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6 21:02:59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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መንግሥቱ ኀይለ ማሪያም
[1]
Mengistu Haile Mariam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engistu_Haile_Mariam_3.jpg
출생 1937년 5월 21일 ([age(1937-05-21)]세)[2]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아디스아바바
악력 에티오피아 제 1대 대통령
임기 1987년 9월 10일~1991년 5월 21일
가족 배우자 우반치 비샤우, 자녀 3명
직업 군인, 정치인
종교 무종교(무신론)

1. 개요2. 초년 생애3. 쿠데타 감행
3.1. '검은 토요일'3.2. 황제 처형
4. 집권기의 행적
4.1. 적색 테러4.2. 수감자에 대한 가혹행위4.3. 1983년의 대기근4.4. 집권 10주년 기념 대회4.5. 다른 행적들
5. 몰락6. 퇴임 후7. 기타

[clearfix]

1. 개요

그들이 우리가 사람을 죽일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가 혁명을 그만둬야 한다고 말하는 것 아닙니까? 살인을 멈추라는 외침은 부르주아의 외침입니다.
임시 군사 행정 평의회[3]가 '레드 테러의 전체 사망자는 15만~20만 명에 달할 거다'라는 국제엠네스티의 추산에 남긴 답변
당신이 몰랐던 이야기가 소개하는 멩기스투 영상

에티오피아 인민민주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자 독재자, 학살자.

1974년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를 강제 폐위시키고 에티오피아에 군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으며 1977년에 군부의 실권자로 등극한 후 수많은 자국민을 학살하여 아프리카의 수많은 독재자들 중에서도 악질로 평가받는 것은 물론 크메르 루주폴 포트, 중국공산당마오쩌둥과 함께 제2차 세계 대전 후 세계사에서 최악의 공산주의 학살자이자 군사독재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실제로 멩기스투 집권기에는 하일레 셀라시에와 황족을 비롯한 67만 명의 반대파가 숙청되었고 에리트레아 독립 전쟁, 에티오피아 내전 등으로 약 100만 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했는데 현재까지 멩기스투가 저지른 이런저런 범죄로 인하여 사망자 수는 무려 200만 명이 넘어갈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2. 초년 생애

1937년 5월 21일에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갈라시다모 총독령의 시골 마을에서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는 소수민족인 콘소족 혈통으로, 상병 계급으로 군대에 복무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본래 자우디투 여제 시절의 궁정 귀족 출신이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외할아버지가 수녀였던 외할머니와 은밀한 관계를 맺은 것이 발각되어 궁에서 쫓겨났기에 어머니가 태어날 당시에는 이미 평민이나 다름없었다.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로 틈만 나면 그를 폭행했으며[4] 어머니는 그가 8살이었을 적에 임신하다가 죽었기 때문에 어린 그는 두 형제와 함께 외할머니의 품에서 몇 년 동안 자라면서 초등학교에 다녔는데 학교에 다닐 적의 그는 학업에는 성실히 임하지 않았지만 상상력이 풍부하고 남의 말을 잘 들었으며 특히 기억력이 유별날 정도로 뛰어난 학생이었다고 한다.

상당히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따라 군대에 입대했는데 통신병 임무 수행으로 군 생활을 시작한 어린 그는 아만 안돔[5] 소대장의 사무실에서 심부름꾼 일을 하다가 홀레타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였고, 졸업 후 중위로 임관하였다. 이후 아디스아바바에 주둔한 육군 제2사단에서 복무하면서 대위로 승진했다. 이후 하라레의 제3부대에 들어갔고 1964년에는 미국 메릴랜드주에 파견되어 18개월 동안 군사 훈련을 받으면서도 메릴랜드 대학교에서 야간 수업을 들으면서 기본적인 영어를 익히기도 했으며 1968년에는 우반치 비샤우[6]와 결혼하여 1남 2녀를 뒀다.

3. 쿠데타 감행

그러다가 1974년 6월에 군 하사관들과 하급 장교들과 공모하여 108인으로 구성된 '더르그'를 세웠고 동년 9월 11일 저녁에는 국영 TV 방송을 통해 대기근을 겪는 백성들의 참상이 담긴 영국의 다큐멘터리에 사이사이 황제의 사치를 몰래 끼워넣어 방송하고 그 다큐멘터리를 황제로 하여금 보게 했다.[7]

1974년 9월 12일에 육군 소령이었던 그는 육군과 경찰들을 모아 쿠데타를 일으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를 폐위시키고 궁전에 유폐시킨 후 9월 15일에 임시 군사 행정 평의회의 제1부 의장이 되었다.

이후 혁명 온건파와 혁명 급진파 사이에서 갈등이 벌어질 때 그는 스위스에서 병을 고치고 있던 황태자 암하 셀라시에를 맞아들이자고 주장했던 아만 안돔 초대 더르그 의장 등과 대립했다. 안돔이 속했던 혁명 온건파는 지식인 계층이 대부분이었지만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고 있었고 군 일부에 존재했던 급진파는 공화제를 주장했으며 학생이나 대학 교수, 노동 조합이 지지하고 있었다.

3.1. '검은 토요일'

1974년 11월 22일 에티오피아 급진파는 갑자기 에리트레아 인민 해방 전선(EPLF) 토벌 문제에 대한 의견 불일치를 이유로 아만 안돔 의장을 해임한 후 그를 연금시켜 버렸다. 바로 이 날 멩기스투는 직접 '혁명적 조치'라며 셀라시에 시절의 민간 및 군 관리들, 황족들을 없애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들은 모두 어떤 범죄에 연루된 적이 없었음에도 이미 부패 혐의가 덧씌워져 쿠데타 직후부터 이미 구금된 상태였는데[8] 이렇게 수감된 54명은 모두 최소한의 형식적인 재판도 전혀 받지 않은 채 바로 다음날인 11월 23일 새벽 2시에 이미 구금된 교도소에서 군용 차량에 실려 중앙 교도소 인근에 미리 파둔 구덩이로 옮겨진 후 모두 기관총으로 처형되었다. 이렇게 처형된 사람들 중에는 전 수상 2명과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손자인 해군 사령관도 있었다 .

아만 안돔과 그의 추종자 6명도 안돔을 체포하기 위한 더르그의 군대와의 총격전 중에 사망했으며 이들도 처형된 셀라시에 시절 관리들이 묻힌 구덩이에 암매장되었다. 1974년 11월 23일 단 하루 동안 총 61명이 사망하여 이 날은 에티오피아에서 '검은 토요일'이라고 불린다. 이 사건으로 그는 에티오피아의 실권을 장악했다.

3.2. 황제 처형

그는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를 억지로 폐위시킨 것도 모자라 80이 넘은 노인이었던 황제를 살해했다는 점 때문에 더욱 큰 비판을 받는다.[9] 1975년 8월 27일에 하일레 셀라시에가 주치의의 부재중에 갑자기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았는데 '전립선 수술로 인한 합병증에 의한 호흡 곤란'으로 사망했다고 발표되었지만 당시에는 그가 손수 황제의 얼굴을 배개로 눌러 질식사시켰다는 소문이 횡행했다.

