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18:54:54

스테판 바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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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fff>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트란실바니아 공국 제2대 공
스테판 바토리
Stefan Batory
파일:Stefan_Batory.jpg
이름 헝가리어 바토리 이슈트반
(Báthory István)
폴란드어 스테판 바토리
(Stefan Batory)
리투아니아어 스테포나스 바토라스
(Steponas Batoras)
출생 1533년 9월 27일
트란실바니아 공국 실라지솜요[1]
사망 1586년 12월 12일 (향년 53세)
폴란드-리투아니아 가르디나스[2]
재위 폴란드 왕국의 왕,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대공
1576년 5월 1일~ 1586년 12월 12일
트란실바니아 공
1571년 ~ 1576년
배우자 안나 야기엘론카 (1576년 결혼)
아버지 바토리 이슈트반
어머니 텔레그디 커털린
형제 에르제베트, 언너[3], 안제이, 크리스토프
서명
파일:스테판 바토리 서명.svg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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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제2대 공(프린스)이자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군주. 배우자인 안나 야기엘론카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공동 군주를 겸했다.

트란실바니아 공으로서는 오스만 제국합스부르크 제국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며 독립을 유지하였으며,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는 전성기를 이끌어낸 명군이다.

2. 생애

1533년 9월 27일 동헝가리 왕국 실라지솜요 성에서 헝가리 왕국 바토리 가문의 가주 바토리 이슈트반과 헝가리 왕실 재무관 텔레그디 이슈트반의 딸인 텔레그디 커털린의 아들로 태어났다. 앞으로 두 형 미클로시와 언드라시가 있었지만 모두 유년기 때 사망했기에, 그는 일찌감치 가문의 후계자로 지명되었고, 1534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아버지의 영지를 물려받았다. 이후 가문의 영지를 지키기 위해 오스트리아 대공이자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이었던 페르디난트 1세 궁정에 들어갔고, 만토바에서 열린 페르디난트 1세의 딸 카타리나와 만토바 공작 프란체스코 3세 곤차가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1549 ~ 1550년경 이탈리아를 방문해 몇달간 파도바 대학교에서 교육받았다.

1553년경 페르디난트 1세의 군대에 복무해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참여했다가 도중에 포로로 잡혔다. 페르디난트 1세가 몸값 지불을 거부하자 반감을 품고 오스만 제국의 봉신이 되었으며, 동헝가리 왕국을 세워서 헝가리 국왕을 자처한 페르디난트 1세에 대적한 서포여이 야노시의 아들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를 받들었다. 1556년 10월 22일 헝가리 귀족을 대표하여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의 어머니 폴란드 공주 이자벨라 야기엘론카를 맞이했으며, 1562년 3월 4일 트란실바니아 군대의 수장으로서 허더드(Hadad 현재 루마니아 호도드)에서 황제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단기간 휴전 협정을 맺었다.

1563년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의 지시에 따라 에 사절단으로 가서 합스부르크 가문 측으로부터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의 권위를 인정받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1565년 3월 13일 서트마르네메티(Szatmárnémeti 현 루마니아 사투마레)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와 예비 평화 협정을 협상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오스만 제국군이 침공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데다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가 합스부르크와 유화적이었던 외교 방침을 오스만 제국에 충실한 쪽으로 바꿔버리자, 합스부르크 측은 그를 빈에 억류했다. 그후 2년간 억류 생활을 하던 그는 1567년이 되어서야 헝가리로 돌아왔다.

1571년 3월 14일, 트란실바니아 공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가 줄러페헤르바르에서 사망했다. 1570년 8월 16일에 체결된 슈파이어 조약에 따른다면, 트란실바니아 공국은 이제 막시밀리안 2세에게 돌아가야 했고, 트란실바니아 내 친 합스부르크 가문 인사인 가스파르 베케시(Gáspár Bekes)가 총독을 맡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트란실바니아 귀족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이대로 트란실바니아를 장악하고 총독을 세운다면 자치권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게 될 거라고 여겼다. 1571년 5월 25일, 줄러페헤르바르 의회는 트란실바니아에서 가장 강력한 영주인 바토리 이슈트반을 만장일치로 트란실바니아 공에 선출했다. 오스만 제국 파디샤 셀림 2세도 이듬해에 그를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인정한다는 칙령을 반포했다. 바토리 이슈트반은 막시밀리안 2세가 무력으로 응징하는 걸 피하기 위해 막시밀리안 2세에게 밀사를 보내 충성을 맹세했다. 막시밀리안 2세는 트란실바니아를 장악하고 싶었지만,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에, 일단 그를 인정하기로 했고, 말년에 이단유니테리언으로 개종한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의 뒤를 이은 이가 가톨릭 신자인 것을 기뻐하는 척하기도 했다.

