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6-15 11:26:12

보리스 옐친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옐친은 이 문서로 연결됩니다. 러시아 출신의 미국 배우에 대한 내용은 안톤 옐친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40px-Standard_of_the_President_of_the_Russian_Federation.svg.png
러시아 연방 대통령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border:0px solid; margin:-11px; margin-top:-8px; margin-bottom:-6px"
-2 {{{#EFD88F 제1-2대}}} -2 {{{#EFD88F 제3-4대}}} -2 {{{#EFD88F 제5대}}} -2 {{{#EFD88F 제6-7대}}}
보리스 옐친 블라디미르 푸틴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블라디미르 푸틴
← 역대 소련 대통령 }}}}}}

파일:attachment/c0026408_4b7dca2914ce9.jpg
성명Борис Николаевич Ельцин (보리스 니콜라예비치 옐친)
생몰년1931년 2월 1일 ~ 2007년 4월 23일
출생지소련 러시아 공화국 우랄 주 부트카
국적소련 파일:소련 국기.png러시아 파일:러시아 국기.png
신장187cm
정당소련 공산당무소속
직위제1대 러시아 연방 대통령
러시아 연방 제1대 총리
배우자나이나 이오시포프나 옐치나
종교러시아 정교회
임기1991년 7월 10일 ~ 1991년 12월 26일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
1991년 12월 26일 ~ 1999년 12월 31일 (러시아 연방 대통령)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대통령
3. 개인사4. 평가
4.1. 러시아의 평가
4.1.1. 재평가(?)
4.2. 서방의 평가4.3. 한국의 평가
5. 기타

1. 개요

소련, 러시아의 정치인.

1987년 인민대표회의 의원으로 선출된 이후 급진 개혁파 정치인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1990년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 당선 이후 1991년 8월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저지하면서 러시아 공화국의 실권자로 떠올라 그 해 말 소련을 해체하고 초대 러시아 연방 대통령으로서 1991년부터 1999년까지 역임했다.

옐친은 개혁파 정치인으로 처음 등장하여 소련이 붕괴되기 직전까지는 러시아 시민들 사이에서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으나, 1991년 독립 이후 경제 개혁 실패, 최고회의 해산 등 무능한 모습을 보이며 국민들의 지지를 잃었다. 특히 충격요법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을 추진해 러시아 경제를 양극화하고, 소련 시절 쌓은 경제기반을 전부 무너뜨리면서 러시아는 1990년대를 통틀어 기나긴 불황을 겪어야 했다. 이후 1996년 체첸전 패배, 1998년 러시아 모라토리움 위기 및 탄핵 시도로 정치적 입지가 땅에 떨어졌다. 이후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완전히 끝났음을 직감했고, 건강 문제까지 겹쳐 1999년 12월 31일 당시 총리였던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정권을 넘기고 정계에서 은퇴, 2007년 별세했다. 그래도 욕을 엄청나게 먹은 것에 비하면 적절할 때 후임에게 대통령직을 넘겨 주었고, 이후로 지속적으로 정권재창출에 성공을 거두면서 말년에도 그런대로 존중받는 삶을 산데다가 죽어서도 러시아 정부로부터 어느정도 대접 받고 있기 때문에[1], 퇴임 후에 러시아 정부나 통합러시아당, 공산당, 자유민주당 가릴거없이 푸대접받는 미하일 고르바초프보다는 나은 삶이기는 했다.

러시아 역사에서 옐친의 시절은 1917년 2월 혁명 이후 제정이 무너진 러시아와 여러 면에서 많이 비견될 만한 시기였다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러시아 공화국(임시정부)이나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은 분명 합법적 선거와 운영체제로 국가를 통치했지만 옐친은 비합법적이고 소련 때보다 더 악화된 권위주의적 독재를 일삼았다.

2. 생애

2.1. 초기

옐친은 1931년 2월 1일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우랄 주에 위치한 예카테린부르크 근처의 부트카(현 스베르들롭스크 주의 탈리츠키 군)에서 태어났다. 젊었을 시절에 건축 기사로 지내다가 1961년에 공산당에 입당했다. 뛰어난 흡인력과 업무능력으로 빠르게 승진하여 1976년에 스베르들로프스크 주 제1서기가 되었고, 1981년에 공산당 중앙위원이 되면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훗날 그와 원수가 되는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지도자가 되면서 고르바초프는 옐친을 등용하여 모스크바 제1서기(한국으로 치면 서울특별시장 정도)가 되었다. 옐친은 모스크바 제1서기 시절 정치 개혁을 주장하다가 보수파들의 반발에 1987년에 해임되었지만 옐친은 이에 굴하지 않고 대중적인 인지도를 쌓아 올려갔고, 개혁의 상징이 되었다.

그 결과 1989년 소련 첫 자유 총선거 때 모스크바 선거구에 출마, 89%의 득표를 얻어 초압승을 거두었고, 그의 동료들도 대거 의원직에 당선되는 데 성공하면서 보수파의 세를 누르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이 때부터 급진적인 노선을 본격적으로 주장하여, 절충적인 개혁을 주장하던 고르바초프와 점차 갈등을 빚기 시작하여 1990년에 공산당을 탈당했다. 원래는 고르비가 급진개혁을 추진했지만 개혁 정책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개혁파 내부에서도 이견이 나왔고, 그 과정에서 고르비가 절충 개혁을 주장하게 되자 이에 대항해 옐친이 고르비를 몰아붙이면서 급진개혁을 주장하면서 공산당을 탈당하게 된 것. 이 과정에서 그의 주벽에 대한 얘기가 보수파 사이에서 나왔지만 옐친의 인기는 더더욱 높아졌다. 1990년 5월에 러시아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으로 당선되었다.

