리요라고 알려진 인물은 마젤란 사후 세계일주 함대의 함장이었다가 트리니다드 호가 고장나자 티도르 섬에 남은 인물이다. 칼바리요가 콘셉시온 호를 불태운 것이 증거인멸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나 신빙성이 낮다.[37]

두번째로 엘카노는 마젤란의 공적을 축소한 적이 없다. 스페인 왕실 서기였던 막시밀리안 트랜실바노가 엘카노 외 3명을 조사한 기록에 의하면 엘카노는 피가페타보다 반란에 대해서 더 자세히 서술했으며[38] 항해에 대해서도 뚜렷하게 행적을 밝혔다. 애초에 다른 기록을 모조리 없앴다고 하는데 생존자들이 남긴 기록중에서는 빅토리아호의 항해사였던 프란시스코 알보의 항해일지까지 남아있었다. 이 기록들은 피가페타의 기록보다 먼저 작성되었지만, 피가페타의 기록만큼 널리 알려지지 못했을 뿐이다. 오히려 엘카노는 마젤란이 모함을 받았다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노력했다. 다만 엘카노는 이 과정에서 마젤란이 왜 죽었는지, 그리고 선원들이 어떤 방탕한 생활을 했는지에 대해서 숨기려고 해서 그 신빙성을 스스로 깎아먹는 결과를 낳기는 했다.

마지막으로 엘카노가 최초로 세계 일주를 한 인물이라고 불린 것은 근거가 없는게 아니다. 오히려 최초의 세계일주 후보인 엔리케, 엘카노, 마젤란 중에서 마젤란의 입지가 가장 떨어진다. 셋을 비교하면 이렇게 된다.
  • 말라카의 엔리케 : 원래 필리핀 출생으로 인도 뱡향을 통해 유럽으로 떠났고, 태평양쪽으로 돌아왔다. 문제는 엔리케의 고향은 말라카인데, 필리핀은 말라카보다 동쪽이다. 세부에서 활동한 이후 엔리케의 행적은 알 수 없다.
  • 마젤란 : 포르투갈에서 활동하던 시절 몰루카 제도의 암본섬에 온 적이 있고 다시 포르투갈로 돌아갔다가 총함장이 되어서 태평양 쪽에서 필리핀으로 돌아왔다. 경도상 암본 섬은 마젤란이 죽은 막탄섬보다 동쪽이다.
  • 엘카노 : 마젤란 사후에도 살아서 남은 선박을 지휘해서 기타 17인과 함께 스페인으로 귀환했다.

마젤란의 경우 엔리케보다는 다소 유리하다. 마젤란이 유럽에서 가장 동쪽으로 이동한 곳과 스페인에서 출발하여 죽을때까지 이동한 지역이 경도상으로는 지구 한바퀴가 되기는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말라카에서 포르투갈까지 동쪽으로 절반, 스페인에서 필리핀까지 절반해서 한 바퀴이다. 그리고 스페인에서 필리핀까지의 항해를 마젤란이 지휘했다는 것도 강점이다. 문제는 마젤란의 세계일주는 경도상으로는 그렇다라는 것이다. 마젤란은 출발점에 도착하지 못했다. 마젤란은 이전에 필리핀까지 간 적이 없기 때문에 마젤란의 항로도는 일생을 기준으로 잡아도 닫힌 선이 되지 못한다. 간단히 말해서 S자의 동쪽끝 필리핀과 서쪽끝 몰루카 제도 사이의 중간 선이 없다는 것이다.[39]
반면 엘카노의 경우는 엔리케와 마젤란에 비해서 독특한 장점이 있는데, 한번의 항해를 통해서 출발한 곳으로 돌아온 최초의 세계일주를 한 18인의 대표라는 것이다.[40] 마젤란과 엔리케의 경우는 한번의 항해라고 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항해를 후원한 스페인 입장에서는 도중에 사망한 마젤란보다는 생존한 엘카노를 최초의 세계일주를 한 인물로 인정하는게 당연했다고 할 수 있고[41], 마젤란의 입지가 엄청난 지금도 엘카노는 스페인에서 존경받는 위치에 있다.[42]

