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17 02:48:03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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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약력4. 평가5. 각종 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

Слободан Милошевић
Slobodan Milošević
1941년 8월 20일 ~ 2006년 3월 11일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 그리고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의 전 대통령이자 독재자, 학살자, 발칸의 도살자로 불리던 정치인. 그리고 포퓰리스트.[1]

집권 동안 세르비아 민족주의와 소패권주의를 내세워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코소보 등 발칸 곳곳에서 전쟁을 벌이고 인종 학살을 자행, 20만 명을 죽음으로 내몰고 300만 명을 난민 신세로 만들었으며 한때 제3세계의 주도국이었던 유고슬라비아 경제를 파탄내고 8개 소국으로 쪼개지는 데 크게 일조했다. 물론 유고슬라비아 경제는 1980년대에 이미 외채 문제로 인해 어려운 상태였지만 이를 감안해도 유고슬라비아의 산업 기반을 절단내서 아주 나락으로 떨어뜨려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게 만든 건 밀로셰비치임에 틀림없다. 그가 개입한 범죄로 유고슬라비아 내전보스니아 내전 당시의 스레브레니차 학살 사건, 그리고 코소보 전쟁 당시의 수많은 전쟁범죄 등이 있다.

2. 생애

1941년 8월 20일 밀로셰비치는 세르비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리스 정교 성직자였고 어머니는 공산주의자 교사였다. 그는 아버지가 1962년에, 어머니는 1973년에 각각 자살하는 비극적인 가정 환경에서 자라났다. 그의 아버지인 스베토자르 밀로셰비치(Svetozar Milosevic)는 몬테네그로 출신으로 종교 교리를 가르치는 성직자였는데, 밀로셰비치가 초등학교를 다닐 무렵 자신의 가정을 포기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962년에 자신의 머리에 권총 방아쇠를 당겨 자살했다. 어머니 스타니슬라바(Stanislava)는 열성 공산당원이었는데, 그녀 역시 1974년 거실에서 목을 메어 자살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밀로셰비치의 삼촌은 유고슬라비아군 육군장군이었는데, 그 역시 권총으로 자살했다고 한다. 학자들은 밀로셰비치의 악마적이고 잔인한 성격이 이런 불우한 가정 환경에서 탄생한 것이라고 본다.

밀로세비치는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베오그라드 대학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이데올로기 위원회(SKJ)의 장으로 활동했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그는 훗날 그의 정치 경력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인물 이반 스탐볼리치를 만난다. 스탐볼리치는 SKJ에서 밀로세비치의 지위를 상승시켜주는 등 정치적으로 후원했다. 밀로셰비치는 1964년에 베오그라드 대학교에서 법학 학위를 취득했다. 학위 취득 후 지방에 있는 공산당 산하 기관인 경제연구소에서 여러 직책을 맡아 일하며 공산주의자로 입지를 다져 나갔다.

