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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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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발루아앙굴렘 왕조 제5대 국왕
앙리 3세
Henri III
파일:1280px-Quesnel_Henry_III_of_France_in_Polish_hat.jpg
출생 1551년 9월 19일
프랑스 왕국 퐁텐블로 궁전
사망 1589년 8월 2일 (향년 37세)
프랑스 왕국 생클루 성
재위기간 프랑스 국왕
1574년 5월 30일 ~ 1589년 8월 2일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1573년 5월 16일 ~ 1575년 5월 12일
서명 파일:앙리 3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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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02395> 가문 발루아앙굴렘 가문
이름 알렉상드르 에두아르 드 프랑스
(Alexandre Édouard de France)
아버지 앙리 2세
어머니 카테리나 데 메디치
형제자매 큰 형 프랑수아 2세, 큰누나 엘리자베트, 작은누나 클로드, 작은 형 루이, 셋째 형 샤를 9세, 여동생 마르그리트, 막내 남동생 프랑수아
배우자 로렌의 루이즈 (1575년 결혼)
종교 가톨릭 }}}}}}}}}
1. 개요2. 생애
2.1. 제3차 위그노 전쟁(1568~1570)과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선출2.2. 프랑스 국왕 즉위와 제5차 위그노 전쟁(1574~1576)2.3. 가톨릭 동맹(신성동맹)과 제6차 위그노 전쟁(1576~1577)2.4. 제7차 위그노 전쟁(1579~1580)2.5. 제8차 위그노 전쟁(세 앙리의 전쟁, 1587~1589)
3. 왕비 로렌의 루이즈 4.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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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국왕. 앙리 2세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4남이자 프랑수아 2세의 동생이다.

발루아-앙굴렘 왕조의 제5대 왕이자 마지막 왕이다. 사후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한 앙리 4세에 의해 부르봉 왕조가 개창되었다.

2. 생애

앙리 2세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4남[1]으로 큰 형 프랑수아 2세, 작은 형 샤를 9세가 모두 후계자없이 사망하면서 프랑스 왕이 되었다. 두 형 프랑수아 2세, 샤를 9세, 동생 알랑송 공작 프랑수아를 제치고 모친 카트린의 총애를 받으며 자랐다. 그 영향 때문인지 발루아 왕조의 전통대로 사냥과 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다른 세 형제들과 달리, 검술에 능하고 스포츠에 약간의 흥미만 가진 것 외에는 외가인 메디치 가문의 취향인 예술독서를 선호했다.

2.1. 제3차 위그노 전쟁(1568~1570)과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선출

15세인 1566년 앙주 공작이 되었으며, 1568년 제3차 위그노 전쟁 당시 왕실 군대의 지휘관이 되어 1569년 3월 자르냐크 전투에서 콩데 공작 루이 드 부르봉을, 같은 해 10월 몽콩투르 전투에서 가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의 위그노(신교) 군대를 격파해 군사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보여주었다. 그 과정에서 위그노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콩데 공 루이 드 부르봉을 죽이고 모욕한 일로 위그노의 증오를 사게 되었다. 1570년 스페인을 견제하고자 잉글랜드 왕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와의 약혼이 오갔으나, 백년전쟁 이후 골이 깊어진 양국간의 감정으로 인해 없던 일이 되었다. 이 혼담은 나중에 그의 남동생 알랑송 공작 프랑수아에게도 갔으나, 끝내 무산되었다.

1572년 7월 7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군주였던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가 자녀 없이 사망하면서 야기에우워 왕조의 대가 끊기자 모후 카트린은 공석인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에 총애하던 앙주 공작 앙리를 내세웠다. 본래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세습군주제였고, 폴란드 왕국은 선거군주제였으나 야기에우워 왕조가 준세습화한 상황이었는데 대가 끊기면서 양국 다 선거군주제로 전환되었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의 아들 에른스트와 경쟁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원래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귀족들은 전 왕이었던 지그문트 2세의 누이동생이자 지그문트 1세의 딸이었던 안나 야기엘론카와 앙주 공작 앙리가 결혼할 거라고 생각해서 밀어주었다. 그러나 그는 머나먼 폴란드로 떠나는 것을 주저했다.