그러나 궁전 부지의 화장실 근처의 콘크리트 바닥에 암매장되었던 황제의 시신이 그가 퇴진한 지 1년 후인 1992년에 발견되었고 1994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의문사는 그의 명령으로 전직 장교들이 침상에서 83세였던 노인의 목을 졸라 교수형을 집행한 것이었다고 한다. 군정의 인장과 서명이 기재된 셀리시에의 암살을 지시한 문서도 발견되었고 이는 더르그의 전직 구성원들에 의해 사실로 인정되었다.[10]

4. 집권기의 행적

4.1. 적색 테러

반혁명주의자들에게 죽음을! 에티오피아인민혁명당에게 죽음을!
1977년 2월 5일에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이 아디스아바바 중심부에서 한 공개 연설 중. 그는 이 연설 후 '혁명이 적들에게 무엇을 할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피를 상징하는 붉은 잉크로 채워진 병 세 개를 바닥에 던져 깨트렸다.

1975년 3월부터 아트나푸 아바테(አጥናፉ አባተ, 1931~1977) 중령과 함께 더르그 부의장을 역임했으며 1976년까지 더르그는 의회와 헌법을 폐지하고 야당을 금지하여 반정부 세력을 말살했고 1977년 2월 3일에는 더르그의 명목상 수장이었던 터퍼리 번티(ተፈሪ በንቲ, Tafari Benti, 1921-1977) 중장과 다른 더르그 수뇌부들을 쿠데타 모의 혐의를 적용해 차고로 압송한 후 매복해 있던 군인들로 하여금 그들을 소음기를 장착한 총으로 총살하고[11] 바로 그 날 더르그의 의장 겸 최고 사령관이 되어 군사독재 정권을 만들었다. 그는 직후 아바테도 부의장 직에서 쫓아낸 후 동년 11월 2일 처형했다.

그는 소련 등의 지원을 받아 에티오피아를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고 계속해서 억압적인 통치를 펼쳐나갔는데 이로 인해 에티오피아는 전세계에서 손꼽히는 생지옥이 되어 버렸다. 당시 군부가 자행한 학정과 악행들을 보면 그는 문자 그대로 '제2의 폴 포트'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수준이었다. 사실 멩기스투는 인지도가 꽤 낮을 뿐, 단순 잔혹성으로만 치면 그 이디 아민 못지 않을 정도로 독재자들의 전성기였던 1970년대의 독재자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한 인물이다.[12]

1976년 9월 23일에 시작되어 그가 국가원수가 된 1977년 2월 3일에 가속화된 후 1978년 3월 22일까지 1년 반 동안 자행된 공포정치인 '레드 테러(Red Terror)'[13]앰네스티 인터내셔널 추산 50만에 달하는 엄청난 사망자가 나왔고 그 중 대부분이 영장 없이 체포되어 재판도 없이 처형된 케이스였다. 드물게나마 재판을 받는 사람들마저 대부분이 군사 재판에서 재판을 받았으며 재판에 끌려간 사람들은 항소가 불가능했다. '레드 테러'는 매우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는데 먼저 각 지역의 위원회들이 용의자들을 제거하는 방법을 논의하기 위해 서로 만나면 각 구성원들은 회의에서 내린 결정을 확인하기 위해 문서에 서명했고 그 문서의 사본은 상위 행정부와 당 기구로 보내졌다고 한다.

그는 국가원수로 집권한 뒤 반정부 세력에 대한 선전포고를 했다. 이후 야당인 에피오피아인민혁명당(EPRP)이 그의 주요 표적이 되었는데 이는 EPRP가 1976년 9월에 그를 암살하려고 했으며 그의 지지 세력을 끊임없이 공격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당시 그의 EPRP 탄압이 어느 정도였냐면 단순히 EPRP의 책자를 보유했다는 이유만으로 재판도 거치지 않고 살해된 사람까지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그는 금지된 단체에 가입한 학생들과 반정부 인사들이 해외에 살고 있으면 사람들을 보내 에티오피아로 강제로 끌고 간 후 구금하거나 가능하면 살해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당연하지만 다른 정치 기구들은 물론 노동조합을 위시한 에티오피아의 모든 민간 단체는 법적으로 금지되어 해산되었고 민간 단체의 지도자들은 줄줄이 체포되었으며 '레드 테러'에 대한 보고서를 전송한 영국인 기자도 '제국주의 선전'을 했다는 이유로 추방되었다.

국민들의 출국도 엄격히 통제하여 반정부 인사로 의심되는 사람들과 구금자의 친척들의 에티오피아 탈출을 '국민과 나라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하고 사형에 처했으며 당시 아디스아바바에는 야간 통행금지령이 내려졌고 심지어 당시 에티오피아인들은 국내의 다른 지역을 이동하는 것조차 제한을 받았다고 한다.[14]

노동절을 앞둔 1977년 4월 29일 밤에는 반정부 시위 방지를 명목으로 더르그가 젊은이들의 체포를 명령했고 이에 진압군들은 반정부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반더르그 시위에 참여하거나 반더르그 팸플릿을 배포한 수백 명의 민간인들이 체포되어 수도 아디스아바바 외곽의 세 장소로 옮겨진 후 대량으로 처형당했으며 기관총을 장착한 지프와 민병대가 아디스아바바 거리를 순회하며 반정부 시민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발포하여 단 이틀 만에 더르그의 추산으로만 732명이 사망했고 앰네스티의 추산에 따르면 1천 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하며 최대 2천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15] 이후 멩기스투 시기에 노동절 학살은 사실상 '전통'처럼 자리잡게 되었다.

당시 아디스아바바의 시민들은 사살된 반정부 인사들이 공포감 조성을 위해 '반혁명 분자였다'처럼 처형당한 이유가 적힌 이름표와 같이 거리에 버려지거나 가로등 기둥에 매달리는 것을 아침마다 봐야만 했으며 에티오피아 정부군은 반정부 세력들을 교회에 감금한 뒤 불을 질러 살해하거나 산 채로 절벽 밑과 강에 떨어뜨려 죽였고 여자들은 군인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강간당했다. 실제로 1977년 단 한 해 동안 아디스아바바에서만 3만 명의 정치범이 구금되었고 이 기간 동안 암살된 관료들은 더르그가 인정한 것만 200명에 달했다. 대부분의 구금과 처형은 아디스아바바에서 발생했으나 1978년에는 지방에서도 학살 사건이 여러 건 발생했다고 한다. 1977년 12월~1978년 1월에는 그런 정치적 테러가 절정에 달해 단 하룻밤만에 100명 이상이 죽는 경우까지 있었다고 하며 심지어 군인들은 살해한 사람의 목을 잘라 시장에 경매에 내놓기까지 할 정도로 잔혹했다. 종교 활동에도 제약이 가해져 몇몇 지역에서는 민병대가 종교 예배를 방해한 것은 물론이고 1978년 3월에는 한 성직자의 14살밖에 안 된 아들을 납치한 후 단 4시간도 안 되어 잔혹한 고문으로 죽게 했으며 1978년 12월 21일에는 에티오피아의 군대가 모스크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기관총을 난사하기도 했다.

