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06-01 05:37:12

샤를 1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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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부르봉 왕조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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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10세, 프랑수아 파스칼 시몽 제라르, 1829년
왕호 프랑스와 나바르의 왕 샤를 10세
(Charles X Roi de France et de Navarre)
이름 샤를 필리프 (Charles Philippe)
생몰년도 1757년 10월 9일 ~ 1836년 11월 6일 (만 79년 28일)
출생지 프랑스 왕국 베르사유 궁전
사망지 오스트리아 제국 고리치아
재위기간 1824년 9월 16일 ~ 1830년 8월 2일 (5년 9개월 15일)
"영국의 왕같은 조건으로 왕을 하느니 차라리 숲에서 도끼질을 하는 것이 낫다."[1]

1. 개요2. 생애
2.1. 왕위에 오르기 전2.2. 7월 혁명과 폐위2.3. 망명지에서의 사망
3. 가족 관계4. 기타

1. 개요

루이 15세의 아들이자 왕태자인 루이 페르디낭의 아들, 부르고뉴 공작 루이[2](1751 ~ 1761, 루이 16세의 형)와 루이 16세(1754 ~ 1793)와 루이 18세(1755 ~ 1824)의 동생이다. 즉위하기 이전에는 아르투아 백작(comtes d'Artois)[3], 앙굴렘 공작(Duc d'Angoulême), 베리 공작(Duc de Berry)[4] 작위를 받았다. 그 외에도 오베르뉴 공작(Duc d'Auvergne)도 받았다고 한다[5]

2. 생애

2.1. 왕위에 오르기 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he_Count_of_Artois_in_1773.jpg
혁명 이전의 샤를 10세(당시 아르투아 백작)

형제 중에서 가장 향락적이고 활발한 성격이었다. 활달한 성격이라 마리 앙투아네트와 함께 노는 일이 많았는데 이 때문에 마리 앙투아네트와의 사이에서 스캔들 소문이 돌기도 했다.

1789년 7월 14일,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형 루이 16세가 혁명파에 굴복한 것에 실망하여 가장 먼저 영국으로 망명했다. 망명지에서 신성로마제국의 레오폴트 2세와 프로이센 왕국에게 우리 혁명 났으니까 침공해 주세요라고 청하는 일명, 필니츠 선언을 하며 혁명 반대를 외쳤으나 딱히 자신이 나서는 활동은 하지 않았다. 사실은 원래 레오폴트와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사이에서 폴란드 분할에 대한 얘기만 오갔었는데, 이때 샤를 10세의 요청으로 프랑스 침공이 일어난다.

1795년 프랑스의 키브론 섬에 왕당파의 군대와 함께 상륙할 예정이었으나, 마지막 순간에 취소하고 대신 1개의 칼을 주었다고 한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집권하자 나폴레옹을 암살하기 위해 왕당파를 지원하고 자객을 프랑스에 보냈다. 하지만 나폴레옹에 대한 암살이 실패하면서 성과는 얻을 수 없었다.

루이 18세왕정복고기에는 프랑스로 귀환했고 자식이 없는 루이 18세의 후계자로 여겨졌다. 복고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기 때문에 공화주의자와 혁명주의자에게는 많은 비난을 받았으며 1820년에는 그가 아끼는 차남 샤를이 암살당하기도 했다.[6]

2.2. 7월 혁명과 폐위

1824년, 루이 18세가 사망하자 왕위를 계승했다. 다만 국왕이 되었을 때 나이가 많았는데 67세의 나이로 왕이 되었다. 초기에는 루이 18세에 비해 뛰어난 언변과 좋은 풍채, 또 정치범들을 사면시켜 주는 등의 유화 정책으로 좋은 인상을 주었으나 오래가지 않아 강경 왕정주의자(Ultraroyaliste)이자 전제군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1825년 5월 절대왕정 시절 전통을 따라 랭스에서 대관식[7]을 치르고, 강경 왕정주의자 빌렐을 수상으로 임명하는 등 강력한 복고 정책을 시행한다. 빌렐 내각은 1822년부터 신문 검열법(Loi de tendance)을 통과시키고, 전제왕정에 적대적인 신문사들을 대거 매수하거나 없애려 한다. 또 가톨릭의 부흥을 앞세워 정교분리 원칙을 번복하고 프랑스를 다시 가톨릭 국가로 만들려는 시도를 한다. 1825년부터는 수도회의 재물을 도둑질하는 자를 기요틴형에 처하는 등의 법안들을 통과시키고, 신성모독을 저지르는 자 또한 손목을 절제한 후 기요틴형에 처하는 등 극단적인 형법을 복원한다. 극단적인 복고주의 정치로 1826년부터 의회의 심한 반발에 부딪히게 된 빌렐은 복고주의자들에게마저 버림받고 결국 1828년에 사임한다.

