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5 03:52:15

주앙 5세

파일:포르투갈 왕국 국장.svg
포르투갈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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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098><colcolor=#fff> 포르투갈 왕국 브라간사 왕조 제4대 국왕
주앙 5세
João V
파일:주앙5세.jpg
이름 주앙 프란시스쿠 안토니우 조제 벤투 베르나르두
(João Francisco António José Bento Bernardo)
출생 1689년 10월 22일
포르투갈 왕국 리스본 히베이라 궁전
사망 1750년 7월 31일 (60세)
포르투갈 왕국 리스본 히베이라 궁전
재위 포르투갈 왕국의 왕
1706년 12월 9일 ~ 1750년 7월 31일
배우자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나 (1708년 결혼)
자녀 바르바라, 페드루, 주제 1세, 카를루스, 페드루 3세, 알레샨드르, 안토니우(사생아), 가스파르(사생아), 호세(사생아), 마리아 리타(사생아)
아버지 페드루 2세
어머니 팔츠노이부르크의 마리 조피
형제 주앙, 프란시스쿠, 안토니우, 테레사 마리아, 마누엘, 프란시스카 조세파
서명 파일:주앙 5세 서명.svg
1. 개요2. 생애3.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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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투갈 왕국 브라간사 왕조 제4대 국왕. 별명은 관대왕(o Magnânimo)이다.[1] 절대군주로 군림했기 때문에 포르투갈태양왕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2. 생애

1689년 10월 22일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 리스본의 히베이라 궁전에서 포르투갈 국왕 페드루 2세팔츠 선제후 필리프 빌헬름의 딸인 팔츠노이부르크의 마리 조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제로 주앙, 프란시스쿠, 안토니우, 테레사 마리아, 마누엘, 프란시스카 조세파가 있었다. 그는 출생하자마자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었지만, 포르투갈 궁정의 관례와는 달리 브라간사 공작 또는 브라질 공에 바로 선임되지 못했다. 이는 전년도에 출생하여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었다가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한 주앙 왕자를 추모하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어린 시절 운하오 여후작 마리아 데 렌카스트레에게 양육되었으며, 예수회 수도사 프란시스쿠 드 크루스, 주앙 세쿠, 루이스 곤차가로부터 정치학, 천문학, 항해, 수학, 군사학. 역사 등 다방면의 교육을 받았다. 청년 시절엔 저명한 포르투갈 외교관인 루이스 데 쿤하로부터 유럽 정세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1696년 동생 프란시스쿠와 함께 그리스도 기사단에 입회했으며, 그해 말 브라질 공과 브라간사 공작의 칭호를 비로소 수여받았다.

1699년 마리 조피 왕비가 사망했다. 자식들에게 자상한 어머니를 무척 사랑했던 그는 우울증에 걸려 여러 달 동안 리스본에서 물러나 고모 카타리나가 머물고 있던 벰포스타 궁전에 거주하면서 양육받았다. 1700년 4월 중병에 걸려 임종 직전까지 몰리자 신부를 불러 병자성사를 했다. 하지만 병세가 극적으로 회복되면서 정상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고, 포르투갈 궁정은 포르투갈 왕실의 수호자인 성모 마리아의 은총으로 간주했다.

1704년 2월 누이 테레사 마리아가 죽자 크게 슬퍼해 몇 달 동안 궁전에 출입하지 않았다. 이에 페드루 2세는 그가 너무 심약해서 왕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할 거라 여기고, 무척 용감하고 활동적인 성격의 마누엘을 왕으로 옹립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하지만 그 해 5월 주앙이 궁정으로 돌아와 누이에 대한 그리움이 왕의 의무를 수행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했고, 페드루 2세는 주앙을 계속 신임하기로 했다. 그 후 1706년 12월 9일 페드루 2세가 뇌졸중으로 사망하면서, 주앙은 포르투갈 국왕 주앙 5세로 등극했다.