당시 소련에서는 페레스트로이카 과정에서 소련 공산당 위주의 중앙집권제를 약화시키기 위해 공화국 정부의 권한을 강화시키고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 과정에서 공산당 보수파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그루지야(조지아) 공산당 제1서기였던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 같은 공화국 정부 출신 인사들을 대거 포섭했고, 옐친은 그 혜택을 받은 인물 중 하나였다. 러시아 공화국을 대표하는 정치인으로써 성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옐친은 1991년 6월 12일에 57%의 득표로 러시아 공화국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2. 대통령


1991년 8월 보수파들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옐친은 보수파들의 저지와 러시아 시민들에게 실력행사를 호소, 보수파의 쿠데타를 막아 내면서 쿠데타 이후 소련을 장악할 수 있었다. 당시 소련 정부는 개혁파였던 고르바초프와 보수파였던 야나예프, 크류츠코프 등 둘 다 쿠데타로 인해 완전히 몰락한 상황이었고, 옐친은 이 공백을 이용해 고르바초프와 보수파의 지지 기반이었던 소련 공산당을 압박하면서 정국을 원하는 대로 주도해 갈 수 있었다.

그 해 12월 21일 옐친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등의 지도자와 벨라루스에 있는 벨로베자 숲에서 만나 함께 소비에트 연방을 해체하고 독립국가연합의 결성을 선언했다. 이 조약으로 소련은 붕괴되었고, '신연방조약'의 체결을 준비하던 미하일 고르바초프도 사임하게 되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러시아인 중 그누구도 그가 어떤 정책을 펼칠 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대통령이 된 옐친은 경제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하면서 그나마 간신히 지탱되던 경제를 빈사 상태로 몰아넣었다. 원래 러시아 경제는 페레스트로이카 시절 추진한 경제 자유화의 후유증을 떠앉으면서 거의 파산에 가까운 수준이었지만,[2]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예고르 가이다르가 추진한 경제 개혁 정책의 일환으로 가격 자유화를 무리하게 추진하면서 실패해 버렸다.

사실 고르바초프 시절 추진한 가격 자율지정화[3]로 인해 이미 후유증이 컸다는 사실을 생각해본다면 가이다르의 개혁은 너무 조급하고 낙관적이었다. 당장 통일 후 동독의 사례를 참고하더라도, 공산주의권에서는 나름대로 준수한 경제라는 서독의 생각과 달리 자본주의 국가들과 경쟁하기에는 심각한 문제점이 많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독일 경제에 큰 부담을 안겼다.

가이다르의 경제 개혁 실패로 러시아의 GDP는 추락했고, 소련 시절 국가의 지원으로 유지되던 수많은 국영기업, 공장, 콜호즈들과 연구소들은 자본주의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도태되어 적자를 이기지 못하고 파산해버렸다. 이렇게 가장 기본적인 경제 주체들이 사라지면서 수많은 러시아 국민들은 실업과 빈곤 속에 빠져들었고, 오직 소수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만이 모든 부를 누릴 수 있었다.
파일:attachment/1_97.jpg
파일:attachment/2_59.jpg
파일:attachment/3_39.jpg

1993년 옐친은 재신임에 성공한 직후 9월 21일 대통령에게 의회해산권을 부여하고, 기존 소련 체제의 잔재였던 인민대표회의와 최고회의를 폐지하고 상하원을 신설하는 개헌을 시도했다. 이에 다수당인 러시아 연방 공산당 등이 9월 23일 러시아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고 옐친을 탄핵하자, 분노한 옐친은 10월 4일 모스크바육군 병력을 소집했고, 육군 타만스카야 기갑사단T-80 전차들을 데려다 국회의사당을 포격해 버렸다.사건의 내막18분 30초부터 나온다. 이렇게 된 이상 국회로 간다!! 러시아에서는 대통령이 국회의사당을 포격합니다.

2년 만에 전차 앞에서 맞서던 입장에서 전차를 끌고 가서 포격하는 입장이 된 게 참으로 아이러니하지만, 이 때 군부가 옐친을 지지하면서 옐친은 빠르게 상황을 진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적잖은 사상자가 나면서 러시아 국민들은 옐친에 크게 실망했다.[4] 결국 그 해 12월에 치러진 총선에서 옐친파 정당은 고작 15.5%의 득표를 올리며 패배했으며, 극우정당인 러시아 자유민주당이 23%로 제1당이 되었다. 공산당-농민당 연합도 22%를 차지했으며 나머지 정파는 대다수가 사민주의 정파였다.

1995년 12월 의회(두마)에서는 공산당이 22%를 득표하며 1당이 되었다. 11%로 자민당이 2당을 차지했으며 10%의 여당 '러시아 - 우리집'은 3당에 그쳤다. 하지만 정당명부제의 특성상 어느 한쪽도 과반을 유지할 순 없었고 혼란은 더 가중되었다. 이런 기조는 1999년 총선까지도 이어지만 1999년 총선에서 친 옐친파 정당이 선전하고 2000년 블라디미르 푸틴이 들어서면서 정치는 안정된다. 거꾸로 말하면 이전까지 러시아는 혼란이 심각했단 이야기다.

1996년 대통령 선거에서 옐친은 심장마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이미지 플레이로 초반 지지율 6%에서 결선투표 진출은 물론 공산당의 주가노프를 54%대 41%로 14% 가량 앞서며 승리했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옐친은 "배당을 위한 융자"라는 악명높은 합의를 통해 자신에게 선거자금을 대주는 대가로 올리가르히(재벌)들에게 러시아의 중요한 경제적 자산 통제권을 나눠주겠다는 범죄적 약속을 받아냈다. 그 같은 조치는 러시아 내에서 올리가르히의 부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가즈프롬이나 루살 등 에너지나 광물 관련 회사들 등 그 나름대로 흑자를 벌어들이는 사업들이 많았는데,[5] 이런 사업체들이 모두 소련 내 제정 관료나 시장원리에 밝았던 전직 공산관료들이나 권력 핵심부에 있던 정부관리에 넘어감으로써 벼락부자들이 대거 탄생했다. 이들 중 몇몇은 옐친 집권 몇년만에 세계적인 부호가 될 수 있을만큼 큰 재산을 모았다. 이런 벼락부자들의 대표적인 예로는 보리스 베레조프스키로만 아브라모비치 등이 있다. 소련 시절에는 부동산 및 생산수단이 국유화되었기 때문에 모을 수 있는 재산은 예금이 전부였고,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재산이 서방기준으로 수천 달러가 고작이었다. 그런데 옐친 집권 하에서 자본주의에 빠르게 적응한 이들은 2, 3년 만에 수조에서 수십조원의 자산가가 된다.

