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7 17:22:12

안토니우(포르투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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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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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098><colcolor=#fff> 포르투갈 왕국 아비스 왕조 제11대 국왕
안토니우
António
파일:Anthony_I_of_Portugal-01.jpg
출생 1531년
포르투갈 왕국 리스본
사망 1595년 8월 26일 (향년 63~64세)
프랑스 왕국 파리
재위 포르투갈 왕국의 국왕 (논란)
1580년 7월 24일 ~ 1580년 8월 25일
자녀 마누엘(사생아), 크리스토방(사생아), 디니스(사생아), 주앙(사생아), 필리파(사생아), 루이자(사생아)
아버지 베자 공작 루이스
어머니 비올란테 고메스
종교 가톨릭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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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투갈 왕국의 국왕 및 왕위 요구자이자 아비스 왕조의 마지막 국왕.[1] 후대 포르투갈인들이 붙인 별칭은 투사(o Lutador) 또는 독립주의자(o Independentista)이다.

2. 생애

1531년경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 리스본에서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1세의 3남인 베자 공작 루이스의 아들로 출생했다. 어머니 비올란테 고메스의 기원은 불분명하다. 많은 연대기에서는 그녀를 유대인 또는 개종한 무슬림이라고 묘사하는데, 일부 학자들은 펠리페 2세에게 대항한 안토니우를 깎아내리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19세기의 포르투갈 학자 카밀로 카스텔로 브랑코가 1879년에 집필한 <돈 안토니우>에는 비올란테 고메스가 포르투갈 소수 귀족의 일원인 페드루 고메스의 딸이라고 기술되었지만, 현재 학계에서는 근거없는 주장으로 간주한다. 그녀는 산타렘에서 수녀로 지내다가 1568년 7월 16일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루이스 왕자는 생전에 크라토 교구의 수도원장으로 선임되었기 때문에, 그가 결혼하려면 교황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교황청이 비올란테 고메스와의 결혼을 허가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안토니우는 사생아로 간주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 기마랑이스 인근에 있는 코스타 수도원에 맡겨졌고, 1548년 코임브라에 있는 산타 크루스 수도원으로 옮겨졌다. 1551년 코임브라 대학교에서 예술 학위를 취득했고, 나중에는 에보라 주교 바르톨로메우 도스 마르티레스 수사로부터 신학을 배웠다. 이후 그리스도 기사단에 가담한 그는 1574년 북아프리카 탕헤르 총독으로 부임했다.

1578년 세바스티앙 1세의 모로코 원정에 참여했다가 크사르 엘케비르 전투에서 전군이 궤멸되었을 때 사드 왕조군에 생포되었다. 이때 한 무슬림 간수가 그의 몸에 걸치고 있던 성 요한의 십자가 문양이 새겨진 천을 보고 "그 천조각은 뭐냐?"라고 묻자, 그는 교황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자신에게 베푼 호의이며, 이듬해 1월 1일까지 돌아오지 않는다면 교황 곁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답했다. 이에 간수는 그가 매우 가난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약간의 몸값을 받고 풀어줬다.

그리하여 조국에 돌아온 안토니우는 세바스티앙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엔히크 1세에게 자신을 후계자로 지명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루이스 왕자와 비올란테 고메스가 자신을 낳은 뒤 나중에 정식으로 결혼했다며, 자신은 사생아가 아니라 아비스 왕조의 합법적인 상속인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엔히크 1세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간주하고 1579년 11월 23일 안토니우의 포르투갈 국적을 박탈하고 재산을 압수하며 타국으로 추방한다는 내용의 칙령을 반포했다. 그는 당국의 추적을 피해 숨어지내면서 추종자들을 모집했다.

1580년 1월 30일, 엔히크 1세가 알메이링 궁전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에 리스본 대주교 주제 데 알마르다, 주앙 테요, 프란치스코 데 사 데 메네세스, 디오구 로페스 데 소우사, 주앙 데 마스케르나스 등 5명의 대신들로 구성된 섭정 위원회를 세우게 했다. 안토니우는 엔히크 1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대놓고 민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 자신을 왕으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했다. 여기에 제4대 기마랑이스 공작 두아르트의 딸이자 마누엘 1세의 손녀이며, 포르투갈의 강력한 귀족인 브라간사 공작 주앙 1세의 아내인 카탈리나도 포르투갈 왕위에 도전했다.

