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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DF3DF><colcolor=#000> 프랑스 왕국 앙리 2세의 왕비 카테리나 데 메디치 Caterina de' Medici | ||
이름 | 이탈리아어 | 카테리나 마리아 로물라 디 로렌초 데 메디치 (Caterina Maria Romula di Lorenzo de Medici) |
프랑스어 | 카트린 마리 로물라 드 로랑 드 메디시스 (Catherine Marie Romula de Laurent de Médicis) | |
출생 | 1519년 4월 13일 | |
피렌체 공화국 피렌체 | ||
사망 | 1589년 1월 5일 (향년 69세) | |
프랑스 왕국 블루아 성 | ||
배우자 | 앙리 2세 (1533년 결혼 / 1559년 사망) | |
자녀 | 프랑수아 2세, 엘리자베트, 클로드, 루이, 샤를 9세, 앙리 3세, 마르그리트, 프랑수아, 잔, 빅투아르 | |
아버지 | 우르비노 공작 로렌초 데 메디치 | |
어머니 | 마들렌 드 라 투르 도베르뉴 | |
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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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 앙리 2세의 왕비로, 본명은 카테리나 마리아 로물라 디 로렌초 데 메디치(Caterina Maria Romula di Lorenzo de' Medici)였다. 줄여서 카테리나 데 메디치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2. 생애
2.1. 유년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중심지였던 피렌체 공화국의 명문 메디치 가문 출신이었다. 당시 피렌체의 지도자인 로렌초 2세[1]와 오베르뉴 백작의 차녀 마들렌 드 라 투르 도베르뉴[2]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메디치 가문의 유일한 상속자였으나, 태어난 지 1개월도 되지 않아서 부모가 모두 사망했다. 아버지 로렌초 2세가 우르비노 공작위를 가지고 있었기에 우르비노 여공작이었고, 당시 갓난아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 자신이 어떤 남자와 결혼하냐에 따라 당시 모든 나라가 탐냈던 이탈리아 반도의 운명이 바뀔 수도 있었기에 생애 초기에는 그야말로 금지옥엽이었다.그러나 카트린을 보호하고 있었던 작은할아버지 교황 레오 10세가 선종하자 메디치 가문의 위세는 일시적으로 위축되었고, 그 와중에 카트린은 우르비노 공작령과 피렌체의 상속인 자격을 잃었다. 지도자를 잃은 메디치 가문이 휘청대는 동안 메디치 가문을 약화시키고자 했던 신임 교황 하드리아노 6세가 우르비노 공작령과 피렌체의 실권을 당시 세 살에 불과했던 어린 카트린에게서 몰수했기 때문이다. 하드리아노 6세의 짧은 치세가 끝난 후, 메디치 가문의 일원이며 로렌초 '일 마니피코'('위대한')의 동생 줄리아노의 사생아인 줄리오 데 메디치가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되었다.
2.2. 카를 5세와 클레멘스 7세 사이의 전쟁에서 튄 불똥
바로 이 신임 교황 클레멘스 7세가 그녀 인생에서 여러 가지로 화근의 씨앗이었다. 그 이전까지 교황과 합스부르크 왕조간의 유대 관계는 더없이 돈독했으나, 클레멘스 7세는 교황치고 젊은 데다 강단도 아주 강한 교황이었다. 당시 유럽은 마르틴 루터로부터 촉발된 종교개혁이 불길처럼 번지는 상황이었건만, 교황의 소프트웨어는 수백 년 전 십자군 전쟁 시기 교황권이 유럽을 호령하던 중세적 사고에 묶여 있었다.시대 배경을 간략히 언급하자면, 클레멘스 7세의 이전 교황들은 당대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 매우 두터운 관계를 유지했다. 레오 10세는 스페인 왕이었던 카를로스 1세가 황제로 선출되게끔 조력을 아끼지 않았고[3], 하드리아노 6세는 다름아닌 카를 5세의 가정교사 출신이었다. 더욱이 카를 5세는 종교 개혁 속에서 가톨릭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 헌신해왔다. 그런데 이처럼 끈끈한 분위기를 클레멘스 7세는 한 큐에 날려버렸다.
클레멘스 7세는 커질대로 커진 황제의 위세를 견제하기 위해 일부러 그의 적들과 동맹을 맺으면서 황제와 적대관계로 돌변했다. 즉 카를 5세의 앙숙인 프랑수아 1세 및 베네치아 공화국과 손을 잡은 것이다. 카를 5세와 프랑수아 1세 사이에 벌어진 이탈리아 전쟁 초기 내내 교황은 프랑수아 1세에 호응하여 카를 5세의 뚜껑을 열게 만들었으며, 가장 결정타는 잉글랜드까지 끌어들여 제국을 사방에서 포위해 버린 코냑 동맹이었다.