게다가 분리독립을 선포하려던 체첸 공화국을 무력으로 제압하기 위해 당시 체첸 지도자였던 조하르 두다예프와 협상을 거부하고 무리하게 군을 투입했다. 하지만 체첸군은 아슬란 마스하도프같은 전직 소련군 출신 인사들에 의해 훈련이 되어있는 상태였고,[6] 이 상황에서 무리하게 그로즈니 시로 진입했다가 체첸군에게 큰 피해를 입었다.[7] 1996년 샤밀 바사예프가 주도한 부됴놉스크 병원 인질극과 체첸 반군의 그로즈니 재탈환으로 체첸군에게 패배하면서 결국 1996년 하사브유르트 협정을 맺고 굴욕적으로 패배를 시인하면서 체첸에 국가나 다름없는 자치권을 준다음 물러났다. 사실 러시아군으로써는 붕괴 이후 군조직이 약화되고 군사적으로 된 준비가 덜 된 상황에서 체첸에 투입되었으니 큰 피해를 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개 지방이었던 체첸에 패배한 사실은 러시아인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안겨주었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1998년 러시아 정부는 재정 부족으로 모라토리움을 선언하기까지 이르렀다. 이미 옐친의 권위는 잦은 실정으로 만신창이가 되었고 탄핵직전에까지 몰렸다가 겨우 회생하기도 하였다. 이후 1999년 8월에는 건강까지 좋지 않아 KGB 출신의 블라디미르 푸틴을 총리로 지명했다. 더 이상 평판이 나빠질 일도 없었던 옐친이 마지막으로 내던진 승부수였는데, 이후 건강 이상으로 물러난 옐친을 대신해 대통령에 오른 푸틴이 치밀한 계획과 사후 처리 대책까지 세워 체첸을 공격, 5천 명 이상을 죽게 만들고도 해결하지 못한 전쟁을 겨우 2,500여 명의 전사자만으로[8] 체첸 반군을 남김없이 쓸어버리고 깜짝 스타로 등극하자 자연히 여당의 지지율도 다시 올랐다. 그 해 12월 총선에서 친 옐친파 정당들이 선전하였고, 총선에서 선전한 대가로 옐친은 푸틴을 차기 대권 주자로 내정하였다. 옐친의 권위가 만신창이가 되었기는 했지만, 적어도 마지막 승부수는 성공을 거둔 셈이다. 그해 말인 12월 31일 옐친은 건강 문제로[9] 자신의 실정에 대해 사과하면서 사임했고, 푸틴에게 대통령직을 넘겨 주었다.

푸틴에게 대통령직을 승계하는 과정에서 옐친은 푸틴에게 사임 후에도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푸틴은 옐친에게 면책 특권을 보장함으로써 이에 보답하였다.[10] 그리고 푸틴이 승승장구하면서 옐친은 푸틴으로부터 비토당하는 일없이 잘 지내며 한가롭게 야인으로 지내다가 2007년에 사망했다. 향년 76세. 그놈의 때문에 건강이 나빠서 죽었다고 한다. 후술하겠지만, 옐친은 살아생전 지독한 주당이었다. 가족으로는 아내 나이나와 장녀 예레나와 차녀 타티아나, 외손자 3명이 있다.

그동안의 소련 지도자들은 대부분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지만 옐친은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매장되었다. 말 그대로 국가 지도자나 영웅들이 묻히는 크렘린에 비하면 격이 살짝 낮다고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노보데비치 수도원도 러시아의 위인들이 많이 묻힌 곳으로 유명하다.

3. 개인사

옐친은 러시아 정치인들 중에서도 주변 인사들이 잠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제일 먼저 보드카오이[11]를 찾았다고 증언할 만큼 을 무척 좋아했다. 거의 이오시프 스탈린에 비견될 정도라 농담 삼아 보리 옐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얼마나 술을 먹었는지 공식 석상에서도 취해 있어서 추태를 부리는 등 러시아라는 나라 이미지를 깎아내리는 데 일조했을 정도.[12] 측근들은 이 사람이 술취해서 부린 추태를 수습한다고 애를 먹었다. 심슨 시즌 8의 10화에서도 음주 단속기의 최종단계로 이 사람 수준이라고 나온다. 말년에는 하도 병을 많이 달고 다녀서 걸어다니는 종합병동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집권 초기에는 권총으로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였다. 관련 기사. 또한, 많이 안 알려진 사실이지만 1991년에는 음주운전을 한 적도 있다. 기사. 1995년 10월, 클린턴이 대통령었던 시절의 미국을 방문해서는 백악관에서 잠을 자다가 술을 진탕 마시고 맨발에 잠옷 차림으로 백악관 문 앞까지 나간 적도 있었다. 당연히 이걸 본 경호원들과 비서들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 사건은 국가 기밀로 취급되어(…) 언론에는 비공개 처리되었다가 나중에 기밀 해제가 되면서 까발려졌다.

파일:TVBXaUg.jpg

역시 클린턴 대통령 시절 미국을 방문한 때인 것 같은데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클린턴 대통령에게 뻐큐를 시전한 적이 있다(...). 아마 어린 시절 손가락을 잃은 탓에 그런 손동작으로 찍힌 것일 가능성이 높다.

파일:external/por-img.cimcontent.net/cc22fd579835b3fc29af7cacb205fff7.jpg

사진은 1996년 대통령 선거 당시 로스토프를 방문해 선거 유세로써 춤을 춘 사진. 당시 옐친이 선거에서 시도한, 일종의 친서민적 이미지 메이킹의 일환이었다. 이 사진은 1996년 올해의 퓰리처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또한 영상 자료로도 매우 확실하게 남아 있다. 물론 이때도 술에 취해서 춤췄다.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옐친은 떡대가 상당했으며 키 187cm의 장신거구였다. 외국인들 입장에선 저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겠으나, 술에 관대한 러시아 특성상 의도한 대로 친서민적인 이미지를 통한 지지율 상승 효과는 있었다. 이는 만취했다는 점을 빼면, 외국에서도 서민들에게 친밀감을 주기 위해 많은 정치인들이 하는 행위다.

