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도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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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34><colcolor=#ffffff> 그랑 도팽 루이 Louis, Grand Dauphin | |
이름 | 루이 드 프랑스 (Louis de France) |
출생 | 1661년 11월 1일 |
프랑스 왕국 퐁텐블로 궁전 | |
사망 | 1711년 4월 14일 (향년 49세) |
프랑스 왕국 뫼돈 성 | |
장례식 | 1711년 4월 28일 |
프랑스 왕국 생 드니 대성당 | |
배우자 | 바이에른의 마리아 아나 빅토리아 (1680년 결혼 / 1690년 사망) |
마리 에밀리 드 졸리 드 슈엥 (귀천상혼) (1695년 결혼) | |
자녀 | 루이, 펠리페 5세, 샤를 |
아버지 | 루이 14세 |
어머니 |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 |
형제 | 마리 테레즈, 필리프 샤를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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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이 14세의 장남이자 프랑스 왕국의 왕세자(도팽). 스페인 보르본 왕조의 국왕 펠리페 5세의 아버지이다. 태어나자마자 왕세자가 되어 오랫동안 왕위를 기다렸지만, 천연두에 걸려 사혈치료[1]를 받았다가 어처구니 없게 사망한다. 천연두야 당시로서는 하늘에 운명을 맡기는 병이었다지만, 사혈치료를 받지 않고 무사히 병이 나았다면 그의 손자가 아니라 이 사람이 루이 15세로 즉위했을 것이다.2. 생애 초반
1661년 11월 1일, 그랑 도팽 루이는 당시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왕이었던 루이 14세와 스페인의 마리 테레즈 사이에 태어난 장남이었다. 그랑 도팽 루이 이외에도 동생들이 태어났으나 모두 어린 나이에 사망했고, 그랑 도팽 루이만이 루이 14세의 후계자가 되었다.루이 14세는 마리 테레즈 뿐만 아니라 다른 여자들과도 만나 자녀들을 두었지만, 그들은 사생아여서 왕위를 이어 갈 수 없었고, 그저 역사 속에서 왕의 사생아로 영원히 남을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루이는 딱히 유능하지는 않았지만, 성격은 성실하고 친절했다. 루이 14세는 절대왕정의 대명사답게 왕으로서의 삶(궁정 업무, 외교, 전쟁 대비 훈련, 사치 등)을 사느라 자녀들의 양육에는 무관심했는데, 어린 시절의 그랑 도팽 루이는 이에는 그다지 나쁜 감정을 가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3. 결혼과 가정
자세한 내용은 마리아 아나 빅토리아 문서 참고하십시오.4. 정치사
왕실 가족 초상화의 일부분. 아버지였던 루이 14세(오른쪽)와 도팽 루이[2], 1710년경 |
그랑 도팽 루이는 30대에 접어들면서 정치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정치개혁에 관심을 가지게 된 루이는 아버지 루이 14세의 정치가 부당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차츰 아버지 루이 14세와 갈등을 빚게 되었다. 그러나 그랑 도팽 루이가 추진하고자 했던 정책은 그저 그랑 도팽 루이의 추진 방안으로만 불렸고, 실제로 실행되지 못했다. 그랑 도팽 루이도 그다지 유능한 편은 아니었기에 신하들과 개혁에 대해서 논의만 했지 이를 실제로 옮기기에는 명분이 없었고, 그랑 도팽 루이를 받들어 줄 지지층도 아버지에 비해 적은 편이었다.