심지어 이런 잔혹한 학정은 어린아이들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1977년 5월 17일에 세이브 더 칠드런은 '아디스아바바에서 8살 정도의 아이들을 포함한 어린이 1천명이 학살당했으며 그들은 대부분 11~13세 정도밖에 안 되었고 그들의 시신은 거리에 유기되어 떠돌아다니는 하이에나의 먹이가 되었다'는 발표를 했다. 실제로 당시 군부는 '단순히 글을 알거나 20세 이하인 사람들은 잠재적이거나 실제 '반혁명' 분자일 것'이라고 여겼다고 하며 심지어 '8세에서 12세 사이의 어린이를 체포할 수 있다'는 법률까지 제정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희생자의 유족들은 시체를 되찾기 위해 군인들에게 '가족을 살해하는 데 사용된 총알의 대가'라며 미화로 25~125달러(2023년 환율로는 124~621달러) 정도의 돈을 바쳐야 했으며[16] 시체 더미에서 사살된 가족과 친구의 시체를 찾으려는 사람들과 사망자를 애도하는 사람들까지 처형되거나 수감되었다.

게다가 당시 고문기술자들은 그에게 헌납하기 위해 고문 장면을 수시로 녹화한 후 그에게 보내기도 했으며 멩기스투 본인은 국영 방송국에게 공포감 조성을 위해 정적들이 참혹하게 살해되는 모습을 전국에 송출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고 심지어 동시기의 아프리카의 독재자들처럼 직접 정적 처형에 가담했는데 실제로 손수 정적을 끈으로 교살하거나 총살했으며 이에 대해 '모범을 보인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잔혹성 때문에 당시 에티오피아 국민들은 그를 식인종이라고 여길 정도였다.

다만 그도 극미량의 양심은 있었는지 민족학 박물관에 있던 종교적 전시품들은 전부 창고에 쳐박아 두긴 했어도 파괴하지는 않았으며 '레드 테러' 기간 동안 황실 시절 관료들과 그들의 친척들은 구금되기는 했어도 후술할 고문은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본격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후에는 공식적으로는 무신론을 내세우면서도 종교의 평등을 내세우며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의 활동 자체를 완전히 막지는 않았는데[17] 이 때문에 멩기스투의 학정 속에 살던 에티오피아 국민들은 이전보다 더 빈번히 교회를 찾아 오히려 교회 출석률이 역대 최고치로 증가할 정도였다.[18] 1988년 5월에 12년 동안 에티오피아 정교회 총대주교를 역임한 아부나 타클라 하이마노트(Abuna Takla Haymanot, 1918-1988)[19]가 죽자 정부 차원에서 국장을 지시한 것을 넘어 정부와 당의 고위층 인사 대부분을 참석시켰다.

특히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의 제2대 총대주교였던 아부네 테오필로스(Abune Tewophilos, 1910~1979)는 1976년 하일레 셀라시에의 옛 궁전에 감금된 후 탈옥했으나 교회의 배신자의 밀고로 발각되자 생존한 최고위 관료들이 수감된 메넬리크 궁전 교도소 1호실에 끌려간 후 무려 40일 동안 단식투쟁을 이어나가고 감옥에서도 수감자를 위한 기도와 미사를 거행했다. 군부는 테오필로스가 황제로부터 받은 황금 십자가와 그가 침대 옆에 보관해 두었던 십자가형 성화를 빼앗고 그가 주교가 되기 전에 쓰던 이름 "아바 멜릭투(Abba Meliktu)"로 서류에 서명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테오필로스는 이를 거부했으며 삼위일체 축일이던 1979년 7월 14일 군부의 명령으로 끌려간 지 정확히 1개월 뒤인 8월 14일 제국의 다른 궁전으로 끌려가 전선에 목이 졸려 사망한 후 수도승의 옷과 모자를 입은 채 궁전 인근 참호 무덤에 얼굴이 아래로 향한 채 매장되었다.[20]

4.2. 수감자에 대한 가혹행위

군부는 연행된 사람들에게 '예방접종만큼이나 일반적으로' 무자비한 고문을 가했는데 당시 군부의 고문은 너무나 잔혹한 나머지 '더러운 전쟁' 당시 남미의 군사정권이 자행한 고문들과 비교해야 할 수준이었다고 볼 수 있었다. 매우 끔찍한 묘사들이 많으니 읽을 때 주의를 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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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군부가 자행한 고문 수법들은 민간인들을 천장에 거꾸로 묶어 놓거나 '통닭구이'와 비슷한 '워페 랄라(ወፌ ላላ, Wofe Lala)'라는 '뒤틀린' 자세로 철봉에 묶어 놓은 후 온몸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기[21], 눈을 가리고 손목을 등 뒤에 묶은 후 도르래로 들어올린 후 채찍질하기, 몇 시간 동안 태양 아래에 묶어 놓기, 고문이 끝난 사람을 의자에 묶어놓은 후 추운 밤 공기에 내버려두기, 나일론 줄로 천천히 목 조르기, 조임 장치가 있는 특수 수갑으로 손 짓누르기, 모의 처형하기, 날카로운 자갈 위를 맨몸으로 몇 시간 동안 기어가게 하기, 강제로 진흙이나 오물 먹이기, 찬 물로 가득 채운 독방에 감금하기, 독극물 주사하기, 물고문, 전기고문, 손톱 뽑기, 얼굴에 끓는 기름 붓기, 신체를 불로 지지기, 여죄수 윤간하기, 신체 절단하기 등이 있었으며 끓는 기름에 몸이 담가지거나 거세를 당한 수감자도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군부는 무려 6살밖에 안 된 아이에게도 고문을 가하거나 겨우 9살밖에 안 된 여자아이를 성폭행하거나 잔혹하게 성고문하는 극악무도한 대악행까지 자행했다고 한다.

당시 고문을 당한 피해자들은 훗날 "일상적인 채찍질이나 구타와는 별도로 일부 피해자들은 전기고문으로 사망하기도 했다.", "피해자들을 플라스틱 용지로 덮어씌웠다. 고문으로 인해 그들에게서 피나 고름이 조사관에게 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는 증언을 했다.

증언자들은 에티오피아의 조사 기관에서는 일명 '버뮤다'[22]로 불리는 조사실에서 무자비한 고문을 당했다고 증언했는데 특히 조사관들은 고문 후에는 피의자들에게 화학 처리가 된 옷을 입혔고 화학 약품 때문에 시신경을 자극당해 피해자 중 일부는 실명했다고 한다.

당시 군부는 연행한 민간인들을 지하실에 밀어넣고 고문을 기다리는 동안 고문당하는 사람(수감자의 친구, 가족도 포함)들의 비명을 듣게 하거나 아예 사람들이 고문당하는 광경을 직접 보게 했다고 한다. 물론 그들이 수감된 지하실들은 공기와 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고 수감자들은 하루에 단 10분만 햇빛을 보는 것이 허용되었으며 온도차도 극심하여 어떤 감방은 '시베리아'라고 불릴 정도였고 습한 데다 쥐와 바퀴벌레, 이가 들끓는 비위생적인 환경이었다.