당연히 이러한 행위는 카를 5세의 분노를 유발했고, 결국 1527년에 온 로마가 쑥대밭이 되는 대사건이 터졌다. 로마가 제국군에 점령당한 반 년간 산탄젤로 성에 피신해 유폐되다시피 한 클레멘스 7세의 권위는 밑바닥까지 떨어졌다.
이처럼 상황이 수습 불가 지경에 이르자 클레멘스 7세는 카를 5세에게 항복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는 한편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움직임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배상금을 메꾸고 교황령을 재건하며 카를 5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스스로 출신지인 피렌체를 공격했다.
자기들을 코냑 동맹에 끌어들인 교황 클레멘스 7세 자신이, 그것도 메디치 가문 사람이 적으로 돌변하자 피렌체 사람들은 당연히 경악했고, 충격에 빠졌다. 물론 피렌체도 제국에 덤벼보긴 했지만 이탈리아 반도 대부분이 카를 5세의 수중에 떨어진 판에 피렌체라고 예외일 리가 없었다.
이런 사태를 맞고 분노한 피렌체 시민들에 의해 메디치의 카트린은 거의 죽을 위기에 처했고, 신변의 안전을 위해 베네딕토회 수녀원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이런 불똥이 옮겨붙은 그녀는 모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오베르뉴를 뺀 땅과 작위를 대부분 잃고 몰락했다. 그 결과 그녀는 태어났을 때에 비해 대외적 가치가 크게 폭락했으나, 그나마 메디치 가문의 재산은 아직 남아 있었기에 아직 클레멘스 7세의 중요한 결혼 동맹용 말로 남아있었다.
결국 그녀는 카를 5세와 프랑수아 1세 사이에서 계속 줄타기를 하고 있던 클레멘스 7세의 중매로 프랑수아 1세의 둘째아들 오를레앙 공작 앙리와 결혼하게 되었고, 오를레앙 공작 부인이 되었다. 이때 카트린과의 결혼에 대해 프랑스에서 큰 반대가 있었는데, 메디치 가문은 당시 벼락출세한 가문으로 여겨져 귀천상혼으로 여겨질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프랑수아 1세는 카트린은 평생 오를레앙 공작 부인일 것이며, 프랑스 왕비가 될 일이 없을 것이라고 귀족들을 안심시키며 앙리와 카트린을 결혼시켰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맏아들 프랑수아가 파비아 전투 때 카를 5세에게 포로로 잡혀 옥살이를 하다가 풀려나고서 오래 지나지 않아 죽었으므로, 앙리 왕자가 프랑수아 1세의 뒤를 이어 프랑스 왕위에 올랐다. 그렇기에 프랑수아 1세가 평생 '오를레앙 공작 부인'일 것이라고 장담했던 카트린이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
만약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이 결혼의 중매만 서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프랑스 발루아 왕가에 여생을 다 바칠 이유도 없었을 것이고, 프랑스의 역사도 완전히 뒤집혔을 것이다. 만약 그녀가 발루아-앙굴렘 왕가가 아닌 합스부르크 왕가로 시집갔더라면 프랑스가 아니라 세계사 차원에서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있다. 결과적으로 클레멘스 7세는 그녀의 인생과 프랑스의 운명, 나아가 유럽 대륙의 운명까지도 뒤바꿔 놓았다.
카트린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카트린은 앙리 2세를 지극히 사랑했으나, 앙리 2세는 카트린과의 관계를 단지 자신의 의무로만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앙리 2세는 카트린과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19살 연상인 디안 드 푸아티에 후작 부인이라는 애인이 생겼기 때문이다.
