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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Republika Srpska Krajina Република Српска Крајина | ||
<rowcolor=#fff> 국기 | 국장 | |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의 영역 [1] | ||
1991년~1995년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유고슬라비아 SFR ,,,, | 크로아티아 | |
유고슬라비아 SFR ,,,, | ||
유고슬라비아 SFR ,,,, | 유엔 동부 슬라보니아, 버러녀, 시르미아 자치주 | |
유고슬라비아 SFR ,,,, | ||
<colbgcolor=#de0000> 위치 | 동유럽, 발칸반도 | |
면적 | 17,028㎞² | |
인구 | 43만 명(1994년) | |
수도 | 크닌(Knin) | |
정치체제 | 공화제 | |
언어 | 세르비아어 | |
민족 | 세르비아인 | |
통화 | 크라이나 디나르(1992 ~1994) 유고슬라비아 디나르(1994 ~1995) | |
종교 | 세르비아 정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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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인 1991년부터 1995년까지 크로아티아 영토 내에 존재한 사실상 세르비아(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의 괴뢰국.1991년 6월 25일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자 여기에 불만을 품던 크로아티아 내의 세르비아계가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의 접경 지역이던 크닌스카크라이나(Kninska Krajina)를 중심으로 독립을 선언했고 크로아티아와 다른 독자적 노선을 걸을 것을 천명하게 된다.
말이 독자적 노선이지, 실상은 세르비아의 지원을 받아 크로아티아와 지속적으로 전쟁을 해서 크로아티아를 다시 세르비아가 정복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크라이나 세르비아 공화국은 국제 사회의 인정을 받지 못했고[2]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군사적 지원에도 불구하고 독립 선언 4년 만인 1995년 여름 크로아티아군의 총공세로 사실상 괴멸 상태에 놓이게 되었으며 이후 1998년 공식적으로 크로아티아에 귀속된다.
2. 배경
중세 크로아트 왕국은 헝가리 왕국과 동군연합으로, 16세기 크라이나 지방을 포함한 크로아티아 왕국이 모하치 전투로 러요시 2세가 전사하고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왕위가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합스부르크 가문에 귀속되면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유럽의 최전선 중 하나가 되었다.크로아티아인이 우세한 곳이던 이 지역에 오스만 제국의 종교적 박해를 피해 세르비아인이 이 일대로 이주해오기 시작했고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세르비아인을 오스만 제국과의 국경 지대에 배치하면서 수세기 만에 세르비아인들도 이 곳에서 상당한 세력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두 민족의 세력 균형 현상은 오스트리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거쳐 유고슬라비아 왕국,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지배를 거쳐가는 와중에도 계속 이어졌는데 이는 두 민족이 갈등 없이 살아가고 있을 때는 민족 화합의 상징으로서 기능하였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이러한 세력 균형은 두 민족간의 갈등이 증폭될 경우 특정한 우위 세력이 없을 시에는 이러한 갈등이 곧 매우 폭력적인 양상으로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1991년부터 발생한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 상당한 민족적 동질성을 가지고 있었던 슬로베니아가 큰 충돌 없이 유고 연방으로부터 독립한 반면에 세르비아인이 일정한 세력을 차지하고 있던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인,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모두 상당한 세력을 차지하고 있던 보스니아는 엄청난 유혈 충돌 끝에야 겨우 독립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여실히 증명되었다.
이미 유고 내전 이전에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크로아티아계 우스타샤와 세르비아계 체트니크가 서로 벌인 인종 학살은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 사이에 깊은 골을 남기고 한동안 수면 아래에 잠겨있었다. 이것이 요시프 브로즈 티토 사망 이후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올랐고 동유럽 혁명 이후 2년이 지난 1991년 이는 마침내 재앙으로 이어졌다.
3. 전개
크로아티아의 경우 이 같은 양상이 가장 잘 드러난 곳이 크라이나 지방이었다. 1991년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언하자 크닌스카크라이나[3] 지방에서 다수를 점하고 있던 세르비아인들은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보이콧하고 크라이나 지방의 크로아티아로부터의 분리를 추구했다.1991년 12월 19일 밀로셰비치의 암묵적 지원 아래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성립이 선포되었다. 세르비아 측의 지원 아래 세르비아 크라이나군(Srpska Vojska Krajine, Српска Војска Крајине), 약자 SVK는 화력, 장비 면에서 크로아티아군을 압도해 순식간에 크라이나 지역의 상당수를 장악한다.
크로아티아군은 반격을 시도했지만 매우 열세였고 이듬해 임시 휴전 협정을 맺고 다음을 기약하게 된다. 보스니아 전쟁이 아니었다면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대대적인 지원을 했던 크라이나 측이 크로아티아를 역관광 보낼 수 있을 정도로 크로아티아군이 심하게 털렸다. 한때는 크라이나 측이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 인근까지 위협했을 정도였다.