당시 에티오피아에서 연행된 사람들은 1년에 2~3번 정도 있는 종교 축제를 제외하면 가족 면회도 거부당했고[23] 병이 걸렸을 때 치료를 받는 것도 제한되었으며 죄수들에게는 음식도 제공되지 않아 가족들이 매일매일 죄수들에게 음식을 보내야 했는데 음식을 받는 것조차 교도관의 승인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그리고 연행된 사람들이 '자백'을 거부하는 것은 사실상 죄인이란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어졌으며 다른 사람의 '자백'으로 끌려온 죄수들이 자발적으로 '자백'한 죄수들보다 더 끔찍한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4.3. 1983년의 대기근

홀로코스트와 비슷하지만 이들은 증오의 희생자가 아닙니다. 단지 무관심일 뿐입니다.
모하메드 아민

참고자료

1984년 10월 23일에 BBC에서 방영된 기근 취재 영상. 워낙 기근의 현장이 참혹한 나머지 연령 제한까지 걸려 있다.[24]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약 2년 동안 에티오피아에서는 북부 지역 중심으로 한 세기 만의 최악의 기근이 일어났는데 사실 제정 말기에도 참혹한 기근이 있었지만 이 기근은 그것마저 뛰어넘는 참혹한 대기근이었다.

이 기근으로 약 3,800만 명에 달하던 에티오피아 인구 중 775만 명이 기근의 영향을 받았고 30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고향을 떠났으며 20만 명의 아이들이 고아가 되었고, 30만~120만 명이 사망하는 끔찍한 참사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1984년 10월 23일에 케냐인 사진작가 모하메드 아민[25]이 촬영하고 영국인 저널리스트 마이클 버크가 논평을 달아 BBC 9시 뉴스에서 송출된 7분짜리 뉴스를 통해 전 세계에 알려졌는데[26] 이 뉴스를 접한 세계인들은 기근에 시달리는 에티오피아 사람들을 돕기 위해 적극적으로 자선 활동에 나섰고 특히 아일랜드의 싱어송라이터 밥 겔도프라이브 에이드 등의 자선 콘서트를 열어 에티오피아 기근에 대한 구호 기금을 마련하고 당대의 세계적 가수들이 대거 참여한 We Are the World도 이 자선 활동의 일환으로 발표되었다.

이 대기근의 근본적인 원인은 가뭄이었지만 그는 이 기근을 오히려 북부 지역의 반군을 없애기 위한 작전으로 이용하면서[27] 반군들에게 동조하던 북부 지역의 주민들을 굶어 두도록 방치해 기근 사태를 의도적으로 키웠다. 실제로 그는 반군들의 세력을 악화시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도 상관없다는 듯 기근 구호 물자의 대부분을 전쟁에 썼으며 농지와 얼마 안 남은 농작물들을 보이는 대로 불태웠고 심지어 에티오피아 공군으로 하여금 자국민들에게 네이팜탄 공격을 퍼붓게 한 것을 넘어 의도적으로 식량 재고와 의료 센터들을 폭격하여 기근의 피해를 키웠다.[28] 즉, 에티오피아 대기근은 기근을 가장한 학살이었던 셈.[29]

그러고도 그는 외국 기자들에게 집단농장을 보여주며 에티오피아 국민들이 잘 살고 있는 것마냥 가장한 것은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기근에 대한 정보를 철저히 통제했다.

1984년 11월 멩기스투는 '기근 문제를 해소하고 에티오피아 농업의 발전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소련의 협조 외에는 별다른 준비도 없이 티그라이 지역 인구 60만 명을 남부 지역으로 강제로 이주시키고 그곳에서 사회주의적 집단농장을 새로 시작하겠다는 계획을 실시했는데 이 이주 과정에서 5만 명이 죽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수단으로 도피했고 이주한 주민들은 살던 곳과 다른 자연환경에 적응하지 못하여 삶이 나아질 수 없었다.

4.4. 집권 10주년 기념 대회

1984년 그는 에티오피아 GDP의 46%를 군사비로 써서[30] 에티오피아군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최대 상비군으로 만들 것이라고 발표했으며 동년 9월 12일 에티오피아 노동당(WPE)을 창당하고 이 당의 사무총장이 되었다.

그는 이에 도취되었는지 같은 달에 당시 가치로만 약 1억 달러[31]의 비용을 들여 창당과 '혁명' 10주년을 축하하는 호화로운 행사를 개최했는데 7만 명이 그의 포스터를 들고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동지의 혁명적인 지도력과 함께 전진하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광장을 행진하는 군중대회와 소련산 탱크, 장갑차, 로켓 발사대들의 행진이 어우러진 대행사였다.

이 행사를 위해 아디스아바바에는 그를 찬양하는 수백 개의 기념물들이 세워졌고 상업적인 간판들은 전부 거대한 '혁명 표어'로 대체되었으며 수도는 온통 붉은색으로 도배되었는데 심지어 왼쪽 주먹을 들어올린 그의 대형 동상도 설치되었다. 물론 군중대회 연습을 위해 수도의 주요 대로는 며칠간 폐쇄되었고 연습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은 구타를 당하거나 투옥된 것은 물론, 식량 배급도 금지되었다.

그는 특별 전시회를 열어 에티오피아를 '고대 인류 시절부터 아드와 전투, 황제의 축출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진화를 거쳐 멩기스투라는 인물에 이르러 '진화의 절정'을 이룬 진보와 구원의 역사를 가진 나라'로 선전했다.

이 행사는 그가 1982년 북한평양에 방문했을 때 본 국경절 행사에 감명을 받아 치러진 것이었는데 실제로 에티오피아에 파견된 북한의 고문들이 행사를 기획하고 감독했으며 북한의 만수대창작사는 아예 오가데 전쟁에서 사망한 에티오피아 군인들을 기린다는 목적으로 50m의 석비와 그의 '혁명의 역사'를 묘사한 구리 부조로 구성된 '티글라친 기념비'도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그는 뻔뻔하게도 기근이 없다는 듯 이러한 초호화 행사를 치러 놓고 기근의 구제를 위해 서방에 지원을 요청했는데 심지어 이 행사에 쓰인 1억 달러는 기근 원조 기금을 횡령한 돈이었다고 한다. 이 행사만 없었어도 에티오피아의 기근이 이렇게까지 큰 비극으로 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32]

4.5. 다른 행적들

그는 집권 초반부터 모든 농장을 국유화한 후 집단농장을 설치했으며 이전까지 에티오피아의 기득권층이 보유하던 재산을 몰수하거나 모든 산업을 국유화하는 등의 급진적인 정책을 실시했는데 그 와중에 에티오피아 북부의 티그라이에서는 독립을 주장하는 봉기가 일어나기도 했다.

