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1-07 02:56:46

보이보디나 자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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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 21,506 ㎢
인구 1,931,809명(2011)
수도 노비 사드

세르비아어:Аутономна Покрајина Војводина
헝가리어:Vajdaság Autonóm Tartomány
슬로바키아어:Samosprávna oblasť Vojvodina
크로아티아어:Autonomna Pokrajina Vojvodina
루마니아어:Provincia Autonomă Voivodina
루신어:Автономна Покраїна Войводин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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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州旗)

1. 개요2. 상징3. 역사
3.1. 근대3.2. 2차 세계 대전 및 전후
4. 주민

1. 개요

세르비아 북부에 있는 자치주이며 판노니아 평원 남부에 위치한다. 주도인 노비 사드는 세르비아 제2의 도시이다.

세르비아의 공식적인 자치주는 이곳과 코소보 및 메토히야 두 곳이다. 그러나 '코소보 및 메토히야'는 명목상 세르비아의 자치주일 뿐 실제로는 코소보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했다.

민족적 다양성이 풍부한 곳으로, 26개 민족이 거주하며, 6개 언어가 공용어이다. 주요 민족으로는 세르비아인이 2/3을 차지하며, 헝가리인은 13%이다. 헝가리인이 자치주 최대 소수민족이긴 하지만, 헝가리인만을 위해 만들어진 자치주는 아니다.

보이보디나란 공국, 더 정확히 말하면 voivodeship을 의미한다.

2.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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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주기

오늘날 보이보디나 자치주는 이전부터 존재했던 3개의 역사적인 지역이 모여 성립되었다. 세 지역은 자치주 서부의 버치커(Bachka), 동부의 바나트(Banat) 남부의 시르미아(Syrmia, 또는 Srem, Sremska)이다. 보이보디나 자치주의 문장은 위 세 지역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좌상단에 위치한 버치카 지역의 문장은 토가를 두르고 칼과 성서를 들고 있는 사도 바울이다. 우상단에 위치한 칼을 들고 있는 사자는 바나트의 문장이다. 바나트 지역은 1차 대전 이후 인종 분포에 따라 세르비아계가 주류인 서쪽은 세르비아(유고슬라비아)에, 루마니아계가 주류인 동쪽은 루마니아에 분할 되었다. 바나트의 문장은 루마니아의 국장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하단에 나무 옆에 앉아있는 숫사슴은 시르미아 지역의 문장이다. 앞의 두 지역이 헝가리 왕국의 강역이었는데 반해, 시르미아 지역은 유고슬라비아 성립 이전에는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의 강역이었다.[2]

국기는 삼색기와 국기 중앙의 세 개의 별로 구성되어 있다. 삼색기는 세르비아의 삼색기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중앙의 세 개의 별은 보이보디나를 이루는 세 개의 지방을 상징한다.

3. 역사

중세에는 헝가리 왕국의 영토였으나 1389년 코소보 전투 이후 오스만에 압박을 느낀 세르비아인들이 피난을 오게되면서부터 세르비아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했고 1459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세르비아가 완전히 멸망하면서 피난 온 세르비아인들이 증가해 세르비아인 다수 지역이 되었다.[3]
헝가리 왕국은 세르비아가 오스만에 멸망하면서, 오스만과 직접 국경을 맞대게 되었는데, 다뉴브 강을 건너 국경 지역을 약탈하는 오스만 제국 정복 전쟁 특유의 비정규병이 매우 큰 골칫거리였다. 따라서 헝가리 왕국은 오스만의 지배를 피해 국경 너머 헝가리로 이주해온 세르비아 유민들을 환영했다. 세르비아 유민들은 헝가리 남부 국경 근처에 정착하여 헝가리 왕국의 대 투르크 전쟁의 선봉에 섰다. 중세 시기 헝가리 왕국 내 세르비아 유민들은 오스만 제국의 비정규전에 맞서 헝가리의 국경을 넘나들며 유격전을 벌였다. 이 시기에 활약한 세르비아 기마 전사조직인 '구사르'(Gusar)가 훗날 경기병의 대명사가 되는 그 유명한 후사르의 기원이 됐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 왕국이 패배하고 헝가리 왕국 대부분이 오스만 제국에 넘어가면서, 보이보디나의 세르비아 유민들도 오스만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3.1. 근대