4. 정치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RSK)은 나름 정치체제를 갖추기 위해서 크닌에다가 임시로 대통령궁과 국회를 짓기도 했다. 이원집정부제를 채택하고 대통령은 밀란 바비치를 세웠다가 바비치는 수상으로 내려가고 밀란 마르티치가 멸망할 때까지 대통령을 했다.그러나 밀로셰비치는 철저하게 크라이나 지방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다. 밀로셰비치는 스릅스카 공화국이 세워지자 라도반 카라지치의 명령을 따르라고 크라이나 측에 지시하여 사실상 카라지치의 부하에 불과했다.
쉽게 말하면 세르비아의 괴뢰국이 세운 이중 괴뢰국이 RSK였던 셈이다. 실제로 RSK는 크로아티아와의 전선 쟁탈전을 마무리하자 모든 국가 역량을 보스니아 전쟁에 총동원했다.
RSK가 동부전선에만 신경을 쓴 결과[4] 서부 방어가 허술해지며 1995년 단 일주일만에 크로아티아군한테 허무하게 멸망당하는 원인이 되었다.
5. 붕괴
1994년~1995년 부분을 보면 된다.
1994년부터 NATO가 보스니아 내전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 이웃한 크라이나의 사태도 전환점을 맞게 된다. 3년간 미국 민간군사기업의 자문과 지원을 받은 크로아티아군[5]은 3년 전에 비해 전력 면에서 많은 향상을 하게 되었고 1995년 5월 1일부터 시행한 섬광 작전(Operacija Bljesak)으로 SVK는 상당한 피해를 입는다.
이미 크라이나 측은 미국이 크로아티아를 지원하는 시점부터 버티는 것이 버거워졌다고 생각하고, 1995년 5월 23일 스릅스카 공화국과 국가 통합에 나섰으나 이미 지나간 버스였다.
마침내 석달 뒤인 8월 4일부터 나흘간 벌어진 일명 폭풍 작전(Operacija Oluja)는 크라이나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고 이로써 크라이나 세르비아 공화국은 사실상 궤멸 상태에 놓이게 된다. 놀랍게도 8월 5일 전선 붕괴 시작 1주일만에 크라이나 세르비아 공화국이 멸망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무려 4년 동안이나 유지하고 있던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전선이 단 1주일만에 붕괴한 것이다.
8월 4일 오전 9시 폭풍 작전[6] 시작 31시간만인 8월 5일 오후 4시에 크라이나 수도 크닌이 함락됐고, 전투 48시간만에 크라이나 대부분의 지방이 크로아티아군 손에 떨어졌으며 8월 8일 크로아티아는 크라이나의 최종 멸망을 선언하였다.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의 대통령 밀란 마르티치는 스릅스카 공화국의 바냐루카로 도망갔으며 RSK의 밀란 바비치 수상은 9월 11일 베오그라드에 정착하였다. 크라이나의 외무차관[7]은 크닌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크로아티아에 잡혀서 현장에서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 대충 전사로 처리한 모양.
살아남은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지도부 인사들은 영내 비세르비아인에 대한 인종청소 혐의로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에 피의자로 넘겨져 처벌을 받았다. 밀란 바비치는 전범재판을 받아 13년 징역형을 살고 항소심 재판을 하던 도중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밀란 마르티치는 재판에서 징역 35년형을 선고받고 현재 에스토니아의 감옥에 수감돼 있다.
이때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유고 연방군에서 공식적으로 요구했던 연방군의 크라이나 파병안을 끝내 거부하여 크라이나의 멸망을 방치했다. 밀로셰비치가 크라이나를 방치한 이유는 여력이 없어서는 아니었고[8] 1993년 아테네 합의가 스릅스카 공화국에 의해 파기되자 밀로셰비치가 격렬하게 반발해 스릅스카로 들어가는 군사 지원을 90% 이상 감축했기 때문이다.
밀로셰비치는 이전부터 주적은 크로아티아의 프라뇨 투지만 대통령이라고 주장했고, 보스니아 전쟁을 하루빨리 마무리 지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라도반 카라지치는 크라이나의 밀란 마르티치 대통령을 자신의 수족으로 부리면서 크로아티아 전선을 내팽개치고 보스니아의 비하치 함락에만 골몰했다. 그러다 보니 카라지치와 밀로셰비치는 갈등이 점점 심해졌고[9] 1995년 들어서면 밀로셰비치는 이 일대 지역에 대해 아예 손절에 가까운 입장까지 가게 된다.