밀로세비치는 고등학교 때부터 교제했던 미랴냐 마르코비치(Mirjanja Markovic)와 결혼하게 되었다. 그녀는 세르비아 공산당 출신의 강경 노선파로, 베오그라드 대학교 사회학 박사 학위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녀는 밀로세비치가 권력을 얻기까지 그의 정치 성향에 큰 영향을 끼친다. 이들 부부 사이에는 두 자녀가 있었는데, 아들인 마르코(Marko)와 딸인 마리야(Marija)가 있다. 1960년 학교를 떠나면서 밀로셰비치는 베오그라드의 경제부 고문 역할을 담당했고, 1968년에 이르러 밀로세비치는 테크노가스 회사에 입사하게 된다. 테크노가스는 정부가 운영하는 가스 회사로 그의 대학 친구인 이반 스탐볼리치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1973년에 그는 테크노가스의 사장이 되었고, 스탐볼리치의 후원에 힘입어서 1978년 베오그라드 연합은행의 총재가 되었다. 밀로셰비치는 이 곳에서 일하면서 외국으로 나갈 기회를 많이 얻게 되었고 파리뉴욕을 자주 갔는데, 이는 그의 영어 능력이 향상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티토 대통령 시절부터 온건한 공산주의 사상을 체득한 그는 빠른 두뇌회전과 강한 추진력으로 베오그라드에서 정치적 기술을 익혔고, 1980년 티토 대통령의 죽음으로 생긴 권력 공백을 틈타 강력한 정치 지도자로 부상했다. 1983년 밀로셰비치는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최고 간부회의 일원으로 활약하게 되었고, 이듬해 1984년에 그는 세르비아 공산당 제1서기장을 역임했다. 그는 형제애와 통일을 내세운 티토의 정책에 큰 불만을 가졌으며, 특히 코소보보이보디나에도 자치권을 준 1974년 헌법을 세르비아의 발목을 쥐는 족쇄라고 생각하였다. 1984년 친구인 이반 스탐볼리치가 세르비아 공산당 새 지도자가 되자 공산당 베오그라드 지구당 위원장에 올랐고, 1987년 4월에는 코소보에서 소수인 세르비아계가 터뜨린 불만에 대새 세르비아계 편을 들어 알바니아계에 대한 진압을 지시하면서, 세르비아 내에서 거물 정치 인사가 되었다.

그 해 스탐볼리치를 당내 선거에서 축출한 후 공산당 당수가 된 그는 1989년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는 대 세르비아주의를 주장하여, 밀로셰비치가 세르비아 내부 자치주인 보이보디나와 코소보, 그리고 연방 구성국인 몬테네그로의 공산당 서기장을 관료혁명이라고 하는 관제 동원시위를 통하여 친세르비아계 인물로 바꾸면서 연방내에서 세르비아 패권주의를 추구하자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는 엄청난 불만을 표시했고, 두 나라에서도 민족주의 성향의 지도자가 집권하여 갈등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결국 이후에 유고슬라비아 내전으로 이어진다.

각 공화국의 공산당이 민족주의를 추구하면서, 사회민주주의-좌파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김에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세르비아 지부도 세르비아 사회당으로 재편되었는데 말이 사회민주주의지 실상은 그냥 세르비아 패권주의나 다름없었다. 어찌됐건 첫 자유총선에서 마침내 밀로셰비치는 65%의 득표를 얻어 세르비아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는데,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세르비아에서 최초로 치뤄진 민주적인 선거방식에 의한 것이었다.근데 뽑힌 놈이 천하의 개쌍놈이였다는 것이지

밀로셰비치는 대통령 선거에서 압승한 김에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에 대한 반감을 고조해 나가며 인기몰이를 했고, 1991년에 슬로베니아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것은 물론 크로아티아와의 전쟁도 지리하게 늘어졌지만 1992년 5월 연방 총선에서 세르비아 사회당은 연립정당과 합쳐서 과반이 넘는 의석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고, 12월에 치러진 세르비아 대선에서 밀로셰비치는 53%의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다.

그는 티토 격하 운동도 시행했다. 하지만 티토 격하 운동은 이미 1980년대 초반 세르비아 민족주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사실 세르비아 총선과 연방 총선에서 세르비아 사회당은 과반의석의 확보에 실패했지만, 극우 정당인 세르비아 급진당과 연립 정권을 수립하고 여론 조작을 통해 대 세르비아주의를 고취했다. 당시 세르비아 국영 방송국 RTS(이전 JRT 베오그라드)는 밀로세비치의 측근인 듀산 미테비치가 장악했고 RTS는 이미 1980년대 후반부터 타 공화국을 비방하며 세르비아인을 선동하는 것은 물론, 영상을 조작하거나 타 공화국에서 벌어졌던 일을 의도적으로 과장 및 왜곡하여 보도하면서 타 공화국과의 화해를 주장하거나 과거의 유고슬라비아를 그리워하는 의견을 표하는 인사들을 반역자 또는 매국노로 몰아갔다. 신문사들은 상대적으로 티비에 비해 밀로세비치의 언론장악에 자유로운 편이었으나 당시의 민족주의적 분위기에 어느 정도 편승하여서 세르비아인들을 상대로 자극적인 보도를 내보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밀로셰비치는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등 다른 공화국에 거주하는 세르비아계 주민들의 민족주의 의식을 고취한 뒤에 세르비아에 의한 유고 연방 통치 야심을 드러내며 결국 유고 전역에서 유혈사태를 초래했다. 그의 통치는 굉장히 억압적이고 폭력적이었으며, 또한 배타적이었다.