4. 평가

4.1. 러시아의 평가

파일:attachment/1945.gif
그의 이미지를 적절히 말해주는 만평. 다리 하나 고치려고 '옐친 병원'으로 간 곰 (러시아)은 결국...

굉장히 평가가 좋지 못하다. 참조. 고르바초프를 밀어낸 뒤 소련을 해체해 버렸다. 비록 15개 구성국 중에 발트 3국이 소련 구성국으로서의 시기를 공산주의 강점기로 간주, 자체적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조지아, 아르메니아, 몰도바 역시 연방 존속에 관한 투표를 거부하고 자체적으로 독립투표를 실시하지만 나머지 9개국은 전부 연방 존속에 관한 국민투표를 실시했으며 9개국 모두 연방 유지 찬성이 다수를 차지했다. 그럼에도 연방 해체를 밀어붙인 게 바로 옐친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꺾고 초대 러시아 연방의 대통령이 되었을 때는 친서민적인 이미지로 인기가 많았으나 당선 후에 본인, 가족들과 측근들의 부정부패, 장기집권을 주도하고 체첸 전투에서의 병크 때문에 러시아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정치인이다. 거기에다가 1994년 발발한 체첸 사태 당시 체첸에 많은 전비를 지출했지만 쑥대밭만 만들어 욕 먹었다. 더군다나 그러면서도 쳐발리기만 하는데다가 1996년 8월에는 굴욕적인 평화 협상을 맺는 바람에 더더욱 인기가 떨어졌다.

거기에 집권 초에 시행한 충격요법의 일환으로 시행한 가격 자유화와 소련 붕괴에 따른 산업 붕괴로 초 인플레이션이 일어나 예금이 모조리 휴지조각이 되었다. 이는 옐친이 경제를 개혁하겠다고 워싱턴 컨센서스에 충실한 학자들이나 기관들(예를 들면 세계은행, 미국 재무부, IMF)에게 조언을 구했었는데, 옐친은 이들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충격요법을 시행했다. 문제는 이들 학자들이나 기관들은 이러한 충격요법을 시행하면 일어날 파장을 예측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음에도 이걸 단순히 불가피한 일 혹은 단기적인 일로 여겼으며, 장기적으로 보면 시장이 해결해줄 것이라고 지나치게 낙관했다는 거다.

그리고 옐친은 이들이 제시한 방안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충격요법에 따라 가격 자유화가 즉각적으로 시행되자, 물가 폭등으로 예금이 휴지조각이 되어버리면서 구매력이 급속히 떨어졌고[13], 범죄율도 대폭 상승하게 된다. 당시 러시아 국민의 90%가 절대 빈곤선 이하로 전락했으며 1인당 국민소득도 1990년 당시 5,300달러였던 1인당 GDP가 1997년과 1998년에는 1,600~1,700달러까지 떨어졌으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과장이 아니라 실업자만 무려 2,000만 명에 이르렀다. 이 정도가 어느 정도냐면 독소전쟁 당시 소련의 전사자가 약 2,900만 명이라는 걸 생각하면 전쟁 희생자에 육박하는 수준이었다는 얘기다. 1990년대 중후반 들어서는 러시아의 인구가 한국의 2배가 훨씬 넘는데도 총 GDP(경제규모)가 대한민국의 절반에도 못할 지경이 되었고 지금도 조금 못 미치는 수준에 불과하다. 사실 러시아의 경제가 푸틴 시절 고도성장을 한 후에는 다시 한국을 추월했지만, 2014년 저유가와 미국의 경제제재로 러시아 경제가 불황에 빠지고 루블화 가치가 폭락하면서 다시 한국보다 명목상 GDP가 작아졌다.

러시아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미국과 대결하던 양대 초강대국이었다가 이제는 전혀 상대가 안 되는 낮은 위상으로 추락한 셈이니[14] 그 충격이 어느 정도인지는 가히 상상조차 안될 정도였다.

거기에다가 무분별하게 민영화를 하다 보니 대량의 국부가 유출되었고 빈부격차도 극심해졌으며 경제를 장악한 올리가르히들이 정치계와 언론계까지 장악하는 바람에 부정부패도 소련 시대보다 심해진데다가 쓸 수 있는 예산이 줄어서 각종 복지정책 등 사회안전망까지 붕괴되었다. 결국 재빠르게 부를 독점한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국민들의 삶은 처참해졌다. 1999년 열친 말기에 와서야 일시적으로 상황이 호전되는 듯 했지만, 그래봐야 사회적인 지표가 개판에 가까웠고, 금융 범죄도 대거 일어날 정도로 그 내실은 결코 탄탄하지 않았다.

그나마도 외환 위기가 일어나는 바람에 다시 한번 쑥대밭이 되어 급기야 모라토리엄까지 선언했을 지경이고 여기에 국민들의 생활 수준이 말 그대로 진짜 벼랑 끝에 내몰리는 바람에 발생한 출산율의 급감과 사망률의 급증으로 매년 인구가 70만에서 90만명선까지 줄어드는 수준이 되어서 한 동안 2050년이 되면 러시아 인구가 1억명 이하로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올 수준이었다.

이 시기의 상황이 얼마나 시궁창이었냐 하면 1990년대 러시아 여대생들의 최고 아르바이트가 바로 외국 관광객 상대 성매매(인터걸)였다는 웃지못할 사실이 있다.[15] 스칸디나비아 국가에서는 "러시아 여자"란 단어가 성매매 여성을 지칭하는 단어가 될 정도였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동남아 여성 매매혼이 유럽-미국 국가에서는 러시아 여성 매매혼으로 벌어졌다. 니콜 키드먼이 주연한 영화 버스데이걸(Birthday Girl)이 바로 그 러시아 여성 매매혼을 주제로 한 영화다. 한 마디로 말해 옐친 집권 시기의 러시아는 사실상 러시아판 고난의 행군을 겪은 셈이다.