1572년 8월 24일 누이동생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나바르 국왕 앙리 드 부르봉[2]의 결혼식 첫날밤인 성 바르톨로뮤 축일에 대학살이 일어나 콜리니 제독을 비롯한 위그노 대부분이 가톨릭 교도들에게 살해당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당시 앙주 공작 앙리는 폴란드 국왕에 선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학살이 일어날 때까지 폴란드로 떠나지 않았으며,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학살 자체가 당시 샤를 9세 가까이에 접근하려 했던 개신교 신도(위그노)들의 수뇌부 중 한 명인 콜리니 제독을 제거하기 위한 카트린과 기즈 공작 가문이 결탁한 음모였고, 앙주 공 앙리가 다른 형제들을 제치고 모후인 카트린의 총애를 받은 것을 볼 때 그 역시 성 바르톨로뮤 축일 대학살의 전모를 간접적으로 알고 있었거나 관여한 의혹을 받고 있다.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대학살 이후에도 여전히 제4차 위그노 전쟁(1572~1573) 중인 프랑스를 떠나려 하지 않자 결국 샤를 9세의 최후 통첩을 받고, 1574년 측근 몇 명만을 대동한 채 독일 북부를 통과하여 폴란드로 떠났다. 이 과정에서 개신교 세력이었던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 비롯한 독일 개신교 제후들의 위협을 받았다. 하지만 1월 25일 폴란드 왕국의 크라쿠프에 도착했고, 2월 21일 바벨 대성당에서 폴란드 국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인 '헨리크 발레지'로 즉위했다.

그러나 23세의 젊은 나이로 왕위에 오른 그로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왕권을 어떻게 행사할지 몰랐기에 각 조항을 승인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고, 지그문트 2세 당시 체결한 루블린 합병으로 모든 권한 등을 인정받은 폴란드 귀족과 고위 성직자들은 그에게서 더 많은 특혜를 얻어내려고 했으며, 결국 바르샤바 근교의 카미엔에서 자신의 폴란드어 이름을 딴 헨리크 조약을 채택해 왕으로서의 모든 권한을 박탈당하고, 수용한 규정에 따라야만 했다.

결국 싫다고 해도 억지로 외국의 왕이 되었으나 왕권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허수아비가 되어버린 것(...)이다. 계획대로 안나 야기엘론카와 결혼했으면 프랑스-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을 이루었겠지만 절대군주정인 프랑스에서 앙주 공작으로 살았던 앙리(헨리크)는 진절머리가 났던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가 헨리크 조약은 폴란드 왕위 세습도 금지했으니 그가 죽으면 어차피 동군연합은 자동으로 해체됐을 것이다.

앙리의 왕권을 제한했던 헨리크 조약은 다섯 조항으로 되어 있었다. 첫째, 국왕은 의회인 세임[3]에 의해 선출되며, 세습에 의해 계승되지 않는다. 둘째, 국왕은 세임을 2년에 한 번 6주 간 열게 한다. 셋째, 국왕은 세임의 동의없이 조세와 관세를 부과할 수 없다. 넷째, 국왕은 세임의 동의없이 총동원을 할 수 없다. 다섯째, 국왕은 세임의 동의없이 선전포고와 정전을 선언할 수 없다. 한 마디로 세임에 의해 권력이 매우 제한된 완전한 꼭두각시 국왕이었다.

2.2. 프랑스 국왕 즉위와 제5차 위그노 전쟁(1574~1576)

