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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여이 야노시 |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 이자벨라 야기엘론카 프라테르 죄르지 | 페르디난트 1세 조반니 바티스타 카스텔도 |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 이자벨라 야기엘론카 | }}}}}}}}}}}} |
<colbgcolor=#cd2a3e><colcolor=#ffffff> 동헝가리 왕국 왕비 동헝가리 왕국 섭정 이자벨라 야기엘론카 Izabela Jagiellonka | |
출생 | 1519년 1월 18일 폴란드 왕국 크라쿠프 |
사망 | 1559년 9월 15일 (향년 40세) 에르데이 공국 줄러페헤르바르[1] |
재위 | 동헝가리 왕국의 왕비 |
1539년 ~ 1559년 | |
동헝가리 왕국의 섭정 (1차) | |
1540년 ~ 1551년 | |
오폴리와 라티보르시 여공작 | |
1551년 ~ 1556년 | |
동헝가리 왕국의 섭정 (2차) | |
1556년 ~ 1559년 | |
아버지 | 지그문트 1세 |
어머니 | 보나 스포르차 |
형제 | 야드비가, 안나,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 조피아, 안나, 카타지나, 올브라흐트 |
배우자 | 서포여이 야노시 (1539년 결혼 / 1540년 사망) |
자녀 |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 |
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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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헝가리 왕국 초대 국왕 서포여이 야노시의 왕비, 2대 국왕이자 에르데이 공국 초대 공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의 모후. 1540년부터 1551년까지, 1556년부터 1559년까지 어린 아들을 대신해 섭정을 맡았다.2. 생애
1519년 1월 18일 오후 10시경, 폴란드 왕국의 수도 크라쿠프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폴란드 국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대공 지그문트 1세이고, 어머니는 밀라노 공작 잔 갈레아초 스포르차의 딸 보나 스포르차였다. 그녀는 두 부부가 첫번째로 낳은 아이였으며, 할머니인 아라곤의 이사벨라[2]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이탈리아어를 가르쳤고, 르네상스 정신을 그녀에게 주입하는 등 철저하게 교육했다. 그녀는 생전에 폴란드어, 이탈리아어, 라틴어, 독일어 등 4개 국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을 크라쿠프와 리투아니아에서 부모님과 남동생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와 함께 보냈다.이자벨라의 결혼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야기에우워 왕조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강력한 반(反) 합스부르크 가문 성향이었던 보나 스포르차는 프랑스 왕국과 손잡고 합스부르크 가문을 협공할 계획을 세웠다. 1523년, 폴란드 주재 프랑스 대사는 이자벨라와 당시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아들 오를레앙 공작 앙리사이의 결혼 가능성을 타진했다. 당시 이자벨라와 앙리 모두 겨우 4살이었다. 프랑수아 1세는 아들 앙리에게 밀라노 공작이라는 칭호를 하사할 정도로 밀라노 공국을 손아귀에 넣으려 애썼는데, 스포르차 가문 출신인 어머니를 둔 이자벨라를 아들과 결혼시키면 밀라노에 대한 프랑스 왕실의 주권 주장에 힘을 실을 수 있을 거라 여겼다. 1524년 봄, 이자벨라와 앙리 2세의 약혼 계약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1524년 2월 25일,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스페인군에게 완패하고 프랑수아 1세가 사로잡히자, 지그문트 1세는 딸의 약혼을 없던 일로 처리했다. 이후 새로운 결혼 대상을 물색하던 폴란드 왕실에게, 1526년부터 동헝가리 왕국의 국왕을 자처하며 오스트리아 대공 겸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페르디난트 1세와 대립하던 서포여이 야노시가 접근했다. 서포여이 야노시는 지그문트 1세의 첫번째 왕비였던 서포여이 바르바라의 오빠였다. 그는 폴란드와 헝가리가 서로 힘을 합쳐 합스부르크 가문의 야욕에 대항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과 이자벨라가 결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나 스포르차 역시 남편에게 이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지그문트 1세는 2가지 이유로 이 결혼을 꺼렸다. 첫째, 그는 조카 러요시 2세가 죽은 모하치 전투의 여파로 피폐해진 헝가리에 딸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둘째, 이 결혼이 성립되면 합스부르크 가문과 정면으로 대결하게 될 텐데, 모스크바 대공국과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지그문트 1세는 서포여이 야노시의 거듭된 구혼에 대답을 미루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에 자기 딸과 혼약을 맺을 의사가 있는지를 타진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이 별다른 호응을 하지 않았고, 서포여이 야노시와 보나 스포르차 등이 끈질기게 설득하자, 결국 지그문트 1세는 서포여이 야노시와 페르디난트 1세가 평화 협약을 맺는다는 조건으로 이자벨라와 서포여이 야노시의 결혼에 동의했다.
