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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화/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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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특징3. 유사 사례와 비교4. 사례
4.1. 일반4.2. 우상화 교육
4.2.1. 영유아 세뇌4.2.2. 역사 왜곡
4.3. 초상화 집착
4.3.1. 재난에서의 초상화 집착
4.4. 동상 집착4.5. 피휘, 이름 강조
5. 북한 주민들의 반응6. 김정은 집권 이후

1. 개요

파일:김일성김정일동상.jpg
평양 조선혁명박물관 인근에 세워진 김일성김정일동상.
2023년 10월 10일, 조선로동당 창건일을 맞아 북한 주민들이 김일성, 김정일 부자 동상에 헌화하는 모습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 동지
북한에서 최고 지도자를 일컬을 때 쓰는 표현 예시.
지도자 이름을 굵은 글씨로 강조해서 표기해야 한다.

북한의 지도자 우상화에 대해 다룬 문서.

2. 특징


우리 당은 위대한 수령님과 장군님께서 생전의 모습으로 계시는 금수산태양궁전을 주체의 최고성지로 더욱 숭엄하게 꾸리고 나라의 이르는 곳마다에 수령님들의 동상과 태양상을 정중히 모시도록 함으로써 수령님들께서 언제나 우리 인민들과 함께 계시며 우리 인민과 진보적인류의 마음속에 영생하시도록 하였습니다.
2016년 5월 7일 김정은이 발표한 조선로동당 제7차대회 중앙위원회 사업총화보고 중 #
그 누구를 막론하고 남을 쳐다보며 우상화하면 자기를 하찮은 존재로 여기게 되고 능히 자체의 힘으로 할수 있는것도 하지 못하게 된다. 나중에는 무엇을 하나 하자고 해도 비굴하게 낮추 붙어 맹목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꼭두각시노릇을 하게 된다.
2023년 1월 18일 로동신문 기사 <자주성은 나라와 민족의 생명이고 존엄이다>의 일부. 북한의 지도자를 우상화하는 것과는 무관한 내용으로, 외국을 의존하며 우상화하다가는 나라가 망할 수 있으나 북한은 자주권을 견지하며 나라와 민족의 존엄을 지켰다는 내용이긴 하다.[2] 그러나 이 문단의 내용만 보면 북한이 김씨 3대를 신격화하여 북한 주민들을 김씨 3대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에 너무나 적합한 표현이다.

북한은 근대 이후 국가 지도자에 대한 우상화가 가장 극단적인 곳으로 악명 높다. 북한에서는 지도자가 곧 신으로 간주되며 지도자에 반기를 드는 행위는 '신성모독'으로 간주되어 처형으로 다스리게 된다. 이는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에 걸쳐 이루어지는 3대 세습의 결과다.

북한에서 우상화를 주도하는 기관은 조선로동당 선전선동부로,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와 함께 가장 막강한 권한을 가진 부서다. 선전선동부가 지시를 내리면 만수대창작사와 같은 하위 기관에서 우상화 선전물을 제작하는 식이다.

이는 당의 유일적령도체계확립의 10대원칙에 의해 이루어진다. 10대원칙은 '김일성동지와 김정일동지의 교시, 당의 로선과 정책을 사업과 생활의 지침으로, 신조로 삼고', '글을 쓸때에는 언제나 수령님과 장군님의 교시, 당문헌을 정중히 인용해 그에 맞추어 전개'하며 '위대한 수령님과 장군님의 유훈, 당의 로선과 방침, 지시를 곧 법으로, 지상의 명령'으로 여겨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는 수령에게 무조건 복종하라 한 줄로 요약할 수 있다.

김씨 일가에 붙는 호칭과 별별 행적을 묘사하는 데는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게 하는 것은 물론 김씨 3대에 대한 혐오감만 가중시키는 것을 넘어 진지하게 김씨 3대가 애정결핍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게 할 정도로[3] 터무니없이 진부하고 과장된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서 묘사한다. 로동신문백두혈통 우상화 교과서 문서에서 이런 광신적 찬양들을 많이 확인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북한의 우상화가 기독교 영향을 받았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김씨 일가는 신이며, 이들의 말이 복음이고, 이들에 대한 찬양가는 찬송가이자 성가인 데다 시조인 김일성이 쓴 책은 경전(성경)이며 체제선전시설이 곧 성당, 교회다. '10대원칙'십계명에 대응되며, 갖은 명목으로 걷어가는 현금과 현물[4]은 대체로 김씨 일가 우상화에 사용되므로 헌금에, 월급에서 공제되는 금액은 십일조에 대응된다. 심지어 사회주의 대가정론(수령-당-인민은 하나)이 삼위일체와 유사하다는 의견도 제기되는 것을 넘어 대놓고 북한에서 '3위1체'라는 표현이 쓰인다!