그러나 좋은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1573년, 가스파르 베케시가 막시밀리안 2세의 지원을 받고 트란실바니아 내 친 합스부르크 파벌을 결성해 합스부르크 헝가리에 트란실바니아 공국을 정식으로 병합하려 했다. 바토리 이슈트반이 군대를 일으켜 카스파르 베케시의 근거지인 포가라스 성을 점거하고 베케시의 가족을 사로잡았지만, 베케시는 합스부르크 헝가리로 피신한 뒤 군대를 끌어모은 뒤 세케이인과 작센인을 부추겨서 바토리 이슈트반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1575년, 베케시는 세케이푈트로 진군한 뒤 그곳에서 세케이인들을 모집해 3,000 가량의 병력을 확보했다. 바토리 이슈트반은 이에 맞서 파르티움(Partium)[4] 군대, 아라뇨스체크 출신 800명, 부더의 파샤가 지원한 튀르크 경기병대를 규합해 베케시를 향해 진군했다.

1575년 7월 9일, 양자는 케렐뢰센트팔 전투를 벌였다. 전투는 오전 10시부터 밤늦게까지 이어진 끝에 바토리 이슈트반의 대승으로 끝났고, 베케시는 막시밀리안 2세에게 망명하려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폴란드-리투아니아로 망명했다. 바토리 이슈트반은 포로로 잡힌 귀족 5명을 전장에서 교수형에 처했고, 한 달 후 의회의 승인을 받아 또 다른 베케시 추종자 43명(귀족 7명 포함)을 처형했다. 이리하여 그는 트란실바니아를 확고히 장악했다. 이후 그는 왕권을 강화하려 노력했다. 서포여이 야노시와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가 귀족들에게 부여했던 특권을 재검토해 일부를 회수했고, 국가 수입을 조사하고 무역과 광업을 진흥했다. 한편, 그는 트란실바니아에서 가톨릭의 세력을 강화하려 노력했다. 1579년 클루지나포카에 예수회를 정착시켰고, 유니테리언 주교로서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를 유니테리언으로 개종시켰던 페렌츠 다비드를 데바 성 감옥에 가뒀다. 1581년에는 세게드 대학교의 전신인 클루지 예수회 대학을 설립했다. 그는 궁정을 파도비아세 교육받은 지식인들로 채웠다. 그러면서도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의 종교 관용 정책을 이어받아 개신교 신도들이 자기들의 신앙을 따르는 걸 허용했다.

한편, 1574년 6월 19일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헨리크 발레지프랑스 왕위 계승을 위해 도망친 뒤,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공위기는 1년 반 동안 이어지고 있었다. 1575년 12월 12일, 그니에즈노 대주교이자 폴란드 대주교 야쿠프 우찬스키는 교황 특사 빈첸초 라우로의 권고를 받아들여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를 국왕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막시밀리안 2세가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폴란드 귀족들은 그랬다간 강력한 위세를 자랑하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의해 자신들이 누리던 특권을 상실할 수 있다고 여겨 반발했고, 얀 자모이스키의 주도로 12월 14일에 스테판을 폴란드 국왕으로 추대하고 전임 국왕 지그문트 1세의 딸인 안나 야기엘론카를 그와 결혼시키기로 했다. 이에 안나는 승인을 요청하는 귀족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나는 왕비가 아니라 여왕이 되고 싶다!"