흔히 그랑 도팽 루이가 조금만 더 장수했더라면 프랑스 왕실이 폐지되지 않았으리라는 아쉬움을 표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건 명백한 착각이다. 설령 루이 14세가 일찍 죽거나 그랑 도팽 루이가 장수했더라도, 이미 루이 14세 때에 이루어진 크고 작은 전쟁으로 인한 경제난의 폐해는 이미 골이 깊어진 상태였기에 아무리 유능한 군주라고 할지라도 근본적인 해결은 어려웠다. 이런 큰 문제를 그리 유능하지도 못했던 그랑 도팽 루이가 해결할 수 있었을지는 미지수로 남을 수밖에 없다. 앞에도 서술했다시피 그랑 도팽 루이는 지지층이 적어서 그의 개혁에 호의적인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5. 죽음
1711년, 프랑스에서 갑자기 천연두가 유행하여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그랑 도팽 루이도 예외는 아니었다. 결국 그랑 도팽 루이는 며칠간 천연두로 끙끙 앓다가 1711년 4월 14일에 세상을 떠났다.루이 14세는 비록 평소부터 자신에게 박박 대들던 루이를 경계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들인지라 그를 깊이 사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생시몽 공작의 회고록에 의하면 그랑 도팽 루이가 죽어가던 때에 루이 14세는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왕세자 거처의 대기실에 머물며 아들의 병세가 호전되기만을 기다렸고, 결국 아들이 병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 충격으로 거의 실신하기 직전까지 갔을 정도였다.[3] 평소에는 아들이 자신을 따르지 않는 것에 섭섭한 감정을 느껴왔으나 골육의 정은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1년 후인 1712년 2월 12일 그랑 도팽의 며느리였던 사보이아의 마리아 아델라이데 공녀마저 홍역으로 세상을 떠났고, 6일 후인 1712년 2월 18일에 그랑 도팽의 장남 프티 도팽 루이도 홍역으로 세상을 떠났다. 1712년 3월 8일에는 프티 도팽 루이와 마리아 아델라이데의 둘째 아들 루이가 홍역으로 죽었다. 프티 도팽 루이와 사보이아의 마리아 아델라이데가 낳은 셋째 아들 루이는 당시 사혈치료를 결사반대한 가정교사 방타두르 공작부인에 의해 살아남았다.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형을 잃은 가엾은 4살의 루이는 70세가 넘은 증조할아버지 루이 14세가 죽으면 차기 왕으로 즉위해야 한다. 결국 루이는 1715년 9월 1일, 증조할아버지 루이 14세가 죽자 프랑스의 왕 루이 15세가 된다. 한편 그랑 도팽 루이의 차남 펠리페 5세는 카를로스 2세의 사망으로 스페인 국왕으로 즉위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떠난 상태였기에 전염병을 피해 살아남았다.
6. 가족
6.1. 자녀
도팽 루이의 가족. 도팽 루이와 도핀 마리아 아나 빅토리아 마리아 아나에게 안겨있는 아기가 샤를, 바닥에 앉아있는 아이가 펠리페 5세, 맨 오른쪽에서 창을 들고 서있는 아이가 프티 도팽 루이. |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남 | 부르고뉴 공작 루이 (Louis, Duke of Burgundy) | 1682년 8월 6일 | 1712년 2월 18일 | 사보이아의 마리아 아델라이데 공녀[4] 슬하 3남[5] |
2남 | 펠리페 5세 (Philip V) | 1683년 12월 19일 | 1746년 7월 9일 | 사보이아의 마리아 루이사 공녀[6] 슬하 3남[7] |
엘리사베타 파르네세 슬하 3남 3녀[8] | ||||
3남 | 베리 공작 샤를 (Charles, Duke of Berry) | 1686년 7월 31일 | 1714년 5월 5일 | 마리 루이즈 엘리자베트 도를레앙[9] 슬하 1남 1녀 |
[1] 당시에는 몸속 체액의 균형이 깨지면 병에 걸린다고 믿어, 혈액이 과다하다고 판단될 때 일부러 몸에 상처를 내 피를 뽑는 치료법이 있었다. 당연히 아무 효과는 없었고 도리어 과다출혈로 사람 잡는 경우가 허다했다.[2] 참고로 루이 14세가 손을 뻗고 있는 어린아이는 루이 14세에겐 증손자, 그랑 도팽 루이에겐 손자로 후일 루이 15세가 되는 인물이다. 루이 14세 문서에 있는 전체 초상화에는 이 아이의 아버지인 프티 도팽 루이도 있다.[3] 평소에는 극히 냉정했던 성격의 루이 14세가 이런 모습을 보이자 생시몽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극도로 놀랐다고 한다.[4]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의 장녀다.[5] 루이 15세 등.[6]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의 차녀다.[7] 루이스 1세, 페르난도 6세 등.[8] 카를로스 3세, 포르투갈의 왕비 마리아나 비토리아, 파르마 공작 필리포 1세, 프랑스의 도핀 마리 테레즈 라파엘, 사르데냐의 왕비 마리아 안토니아 페르디난다 등.[9]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의 차녀이며 6촌 겸 사촌이다. 마리 루이즈의 아버지 필리프 2세가 샤를의 아버지 그랑 도팽 루이의 친사촌이고, 마리 루이즈의 어머니 프랑수아즈 마리는 그랑 도팽 루이의 이복여동생이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