1538년 2월 24일, 서포여이 야노시와 페르디난트 1세는 바러드에서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헝가리 왕국의 2/3에 달하는 동쪽 부분은 서포여이 야노시의 통치를 받기로 했고, 헝가리 왕국의 1/3에 달하는 서쪽 부분은 페르디난트 1세의 지배를 받기로 했다. 또한 당시 아들이 없었던 서포여이 야노시가 사망하면, 그에게 속했던 영토는 페르디난트 1세에게 넘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서포여이 야노시가 차후에 적법한 아내에게서 아들을 낳는다면, 그 아들은 헝가리 왕위에 대한 권리가 없으며, 그 대신 금전적 보상, 왕자의 칭호 및 스피슈(Spiš) 일대를 영지로 수여받기로 했다. 이 협약은 오스만 제국의 분노를 살 수 있었기에, 양자는 비밀을 엄수하기로 했다.
이렇게 평화 협약이 체결된 후, 이자벨라는 1539년 2월 23일 서포여이 야노시와 결혼했고 동헝가리 왕국의 왕비가 되었다. 서포여이 야노시는 그녀보다 32세나 많았지만, 이자벨라는 결혼 몇 달 만에 임신했고 1540년 7월 7일 부더에서 아들을 낳았다. 그녀는 남편의 이름에 아버지 지그문트 1세의 이름을 딴 '지그몬드'를 덧붙여서 아들의 이름을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로 지었다. 서포여이 야노시는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접하자 축하 행사를 대대적으로 개최했다. 그러나 열흘 후인 7월 17일에 심장마비에 걸려 급사했다.
서포여이 야노시는 유언장에서 재무관 프라테르 죄르지[3]에게 바러드 조약을 따르지 말고 아들을 헝가리 왕위에 세운 뒤 섭정을 맡아달라고 당부했다. 프라테르 죄르지는 서포여이 야노시가 사망한 직후 부더로 서둘러 가서 정국을 장악했다. 이후 1540년 9월 13일 의회를 소집한 뒤 서포여이 야노시의 유언장을 낭독했고, 헝가리 의회는 유언에 따라 갓난아기였던 서포여이 야노시 자그몬드를 헝가리 국왕으로 선출했다. 또한 의회는 어머니 이자벨라, 프라테르 죄르지, 그리고 2명의 헝가리 대귀족 페트로비치 페테르, 퇴레 발린트를 유아 군주의 수호자로 선포했다.
얼마 후 페르디난트 1세가 파견한 사절이 부더에 도착한 뒤 바러드 조약에 따라 서포여이 야노시의 영토를 페르디난트 1세에게 넘길 것을 요구했다. 그러면서 이자벨라의 어린 자식에게는 신성 로마 제국의 영방군주 자리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이자벨라 등은 이 제안을 거부했다. 한편, 상 헝가리에서 서포여이 야노시를 지지하는 군대의 사령관이었던 페레니 페테르와 컬로처 대주교인 프라뇨 프랑코판은 곧바로 페르디난트 1세에게 귀순했고, 에르데이 보이보드 마즐라트 이슈트반 역시 페르디난트 1세 지지를 천명하면서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의 지지자들을 대거 축출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그리고 페르디난트 1세의 또다른 사절인 히에로니무스 라스키는 코스탄티니예로 찾아가서 오스만 제국 파디샤 쉴레이만 1세에게 바라드 조약 내용을 알리면서, 페르디난트 1세가 헝가리 전역을 차지하는 걸 동의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쉴레이만 1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라스키를 체포했다.