1977년에는 에티오피아의 소말리인 거주 지역을 병합하길 원했던 시아드 바레 치하의 소말리아가 에티오피아 동쪽 국경을 넘어서 침공해 오가덴 전쟁이 발발했고 나라가 쑥대밭이 되어 버렸는데 에티오피아는 소련 등 외세의 도움을 받아 가면서 소말리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고 자국 영토를 지키는 데는 성공했으며 결국 서로 지친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는 1978년이 되어서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한편 그가 의회의 연단에 오르면 835명에 달하던 의원들은 섬뜩해질 정도로 조용해졌고 중앙의원회 정치국의 결의안을 들으면 박수를 치면서 반대 의견 하나 없이 모두가 찬성을 표했다고 한다. 실제로 더르그 의원들도 멩기스투를 두려워하여 '멩기스투의 지시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법'을 배웠다.

그에 대한 우상화도 자행되어 그는 '전지전능한' 존재로 추앙되었는데 당시 학교에서는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쳤으며 신문 1면마다 그의 얼굴이 실려 있었고 에티오피아에서는 식당과 술집에까지 그의 초상화가 걸렸을 정도였고 그의 흉상들은 전국 각지에 설치되었으며 '훌륭하고 관대한 에티오피아의 구세주', '가장 사랑받는 지도자', '자비로운 개인', '모든 현명한 정책 결정의 원천', 심지어 '예수의 재림'처럼 그에게 가장 안 어울리는 호칭들이 멩기스투 한 명을 위해 존재했다. 그는 자기가 황제라도 되는 듯 사람을 만날 때는 금박을 입힌 의자와 높이 올린 연단에 따로 앉아 자신의 권력을 강조했다.

물론 그는 부패와 사치도 즐겨 국유화 주택에서 외국인 직원 및 기관에 임대한 4,500만 달러와 에티오피아 일대의 금광에서 채굴된 금의 일부를 비밀 은행 계좌에 저장했으며 황궁을 집무실로 쓰며 황제로부터 몰수한 리무진들을 보유했고 그가 드라이브를 나갈 때면 인근 도로들은 폐쇄되었다고 한다.

덤으로 셀라시에 황제 시절의 에티오피아군이 6.25 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 자체를 감추고 6.25 전쟁 참전 용사들을 '공산주의에 총부리를 겨눴다'는 이유로 핍박하기도 했다.#

심지어 1979년에는 '세계 아동의 해'를 기념한다고 아디스아바바에 있는 경기장에서 멩기스투 본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어린이 2만 명을 모아놓고 오리걸음을 시키기도 했다.[33]

웃기게도 그는 이스라엘에게 자국의 베타 이스라엘을 이용하여 속된 말로 앵벌이 짓을 했다. 에티오피아가 돈은 없는데 각지에서 기근이 발생하고 반군이 들고 일어나 돈 나갈 데는 많으니 유대인 이주 허용을 대가로 이스라엘에게 손을 벌린 것이다. 이스라엘은 에티오피아에게 교관과 무기, 돈을 지원하고 그 대가로 베타 이스라엘을 수단을 경유해 자국으로 실어날랐다. 이렇게 9만 명을 이주시켰는데 의외로 멩기스투 집권기였던 80년대에 이주한 베타 이스라엘은 2만 이하로 의외로 적었고 대부분은 멩기스투 정권 붕괴 후 이주한 케이스다. 이들은 오늘날 17만 명에 달하는 이스라엘의 흑인 유대인의 기원이다.

5. 몰락

1987년 2월 1일에 열린 국민투표 결과(찬성 86%)에 의거하여[34] 1987년 9월 10일 그는 군정을 폐지하고 에티오피아 공산당 1당만이 합법 정당으로 허용된 에티오피아 인민민주공화국 정부 수립을 선포해 이틀 뒤인 9월 12일에는 대통령직에 올랐지만 그가 군정을 폐지했다고 해도 변한 것은 없었고 결국 그의 폭정과 가난을 참다 못한 반군들이 들고 일어났다.

1988년 5월 8일에는 멜레스 제나위가 에티오피아 인민혁명민주주의전선(EPRDF)을 결성했는데 그는 이러한 반군 세력들을 진압하기 위해 정부군 병력을 동원하여 반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펼쳤지만 워낙 그가 저지른 일들이 잔혹했고 그에게 원한이 뼈에 사무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많은 에티오피아 국민들이 반군을 지지하였다.[35] 결국 그의 정부군은 1988년 3월 17~20일에 일어난 '엘 알라메인 전투 이래 아프리카에서 벌어진 최대의 전투'로 평가받았던 EPLF와의 아파벳 전투에서 소련군의 지원을 받은 에티오피아 최고의 사단이 대패하고 많은 장비를 잃은 것을 시작으로 연전연패를 거듭하면서 주요 거점지와 도시들을 반군에게 빼앗겼다.

이렇게 수세에 몰린 그는 13세 이하의 소년 10만 명을 소년병으로 강제 징집하도록 명령하면서 구설수에 올랐는데 이렇게 징집된 아이들은 제대로 먹지 못한 채 얻어맞기만 하면서 훈련은 제대로 못 한 상태로 '세계에서 가장 잘 훈련되었다'는 말까지 들을 정도였던 반군들과 싸우게 되었다.

그는 아예 내각의 대부분을 에리트레아의 중심지인 아스마라로 옮기며 자신이 직접 에티오피아 국군의 작전을 지휘했지만 120억 달러에 달하는 소련의 군사 지원을 받은 총인원 30만 명의 에티오피아 국군이 수적인 우세만으로 반군을 이길 것이라고 믿어서 전략을 제대로 따지 않은 채 전투에 나서서 에티오피아 국군은 반군과의 전투에서 줄줄이 실패했다. 물론 그는 패전의 책임을 부하 장군들에게 돌리며 부하 장군들을 처형했다.

1988년 6월 22일에는 티그라이 지역의 고원에 있는 하우젠(ሓውዜን, Hawzen)이라는 마을에 반군이 숨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해 4대의 MiG-21건쉽을 동원해 장날을 맞이한 마을에 무자비한 폭격을 퍼부어 2500명 이상의 민간인들이 사망했고 고대의 비석 4개도 파괴되었다. 이 폭격 명령을 내린 사람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당시 티그라이 지역의 신입 계엄 행정관이었던 레게세 아스파우(Legesse Asfaw)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추정된다. 이 사건은 국내외적으로 큰 비난을 받았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실제로 이 사건 이후 반군에 대한 지원이 급증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것처럼 당시 에티오피아 북부에는 단순히 '반군에 협조할 것이다'라는 이유만으로 에티오피아 공군에게 폭격당한 마을이 많았다.