헝가리 왕국이 멸망한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와 신성 동맹은 사투 끝에 2차 빈 포위전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승리를 거두었다.(1683년) 수비에서 반격에 나선 합스부르크 왕가는담당 일진 사부아의 외젠 공의 활약에 힘입어, 헝가리 왕국 전역을 탈환는데 성공했다. 이 시기에 외젠 공은 오늘날 보이보디나 자치주 북부에 위치한 젠타에서 티서 강[4]을 도하 중이던 오스만 군 5만을 포착하여 이를 격파하는 등(젠타전투,1697년) 헝가리와 오늘날의 보이보디나 지역 탈환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한편 헝가리 왕국, 특히 국경 지대인 남부 지역(보이보디나)은 오랜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되고 인구가 크게 감소하였다. 전후복구를 위해 18세기 동안 합스부르크 제국과 신성로마제국 전역에서 여러 민족(독일인, 헝가리인, 슬로바키아인, 루테니아인, 불가리아인 등)이 이주했다. 특히, 독일인이 매우 많이 이주했는데, 이는 전후복구를 겸사하여 독립의식이 강한 헝가리인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이 당시의 대규모 이주민 정착은 오늘날 보이보디나 자치주의 인종적 다양성의 기원이 되었다. 결과적으론 오스만이 발칸반도 인종 문제의 만악의 근원 이다.
19세기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면서 보이보디나 지역의 세르비아계 주민들 사이에서도 민족주의 의식이 확산되었고, 근대 국가 성립 운동이 시작되었다. 1848년에는 반동적인 빈체제에 항거하여 빈과 부다페스트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헝가리가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독립하여 공화국을 선포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간 전쟁이 발발했다.
이에 보이보디나의 세르비아인들은 다뉴브 강 남쪽 본국에서 건너온 의용병들의 지원에 힘입어, 헝가리 왕국 내 세르비아 다수 거주 지역에 '세르비아 보이보디나 공국[5]'의 성립을 선포했다. 보이보디나의 세르비아인들은 오스트리아 황제에 협력하여 헝가리의 독립운동을 진압하는 대신, 헝가리 왕국에서 분리독립하여, 합스부르크가의 황제를 수장으로 하는 오스트리아 제국 직할의 세르비아 보이보디나 공국을 공인할것을 요구했다. 이것이 오늘날 보이보디나 자치주의 기원이 되었다.

파일:보이보디나_공국_1848.png
1848년 보이보디나 공국의 영역 [6]

헝가리 독립 전쟁은 이듬해인 1849년,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 내 민족들의 저항과 결정적으로 러시아 제국의 개입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고, 오스트리아 제국은 헝가리 지역을 회복하게 되었다. 한편 보이보디나의 세르비아인들은 전쟁의 공로를 인정받았고, 보이보디나에 이웃한 루마니아계가 다수 거주하는 바나트 지역과 함께 헝가리 왕국으로부터 독립된 자치지역인 세르비아 보이보디나- 바나트[7]가 성립 되었다.

파일:오스트리아제국_1848.png
보이보디나-바나트 및 오스트리아 제국의 구성국들[8]

보이보디나-바나트의 성립은 당연히 트란실바니아 대공국과 함께 헝가리 왕국을 견제하기 위한 오스트리아의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보이보디나-바나트는 이후 헝가리 왕국내 소수민족의 이용가치가 없어지면서 소멸할 운명이었다.
자치지역이 성립된지 20년이 채 되지 않아, 오스트리아 제국은 독일통일 전쟁에서 프로이센에 패배하였다. 독일과 이탈리아 지역에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한 오스트리아는 제국 내 경영에 중점을 두기로 결정하였다. 1867년에는 오스트리아제국이 헝가리왕국과 대타협을 맺음으로써 이중제국이 성립 되었다. 이는 헝가리 왕국내 소수민족들에게는 그야말로 재앙이나 다름 없었다.
이중제국의 성립으로 보이보디나-바나트와 트란실바니아 대공국은 헝가리 왕국에 합병 되었다. 이에 따라, 보이보디나의 세르비아인들은 헝가리 당국의 강력한 동화정책으로 종교와 문화, 정치참여에서 탄압받았다.

이후 반세기 가까이 세월이 지난 1914년, 보이보디나의 세르비아인들에게는 다시 한번 헝가리로부터 독립의 기회가 찾아왔다. 전쟁 말, 종전을 1달여 앞둔 1918년 10월 경에 이미 전쟁 수행에 한계에 이른 이중 제국은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슬로베니아는 이중제국으로부터의 독립과 세르비아로의 합류를 선언했고, 협상국의 도움을 받아 재건된 세르비아군은 헝가리 남부로 진격하여 보이보디나를 점령했다. 이후 트리아농 조약(1920년)을 통해 최종적으로 보이보디나 일대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에 편입되었다.