그가 막 통치를 시작했을 때, 포르투갈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카를 대공을 추대한 오스트리아-영국-네덜란드와 연합해 펠리페 5세를 스페인 국왕으로 내세운 프랑스 왕국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1706년 6월 25일, 포르투갈군은 마드리드에 입성하여 카를 대공을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3세'로 옹립했다. 그러나 스페인 현지인들이 펠리페 5세를 위해 끝까지 싸우면서 전세가 점점 불리해지다가 프랑스 장군 제임스 피츠제임스가 이끄는 프랑스군의 역공으로 1706년 10월 마드리드를 도로 빼앗겼다. 포르투갈군은 1707년 초 마드리드를 재탈환하고자 골웨이 백작 앙리 드 마스의 지휘하에 영국-네덜란드 연합군과 함께 공세에 착수했으나, 1707년 4월 25일 알만사 전투에서 제임스 피츠제임스에게 참패했다.

프랑스-스페인 동맹군은 알만사 전투 승리의 여세를 몰아 1707년 5월 발렌시아와 사라고사를 탈환했다. 이후 포르투갈군이 점거한 스페인 국경 도시 발렌시아 데 알칸타라, 알렌테호, 세르파, 모우라가 도로 스페인군에 넘어갔다. 주앙 5세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페드루 2세의 전직 고문 몇 명을 해임하고 디에고 데 멘도사를 국무장관으로 선임한 뒤 군사개혁을 실시했다. 1707년에 반포된 군사령에 따라 테르시오를 고수하던 군대는 연대 체제로 변모했고, 야전 사령관의 지위는 대령으로 바뀌었다.

여기에 포르투갈의 가장 오래된 정규군 부대였던 로사리우 드 라 코루나 드 포르투갈(Rosario de la Corona de Portugal)은 2개의 해군 연대로 전환되었다. 또한 군사 연구를 장려하고 해외의 군사 기술자들이 집필한 요새 건축 및 포병 훈련 요령서를 번역 및 인쇄해 전군에 배포하게 했다. 그리고 군사 교육을 위한 수업을 리스본 궁정에서 실시하게 했다. 이 수업은 다른 도시들에서도 행해졌고, 1732년에는 포르투갈의 주요 국경도시인 엘바스와 알메르다에 사관학교가 세워졌다.

1707년 6월 27일, 포르투갈 대사 페르낭 텔레스 데 실바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1세를 상대로 협상한 끝에 주앙 5세와 레오폴트 1세의 딸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나의 결혼 게약을 체결했다. 포르투갈을 동맹국으로 묶어놓고 싶었던 황제는 공주의 지참금으로 10만 크라운에 달하는 금액을 지불했다. 1708년 10월 26일 공주를 리스본까지 호위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포르투갈 함대가 타구스 강 하구에 도착했고, 공주가 탄 기함은 히메리아 궁전의 부두에 정박했다. 이후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결혼 축하 행사가 12월 27일까지 거행되었다.

주앙과 마리아 부부는 1710년 말까지 왕위 계승자를 낳지 못했다. 1711년 초, 프란치스코회 추기경이자 포르투갈 종교재판소 대심문관인 누누 데 쿠냐 에 아타이데의 권고에 따라 프린치스코 수녀원을 짓고 하느님에게 자식을 낳게 해달라고 기원했다. 1711년 12월 4일 마리아 안나가 장녀 바르바라를 낳으면서, 이들의 소원이 성사되었다. 이후 부부는 주제 1세, 카를루스, 페드루 3세, 알레샨드르를 추가로 낳았다. 하지만 부부 사이는 대체로 소원하여 별거 생활을 유지했고, 주앙 5세는 필리파 데 노론하, 파울라 데 오디블라스, 루이스 이네스 안토니아 마차도 몬테이로, 마달레나 막시마 데 미란다, 이나시아 로사 데 타보라, 루이스 클라라 데 포르투갈 등 여러 정부를 두고 사생아들을 많이 낳았다.

1710년, 프랑스 제독 장 프랑수아 뒤클레르가 6척의 배를 이끌고 금 선적항인 리우데자네이루를 공격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구아나바라 만에서 바라 요새에 의해 격퇴되었고, 더 먼 해변에 상륙한 뒤 리우데자네이루로 행진했다가 현지 군대의 역공으로 크게 패하고 생포되었다. 이에 1707년 이베리아 반도로 향하던 200척의 영국군 수송선을 습격해 막심한 피해를 입히고 1709년 300척의 상선과 20척의 전함을 나포해 프랑스 전역에서 영웅으로 떠오른 르네 뒤과이-트루앙 제독이 나섰다. 1711년 9월 11일, 그는 12척의 전함과 6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리우데자네이루로 항해해 난공불락이라 여겨지던 바라 요새를 습격해 11일간의 전투 끝에 공략하고 리우데자네이루 시를 점령했다. 이후 2개월간 주지사를 억류한 채 도시를 지배하던 그는 도시를 돌려주는 대가로 막대한 몸값을 받아내고 1,000명의 프랑스 포로들을 구출했으며, 수많은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빼내서 프랑스령 기아나 섬으로 끌고 갔다. 브라질의 금 운송에 크게 의존하던 포르투갈은 이 패배로 인해 막심한 손실을 입었다.