3. 기타

마젤란이 죽은 필리핀의 막탄 섬에는 마젤란의 죽음을 추모하는 커다란 비문과 마젤란을 죽인 라푸라푸[43]의 동상이 같이 세워져 있는데, 마젤란의 비문에는 세계 최초로 세계일주를 성공시킨 마젤란을 추모하는 내용이 있고, 라푸라푸의 동상에는 필리핀 최초로 침략자를 물리친 것에 대한 찬사가 적혀있다(…). 필리핀에서는 극우적 인사들이 라푸라푸 동상에 가서 헌화를 하고 필리핀 애국주의를 외치는 반면, 마젤란 비문은 해외 관광객이나 가끔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정치인 같은 해외인사들이 들른다고 한다. 물론, 라푸라푸는 필리핀 교과서에서도 나오는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막탄 섬 이외에 수도 마닐라의 리잘 공원에도 '자유의 파수꾼'이란 이름으로 라푸라푸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이 동상은 한국 반공단체인 자유총연맹에서 창립 50주년 기념으로 헌정한 것이다. 참조. 아무래도 필리핀이 6.25 전쟁 당시 UN군 소속으로 대한민국을 도와준 우방국이고 냉전 때 같은 아시아권의 반공 국가로 교류가 많아서 그런 듯.

하지만 정작 라푸 라푸에 대해서 기록이 전혀 없다. 그를 영웅으로서 교과서에 쓰는 필리핀에서조차 자세한 삶에 대한 걸 찾고자 노력하지만 스페인이 쳐들어와 막탄의 부족들을 학살하면서 그들 기록도 불태우는 통에 이제 더 연구하는 게 불가능해졌다. 한국어판 사이트에서 그가 1491~1542년까지 살았다고 하지만, 영어 위키피디어에서는 전혀 생몰 기록이나 삶에 대한 게 없고 라푸 라푸라는 이름조차도 본명이 맞나? 실존하나? 진위여부까지 있다고 할 정도이다.기껏해야, 침략자이던 마젤란 일행의 기록과 세부 왕국 마지막 왕인 라자 투파스가 쓴 기록이 있을 뿐이지만, 둘 다 이름과 왕이 있다라는 간략한 소개만 나와있을 뿐이다.

생존자들을 통해 전해진 마젤란과 스페인 선원들의 죽음은 스페인 정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래서 스페인 정부는 보복을 결심하고 대규모 원정대를 필리핀으로 보냈다. 필리핀에 도착한 스페인 원정대는 조직적인 공격으로 적대적인 필리핀 원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하고 능욕했다.[44] 특히 저항이 심했던 사이판 섬의 차모로족은 잔혹하게 학살당했고 다른 섬으로 추방당하기까지 했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의하면 스페인은 이 지역을 지배할 수 없었으나 포르투갈과 시라고사 조약을 새로 맺으면서 필리핀과 그 근처의 - 북마리아나 제도 등은 스페인령 동인도라는 스페인의 식민지가 된다. 그리고 다시 미국-스페인 전쟁을 거치면서 미국 식민지로 변한다.

마젤란을 기리는 큰 십자가가 필리핀에 세워져있는데 이것 또한 현재는 보호판으로 둘러싸여 있다. 과거에는 이걸 조금씩 떼어내서 먹으면(?) 몸에 좋고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좋은 미신과 같이, 반대로 침략자 수괴 XX를 뭐하러 기리냐며 허구헌날 십자가에 불을 지르거나 저주하거나 고소해하는 글귀를 적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사실상 대항해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임에도 정작 디아스나 바스쿠 다가마와 다르게 화폐에 등장하지 않았었을...줄 알았는데, 미국 식민지 시절의 필리핀에서 발행된 100페소 지폐의 도안으로 쓰였었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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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매체

유럽의 굴기를 다룬 게임 답게, 유로파 유니버셜리스 4에서 마젤란의 지구일주가 등장한다. 외교 기술 9레벨에 도달한 이후 탐험가를 배치한 소형선 최소 3척 이상을 가진 함대에 지구일주를 명령할 수 있는데, 어떤 국가로 성공시키던[46] 첫 지구일주에 성공한 국가는 마젤란의 일화가 문구로 적힌 "최초의 지구일주"라는 이벤트를 받게 된다. 이는 실 역사에서 무모한 모험을 감행한 마젤란에 대한 기념[47]이며, 고증에 매우 충실해서 마젤란이 기획한 모험이 얼마나 미친 짓이었는지 제대로 느끼게 해준다. 해상 소모를 감당하지 못해 1600년대 이전에는 도저히 성공시킬 수가 없고, 1600년대에 와서도 10척 넘는 편성으로 한두척만 남긴체 겨우 성공할 정도로 어렵다. 한술 더 떠, 실제 마젤란의 모험이 강행된 1500년대 초에 맞춰 열리는 외교 기술 9렙에선 아직 그 당시 시대반영으로 캐러벨선이 없다. 바크랑 카락만 가지고 지구를 돌은 마젤란 선단이 얼마나 용자였는지 제대로 체험 가능하다.