2.3. 세자빈에서 섭정이 되기까지
프랑수아 왕세자의 사후 앙리 2세가 왕세자가 됨에 따라 카트린 또한 왕세자빈의 지위에 올랐다. 하지만 남편 앙리 2세는 이미 디안 드 푸아티에라는 애인을 두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실세는 카트린이 아닌 푸아티에가 되었다. 카트린은 수많은 궁정 사람들에게 모욕과 멸시를 받고 남편 앙리와의 동침조차 푸아티에의 발언에 달려있었다. 정작 카트린의 6촌이기도 했던 디안 드 푸아티에 역시 그다지 높은 가문 출신이 아니었으며[4] 앙리 2세의 정부가 되어 그의 총애를 바탕으로 벼락출세한 여자였다. 문제는 처음 카트린과 앙리의 결혼에 강력하게 찬성한 건 당시 앙리와 애인도 아니었던 푸아티에 부인이었다는 것이다.어린 나이에 외국의 궁정으로 시집온 카트린을 편들어 준 인물은 시아버지인 프랑수아 1세와 시누이인 마르그리트 공주[5]밖에 없었다. 프랑수아 1세는 하나뿐인 며느리를 매우 예뻐했고, 카트린이 궁정에서 무시당하는 것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했다. 덕분에 그가 살아있을 때는 카트린도 큰 모욕을 받지는 않았지만, 앙리 2세의 치세가 되고 나서 권력의 중심이 푸아티에 부인이 됨에 따라 온갖 수모를 당했다. 카트린은 이후로도 줄곧 와 같은 심한 모욕을 감내해야 했다.[7] 카트린은 모성애가 극진한 인물이었지만 어렵게 얻은 아이들조차 앙리 2세가 디안 드 푸아티에에게 맡기는 바람에, 자식들을 양육하는 건 고사하고 마음대로 볼 수조차 없는 처량한 신세에 놓였다. 게다가 푸아티에 후작 부인은 1548년에 발렌티누아 여공작, 1553년에 에탕프 여공작 작위까지 수여받아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앙리 2세가 사고로 죽고 카트린이 아들 프랑수아 2세의 섭정을 맡게 되면서, 주위에서는 그녀가 복수의 화신이 되어 디안 푸아티에를 죽이고 궁정을 아예 피로 물들일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카트린의 복수는 단지 푸아티에 후작 부인에게서 슈농소 성[8]과 보석 반환, 앙리 2세의 장례식 참여 불허라는 매우 관대한 처분으로 끝났다.
사실 카트린에게 있어서 푸아티에 부인은 단순한 증오의 상대이자 연적이라기보다 애증이 섞인 불편한 관계였다. 푸아티에 부인은 내연녀 시절에도 총애를 믿고 거들먹거리기는 커녕, 카트린이 아플 때 적극적으로 간호를 해주거나 그녀에게 공손한 저자세를 유지하는 등 의외로 프랑스 왕비로 존중하면서 보호해 주는 쪽이었다. 그러니 카트린도 자기 남편을 빼앗아가고 귀족이라는 이유로 푸아티에 부인을 마냥 일방적으로 미워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제치고 주도권과 실권을 잡은 푸아티에 부인을 상대로 좋아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그런 과거가 있다 해도 당대인들은 카트린이 자기 남편의 애첩인 푸아티에 부인을 처형하고, 기즈 가문의 입지도 그만큼 줄어들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 밖에도 푸아티에 부인은 정치에서는 배제되었으나 막대한 재산을 보전하며 조용히 은거했다. 이후 카트린은 점차 자신의 지위를 강화시켰다.
2.4. 왕권 강화를 위한 이간책과 위그노 탄압
1559년 7월 앙리 2세가 마상 창시합 도중 죽은 후[9]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세 차례에 걸쳐[10] 왕의 그림자 뒤에서 프랑스 정치를 주름잡는 실세가 되었다. 그리고 이 과부가 다스리는 30년은 프랑스의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 중 하나로 기억된다(위그노 전쟁).어렵게 섭정 왕태후의 지위를 얻었으나, 당시 프랑스는 신/구교간의 갈등으로 내전 상태였고, 어린 아들 프랑수아 2세의 왕권도 기즈 가문[11]에 의해 흔들리는 처지였다. 프랑수아 2세의 왕비이자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었던 메리 스튜어트의 외가 역시 기즈 가문인지라 그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카트린은 발루아 왕조의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신교도들과 구교도 간의 갈등을 적극 이용했다. 프랑수아 2세 즉위 당시 벌어진 위그노(개신교)들의 국왕 납치 시도 사건(앙부아즈의 음모 사건)의 주모자 격인 콩데 공 루이 1세를 사면해 가톨릭의 대표인 기즈 가문을 견제했다.
그러는 동안 워낙 병약했던 프랑수아 2세는 즉위 16개월 만에 후사를 두지 못한 채 승하했다. 메리 스튜어트는 왕권을 찾아 스코틀랜드로 떠났고,[12] 카트린은 장남의 뒤를 이어 즉위한 차남 샤를 9세를 대신해 섭정하게 된다. 카트린은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이반하여 자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하는 샤를 9세를 설득하고, 개신교도라면 이를 가는 기즈 가문과 연합하여 샤를 9세와 협력 관계이던 개신교도[13]들에 대한 암살 계획을 방조했다는 의혹이 있다. 카트린이 연루되었든 그렇지 않든 이 암살로 인해 촉발된 일이 바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이라고 불리게 되는 대사건이었다. 다만 카트린 자신은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을 제외하면, 화합의 아이콘이 될 미셸 드 로스피탈을 수상으로 임명하고, 자신의 딸 마르그리트와 위그노인 앙리 드 부르봉을 혼인시켰을 정도로 위그노와 가톨릭의 화합을 꿈꾼 인물이었다.