김일성, 김정일을 대놓고 인간태양이라고 묘사하는데도 북한 당국은 김씨 일가에 대한 찬양이 전혀 우상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2005년 '개인숭배가 아닌 영웅숭배'라는 궤변을 남긴 것은 물론 김씨 일가는 단순히 '위대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3. 유사 사례와 비교

20세기의 많은 국가들은 최고 지도자들의 미덕을 칭송하는 데 있어 극단에 이르렀습니다. 아마도 로마 제국 말기[5]나 심지어 고대 이집트 시대[6] 이후로 세계는 개인숭배가 그토록 높은 수준에 도달하는 것을 본 적이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마오쩌둥의 중국이나 이오시프 스탈린의 러시아와 비교하더라도 여전히 (지도자에 대한 개인숭배가) 눈에 띕니다.
안드레이 란코프기고한 칼럼

크리스토퍼 히친스기고한 칼럼

나무위키에서 지도자 우상화를 다루는 항목이 별개 문서로 분리될 정도로 길어진 것이 북한의 지도자 우상화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 실태를 보면 북한은 농담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거대한 사이비 종교 국가라고 봐도 될 수준이다.[7]

일례로 8월 종파사건 당시 소련 대사였던 이상조(李相朝, 1915~1996)는 자신이 숙청될 것을 직감하고 1958년 "북한에선 스탈린 따위는 가볍게 넘어설 수준의 김일성 개인숭배가 이뤄지고 있다"는 내용으로 김일성의 진상을 폭로하는 문서를 작성하였다.[8] 지금과 같은 김씨 일가 백두혈통 체제의 시작이 8월 종파사건이었으므로 김일성이 북한의 권력을 장악한 초기에도 우상화가 심각하었음을 알 수 있다.[9]

특히 대부분의 국왕들이 통치권을 상실하면서 공화제나 입헌군주제가 된 20세기 중반 이후 강한 우상화가 이루어진 국가들은 상당수가 제2세계에 포함되었던 상황에서 북한은 압도적으로 심한 케이스인데 대표적으로 우상화된 지도자인 이오시프 스탈린마오쩌둥,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엔베르 호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하다못해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10]도 북한만큼은 아니었다.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 시절의 적도 기니가 북한 정도의 지도자 우상화를 펼치긴 했으나[11] 조카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의 쿠데타로 축출되고 처형당하면서 10여 년만에 끝나고 말았다.[12]