3.2. 2차 세계 대전 및 전후

파일:보이보디나 인종 분포 1910.gif
1차 대전 이전(1910년) 보이보디나의 민족 구성 [9][10]

1차 대전 발발 이전, 보이보디나 지역의 민족 구성은 세르비아계 33.8%(51만명), 헝가리계 28.1%(42만명), 그리고 독일계는 21.4%(32만명)으로 세르비아와 헝가리계에 이은 보이보디나 제 3의 민족이었다. 이외에 크로아티아계, 슬로바키아계, 루마니아계등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다. [11]
보이보디나 지역은 유고슬라비아 왕국에 합병 되었지만, 다민족 국가이면서 세르비아계가 주도하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태생부터 불안정했다. 유고슬라비아 왕정이 2차대전 이후 붕괴하기까지 보이보디나 지역에는 자치적인 행정구역이 설립되는 일은 없었다.
1941년, 소련 침공을 눈앞에두고 히틀러의 변덕으로 인해 나치독일과 추축국은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침공했다. 극심한 내부분열에 시달리던 유고슬라비아는 개전 11일만에 붕괴되고 추축군이 유고슬라비아 전역을 점령한다. 독일은 유고슬라비아를 해체하여 괴뢰을 세우거나 헝가리, 불가리아, 이탈리아 등에 영토를 넘겼다.
보이보디나 지역은 역사적으로 세 개 지역(버치카, 바나트, 시르미아)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나치 점령 기간 동안 이 강역을 따라 삼분할 되었다. 서부의 버치카 지역은 헝가리 왕국에 합병되었고, 역사적으로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의 강역이었던 시르미아는 크로아티아 독립국에 편입되었다. 동부의 세르비아령 바나트는 독일이 점령한 세르비아 군정 지역의 자치주인 바나트 자치주가 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 문서 참조
한편, 나치 점령 기간 동안 보이보디나 지방의 독일인들은 악마와 손을 잡고 말았다. 전쟁이 확대되어감에 따라, 외국인과 재외 독일인을 대상으로 무장친위대를 창설하고 있던 나치독일은 근 30만에 달하는 보이보디나 독일인을 대상으로 무장친위대 가입을 독려 또는 징집했다. 1941년 말, 보이보디나 독일인을 근간으로, 제7 SS 의용 산악사단이 창설 되었다. 사단의 명칭은, 보이보디나 독일인의 영웅인 사부아 공 외젠의 이름을 따 프린츠 오이겐이라 명명 되었다. 무장친위대 사단 중 기병, 산악 사단은 주로 대파르티잔 전선에 투입 되었는데, 프린츠 오이겐 사단은 크로아티아 및 독일군과 함께 유고슬라비아에서 활동 중인 티토의 빨치산 토벌임무를 맡게 되었다. 2차 대전의 파르티잔 전선이 다 그렇듯, 프린츠 오이겐 사단 장병들은 빨치산 토벌작전과정에서 보이보디나 지역의 빨치산 전투원과 민간인들[12] 을 대상으로 전쟁 범죄를 저질렀고, 유고슬라비아 내 유대인 학살에 가담했다. 그리고 곧, 존경하는 영웅의 이름 아래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르고 다닌 대가를 치르게 된다.
세계 대전이 끝나고 티토가 유고슬라비아를 사회주의 연방으로 재건했을 때, 단순히 나치에 협력하는 수준이 아니라, 지역사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힌 독일계 주민이 받게된 분노와 적대감은 어마어마했다.[13] 보이보디나 독일인들은 종전 직후 즉각적으로 추방당했고,[14][15] 대부분이 독일 본국이나 오스트리아로 향했다. 이로써 한때, 보이보디나 제 3의 민족이었던 보이보디나 독일인 공동체는 오늘날 보이보디나 자치주에서는 더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독일인들이 떠난 정착지에는 주로 세르비아인 또는 몬테네그로인 등이 재정착하였다. 보이보디나 자치주의 독일식 지명들도 이때를 전후로하여 슬라브식으로 개명 됨으로써 보이보디나에는 한때 수많은 독일인이 거주했다는 흔적조차 찾기 힘들다.
2차 대전의 종전과 함께, 유고슬라비아는 종전의 영토를 모두 회복하고, 이탈리아로부터 남슬라브계가 주류인 몇몇 영토를 할양받았다.[16] 추축국에 삼분할 되었던 보이보디나 지역 또한 유고슬라비아에 반환 되었다. 국토를 수복한 티토는 유고슬라비아를 사회주의 정체에 각 민족을 대표하는 공화국으로 구성된 연방제 국가로 재건했다. 헝가리계를 비롯한 여러 민족이 살아가는 보이보디나와 코소보는 비록 별개의 공화국을 구성하지는 못했지만,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에 소속된 자치주로 인정을 받았다. 이후 냉전의 끝무렵, 유고 내전을 거치고 코소보가 세르비아로부터 사실상 독립을 한 지금까지도, 보이보디나 자치주는 세르비아 공화국 소속으로 남아있다.