1540년 10월, 페르디난트 1세가 파견한 제국군은 비셰그라드, 바츠, 페슈트, 터터, 세케슈페헤르바르를 공략했지만 부더를 공략하지는 못했다. 1541년 5월 4일, 빌헬름 폰 로겐도르프가 이끄는 제국군 사령관이 다시 부더를 포위했다. 이에 프라테르 죄르지와 이자벨라 왕비는 쉴레이만 1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쉴레이만 1세는 그해 6월 곤경에 처한 봉신을 돕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군을 일으켜 헝가리로 진군했다. 그해 7월 말, 몰다비아 보이보드 페트루 5세 라레슈가 쉴레이만 1세의 지시에 따라 퍼거라슈에서 마즐라트 이슈트반을 체포해 코스탄티니예로 압송했다. 이후 에르데이 의회는 오스만 제국군의 압력에 굴복해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후 오스만 제국군이 부더로 진군하자, 빌헬름 폰 로겐도르프는 8월 26일 부더의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1541년 8월 29일, 프라테르 죄르지, 퇴레 발린트를 포함한 헝가리 대귀족 6명이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와 함께 파디샤의 진영으로 가서 자신들을 구원해 준 것에 감사를 표했다. 그들은 곧 구금되었고, 예니체리가 부더에 입성했다. 이후 쉴레이만 1세는 어린 아이를 헝가리 왕위에 앉힌다면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헝가리를 잃겠다고 판단하고, 헝가리 왕국을 분할하여 중부는 직할지로 삼고 티서 강 동쪽의 영토만 매년 10,000 플로린의 조공을 바치는 대가로 야노시의 영토로 인정했다. 1541년 9월 5일, 이자벨라 왕비와 프라테르 죄르지는 어린 왕과 함께 서포여이 가문의 영지 중심지인 리퍼(현 루마니아 리포바)로 이동했다. 그해 10월 18일,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의 추종자들은 쉴레이만 1세의 종주권을 인정한다고 서약했다.
1541년 12월 29일, 프라테르 죄르지는 줄러(현 루마니아 길라우)에서 페르디난트 1세의 사절인 카스파르 세레디와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페르디난트 1세가 부더를 탈환할 경우 헝가리의 주권이 페르디난트 1세에게 있음을 인정하고, 그 대신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는 서포여이 가문의 영지를 다스릴 권한을 인정받았다. 이후 프라테르 죄르지는 동헝가리 왕국에 속한 귀족들에게 페르디난트 1세와 협력해 오스만 제국에 맞서라고 권고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고, 에르데이 의회는 1542년 12월 20일 줄러 조약을 무효로 선언했다. 이후 이자벨라 왕비와 프라테르 죄르지 간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다. 1543년 2월, 에르데이 의회는 이자벨라가 프라테르 죄르지보다 우월한 지위를 가진다고 확인했다. 그러나 프라테르 죄르지는 이후에도 국가 행정과 재정을 통제하면서, 이자벨라 왕비가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도록 했다.
