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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DDFF><colcolor=#000> 트란실바니아 제10대 여공 카타리나 폰 브란덴부르크 Katharina von Brandenburg | ||
이름 | 독일어 | 카타리나 폰 브란덴부르크 (Katharina von Brandenburg) |
헝가리어 | 브런덴부르기 커털린 (Brandenburgi Katalin) | |
출생 | 1602년 5월 28일 | |
프로이센 공국 쾨니히스베르크 | ||
사망 | 1649년 8월 27일 (향년 47세) | |
신성 로마 제국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 쇠닝겐 | ||
재위 |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여공 | |
1629년 11월 15일 ~ 1630년 9월 21일 | ||
배우자 | 베틀렌 가보르 (1626년 결혼 / 1629년 사망) | |
작센라우엔부르크의 프란츠 카를 공자 (1639년 결혼) | ||
아버지 |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한 지기스문트 | |
어머니 | 프로이센의 아나 공작부인 | |
형제 | 게오르크 빌헬름, 아나 조피, 마리아 엘레오노라, 요아힘 지기스문트,아녜스, 요한 프리드리히, 알브레히트 크리스티안 | |
종교 | 루터교회 → 칼뱅파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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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공비(公妃) 및 제10대 여공(女公).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유일한 여성 군주이다.2. 생애
1602년 5월 28일 프로이센 공국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브란덴부르크 제16대 선제후 요한 지기스문트와 프로이센 제2대 공작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의 딸 아나의 딸로 출생했다. 형제로 브란덴부르크 제17대 선제후 게오르크 빌헬름, 아나 조피[1], 마리아 엘레오노라, 요아힘 지기스문트[2], 아녜스[3], 요한 프리드리히[4], 알브레히트 크리스티안[5]이 있었다. 카타리나는 본래 루터교회 신자였지만, 1614년 가족과 함께 칼뱅파로 개종했다.카타리나는 키가 작고 건강은 그리 좋지 않은 편이었지만, 몸매가 좋았고, 미모가 뛰어났다. 베틀렌 가보르의 옷 관리사이자 댄스 마스터인 디에고 데 에스트라다는 그녀를 매력적이고 친절하며, 연약하고 활기차며, 예민한 여성으로 묘사했다. 17세기 트란실바니아 역사가 실라르디 야노시(Szalárdi János, 1601 ~ 1666)는 그녀가 아름답지만 무척 사치스럽고 세속적인 쾌락을 즐기려는 의지가 강해, 돈을 마구 쓰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고 비평했다. 그녀는 1620년에 어머니와 함께 얼마 전에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와 결혼한 여동생 마리아 엘레오노라를 방문하기 위해 스톡홀름으로 여행했는데, 이곳에서 2년 넘게 머물면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고, 스웨덴 귀족들에게 막대한 돈을 빌렸다. 그녀의 형제이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인 게오르크 빌헬름은 그녀를 대신해 빚을 갚았지만, 그녀가 하도 많은 빚을 지는 바람에 나중에는 더 이상 돈을 갚을 여력이 되지 않자 강제로 귀국시켰다.
1623년 루스 차르국의 차르 미하일 1세와의 혼사가 오갔으나 결렬되었다. 1625년 6월, 트란실바니아 공 베틀렌 가보르는 반(反) 합스부르크 연합을 결성하기 위해 브란덴부르크 궁정에 방문해 카타리나와 결혼하고 싶다는 의사를 타전했다. 브란덴부르크 측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그는 라코치 죄르지가 이끄는 사절단을 정식으로 파견했다. 그 해 결혼 협약이 체결되었는데, 그 내용은 베틀렌 가보르가 그녀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포가라스와 문카치, 코카이 성을 영지로 수여하고, 넉넉한 수당을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두 사람과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에 대한 계승권을 포기하기로 했다.
1626년 1월 22일 베를린에서 라코치 죄르지가 대리 신랑을 맡은 채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이후 트란실바니아로 이동한 카타리나는 그 해 3월 2일 커셔에서 열린 성대한 결혼식에 참석했다. 이때 신부는 베를린에서 말 340마리와 마차 39대를 대동해 커셔로 이동했으며, 수행원은 255명에 달했다. 신랑은 기병 6,000명, 하이두크(hajdúk: 평시에 산적, 도적으로 활동하다가 전시에 용병으로 고용되는 비정규 보병) 1,500명, 독일 총사대 500명과 함께 그 앞에서 행진했다. 결혼식에는 신성 로마 제국, 오스만 제국, 스웨덴, 덴마크, 폴란드-리투아니아, 스페인 사절단이 참석했고,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는 직접 참석했다. 결혼식이 끝난 뒤, 신혼부부는 트란실바니아로 이동해 3월 말 줄러페헤르바르에 도착했다. 당시 카타리나는 독일어와 프랑스어만 알았고, 베틀렌 가보르는 두 언어에 능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통역사의 도움을 받아야만 서로 대화할 수 있었다.