다음 날인 1575년 12월 15일, 귀족들은 그녀의 의사를 존중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여왕이자 트란실바니아 프린스의 아내로 추대했다. 헤움의 시종장이자 기사단 원수인 미코와이 시에니츠키는 선거인단의 결정을 발표하면서, "공주를 여왕으로 지명하며, 스테판 바토리를 폴란드 왕이자 리투아니아의 대공으로 지명했다"고 밝혔다. 이후 스테판의 폴란드 국왕 등극을 지지한 민중이 크라쿠프를 점거하고 합스부르크에 호의적인 도시와 대학을 위협했다. 결국 야쿠프 우찬스키는 막시밀리안 2세 추대를 취소했다.

스테판은 1576년 2월 16일 미디어슈에서 폴란드 귀족들의 특권을 인정하며 루스 차르국이 폴란드-리투아니아로부터 빼앗아간 영토를 되찾겠다고 약속했다. 1576년 3월 30일 스니아틴 인근에서 폴란드 국경을 넘은 뒤 5월 1일 바벨 성에서 안나와의 결혼식을 거행하고 바벨 대성당에서 쿠야비 주교 스타니스와프 카르노코프스키가 주관하는 대관식을 치렀다. 그러나 단치히 시는 막시밀리안 2세가 폴란드의 왕이 되어야 한다며 스테판의 선출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스테판은 무력으로 이들을 무찌르기로 하고 1576년 가을 토룬에서 세임을 소집해 단치히와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 세금을 거두는 걸 동의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귀족들은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하라며 이를 거부했다. 대신 장정을 동원하는 건 받아들였고, 단치히 출신 의원들이 체포되고 시민들의 재산을 압수하는 것도 받아들였다. 또한 스테판은 발트해 무역의 거점을 단치히에서 엘블롱크로 옮길 것을 명령했다.

스테판의 결정을 접한 단치히 시는 덴마크와 동맹을 맺고 엘블롱크 항구를 해상 봉쇄하려 했다. 여기에 용병대장 얀 빈켈브루흐를 사령관으로 세우고 보병 11,000명과 기병 800명을 조직했다. 1577년 봄, 빈켈브루흐는 군대를 이끌고 트체프에 주둔하고 있는 폴란드군을 급습하려 했다. 그러나 이 움직임은 사전에 포착되었고, 스테판은 즉시 군대를 이끌고 요격에 나섰다. 1577년 4월 17일, 양군은 루비세프 인근에서 격돌했다. 단치히군은 윙드 후사르의 돌격에 의해 패주했고, 스테판은 여세를 이어가 단치히를 포위했다. 그러나 단치히의 성채를 파괴하기에는 대포와 병사가 부족했고, 단치히 항구의 입구를 방어하는 바이크셀뮌데 요새를 파괴하려는 시도도 실패했다. 결국 그해 12월, 스테판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5]의 중재를 받아들여 단치히 시와 평화 협정을 맺었다. 단치히 시는 스테판에게 경의를 표하고 20만 폴란드 플로린을 바치기로 했다. 스테판은 그 대가로 전쟁 중 단치히에 부과한 모든 경제적 제한을 폐지했다.

단치히와의 전쟁이 끝난 후, 스테판은 오스만 제국에게 25,000 플로린을 공물로 헌납하는 대가로 폴란드-트란실바니아 연합에 대한 동의를 받아냈고, 형제 크리스토프를 트란실바니아 보이보드로 선임했다.1581년 크리스토프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바토리 지그몬드가 뒤를 이었지만 아직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섭정 의회가 권력을 잡았다가 1585년부터 헝가리 귀족 그히치 야노시(Ghiczy János ?~1589)가 섭정을 맡았다. 하지만 스테판 바토리는 크라쿠프에 별도의 트란실바니아 정부를 조직하고 어린 조카를 대신하여 트란실바니아에 관한 모든 중요한 결정을 스스로 내렸다. 또한 루스 차르국과의 전쟁 때 트란실바니아에서 동원한 군대를 투입하기도 했다.

스테판이 단치히와 전쟁을 치르고 있던 1577년 7월, 루스 차르국의 차르 이반 4세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리보니아로 진격해 마리엔하우젠, 로지텐, 뒤나부르크, 코켄하우젠, 슈바넨부르크 등지를 점령했다. 특히 1577년 9월 리보니아의 핵심 요충지인 벤덴을 공략했다. 이에 폴란드군이 그해 가을에 반격했지만 일부 영토를 탈환하는 데 그쳤다. 1578년, 단치히와의 전쟁을 마친 스테판은 반격에 착수했다. 그해 초, 폴란드-스웨덴 연합군은 벤덴을 탈환했다. 루스군은 2월에 벤덴을 다시 공략하려 했으나 격퇴되었다. 이에 이반 4세는 이반 골리친이 지휘하는 18,000~22,000명 가량의 대군을 동원해 벤덴을 공략하게 했다.