4. 사례

4.1. 일반

  • '김일성교'(주체사상) 핵심 교리인 '10대원칙' 학습을 요구한다. 1974년 제정된 '10대원칙' 4조 5항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혁명 사상"을 매일 2시간 이상 학습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매주 토요일마다 집중학습이 이루어지고 100페이지가 넘는 '문답식 학습제강'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완전히 통달해야 한다. 2008년 데일리NK 보도
  • 백두혈통에 접두어 '어버이'를 붙인다. 어버이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동시에 일컫는 말로, 부모와 동의어인 고유어다. 즉, '어버이 수령'이라는 말은 북한에서는 백두혈통이 친부모와 같은 위상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북한에서 지도자의 '은덕'을 가리킬 때 '친어버이사랑'이라는 표현이 자주 쓰인다. 샌드연구소의 최경희 대표는 북한의 실태가 어려울 때마다 자신들을 배신하지 말라는 세뇌를 강화하기 위해 어버이 단어를 더 자주 꺼낸다고 본다. #
  • 사회주의 대가정론에 입각하여 수령은 아버지, 당은 어머니, 인민은 자식이란 식으로 '우리는 수령님의 사랑을 받는 커다란 대가정'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일은 각각 '태양절'과 '광명성절'로 불리며 성대한 행사들이 열리고 특히 김일성의 생일은 김일성이 절대 권력을 누렸을 시기인 1974년부터 '민족 최대의 명절'으로 공표되었다. 물론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망일은 '민족 최대의 추모의 날'로 간주되고 있다. 다만 김정은 생일인 1월 8일은 공식적으로 공개되지 않았다. 이 날 충성 행사를 진행하기는 하지만. 2018년 BBC는 생모 고용희출신 성분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 김일성이 죽었을 때 애도기간 3년, 김정일이 죽었을 때100일[13]이 선포되었다. 이 때 진심으로 추모하지 않거나 노래 같은 오락거리를 즐기거나 술을 마시면[14] 처벌을 받았고[15] 이 기간에 탈북하면 '역적'으로 간주되었다.[16]
  • 아기가 김씨 일가 생일/사망일과 같은 날에 태어나면 무조건 생일을 바꿔야 한다. 이름도 김씨 일가와 같으면 안 되는데 #피휘, 이름 강조 문단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 해외 인물들을 내세워 우상화하기도 한다. 지미 카터가 '김일성이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에이브라함 링컨을 합친 것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다'라고 주장했다는 발언을 하는 것이나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에덴동산이 아니라 주체의 낙원이 지구 위에 피어난 민중복락의 동산'이라는 발언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물론 두 발언 모두 아무 증거도 없는 날조된 발언들이다.
  • 1982년 4월 2일 더 가디언1978년 10월 15일 워싱턴 포스트에 따르면 당시 북한에서는 일본과 미국의 '패배'[17]와 여성문제의 해결, 사상 최대의 곰의 사살, 희귀한 난초의 발견, 중성 꿩의 발견, 심지어 양계장의 닭들이 달걀을 많이 낳는 것까지 모두 김일성의 공로가 될 정도였다고 한다.[18] 물론 수해가 없고 풍년이 든 것도 모두 유일사상의 신봉과 이의 창조적 발전 덕택이 되었다. 관련 기사
  • 김씨 일가를 직접 보고 이야기를 나누거나[19] 김씨 일가의 손이 닿거나 함께 사진을 찍으면 '접견자'가 되어 기본 군중(핵심계층)으로 분류된다. 기본 군중은 진학/취업/승진에 유리한 등 혜택이 가장 많다.
  •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를 찾아 읽는 어린이들은 언어 영재로 취급받고 있다. 물론 책이 책인지라 책을 펴자마자 곯아떨어지는 어린이들도 있다고 한다.
  • 김정일이 원수로 추대된 1992년 4월부터 단 반년 동안 김정일을 찬미하는 문학 작품들이 1,600편(시 600편 포함)에 달하며 김일성 생전에 발표된 김정일을 찬양하는 문학 작품은 최대 6천 편으로 추정된다.
  • 김정일의 호칭은 공개된 것만도 1,200여개에 달한다. 예시
파일:화성-13 명판 확인.jpg
화성-13 TEL의 김정일, 김정은 찬양 명판[내용]
  • 군사장비는 물론이고 전동차, 노면전차 등 각종 장비에 김씨 일가가 탑승 심지어는 보기만 해도 기념 명판이 붙는다.
파일:102183178-vert.jpg
김정은이 장성들에게 특별 하사한 백두산 권총 사진.
  • 최고지도자들이 특별 하사한 무기들도 당연히 엄중히 관리되어야 하며 관리가 엉망이거나 분실할 경우 처벌받을 수 있다.
  • 사전 준비를 거쳐 김씨 일가가 현지지도를 위해 방문한 가정에서는 그 집 안팎에 '주체○○년 (수식어) 김○○동지께서 ○○○현장지도 중 찾아와주신 집'이라고 적힌 현판이 걸리는 것은 물론, 잠시 앉은 벤치와 몸을 기댄 나무마저 강화 플라스틱 덮개를 씌워 보존하며 심지어 김정은이 직접 만진 간장병까지 '원수님이 간장 맛을 직접 봐주시였다'며 따로 전시해 놓기도 한다.[21]
  • 김일성 우상화를 위해 고용되었던 외국인마저 고작 김일성 우상화의 허구성을 지적했다는 이유로 CIA 공작원이라는 누명을 쓰고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 사망했다. 이 사람이 지적한 내용은 '김일성이 일본군을 피하기 위해 피난한 거리 총합은 자구 둘레의 2배인 8만 km이다'라고 한다.
  • 외국인이 개발한 멀쩡한 꽃에 김일성화, 김정일화라는 이름을 붙였다.
  • 2018년 위성 사진으로 확인한 바에 따르면 사진에 찍힌 김씨 일가 선전물은 약 11,200개라고 한다.