1626년 6월 12일, 줄러페헤르바르에서 개최된 의회는 카타리나를 베틀렌 가보르의 후계자로 선출했다. 이와 동시에 베틀렌 가보르는 남동생 베틀렌 이슈트반을 트란실바니아의 총독으로 삼았고, 카타리나가 세운 정책은 이슈트반과 공국 평의회의 승인을 얻어야만 추인된다고 규정했다. 또한 국가의 수입을 관리하는 재무관을 두고, 총독과 의회는 재무관에게 지침을 제공할 의무가 있었으며, 카타리나는 의회에 외국인을 임명할 수 없었다. 오스만 제국은 1627년 3월 8일에 카타리나의 후계자 선임을 확인했다. 그 후 카타리나는 줄러페헤르바르 궁정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녀는 댄스 파티, 가장 무도회, 여행, 사냥을 즐겨했으며, 궁정에 발레를 소개했다. 케메니 야노시의 자서전에 따르면, 그녀는 베틀렌 가보르의 기수였던 지로틴(Zierotin)이라는 모라비아 귀족과 지나치게 친밀한 관계를 맺었는데, 스웨덴 대사가 베틀렌 가보르에게 이를 지적한 뒤 지로틴이 추방되었다고 한다. 다만 이 내용은 다른 사료와 교차검증되지 않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진다.
1629년 11월 15일, 베틀렌 가보르가 과로에 시달린 여파로 사망했다. 카타리나는 베틀렌 가보르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낳지 못했다. 그 후 트란실바니아 여공이 된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헝가리 국왕인 페르디난트 2세에게 상부 티서 7개 백국을 반납하는 대가로 여공으로 인정받았고, 오스만 제국에 사절을 보내 자신이 트란실바니아 여공이 된 걸 승인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후 그녀는 트란실바니아 총독을 맡은 베틀렌 이슈트반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싶어했고, 트란실바니아 정계는 곧 두 패로 나뉘었다. 금고 관리인 치사키 이슈트반, 토르다 수석 주교 코바초치 이슈트반, 트란실바니아 의원 할러 이슈트반, 코바르 수비대장 체르니 퍼르커시 등이 카타리나를 지지했고, 버러드와 트림셰크 수비대장 졸료미 다비드, 하이두크 지도자이자 트란실바니아 총독의 아들인 베틀렌 이슈트반, 궁정 대장 나기 팔과 막스카시 페렌츠, 재무관 미코 페렌츠, 볼디자르 수비대장 케메니 포가라시, 우드바르헬리셰크 수비 대장 발라시 페렌츠 등은 베틀렌 이슈트반을 지지했다.
치사키 이슈트반은 베틀렌 이슈트반 지지자들에게 압력을 가하기 위해 코바르에서 군사 행동을 준비했지만, 베틀렌 이슈트반이 코바르에 집결하려던 장정들을 차단하면서 지연되었다. 1630년 1~2월, 의회는 베틀렌 이슈트반의 사주에 따라 여공의 권한을 더욱 제한했다. 여공은 총독과 의회의 승인이 있어야 직책이나 재산을 부여할 수 있었고, 물품에 대한 문제를 스스로 결정할 수 없으며, 여공의 재산은 총독과 궁정 평의회가 임명하고 감독하는 재무관에 의해 관리될 수 있었다. 1630년 6월 메지에시에서 소집된 의회는 추가 제한 사항이 도입되었다. 치사키 이슈트반은 의회의 승인이 있어야만 트란실바니아에 방문할 수 있으며, 그가 여공에게 보낸 편지는 베틀렌 이슈트반이 먼저 읽어야 했다.
이후 양자간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고, 양측은 상대방이 자기를 암살하려 들까 봐 두려워했다. 1630년 8월, 치사키 이슈트반이 카타리나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고 트란실바니아를 침공할 준비를 하자, 베틀렌 이슈트반은 라코치 죄르지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트란실바니아 공으로 세워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라코치 죄르지가 하이두크를 동원해 진군하기 직전인 1630년 9월 21일, 카타리나는 심각한 사치를 연이어 규탄당하고 사임 압박을 받은 끝에 시기쇼아라에서 열린 의회 앞에서 퇴위를 선언하고 물러났다. 다만 의회는 카타리나가 차기 공을 정할 권리를 인정했다.
그 후 베틀렌 이슈트반이 트란실바니아 공을 맡았지만, 라코치 죄르지가 이에 반발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누가 트란실바니아 공이 되든 상관이 없었기에, 두 사람 모두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이에 카타리나가 둘 중 한 사람을 트란실바니아의 공으로 정해야 했는데, 베틀렌 이슈트반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었던 그녀는 12월 1일 라코치 죄르지의 임명장만 읽음으로써 그를 선택하겠다는 의사를 간접적으로 밝혔다.
카타리나는 퇴위한 뒤 포가라스 성으로 은퇴했다가 1631년 중반에 토카이로 이사했고, 나중에 하인부르크로 이동했다. 1632~1633년경에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1639년 작센라우엔부르크의 공자 프란츠 카를과 재혼했다. 이듬해 남편과 함께 포메른으로 이동했고, 1649년 8월 27일에 사망했다. 그녀는 프란츠 카를과의 사이에서도 아이를 낳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