[1] 부상 후유증으로 보행이 불편했다고 하며, 이 부상은 나중에 마젤란 본인이 사망하는데 일조하게 된다.[2] 상이군인으로 퇴역한 후 항해자금을 벌기 위해 마누엘 1세에게 연금을 올려달라고 두번 요청했지만 매번 퇴짜를 맞았다. 급기야 마누엘 1세와 면담하면서 망명하겠다는 협박까지 했지만 어느 나라든 가버리라는 대답만 들었다.(...)[3] 원주민 아내에 대한 궁금증이 생길 수도 있는데 말이 원주민 아내이지 중혼정부나 다름없는 경우가 많았고 이 당시 현지에 진출한 유럽인들이 현지처를 가지는 것은 평범한 일이었다. 현지처들도 상인 계통 인물들이 많아 몰루카 제도에 사는 나름대로 괜찮은 수준의 사람으로 생각해도 좋았다. 현지처 입장에서 말하자면 권위와 무력으로 상권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것. 마젤란이 결혼한 현지처가 상인 계통인지는 모르지만.[4] 대항해시대 2에도 지리학자로 등장하신다.[5] 당시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따라 신대륙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던 스페인은 파나마 지협을 육로로 횡단하여 태평양의 존재를 이미 확인하였고, 남아메리카 남부의 라플라타 강 하구에까지 함대가 진출한 상황이었다.[6] 산안토니오, 콘셉시온, 트리니다드, 빅토리아, 산티아고 등 각각 다른 배수량의 카락 4척과 캐러벨 1척.[7] 당시 모험항해는 생각보다 규모가 큰 투자였고, 항해 중 손실을 메우기 위해서는 높은 수익률이 필요했다.[8] 이는 포르투갈 정부를 화나게 만들었고 포르투갈 정부는 마젤란에게 사형 판결을 내리며, 마젤란을 붙잡기 위해 훗날 대서양이며 향료 제도로 추적대를 급파했다.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마젤란이 죽어서 실패.대신 트리니다드 호에 화풀이했다[9] 루이 팔레이로는 남위 40도 부근에 마젤란 해협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마젤란 해협은 훨씬 남쪽에 있다. 대략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 쯤의 위도가 남아메리카의 남쪽 끝 이라고 계산한 것.[10] 거기다 마젤란은 포르투갈인이었지만 함장들과 선원들이 전부 스페인인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외국인 주제에 너무한다며 반감까지 발생해 이 갈등은 더욱 증폭된다.[11] 정확히는 최초가 아니었고 후안 데 카르타헤나가 이전에도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해 공동 사령관에서 박탈당했다.[12] 5척 중 3척이나 반란을 일으켰다.[13] 반란을 일으킨 4인의 스페인인 선장들 중 빅토리아호의 멘도사는 마젤란의 부하들이 협상하는 척 하면서 숨겨둔 칼로 죽였고, 케사다는 붙잡은다음 사지를 찢어서 끔살, 카르타헤나와 신부(사제)였던 페드로 산체스 데 라 레이나는 해변에 버려졌고 엘카노만이 용서받았다. 가담한 선원 40명도 일손 부족으로 용서해주었다.[14] 마젤란은 발견할 당시에 빅토리아 호를 따서 빅토리아 해협이라 불렀다.[15] 마젤란 선단에서 가장 큰 배였다. 한때 선단에서 풍랑으로 이탈했던 산 안토니오 호의 선장 메스키타는 본 선단을 찾아서 합류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항해장이었던 에스테반 고메스와 선원들은 남은 식량이 3개월분 뿐이며 더이상의 항해는 무리라는 것을 들어서 스페인으로 돌아갈 것을 강력하게 요구해 돌아가고 만다.[16] 산 안토니오 호의 선장과 선원들은 원정이 실패했다고 단언하며 모든 책임을 마젤란에게 덮어씌웠다. 덕분에 스페인에 남아 있던 마젤란의 가족은 당국의 탄압을 받았으며, 이런 오해는 마젤란의 사후까지도 한동안 지속되었다.[17] 산 안토니오 호의 합류를 기다리면서 척후를 파견하다가 해협의 돌파사실을 알게 된다.[18] 이건 냉정하게 평가해서 일정 정도는 마젤란의 자업자득+외부적 상황의 결합에 의한 것이었다. 마젤란은 원래 엄청난 양의 식량과 무기, 교역품을 싣고 항해에 나설 예정이었으나 포르투갈의 방해와 여타한 문제로 항해 준비에만 8개월 이상을 소모했지만 보급을 다 끝내지 못했고 식량은 착오로 인하여 절반도 싣지 못했다. 