1578년 10월, 벤덴에 도착한 루스군은 벤덴 성을 포위하고 포격을 퍼부어 성벽 일부를 뚫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 폴란드, 리투아니아, 트란실바니아, 독일, 보헤미아, 도나우 공국[6], 스웨덴 등지에서 차출된 5,500~6,000명 가량의 군대가 리투아니아 헤트만 안제이 사피에하의 지휘하에 인근에 이르렀다. 10월 21일, 양군은 벤덴의 패권을 놓고 격돌했다. 그 결과, 루스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적어도 3,000명이 포로 신세로 전락했고, 대포 20~30문이 노획되었다. 사상자 수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으나 막대할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이반 4세의 평화 협상 요청을 받아들여 3년간 휴전 협정을 맺은 스테판은 모스크바를 공략하기 위한 대규모 병력을 준비했다. 폴란드 왕국에서는 기병 7,311명과 보병 용병 6,519명을 고용했으며,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기병 1,445명과 보병 용병 2,530명을 고용했다. 용병들은 헝가리, 독일, 트란실바니아, 보헤미아, 폴란드 등 민족 단위로 모였다. 여기에 폴란드에서 민병대 18,739명이 모였고, 리투아니아에서는 22,975명이 모였다. 이리하여 4만 이상의 대군을 소집한 그는 휴전이 만료된 1581년 폴로츠크로 진격했다. 포위 공격은 8월 11일에 시작되었고, 도시는 그 달 29일에 항복했다. 뒤이어 폴로츠크-라소니 일대에서 루스군이 점령했던 8개 성을 모두 탈환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은 여세를 이어가 8월 29일 벨리키예 루키를 포위하고 9월 5일 함락했다. 9월 20일 토로페츠 인근에서 야누스 즈바라스키가 이끄는 폴란드-리투아니아 기병 2,600명과 디미트리 체레미소프와 그리고리 냐쇼킨이 지휘하는 루스 기병대 4,000명이 맞붙었다. 그 결과 루스 기병 300~500명이 전사했고 200명이 생포되었으며, 나머지는 패퇴했고 두 지휘관은 모두 사로잡혔다. 폴란드-리투아니아 기병대의 손실은 알려진 바 없으나 미미한 것으로 추정된다. 폴란드-리투아니아군은 뒤이어 벨리츠와 네벨을 함락시켰다. 그 다음에는 프스코프를 포위했지만 6개월 동안 공략에 실패했다.

그러는 동안 나르바 전투에서 루스군이 스웨덴군에게 참패하면서 막대한 전력 손실을 입은 이반 4세는 리보니아 주둔 루스군을 구할 방도가 없으니 이 이상의 전쟁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측에 평화 협약을 맺자고 제안했다. 양자는 교황청 특사 안토니오 포세빈의 중재에 따라 1582년 1월 얌자폴스키에서 평화 협정을 맺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리보니아와 폴로츠크 등지의 거의 모든 지역을 되찾았고, 이반 4세의 군대는 리보니아에서 완전히 떠나야 했다. 이리하여 발트해로 진출하려 했던 이반 4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리보니아 전쟁에서 승리한 후, 스테판은 리보니아의 행정을 재조직했다. 1583년 키에시 세임에서 리보니아 헌법을 공포하고 빌뉴스 주교 예르지 라지비우에게 이 지역의 총독 직을 맡겼다. 여기에 리보니아 주교구도 세워졌으며, 1585년 4월 20일에는 덴마크에 보상금을 지불하고 리보니아 내 덴마크 영토였던 필틴을 인수했다.