1543년 6월, 루터교회를 받아들인 크론슈타트의 작센인 성직자들이 줄러페헤르바르로 찾아와 가톨릭 사제들과 토론을 벌였다. 프라테르 죄르지는 이들을 이단으로 간주해 종교재판에 세우고 싶어했지만, 이자벨라 왕비와 귀족들은 이를 거부하고 그들을 안전하게 돌려보냈다. 1544년 4월, 투르다 의회는 여행자들이 방문한 정착지의 종교 관습을 존중해야 한다고 선포했다. 하지만 프라테르 죄르지는 이에 굴하지 않고 1545년 데브레첸 의회를 주재해 누구도 자신의 소유지에 루터교인들을 용인해서는 안 된다고 선언하도록 했고, 같은 해 투르다 의회를 재소집해 "아무도 어떤 종교적 혁신도 도입해서는 안 되며, 사제와 수도자의 직업 수행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라고 선언하게 했다. 헝가리 종교개혁가 헬터이 가슈파르가 성경을 헝가리어로 번역하는 사업을 전개하자, 프라테르 죄르지는 성경은 오직 라틴어만 쓰여야 한다고 못박고 그에게 벌금을 부과했다. 교황청은 그런 그의 노고를 인정해 1551년 10월 12일 그를 헝가리 추기경으로 승격했고, 동시에 에스테르곰 대주교로 선임했다.
1544년 8월 에르데이 의회에서 프라테르 죄르지가 대법원장이 되었고, 이전에 페르디난트 1세의 통치를 받아들였던 5개 백작령(베레그, 샤볼치, 서트마르, 웅, 젬플렌)은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546년 초, 오스만 제국이 베체와 베치스케레그 요새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여기에 1547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 체결한 에디르네 평화 협약에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의 영지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는 오스만 제국이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의 영지 일부를 빼앗을 의도가 있음을 시사했다. 이에 이자벨라와 프라테르 죄르지는 1548년 페르디난트 1세와 헝가리 통합에 대해 협상을 재개했다. 1549년 9월 8일, 니르바토르에서 양자간의 협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이자벨라와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는 보헤미아 왕관령 슬레스코의 오펠리와 라티보르시(현 폴란드 라치부시) 공국을 받고 10만 플로린을 별도로 받는 대가로 헝가리 왕위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이자벨라는 도중에 마음을 바꿔 아들의 퇴위를 거부하고 줄러페헤르바르에 남았다. 그녀는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토대로 자신과 아들의 지위를 지키기로 하고, 코스탄티니예에 사절을 보냈다.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를 지배하는 걸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프라테르 죄르지는 페르디난트 1세가 이끄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헝가리 전역을 장악하게 하기 위해 그녀를 축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1550년 9월, 이자벨라와 프라테르 죄르지의 추종자들 간의 내전이 발발했다. 프라테르 죄르지는 줄러페헤르바르에서 이자벨라를 포위한 뒤 강한 압력을 가한 끝에 1550년 10월 13일에 항복하고 평화 협약에 서명하도록 강요했다. 뒤이어 1550년 12월 몰다비아 공국과 튀르크 분견대의 헝가리 침공을 격파했다. 하지만 이자벨라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프라테르 죄르지가 페르디난트 1세와 협상하기 위해 나라를 떠나자마자 서둘러 의회를 소집한 뒤, 프라테르 죄르지를 반역자로 선언하고 아들의 대관식을 거행하려 했다. 그러나 프라테르 죄르지는 이 소식을 접하자마자 군대를 소집한 뒤 돌아왔다. 의회는 곧 해산되었고, 이자벨라는 강한 압력에 시달렸다.
1551년 5월, 이자벨라는 추종자인 파토치 페렌츠 등에게 군대를 일으켜서 자신을 구출하게 했지만, 프라테르 죄르지를 추종하는 군대가 이들을 물리쳤다. 1551년 7월 19일, 이자벨라는 페르디난트 1세를 헝가리 국왕으로 인정하고 헝가리 대관식 휘장을 넘겨야 했다. 그 대신, 오폴리와 라티보르시 공국 및 140,000 플로린을 받기로 했다. 이틀 후, 이자벨라는 성 이슈트반 왕관을 페르디난트 1세가 선임한 헝가리 총독인 조반니 바티스타 카스텔도에게 넘겼다. 에르데이 의회는 7월 26일 그들의 퇴위를 인정하고 페르디난트 1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551년 8월 6일, 이자벨라와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 모자는 에르데이를 떠나 커셔에 정착했고, 1552년 3월 오폴리로 이동했다. 하지만 이곳 사정이 지극히 좋지 않다는 게 드러나자 4월 말 이전에 폴란드로 이동했고, 수년간 크라쿠프, 바르샤바, 사노크 등 폴란드의 여러 도시를 전전했다. 그러면서 폴란드 국왕이자 남동생인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로부터 여러 성의 수입을 받았다.
