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bgcolor=#3951a3><colcolor=#fff>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초대, 3대 대통령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5대 총리 밀란 바비치 Милан Бабић | Milan Babić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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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956년 2월 25일 |
| 유고슬라비아 FPR 크로아티아 SR 쿠카르 | |
| 사망 | 2006년 3월 5일 (향년 50세) |
| 네덜란드 왕국 헤이그 | |
| 학력 | 베오그라드 대학교 치의학부 |
| 직업 | 치과의사, 정치인 |
| 정당 | 세르비아 민주당 |
1. 개요
신유고연방의 괴뢰국인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의 초대, 3대 대통령이자 5대 총리로 2004년 국제사법재판소에서 반인륜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다. 2006년 3월 5일 스케베닝겐의 교도소에서 자살했다.2. 생애
밀란 바비치는 1956년 2월 25일 쿠카르에서 태어났다. 1981년 베오그라드 대학교 치의학부를 졸업한 뒤 세르비아계가 다수를 차지 했던 크로아티아 남서부 도시인 크닌의 보건소 소장이 되었다. 유고슬라비아가 붕괴되기 시작하자 밀란 바비치는 정계에 입문한 뒤 2월 17일 크닌에서 세르비아 민주당에 창립 멤버 중 한 명으로 합류했다. 그는 크닌의 SDS 위원회 위원장이었고 크로아티아 최초의 다당제 선거에서 당 선거 본부장이었다. SDS는 세르비아계 주민이 다수인 지방자치단체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바비치는 크닌 시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세르비아인들이 크로아티아 독립에 저항한 이유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크로아티아 독립국 에서 자행된 대량 학살 에서 비롯되었다. 크로아티아 독립국 의 상징은 1990년대 초 민족주의가 극에 달했던 시기에 크로아티아 전역에서 거침없이 되살아났다. 그래서 크로아티아에 사는 세르비아인들은 프라뇨 투지만의 움직임에 저항하기 위해 세르비아 민족 평의회를 설립했고, 바비치가 이 평의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다.1990년 9월, 크라이나 세르비아계 주민 99.7%가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인의 "주권과 자치"를 지지하는 국민투표가 실시되었고, 크로아티아 당국은 이를 불법 및 무효로 선언했다. 이후 크닌의 바비치 행정부는 1990년 12월 21일 크라이나 세르비아 자치주를 설립했고, 이 자치주는 1991년 4월 1일 크로아티아로부터의 분리 독립과 세르비아 합병을 선언했다. 바비치는 군대를 조직하고 도로를 봉쇄하여 달마티아와 크로아티아의 나머지 지역 간의 관계를 사실상 단절했다. 이후 본격적인 유고 전쟁이 발발하여 크로아티아 영토의 3분의 1이 점령당했고, 비세르비아계 주민들은 인종 청소를 당했다. 가장 치열한 전투는 1991년 8월부터 12월까지 벌어졌는데, 이 기간 동안 약 8만 명의 크로아티아인과 무슬림이 크라이나에서 피난을 가거나 추방되거나 살해되었다.
1991년 11월, 유엔의 사이러스 밴스 특별대표는 크라이나를 군사적으로 비무장화하고 유엔 평화유지군이 보호하는 계획을 제시했으나, 밀란 바비치는 이 계획에 강력히 반대했다. 이후 1991년 12월 19일, 독일 외무장관 한스디트리히 겐셔가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인정한다고 발표하였다. 바비치는 이를 반대했으나 신유고연방 대통령인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밴스의 계획을 지지하여 바비치를 정치적으로 배제했다. 1992년 2월, 바비치는 세르브 크라이나의 대통령직에서 물러났고, 그 자리는 더 순종적인 고란 하지치가 차지했다. 이후 바비치는 외무장관직을 맡았지만 영향력은 약해졌다. 유엔 평화 회담은 성과를 내지 못했고, 바비치는 밀로셰비치가 크라이나를 사실상 통제했다고 증언했다. 1993년 12월, 크라이나에서 열린 선거에서 바비치는 밀란 마르티치와 경쟁해 승리했으나, 베오그라드는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1995년 7월, 군사적 압박 속에서 바비치는 크라이나 정부의 수장으로 임명되었고, 크로아티아와의 통합을 추진했다. 그러나 8월 4일, 크로아티아의 '폭풍 작전'이 시작되면서 크라이나는 빠르게 함락되었고, 바비치는 가족과 함께 세르비아로 피신했다. 이후 베오그라드 근처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2002년 12월, 바비치는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전범 재판에 검찰 증인으로 출석하여 밀로셰비치가 크로아티아 내 분쟁에 개인적으로 연루되었다고 증언했다. 2003년 11월 18일 재판소는 바비치 본인에 대한 기소장을 공개하여 1991년 8월 1일 부터 1992년 2월 15일 까지 크라이나의 여러 마을에서 수백 명의 크로아티아 인 과 기타 비세르비아인을 살해한 혐의를 포함하여 반인륜 범죄와 전쟁의 법률 및 관습 위반 혐의 4건을 기소했다. 처음에는 혐의에 대해 무죄를 주장했지만, 바비치는 2004년 1월 27일 검찰과 변호 협상을 시작했다. 2004년 6월 28일, 헤이그 재판소는 바비치에게 13년 징역형을 선고하였다. 하지만 2년 뒤 바비치는 스헤베닝겐에 위치한 교도소에서 스스로 목을 매달아 자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