그녀가 가장 아낀 아들은 앙리 3세였다. 외모도 뛰어난 데다가 어릴 때는 상당히 총명하여 그녀가 가장 기대한 아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즉위한 후 그는 총신들과 놀아재끼기에 바빴고, 어머니인 카트린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그중 가장 결정판이라 할 만한 것은 앙리 3세의 기즈 공작 암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카트린이 암살 전에 이걸 인지했다는 주장도 있다.
2.5. 발루아-앙굴렘 왕가의 멸망
앙리 3세는 어머니와 다른 정치적 노선으로 인해 갈등을 빚었고, 결국 1588년 어머니의 조언자들을 모두 해고했다. 앙리 3세는 카트린을왕들의 어머니일 뿐 아니라 국가의 어머니
라고 높여 불렀으나 단지 그뿐이었고, 당시 이미 심한 폐렴에 걸려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 있었던 카트린은 모든 정사에서 배제되었다. 이후 앙리 3세의 행보는 그를 결국 파멸에 이르게 했다. 앙리 3세는 기즈 공작을 대놓고 적대시하기 시작했는데, 기즈 공작은 프랑스 가톨릭 세력의 구심점이자 그야말로 핵심이었기 때문에 앙리 3세는 자신의 세력 기반에서의 지지를 잃게 되었다. 거기다 앙리 3세는 정치적 동맹자로 이전까지 자신을 충실히 지지하던 기즈 가문이 아니라 개신교 측인 나바르의 앙리(앙리 4세)를 선택했는데, 이 역시도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어머니 카트린의 말을 듣지 않기는 했지만 종교적 관대함만은 어머니와 닮았던 앙리 3세는 나바르의 앙리(앙리 4세)와 가까워진 이후, 위그노파와 화해를 추진하는 정책을 펴려 했다. 큰 모욕을 받았다고 여긴 가톨릭파의 보스 격인 기즈 가문의 두 형제(기즈 공과 추기경)는 이에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의 지원을 받아 아예 앙리 3세를 축출해 버리고자 했는데, 강력한 신하들을 왕권으로 견제할 수단이 없었던 앙리 3세는 1588년 12월 23일 기즈 형제 둘을 전부 다 암살하는 막장스러운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 암살 사건으로 인해 큰 충격을 받은 카트린의 병세는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1589년 1월 3일 그녀는 오랜 친구인 부르봉 추기경[14]을 방문하여
"아, 그 가련한 아이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오. 그는 자신의 모든 걸 무너뜨려 폐허로 만들고 있소."
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난 1월 5일,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쓸쓸하게 블루아 성에서 사망했다. 평생을 발루아-앙굴렘 왕조와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 바친 삶이었으나 결국 그녀는 아무것도 보상받지 못한 채 모두에게서 잊혀진 채로 임종을 맞게 되었다.죽어서도 카트린에 대한 취급은 매우 비참했다. 그녀의 시신은 약식 장례를 치른 후 블루아 성당 바닥에 묘비도 없이 묻혀 있었다. 이렇게 모두에게서 잊혀져 버린 카트린은 훗날 자신의 자식도, 사위도 아닌 의붓딸에 의해 비로소 안식을 찾게 된다. 앙리 2세의 서녀였던 디안 드 프랑스가
"앙리 2세의 부인인 카트린이 죽어서 이런 취급을 받는다는 건 너무나도 부당하다."
고 나섰던 것이다. 결국 디안에 의해 카트린은 생 드니 성당의 왕실 묘역으로 이장되어 남편 앙리 2세 곁에 잠들게 되었다.이제 카트린이 역사에서 퇴장한 이후 남은 그녀의 마지막 아들인 앙리 3세로 다시 돌아가자면, 기즈 공작의 암살 이후 앙리 3세는 어찌되었든 자신의 세력 기반이었던 가톨릭 측에서 볼 때 그야말로 원수와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가톨릭 측이 주류인 수도 파리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앙리 3세는 도망을 쳤는데, 도망간 곳이 나바르 국왕 앙리(앙리 4세)가 이끄는 위그노 군대가 있던 곳이었다(...)
나바르의 앙리(앙리 4세)는 일단 앙리 3세와의 친분도 있었고, 그가 자신을 프랑스의 차기 국왕으로 인정했기에 기꺼이 프랑스의 국왕으로 대우해 줬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앙리 3세 또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 모후 카트린이 사망하고 8개월이 지났을 때, 암살당한 기즈 형제의 원한을 갚는답시고 광신적인 가톨릭 수도자가 앙리 3세를 면전에서 칼로 찔러 죽이는 일이 발생하고 만 것이다. 이로 인해 백년전쟁에서 살아남으며, 프랑스의 왕좌를 지켰고, 한때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까지도 노리던 발루아 왕조는 초라하게 몰락하고 말았다.
