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0-24 12:21:59

프란시스쿠 드 알메이다

파일:Retrato_de_D._Francisco_de_Almeida_(após_1545)_-_Autor_desconhecido.png

Francisco de Almeida
프란시스쿠 드알메이다[1]
(1450 ~ 1510)

1. 개요2. 생애
2.1. 아프리카 공략2.2. 인도 공략2.3. 주변 세력과의 갈등
3. 대중 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포르투갈의 군인.

2. 생애

어려서 군대에 입대하여 1476년에 포르투갈과 아라곤, 카스티야 왕국의 연합군이 싸운 3월 1일에 일어난 토로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그 이외에도 모로코에서 참전하고 1492년에 그라나다 공략전에도 참가하였다.

2.1. 아프리카 공략

1505년 마누엘 1세의 명을 받고 인도의 총독으로 임명받아 함대 21척으로 1000명의 선원과 1500명의 군인들을 이끌고 3월 25일에 아프리카로 출발했다. 7월 경에 함대는 동 아프리카의 킬와 술탄국(Kilwa)[2]에 도착했다. 킬와는 원래 바스코 다 가마 시기에 제압되어 포르투갈에 공물을 바치기로 했으나 당시 술탄이던 알 푸다일(al-Fudail)의 측근이던 장관 '이브라힘 이븐 술레이만(Ibrahim ibn Suleiman)'이 자신이 섬기던 술탄을 퇴위시킨 뒤 죽여버리고 행방불명 된 그의 아들 문타리(Muntari)의 이름을 빌려 대리 통치를 하며 포르투갈에 내던 공물까지 끊어버리는 일이 있었다.

프란시스쿠는 자신의 아들 로렌소와 함께 이 상황에 간섭해 찬탈자 이브라힘에 대항하는 인물이자 친 포르투갈 성향의 관료였던 '무하마드 이븐 루큰 앗 딘(Muhammad ibn Rukn ad Din)'[3]을 지원하기로 했고 결국 그의 뜻대로 전투에 패한 이브라힘이 살해되자 무하마드가 술탄에 올랐고 술탄은 숨어있던 문타리 왕자를 찾아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했다. 이 때부터 포르투갈이 꼭두각시가 된 술탄들을 다시 지원하며 킬와를 실질적으로 지배했으며 자신들을 통하지 않고는 킬와의 그 누구도 해외무역을 할 수 없도록 경제조치를 가했다.[4]

한편, 프란시스쿠가 오기 훨씬 이전인 1502년에 자신들이 속해 있던 킬와 술탄국에서 분리 독립한 몸바사(Mombasa)[5]가 자신들을 지배했던 킬와 만큼이나 포르투갈에 반감을 가지고 있자[6] 프란시스쿠는 그들을 제압하고자 했다. 당시 몸바사는 인구가 1만 명이 넘을 정도의 제법 큰 도시였던데다 아랍인 출신의 지배자(sheikh) 아래에 일치단결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포르투갈의 군인들만으로는 어려워서 몸바사와 경쟁 중이던 말린디(Malindi)[7]의 술탄에게 도움을 받아 공격하는 한편, 주앙 호메레(João Homere)에게 지시해 함대를 이끌고 가서 잔지바르에 상륙시킨 뒤 점령하게 했다.

잔지바르의 경우는 어느 정도 위세를 보인 뒤 '후이 로렝소 하바스코 마르키스(Ruy Lourenço Ravasco Marques)' 대위가 잔지바르의 술탄을 만나 나름 평화로운 방식으로 통치권을 양도 받은 뒤 잔지바르를 포르투갈 제국의 일부로 편입하였다. 그 사이 몸바사에서는 격전이 벌어진 끝에 1506년 8월에 포르투갈 군에 점령되었다. 도시는 초토화된 뒤 크게 약탈을 당했으나 포르투갈 군대도 만만찮은 피해를 입게 되었다.[8] 1507년 3월에는 모잠비크의 해안가를 점령하였다.[9]