1711년 4월 17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1세가 사망한 뒤 카를 대공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로 등극했다. 이에 영국, 네덜란드는 스페인이 신성 로마 제국과 결합해서 좋을 것이 없다고 여기고 프랑스와 평화를 논의하기로 했다. 주앙 5세 역시 전쟁을 그만두기로 하고, 루이스 데 쿤하를 프랑스 정부로 보내 협상을 벌이게 했다. 그 결과 1711년 4월 1일 프랑스와 평화 협약을 체결했으며, 1715년 2월 6일 스페인과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다. 양자는 서로에게서 빼앗은 영토를 돌려주고 전쟁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며 포로들을 교환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포르투갈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이 무렵, 전통적으로 포르투갈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무굴 제국이 쇠락하고 마라타 제국이 대두되었다. 마라타 제국은 포르투갈인들을 인도에서 몰아내려 했다. 여기에 포르투갈의 식민도시였다가 독립한 무스카트의 아랍인들이 잔지바르 등 동아프리카 해안의 여러 거점을 공략하고 포르투갈인들과 크고 작은 충돌을 벌였다. 포르투갈은 인도양과 동아프리카 해안의 거점 도시들을 지키기 위해 두 세력을 상대로 사투를 벌여야 했다.

그러던 1714년, 7척으로 구성된 무스라트 아랍 함대가 무굴 제국의 주요 항구 도시이자 아랍과 포르투갈 사이에서 중립을 선언한 곳인 수라트에 상륙했다. 그들은 아라비아 반도 횡단 중에 심각한 손상을 입은 2척을 수리하기 위해 항구에 남아야 했다. 이때 그들은 마카오에서 온 포르투갈 선박들을 발견하고 빼앗았다. 인도의 포르투갈 총독 바스코 페르난데스 세사르 데 메네스는 이에 격분해 3개 전함들을 이끌고 아랍인들을 공격해 사투를 벌인 끝에 그들을 제압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무스카트는 보복하기로 결의하고 인도에 대규모 아랍 함대를 파견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포르투갈-무스카트 해상 전쟁은 5년간 이어지다가 1719년 페르시아 만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포르투갈 해군이 완승을 거두면서 포르투갈의 승리로 돌아갔다. 반면 1727-1729년에 동아프리카 해안의 도시인 뭄바사의 패권을 놓고 벌어진 전쟁에서는 포르투갈군이 바다에서 승리했지만 육지에서는 패해 뭄바사 시를 빼앗겼다. 한편 마라타 제국과의 전쟁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1739년 2월 ~ 5월 바사이 공방전에서 패배해 바사이를 마라타 제국에 넘겨야 했다. 이후 포르투갈의 인도 동북부에서의 영향력은 급속도로 쇠락했다.