심지어 1989년 5월 16일에는 그가 동독을 국빈 방문할 동안 고위 장군들이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했다. 다만 그 쿠데타 시도는 그가 하루 만에 돌아오고 3일 간의 전투 끝에 국방부 장관을 포함한 44명이 죽고 176명의 쿠데타 관계자들이 체포되면서 실패로 끝났으며 육군참모총장과 공군 사령관 등 9명의 장군들이 쿠데타 진압 직후에 재판도 없이 초법적으로 처형되었고 1년 후인 1990년 5월 19일에는 12명의 장군들이 재판에서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대통령궁 지하에서 처형되었다. 이는 그가 국민들 사이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권력층 사이에서도 민심을 잃었다는 신호였다. 이 쿠데타의 영향으로 일반 사병의 탈영 비율이 증가했다.

더욱이 냉전이 종식되고 멩기스투 정권을 지원하던 공산권 국가들이었던 소련과 쿠바마저 지원을 끊으면서 그는 외교적으로 고립되기 시작했고 1991년 4월 20일에는 '조국을 온전한 상태로 보호하기 위해' 총동원령을 선포하고 개각을 감행했으나 1991년 5월 무렵에는 몇몇 에티오피아의 의원들이 그의 몰락이 가까워졌다는 걸 인지하고 멩기스투 시대에 의회에서 활동할 동안 유일하게 그를 맹비난했으며 결국 1991년 5월 21일에 수도 아디스아바바를 에티오피아 인민혁명민주전선(EPRDF)에게 빼앗기면서 그는 패망했다. 그의 패망 후 에티오피아에서는 벌집이 될 정도로 무수한 총알을 맞은 그의 포스터가 발견되었으며 아디스아바바에 있던 9m 높이의 레닌 동상[36]이 철거될 때의 분위기는[37] 마치 베를린 장벽이 철거되었을 때의 분위기와 같았다고 한다. #

그가 몰락하고 EPRDF를 이끌던 멜레스 제나위가 불과 36세의 나이에 에티오피아의 대통령에 등극한 후 새로운 독재자가 되어 에티오피아를 지배하게 되었다.

6. 퇴임 후

그는 권좌에서 쫓겨난 직후 가족들과 측근들을 합해 총 50명을 데리고 몰래 짐바브웨로 망명했으며 거기서 로버트 무가베식객이 되었다.[38] 1995년 11월 4일에는 하라레에서 아내와 산책하던 중에 한 에리트레아인에게 암살될 뻔했으나 목숨을 건졌고 1998년에는 일시적으로 북한으로 망명지를 옮기기도 했지만 결국 북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돌아왔다고 한다.[39]

이후 그는 짐바브웨에서 호화롭게 살면서 무가베에게 보안 문제에 관한 조언을 하거나 2005년에 벌어진 짐바브웨의 슬럼가 강제 철거 작전인 무람바츠비나[40] 작전을 입안하고 작전 회의를 주재했다는 소문이 전해지는 등[41] 권력 개입 의혹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2006년 에티오피아 대법원은 그는 잡지 못한 채 궐석재판을 진행하였는데 그는 집권 시절 대량학살 혐의로 기소되어 2007년 2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2008년 5월에는 대법원에 참석한 106인 모두의 만장일치로 형량을 높여 17명의 측근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에티오피아의 송환 요구를 무가베가 무시해서[42] 그에 대한 판결은 문자 그대로 '상징적'인 의미로 전락했다.

그러나 그를 적극적으로 보호해 줬던 로버트 무가베가 2017년 11월에 군부 쿠데타로 대통령직에서 실권하면서 무가베 축출 후 들어선 짐바브웨 신정부가 그를 에티오피아에 인계할 가능성도 높아졌지만 이후에도 에머슨 음낭가과 현 대통령 등이 멩기스투 송환에 대한 이렇다 할 언급을 하지 않는 등 송환이 확실하다고 판단하기 어렵다.[43] 일단 2024년 현재도 멩기스투는 하라레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다.

파일:노년의 멩기스투.jpg

좌측이 하일레마리암 데살렌(ኃይለማሪያም ደሳለኝ, Hailemariam Desalegn, 1965-) 전 에티오피아 총리[44], 우측의 노인이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이다.[45]

2018년 7월 말에는 하일레마리암 데살렌 전 에티오피아 총리가 아프리카 연합 선거 참관단을 이끌고 아프리카 연합 선거 참관단의 대표 직분으로 짐바브웨를 방문했을 때 그와 만나 사진을 찍기도 했다. 하일레마리암 데살렌은 이 사진을 2018년 8월 2일에 트위터에 올리고 이를 '일종의 화해'처럼 생각했던 모양이지만[46] 논란이 일자 이 사진이 담긴 글을 삭제했다.

2022년 5월 17일에 짐바브웨의 외무장관 프레더릭 샤바(Frederick Shava)는 VOA 짐바브웨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에티오피아 국민이 짐바브웨 정부에 접근하면 에티오피아 정부의 정당한 요청에 따라 짐바브웨 정부가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밝히면서 짐바브웨 정부가 그를 송환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암시했다. 출처

그러나 짐바브웨 정부는 위의 기사가 보도된 후에도 멩기스투의 송환을 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그는 2023년 5월 말에 하라레에서 남수단의 대통령 수석고문 쿠올 만양 주욱(Kuol Manyang Juuk, 1945~)를 만나 함께 사진을 찍으면서 건재함을 과시했다. 물론 그로부터 얼마 전에 86세 생일을 맞이한 고령인 만큼 5년 전에 비해 많이 노쇠해지긴 했다. #1, #2, #3

2024년 3월 25일 딸이 SNS에 아버지랑 같이 찍은 사진을 올렸다. # 동년 5월 27일에는 87세 생일을 기념하는 포스트를 올렸다. #[47]

냉전 시대의 아프리카 국가의 전직 독재자들 중 야쿠부 고원[48] 전 나이지리아 대통령과 함께 유이하게 생존하고 있는 인물이며, 당연히 독재자들의 최전성기이던 1970년대에 활동한 최악의 독재자들 중에서도 마지막 생존자이기도 하다.[49]

7. 기타

  • 어릴 적에 그를 길러 줬던 멩기스투의 외할머니는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수녀였으며 멩기스투 집권 초기에도 살아 있었다. 그는 할머니는 사랑했는지 할머니에게는 특별 명령을 내려 다른 교회들이 소유한 토지를 모조리 국유화하면서도 1928년에 저우디투 여제가 하사했던 할머니 소유의 땅은 국유화하지 않고 그녀가 그대로 가지게 했다.
  • 80년대 후반에도 살아 있었던 그의 아버지는 황제를 몰아내고 국가에 공포통치를 가져온 아들을 저주하며 자신의 거실 벽에 아들이 살해한 황제의 초상화를 걸 정도였다. 물론 아들도 과거 자신을 그렇게 학대하던 아버지를 증오하여 아버지가 경제적으로 곤궁할 때도 단 한 번도 돕지 않았다.
  • 정확한 신장은 불명이지만 상술한 노년기의 사진들을 보면 160cm대로 추정된다.
  • 모든 회의를 주도면밀하게 준비해야 직성이 풀렸을 정도로 일 중독자였다.
  • 잔혹한 만행들을 수도 없이 저지른 것과는 별개로 개인적으로는 겁쟁이였다고 하는데 실제로 암살에 대한 공포에 시달려 항상 북한에서 훈련을 받은 중무장한 경호원[50]의 호위를 받으면서도 항상 방탄조끼를 입었다고 한다.
  •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에티오피아인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최악이다. 이 글만 봐도 에티오피아인들은 그에 대해 격렬한 분노를 쏟아내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에티오피아에서는 '멩기스투가 짐바브웨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정치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끊고 거듭난 기독교인이 되어 성직자 같은 일을 하고 있다'[51]는 소문도 돌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링크 댓글에서도 볼 수 있듯 에티오피아인들 중에도 그를 '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혁명적 지도자'로 여기며 존경하는 사람은 있다고 한다.[52] 2024년 현재도 멩기스투의 지지자들은 멩기스투는 부패한 지도자가 아니었고 에티오피아의 통일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며 멩기스투를 감싸고 있다. 그랬다는 사람이 에리트레아를 잃고 에티오피아를 내륙국으로 전락하게 하는 데에 일조했냐?