  • 김일성 생전 '위대한 수령 김일성 대원수님의 만수무강을 삼가 축원합니다.'라는 글귀가 새겨진 '만수무강탑'이라는 구조물을 세웠는데 사후에는 '수령 영생론'을 내세우며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김정일 사후에는 "위대한 김일성동지와 김정일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로 문구를 바꾸어 영생탑이라는 구조물을 모든 시군 중심지에 설치했다. 이는 '김일성혁명사상연구실'도 마찬가지다. 영생탑은 김포나 교동도의 높은 장소에서 좋은 카메라로 북한을 촬영해도 잘 보인다. 연구소 수는 약 4만 개에 달한다고 한다.[22] 영생탑은 2019년 기준으로 전국의 모든 시, 군, 읍, 리, 주요 공장의 중심지 약 5,175곳에 세워져 있다. 영생탑이 오벨리스크마냥 크기 때문에 위성으로 잘 보여서 셀 수 있다.
  • 영생탑이 설치될 정도로 중요한 전국 주요 지역과 시설에 김일성김정일동상명제비를 건립했으며 그 수도 영생탑에 비견될 수준으로 많은 편이다.
  • 김정일의 출생지를 소련에서 백두산으로 날조하기 위해 백두산지구 혁명전적지(백두산 밀영)를 건설하였고 인근 바위를 파내 정일봉을 만들었다. 백두산뿐만 아니라 금강산 한 곳만 해도 총 80여개소 4500여자의 김씨부자 우상화 글귀들이 적혀 있다고 하며 묘향산 등 다른 명산에도 우상화 문구가 파내졌다고 한다. 관련 글
  • 2022년 11월 기준으로 매주 1회 1시간씩 열리는 김정은의 사상과 영도를 '신념과 양심'으로 받아들일 데 대한 주민 대상 '집중학습'에서 '의무감이나 책임감으로 수령에 대한 충실성을 보인다면 진짜 충성하지 않는 것이며, 수령에 대한 충실성은 의무이기 전에 신념과 양심, 의리로 표현되어야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충성이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주민들이 학습회에 참여하지 않으면 정치적인 죄를 뒤집어씌우기 때문에 주민들은 이에 불만을 품으면서도[23] 어쩔 수 없이 참여하게 된다. 자유아시아방송 기사
  • 신어마냥 언어도 통제한다. 국립국어원이 발간한 '남북 언어예절 비교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최고 지도자의 행동을 묘사할 때는 반드시 '-시-'라는 선어말 어미를 용언마다 붙여야 하고 '께서'라는 어미도 최고 지도자에게만 쓰일 것이 권장되며 북한에서는 이를 "인민들의 언어사용의 지향과 요구를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심지어 어릴 적의 김일성도 '아드님'이라는 표현으로 높여부르고 어릴 적의 김정일도 '사랑하는 아드님' '어리신 아드님'이라고 높여부르며 당연히 이들의 행동마다 -시- 선어말 어미도 붙이고 있다.
    최고지도자가 가르치는 것만 일깨워주는 의미로 '가르치는' 것으로 묘사할 수 있고 일반인들이 가르치는 것은 배워서 전해준다는 뉘앙스의 '배워준다'라고 표현해야 한다. '사랑'도 지도자가 인민에게만 할 수 있는 것이다.
    '교시', '성함(존함)', '안광', '안색', '신상', '저택', '몸소', '친히', '손수', '배려', '심려', '부르시다', '보살피시다' 같은 단어는 대개 최고 지도자를 높이는 경우에만 쓸 수 있으며 부모에게조차 제대로 못 쓰게 한다. 1990년에는 '선물'은 김부자가 하사하는 물품에만 쓰고 주민들끼리 주고 받는 것은 '기념품'이라고 하라는 지시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백두혈통'이 태어난 것은 '태어났다'가 아닌 '탄생하셨다'로 표현해야 하고 이들의 초상화를 걸어놓는 것도 '걸어놓다'가 아닌 '모신다'라고 표현해야 한다.[24]
  • 평양문화어보호법 항목에서도 볼 수 있듯 2023년 1월부터는 최고지도자가 아닌 보통 사람의 직무 뒤에 '님'이라는 말을 붙여 부르는 것은 '괴뢰식부름말'을 쓰는 것으로 간주되어 문자 그대로 공개처형까지 각오해야 하는 행동이 되었다. 이 조치는 '혈육관계가 아닌 청춘남녀들 사이에 《오빠》라고 부르거나 직무뒤에 《님》을 붙여 부르는 것'을 통제한다고 했기 때문에 북한에서도 직무가 아닌 '혈육관계'인 '부모님'이라는 단어는 사용해도 된다고 하며 그나마 다행히 외부의 우려와는 달리 학교 선생님에게도 '님'을 붙이는 것은 허용된다고 한다.
  • 김정일 시기까지는 서가에 김일성, 김정일의 노작과 문헌을 비롯한 정치서적들을 대량으로 비치해야 했다. 2015년 자유아시아방송 보도에 의하면 경제 상황이 나빠지면서 노작이 땔감으로 사용되어 버려 처벌하지 않고 있다.
  • 김일성이 태어난 1912년을 원년으로 한 주체년호를 만들어 이를 1997년부터 북한의 공식적인 연도 표시 방식으로 사용한다.
  • 2004년에는 김일성과 김정일을 우상화하는 데에 전체 국가예산의 최소 38.5%를 사용했다. 출처
  • 2001년에는 잡지 '조선예술'에 익명의 재미교포 풍수학자를 내세우며 '평양의 풍수는 김일성 덕분에 세계 제일이 된 만큼 북한은 천년만년 거뜬히 갈 세계 최고의 국가가 될 것이고 반대로 서울은 땅의 기운이 쇠한 만큼 남한은 곧 쓰러져서 북한의 자비만을 구걸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도 했다.
  • 매일 아침 평양역에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그리운 장군님', 2010년대 중반경부터 자정에는 '대를 이어 충성을 다하렵니다'라는 노래를 크게 틀어놓는다. 곡조가 섬뜩해서 외부인들은 처음 들으면 기겁한다.
  • 1974년부터는 3월마다 만 10~11세 정도의 학생들에게 '김일성의 고생[25]을 따라 배워야 한다'며 배움의 천리길이라는 이름으로 김일성이 걸었다는 길을 그대로 따라 걷게 하는데 그것도 아이들이 김일성이 언제 어느 날 무엇을 했는지를 정확히 모방하게 한다. 예를 들어 김일성이 강계 우체국에서 부모한테 강계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전보를 쳤으니 이 행군 중 강계에 도착한 학생들을 다 우체국에 데리고 가고는 김일성과 똑같이 집에 전보를 다 치라고 한다.