산 안토니오호의 회항이 선원들의 동조를 얻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특히 원정대에서 식량이 많이 실렸던 산 안토니오 호의 이탈은 원정대가 식량부족에 시달리는 원인을 제공했다.[19] 하지만 이게 무척 어려웠는데 일단 이미 필리핀에는 이슬람교를 선교하러 온 인도인아랍인 무슬림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몇 백년전부터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들이 꽤 많았다. 불교, 힌두교의 영향도 꽤 뿌리가 깊었고, 마젤란을 전사하게 만든 라푸 라푸 부족왕도 무슬림이었고, 이 지역에는 오늘날의 민다나오에서 말레이시아 사바 주의 북부에 이르는 술루 술탄국이라는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는 나라도 있었다. 비단 필리핀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도서 지역에서 이슬람교는 상당히 널리 전파되어서 앞서 마젤란이 고문관으로 재직했던 테르나테도 이슬람교를 국교로 하는 나라였다.[20] 특산품이나 물품 제조가 마닐라나 민다나오에 비해 별로 발달되지는 못했으나 중계무역지 여서 교통이 발달했고 바랑가이 부족왕국 치고는 금을 많이 보유했던 것으로 기록되어있다.[21] 12세기 비사야인 해적들이 송나라에서 해적활동을 할때는 문신은 했지만 갑옷을 안입고 있었다, 400년간 많은 전쟁으로 발전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22] 콘키스타도르 몇 명이 철기 시대 이전의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상대로 강철 칼과 군마, 화승총, 화포 등으로 무쌍을 찍으며 아메리카를 정복해나가던 스페인과는 달리, 포르투갈이 진출한 지역은 몰루카, 호르무즈, 다만디우(Daman and Diu)등 이미 상당한 지역행정조직을 갖춘 힌두교, 이슬람계 술탄국이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어 이런 식이 통하지 않아 지역 유지들과 친분을 쌓으며 점과 선을 장악하고 교역을 하는 방식을 택하여 실리를 챙겨왔다. 그렇게 만든 전진기지가 인도의 고아 주와 중국의 마카오 등이었다.[23] 특히 마젤란의 요구가 사실상 협박이었기에 라푸라푸를 화나게 만들었다.[24] 마젤란은 퇴각 와중에 무거운 갑옷과 불편한 무릎 때문에 뒤쳐지고 말았고, 하필 다친 무릎에 다시 부상을 입어 결국 쓰러지고 만 것이다. 라푸라푸 군대는 침략자들이 총과 화살을 쏴대는 것에 일부 병력이 죽거나 다치는 걸 보고 거리를 두고 떨어져 화살과 돌을 던져댔다. 스페인 원정대는 화약이 바닥나서 적들이 내던지는 돌에 압도당했다. 그나마 이들은 단단한 투구와 갑옷으로 돌팔매질을 버텼다. 하지만 라푸 라푸 군대는 이걸 보고 저들 침략자들이 장거리 무기가 이젠 없다는 걸 알아차리고 몰려와서 이들을 공격하며 투구와 갑옷이 보호하지 못하는 다리를 집중 공격했다. 결국 마젤란은 명성에 비해서는 결코 곱지 못한 최후를 맞았다.[25] '캄필란' 이라고 하는 필리핀 전통 무기이며 특징은 생물의 벌어진 입을 묘사하느라 갈라진 칼자루 디자인이다. 필리핀의 전통 무술 칼리 아르니스에서 쓰이는 무기이기도 하다.이미지[26] 일부 사람들은 엔리케가 처음으로 세계 일주에 성공한 사람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엔리케는 필리핀 출신이었고, 마젤란과 함께 항해에 참가해 필리핀으로 돌아온 셈이기 때문. 물론 정설은 아니고 일종의 야사에 가까운 이야기이다.[27] 이 엔리케라는 자는 주인에게 상당한 신임을 받았는지, 마젤란과 고급선원들의 식사나 회의자리에 동석하고 함 내에서 약간의 지휘권도 갖는 등의 우대를 받았다고 한다. 마젤란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면 주인을 잘 지키지 못한 선원들에게 원한을 품었을지도 모른다.[28] 다른 말로는 향료 군도.[29] 정향을 잔뜩 싣고 출발하려는 순간 침수가 발생했다. 결국 수리기간이 4개월이 걸렸다. 