앙주 공작 앙리가 부재중인 사이, 샤를 9세와 막내동생인 알랑송 공작 프랑수아가 다투자 많은 위그노들이 보호와 지지를 구하면서 알랑송 공작 프랑수아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1574년 2월에 생 제르망 쿠데타 미수사건이 일어났는데 그 목적은 궁정에 억류된 나바르 왕 앙리와 콩데 공 앙리의 구출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북부의 노르망디, 서남부의 보르도 등지에서 위그노들이 봉기하면서 전쟁이 다시 재개되었다. 앙주 공작 앙리가 폴란드의 국왕으로 즉위한 지 3개월 후인 1574년 5월 30일,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대학살로 큰 충격을 받아 와병 중이었던 형 샤를 9세가 사망하자 왕태후 카트린이 앙주 공작 앙리가 귀국하기 전까지 섭정으로 취임한다고 선언했다. 앙리는 제5차 위그노 전쟁(1574~1576) 중이었던 프랑스의 왕위 계승을 위해 6월 18일, 프랑스로부터 같이 동행했던 측근들과 함께 모의해 미련없이 폴란드 왕위를 버리고, 급히 서둘러 크라쿠프 바벨 성에서 도망쳤다. 다음날 아침 신성 로마 제국의 모라바 변경백령에 도착한 후, 오스트리아 대공국으로 가 막시밀리안 2세의 환대를 받고, 가톨릭 세력권인 남부 독일을 경유해 베네치아 공화국, 만토바, 페라라이탈리아 반도 북부를 유람하는 듯이 거치면서 사보이아 공국토리노를 경유해 여유롭게 사촌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를 만난 후 9월 2일 샹베리[4]에 도착하여 동생 프랑수아와 합류하고, 이어 9월 6일 리옹에 도착, 모후 카트린과 만났다. 귀국한 앙리는 랑그도크 지방 총독이던 몽모랑시 당비르의 배반에 직면했다. 불만파(폴리티크파)에 속했던 당비르는 프랑스 남부의 위그노와 결탁하고 발루아-앙굴렘 왕실에 등을 돌렸다.

1575년 2월 21일 랭스에서 대관식을 치른 후, 앙리 3세는 이틀 뒤 로렌 가문의 루이즈 드 보데몽과 결혼했다. 이 때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은 그가 다시 폴란드-리투아니아로 돌아오기를 간청했지만 앙리 3세가 돌아오지 않자 결국 포기하고, 새로운 국왕 선거를 치러 에르데이 공국의 바토리 이슈트반을 선출했고, 그가 안나 야기엘론카와 결혼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스테판 바토리[5]로 즉위하였다.

앙리 3세는 프랑스 왕위에 오르면서 즉위 이전과 다른 모습들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원래 그는 똑똑하고 지적이었으며 세련된 성격이라 모후 카트린이 매우 총애했는데, 왕위에 오르면서 '미뇽(Les Mignons)'이란 불린 총신들에 대한 지나친 총애, 동성애적인 성적 취향, 조각배를 타고 강을 오르락 내리락하는 등의 기이한 행각, 그리고 과도한 사치 등으로 비난을 받았다. 또 카트린과 더불어 사악하고 간사한 인물로 인식되어 즉위 전부터 많은 이들로부터 무차별적인 미움을 받아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고, 프랑스 전역을 다시 종교전쟁의 대혼란으로 몰고 갔다.

앙리 3세는 1575년 4월에 협상을 모색했지만 9월에 알랑송 공 프랑수아가 파리의 궁정에서 탈출, 자신의 영지 내에 위치한 드뢰로 도망쳐, 지지자들을 모은 후 폴리티크파의 두목이 되어 가톨릭계 신성동맹의 수장인 3대 기즈 공작 앙리 1세 드 로렌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한편 팔츠 선제후 루트비히 6세의 동생 요한 카지미어까지 위그노들을 돕기 위해 4,000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프랑스 영내로 진입해 들어오자 앙리 3세는 황급히 프랑수아와 7개월간의 휴전을 협상하여 독일 침략군을 라인강 동부에 묶는 조건으로 500,000 리브르의 지불을 약속했지만 화평은 확실한 것이 아니었다. 1576년 2월 3일에 나바르 왕 앙리와 그의 사촌동생인 콩데 공 앙리 드 부르봉이 파리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하여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부인하고, 다시 위그노로 복귀하며 나바르의 베아른에서 다시 세력을 결집하기 시작했다. 3월에 앙리 3세는 알랑송 공 프랑수아와 위그노측의 조건을 받아들여 '왕제 전하(王弟殿下)의 화친'이라고 불린 <볼리유 칙령>을 공표했다. 이 칙령으로 수도 파리 성벽 내외의 모든 장소에서 프로테스탄트의 공식적인 예배가 인정되었고, 위그노의 안전보장도시가 8개로 늘어났다.