결국 마지막으로 승리한 사람은 발루아 가문도, 기즈 가문도 아닌 카트린의 평생의 적이었던 부르봉 가문의 앙리 4세(나바르의 앙리)였다. 카트린, 기즈 가문, 앙리 3세와 같은 앞선 역사의 주역들이 모두 몰락하고 가톨릭 세력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린 후, 나바르의 앙리(앙리 4세)는 자신의 왕국인 나바르로 돌아가 한동안 힘을 기르다가 잉글랜드를 위시한 각국의 개신교 군대의 도움을 받아 파리로 진격한 후 포위했다.
그러던 중 파리 시는 앙리 4세를 왕으로 받아들이되 그가 가톨릭으로 개종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는데, 그는 즉시 가톨릭으로 회심[15]한 뒤에 즉위하고 부르봉 왕조를 창시했다. 이때 앙리 4세가 한 유명한 말이 바로
그러나 부르봉 왕조도 훗날 카트린의 혈통으로 이어지게 되었는데 앙리 4세의 증손자 그랑 도팽 루이의 아내 바이에른의 마리아 아나 빅토리아, 앙리 4세의 고손자 프티 도팽 루이의 아내 마리 아델라이드가 모두 카트린의 여계 후손이기[16] 때문이다. 마리아 아나 빅토리아의 장손이자 마리아 아델라이데의 아들이 바로 루이 15세로 여계 혈통으로나마 카트린의 후손이 프랑스의 왕위를 이어받게 된 셈이다.
게다가 아들들이 모두 자식을 낳지 못하거나 사생아만 낳아서 남계 후손은 끊겼지만 여계 후손은 매우 번성해서 카트린의 후손 중 하나가 프란츠 1세로[17], 프란츠가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하여 수많은 자녀들을 낳고 또 그 자손들이 여러 유럽 왕실과 혼사를 맺으면서 카트린의 혈통은 부르봉 왕조뿐만 아니라 유럽 왕실 전역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3. 평가
프랑스 발루아 왕조의 국왕 앙리 2세의 왕비로 프랑스 전역을 휩쓴 위그노 전쟁 당시 파리에서 수천 명의 위그노들을 학살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었으나, 20세기부터의 시각으로는 학계에서 일관적으로 부정되고 있는 편[18]이다. 카트린이 대학살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된 가장 큰 원인은 훗날의 마리 앙투아네트(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처럼 국민에게 인기가 없는 외국인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학계의 시선과는 다르게 일반인들에게는 그냥 학살자로만 알려져 있는 편이다.남편 앙리 2세의 사후 쇠약해진 왕권을 되살리기 위해 비인도적인 짓을 많이 저질렀으며 권력에 눈이 멀어, 피도 눈물도 없었던 여인으로 보일 수 있으나 이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사건으로 인해 덮어씌워진 이미지이다. 이 문서의 개요와 본문만 해도 여러 번 학살의 주범이라는 식으로 수정된 적이 많다. 카트린은 평생 가톨릭과 위그노 사이의 갈등을 봉합하려 한 중재자로 살았으며, 아들들의 왕권과 발루아 왕조를 위해 평생을 바쳤다. 그녀의 정책은 비록 기만적이었을지도 모르나 적어도 피와 음모로 얼룩지지는 않았다.
앞서 말했듯 카트린의 정책과 궁극적인 목표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화합을 바탕으로, 그 위에 발루아 왕조가 종파를 초월한 왕조로 거듭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카트린의 정책은 실패했는데 첫 번째 이유는 자식들이 영 칠칠치 못한 데다가 자손도 남기지 못했던 탓이요, 두 번째 이유는 그녀 자신이 종교 갈등 자체를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에 있었다. 피렌체 출신의 카트린은 평생 종교적 열정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철저히 실리에 의해 움직이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당시 가톨릭과 위그노 진영은 합리성과는 거리가 먼, 신앙으로 살아가는 이들이었기에 그녀가 제시한 가톨릭과 개신교가 평화롭게 어울려 사는 청사진은 본질적으로 실리와는 양립할 수 없었다. 즉, 당시의 프랑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카트린은 이 두 세력을 이용해 권력 기반으로 삼고자 평생을 노력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이 종교 갈등이 그나마 봉합된 것은 결국 프랑스 전역이 황폐화 된 이후 앙리 4세의 치세에 이르러서였다.