하지만 섭정 위원회는 두 사람 모두 왕이 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겼다. 안토니우는 사생아이니 왕위에 오를 자격이 없고, 포르투갈에서 여왕이 인정된 사례가 없으니[2] 카탈리나 역시 왕위에 오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가 자신의 전 아내 마리아 마누엘라가 주앙 3세의 딸이며 자신 역시 포르투갈 왕실과 혈연관계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막대한 뇌물을 보내자, 섭정 위원회는 펠리페 2세를 포르투갈 국왕으로 옹립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안토니우는 이에 맞서 백성들에게 주앙 1세가 1383~1385년 카스티야 왕국의 침략으로부터 포르투갈을 구한 일을 상기하라고 호소했다. 주앙 1세 역시 사생아로 간주되었지만 카스티야의 압제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해 떨쳐 일어났고 그의 후예들이 200여 년간 나라를 이끌었으니, 자신 역시 그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스페인 왕국이 자국을 병합하기를 원하지 않은 민중은 이에 호응했고, 그는 1580년 7월 24일 산타렘에서 포르투갈 국왕으로 즉위했다. 여기에 리스본세투발 등지에서도 그의 추종자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1달 후인 1580년 8월 25일, 안토니우는 펠리페 2세가 급파한 알바 공작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 톨레도를 상대로 알칸타라 전투를 치렀다. 알바 공작이 이끌고 온 병력은 보병 18,000명, 기병 2,000명에 달한데 비해, 안토니우가 이끄는 병력은 보병 8,000명에 기병 1,800명에 불과했고 훈련도 역시 지극히 열세했다. 그는 정면 대결로는 승산이 없다고 여기고 알칸타라 강의 왼쪽 둑에 자리를 잡고 그 옆의 요새에 의지한 채 수비에 전념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가 강을 도하하는 스페인군을 상대로 맞서는 사이, 스페인군 좌익 부대가 비밀리에 다른 곳에서 강을 도하한 뒤 요새를 빠르게 공략했다. 이에 전의를 상실한 추종자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안토니우는 비아나 데 카스텔로로 피신했다.

얼마 후 산초 데 아빌라가 이끄는 스페인군이 비아나 데 카스텔로에 이르자, 그는 다시 그곳을 탈출한 뒤 왕국 각지를 방랑하다가 1581년 6월 잉글랜드 왕국에 망명하여 엘리자베스 1세를 알현해 군사적 지원을 구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고 1582년 아조레스 제도의 테르세이라 섬에 들어간 뒤 그곳에서 왕으로 군림했다. 그러면서 펠리페 2세의 해군이 쳐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아그라 요새 방어를 강화하고 동전을 주조했으며, 프랑스 왕비이자 실권자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1583년 레판토 해전의 승리를 이끈 알바로 데 바잔 제독이 이끄는 스페인군과의 항쟁에서 패배를 면치 못하자 프랑스로 망명했다.

이후 스페인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간의 전쟁이 벌어지자, 1589년 다시 잉글랜드로 이동해 엘리자베스 1세에게 자신을 복위시켜달라고 청원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이번에는 그를 돕기로 하고, 브라질과 아조레스를 잉글랜드에 넘기는 대가로 안토니우를 복위시킨다는 내용의 협약을 체결했다. 1589년 6월 3일 프랜시스 드레이크 제독이 이끄는 잉글랜드 함대와 함께 리스본으로 항해해 리스본 성벽 밖의 모든 건물을 파괴하고 불을 질렀다. 그러나 잉글랜드 함대는 역병에 시달리다가 본국으로 돌아갔고, 그는 배에서 내린 뒤 추종자들을 끌어모아 리스본을 공략하려 했으나 끝내 실패하자 스페인군의 추격을 피해 프랑스로 다시 피신했다.

안토니우는 프랑스로 망명할 때 상당한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갔으나 포르투갈 왕위를 쟁취하기 위해 용병을 고용하고 권력자들에게 뇌물을 바치는 과정에서 모조리 탕진해버렸고, 말년에는 프랑스 국왕 앙리 4세가 제공하는 얼마 안 되는 연금으로 먹고 살아야 했다. 그는 프랑스에서 자신의 대의를 옹호하기 위해 여러 편의 글을 집필했으며, 그 외에도 시편의 발췌 시문인 <Psalmi Confessionales>를 출간했다. 1595년 8월 26일에 사망하면서 자신의 유해를 포르투갈 알렝케르의 성 프란치스코 수도원에 안장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파리에 있는 프란치스코 수도원에 대신 안장되었다. 또한 그의 심장은 파리에 있는 산타 클라라 수도회의 마리아 수녀원에 안장되었다.

안토니우는 알려지지 않은 여인에게서 사생아 마리아를 낳았고, 아나 바르보사라는 여인과의 사이에서 필리파, 루이스, 아폰수, 마누엘, 크리스토퍼, 페드루, 디니스, 비올란테, 안토니아, 주앙을 낳았다. 이중 마누엘은 아버지가 테르세이라 섬에 군림했을 때 왕세자를 칭했다. 오늘날 그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이들은 수백명에 달하는데, 주로 네덜란드, 벨기에, 스위스에 기반을 두고 있으나 포르투갈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1] 안토니우를 정통 국왕으로 간주할 경우.[2] 1116년 테레사 데 레온이 포르투갈 여왕을 자칭한 적이 있었지만 어떤 국가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다. 1383년 베아트리스가 남편인 카스티야 국왕 후안 1세에 의해 포르투갈 여왕으로 내세워지기도 했지만 역시 인정받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