밀로셰비치는 1997년 연방 대통령에 오른 뒤에도 철권 통치를 휘둘렀으며, 결국 보스니아 내전코소보 전쟁 당시에 인종청소를 저질렀다. 악명 높은 절멸수용소를 세운 다음 수용소에 사람들을 끌어와서는 수많은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이곳에 끌려온 사람들을 개처럼 가지고 놀다가 죽이거나, 천천히 고문을 하다 살해하거나, 손톱을 뽑거나 눈알을 빼내서 죽이거나, 여성들에게 모욕을 줄 목적 또는 종교적 신념을 없애기 위해서 강간하는가 하면 강제로 이물질이나 심지어 인육을 먹이는 만행을 벌였고, 사람들을 총살시키거나 생매장을 시키는 등 온갖 더러운 짓거리를 저질렀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유명한 스레브레니차 학살이다. 이 학살로 인해 8,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해당해 땅에 매장당했다.

학살뿐만 아니라 독재자답게 부정부패에도 열심이었는데, 유고슬라비아의 1인당 GDP가 절반으로 줄어드는 동안[2] 횡령한 돈이 무러 10억 달러나 되었다. 횡령한 양으로도 필리핀마르코스, 인도네시아수하르토와 함께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다.

그러나 이런 미친 학살극을 벌인 것과는 별개로 정치가로서는 꽤나 유능하기는 했다. 1995년 보스니아 내전 때는 서방이 경제 제재를 비롯한 여러 방법으로 압력을 가하자 협상에 나서 데이튼 협정에 서명하는가 하면 코소보 전쟁 때에도 몇 차례에 걸쳐 나토와의 협상에 응하는 등 현실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또한 보스니아 내전이나 크로아티아 내의 세르비아계 괴뢰 공화국 크라이나-세르비아 공화국에 대한 지원에서도 민병대를 통해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등 전쟁 범죄의 책임을 피하려는 모습도 보여줬으며, 국내 정치에서도 1996년 세르비아 지방선거에서 야당에게 수도 및 제2의 도시인 니쉬에서 패배한 것을 인정하는 등 실리적인 모습도 보였다.

나토의 유고 공습 이후 지지율이 급락하고 국민들의 저항이 거세지는 가운데, 결국 신 유고연방군은 코소보에서 철수했다. 이듬해 치러진 선거에서 패배했으나 선거결과를 조작해 2차 결선투표를 강행하려 했다. 원래는 야당 후보가 과반수를 조금 넘는 50.3%의 득표율로 결선 없이 당선될 예정이었지만, 밀로셰비치는 야당 후보가 얻은 표를 48.9%로 조작한 뒤 결선 투표에서 세르비아 급진당 등 극우 정당들과 연합하여 연방 대통령에 재선되려 했다. 이에 반발하여 세르비아 내 반정부 시위대가 중장비를 이용해 세르비아 국영 방송국 및 국회, 정부청사를 점거하는 일명 불도저 혁명이 일어났다. 이 때 무려 30만 명이 넘는 국민들이 밀로셰비치의 퇴진을 요구했다. 결국 2000년 10월 5일에 끝내 자신이 세르비아에 불러온 결과를 인정하고, 13년간 차지했던 권좌에서 물러났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에 호응했던 세르비아 국민들이 밀로셰비치를 몰아낸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세르비아 국민들이 대 세르비아주의를 추종한 결과가 경제 파탄과 국제위상의 추락(제3세계를 주도하던 국가에서 전범국가로 추락), 국가의 전반적인 약체화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1990년대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광풍 아래에서도 세르비아인이 모두 밀로셰비치 정권에 호의적이었던 것은 아니었으며 밀로셰비치에 비판적인 야당도 존재했다.