    번외편(?)으로 '광복의 천리길'도 있는데, 이것도 북한에서 매년 1월마다 학생들에게 김일성이 1925년에 조선독립의 뜻을 품고 평양 만경대~압록강가 포평나루터까지 13일 동안 천 리를 걸었다는 것을 그대로 걷게 한 거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둘 다 학생 대표로 특별히 엄선된 사람만 갈 수 있게 하여 모든 학생들에게 이 행사에 참여할 것을 강요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며 둘 다 북한의 주장 외에는 어떠한 근거도 없는 완벽한 날조다. 이렇듯 북한에서는 학생들에게 김일성 부자 관련 행적이나 '혁명사적지'를 가도록 강요하고 있다.[26] 관련 한국 언론 보도
  • 1993년에는 북한 군인들이 해변가에서 골뱅이 껍질 50만 개를 골라 김정일의 '혁명 업적'을 형상화한 골뱅이 만년화를 만들었으며 나비 450만 마리를 잡아 군인들의 환호에 답례하는 김정일의 모습을 만들어 생일 선물로 바쳤다. 관련 한국 언론 보도
  • 조선중앙텔레비죤김일성장군의 노래 도입부를 느리게 늘어뜨린 선율로 하루 방송을 시작한다. 뒤이어 애국가(북한)가 재생된 후 아나운서가 개시멘트를 하는데 배경음악으로는 김일성장군의 노래와 김정일장군의 노래 기악 편곡판을 깔고 화면으로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태양상'을 해가 뜨듯 떠올리는 모습을 보낸 후에야 시작한다.
  • 거의 모든 노래에 직간접적으로 김씨 일가와 조선로동당을 찬양하는 가사가 들어가야 한다. 매우 예외적인 사례로 우리의 국기가 있으나 국기를 다루는 노래이기 때문에 체제 찬양 요소가 가득하며, 반갑습니다감자자랑, 지새지 말아다오 평양의 밤아처럼 체제 선전과 관련이 없어 보이는 멀쩡한 곡들조차 북한 체제를 교묘하게 찬양하는 내용이 3절에 거의 반드시 들어간다. 오죽하면 "북한에서 체제 선전이 없는 노래는 (북한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에 만들어진) 애국가(북한) 한 곡뿐이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일까?
  • 북한의 몇몇 사이트에서는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을 검색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으며 김씨 일가 사진 위로는 마우스 커서가 숨겨진다. 김정은이 나오지 않은 사진은 커서가 잘만 보인다. 이렇게 된 이유는 '최고존엄'은 항상 앞에 노출되어야 하고 커서가 김정은을 가리는 것을 '최고존엄' 모독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 결혼 과정에서 신랑, 신부 일행이 처음으로 향하는 곳은 김씨 부자 동상[27]이며 군과 리처럼 동상이 없는 지역에서는 김씨 부자 초상화 앞에서 꽃다발을 놓아야 한다. 그 후 신혼부부들은 김씨 부자에게 마음속으로 '저희가 결혼하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앞날을 축복해주세요'라고 빌어야 한다.
  • 우상화 작업에는 최고지도자가 직접적으로 개입하기도 한다. 2021년 6월 27일 로동신문 기사 <승리와 영광으로 빛나는 위대한 혁명영도의 10년 - 수령영생위업실현의 성스러운 새 역사를 펼치시여>에 따르면 김정은은 생전에 김정일의 태양상 제작을 위해 '형상방향과 방도들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밝히고 손수 김정일의 시각 자료까지 보내주면서 '때없이 귀중한 시간을 내시여 최상의 수준에서 완성하도록 세심한 지도를' 주고 만수대언덕에 있는 김일성, 김정일의 새 동상 제작에는 '동상의 구체적인 세부에 이르기까지 생동하게 형상하도록' 손수 그림까지 그려주며 관여했으며, 금수산기념궁전을 금수산태양궁전으로 리모델링하는 모습을 묘사한 부분은 가관이다. 김정은이 그 '거창한 성업을' 직접 맡아안으며 '낮에 밤을 이어, 끼니도 건느시며(?!) 마음쓰신 그이의 지성과 로고에는 끝이 없었다'고 묘사하는 것은 애교에 우상화 시설 건설에 심혈을 기울였다고는 것을 하술하는 내용처럼 묘사한다.
손수 도안까지 그려가시며 태양궁전을 사소한 손색도 없이 꾸리시기 위해 마음쓰신 이야기, 영상사진문헌들의 액틀색갈까지 가늠해보시고 사적물의 영구보존문제에 대하여 세심히 관심하신 사연, 태양궁전의 벽체와 바닥돌의 재질과 색갈, 문양 그리고 문손잡이와 장식세부에 이르기까지 지도하신 사실 등 금수산태양궁전을 최상의 수준에서 일떠세우시며 바쳐오신 그 노고를 어떻게 한두마디로 다 전할수 있겠는가.
인민들이 아무때나 금수산태양궁전에 찾아와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께 인사도 드리고 휴식도 할수 있게 금수산태양궁전주변을 공원으로 잘 꾸리도록 하시기 위해 보아주신 설계형성안은 그 얼마인가. 태양궁전광장에 원림을 조성하고 꽃들을 많이 심을데 대하여서와 화단형성방법, 잔디문제에 이르기까지 밝혀주신 세심한 지도, 녹지들 사이사이에 길을 내주며 사람들이 앉을 자리도 만들어줄데 대하여 가르쳐주신 사실…
물론 그렇다고 무조건 심한 딸랑이 짓을 하는건 아니다. 김철웅이 설명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조직지도부 간부5과기쁨조라고 불린 유래는 5과 공연조 소속은 결혼하면 은퇴해서 대부분 20대 초반을 넘기는 사람이 없는데 20대 중반이 넘어 보이는데도 공연을 하는 공연자를 보고 김일성이 "저 아이는 나이가 꽤 돼보이는데도 아직 결혼을 안했어?"라고 묻자 5과 간부가 "수령님의 기쁨을 위해서라면 결혼이 대수겠습니까? 저희는 인민들을 위해 밤낮 고민하시는 수령님을 생각하면 쉴 수가 없습니다"라고 북한 기준으로도 심한 딸랑이 짓을 했는데 김일성은 딱히 별 다른 대답은 안하고 웃으면서 지나갔지만 이것을 본 다른 과 간부들이 아무리 김일성 앞이라고는 하지만 어떻게 저렇게까지 아첨을 하냐면서 비아냥삼아 5과를 너희들이 무슨 엘리트냐 너희는 그냥 '기쁨조'라고 놀린 게 퍼졌다고 한다.