포르투갈 왕국의 전통적인 수입원이었던 인도에서의 영향력이 쇠락하자, 주앙 5세는 브라질 경영에 집중했다. 페드루 2세 치세 말기에 브라질에서 대규모 금광이 발견되면서 시작된 골드 러시는 그의 치세에 절정을 이루었다. 주앙 5세는 모든 금의 5분의 1은 왕의 금고로 직접 들어가야 한다고 규정했고, 상비센테 총독부(1709), 페르남부쿠 총독부(1716)를 잇따라 신설해 브라질의 가장 가치있는 두 지방을 직접적으로 통제하고 세금을 거둬들이게 했다. 1721년에는 상비센테에서 미나스 제라이스를 따로 분리해 자치령으로 삼고, 이곳에 더 많은 세금을 징수하게 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난 뒤, 주앙 5세는 유럽 국가들과의 관계를 재수립하고자 노력했다. 특히 전쟁으로 악화된 프랑스와의 관게를 개선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히베리아 그란데 3대 백작 루이스 마누엘 데 카마라는 1715년 8월 초 루이 14세의 궁정에 파견되어 막대한 선물을 프랑스 국왕에게 바치고 시민들에게 금전을 베풀어 프랑스인들의 호의를 샀다. 한편, 주앙 5세의 동생 마누엘은 형의 허락을 받지 않고 본국을 떠나 유럽 전역을 여행하면서 각지의 포르투갈 대사 및 귀족들과 함께 호화로운 연회를 벌였다. 주앙 5세는 처음엔 마누엘이 허락 없이 떠난 것을 불쾌하게 여겼지만, 마누엘에게 "네가 아직 어리니 이해하마"라며 용서했다. 그 후 마누엘은 주앙 5세의 허락을 받고 사부아 공자 외젠의 부관이 되어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가 맞붙은 페트로바라딘 전투에서 활약했다. 마누엘은 이후에도 여러 궁정을 전전하며 유능한 군 지휘관으로 활약했으며, 1732년에는 폴란드 국왕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그의 모험은 여러 문학 작품에 영감을 주었고 포르투갈의 명성을 드높이는 데 일조했다.

1715년 오스만 제국 파디샤 아흐메트 3세베네치아 공화국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모레아를 공략한 뒤 달마티아를 침공하자, 베네치아는 전유럽에 구원을 호소했다. 1716년 스페인이 베네치아를 돕기 위해 지중해에 함대를 파견하자, 그는 스페인 군주에게 뒤쳐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오스만 함대에 포위된 코르푸를 구원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5척의 전함과 호위함 1척, 보조함 몇 척으로 구성된 함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그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오스만 함대는 이미 포위를 풀고 돌아가버렸기 때문에 별다른 전투를 치르지 못했다.

1717년,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주앙 5세에게 함대를 다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주앙 5세는 동생 프란치스쿠에게 7척의 전함을 파견해 베네치아와 구호 기사단 함대와 합세하도록 했다. 이후 오스만 함대 15척과 마주치면서 벌어진 마타팡 해전에서, 구호 기사단 함대와 포르투갈 함대가 베네치아 제독의 통제에 따르지 않고 이탈해버리면서, 베네치아 함선 5척이 15척의 적선에 둘러싸이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오스만 함대는 탄약이 다 떨어져서 전투를 이어가기 어렵다고 여기고 곧 철수했고, 기독교 측은 이를 승리로 해석했다. 포르투갈 함대는 시칠리아에 귀환한 뒤 화려한 연회와 불꽃놀이를 벌여 승리를 자축했고, 함대 사령관인 리오 그란데 백작 로페 푸르타도 데 멘도사는 로마로 귀환한 뒤 시내에서 5대의 황금 마차를 앞세워 개선식을 거행한 후 교황청에 마차를 바쳤다. 클레멘스 11세는 이에 감격해 주앙 5세에게 감사를 표하는 편지를 보냈고, 포르투갈의 명성은 이전보다 크게 상승했다.

이렇듯 주앙 5세는 교황청과 우호 관계를 맺었지만, 리스본의 교황 대사 빈센초 비치(Vincenzo Bichi) 문제로 인해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빈센초 비치는 리스본에서 면죄부를 대량으로 판매한 일로 포르투갈 성직자들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았다. 비치는 교황청으로 불려가서 엄중한 경고를 받고 리스본으로 돌아갔지만, 이후에도 언행을 고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마타팡 해전 후 교황청이 포르투갈 왕국이 오스만 해군을 물리쳐준 것에 보답하는 의미로 리스본 대교구를 총대주교청으로 승격시켰다. 이후 1719년 교황 클레멘스 11세가 비치를 로마로 소환하기로 했을 때, 주앙 5세는 리스본이 파리, 마드리드, 비엔나와 같은 급이 되었으니 이들 도시의 교황 대사가 교황청으로 귀환한 뒤 추기경으로 승진하는 관례대로 비치를 추기경으로 선임하겠다고 보장해달라고 요구했다. 교황이 비치의 그릇된 행실을 문제삼으며 요청에 응하지 않자, 주앙 5세는 비치가 추기경이 될 것이라는 보장을 받지 않고서는 리스본을 떠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포르투갈을 오스트리아, 스페인, 프랑스와 동급의 국가로 올려놓으려는 계산이었다.