게다가 1990년대 동안 러시아는 오랜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국외에 군사력을 전개시킬 수 없을 정도로 경제가 악화되었는데, 중앙유럽 국가들 입장에서는 러시아의 영향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특히 이 시기 반소 감정이 심했던 중앙유럽 국가들은 재빨리 서구권에 편입되기 위해 급진적으로 경제 개혁을 진행하면서 냉전 시절의 유산을 청산하였다.

그 결과 2016년 현재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몰도바, 아르메니아 등 옛 소련권 국가들과 내전을 겪은 옛 유고슬라비아 국가들 중 친러 국가인 세르비아를 제외한 대부분이 현재 NATO유럽연합 회원국으로 가입해 있다. 이마저도 현재 우크라이나무리한 개입으로 인해 우크라이나가 반러 친서방으로 돌아섰다.

이 시기 러시아는 군사적으로도 크게 약화되었다. 독트린 94를 내세워 핵무기와 기술연구에만 투자하다보니 러시아군은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는 당장 대규모 정규군을 유지할 수 있는 비용이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양적 감축을 통해 유지비를 최소화하되, 최소한의 국제적 영향력 유지를 위한 핵전력/이후 군 조직의 재건을 위해 필수적인 기술적 우위만은 놓치지 않겠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군의 중추가 되는 장교/부사관들을 제대로 유지한다는 마인드가 없었던 게 큰 문제였고, 결국 러시아는 중간 간부진이 무너진 군을 재건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그리고 그 돈이 없는 것도 누구 때문인가 생각해보면...

소련 말기에 이미 서구식 민주주의가 도입이 진행된 바 있지만[16] 어쨌든 옐친은 제도적으로 서구식 민주주의를 러시아에 정착시켰다. 서구식 민주주의 체제를 지향했던 옐친은 자신이 러시아에 민주주의를 정착시켰다는 자부심을 가졌으며 한때 푸틴이 지방선거를 폐지하고 대통령이 주지사 등 지방자치단체장을 직접 임명하는 방식으로 바꿔 버리자[17] 옐친은 퇴임 이후 푸틴과 우호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푸틴의 결정이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약한다고 반발하기도 했을 정도다.

그러나 오히려 러시아에 제도적 민주주의를 정착시켰다는 보리스 옐친 본인은 정작 대통령 임기동안 반민주주의적 행보를 보였다. 자기 말 안 듣는다고 헌법에도 없는 최고회의 해산을 벌이려다가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같은 내란을 불렀고, 임기 동안 솔제니친이 진행하는 TV 프로그램(솔제니친과의 만남)이 폐지된다거나(...) 주요 방송사와 통신사에 낙하산을 내보낸다거나 주요 언론사들을 매수해서 선거운동을 하고 막장인 러시아 상황을 알린 외국 언론들에게 압력을 가하곤 했다(...).

그 영향이 남아서 러시아는 제도적으로만 민주화되었을 뿐, 실제로 민주주의는 취약하며, 경제는 매우 심각한 국가가 되었다. 그러니 옐친이 민주제도를 정착시켰다고 해도 좋은 평가를 받기 힘들다. 가령 러시아는 헌법상으론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지만, 실제로 반정부적인 언론은 여전히 엄청난 탄압을 받고 있으며, 언론 자유는 148위(2017)로 세계 최하위권. 짐바브웨(128위)보다도 더 낮다. 이미 옐친 시기가 지난지 얼마 안된 2002년에도 121위를 마크해서 언론탄압으로 악명높은 종교 국가들인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등과 비슷한 순위를 보여주었다. 기자들은 중국이나 소련 시절처럼 코렁탕을 먹는 건 아니지만 유무형의 협박을 받거나 심지어는 암살된다고 한다. 이는 러시아가 사형제 폐지 국가(사형은 법률에 있으나 판결이 불가능)라 그렇다.

정적의 사생활을 찍어 폭로해 매장하는 몰래카메라[18]를 비롯한 여러 수단으로 정적을 제거하고 있으며, 서방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여러 암살 의혹 사건은 옐친-푸틴 시절부터 러시아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이런 나라가 아무리 민주제도를 갖췄다고 해도 제대로 된 민주국가라고 할 수 없다.

옐친의 소련 해체는 악성 채무를 털어내고 권력을 확고하게 잡으려고 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즉 소련을 해체함으로써 알맹이만 챙겨먹어 이후 통치 및 재건을 용이하게 한다는 건데 그걸 추가로 말아먹었으니 옐친의 능력이 얼마나 답이 없었는가를 말해주는 부분.

생전의 실정 때문에 대다수의 러시아 국민들에게 나라를 말아먹은 놈, 심하면 개혁을 한답시고 개인 소유 재산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놓고선 자기와 친인척, 재벌들의 배만 불린 놈정도의 취급을 받지만 그와 별개로 푸틴에게는 자신을 대통령으로 올려준 아버지같은 인물이다보니 옐친이 퇴임한 후에도 현안이 있을 때마다 옐친을 만나 얘기를 나누면서 조언을 구할정도로 대접을 융숭하게 해주었으며 장례식도 꽤 성대하게 치러졌다.

물론 옐친 본인은 허울뿐인 민주주의의 근간 자체는 유지하려 노력했지만, 애시당초 이를 뒷받침하는 기본적인 사회정의조차 존재하지 않는 나라에서 민주주의가 유지될 리가 없다.

많은 러시아인들이 옐친과 동급으로 고르바초프를 비난하지만, 고르바초프는 집권 말기 여러 수모를 겪으면서도 소련 경제를 살려보겠다고 서방 국가를 돌아다니며 차관을 빌렸다. 한국이 소련과 비교적 쉽게 수교관계를 수립할 수 있었던 것도, 급전이 필요한 고르바초프가 요구한 30억불 차관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IMF나 미국은 소련에 차관 제공을 거절했기 때문에, 고르바초프는 수모를 겪으며 한국에까지 손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정상 수교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의전도 모두 생략하고 미국의 한 호텔에서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만나기까지 했다. 당시 한국보다 소련이 1인당 국민 소득이 2배였는데도 그랬다. 옐친은 정권을 잡고 나서는 그가 시행한 정책들이 실패로 돌아갔으며 결국 알콜 중독에 빠져 내정 뿐만 아니라 정상외교까지도 망치기 일쑤였다.