또 다른 사례로는 정춘실이 있다. 그녀는 김일성이 죽은 후 오라버니 김정일을 위해 죽겠다는 둥 아버지 김일성을 위해 3년상을 치르겠다는 둥 떠들며 정말 3년이나 상복을 입는 둥 유난을 떨었으나 김정일의 심기를 거슬러서 "난 그런 누이 둔 적 없다!"는 김정일의 짜증과 함께 권력에서 완전히 밀려나 버렸다.

4.2. 우상화 교육

우상화 교육 과정에서 자행되는 악행들도 가히 가관인데 북한의 우상화 교육은 비교육적인 허위 정보 유포와 정치적 사상 세뇌로 점철되어 있어 육체적 폭력만 없을 뿐이지 엄연한 아동 학대나 다를바 없을 정도로 극심하다.[28] 하다못해 무기개발 인력, 해킹 인력, 농업 같은 분야의 자신의 '과제'를 이해하는 인력 등을 양성하기 위해서라도 다른 내용도 가르치기는 하지만 저런 내용이 곳곳에 있는 것이 문제다. 특히 예술 분야가 이런 경향이 아주 심하다.

하술할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어린아이들에게 북한 수준의 세뇌 교육을 한 독재국가는 인류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에 준하는 수준으로 어린이들을 세뇌시킨 국가도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국가로 꼽히는 마시아스 응게마 치하의 적도 기니민주 캄푸치아, 지도자가 심각한 괴짜였던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 시기의 투르크메니스탄 정도밖에 없다.[29] 사실 독재자들이 자신의 정치 사상을 어린이들에게 주입하는 것은 거의 독재자들의 클리셰 수준으로 흔한 일이지만 북한은 이들 중에서도 특히 아동 세뇌가 독보적인 수준이다.

북한에서 우상화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 곳은 '사회정치적 생명'이 끝난 사람들이 가는 정치범수용소 완전통제구역이나 최고 엘리트 양성 기관인 금성학원 두 곳밖에 없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평생을 우상화 강연을 들으며 살아야 한다.
  • 1976년 4월 제정된 어린이보육교양법에 따라[30] 아이들에게 보육원, 탁아소에 들어갈 때부터 강제적으로 김씨 3대를 신격화하는 내용들을 정규 과목으로 배우게 해 이 과목을 학업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과정으로 여기는 것은 물론, 그 과목의 성적이 제대로 안 나오면 대학 입학을 아예 막아 버린다. 백두혈통 우상화 교과서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 배우는 내용들은 모두 날조인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그 유명한 축지법 사용이 가장 양호한 편으로 보일 정도로 허황되고 유치하다는 말로만으로는 표현하기가 불가능한 수준이다. 지극히 당연하지만 지도자에 대해 우상화를 자행한 수많은 나라 중 지도자의 생애를 정규적인 필수과목으로 지정한 나라는 북한이 유일하다.
    이러한 날조 에피소드는 조선사회과학원 산하 력사연구소가 만들고 당에 소속된 '유포담당책임일꾼'들이 구전을 통해 주민들과 학생들에게 유포하고 일정 기간이 지난 후 언론매체를 통해 선전하고 출판사를 통해 '입증'한 뒤 교과서와 일반 서적에 소개하여 신빙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퍼진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이렇게 공을 들여(?) 만든 날조 선전을 "이것들은 모두 조선의 사회과학자들이 중국 동북지방에까지 수백번이나 돌아다니며 힘들게 자료를 찾아가면서 겨우겨우 발굴해간 검증된 사실들이며, 이 이야기들의 진원지는 남조선과 외국이다"라고 선전한다.
  • 2013년 제정된 12년제 의무교육강령에 따르면 궁극적인 교육 목표가 "백두산절세위인(김씨 일가)의 사상 이론의 위대성, 영도의 위대성, 풍모의 위대성에 대한 원리적인 인식과 인간적인 매혹에 기초하여 투철한 혁명적 수령관을 지니고 당과 수령에 대한 끝없는 충실성을 제일 생명으로 간직하며 경애하는 김정은 원수님을 결사옹위하는 총폭탄 정신, 육탄 정신이 체질화 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결사옹위(決死擁衛)란 한국어에서 '결사'는 죽기를 각오하고 '옹위'는 좌우에서 부축하며 지키고 보호한다는 뜻이니 김정은의 목숨을 자기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라는 뜻이다. 총폭탄, 육탄도 생각하는 그대로의 뜻이다. 이런 교육을 시키다 보니 외부 전문가들은 김정은은 인민이 제 아무리 많이 죽어도 자신의 권위를 훼손시킨 주민이 죽는 등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면 전혀 개의치 않을 인물이라고 여기는 경우도 많다.
  • 전국의 중학교와 초등학교는 물론 탁아소와 유치원에는 특별히 김씨 3대를 다루는 교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데 이 방에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가의 모형이 놓여진 사판(沙板)과 방의 크기에 비례하는 크기의 이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북한의 선생님들은 아이들이 그 모형판의 주변 시설들, 즉 김일성 부자의 생가 주변에 있던 시설들을 하나하나 익히게 해야 한다. 게다가 어린이들이 '연구실'에 들어가기 전에는 몸에 묻은 먼지를 털고 옷차림을 단정하게 하며 '경건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자유아시아방송 기사