4.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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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색은 세르비아인, 노란색은 헝가리인, 보라색은 슬로바키아인, 자주색은 루마니아인, 오렌지색은 크로아티아인 다수분포 지역이다. 상술했듯이, 한때 역내 제 3의 민족이었던 독일계는 2차대전 이후 추방 되어 잔존하고 있는 인구는 거의 없다.

1% 넘게 차지하는 민족으로는 세르비아인(66.76%), 헝가리인(13%), 슬로바키아인(2.6%), 크로아티아인(2.43%), 집시(2.19%), 루마니아인(1.32%), 몬테네그로인(1.15%)이 있다. 주요 종교는 2002년 기준으로 정교회 68.97%, 가톨릭(로마 가톨릭 및 동방 가톨릭 교회) 19.11%, 프로테스탄트 3.55% 등이다.

[1] 보이보디나에서 쓰이는 6개 공용어이다.[2] 시르미아 지방은 세르비아계가 다수 거주하는 동쪽 지역은 보이보디나에, 서쪽 지역은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분할되어 편입 되었다. 두 곳이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소속되어있을 때에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오늘날 크림반도 사태와 같이 연방이 해체되고 크로아티아가 독립하자 크로아티아령 서부 시르미아 지역의 세르비아계 주민들이 이에 반발하여 크라이나-세르비아 공화국에 합류했었다.[3] 출처: 두샨 바타코비치 外, 정근재 역, 『세르비아 역사』, (선인, 2001), p 131~p 133[4] 오늘날 헝가리를 지나 보이보디나에서 다뉴브에 합류하는 다뉴브 강의 주요 지류 중 하나[5] 위에 상술 했듯이 보이보디나 자체가 세르비아어로 '공국'에 해당하는 뜻이니 겹말인 셈이지만, 보이보디나를 일종의 고유명사로 취급하여 보이보디나 공국이라 표현했음[6] 오늘날의 보이보디나 자치주의 강역과 거의 유사함을 알 수 있다.[7] Voivodeship of Serbian & Banat of Temeschwar 더 나은 번역명이 있으면 추가바람[8] 지도의 20번이 보이보디나-바나트 이다. 16번이 헝가리왕국 18번은 트란실바니아 대공국이다.[9] 파란색은 세르비아인, 노란색은 헝가리인, 황토색은 독일인, 주황색및 붉은색은 크로아티아인, 적갈색은 루마니아인, 보라색은 슬로바키아인이다.[10] 아래의 2011년 지도와 비교해보면 독일인이 거의 없어졌음을 확인 할 수 있다.[11] 루마니아계의 경우는 유고슬라비아왕국과 루마니아 왕국간에 바나트를 분할한 이후 상호간에 인구 이동이 있어 그 수가 줄어들었다.[12] 주로 세르비아계, 또는 나치에 비협조적인 독일계도 포함해서[13] 쉽게 말해, 해방 직후 조선인들이 재한 일본인에 느끼는 감정을 생각하면 된다.[14] 유고의 사례와 유사하게 전쟁기간, 독일에 점령당해 온갖 곤욕을 치뤘던 체코폴란드에서도 대대적인 독일인 추방이 뒤따랐고, 독일의 레벤스라움을 건설하고자 했던 침략전쟁은 아이러니 하게도 중부, 동부 유럽의 수백년 역사를 가진 독일인 공동체의 소멸과 함께 종결되었다.[15] 이러한 대대적인 추방 흐름속에서 루마니아에서는 독일계에 대한 강제추방이 없었다. 루마니아가 중간에 연합국으로 전향하여 독일에 총부리를 돌리고 치열하게 싸우긴 했지만, 독일에 직접 점령되어 고초를 겪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루마니아의 독일계 주민들은 공산 정권과 동구권 붕괴를 거치면서 대부분 독일 본국으로 귀환했다.[16] 이스트라 반도,이탈리아령 달마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