결국 옐친의 통치 하에서 러시아는 기초과학도 무너졌고 복지도 파괴되었고 국가 경쟁력과 각종 경제 및 사회 지표 역시 폭락했다. 결정적으로 민주주의 자체도 사실상 사망한 상황이다.

또한 러시아는 옐친 시절 소련 해체와 기본 경제 붕괴로 인해 러시아는 옛날의 제정 러시아 때나 소련처럼 서방과 정면으로 대립각을 새울 영토적 기반을 거의 상실해버렸다.

이를 인지한 러시아에서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서구권에 유화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서구권과 나름대로 협력을 추진하면서 대립을 피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본격적으로 우크라이나몰도바, 조지아 등이 서구권 편입을 준비하기 시작하자 러시아는 옛 영향권을 유지하기 위해 다시 패권적으로 나서기 시작했고, 이는 2008년 남오세티아 전쟁2014년 크림 위기, 돈바스 전쟁을 겪으면서 보다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미국을 비롯한 서방과의 관계가 심하게 틀어져 서방에게서 경제제재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러시아는 이 경제제재 때문에 경제가 성장을 못하다보니 해제하라며 반발하지만, 서방은 러시아가 서방을 위협하지 않는게 확실해질때까지 하겠다며 거부한다.

러시아는 나라 특성상 블랙 유머가 많이 통하는데, 옐친도 예외는 아니어서 꽤나 자주 입담에 올랐다. 다음은 공산주의 유머에도 나와있는 예시다.
A: 소련이 70년 동안 그토록 강조했지만 국민들을 설득시킬 수 없었던 과업을, 옐친은 단지 자신의 재임시절 몇 년 만에 다 이루었다.
그것은 무엇일까?
B: 국민들에게 소련이 좋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것이지.
그만큼 소련 시절이 천국으로 보일만큼 옐친은 러시아를 파탄내 버렸다.

4.1.1. 재평가(?)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m0604&wr_id=5803

소련 시절 같은 구성원이자 러시아의 이웃 국가였던 우크라이나, 몰도바, 아르메니아, 조지아 등의 나라들이 소련 붕괴 이후 20년이 넘어가는 시점에서도 내전과 경제 붕괴의 수렁 속에서 잘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을 두고 "러시아는 국토가 그렇게 큰데도 내전이 없었지 않았냐?"라는 재평가가 학계에서 나오기도 하며 반공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시민들 중에는 옐친을 열렬하게 지지하지는 않더라도 어느정도 옹호하거나 공산당보다는 낫다는 소리를 하기도 한다.

물론 전반적인 의견은 아닌지라 러시아에서 이런 얘기를 한다면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옐친 재임 시절의 러시아인들이 겪었던 고통은 IMF 당시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겪었던 고통보다 훨씬 더 강도도 심했고 기간도 길었다는 점 덕분에...

사실 소련 구성원 이웃 국가들이 내전이 터지거나 서로 전쟁을 벌인 것도 소련이 해체되고 서로가 같은 나라의 행정구역이 아닌 외국이 되면서 이익이 충돌해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옐친이 행한 연방 해체가 그들 국가에서 일어난 내전의 원인 중 하나라고 볼 수도 있다. 구 소련령이 아닌 러시아로 한정하더라도 국가전면적 사태는 아니지만 체첸 사태 등 내전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4.2. 서방의 평가

보다 나을 것이 없는 차악으로 평가받고 있다. 옐친이 막나가는 통치를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서방에서 그에 대해 침묵한 것은 그가 잘해서라기보다는 그의 대안 세력들이 모두 정신나간 극단주의자들 뿐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옐친의 정치적 경쟁자였던 겐나디 쥬가노프는 공산당의 수장으로서 "소련 부활"을 부르짖었고, 그 다음으로 유력한 정치인이었던 블라디미르 지리놉스키는 자유민주당의 수장으로서 러시아 민족주의와 인종차별을 모토로 삼았었다. 그리고 이들은 정말로 집권할 가능성까지 높았다.

실제로 쥬가노프는 1996년 대통령 선거에서 옐친과 거의 근접할 정도로 지지율이 높았고, 1999년에는 옐친 이후 공산당이 재집권할 것이라는 예측이 과반수였다. 아프가니스탄전의 영웅인 알렉산드르 레베디나 반정부 활동을 하다 훗날 암살된 보리스 넴초프, 현 야블로코 당 당수인 그리고리 야블린스키 등 개혁파 정치인들이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지만, 그들 개인으로서는 두 거대 조직인 공산당과 자유민주당을 이기기 역부족이었다.

이런 사정을 파악한 서방권에서는 무능력한 지도자보다는, 당연히 극단주의로 무장하고 서방에 적대적인 구체제를 회복시킬 수 있을 정치인을 더 위험하게 바라보았다. 많은 서방 언론들이 옐친의 무리한 경제 개혁과 부패에 대해 보도하면서 그를 비판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미국은 선거에서는 옐친에게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 왜냐면 미국 입장에선 옐친이 영 미덥지는 않아도 겨우 무너트린 소련이 금세 부활하거나 대공황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나치 독일이 탄생한 것처럼 위험한 적국이 탄생하는 것보다는 당연히 나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96년 대통령 선거 당시 러시아 공산당 당수인 주가노프가 옐친보다 지지율에서 앞서자, 미국 측이 선거 전문가들을 대거 파견해 옐친을 도와주었다 .

하지만 결정적으로는, 당시 러시아 언론을 대부분 소유했던 러시아 재벌 올리가르히들의 전폭적인 지원 덕택에 옐친은 승리할 수 있었다. 당시 러시아 언론은 글라스노스트 이후 서방 언론과 비슷한 수준의 자유도를 보였다. 러시아 국영 방송에서는 소련 시절의 부정적인 모습과 1993년 10월 사태 등을 중점적으로 보도하면서 네거티브 전략을 펼쳤다. 이에 반해 공산당 쥬가노프의 선거 전략은 기껏해야 공산주의 시절의 구시대적인 대중 집회와 연설 뿐이었다. 옐친은 간신히 재선에 성공했다.[19] 선거 승리의 주역이라고 평가된 알렉산드르 레베디는 그 공로로 러시아 국가안전보장회의 의장까지 오르지만 얼마 안가 토사구팽되었으며, 쥬가노프 다음 가는 경쟁자였던 지리놉스키는 듣보잡으로 전락한다.