  • 학교 교과서의 매 장(章) 절(節)마다 김일성의 교시와 김정일의 유시가 실려 있으며 교과서의 문제들은 전반적으로 북한의 우상화 선전과도 연관된다. 설령 그것이 우상화 과목이 아닌 교과서라도. 국어 교과서 영어 교과서 수학 교과서 과학 교과서
  • 1980년대 중반 초등학교 1학년용 국어 교과서에 대놓고 '우리는 짧은 글을 하나 지어도 아버지 원수님과 친애하는 지도자 선생님을 우러러 받드는 마음이 나타나게 지어야 합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1980년대 중반 교과서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연구 논문 현재는 내용이 변했을 것이다. 김일성은 1992년 대원수로, 김정일은 2012년 대원수가 되어 현재 '아버지 원수님'은 김정은뿐이기 때문이다.
  • 학술 논문까지도 우상화를 피하지 못했다. 서문은 언제나 '김일성 수령님/김정일 장군님은 이렇게 교시하시였다.'라는 말로 시작하며 김일성과 김정일을 인용해야만 하며 마지막도 언제나 '따라서 수령님/장군님의 말씀은 맞다.'로 끝난다.[31] 북한에서 인문 계열 학술지의 논문이 평균적으로 편당 2~5페이지인데 서문을 빼면 내용이 더 줄어든다.
  • 북한에서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 생명'이 있다고 가르치는데 '육체적 생명'은 부모에게서, '사회정치적 생명'은 수령과 당이 내려준 것이므로 '육체적 생명'보다 '사회정치적 생명'이 더 귀중하다고 가르친다.
    사실 북한의 실태를 보면 김씨 3대에 밉보이는 행동을 하여 '사회정치적 생명'이 끝나면 지옥과도 같은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 사실상 '육체적 생명'은 곧 끊어질 것 같은 가느다란 끈만 힘겹게 잡아가며 연명하고 죽음보다도 더 끔찍한 고통을 매일매일 느껴야 하는 참혹한 꼴이 되니 어느 의미에서는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 김일성의 생전에는 김일성의 부모와 조부모는 물론이고 동생, 삼촌, 외조부, 외숙부, 심지어 사촌 동생까지도 교과서에 실어 놓고 학생들에게 이를 외우게 했다. 관련 기사
  • 탈북 청소년은 국어 성적이 많이 높지 못해 처음에는 연구자조차 정치 선전을 믿어 이들을 외국어를 배우는 외국인 취급하며 국어 교육을 하려고 했는데 연구가 진척되자 한국어 암송 능력이 뛰어나다든가, 학교 교육의 배경지식이 필요 없는 직관을 묻는 한국어 문제에서 남한 출신보다 뛰어나다는 것이 밝혀졌다. 사실적인 글의 이해도는 남한 출신과 엇비슷했다. 왜 이렇게 국어 성적이 낮았냐면 북한에서는 민족 문학, 민주주의 대신 이공계 자료를 제외하면 김일성 가문 우상화 자료를 달달 외우게 하기 때문이다. 특히 말과 글은 '혁명과 건설의 무기'라는 전제 아래 쓰기를 혁명사상과 주체사상을 표현하는 도구로 교육하면서 글을 반드시 김씨 일가 찬양으로 마무리하도록 교육받던 트라우마로 인해 쓰기를 잘 못하는 학생이 많았다. 그런데 한국어 자체는 잘 아는 사람들에게 외국인처럼 한국어를 교육하니 역효과가 있었다. 관련 논문 극심한 단속에도 한류가 퍼지는 것도 한국어의 진심이 담긴 감정 표현에 목말라하던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 하도 세뇌가 극심해서 북한이탈주민들은 처음 중국에서 '최고존엄'의 이름 앞에 붙이는 존칭어를 떼어내고 '함부로' 부르는 것을 듣고 이들에 대한 '모독'이라고 여기며 불안해하고 오싹해했다고 한다.
  • 심지어 1976년 12월 11일 동아일보에 보도된 익명의 일본인 상공인[32]의 증언에 따르면 모든 노동자들을 상대로 김일성 사상전집을 교재로 한 사상 시험을 연간 세 차례 실시해 성적이 나쁘면 임금과 식량배급량을 줄였다고 한다. 1등급에서 8등급으로 나누어 1등급은 임금과 식량배급량을 올려줬지만 8등급은 임금과 식량배급량을 절반으로 깎았다고... 그 스탈린도 자신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주민들의 식량 배급량을 깎지는 않았다는 것에서 김일성의 극악무도함이 명확히 드러난다. 심지어 북한의 중견 간부는 이런 시험을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그 일본인은 식량난으로 민심이 요동치자 임금과 식량을 미끼로 민심을 바로잡고자 하는 목적이 있을 거라고 설명했다. #
  • 교과서를 무상으로 공급한다는 선전과는 달리 학교에 폐지를 바치지 않는 학생에게는 '기본 과목'이라면서 '혁명활동' 교과서만 준다. 2024년 기사
  • 김일성의 생일인 태양절과 김정일의 생일인 광명성절, 김정은의 생일인 1월 8일[33]에는 12세 미만의 어린이들에게 1kg의 당과류 세트를 선물로 주고 있다. 각각 1979년/1982년/2013년부터 그래왔다. # 강철환의 증언에 따르면 정치범수용소 혁명화구역에 수감된 어린이들에게도 "당연히 죽어 마땅한 죄인들의 가족이지만 당과 수령의 은혜는 이토록 깊다"는 의미로 당과류 선물을 꼬박꼬박 줬다고 한다.[34]