한편, 폴란드 공동 여왕인 안나는 남편보다 우위를 점하려고 노력했다. 외국 사절은 먼저 그녀에게 신임장을 제출하고 공사관권을 제시해야 했다. 또한 그녀는 스테판 바토리와 크라쿠프 대학의 학자들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했고, 1584년 크라쿠프 대학의 소재지를 방문한 후 대학에 보석을 기증하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산을 활용해 여러 건설 계획을 후원 및 감독했다. 그러나 스테판은 그런 안나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지극히 형식적이었다. 일설에 따르면, 두 사람은 딱 3차례만 잠을 함께 잤고, 이후에는 별거 생활을 이어갔다고 한다.

게다가 스테판은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길 희망한 아내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고 자신이 정국을 진두지휘했고, 안나는 이에 불만을 품었다. 게다가 스테판이 젊은 여성과 결혼하여 자식에게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상속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그녀와 이혼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자, 그녀는 리보니아 전쟁에서 스테판을 상대하는 적들을 은밀히 지원했다. 하지만 스테판은 그녀와 이혼하면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서의 정통성이 손상을 입어 입지가 위태로워진다는 걸 잘 알았기에 이혼하지 않았다.

스테판은 아내 안나를 정치에서 철저히 배제하면서 얀 자모이스키에게 국정 전반을 맡겼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지만 관용의 원칙을 고수했다. 1585년 2월 25일, 그는 키예프에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전역에서 정교회를 믿을 자유를 인정했다. 그리고 크라쿠프에서 일어난 반개신교 폭동을 성토했고, 바르샤바에서 루터교회 신자들이 추방되는 것을 막았다.

그러던 중, 스테판은 시에라츠 주지사 올브라흐트 와스키로부터 사무엘 즈보로프스키가 자신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고발을 받았다. 사무엘은 즉각 체포되었고, 자모이스키는 그를 죽이자고 제안해 허락을 받아낸 뒤 1584년 5월 26일 바벨 성 안뜰에서 사무엘을 참수했다. 1585년 세임 법원은 즈보로프스키의 유족들이 재판 없이 처형한 것을 문제삼으며, 이는 귀족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라고 주장한 일에 관해 논의하고 재조사를 벌여야 한다고 결의를 내렸다. 하지만 상원은 사무엘의 음모에 대한 증거가 명백하고, 통치자가 안위를 확보하기 위해 부득이 사무엘을 체포했다고 밝히며 스테판을 지지했다. 여기에 세임 법원에 재조사를 요청한 인사들 중 한 사람인 사무엘의 형제 키시슈토프가 왕을 죽이기 위해 암살자를 보내려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건은 유야무야 처리되었다. 그러나 하원 내 많은 의원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스테판과 자모이스키가 독단적으로 처신했다고 비판했다.

이렇듯 정국이 즈보로프스키 사건으로 소란스럽자, 스테판은 귀족들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루스 차르국과의 또다른 전쟁을 준비했다. 그러던 중 몰라위카 숲에서 사냥을 하던 중 갑작스런 병환을 얻고 인근의 가르디나스로 이송된 뒤 1586년 12월 12일에 사망했다. 공식적으로는 다낭성 신종으로 사망했다고 알려졌지만, 폴란드 의사이자 육군 장교, 민족 운동가였던 헤르만 즈지스와프 쉐어링(Herman Zdzisław Scheuring, 1894 ~ 1963)은 저서 <스테판 바토리 왕의 죽음에 대한 비판적 연구>에서 외국 의사와 정적들에게 독살되었다고 주장했다. 사후 크라쿠프의 바벨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가 사망한 후 안나 야기엘론카가 폴란드의 단독 여왕으로서 정치를 주도할 수 있었지만, 당시 62세로 고령이었던 그녀는 왕위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자신의 조카인 스웨덴의 시기스문드 왕자의 입후보를 지지했고, 또다른 후보인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 3세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선거 결과, 이번에는 시기스문드 왕자가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지그문트 3세 바사로 등극했다.


[1]루마니아 심레우실바니에이[2]벨라루스 흐로드나.[3] 그 악명높은 바토리 에르제베트의 어머니이다.[4] 오늘날 헝가리 동부 미슈콜츠, 데브레첸슬로바키아 동부 코시체 일대를 아우르는 역사적인 지역. 라틴어가 쓰인 이유는 중세 헝가리 왕국의 공용어가 라틴어였기 때문이다.[5] 마이센의 유다로 알려진 모리츠의 동생.[6] 왈라키아 공국몰다비아 공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