출항 후에도 풍랑과 괴혈병이 덮쳐 제대로된 항해를 하지 못하고 마젤란을 추적하던 포르투갈 함대에 나포되어 단 3명의 선원만 스페인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30] 빅토리아의 뜻(승리)을 생각해 보면 이름값을 한 셈이다..[31] 1)후안 세바스티안 데 엘카노(선장), 2)프란시스코 알보, 3)미구엘 데 로다스, 4)후안 데 아쿠리오, 5)안토니오 롬바르도(=피가페타), 6)마르틴 데 후디키버스, 7)에르난 데 부스타만테, 8)그리스인 니콜라스, 9)미구엘 산체스, 10)안토니오 에르난데스 콜메네로, 11)프란시스코 로드리게스, 12)후안 로드리게스, 13)디에고 카르메나, 14)아첸의 한스, 15)후안 데 아라티아, 16)바스코 고메즈 갈레고, 17)후안 데 산탄드레스, 18)후안 데 주빌레타.[32] 산티아고 호, 콘셉시온 호, 트리니다드 호를 가리킴. 산 안토니오 호는 전술했다시피 중도에 이탈.[33] 왜 유럽인들이 아시아와의 무역에 그렇게 집착했는지를 짐작케 해주는 대목이다.[34] 이 책이 완전히 출판된 것은 18세기 이후이다. 그 전에는 책의 일부분만 출판된 기록이 남아 있으며 그나마도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프랑스어 판본으로 여러차례 변조가 이뤄졌다는 평가를 받는다.[35] 다른 언어 위키백과에는 없다.[36] 이후 한국어 위키백과에서도 해당 내용은 전부 삭제되었으며 영어 위키백과의 번역문으로 교체되었다.[37] 엘카노가 마젤란 해협에서 도주한 배의 선장이라는 이야기가 있으나, 실제로 마젤란 해협에서 돌아간 배는 산 안토니오 호이고, 그 배의 선장은 메스키타라는 스페인 항해사이며 실제로 스페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선장을 설득한 인물은 항해장이었던 포르투갈인 에스테반 고메즈이다. 산 안토니오 호가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길에 섬들을 발견했다고 하는 곳이 일명 산 안토니오 제도 혹은 스페인어로 말비나스 제도라고도 불리는 곳으로, 현대의 포클랜드 제도이다.[38] 마젤란파였던 피가페타는 오히려 포르투갈인었던 마젤란과 스페인 항해사의 대립에 대해서 약간 두루뭉술하게 넘긴 흔적이 있다.[39] 그래서 엔리케의 세계일주가 언어적이라면, 마젤란의 세계일주는 수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40] 그래서 현재 최초의 세계일주를 한 사람은 엘카노를 포함한 18인으로 꼽는게 일반적이다. 마젤란이 아니다.[41] 막말로 항해가 성공한 것은 엘카노가 이끌고 온 빅토리아 호가 향료 제도라고 불린 몰루카 제도에서 사온 향료때문이었다. 몰루카 제도는 이미 알려져 있던 지역으로, 다만 이 지역이 포르투갈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을 뿐이다. 결국 이 항해의 이득은 이 향료 대금에서 나왔다.[42] 현재 스페인 해군 해사생도 훈련함(기범선) 이름이 '후안 세바스티안 데 엘카노' 함이다. 한국 해군사관학교도 몇년에 한번씩 방문한다.[43] 인명이자, 현지에서 미식으로 즐겨먹는 물고기 이름이기도 하다. 마젤란은 라푸 라푸에게, 라푸 라푸는 요리사에게 죽었다는 농담도 있다.[44] 기독교로 개종해 투항한 원주민들은 건드리지 않았다.[45] 후에 필리핀에서 이 지폐를 도안으로 한 우표를 발행하기도 했다.[46] 유럽은 먼저 희망봉을 간 다음, 마젤란 해협을 돌아 파나마를 거처 향신료 제도로, 이후 인도를 거처 희망봉을 돌아 유럽으로 돌아오는, 마젤란의 실제 항로와 비슷한 항해를 하게 되는대, 가장 난이도가 높다. 아시아쪽은 태평양을 건너 켈리포니아 해안으로 간 다음, 파나마를 거처 마젤란 해협을 건너 카리브 해안으로간 후, 지브롤터에 들렀다가 희망봉을 돌아 인도를 거처 본국을 향해 가게 되는대, 태평양을 건너 남아프리카로 식민지를 펼치면 되므로 조금 덜 어려운 편. 한편, 비유럽권 아프리카의 경우 가장 가라를 치는 항로를 돌기 때문에 제일 쉽다. 물론 비유럽권 국가들은 그만큼 테크에 페널티를 받는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47] 1500년대 초에 지구일주라는 용자짓을 벌인 것을 더 높게 평가했는지 항해를 끝마친 엘카노에 대한 언급은 안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