2.3. 가톨릭 동맹(신성동맹)과 제6차 위그노 전쟁(1576~1577)

<볼리유 칙령>은 위그노, 즉 칼뱅파에 대해 많은 양보를 한 것이어서 이에 반대하는 가톨릭 과격파인 기즈 공 앙리가 가톨릭 동맹을 결성했기에 단명으로 끝나고 말았다. 기즈 가는 오랫동안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청했고, 기즈 공 앙리와 그의 친족들은 가톨릭 동맹에 충성을 맹세하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했다. 또한 가톨릭 동맹은 도시 중산층의 많은 지지를 받았다.

나바르의 앙리가 탈출한 사건을 계기로, 사치에만 몰두하는 앙리 3세 드 발루아-앙굴렘, 가톨릭 동맹의 수장이자 카롤루스 왕조의 후예라 주장하며 프랑스의 왕위를 노리는 앙리 드 기즈[6], 발루아-앙굴렘 왕가와 먼 친척 관계이자 앙리 3세의 매부였던 나바르 왕 앙리 드 부르봉 등이 서로 혈전을 벌인 위그노 전쟁이 시작되었다.

1576년 블루아에서 소집된 삼부회에서 앙리 3세에게 원조금을 내놓기를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12월엔 푸아티에와 기엔에서 위그노들이 무장봉기했다. 기즈파가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로부터 확고한 지원을 얻은 한편으로 위그노들도 남서부에 강력한 기반을 구축했다. 그들은 또 국외의 신교도 국가의 지원을 받았지만 실제로는 잉글랜드와 독일 신교 제후국들이 소수의 군대만을 파견하는데 지나지 않았다. 이번 전쟁에선 왕제인 앙주 공작 프랑수아(전 알랑송 공 프랑수아)와 당비르 등의 폴리티크파가 가톨릭 동맹에 참가하여 전황은 위그노에게 불리했다. 결국 앙리 3세와 위그노는 <볼리유 칙령>에서 얻은 양보 대부분을 철회하고, 가톨릭 측은 동맹을 해체하는 베르주라크 평화조약(1577)을 체결하여 6일 후엔 이를 확인하는 <푸아티에 칙령>이 발효되었다.

2.4. 제7차 위그노 전쟁(1579~1580)

하지만 왕제인 앙주 공 프랑수아와 그 지지자들이 네덜란드의 대스페인 반란에 개입해 전쟁을 치르자 발루아 궁정은 다시 혼란속에 빠져들었다. 한편 지방의 정세는 가톨릭과 위그노가 각자 자위권을 위해 무장하여 무질서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1579년 11월에 콩데 공 앙리 드 부르봉이 라 페흐를 함락하여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 '연인들의 전쟁'이라 불린 이 제7차 위그노 전쟁은 1580년 11월에 앙주 공 프랑수아와의 협상에 의해 르 플룩스 조약이 체결되어 종결되었다.

2.5. 제8차 위그노 전쟁(세 앙리의 전쟁, 1587~1589)

1584년 2월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벌이고 있었던 네덜란드의 '국부' 오라녜 공 빌렘에 의해 네덜란드 왕으로 추대되었다가 안트베르펜의 참변으로 많은 병력을 잃고, 실의에 빠져 파리로 돌아온 동생 프랑수아가 죽으면서 프랑스 왕국의 왕위 계승 과정이 새로운 국면에 빠지고 말았다. 당시 앙리 3세의 슬하에 뒤를 이을 자식들이 없었고, 다른 형제들도 후사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왕위계승권은 앙리 3세의 매부이자 위그노의 지도자였던 나바르의 왕 앙리 드 부르봉에게 넘어갔다. 이에 국내외의 가톨릭은 프랑스의 왕위가 개신교도인 나바르의 앙리에게 넘어가는 것에 반발했고, 가톨릭 동맹을 다시 일으켜 나바르의 앙리의 숙부이긴 했지만 가톨릭 신자이며 노르망디의 루앙 추기경이었던 샤를 드 부르봉을 환속시켜 앙리 3세의 후계자로 내세우는 등 국내 정세가 불안정해졌다. 급기야 1585년 7월 18일 가톨릭 동맹과 손을 잡아 발루아 왕가의 왕권을 강화시키려하는 태후 카트린의 설득으로 위그노들의 자유권을 폐기하는 느무르 조약을 체결했으나 선포 이후 군중들의 환희에 답하지 않고 떠났기에 가톨릭의 경멸을 받기 시작했고, 이는 종교의 자유을 박탈당한 위그노로부터도 반발을 불러 일으켜 나바르의 앙리와 독일의 개신교 제후들로부터 경고를 받게 되었다.