그러는 사이, 동헝가리 왕국의 사정은 지극히 불안정했다. 1551년 말, 카스텔도는 프라테르 죄르지가 오스만 제국과 공모하고 있다고 의심한 끝에 그를 죽여버렸다. 이에 프라테르 죄르지의 추종자들이 오스만 제국으로 대거 귀순했고, 오스만 제국은 1552년 여름 바나트 저지대를 점령했다. 1553년 9월 세케이푈드 주민들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강경 진압되었다. 1554년 4월, 쉴레이만 1세는 헝가리가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에게 반환되어야 한다고 선언하고, 서포여이를 지지하는 페테르 페트로비치가 바나트의 2개 요새를 장악하는 걸 허용했다. 여기에 합스부르크 가문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프랑스 국왕 앙리 2세도 이자벨라에게 헝가리로 돌아가라고 촉구했고, 자기 딸을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와 결혼시키겠다고 약속했다.
1556년 2월 29일, 이자벨라는 자기 재산을 관리하겠다는 명목으로 헝가리 동부와 가까운 르부프로 향했다. 그는 그곳에서 2월 2일 투르다에서 소집된 에르데이 의회가 자신과 아들을 에르데이로 소환한 뒤 주권을 부여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3월 12일, 사스셰베시(Szászsebes)에서 소집된 에르데이 의회는 페르디난트 1세에 대한 충성 맹세를 철회하기로 결의하고, 이자벨라의 추종자였던 페트로비치 페테르를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 왕의 부총리로 선출했다. 이후 합스부르크 지지자들과 서포여이 지지자들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는데, 몰다비아 공국과 왈라키아 공국의 지원을 받은 서포여이 지지자들이 신속하게 에르데이 전체를 지배했다. 페르디난트 1세는 이자벨라와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의 귀환을 지지하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기에, 에르데이를 포기하기로 했다.
그 후 에르데이 의회 사절단이 6월 1일 폴란드로 파견되었고, 10월 22일 콜로즈바르에서 이자벨라와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를 알현했다. 의회는 이자벨라가 아직 미성년이던 아들을 대신해 5년간 섭정할 권리가 있음을 확인했다. 이후 몇달 동안 에르데이 외부의 여러 카운티(이바우치, 비하르, 괴뫼르 등)도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의 통치를 인정했다. 이렇게 해서 아들과 함께 동헝가리 왕국으로 귀환한 이자벨라는 관대한 종교 정책을 채택하여 파르티움(Partium)[4]과 콜로즈바르에서 칼뱅교회가 확산하는 걸 허용했다. 또한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토대로 토커이(1556년 말), 후스트(1557년 1월), 바러드(1557년 5월)을 탈환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을 선호하는 트란실바니아 작센인이 1558년 늦여름에 반란을 일으켰지만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그녀는 반대파를 제거하라는 명령을 직접적으로 내리지는 않았지만, 살육을 사주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1558년 가을, 오스만-에르데이 연합군은 셔요 강에서 합스부르크군에게 패배했다. 그 후 이자벨라는 상 헝가리를 탈환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페르디난트 1세와 협상을 시작했다. 1559년, 페르디난트 1세는 자기 딸을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와 결혼시키고 티서 강 동쪽의 땅을 다스리는 걸 인정할 테니,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가 헝가리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라고 권고했다. 이자벨라는 이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지만, 1559년 9월 15일에 40세의 나이로 줄러페헤르바르에서 급사했다. 사후 줄러페헤르바르 대성당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