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ding [ 펼치기 · 접기 ] | <colbgcolor=#FFF,#191919> 고대 | 판노니아 | ||
로마 제국 | ||||
서로마 제국 | ||||
훈족 | ||||
게피드 왕국 | 동고트 왕국 | |||
랑고바르드 | ||||
아바르 칸국 | ||||
중세~근세 | 마자르족 | |||
헝가리 대공국 | ||||
중세 왕국 ,몽골의 침입, | ||||
동헝가리 | 합스부르크 제국 ,합스부르크 헝가리, | 오스만 헝가리 | ||
트란실바니아 공국 | ||||
근대 | <colbgcolor=#426f4c> 오스트리아 제국 ,합스부르크 헝가리, |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트란스라이타니아, | ||||
제1공화국 평의회 공화국 | ||||
근대 왕국 ,국민단결정부, | ||||
현대 | 헝가리 제2공화국 | |||
헝가리 인민공화국 | ||||
헝가리 제3공화국 |
오스만령 헝가리 Török hódoltság | |
국기 | |
1526, 1541~1699년 | |
위치 | 동유럽 |
정치체제 | 전제군주제 |
국가원수 |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 |
언어 | 오스만어, 헝가리어 |
성립 이전 | 1526년까지의 헝가리 왕국 |
멸망 이후 | 헝가리 왕국 합스부르크 제국 |
튀르키예어 | Osmanlı döneminde Macaristan |
헝가리어 | Török hódoltság |
[clearfix]
1. 개요
오스만 제국이 1541년부터 1699년까지 통치하던 헝가리 왕국의 영토. 오스만 제국이 1526년에 헝가리 왕국를 상대로 모하치 전투에서 승전한 이후 헝가리 지배를 시작했다.2. 상세
2.1. 오스만 헝가리의 성립
1526년 발발한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 왕국은 패배하였고 국왕 러요시 2세가 전사하였다. 이에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는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국왕을 자처하면서[1] 주로 동부에 기반을 둔 헝가리 귀족들의 반발을 받았다. 하지만 서부의 헝가리 귀족들은 오스만 제국의 침공을 염려하여 그를 선출된 왕으로 받아들였다. 이리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크로아티아-보헤미아는 동군연합으로 묶였고 합스부르크 제국이 출범했다.이후 1541년, 헝가리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헝가리 왕국과 오스만 제국, 그리고 야노시 2세(II. János)의 동헝가리 왕국으로 삼분할 되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에 반기를 든 일부 동부 귀족들은 쉴레이만 1세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1547년, 쉴레이만 1세는 페르디난트와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은 휴전으로 끝났고 쉴레이만 1세는 야노시 2세를 오스만 제국의 제후로 삼는 한편, 중부 헝가리를 오스만 제국으로 병합시켰다. 그리고 페르디난트를 헝가리 북부와 서부, 크로아티아 왕국의 통치자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1551년, 오스트리아가 에르데이 지역을 획득할 목적으로 오스만 제국을 침공하였다. 1566년, 쉴레이만 1세는 결국 에르데이를 자국의 신하국으로 삼았다. 이로써 에르데이 공국은 오스만 제국의 신하국이자 자치국으로서 성립되었다.
2.2. 오스만 제국의 통치
약 200년 간 지속된 오스만의 지배 속에서, 헝가리인은 오스만 제국의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이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헝가리는 지리적으로 대평원에 위치했기 때문에 은둔처를 가지지 못했다. 또한 헝가리의 가톨릭 신앙이 상당히 강하여 이슬람과 쉽게 타협하지 못했다.[2] 이미 오스만 제국의 발칸반도 정복 사업 동안 아큰즈의 약탈로 상당수의 헝가리인이 노예로 끌려간 상황이었다.오스만 헝가리는 4개의 속주(Paşalık, 파샬륵)로 구성되었다.[3] 헝가리 귀족들은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피해 거의 모두 달아났으며[4], 농민들만 남았다. 오스만 제국은 자신들이 지배하게 된 토지를 관리와 병사들에게 나눠주었고, 봉토를 하사받은 이들은 지배 지주 계급이 되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정책은 특이하게도 이 봉토를 세습할 수 없는, 언제라도 다른 지역으로 옮겨갈 수 있는 일시적인 것으로 취급했다.[5] 파디샤의 신하들은 대부분 한 곳에 장기간 주둔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의 강청 행위는 극에 달했다.
그나마 파디샤의 국영지(Hâs)는 상황이 좀 더 나았다. 국영지의 농민들은 상당한 번영을 누렸고, 상업이 급성장하였다. 이들은 오스만 제국 내 중산 계급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는 극히 드문 경우로, 일반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헝가리 지배는 가혹하였다. 특히 오스만 헝가리의 인구가 지속적으로 감소하자 일손이 부족하여 상황은 더욱 아비규환이 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는 헝가리의 국토를 황폐화시켰고 결국 1683년 제2차 빈 공방전에서 오스만 제국은 서유럽 연합군에게 패하였다. 1697년 젠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무스타파 2세의 친정군이 사부아 공자 외젠에게 대패하면서 결국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은 과거 헝가리 왕국으로부터 뜯어낸 거의 모든 영토[6]와 에르데이 공국을 합스부르크 제국에게 할양하였다. 이로써 오스만 제국의 헝가리 지배는 종료되었다.
16세기 말 기준으로 오스만 헝가리의 인구는 90만여 명 정도였으며 대다수가 칼뱅파 신도였다. 다만 부다의 경우는 주민 대다수가 유대인이나 무슬림이었고 기독교인 인구는 수십여 명 안팎이었다.
3. 참고 문헌
- 이정희, 『東유럽史』, 대한교과서 주식회사, 1987, 168-172p
4. 관련 문서
[1] 아내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안나가 전사한 러요시 2세의 누나였다.[2] 이는 오스만 헝가리 주민 상당수가 칼뱅파로 개종하는 계기가 되었다.[3] 부딘(Budin), 트므슈바르(Tımışvār), 에으리(Eğri), 카니제(Ḳanije). 이후 우이바르(Uyvar)와 바라드(Vārad)의 2개 속주가 신설되어 6개로 늘어났다. 파샬륵은 파디샤의 파견인 파샤(Paşa)가 관리하는 지역이라는 뜻이다. 파샬륵은 별칭이고 일반적으로는 에얄레트(Eyalet)라고 한다.[4] 오스만 제국은 예전의 지위, 재산권을 모두 박탈했기 때문에 헝가리 귀족들은 저항하거나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5] 왜냐하면 해당 지방에 파견된 총독, 귀족들이 오랜기간 그 지역을 통치하면 해당 지역에 확고한 기반을 가지게 되고,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민심을 얻을 경우 반란을 일으켜도 제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오스만 제국의 지방정책은 기본적으로 지방에 파견된 총독이나 파샤들에게 군사, 사법권은 주되 필요할 경우 즉각 호출할 수 있는 방식으로 통치했다. 이것에 반기를 들고, 결국 원하는대로 자신만의 왕국을 일구어낸 인물이 바로 이집트의 메흐메트 알리파샤이다.[6] 현재 루마니아 티미쇼아라와 세르비아 보이보디나 자치주 즈레냐닌 일대의 바나트는 제외. 여기는 1718년 파사로비츠 조약으로 오스트리아에게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