결국 1년 6개월이 지나 프랑스 전역이 다시 한번 내전으로 치닫게 되었고, 이 내전이 바로 오늘날 세 앙리의 전쟁이라 불린 제8차 위그노 전쟁(1587~1589)이었다. 전쟁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앙리 3세는 여전히 사치에 몰두하고 있었으며 쿠트라 전투에서 총신인 국왕군 총지휘관 주아이외즈 공작을 비롯한 국왕군 8,000명이 궤멸당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등 점차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유하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프랑스의 왕위를 노리는 앙리 드 기즈의 공작으로 수도 파리 내에서 국왕으로서의 위신이 실추되기 시작했다. 1588년 5월 12일, 결국 파리에서 앙리 드 기즈의 농간으로 보이는 시민 봉기가 일어나자 모후인 카트린이 앙리 드 기즈와 협상을 하는 동안 측근들을 데리고 파리를 탈출해 샤르트르로 피신하고 말았다.

앙리 3세가 파리를 탈출하면서 유리해진 것은 앙리 드 기즈였으나, 그 또한 파리를 점거하면서 가톨릭 동맹 내에 발생하는 파벌싸움을 제어하기 힘든 사태가 벌어지자 두 사람의 앙리는 태후 카트린의 중재하에 다시 협상을 했다. 1588년 7월 19일 앙리 3세는 11개의 조항으로 된 루앙 연맹조약을 발표하고, 3일 뒤 이 조약은 파리의 대법원에 등록되었다. 그가 발표한 연맹조약 안에는 위그노들에게 느무르 조약보다 더 가혹한 조항이 있었고, 이는 앙리 3세에게도 가혹한 것으로 부르주, 오를레앙 등 4개의 도시를 가톨릭 동맹에게 제공하는 것 등이었다. 이는 순전히 앙리 드 기즈와 가톨릭 동맹의 권한을 더욱 강화시켰다. 10월 16일 루앙 연맹조약을 명문화하기 위해 블루아에서 삼부회를 개최하면서 앙리 1세 드 기즈와 그의 동생인 로렌의 추기경 루이 2세 드 기즈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고, 12월 23일 암살 계획을 실행해 앙리 드 기즈를 자신의 방으로 불러 살해하고, 그의 동생인 루이 또한 살해한 후, 가톨릭 동맹이 내세운 자신의 또 다른 후계자인 샤를 드 부르봉을 포함한 기즈의 측근들을 체포했다.