4. 가족
4.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카테리나 데 메디치 (Caterina de' Medici) | <colbgcolor=#fff3e4,#331c00> 우르비노 공작 로렌조 2세 데 메디치 (Lorenzo II de' Medici, Duke of Urbino) | <colbgcolor=#ffffe4,#323300> 피에로 디 로렌초 데 메디치 (Piero di Lorenzo de' Medici) | |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 (Lorenzo di Piero de' Medici) | |||
클라리체 오르시니 (Clarice Orsini) | |||
알폰시나 오르시니 (Alfonsina Orsini) | |||
탈리아코초와 알바 백작 로베르토 오르시니 (Roberto Orsini, Count of Tagliacozzo and Alba) | |||
카테리나 산세베리노 (Caterina Sanseverino) | |||
마들렌 드 라 투르 도베르뉴 (Madeleine de La Tour d'Auvergne) | |||
오베르뉴 백작 장 4세 (John IV, Count of Auvergne) | |||
오베르뉴 백작 베르트랑 6세 (Bertrand VI, Count of Auvergne) | |||
루이즈 드 라 트레무유 (Louise de La Trémoille) | |||
잔 드 부르봉 (Jeanne de Bourbon) | |||
방돔 백작 장 8세[19] (John VIII, Count of Vendôme) | |||
이자벨 드 보보 (Isabelle de Beauvau) |
4.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남 | 프랑수아 2세 (François II) | 1544년 1월 19일 | 1560년 12월 5일 |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 |
1녀 | 스페인의 왕비 이사벨 (Isabel, Queen of Spain) | 1545년 4월 2일 | 1568년 10월 3일 | 펠리페 2세 슬하 2녀[20] |
2녀 | 로렌 공작 부인 클로드 (Claude, Duchess of Lorraine) | 1547년 11월 12일 | 1575년 2월 21일 | 로렌 공작 샤를 3세 슬하 3남 6녀 |
2남 | 오를레앙 공작 루이 (Louis, Duke of Orléans) | 1549년 2월 3일 | 1550년 10월 24일 | |
3남 | 샤를 9세 (Charles IX) | 1550년 6월 27일 | 1574년 5월 30일 |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슬하 1녀[21] |
4남 | 앙리 3세 (Henri III) | 1551년 9월 19일 | 1589년 8월 2일 | 로렌의 루이즈 |
3녀 | 프랑스의 왕비 마르그리트 (Marguerite, Queen of France) | 1553년 5월 14일 | 1615년 3월 27일 | |
5남 | 앙주와 알랑송 공작 프랑수아 (François, Duke of Anjou and Alençon) | 1555년 3월 18일 | 1584년 6월 10일 | |
4녀 | 발루아의 빅투아르[23] (Victoire of Valois) | 1556년 6월 24일 | 1556년 8월 17일 | |
5녀 | 발루아의 잔[24] (Jeanne of Valois) | 1556년 6월 24일 | 1556년 6월 24일 |
5. 여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늘 탐독했다고 한다.의전에 관해서 당시 포크도 사용하지 않았던(!) 프랑스 궁정에 올바른 식사 예절을 도입하고 향수[25]를 소개하는 등 이탈리아 문물을 본격적으로 수용하여, 이후 부르봉 왕조의 시대에 이르러 유럽의 궁정 문화를 주도하게 될 프랑스식 궁정 문화의 기초를 확립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리고 이탈리아 과자 마카롱도 카트린이 프랑스로 전파한 것이다. 다만 우리가 알고 있는 샌드위치 형태의 마카롱은 먼 훗날 파리의 제과점 라뒤레에서 개량한 것이다.
또한 말을 탈 때 여성들이 두 다리를 한쪽으로 모아 타는 승마법을 유행시키기도 했다. 게다가
"궁정의 여인들은 모두 코르셋을 착용하여 허리 둘레를 30cm 이하로 유지하라"
는 황당한 명령을 내려 코르셋 열풍에 한몫하기도 했다.6. 매체
<대항해시대 온라인> 프랑스 국가 이벤트에 등장하는 프랑스 황태후가 바로 이 인물이다.<대항해시대 오리진>에서도 등장한다. 여기서는 A급 교역 항해사로 등장하며 메리 스튜어트를 고용한 상태여야만 고용이 가능하다. 성능은 아쉬운 스탯 배분과 스킬로 인해 평이 좋진 못하다. 다만 S급 교역 항해사인 사피예 술탄을 뽑기 위해서는 카트린을 뽑아야 하기 때문에 뽑는 유저들 자체는 많은 편.
영화 <여왕 마고>에도 등장한다. 권력을 위하여 온갖 악행을 일삼는 역할로 묘사된다. 자신의 사위인 앙리 드 부르봉의 독살을 기도한다. 그런데 정작 그 독약의 희생자는… <여왕 마고> 항목 참조.
게임 <창세기전 3>에는 이 인물을 오마주한 조연 캐릭터 카트린느 메디시스가 있다.