2.2. 인도 공략

9월 13일에 인도 서부에 위치한 안자디브 섬[10]에 요새를 건설한 뒤 섬 이름을 '일라 지 앙제지바(Ilha de Angediva)'로 바꾸고 항구이자 무역 대도시 중 하나였던 칸누르(Kannur)에 '산토 안젤로 지 카나노르 요새(Fortaleza de Santo Ângelo de Cananor)'를 건설하였고 10월 31일에 코치(Kochi)에 도착해 본거지로 삼아 '코치 요새(Kotta kochi)'[11]를 강화했으며, 콜람(Kollam)에는 무역 본부를 세웠다.[12]

이러한 공로로 그는 마누엘 1세로부터 '인도의 부왕(Vice-rei da Índia)으로 임명되었다.

2.3. 주변 세력과의 갈등

1508년에 동아프리카, 남아라비아, 인도의 이슬람 세력들이 이집트에게 포르투갈을 견제하라는 압력을 행사하자 이집트가 오스만과 손을 잡고 포르투갈을 응징하기 위해 디우에 함대를 집결시키자 아들인 로렌초에게 작은 선박을 주어 정찰을 시켰다.

그러나 아들이 맘루크 왕조오스만 제국의 연합 함대를 이끄는 후세인 쿠르디의 공격으로 잡혀서 죽임을 당하자[13] 함대를 이끌고 아라비아로 후퇴하였으며,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가 후임 총독으로 부임하자 그를 가두었다.

1509년 2월 2일에 디우에서 17척으로 군인 1500여명과 군함 200여척의 병력으로 집결한 맘루크 왕조, 오스만 제국, 캘리컷, 구지라트의 연합 함대를 이끈 쿠르디를 격파하였으며 이 승리로 포르투갈의 인도양 무역을 활성화하였으며 승리한 이 해에 투옥한 알부케르크를 풀어주고 총독 자리를 물려주었다.

1509년 12월에 포르투갈로 귀국하기 위해 출발했지만 1510년 2월에 희망봉에서 코이코이족(호텐토트족)의 공격을 받고 사망하였다.

3. 대중 매체에서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시리즈의 확장팩 아프리칸 킹덤의 캠페인의 주역 중 한명으로 등장하는데 캠페인 내용이 위에 적혀 있는 그의 행적을 그대로 담았다. 해당 항목 참고. 참고로 고유 외형이 있는 다른 영웅들과 달리 스페인의 특수 유닛인 정복자 포트레이트를 그대로 사용했다.(...) 결정판에서의 성우는 알라라크로 잘 알려진 이주창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로망스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쓰도록 하고 있다.[2] 오늘날의 탄자니아 린디 주[3] 포르투갈 사람들은 이 인물을 무하마드 아르코네(Muhammad Arcone)로 불렀다.[4] 술탄 무하마드는 1년 후에 이브라힘의 친척이었던 티렌디쿤데(Tirendicunde)의 지사의 손에 암살되었지만 포르투갈의 지배력이 약해지진 않았다.[5] 오늘날의 케냐의 몸바사 주[6] 1498년에 유럽인 최초로 바스코 다 가마가 그들과 조우했으나 반응이 심히 좋지 않았다.[7] 오늘날의 케냐 킬리피 주[8] 몸바사는 이후에도 포르투갈에 대한 저항을 반복하였다가 제압되었다.[9] 포르투갈이 본격적으로 모잠비크의 내륙 일대로 음웨네무타파(Mwenemutapa), 즉 무타파 왕국과 관계를 맺은 것은 1530년 정도였다.[10] 인도 서부 해안에서 주로 사용하던 콘칸어(Konkani) 식 표기이다.[11] 뜻은 '코치 하구'로 해석된다. 흔히 잘 알려진 '엠마누엘 요새'는 프란시스쿠의 뒤를 이은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가 건설했다.[12] 콜람의 포르투갈 요새인 '산토 토마스 요새(Santo Thomas Fort)'는 프란시스쿠 사후인 1517년에 세워졌다.[13] 다만 다른 사료에 의하면 잡히지 않고 입고 있던 판금 갑옷의 무게 때문에 바다에 빠져 죽었고 시체를 끝내 발견할 수 없었다는 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