그는 권좌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강력한 야당을 만들어 다음 선거에서 승리하겠다며 국내에 남아 정치를 계속할 것을 표명했다. 또한 밀로셰비치의 뒤를 이어 유고슬라비아의 대통령이 된 보이슬라브 코스투니차는 선거기간 내내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는 미국의 정치도구에 불과하다며 밀로셰비치를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가 아닌 자국내에서 총살형을 선고받고 사형당한 세르비아의 인접국가인 루마니아의 전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전 루마니아 대통령 같이 유고슬라비아 연방 대법원에서 재판하여 국내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인물이었다.[3][4] 그래서 밀로셰비치가 극적으로 사임한 데에는 자신의 안전을 대가로 한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던 게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밀로셰비치 등 구 유고 전범 인사들에 대한 처벌을 주창한 새 총리이자 전 베오그라드 시장인 조란 진지치의 조치로 인하여 2000년에 권력남용 및 부정부패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후 1993년 유고슬라비아 내전의 전쟁 범죄를 처벌하기 위해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 형사 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 for the former Yugoslavia)가 설립되었다. 인종청소를 자행한 전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앞서 언급한 대로 2000년에 권력남용 등의 혐의로 체포되었는데 이듬해인 2001년 6월 전범재판소 법정으로 인도되어 이듬해부터 재판을 받았으나, 밀로셰비치는 이 재판을 '승리자의 재판'이라고 무시하며 "조국과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내가 했던 모든 일들이 자랑스럽다"는 망언과 함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참고로 그의 재판을 담당했던 영국 출신 변호사인 스티븐 케이는, "밀로셰비치는 재판을 회피하려 하지 않았으며 자포자기하지도 않았다면서 그는 나에게 자신이 재판을 모두 치르고 감옥에서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고 밀로셰비치가 살아있을 상황을 말하기도 했다. 밀로셰비치는 발칸 반도에서 벌어진 66건의 전쟁 및 반인륜 범죄 혐의와 1995년 세르비아 내 UN 안전 지대에서 8,400여 명의 이슬람교도를 대량 학살한 혐의로 기소되어 지난 2002년 2월 이후 4년간 ICTY에서 재판을 받았다. 결국 투옥 뒤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재판을 받다가, 2006년 3월 11일 64세의 나이로 헤이그 감옥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이날 밀로셰비치가 그의 감방 침대 위에서 죽어 있는 것을 교도관이 발견한 뒤 상부와 의료진에게 보고했으며, 곧이어 사망 사실을 확인했다고 한다. 자연사한 것으로 추정되었고, 네덜란드 법의학 연구소로 시신을 이송해 사체 부검과 독극물 검사를 지시했지만 사인은 자연사인 것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2006년 3월 밀로셰비치는 교도소 안에서 죽기 전에 몬테네그로마저도 독립한다는 이야기를 듣자, '"세계가 내 조국을 조각내는구나..."'라고 중얼거렸다고 전해진다.

밀로셰비치는 그동안 고혈압과 심장질환 등의 증세로 수 차례 러시아에 가서 치료를 받겠다 요청했으나, ICTY는 그가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을 우려해 요구를 거절했다. 그의 지지자들과 유족들은 밀로셰비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ICTY에 있다며 분노를 표했다. 밀로셰비치가 속했던 세르비아 사회당의 한 간부는 밀로셰비치는 죽은 것이 아니라 살해된 것이라고 비판했으며, 미하일 고르바초프소련 서기장도 그의 러시아행을 막은 것은 실수였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밀로셰비치의 처벌을 주장했던 스티페 미시치 크로아티아 대통령은 그가 재판의 말미에 받아야 할 선고를 받지 못한 채 먼저 죽은 것은 유감이라 말했다. 또한 국제 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의 한 간부는 희생자들에게는 좌절이고 정의에는 역행하였다는 말을 남겼으며, 희생자와 정치 지도자들은 밀로셰비치가 단죄할 기회가 없어졌다며 분노했다고 한다.