[1] Mängəśtu Ḫaylä Maryam[2] 1941년생이라는 설도 있다.[3] PMAC, 암하라어로 '위원회·의회'를 뜻하는 '더르그(ደርግ / därg, 통칭 Derg)'로도 불린다. 이하 이 문서에서는 임시 군사 행정 평의회를 '더르그'로 칭한다.[4] 공교롭게도 멩기스투도 권력자가 되기 전에는 알코올 중독과 끊임없는 분노로 유명했다. 어떻게 보면 집권기의 폭력적인 모습이 알코올 중독에 의했을 가능성이 농후한 셈.[5] አማን አንዶም(Aman Andom), 1924-1974. 에리트레아 지역 출신이었고 이후 중장까지 진급했다. 후술하듯 나중에 멩기스투와 대립하다 사살당했다.[6] ውብአንቺ ቢሻው(Wubanchi Bishaw), 1937-. 남편과 달리 온화하고 경건한 여성이었다고 한다.[7] 실제로 1972년에서 1974년 사이 에티오피아에서는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기근으로 약 4만 명에서 8만 명 정도가 사망했다.[8] 참고로 여성 황족들과 황실 고위 관리의 아내들 중 상당수도 군부에 의해 구금되었다고 한다.[9] 전직 에티오피아 황제임을 떠나서 80대 노인을 잔혹하게 살해했다는 점에서 멩기스투의 잔혹함이 더욱 부각된다.[10] 그런데 웃긴 사실은 멩기스투는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총애하던 신하였다는 점이다. 근데 사실 하일레 셀라시에가 기근으로 민심을 크게 잃던 차라 셀라시에를 몰아내려고 생각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기는 하다. 문제는 멩기스투가 실질적으로 집권한 후 소련쿠바의 지원을 제대로 써먹지 못하고 무능하고 포악한 통치를 해서 안 그래도 바닥이었던 경제를 더욱 더 말아먹은 데다 포용력은 눈곱만큼도 없어서 내전까지 유발했다는 점이다.[11] 그 과정에서 총격전이 벌어져 많은 군인들이 사망했다.[12] 다만 이는 멩기스투가 아민만큼 노골적인 자기자랑과 자극적인 외교를 벌이지는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공산주의 국가들 중 더한 인권탄압이 발생한 스탈린 치하 소련, 북한, 민주 캄푸치아 등이 있었으며 그만큼 잔혹하지는 않고 퇴임 직전까지 대규모 학살을 자행한 적은 없으나 우스꽝스러운 정책을 시행하여 전세계의 웃음거리가 된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때문에 자연스레 멩기스투가 묻힌 점도 있다. 다만 차우셰스쿠는 그놈의 답이 없는 인구 정책북한을 연상시키는 우스꽝스러운 우상화만 제외하면 1970년대까지는 어느 정도 괜찮았다.[13] 암하라어로 커이 시브르(ቀይ ሽብር / ḳäy šəbbər).[14] 그 방법이 북한민주 캄푸치아처럼 '특별 허가'를 받아야 다른 지역을 이동하는 것을 허용하게 하는 방법이었는지, 아니면 거리마다 검문소를 채워넣는 방법이었는지는 불명. 다만 본격적으로 정권을 장악한 후 여행 제한 조치는 해제된 것으로 보인다.[15] 참고로 더르그는 이 학살이 국제적으로 알려지자 처음에는 이를 '제국주의 선전'이라고 일축했으며 이후에도 앰네스티를 '악의에 찬 반혁명적인 선전을 일삼는다'고 맹비난했다.[16] 참고로 1977년 에티오피아의 1인당 GDP는 약 134달러로 추정되는데 이는 2023년 환율로는 약 665달러다.[17] 물론 주교를 임명하려면 교회가 군부와 상의를 거친 후에야 가능하게 했다.[18] 참고로 공산 국가에서 교회 출석률이 증가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사례라고 하는데 실제로 엔베르 호자알바니아는 대놓고 '무신론 국가'를 내세우며 종교를 탄압했고 북한민주 캄푸치아, (공식적인 공산주의 국가는 아니긴 했지만) 마시아스 응게마적도 기니도 종교를 금지했다. 다만 이들은 공산권 국가 중에서도 특히 폭압적인 체제였다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19] 신도들에 대한 박해가 가중될 것을 두려워하여 멩기스투 정권에 직접 맞서지는 않았지만 "내 백성들아, 온 마음을 다해 공산정권에 대한 저항에 동참하면서 강해지고 기도하라."고 설교했으며 에리트리아와 티그라이 지역에 대한 에티오피아군의 폭격에 대해 멩기스투에게 항의하기도 했다. 이에 멩기스투는 "국정 간섭을 중단해라"며 화냈고 지속적인 단식과 고행으로 건강이 악화되었던 하이마노트는 이에 항의하는 의미로 더욱 엄격한 단식을 하다가 1988년 5월에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20] 물론 멩기스투의 몰락 후 그의 시신은 발굴되었고 그가 직접 아디스아바바 남부에 지은 고파 성 가브리엘 교회에 정식으로 다시 안장된 후 시성되었다.[21] 이 구타에는 전깃줄이나 가죽채찍, 철조망, 고무 호스, 몽둥이, 개머리판, 군홧발 등 다양한 도구가 쓰였으며 특히 발바닥을 집중적으로 구타당한 수감자들이 많았고 심지어 이렇게 발을 다친 사람들은 군부의 강요로 장기간 동안 자갈길을 걷어야 했다.[22] '누군가가 거기에 들어가면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로 이렇게 명명되었다.[23] 이마저도 1978년에 금지당했다.[24] 이 기사에 논평을 단 영국인 저널리스트 마이클 버크(Michael Buerk, 1946-)는 이 기근을 '20세기의 성경적 기근', '지상에서 지옥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고 일컬었다.[25] 멩기스투의 몰락과 관련된 독점적인 사진을 제공하기도 했다.[26] 당시 BBC의 이 뉴스를 보도한 방송사의 수는 세계 각지에 무려 400개가 넘었다고 한다.[27] 기근이 일어난 에티오피아의 북부 지역은 당시 군부의 반정부 인사 탄압이 유난히 극심했던 곳이었다고 한다.[28] 아이러니하게도 1974년 11월 16일 더르그가 발표한 특별 형법 선언 27조의 내용은 "의도적으로 기근, 전염병 또는 고통을 조장하고 이것이 인명 손실로 이어지는 경우에는 그 사람은 사형에 처한다"였다. 이는 상술한 하일레 셀라시에 시기 기근의 영향을 받은 조항이긴 하나 멩기스투는 자신이 만든 조항을 어기고도 그에 합당한 벌은 피한 셈이다. 그야 법 위에 있던 사람이니까.[29] 아일랜드 대기근, 우크라이나 대기근, 고난의 행군이 인재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어도 의도적인 학살인지에 대한 여부가 엇갈리는 것과는 대조적이다.