굽시니스트의 서양 미술사 만화에서는 유페미아 리 브리타니아로 표현했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을 의도했는지 눈 가장자리가 붉게 칠해진 상태로 석궁을 들고 "위그노를 죽여요"라는 대사를 하고 있다.
<문명 6>에서 프랑스의 지도자로 등장. 이름을 이탈리아식과 프랑스식을 짬뽕한 '카트린 데 메디치'라는 희한한 표기를 해 놨다[26]. 상술된 바와 같이 원래 이탈리아 출신이고[27] 결국은 실패한 군주이기 때문에 다른 쟁쟁한 후보를 제치고 프랑스의 지도자로 나오는 것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아무래도 카트린이 나오는 건 여성이라는 이유가 큰 것 같은데, 여성 지도자를 넣고 싶었다면 문명 2와 3에서 지도자로 등장한 잔 다르크도 있다는 것. 결국 이후 제작진이 프랑스에게 첩보 특성을 주기 위해 취한 조치임이 밝혀졌다.
체키 카리요 주연의 영화 <노스트라다무스>에서 노스트라다무스의 후원자로 등장한다. 결말부에서 이단자로 몰려 화형을 당할 위기에 빠진 노스트라다무스를 사면한다.
각색까지는 아니지만 <어이쿠! 왕자님 ~호감가는 모양새~>에서 카트린의 이름 모티브가 되었다.
미국 방송사 Starz에서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어린 시절부터 프랑스의 섭정이 되기까지의 일대기를 그린 뱀의 여왕(The Serpent Queen)이라는 제목의 드라마가 나왔다. 영화 <골든 에이지>에서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31], <신비한 동물사전>에서 메리 루 역으로 알려진 서맨사 모턴이 카트린 역으로 출연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상생방송STB에서 첫방영되었고 B tv와 Wavve에서 스트리밍되고 있다.
[1] "위대한 로렌초"로 알려진 로렌초 데 메디치의 장남 피에로의 아들이었다. 즉 '위대한 로렌초'의 손자였다.[2] 마들렌의 어머니가 부르봉 가문 방계 방돔 백작의 딸인 잔 드 부르봉-방돔이며,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외할머니가 되는 마르그리트는 부르봉 공작의 딸이었으므로 마들렌은 프랑수아 1세와 먼 친척이었다.[3] 사실 레오 10세는 프랑스와 스페인 어느 쪽이든 이탈리아에 영향력을 미칠 것을 우려해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를 밀었다. 카를 5세와 협력한 것은 그가 황제로 선출된 이후였다.[4] 비록 고위 귀족 가문은 아니지만 왕실과 인연이 있었다. 디안의 친조부 아이마르 드 푸아티에의 첫 번째 부인은 루이 11세의 사생아 마리였고 디안의 외조부 임베르트 드 바타르니는 루이 11세가 가장 신뢰하는 조언자 중 한 명이었다. 또한 푸아티에-발랑티누아 가문은 12세기에 푸아티에 지역에서 등장하는 유서 깊은 집안이였다. 같은 지역이지만 엘레오노르 다키텐의 가문 푸아티에 가문과는 관련이 전혀 없다.[5] 프랑수아 1세의 막내딸로 나중에 사보이아 공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와 결혼했다. 마르그리트와의 친분 때문에 카트린은 나중에 사보이아 공국이 프랑스로부터 영토를 되찾는 과정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6]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메디치 가문이 막대한 결혼 지참금을 지불할 경제력이 있다는 점, 교황과 연줄이 있다는 점, 프랑스 왕실이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를 선호했다는 점 때문에 강대국 프랑스 왕족과 결혼할 수 있었다.[7] 앙리 2세 사후에 왕비로 등극한 카트린의 맏며느리 메리 스튜어트조차 "이탈리아 출신 장사꾼의 딸이 왕족과 대등한 위치에 있을 수는 없다."는 논지의 말을 했다고 하니, 그 모욕의 역사가 얼마나 긴지 알 수 있다. 메디치 가문이 오랫동안 피렌체 공화국의 실질적인 지배자라 해도 카트린이 결혼할 당시인 1533년의 귀족 세계에서는 피렌체 공작 작위를 얻은 지 얼마 안 된(1531년) 벼락출세 가문이었다. 원래 프랑스 왕족들은 암묵적으로 귀천상혼 법칙에 따라 신분이 낮은 가문의 여자와는 결혼할 수 없었다.[8] 카트린이 가장 사랑했던 성이었는데, 앙리 2세가 디안을 위해 덜컥 하사하여 카트린에게 굴욕을 주었다.[9] 이걸 예언했다며 유명해진 인물이 노스트라다무스이다.