이 1996년 선거는 지금도 러시아에서 서방의 내정간섭, 부정선거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무엇보다 옐친의 재선은 미국이 러시아를 몰락시키려고 한다는 생각을 러시아인들에게 각인시킨 결정적인 계기였다. 사실 의외로 소련 시절까지만 해도 러시아인들의 대미 감정은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은 편이었다. 외교적으로 적국이었고 미국을 적대시하라는 공산당의 선전이 있었지만, 그림자 속에서는 미국의 다양한 문화를 즐기면서 미국에 대한 친숙함이 어느 정도 있었다. 특히 소련 말기에는 자유 세계의 선도자이자 소련보다 훨씬 경제적으로 발전한 국가인 미국을 동경하는 사람들까지 많았다.

그러나 미국의 지원과 러시아 국내 농간을 등에 업고 집권한 독재자가 실정으로 러시아의 사회를 파괴하고 국력을 끝없이 후퇴시키는 모습을 보면서 증오심과 반미 감정을 키운 러시아인들이 상당히 늘었다. 결국 옐친이라는 최악의 독재자를 지원한 대가로 미국은 러시아인들의 압도적인 반미 여론을 형성시켜, 기형적 독재자인데다 서방에 극도로 적대적이기까지한 블라디미르 푸틴의 집권을 간접적으로 야기한 꼴이 되었다. 고르바초프는 본인의 자서전에서 미국은 민주주의이든 아니든 개혁한 소련이나 민주주의 러시아보다는 옐친이 이끄는 망한 러시아가 더 다루기 쉽다고 판단하고 옐친에게 모든 지원을 집중했다고 비판했다. 지금 동유럽에서 벌이는 푸틴의 각종 무리수가 계속 먹혀드는 것도 이 때의 부정선거가 절반은 해먹었다.

이 시기 러시아인들은 서방이 체제 전환 과정에서 발생한 러시아의 위기를 방조 내지는 조장하고 구 소련 국가들을 적극적으로 서방권으로 끌어들이는 모습을 두 손 놓고 보는 수 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오늘날에도 러시아인들은 서방이 소련을 일부러 무너뜨렸다는 인식이 강한 편이다.[20]

4.3. 한국의 평가

파일:external/image.edaily.co.kr/PS15112200448.jpg

1994년 6월 김영삼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 당시.

위에서 나온 무능력하고 부패한 모습과는 별개로, 한국에는 호의적인 모습을 많이 보였다.만력제 러시아 = 소련 = 공산당 = 북한 편이라는 소련 시절 스테레오 타입을 가진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생각과 다르게 옐친은 개인적으로 북한을 굉장히 싫어했다. 스탈린김일성의 회담 내용등을 포함한 한국전쟁 관련 문서를 대거 공개해 한국전쟁의 원인이 북한의 남침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못박았고 남, 북한간 전쟁시 러시아가 북한편으로 개입하는 우호조약을 폐기한 것도 옐친이다. 옐친 개인의 반북 경향과 더불어 한국과 교류를 늘리려던 러시아의 외교 정책, 그것을 이용한 한국 정부의 외교 전략이 성공한 결과이다.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을 공식적으로 사과하였고, 블랙박스 및 유품 등을 전달해 주었다.

한국에서는 향후 남북 무력 충돌시 중조우호조약을 맺은 중국군처럼 북한에 우호적인 러시아군이 북한 편을 들어 개입한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옐친 시절의 이 조약 폐기로 러시아군은 참전할 명분이 없어졌다. 일단 옐친의 성향부터가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공산당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이런 면에서는 한국의 은인이기도 하다

소련이 북한에 해주던 여러 가지 지원이나 우방국 혜택 같은 것을 모두 폐지하여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걷게 되기도 했다. 고난의 행군 기간 동안 북한 주민들이 수십만 명이나 아사한 걸 감안한다면 북한 입장에서는 원수. 다만 이때는 러시아도 마찬가지로 경제가 막 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설령 옐친이 북한이 호의적이었다고 해도 저런 사태는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간접적으로 북한의 핵무기, 탄도미사일 개발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옐친 치하에서 러시아군은 무기를 제대로 관리를 안 해서 소련 시절 개발한 여러 전략무기들이 북한의 손에 넘어갔고 전략 미사일 설계국은 돈도 제대로 못 받아 엔지니어들이 거리에 나앉게 되자 북한은 이들을 거금을 줘서 고용을 했다. 북한은 입수한 로켓과 공학자들을 이용 소련 로켓을 역공학으로 카피하여 2000년대 들어 여러가지 전략무기를 제조해내고 있다. 기껏해야 500~700km 단거리 탄도미사일이나 간신히 만들던 나라가 1990년대 말~2000년대 초에 갑자기 로켓 개발 능력이 향상된 건 이러한 이유이다. 지금도 이 러시아 연구자들은 한달에 8천달러의 봉급을 받으며 북한 고급 아파트에서 경호를 받으며 살고 있으며 푸틴이 줄기차게 이들의 소환을 요구하고 있으나 북한은 거절하고 있다고 한다. 이제는 이들이 가진 대부분의 지식은 북한 과학자들에게 전수되었을 테니 송환해봤자 별 소용도 없겠지만...

그리고 옐친의 이런 어설픈 나라운영 때문에 러시아의 많은 국방기술이 북한 뿐만 아니라, 한국에 이전되기도 했다. 국산 대공미사일 기술의 상당부분에 러시아 기술이 이전된 것이다. 하지만 푸틴 이후에는 러시아의 국방기술 이전이 어려워졌다.

5. 기타

  • 1990년대 초반, 한국에서는 이 사람을 한때 옐트신옐트神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이 사람의 이름을 영어로 Yeltsin으로 표기하기 때문(...) 러시아어에 익숙하지 않았던 그 당시 사람들이 영문 알파벳을 보고 이상하게 받아들인것이다. 사실 이런 점은 흐루쇼프도 마찬가지다. 2000년대 초반까지는 흐루쇼프를 흐루시초프라고 표기하였다.
  • 인디펜던스 데이: 리써전스에서는 외계인을 무찌른 후 각국과 정상회담을 한다. 근데 이 양반은 술 퍼먹다 외계인에게 당했을 것 같은 느낌이..