[30] 참고로 80년대~90년대 초의 에티오피아는 국가 예산의 절반 이상을 군사비로만 썼다.[31] 2023년 환율로는 약 2억 9천만 달러다.[32] 참고로 에티오피아 기근과 비슷하게 1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북한의 고난의 행군도 직접적인 원인은 홍수였으나 김정일이 외국이 준 기근 원조 기금을 별장 건설과 식도락 같은 자신과 측근들의 사치와 향락, 선군정치에 쓰면서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진 것이다.[33] 참고로 같은 해에 중앙아프리카 제국의 황제인 보카사 1세도 1월, 4월에 2차례나 있었던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를 잔혹하게 진압하면서 도합 500여명의 사망자를 낳았으며 심지어 2차 시위 당시에는 보카사 본인이 감옥까지 찾아가서 수감된 학생들을 직접 때려죽였다고 한다. 물론 보카사는 이 일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으며 바로 이 해에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쿠데타로 쫓겨났다.[34] 참고로 이 선거는 1973년 이래 에티오피아에서 열린 최초의 선거인데 사실 군정 기간의 에티오피아에서는 선거 자체가 전혀 치러지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에 대항하던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에리트레아도 2003년 이후 20년간 선거 자체를 전혀 치르지 않고 있는데 군정이었던 멩기스투와 달리 아페웨르키는 명목상으로는 공화제인데도 선거를 치르지 않고 있으니 멩기스투보다 더 질이 나쁘다고 할 수 있다.[35] 황당하면서도 웃긴 이야기인데 EPRDF도 마르크스-레닌주의사회주의를 표방한 단체였다. 멩기스투는 공산주의 간판만 내걸고 사실상의 군부 독재를 했고 이게 많은 국민들의 반감을 샀다. 문제는 EPRDF도 현실사회주의에 따라 충실하게 독재를 자행했고 아비 아머드 알리 총리가 그나마 통제 정책을 완화한 정도라는 것이다. EPLF의 의장이었던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에리트레아의 초대 대통령이 되지만 아페웨르키도 멩기스투의 2배 정도나 되는 무려 30년에 달하는 장기 집권을 하며 에리트레아를 현 시점 최악의 인권탄압국으로 만든 독재자로 전락하고 말았다.[36] 1984년에 멩기스투의 쿠데타 10주년을 기념하여 소련이 선물해 준 것이다.[37] 참고로 이 철거를 주도한 사람은 티글라친 기념비를 제작했던 건축가였다.[38] 참고로 멩기스투는 짐바브웨가 독립 전쟁을 할 때 게릴라들에게 훈련과 무기를 제공했고 짐바브웨가 독립한 후에는 짐바브웨 공군의 조종사들에게 훈련을 제공한 적이 있었다.[39] 사실 북한은 폐쇄적인 것은 둘째치고 전반적인 경제기반이나 문화 자체가 다른 구 공산권 국가들에 비해 엄청나게 낙후되어 있다. 당장 과거에 공산권 국가였던 동유럽 국가들은 상황이 괜찮은 국가들은 중진국 정도는 되는데 북한은 현 기준으로 1인당 GDP가 에티오피아보다도 훨씬 낮은 것은 물론 에리트레아와 사실상 동급으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도 극빈국으로 꼽히는 나라들과 비슷한 수준일 정도로 낮다. 2022년 UN 통계 기준으로는 아예 에티오피아, 에리트레아는커녕 소말리아보다도 1인당 GDP가 낮다.[40] 쓰레기 청소를 의미한다.[41] 참고로 짐바브웨 정부는 후자를 부인했다고 한다.[42] 당시 짐바브웨 정부는 '멩기스투는 난민 신분으로 짐바브웨에 있으며, 유엔 협약에 따라 난민은 그가 망명한 나라에서 보호받고 있다'는 것을 그 근거로 댔다.[43] 최악의 경우 에티오피아로 인도, 송환되어 처벌받지 못하고 망명국인 짐바브웨에서 노환으로 사망할 가능성도 있다.[44] 2012년 8월 20일부터 에티오피아 총리를 역임하다가 2018년 4월 2일에 사임했다. 참고로 총리 시절에 멩기스투를 에티오피아로 송환하려다가 실패한 적이 있다.[45] 81세라는 고령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동안으로 보이는데 사실 로버트 무가베폴 비야(이들은 90세를 넘어서도 변함없는 젊음을 과시했다)처럼 아프리카의 고령 독재자들이 동안인 것은 그렇게까지 드문 일은 아니다.[46] 하일레마리암 데살렌은 멩기스투와 싸우던 반군들이 집합한 EPRDF 소속이다. 다만 그는 멩기스투가 몰락한 후인 1990년대 후반에야 EPRDF에 가입했다.[47] 여기서는 멩기스투의 나이가 83세로 언급되었다.[48] 이쪽도 나이지리아 내전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기근을 조장하며 10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전범인데도 전범 혐의로 궐석재판에 회부되기는커녕 오히려 고국에서 살면서 생일마다 모하마두 부하리 현직 나이지리아 대통령으로부터 축전까지 받는 등 국가적으로 영웅 대접을 받고 있다. 사족으로 냉전 시대 인물인데 개인 트위터 계정까지 있다.[49] 70년대의 악질 독재자 중 멩기스투 다음으로 최근까지 살아남은 호르헤 비델라는 이미 10년도 더 전인 2013년 사망했다.[50] 대부분이 콘소족 출신이었으며 1989년에 한 경호원이 술집에서 싸우다가 칼에 찔려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멩기스투의 지시를 받은 경호원들이 술집의 민간인들에게 화풀이로 기관총을 난사한 적도 있을 정도로 잔혹했다고 한다.[51] 선배들인 장 베델 보카사모부투 세세 세코도 석방/축출 후 속세의 쾌락과 인연을 완전히 끊고 수도승처럼 검소하게 살았다.[52] 다만 아프리카 국가에서 새로운 독재자가 집권한 후 이전 독재자 시절보다 상황이 악화되면 이전 독재자를 그리워하는 것은 흔한 일이며 우간다에는 멩기스투 이상의 악질 독재자였던 이디 아민을 그리워하는 사람까지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렇게까지 이상한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