[10] 프랑수아 2세(1559~1560), 샤를 9세(1560~1574), 앙리 3세(1574~1589)[11] 프랑수아 1세는 왕세자 부부에게 유언으로 "기즈 가문을 조심해라. 그들은 너희의 아이들의 조끼까지, 그리고 너희의 백성들의 셔츠까지 몽땅 벗겨 갈 것이다."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남겼다.[12] 그리고 카트린이 메디치 가문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여러 사람 앞에서 그녀를 장사꾼이라고 비하했다가 카트린한테 찍힌 나머지 남편 사후 더 이상 프랑스에 남아있을 수 없었던 것도 있다.[13] 대표적으로 당시 개신교도의 수장이었던 프랑스 해군 제독 가스파르 드 콜리니.[14] 사위인 앙리 드 나바르의 숙부였다. 그는 신교도인 앙리 드 나바르에 반대해 신성 동맹, 즉 가톨릭 동맹에서 대립 후계자로 내세운 인물로 앙리 3세에 의해 기즈 형제가 암살당할 때 왕에 의해 구금되어 있었다.[15] '회심'은 원래 가톨릭이었던 사람이 다른 종교로 오랫동안 개종해 살았다가 다시 가톨릭으로 돌아와 재개종하는 걸 말한다. 실제로 앙리 4세는 위그노로 자라긴 했으나 어릴 적에는 정말로 가톨릭 교회에서 세례성사를 받았다.[16] 마리아 아나 빅토리아와 마리아 아델라이데 모두 장녀 엘리자베트의 후손이다.[17] 차녀 로렌 공작 부인 클로드의 직계 6대손이 프란츠 1세다.[18] G.F Young, Denis Crouzet, Jean-Louis Bourgeon, Thierry Wanegffelen 등[19] 루이 1세 드 부르봉방돔의 장남.[20]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총독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 사보이아 공작 부인 카탈리나 미카엘라[21] 요절한 적녀 마리 엘리자베트 외에도 정부 마리 투셰에게서 사생아 아들인 앙굴렘 공작 샤를을 낳았는데, 그는 루이 14세 초기까지 장수했으며 슬하의 2남 1녀 중 차남인 루이 에마뉘엘이 딸 마리 프랑수아즈를 낳아 계속 가계를 이어갔다.[22] 1572년 결혼 / 1599년 무효화[23] 아래의 잔과 쌍둥이다.[24] 빅투아르의 쌍둥이 동생.[25] 1221년 설립된 산타 마리아 노벨라 수도원에서 1533년에 캐서린 드 메디치의 혼수품으로 향수를 제조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이름은 ‘아쿠아 디 산타 마리아 노벨라Acqua di S.M. Novella’. 이후 메디시스의 일화에서 영감을 받은 Acqua della Regina(왕비수) 라는 향수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 향수는 최근에 조향된 것이라 그때 당시 왕비가 썼던 것하고는 확연히 다른 향이다.[26] 카트린은 프랑스어식이고, 데 메디치는 이탈리아어식. 완전히 프랑스어식으로 읽으면 이 항목의 제목대로 카트린 드 메디시스이며, 이탈리아어식으로는 카테리나 데 메디치. 덧붙여 이게 왜 문제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면, 동아시아로 치면 인명 豐臣秀吉을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 아니고 "풍신수길"도 아닌 "풍신 히데요시"라고 읽은 상황이다.[27] 다만 이 부분은 문명 2에서부터 5까지 줄곧 러시아의 지도자로 나온 예카테리나 2세도 마찬가지다. 그녀도 독일 출신으로서 러시아를 통치했기 때문. 다만 예카테리나는 다른 걸출한 남성 군주들을 버려두고 왜 그녀냐는 비판은 받아도 독일 출신이 어딜 넘보느냐는 비판은 거의 받지 않았다.[28] 원작 게임 카트린의 모습과 스파이를 사용하는 플레이 방식이 악당 같다는 이유로 주요 라이벌로 삼았다고 한다.[29] 온라인과 오리진과 달리 역사대로 라면 이미 카트린은 죽은 뒤다.[30] 인기를 끌면서 주요 등장인물로 고정된 덕분에 굳이 문명 6이 아니라도 다른 만화에서 이런저런 모습으로 자주 등장한다. 코스튬도 많은데 모래찜질용 피서 복장 외에도 몸매가 잘 드러나는 제국 근위대 복장이나 스파이, 흉갑기병 복장 등 상당히 많은 복장으로 출연하며, 할로윈 기념 조공 짤도 만들어졌다. 두툰 낙서시키기 이벤트에서도 바니걸, 링크 여장복, 메이드복, 비키니, 사무스 아란 옷 등 다양한 짤이 나왔다.[31] 실제 역사에서 카트린과 메리 여왕이 고부 관계였단 걸 생각하면, 서맨사 모턴은 자신이 맡았던 배역의 시어머니 역으로 이 드라마에 출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