[1] 많은 러시아인들은 엘친을 증오하기는 하지만 그와 별개로 푸틴이 옐친으로부터 대통령직을 승계받은 인물이고, 또한, 옐친으로부터 이런저런 조언을 들으면서 대통령직 수업을 받은데다가 결정적으로 옐친에게 면책특권을 부여해주어서 옐친이 감옥에 가지않고 말년에 별장에서 내보낼수있게 만들었기 때문에 옐친을 일방적으로 격하시킨다면 정통성에 큰 타격을 입기 때문이다.[2] 1990년 소련은 이미 경제 체제가 거의 마비되어 배급제를 실시하고 있을 정도였다.[3] 국가가 가격을 정하지않고 생산자가 가격을 정하는 것. 자본주의 국가에서라면 이미 당연한 논리겠지만,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국가에서 국영화된 생산시설(공장, 농장(콜호즈) 등)을 통해 가격을 책정, 도시 노동자들에게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고 있었다. 이는 현실공산주의 경제의 가장 기초적인 경제원리였다.[4] 당시 러시아 정부 공식통계 추산 사상자 187명, 최고회의 추산 약 2,000명 가량으로 집계했다.[5] 원래 소련은 1930년대 산업화 시절 군대를 육성하기 위해 군수 산업과 관련된 중공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하지만 1950년대, 1960년대를 거치면서 점점 공업 생산력과 경쟁력이 서방보다 떨어지면서 적자가 늘어났다. 이에 따라 소련 정부는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자원채굴 사업에 많이 기댔고, 실제로도 국가예산의 상당수를 자원소득에서 얻었다. 이런 자원의존형 구조는 소련 붕괴 이후 점차 심각해져 오늘날 러시아는 국고의 52%를 자원 수출에 의존하고 있다. 러시아의 재벌들 역시 주요 수익이 자원채굴과 수출이다.[6] 이미 러시아는 나고르노 카라바흐같은 분쟁이나 1992년 조지아 내전 때 샤밀 바사예프같은 체첸계 군인을 보냈던 적도 있었다.[7] 제대로 된 보병과 포병, 공군의 지원없이 무리하게 기갑전력을 시가지로 밀어넣은 결과 고층 건물에서 체첸 반군이 내리 쏘는 대전차무기들에게 뚜껑이 따이고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러시아군은 당시 그로즈니 시가전을 숫제 연옥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8] 사실 이정도의 전사자도 러시아에겐 상당한 피해였다. 그만큼 체첸의 저항이 워낙 거세어서 멸망시키는데 고생했던 것.[9] 실제로 재임중 건강이 좋지 못해 병원에 자주 갔으며 않아 눕는 일도 많았다.[10] 옐친은 이미 대통령일 때에도 임기 중에 많은 뇌물을 받고 부정축재를 했다는 당시 검찰의 폭로가 있어서 제1야당인 공산당이 집권하고 이걸로 건수 잡으면 퇴임하자마자 감옥에서 여생을 보내야 할 판이었다.[11] 러시아에서 오이는 살로(돼지 비계)와 더불어서 보드카와 함께 가장 흔하게 먹는 술안주다.[12] 1994년에는 아일랜드 총리와 회담할 예정으로 공항에 도착하고도 만취한 탓에 비행기에서 내리지 못해 회담이 연기되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 덕에 옐친의 국제적 이미지는 대폭 추락했다.[13] 예금이 휴지조각 되어버리고, 봉급도 사실상 몇 토막 나버리는 바람에 돈이 없어 물건을 제대로 사지 못했다.[14] 미국을 능가하던 인구도 반토막났고(소련 인구는 2억 9천만이 넘었는데 붕괴 직후 러시아의 인구는 약 1억 4,800만으로 붕괴 직전 소련의 절반이었고, 1990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당시 미국의 인구는 2억 4,900만 가량이다. 지금 미국의 인구는 3억 3,000만을 넘는데 러시아 인구는 1억 4,500만으로 줄어 차이는 훨씬 늘었다.) 강대한 경제는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였다. 군사적으로나 우주 개발에서나 전혀 상대가 될 수 없었던 것이 당연.[15] 이는 당시 이원복의 '현대문명진단'에서도 묘사된 바가 있다.[16] 공산당 내에서는 사실상 민주적으로 투표를 진행했었고 말기에는 노동자가 직접 공장장을 뽑는 제도도 시행했었다.[17] 몇년 후 직선제로 원상복귀되었다.[18] 이런 정치공작도 옐친이 원조다. 기사.[19] 1차투표에서 옐친:주가노프는 35%:32%, 결선투표에서 옐친은 레베트와 지리놉스키의 지지를 얻어 54:40으로 이긴다.[20] 이 말이 맞을 수 밖에 없는 것이 그 당시 서방은 엄연히 소련을 최대의 가상적국으로 보았고 소련을 약화 내지는 제거하려는 의도는 상황에 따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항상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은 수십 년을 넘게 미국 및 서방 세력과 적대해 왔었고, 아무리 몰타 회담 등의 이벤트를 통해 일시적으로 서방과 소련의 관계가 완화된다고 해도 소련이 서방의 위협 요인이라는 근본적 사실 자체는 바뀌는 것이 없었다. 물론 그런 점을 생각한다 해도 온갖 불법적이고 비윤리적인 방법을 동원해 소련 붕괴를 시켰다는 점,그리고 소련과의 약속들을 모두 어기고 동유럽의 구 소련 국가들을 모조리 NATO에 가입시키려드는 등의 행보들은 러시아인들에게 하여금 자신들의 실수로 무너졌다는 생각 대신 서방이 온갖 부당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우리를 무너트렸다는 생각을 각인시켰고,그 결과 푸틴우크라이나 내전으로 대표되는 러시아의 반서방,대러시아적 외교 방침을 부추긴 것은 서방의 완벽한 실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