빌렐의 대안으로 샤를 10세는 중도 왕정주의자 마티냑을 출범시킨 정부를 앞세우나, 그는 강경 왕정주의자들과 입헌주의자들을 타협시키는 정책을 내놓는 데 실패한다. 1830년부터는 프랑스 혁명 중에 살해된 폴리냐크 부인의 아들인 폴리냐크 공작을 수상으로 삼은 내각을 출범시킨다. 극단적인 전제왕정 복고주의자로, 폴리냐크 공작은 보나파르트주의자들과 프랑스 혁명에 가담한 공화주의자에게 사적으로 보복을 가하는 백색테러(Terreur blanche)를 방치하고, 귀족들의 특권과 재산을 대거 회복시키기 위해 국채를 대규모로 지급했다. 하지만 조상 대대로 대토지를 상속받은 소수 대귀족을 제외한 대부분의 중소귀족들은 얼마 되지 않은 국채 매각 대금으로는 도저히 조상 전래의 토지를 매입할 수도 없었고 자연스럽게 국채 이자로 생활하는 연금 생활자가 되었는데, 이것이 샤를 10세의 의도와는 다르게 중소귀족들을 도시 부르주아로 재편하면서 자연스럽게 왕당파에서 입헌군주정이나 공화정으로 사상을 전환하게 만들었다.

1830년 3월, 샤를 10세는 의회의 침체적인 상태에 대응해 폴리냐크 내각에 반대하는 의원들을 처벌하겠다는 연설을 한다. 결국 의원들과 시민들의 불만은 결국 극치에 다다르고, 의원들은 입헌군주제를 요구하는 "221명의 청원서"를 발표한다. 샤를 10세는 이에 "나의 결정은 완고하다"라며 실책병크을 저지르게 되고, 결국 의원들과 시민들이 반발해, 1830년7월 혁명이 일어난다.

샤를 10세는 관심을 돌리려 알제 정복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1814년의 헌장을 근거로 왕권을 공고히하는 4가지 왕령[8]을 선포한다. 마르몽 원수가 지휘하는 부대가 시민들에 대한 사격 등으로 강경 진압에 나서긴 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게다가 나중에는 정부군도 시민들에게 가담하여 샤를 10세를 배신하게 된다. 샤를 10세는 의원들에 의해 정치권력을 박탈당하고 전제군주에서 이름뿐인 군주가 된다는 통고를 받는다. 이에 샤를 10세는 실권없는 군주 되길 거부하고 손자 샹보르 백작 앙리에게 양위하여 앙리 5세로 즉위시킨 다음에 오를레앙 공작 루이필리프를 섭정으로 삼으려 했으나 이미 대세가 완전히 기울어졌고 오를레앙 공작은 섭정에 만족할 생각이 없어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르봉 왕가의 친척인 오를레앙 공작이 왕위에 올랐다. 10새가 된 10세

2.3. 망명지에서의 사망

샤를 10세는 프랑스에서 추방되어 망명길에 올랐는데 영국에 망명하다가 프란츠 1세의 초청으로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망명했으며 프라하에 정착해서 살았으나 끝내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1836년에 사망했다. 이 때문에 그는 생 드니 대성당에 묻히지 못하고 사망한 곳인 괴르츠(현 슬로베니아 노바 고리차)에 묻혔다.[9] 여담으로 샤를 10세는 프랑스 밖에 무덤이 있는 유일한 프랑스 왕이다.