그리고 밀로셰비치의 부인이던 마르코비치도 2019년 4월에 사망하였다.#

3. 약력

4. 평가

세르비아에서의 평가는 50대 50. 집권 이후 밀로셰비치는 세르비아인의 생존권을 내세우며 대세르비아주의를 내세웠는데 이것 자체는 티토 사후인 1980년대부터 세르비아 내부에서 이미 퍼질 만큼 퍼져 있어서 밀로셰비치 탓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전쟁 수행 과정에서 지도자로써의 역량은 한참 부족했다는 점이 문제였었다. 그나마 세르비아 본토의 피해는 크지 않았으나[5] 연방 구성국들에 거주중이었던 수만의 세르비아인들이 전쟁통에 사망한 것은 물론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와 벌인 전쟁에서 패배하였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도 학살극까지 벌일 만큼 우세를 보였지만 결과적으로 얻은 것이 전혀 없었다. 특히 반인륜 행위는 안하느니만 못해서, 차라리 안 했으면 유고연방 해체를 막기 위해 불가피한 전쟁이었다는 명분이라도 내세울 수 있었던 걸 스스로 발로 차버린 셈이 되어 버렸다. 밀로셰비치가 주도한 전쟁으로 인해 물가가 폭등했고, 유고슬라비아의 해체로 인한 내수 붕괴는 세르비아 경제의 급속한 악화를 초래했으며 거기에 NATO의 공습으로 인해 코소보마저 상실하게 되는 데 큰 원인을 제공했다. 게다가 코소보 공습의 주 원인 중 하나가 바로 학살이었는데, 보스니아 학살로 그렇게 당하고도 정신 못차린 셈이다. 일반적인 국가라면 보스니아 내전에서 그 난리 치고 패했을 때 바로 탄핵당해 쫓겨나거나 패전에 책임지고 하야했어야 하는게 정상이다. 2000년까지 정권을 잡고 있었던 것도 기적이었다.

세르비아의 극우 민족주의자들 중에는 은근히 밀로셰비치를 추종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동정하는 여론도 있다고 한다. 아예 세르비아의 일각에서는 밀로셰비치는 학살자가 아니라며 밀로셰비치가 잔인한 학살자였다기보다는 연방에서 분리독립하여 이탈하려던 다른 유고 연방내 공화국들의 독립을 저지하려고 일으킨 전쟁이 장기화되던 과정에서 학살이 발생했다고 말하며 밀로셰비치는 학살자가 절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밀로셰비치는 세르비아 대통령이었을 당시 유고 내전 발발 직전에 대세르비아주의를 대놓고 선동하여 알아서 분리독립세력에게 명분을 갖다바친 것은 물론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계에 대해 무기와 군사훈련을 지원, 인종청소 등의 민족 대량 학살을 확대했다. 특히 독립 막겠다고 군대 보낸 건 그렇다 쳐도 제노사이드는 내전중인 국가의 정부가 다 이런 짓 하는 것도 아니니 변명의 여지가 전혀 없다.

물론 밀로셰비치 정부 시절 세르비아 중심의 신유고 연방과 전쟁 중에 세르비아의 지원을 받았던 스르프스카 공화국, 크라이나-세르비아 공화국 등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 내부의 세르비아계 반란 정부들과 싸웠던 크로아티아의 프란요 투지만 전 대통령, 보스니아의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전 대통령, 코소보의 하심 타치 총리 등도 많은 학살과 약탈 등 전쟁 범죄를 자행했다. 이 전쟁 자체가 국가지도부에 한정해서는 무고한 피해자가 없는 전쟁이라고 봐도 무방하고, 세르비아 측의 진압 자체에 대해서는 국제법적으로도 문제시되지 않고 있다.[6] 하지만 밀로셰비치가 가장 많이 거론되고 비난받는 이유는 자기네 국가 내부에서만 학살을 저질렀던 저 지도자들과 다르게 밀로셰비치는 저 모든 지역의 분쟁에 광범위하게 개입하고 전쟁범죄를 자행하였기 때문이다.