1720년 9월, 클레멘스 11세는 비치를 로마로 소환하고 나폴리 출신의 주세페 피라오를 리스본의 새로운 교황 대사로 선임했다. 그러나 주앙 5세는 비치가 리스본을 떠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피라오가 포르투갈 영내에 들어오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1721년 초 클레멘스 11세가 선종한 후 인노첸시오 13세가 선출되자, 주앙 5세는 새 교황이 1697년부터 1710년까지 리스본의 교황 대사로 일한 적이 있는 점에 기대를 걸고 비치를 추기경으로 세워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인노첸시오 13세는 이를 무시하고 피라오를 교황 대사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주앙 5세는 비치를 추기경으로 세우지 않는다면 교황청과의 외교 관계를 끊겠다고 위협했다. 당시 포르투갈 함선이 교황청을 위해 중국으로 가는 선교사들을 수송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황청은 이 협박을 무시하기 어려웠다.

1724년, 인노첸시오 13세가 선종했다. 새 교황 베네딕토 13세는 포르투갈 국왕 디니스 1세의 후손이었기에 주앙 5세는 다시 한 번 기대를 걸었지만, 비치를 추기경에 세우려는 기미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이에 주앙 5세는 1728년 모든 포르투갈인은 성직자와 평신도를 막론하고 교황청과 직접적으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금지하며 로마에 있는 포르투갈인은 본국으로 귀환하라는 내용의 칙령을 반포했다. 베네딕토 13세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에게 중재를 요청했지만, 주앙 5세는 자신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는다면 중재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1730년 가을, 그해 7월에 선출된 새 교황 클레멘스 12세는 비치를 추기경으로 승진시키기로 결의했다. 이리하여 빈센초 비치는 1731년 9월 24일 몬토리오에서 성 피에트로의 추기경으로 임명되었고, 리스본은 마드리드, 파리, 비엔나와 함께 추기경을 배출한 도시가 되었다. 그 후 포르투갈과 교황청의 관계는 호전되었고, 1748년 교황 베네딕토 14세는 주앙 5세와 그의 후계자들에게 "가장 충실한 왕(Sua Majestade Fidelíssima)"이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1722년, 앙골라의 루안다 총독이 주앙 5세에게 영국이 콩고강 하구의 카빈다에 요새를 건설하고 있다고 알렸다. 영국은 포르투갈의 우방이었지만, 카빈다를 앙골라의 일부로 간주했던 포르투갈인들은 그곳에 영국 거점이 세워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주앙 5세는 이를 심각한 상황으로 여기고 브라질 해군의 일부 편대를 앙골라로 파견해 상황을 조사하게 했다. 얼마 후 영국인들이 실제로 요새를 건설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주앙 5세는 영국인들에게 요새를 넘겨줄 것을 요구하라고 지시했다. 영국인들이 이를 거부하자, 포르투갈 함대는 요새를 향해 포격을 가했다. 영국인들은 한동안 저항했지만 이내 요새가 무너질 위기에 몰리자 영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장받는 대가로 요새와 수송선을 넘겨주기로 했다.영국 측이 이에 대해 별다른 항의를 하지 않은 것을 볼 때, 요새 건설은 본국의 허락을 받지 않고 독단적으로 행한 것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735년 스페인의 리오데라플라타 총독 미구엘 데 살세도 이 시에라알타가 우루과이 지역 공략을 위해 침공을 가하자, 현지 포르투갈 총독 안토니오 페드로 바스콘셀로스가 반격하여 물리쳤다. 이 소식을 접한 주앙 5세는 6척의 전함을 우루과이 지역으로 파견했다. 이들은 5척의 소형 전선과 3척의 프리깃함으로 구성된 적 함선과 교전했지만 양측 모두 한 척의 배도 잃지 않고 물러났다. 이후 포르투갈과 스페인 사이에 대규모 전쟁이 벌어질 기미가 감지되었고, 영국 함대는 주앙 5세의 요청에 따라 리스본에 정박했다. 하지만 1737년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의 중재에 따라 양측이 평화 협약을 맺기로 하면서 분쟁이 종식되었다.