정작 슬로베니아는 먹고 살기도 빠듯하다 보니 그의 무덤이 자국 영토에 있는 줄도 몰랐는데, 2016년 프랑스의 어느 단체에서 그의 묘를 반환하라는 요청이 들어왔고, 별로 내세울 것 없는 국경마을인 노바 고리차에서는 절대 내놓을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프랑스에서 인기가 있었던 왕이 아니었던 관계로 더 이상의 요구는 없었기 때문에, 슬로베니아는 팔자에도 없던 외국 왕의 무덤을 갖게 되었다.[10] 나름 왕릉인 관계로, 관광명소가 되어 그때까지는 아무도 찾지 않던 마을 성당에 1년에 1만 5천 명이 찾게 되었다고 한다.

3.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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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마리 테레즈

1773년 비토리오 아마데오 3세스페인의 마리아 안토니아 페르디난다의 딸 사보이마리 테레즈[11]와 결혼해서 2남 2녀를 보았는데 장남 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일명 루이 19세[12]), 장녀 소피, 차남 베리 공작 샤를 페르디낭, 차녀 마리 테레즈가 있었다. 딸들은 모두 요절했는데, 장녀 소피는 7세, 차녀 마리 테레즈는 태어난 그 해에 죽었다. 그나마 아들들은 딸들보다 비교적 오래 살았고 루이 16세의 살아남은 유일한 자식이자 사촌이었던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와 결혼한 장남 루이 앙투안은 자손이 없었고 암살당한 차남 샤를 페르디낭만이 외아들이자 샤를 10세의 손자 샹보르 백작 앙리 5세[13]가 있었다. 그러나 앙리 5세는 역시 자손이 없어서 부르봉 왕조 직계는 단절되고 말았다. 그래서 방계이자 루이 13세의 후손으로 먼 친척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 1세가 뒤를 잇게 되었다. 참고로 여계로 갈 경우 부르봉파르마 계통[14]로 이어지는데 이 가문의 당주들 중 하나이자 카를리스타 파의 대표인 카를로스 우고(5대손)는 1961년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자신의 사후에 왕정 복고가 될 것임을 선언하고 후안 카를로스와 우고 중 하나를 차기 스페인 왕 후보로 지명하려고 했을 때 후안 카를로스가 지명된 것에 앙심을 품었다. 더불어 이 때 프랑코가 2차 바티칸 공의회로 인해 가톨릭과도 사이가 벌어져서 이 사람은 극우반동주의(+나바라 분리주의)였던 카를리스타 파를 이끌고 스페인 공산당과 녹색당에 합류해서 연합 좌파를 결성했다. 보르본 왕조 참조. 다만, 남자 직계는 단절되었지만, 앙리 5세의 누나 루이즈 마리 테레즈 다르투아가 파르마-피아첸차 공작으로 부르봉 왕조 방계인 카를로 3세와 혼인하여 자손을 남겼고 루이즈의 장남인 로베르토 1세가 전처 양시칠리아의 마리아 피아 공주와 후처 포르투갈의 인판타 마리아 안토니아 사이에서 무려 24명의 자식을 둬서 정력왕, 샤를 10세의 자손들은 꽤 많이 있으며 로베르토 1세의 딸 중 하나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마지막 황제 카를 1세의 아내인 지타 황후이고, 아들 중 한 명이 룩셈부르크 샤를로트 여대공의 남편인 펠릭스 공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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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루이 1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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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녀 소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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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남 샤를 페르디낭

4. 기타

아이티가 빈국이 된 결정적인 이유를 제공한 왕이기도 하다. 1804년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아이티에게 1825년 때 함대를 파견해 독립 배상금으로 1억 5천만 프랑을 물 것을 강요했다. 이 천문학적인 금액을 감당할 여력이 되지 못한 아이티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서 배상금을 9천만 금 프랑으로 깎았다. 2010년 미국 달러로 환산하면 9천만 프랑은 400억 달러였다. 이후 아이티는 1947년까지 1세기 넘게 배상금을 갚아야 했다. 1년 예산의 80%를 '배상금' 갚는 데 쓴 결과 아이티의 경제는 초토화되었다. [15]