결론을 내리자면 부패하고 무능하며 포퓰리즘적이고 극단적 민족주의에 매몰된 지도자와 특정 사상 혹은 신념에 매몰된 국민이 짝짜꿍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말해준다고 볼 수 있겠다.

5. 각종 매체에서의 등장

  • 한국 게임 강철제국에 등장하는 캐릭터인 밀로셰비치 전 육군 대령의 모티브가 이 사람이다. 주인공이 애용하는 총포상 주인인,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에서 이름을 따온 듯한 보리스 영감의 손녀를 납치, 란체스터라는 당 세계관의 명품 소총을 내놓으라고 인질극을 벌이다, 주인공이 제압 후 죽이거나 살려서 동료로 쓸 수 있는 캐릭터이다. 암만 망쪼들렸기로소니 세르비아한테까지 농락당하는 막장 러시아....



[1] 내전의 주 원인은 세르비아 민족주의였는데, 밀로셰비치가 실제로 독재자에 전쟁범죄자인 것은 맞지만 과거 나치 독일의 히틀러나 이라크 사담 후세인, 캄보디아 폴 포트, 소련 스탈린, 소말리아 시아드 바레, 우간다 이디 아민 같은 독재자들처럼 대놓고 주변들을 일방적으로 침략해 전쟁을 일으킨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 정도의 강력한 권력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오히려 배타적 대세르비아 민족주의 사상을 더욱 부추겨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마케도니아 등 다른 구 유고 연방내 공화국들이 연방으로부터 분리독립의 빌미를 제공하여 사태를 악화시킨 인물이었던 셈이었다.[2] 물론 전쟁을 몇년씩 해대고 국제제재까지 받으니 당연히 생산활동이 막혀서 줄어들 수밖에 없기는 했다.[3] 하지만 코슈투니차는 밀로셰비치의 처우를 놓고 유고슬라비아 내부에서 서방과의 관계개선과 밀로셰비치를 위시한 구유고 전범 인사들에 대한 국제사법재판소 인도를 주창하던 조란 진지치 전 총리와 심한 갈등을 빛었고, 유고 국내 처벌을 빌미로 밀로셰비치를 봐주는게 아니냐는 미국을 위시한 서방 강국들과 밀로셰비치 시기 내전을 치뤘던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같은 구유고권 주변국가들의 의심과 불신마져 가중되자 결국 밀로셰비치에 대한 유고 국내 처벌 주장을 철회하고, 밀로셰비치의 헤이그 전범재판소 인도를 허락했다.[4] 루마니아 국내에서만 반대파 탄압과 고문, 살인, 인권유린을 저지르던 차우셰스쿠와 달리 밀로셰비치는 세르비아 대통령 시절 과거 구 유고 연방에 속해있다 연방 붕괴로 분리독립한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등 모든 발칸반도 신생국들의 내전에 개입, 침범하여 제노사이드 등을 주도했던 전범이었기에 몰락 이후 루마니아 신정부에 의해 자국내에서 사형당한 차우셰스쿠와는 그 급이 달랐고, 구 유고 내전 당시 저지른 인종학살 등 유럽과 서방세계에 남긴 전쟁범죄의 규모와 경악성도 차우셰스쿠가 루마니아를 지배하면서 남긴 악영향보다 더 컸다.[5] 경제적으로 파탄나긴 했으나 일시적이었고, 현재는 완전히 복구된 상태다. 국민소득이 5천달러 정도로 상당히 낮은 건 사실이나 원래 유고 지역 자체가 가난했던 곳이고, 다른 연방구성국들의 처지도 크게 다르지 않다.[6] 밀로셰비치가 기소된 원인은 전쟁범죄지, 전쟁 행위 자체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