보스니아 내전에도 새로운 전환점을 안겨주었으며 크로아티아군이 이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크라이나에 거주 중이던 20만 명 가량의 세르비아인들이 보스니아 영내의 스릅스카 공화국과 세르비아 본토로 축출되면서[10] 크라이나 사태는 사실상 종식된다. 이후 이 지역은 UN 측에서 일정 기간 관리하다가 1998년 크로아티아가 이 지역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획득하게 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세르비아인에 대한 크로아티아의 인종 청소가 자행됨으로서 수많은 민간인 피해가 나서, 당시 작전을 주도한 크로아티아군 인사 몇몇이 전범재판에 넘겨지기도 했으며[11], 크로아티아 국내에서는 큰 반발을 부르기도 하였다.
이 작전의 결과 오랜 기간동안 세르비아인들의 거주지역이었던 크라이나는 크로아티아인이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이 되었다.[12] 광신적인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추구했던 대세르비아라는 야욕은 아이러니하게도 세르비아인 거주지역의 축소를 불러온 것이다.
비록 크로아티아군의 인종청소 역시 비열한 행위였지만, 타협없이 잔인한 전쟁을 계속하던 크라이나 세르비아 공화국의 지도층 역시 한때 동구권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중 하나이자 풍족하고 평화롭던 유고슬라비아를 인간도살장으로 만든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6. 군사
자세한 내용은 세르비아 크라이나군 문서 참고하십시오.7. 국가
공식 국가 "정의의 신".
크라이나 세르비아 공화국이 존재하고 있던 시절 국가처럼 가장 많이 불리던 노래.[13]
8. 여담
국내에서는 Krajina 중간의 'j'를 영어식 발음인 [dʒ]로 읽어 크라이나를 '크라지나'로 표기한 적이 많았지만 세르보크로아트어 외래어 표기법에 따른 표기는 '크라이나'이다. 세르보크로아트어 계통에서는 'j'를 독일어와 마찬가지로 [j], 즉 영어의 y 발음으로 발음한다.국영 방송국 SRTV KNIN에서 스릅스카 공화국이 나온다.#
[1] 지도의 빨간 부분[2]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크로아티아에 크라이나, 보스니아에 스릅스카 공화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워놓고는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유는 세르비아 입장에서 이들은 단순히 '미수복지구'이지 국가가 아니기 때문.[3] 슬라브어권에서 '크라이'는 변경지역이라는 의미가 있어 크라이나라는 지명은 남유럽과 동유럽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예: 우크라이나) 그래서 이곳을 특정해 이르려면 중심도시인 크닌에서 따와 크닌스카크라이나라 한다.[4] 보스니아의 비하치가 RSK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5] 민간군사기업의 자문과 지원이라고는 하나, 미국 국무부가 알선해준 전직 미군 고위장성 중심의 민간군사업체라는 측면에서 실질적으로 미국과 NATO가 크로아티아군을 교육하고 훈련시켜준 것과 마찬가지였다.[6] UN이 오전 8시 이전에 전쟁을 시작하지 말라고 통보해서 크로아티아에서 9시부터 크라이나 침공을 시작했다.[7] 외무장관은 밀란 바비치가 겸직했다.[8] 밀로셰비치는 보스니아 전쟁에 대해 철저하게 방관자의 역할만 했다.[9] 이후 1995년 데이턴 협정에 원래라면 라도반 카라지치가 참여해야 하지만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참가한 것은 다 이런 내부 정치 갈등이라는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10] 그렇다고 이 사람들이 크라이나 지역이 크로아티아에게 함락당한 이후에 세르비아로 피난와서도 세르비아 본토의 세르비아 국민들로부터 좋은 대접을 받았냐면 더더욱 아니었다. 외려 외국인, 불법체류자 취급을 하며 엄청난 홀대와 차별을 가했으며 이 때문인지 크로아티아 출신의 세르비아인들도 세르비아 본토의 세르비아인들과 사이가 그리 좋지 않다. 우습게도 이는 그리스나 프랑스나 일본에 이르기까지 근현대에 흔했던 일이었다.[11] 대표적으로 전범 재판 재판정에서 판결에 불복하며 즉시 독약을 먹고 자살한 슬로보단 프랄략이 있다. 슬로보단 프랄략의 결정적인 혐의는 보스니아에서 보슈냐크인들과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한 헤르체그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공화국의 성립에 관여했다는 게 컸지만.[12] 물론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끝나고 세르비아로 피난을 간 일부 크로아티아 출신 세르비아인 주민들이 돌아오기도 했다. 현재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인 숫자 역시 4.35%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13] 세르비아 민족주의 민병대 체트니크들이 부른 회색 새들인 매들이여(Соколови, сиви тићи)를 개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