1589년 1월 5일 앙리 3세의 정치적 충고자이면서 후원자였던 태후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사망하면서, 암살당한 앙리 드 기즈와 루이 드 기즈의 동생이었던 마옌느 공작 샤를을 비롯한 가톨릭 동맹에 의해 왕은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프랑스의 대도시 대부분이 공개적으로 국왕 앙리 3세에게 적대감을 표했으며, 삼부회마저 등을 돌린데다 표면적으로나마 충성을 표하던 파리의 대법원 또한 1월 16일, 16인 위원회에 의해 해산되고 가톨릭 동맹을 대변하는 새 대법원이 세워지면서 프랑스 전역의 고등법원마저 가톨릭 동맹편에 서는 등 앙리 3세의 모든 권력과 명예가 실추되었다. 가톨릭 동맹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은 앙리 3세는 그나마 손을 잡을 수 있는 존재가 위그노의 수장인 나바르 왕 앙리 드 부르봉 밖에 없었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나바르의 앙리와 손을 잡았다. 그리고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앙리 3세는 블루아에서 투르로 거처를 옳겼다. 1589년 4월 3일 두 사람의 앙리는 1년 기한의 공식적인 조약을 체결한 후 같은 해 4월 29일에 각자 조약을 발표했다. 5월 8일 가톨릭 동맹군이 투르로 쳐들어왔으나, 앙리 드 부르봉이 이끌던 위그노군에 의해 앙리 3세는 구원을 받았다. 이후 앙리 3세는 나바르의 앙리와 함께 수도 파리를 탈환하기 위해 2개월 동안 준비를 한 후 같은 해 7월 말에 4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파리 성벽에 도달한 후 파리 서쪽 생클루에 위치한 레츠 백작의 저택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1589년 8월 1일 파리가 포위되는 와중에 브레앙 백작이 보낸 자라고 말한 도미니코회수도자 자크 클레망(Jacques Clément)을 맞이했다. 앙리 3세가 자크 클레맹이 갖고 온 편지에 주의를 팔고 있는 사이, 자크가 꺼내서 휘두른 단검에 복부를 심하게 찔리는 부상을 당했고, 곧 그를 밀쳐내며 경비병을 불렀다. 이에 경비병들이 달려와 칼을 휘두르며 저항하는 자크 클레맹을 죽이고, 의사를 불렀다. 급히 달려온 의사의 응급 처치를 받았지만 앙리 3세는 이미 심한 중상을 입었기에 병상에 누웠다. 상태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고 하나 문병차 온 후계자인 앙리 드 부르봉에게 가톨릭으로 다시 개종할 것을 권했다. 더불어 많은 사람들에게 앙리 드 부르봉에게 충성할 것을 명령한 뒤 구술로 왕비와 아직도 자신에게 복종하는 지방의 총독 및 제후들에게 편지를 보낸 이후 다음날 오전 2시경에 숨을 거두었다. 이로써 파란만장한 역사를 이어오던 발루아 왕조가 완전히 단절되었다.

앙리 3세에게 후사는 없었고, 그의 뒤를 이어 가장 가까운 친척이자 매부인 앙리 드 부르봉이 즉위해 부르봉 왕조의 초대 국왕 앙리 4세가 되었다.

3. 왕비 로렌의 루이즈[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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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3년 4월 30일 - 1601년 1월 29일 (48세)

로렌의 루이즈는 로렌 공작 앙투안의 차남이자 메르쾨르 공작이었던 로렌의 니콜라와 그의 첫 번째 아내인 에그몬트의 마르그리트의 막내딸이었다. 이후 루이즈가 고작 한 살 때 어머니 마르그리트가 사망하면서 아버지 니콜라는 사부아느무르[8]의 잔과 재혼했다. 루이즈의 첫번째 계모였던 사부아느무르의 잔은 후술된 카트린과 정반대로 루이즈에게 양질의 교육을 시켜주었고, 이후 루이즈가 10세가 되었을 때 낭시의 궁정에 사교계 데뷔를 시켜줄 정도로 의붓딸을 아꼈다. 하지만 그렇게 루이즈를 아껴주던 잔도 루이즈가 15세 때 사망했다. 이후 니콜라는 자신의 5촌 조카인 로렌-오말의 카트린[9]과 재혼했다. 의붓딸 루이즈보다 고작 세 살 연상이었던 카트린은 자신과 거의 동년배인 의붓자식들을 매우 경계했고, 아버지 니콜라마저 어린 후처에게 동조하며 전처 소생의 자식들을 모질게 대했다. 이렇게 루이즈는 아버지와 두번째 계모 밑에서 구박받으며 불행하게 살다가, 앙리 3세의 왕비가 되면서 말그대로 진정한 동화 속 신데렐라가 되었다.

사실 앙리 3세는 콩데 공작부인 마리 드 클레브[10]라는 여인을 결혼까지 생각할 정도로 사랑했지만, 공작부인이란 직위에서 알 수 있듯이 마리 드 클레브는 유부녀였기 때문에 결혼에 실패했다. 이후 마리 드 클레브는 젊은 나이에 일찍 사망했다.

