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치아 Gorizia Görz | |||
국가 | 이탈리아 | ||
지역 | 프리울리베네치아줄리아 | ||
면적 | 41km2 | ||
인구 | 33,584명[1] | ||
시장 | 로돌포 지베르나 | ||
시간대 | UTC+1 (서머타임: UTC+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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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어: Gorizia(고리치아)슬로베니아어: Gorica(고리차)
독일어: Görz(괴르츠)
이탈리아 북동부 프리울리베네치아줄리아에 있는 도시이며 알프스산맥의 기슭에 위치하며 슬로베니아와 접경하고 있다. 고리치아의 중심 도시며 관광, 산업, 상업의 지역 중심이다.
1919년까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였다가 이후 이탈리아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인 1945년부터 코민포름은 이탈리아와 협상하며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 양도된 구역은 노바고리차로 나뉜다. 두 도시들은 슬로베니아의 솀페테르브르토이바 마을을 포함하는 도시 지역을 구성한다.
2. 지리
고리치아는 이손초 강의 합류상과 비파바 계곡에 위치한다. 콜리오 앞에서 바라보이는 평야에 놓여있으며, 와인 생산지로 유명하다. 고리치아는 이웃하는 지역의 대부분에 영향을 끼치는 차가운 보라 바람으로부터 산등성이 북쪽으로부터 보호받는 상태이다보니 1년 내내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를 유지하며 유명 리조트들이 위치해있다.3. 어원
도시의 이름은 아마도 "작은 언덕"을 뜻하는 슬로베니아어 단어 gorica에서 생겨났으며 슬로베니아 지역에서 매우 흔한 지명이다.4. 역사
고리치아가 처음 언급되었을 때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오토 3세가 라벤나에서 작성한 문서에서 였다. 오토 3세는 고리치아 일대를 아퀼레이아의 대주교이자 프리울리 백작인 에펜슈타인 백작에게 봉토로 주었다. 에펜슈타인 백작은 1127년 자신을 고리치아 백작 그라프 폰 괴르츠라고 불렀다. 13세기 후반에 고리치아 가문은 신성 로마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귀족 가문 중 하나로 부상했다. 고리치아 가문은 고리치아는 물론이고 파도바, 트레비소, 이스트리아 반도와 티롤 일부를 자신의 봉토로 만들었다. 그러나 베네치아 공화국이 부상하자 고리치아 백국은 베네치아와 신성 로마 제국의 완충지 역할을 하였다. 베네치아는 고리치아 백국이 지배하고 있는 이스트리아 반도를 노렸고 군사력이 약한 고리치아 백국은 베네치아의 영향력 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레온하르트 고리치아가 1500년 후사없이 사망하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 1세는 고리치아를 오스트리아 대공국으로 편입시켰다. 이에 반발한 베네치아는 고리치아를 점령하려고 했으나 서쪽에서 쳐들어온 루이 12세의 프랑스군에 패함으로 고리치아 점령은 좌절되었다.그때부터 고리치아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습 영토가 되었다. 이탈리아인이 많이 이주해 상업이 융성하였으며 독일인(오스트리아인),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등 다양한 민족이 사는 다민족 도시가 되었다. 1754년 마리아 테레지아는 고리치아 백국과 그라디스카디손초를 합쳐 고리치아-그라디스카 후백국을 창설하였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랑스 제1제국의 영토로 편입되기도 하였으나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다시 고리치아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이 지역은 합스부르크 가문과 오스트리아 제국 귀족들의 휴양지였고 이 중에는 1830년 2월 혁명으로 퇴위한 프랑스의 국왕 샤를 10세도 있었다. 19세기 중반 이탈리아가 통일운동이 활발해지고 통일 이탈리아 왕국이 베네토일대를 점령하자 이에 위기감을 느낀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고리치아를 포함한 트렌토와 트리에스테. 이스트리아 반도, 달마티아에 살던 이탈리아인의 독일화를 위한 광범위한 프로젝트를 시행하였다. 이는 이 지역의 이탈리아계 오스트리아인들의 반발을 샀고 더욱더 가열차게 정부에 저항하였다. 결국 1909년에는 모든 공공 건물과 이탈리아인에게 이탈리아어가 금지되는 결과까지 낳았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이탈리아 왕국은 고리치아를 향해 공세를 시작하였고 1916년 8월 9~10일에 벌어진 고리치아 전투에서 이탈리아 왕국군 장교 1,759명과 군인 약 50,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전투에서 고리치아는 탈환하였으나 이어진 카포레토 전투에서 이탈리아 왕국군이 대패함으로 인해 다시 고리치아를 빼앗겼다. 하지만 전쟁이 협상국의 승리로 끝남에 따라 고리치아는 이탈리아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 그 이후 들어선 파시스트 정권은 고리치아에 살고 있던 슬로베니아인을 이탈리아화하는 작업을 하였다. 지명의 이탈리아어화를 시작으로 1927년부터 슬로베니아어 성을 이탈리아어 성으로 강제로 바꾸게 하였고, 1929년에는 모든 수준의 도시 공립학교에서 슬로베니아어 교육을 금지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 쯤 슬로베니아 제9군단의 게릴라들이 고리치아를 점령하였다. 게릴라들은 이 지역의 이탈리아인들을 숙청되었고 그 수는 약 665명에 다다랐다. 파리 조약으로 고리치아의 5분의 3을 유고슬라비아에 양도하였지만 인구의 85%와 역사적인 중심지와 도시 대부분의 지역은 이탈리아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이에 따라 고리차아는 유고슬라비아 통치 하에 들어간 구 이탈리아 영토에 살던 이탈리아인들의 정착지가 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고리치아 동쪽에 노바고리차를 건설하기 시작하였고 국경에는 벽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서방에서는 고리치아를 작은 베를린으로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유고슬라비아는 제3세계의 지도자격인 국가라서 이탈리아와 영원히 적대적인 정책을 고수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결국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는 1975년 오시모 협정을 맺음으로 양국 사이의 적대적 긴장감을 완화하고 고리치아와 노바고리차의 문화와 스포츠 교류를 활성화하였다.
유고슬라비아가 붕괴되면서 노바고리차는 슬로베니아의 영토가 되었고 2007년 12월 21일 슬로베니아가 솅겐 협정에 가입함으로 인해 두 도시는 어떠한 검문도 없이 자유롭게 오고 갈수 있게 되었다.
5. 관광
- 오슬라비아 전쟁 기념관 (Oslavia War Memorial) : 1938년 이손초 전투에서 전사한 이탈리아 왕국군 군인들을 기리기 위해 만든 기념비로 매년 8월 8일 제6차 이손초 전투 중 고리치아 함락을 기념하는 날에 전쟁 희생자를 기리는 의식을 진행한다.
- 고리치아 성 (Castello di Gorizia) :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해발 115m의 언덕에 세워진 요새로 현재 고리치아 성에는 고리치아 중세 박물관이 위치해 있다.
- 고리치아 대성당 (Cattedrale metropolitana di Gorizia) : 13세기에서 14세기 사이 건축된 성당으로 아퀼레이아의 대주교였던 힐러리와 타티아누스에 헌정되었다.
- 트란살피나 광장 (Piazza della Transalpina) : 이탈리아와 슬로베니아의 국경을 가로지르는 광장으로 슬로베니아에서는 유럽 광장이라 부른다. 국경이 나눠지기 전에는 이 광장에는 고리치아역이 존재했다.
[1] 2023년 1월 1일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