현재까지 콜드플레이 하면 떠오르는 노래 중에 하나이자 가장 성공한 싱글 중에 하나로도 기억이 되는 노래 Viva la Vida는 샤를 10세의 비참한 최후를 담았다.
[1] 그의 절대왕정 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발언이다. 실제로 그는 입헌군주정 전환을 통보받자 주저않고 퇴위해버렸다.[2] 루이 16세가 장남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볼드체로 작성.[3] 결혼 이전[4] 2개의 공작위는 결혼 이후. 전자는 1773년, 후자는 1776년[5] 공식적으로는 앙굴렘 공작이었지만, 최초로 받았던 작위인 아르투아 백작으로 주로 불렸다.[6] 당시 공화파들에게 샤를 10세의 즉위는 재앙으로 여겨졌다. 오죽하면 차라리 루이 18세의 장수를 바랬다는 썰도 나돌 정도. 루이 18세는 생각보다 꽉 막힌 왕이 아니었다. 부르주아를 비롯한 혁명파들의 기준에서야 꽉 막힌 왕이었지 그래도 이전의 루이 14세나 15세, 16세에 비하면 굉장히 많은 양보를 한 왕이었다. 특히 루이 18세는 이렇게 양보를 하지 않으면 왕권이 위태롭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선을 넘지 않으려 애를 썼다.[7] 대관식에서부터 왕의 손길이 닿으면 병이 낫는다는 의식을 했다. 연주창이라고 하여 목 주변의 림프선이 결핵균에 의해 감염되는 질환이 있다. 이 연주창은 손길이 닿을 경우 부어오른 부위가 일시적으로 가라앉는 현상이 일어나며, 중세기에는 이를 성유로 축복받은 왕만이 일으키는 기적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왕의 즉위식에서는 연주창 환자들에게 왕이 직접 자신의 손을 환자의 목에 갖다 대는 식전이 있었다. 당장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맥베스가 거짓 왕이라는 증거로 내세운 것 중 하나가 바로 연주창을 치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8] 언론의 자유를 완전히 억압하고, 의회를 해산하고, 부르주와 등 입헌군주제에 호의적인 계급을 선거인단에서 제외하고, 의원을 새로 선출하는 왕령이다[9] 당시 노바 고리차는 오스트리아 영토로 샤를 10세가 사망한 당시 도시 이름은 괴르츠(Görz)였다. 이 지역은 이탈리아계가 다수였던 지역으로, 제1차 세계 대전오헝제국이 분할될 때 이탈리아계가 다수인 지역이 승전국인 이탈리아에게 넘어갔는데, 괴르츠 또한 이탈리아에게 넘어가면서 고리치아(Gorizia)란 이름으로 바뀐다. 헌데 이 지역은 이탈리아계가 다수이긴 하지만 슬로베니아인 또한 거주했던 곳이기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 후 이탈리아가 패전국이 되면서 이스트리아와 프리울리 지방 일부가 유고슬라비아 연방에게 넘어가면서 고리치아 외곽 일부가 유고슬라비아령이 되면서 노바 고리차(Nova Gorica)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샤를 10세가 묻힌 묘지 또한 이 때 유고슬라비아령이 된 고리치아 외곽에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 이후 유고슬라비아가 내전을 거쳐 분할되면서 현재 이 지역은 슬로베니아에 속한다.[10] 1991년 처음으로 독립한 슬로베니아는 왕이 있었던 적이 없다.[11] 남편과 달리 오스트리아의 그라츠에 묻혀 있다.[12] 원래 샹보르 백작 앙리에게 물려주려고 했는데 계승법상 이 양반을 뛰어넘어 계승하는 게 불가능해서 20분 가량 왕위에 있었다. 그래봐야 둘 다 왕으로 인정 못 받는 건 똑같다는 게 함정[13] 아버지가 죽었을 때는 아직 어머니 뱃속에 있었으므로 그가 태어났을 때는 "기적의 아이"라고 부르며 왕당파의 숭배 대상이 되었다. 정작 모친은 루이 필리프 시대에 정권 타도 음모에 연루되었다가 체포되었을 때 임신 중인 사실이 드러나 정통파의 명분에 타격을 가했다.[14] 카를 1세의 부인 지타 황후(고손녀)와 미하이 1세의 부인 안 드 부르봉파르므(5대손), 룩셈부르크의 장 대공(5대손) 역시 후손이다. 이 사람들 역시 본국에서 존경받는 왕비들이고 남편들 역시 존경을 받으니 그야말로 견부호자인 셈이다.[15] 아이티가 지금도 최빈국으로 남게 된 원인까지 제공해서 아이티는 프랑스와의 관계가 매우 좋지 못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