그렇게 사랑에 실패하고 왕위에 오른 앙리 3세는 예전에 봤던 로렌의 루이즈에게 갑작스럽게 청혼하며 그녀와의 결혼을 결정했다. 루이즈는 엄연히 귀족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왕비가 될 정도의 고위 귀족은 아니었기 때문에[11], 앙리 3세의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물론 당대의 호사가들까지 이 결혼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래도 앙리 3세와 루이즈는 서로를 아주 열렬히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무난한 결혼생활을 영위했다. 특히 루이즈는 자신을 불행한 처지에서 구해주고, 왕비로까지 만들어 준 남편을 매우 존경했고, 야심만만한 친정식구들을 말리며 정치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기에 시어머니 카트린을 흡족케 했다. 하지만 루이즈는 앙리 3세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낳지 못했기 때문에, 후계자가 없다는 사실에 적지않은 스트레스를 받았다.[12] 이후 앙리 3세가 젊은 나이에 암살당하자 루이즈는 매우 슬퍼했고, 전통적으로 프랑스 왕비의 상복인 흰색 드레스를 입고 남편의 죽음을 기리며 지냈다.

또 다른 가족 관계로는 이복여동생인 로렌의 마르그리트(Marguerite de Lorraine)가 있었는데[13], 마르그리트는 훗날 앙리 3세의 오른팔이자 숨겨진 동성애 첩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던 조외즈 공작 안 드 조외즈[14]와 결혼했다.[15]

4. 대중매체

황미나 만화인《불새의 늪》에서 매우 병약한 모습으로 나온다. 기즈 공작을 죽이지 않으면 짐이 죽는다라고 생각하며 암살로 위장하여 죽였고 역사처럼 칼에 맞아 죽는데 곁에 달려온 매부 앙리 4세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가톨릭으로 개종하란 말을 남긴다.

영화 <여왕 마고>에서는 배우 파스칼 그레고리가 역할을 맡았다. 유약한 형 샤를 9세를 죽이기 위해 계속 기회를 엿봤으며 샤를 9세가 사망하면서 그 뒤를 이었다.

근육조선》에선 앙리 3세는 당시 프랑스의 국왕으로, 내전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자신의 위엄을 살리기 위해 조선의 사절단을 초청한다. 현대의 파리도 관광객들에게 충격을 준다고는 하지만, 씻으면 병균이 들어온다며 절대 씻지 않고, 정상적인 식재료인 토마토나 감자 등을 독이 있다며 먹지 않는 당시 프랑스의 모습에는 현대보다 비교적 비위생적인 환경인 조선인들마저 충격을 느낀다. 게다가 앙리 3세는 내전 중인 나라에서 위신을 세우겠다며 사치를 즐기는 모습을 보여 준다. 사냥은 별다른 목적 없이 육식동물은 쫒아내고 순한 초식동물만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이는 식이라 육식동물들이 먹이가 없어 민가를 습격할 게 뻔하고, 심지어 백성의 소와 말을 징발해 사냥한다. 또한 강가에 별장을 짓고, 주변 사람들을 뱃놀이에 동원하기까지 한다. 보다못한 유운룡이 평소에 먹지 않던 식재료로 맛있는 요리를 먹여서 마음을 바꿔보기 위해 센 강의 잡어를 재료로 부야베스를 만들어 대접했지만 맛있다고 인정하면서도 기름이 부족하다고 트집을 잡는다. 그러면서도 인정한 것이 자존심 상했는지 유운룡에게 프랑스의 요리를 배워가라고 명했는데, 기름에 절은 레시피를 강요하고 담백한 조선식 레시피는 한사코 인정하질 않는다. 결국 유성룡이 아예 작정하고 엄청난 기름을 넣은 요리를 대접하자 이것이 진미라고 걸신들린 듯 흡입하는 추태를 보인다.[16]

그런데 이때 본인의 군대가 대패를 하고[17] 귀족과 민초가 손을 잡고 몰려온다는 비보를 듣고 망연자실한 반응을 보이고, 조선 사신단에 섞여 수도를 버리고 피난한다. 반란군 수장에게 암살자를 보냈다는 말에 어처구니를 잃은 유성룡이 쌍욕만 안 했을 뿐이지 제정신이냐며 극언을 퍼붓기까지 한다.[18] 게다가 어머니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를 푸대접하는 꼴을 보인다. 조선인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 만도 못한 혼군이라는, 한자문화권에서 군주에게 내릴 수 있는 최악의 악평을 남긴다. 결국 폐위뒤어 수도원에 유폐되었다 독살당한다.