1744년 9월, 마르키스 데 카스텔로 노보 총독이 고아 총독으로 부임했다. 25년 전 상파울루와 미나스 데 오로의 총독이었던 그는 포르투갈의 고아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북부 고아 일대의 보운솔로스를 공략하기로 했다. 1745년 4월 공세를 개시한 그는 알로나, 비콜림, 산클림 일대를 공략했고, 나머지 지역을 별다른 전투 없이 점거했다. 그해 11월에는 고아의 최북단인 티라콜 요새를 항복했다. 카스텔로 노보는 이후에도 고아 주변의 여러 마을을 공략하면서 포르투갈의 지배력을 대폭 강화했다. 그는 이 공적으로 1748년 주앙 5세에 의해 알로나 후작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1746년,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스페인령 남미 영토와 포르투갈령 브라질 간의 경계를 확실히 정하지 않으면 분쟁이 계속 되리라는 것을 깨닫고 협상을 시작했다. 4년간 이어진 협상 끝에, 1750년 1월 13일에 마드리드 협정이 체결되었다. 포르투갈은 협정에 따라 로니아 델 사크라멘토를 스페인에 양도하고 그 대가로 세븐 타운스 오브 미션스를 받았다. 그러나 현지의 과라니 부족은 예수회 수도사들과 함께 스페인의 지배를 받기를 거부했고, 이로 인해 주앙 5세의 뒤를 이은 주제 1세 통치기에 이 지역을 둘러싼 과라니 전쟁이 발발했다.

어린 시절부터 건강이 약했던 주앙 5세는 1742년 심한 발작으로 죽을 뻔했다가 칼다스 다 레인하 시의 목욕탕으로 옮겨지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이후 1743년 5월과 9월, 1744년 4~5월과 7월, 1744년 10월, 1745년 5월과 10월, 1746년 9~10월, 1747년 4월과 9월, 1750년 7월에 중병에 시달렸고, 그때마다 병자성사를 받았다. 그러던 1750년 7월 31일 히베이라 궁전에서 60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상 비센트 드 포라 성당에 안장되었다. 사후 살아남은 자식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아들인 주제 1세가 포르투갈의 새 국왕에 등극했다.

3. 가족 관계

1708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의 딸.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나(1683 ~ 1754)와 결혼하였다.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나
(Maria Anna of Austria)
1녀 스페인의 왕비 바르바라
(Barbara, Queen of Spain)
1711년 12월 4일 1758년 8월 27일 페르난도 6세
1남 브라질 공 페드루
(Pedro, Prince of Brazil)
1712년 10월 19일 1714년 10월 29일
2남 주제 1세
(José I)
1714년 6월 6일 1777년 2월 24일 스페인의 마리아나 빅토리아[2]
슬하 4녀[3]
3남 카를루스 왕자
(Infante Carlos)
1716년 5월 2일 1736년 4월 1일
4남 페드루 3세
(Pedro III)
1717년 7월 5일 1786년 5월 25일 마리아 1세
슬하 2남 1녀[4]
루이사 이녜스 안토니아 마카도 몬테이로 (사생아)
(Luísa Inês Antónia Machado Monteiro)
5남 브라간사의 안토니우
(António of Braganza)
1714년 10월 1일 1800년 8월 14일
마델레나 막시마 데 미란다 (사생아)
(Madalena Máxima de Miranda)
6남 브라가의 대주교 가스파르
(Gaspar, Archbishop of Braga)
1716년 10월 8일 1789년 1월 18일
파울라 데 오디벨라스 (사생아)
(Paula de Odivelas)
7남 포르투갈의 종교재판관 주제
(José, High Inquisitor of Portugal)
1720년 9월 8일 1801년 7월 31일
루이자 클라라 (사생아)
(Luísa Clara de Portugal)
2녀 브라간사의 마리아 리타
(Maria Rita of Braganza)
1731년 5월 28일 1808년 7월 27일

4남(사실상 차남)인 페드루 3세가 친조카이자 주앙 5세에겐 친손녀인 마리아 1세와 결혼함으로서 마리아 1세는 주앙 5세의 친손녀이자 며느리이고 페드루 3세는 주앙 5세에게 아들이자 손녀사위가 되는 셈이다.


[1] 먼 후손인 브라질 황제 페드루 2세의 별명이기도 하다.[2] 펠리페 5세의 장녀다.[3] 마리아 1세 등.[4] 주앙 6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