[1] 차남 루이가 요절했기에 사실상 3남이었다.[2] 훗날의 앙리 4세[3] 프랑스삼부회에 해당한다.[4] 현재는 프랑스령이나 당시에는 사보이아 공국 영토였으며 토리노 이전 사보이아 공국의 수도였다.[5] 이 사람의 누나 언너가 그 악명높은 바토리 에르제베트의 어머니이다.[6] 여담으로 기즈 가문의 본가는 로렌(로트링겐) 가문이었는데 훗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6세로렌 공작 프랑수아 에티옌을 자신의 사위로 맞이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로렌 가문이 카롤루스 대제의 후손이라는 점 때문이었다.[7] 가톨릭 동맹의 수장이었던 앙리 드 기즈 공과는 6촌 지간이었다.[8] 사보이아 가문의 프랑스계 방계.[9] 초대 기즈 공작 클로드 드 로렌의 삼남인 오말 공작 클로드의 딸로, 대왕 앙리 4세의 정적이었지만 훗날 총신이 되는 마옌느 공 샤를 드 로렌의 사촌누나였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남편 니콜라는 카트린의 당숙부였으며, 의붓딸 루이즈는 같은 항렬인 6촌 자매였다.[19] 또한 카트린의 고모는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5세의 왕비이자 메리 스튜어트의 어머니인 마리 드 기즈였다. 즉, 메리 스튜어트는 카트린의 고종사촌.[10] 앙리 3세 이후 왕위에 오르는 앙리 4세사촌이기도 하며, 헨리 8세의 4번째 왕비인 클레베의 앤육촌이었다.[11] 정확히 말해서 루이즈의 친정인 로렌 가문은 엄연히 통치 가문과 혼인이 가능한 명문가였으나, 루이즈는 직계와 너무 먼 방계였기 때문에 '귀천상혼'이라는 이야기가 나돌았다.[12] 앙리 3세가 동성애자였다는 소문도 있지만 정부가 없었던 것도 아니라서 진실은 저 멀리.[13] 아버지 니콜라와 그의 두번째 부인 사부아느무르의 잔 소생.[14] Anne de Joyeuse, duc de Joyeuse(1560년~1587년 10월 20일).[15] 조외즈 공작은 마르그리트와 결혼 후 6년 뒤에 전쟁에서 전사했다.[16] 그리고 이때 만들어진 요리는 프랑스에서 조선식 요리라며 퍼진 모양이라, 면직물을 팔기위해 프랑스에 들렀던 프랜시스 드레이크가 시카고 피자를 먹고 기름범벅의 미친 요리라며 영국인이 프랑스 요리를 디스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였다. 더군다나 문제의 요리기법이 현대 시점에까지 이어져서 근육조선 세계관의 프랑스는 기름에 절은 요리가 대세가 되어 비만 등의 이유로 국민 평균수명이 저하되는 부작용을 겪고 있다고 언급되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를 정복한 히틀러가 프랑스 놈들은 비계를 처먹는다며 깔 정도로 심각한 모양.[17] 심지어 이때 내전 중이었으나 동방의 사절단이 왔다고 해서 구체적인 합의는 없었지만 일시적인 휴전이 이루어진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 먼저 공격을 하고 그도 모자라서 아직 싸우기도 전에 승전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결국 이 승전연 중간에 패전 소식이 들어오면서 반란이 일어난다.[18] 수도를 버리고 도주한, 사실상 패배한 상황에서 수장만 암살한다고 권력이 다시 돌아올 리가 없기 때문, 오히려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마저 등 돌리게 만드는 악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