북한 학교에서의 우상화 교육의 실태를 보다 자세히 알고 싶다면 2015년 6월 16/23일 MBC 통일전망대 방영분 북한은 왜? <어린이 우상화 교육> 2부작을 참고하도록 하자. 1부 2부 성통만사에서 작성한 '증오를 배우다'라는 글도 보면 좋다. #

4.2.1. 영유아 세뇌

북한에서는 영유아 정도밖에 안 된 아이들에게 부모보다 김일성과 김정일을 더 소중한 사람으로 여기라고 교육하고 있다.
  • 북한 아이들은 태어나고 나서 가장 먼저 배우는 말은 '엄마', '아빠'가 아닌 '아버지 김일성 대원수님 고맙습니다', '김정일 장군님 고맙습니다' 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북한의 아이들은 엄마, 아빠 이름보다 김일성, 김정일 이름을 먼저 알아야만 한다. 이렇게 북한의 어린이들은 무의식적으로 김일성을 진실한 아버지로, 친아버지는 '동거하는 가짜 아버지'로 생각하게 되며 낳는 어버이도, 그들의 아이도 아버지가 같게 된 꼴이 되었다. 물론 북한에서는 이를 "얼마나 인민들이 수령님을 존경하면 한결같은 진심을 담아 수령님을 '아버지'라고 부를까? 인민들에게 이런 사랑을 받은 지도자는 동서고금을 통틀어서 김일성 수령님 1명밖에 없다."는 식으로 포장하고 있다.
  • 탁아소[35]에서는 걸음마를 뗄 무렵부터 간식을 받을 때 김일성 부자 초상화 앞에서 일렬로 서서 '아버지 김일성 대원수님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방법을 반복해서 훈련받아야 한다.
  • 유치원생들은 유치원에 들어갈 때 복도 중앙에 '어린이들을 사랑의 한 품에 안으신 경애하는 대원수님들'을 형상한 대형 유화판에 머리 숙여 인사하고 교실에 들어서서는 교실의 정면에 비치된 김일성‧김정일 초상화에 인사를 하고 다음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관련 글[36]
  • 첫 의무교육 시설인 유치원에 다니는 만 4 ~ 5세밖에 안 된 아이들은 하루에 최소 3시간 동안 '사상교육'을 받아야 하며 유치원생들이 배우는 동요와 율동조차 김일성, 김정일의 개인사와 '혁명'을 가르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들이다.관련 주간조선 기사 북한에서 유치원 교사로 일하던 북한이탈주민의 증언
    이조차 김일성 시절에 비해 완화된 것이다. 김일성 시절 유치원은 오전 6시부터 오후 9시까지 김일성 가족의 '혁명사'를 가르치는 정치사상교육 6시간, 자본계급과 남한, 미국에 대한 증오심을 심는 계급교양 3시간, 김일성 찬양가 교육 2시간에 군사무용교육 2시간, 심지어 총검술 제식훈련과 같은 군사훈련도 1시간 했다. 한국에서 교련이 정규 과목이었을 때에도 고등학생 전용 과목이었다! 관련 언론 보도
  • 유치원과 소학교에서 한글 자모를 배우는 데 사용되는 글은 김일성과 김정일을 찬양하는 동요, 시를 배우는 것이다. 이 노래들을 각각 '모음가', '자음가'라고 하는데 북한은 이 노래가 '남조선 어린이들'이 김정일을 흠모해 만들어 북한에 수입된 것이라고 억지주장을 하고 있다.
  • 김일성 시기에는 탁아소의 아이들이 입는 옷 모양, 신발 형태, 먹는 것 하나하나가 모두 김일성의 교시에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이를 '수령님께서 어린이들을 얼마나 사랑하면 어린이들의 생활 하나하나를 자상히 돌봐주실까?'라는 식으로 선전하지만 실상은 어린이들의 의식주 하나하나마저 김일성의 기호와 취미에 맞춰져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세뇌 교육이 이루이지니
  1. 4살짜리 아이에게 엄마 보고 싶냐고 하자 엄마를 보고 싶지 않다고 한다던가[37]
  2. 동갑인 다른 아이에게 아버지가 누구냐고 묻자 "김일성 원수님"이라고 답했다거나[38]
  3. 이름을 부르면 말을 겨우 할 정도의 아이가 지도자의 출생과 약력을 달달이 외우는 등
북한의 어린이들은 하나같이 '주입식 인간개조'의 피해자가 되었다. 이런 모습들을 본 북한 특파원은 '교회의 주일학교에서 어린 꼬마들이 요절(要節)을 암송하는 것과 닮았다'고 표현하며 북한 우상화의 종교성을 알아차리며 "인간의 정이 있는 곳에 공산주의는 불가능하다는 인상이었다.", "낳은 자식에게 젖을 물리며 새근히 잠든 아기의 미소를 보는 엄마의 특권, 보람찬 모습은 없어야 한다는 북한의 오늘이었다."고 북한의 유아 세뇌를 표현했다. 1972년 9월 5일 경향신문 기사

그런데 웃긴 것은 북한은 2024년 4월 5일 로동신문 기사 <인간의 정신문화생활이 극도로 빈궁화되여가는 사회>에서 '어느한 자본주의나라'가 부모들이 젖먹이를 안전한 장소에 버려야 한다는 해괴한 법을 만들어 이런 법 아닌 《법》의 비호하에 반인륜적이고 비인간적인 악행이 노골적으로 감행되고 있다고 이를 '자본주의사회에서 말세기적풍조가 성행하게 된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폭로해주는 단적인 실례'라고 비난했다. 해당 기사에서 미국의 자극적인 인터넷 문화로 인한 참극들은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명확히 밝히면서 그 법이 만들어진 나라는 제대로 밝히지 않은 것부터 신뢰성이 매우 낮을뿐더러 상술한 과거 북한의 행각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내로남불이다.

4.2.2. 역사 왜곡

북한에서 가르치는 한반도의 역사는 과장 안 보태고 김일성이 태어나기 전의 '혼돈'의 시기와 김일성이 태어난 후의 '창조'의 시기로 나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 김일성의 아내와 부모는 물론이고 동생, 작은아버지, 조부모, 외삼촌, 외할아버지, 심지어 증조부 김응우까지 한반도의 주요 사건을 주도했다는 역사 왜곡을 벌였다. 실제 김일성의 증조부는 묘지기였으며 조부는 농부였고 김일성의 친모인 강반석은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으며 친부인 김형직은 한술 더 떠 한의원을 운영할 때 공산주의자들은 치료해 주지도 않은 초강경 반공주의자로 공산주의 단체에 의해 목숨을 잃은 사람이었다.
  • 김일성은 조선인민혁명군[39]을 이끌고 봉기를 일으켜 일본군을 물리치고 8.15 광복을 맞게 해 준 인물이라고 선전된다. 구체적으로 김일성은 '조선해방을 위한 최후공격작전'을 위해 함경북도 지역을 중심으로 1945년 5-6월에 근거지를 만들고 6월에 백두산에 비밀 근거지를 만들어 한반도를 사실상 해방시켰으며 8월 9일부터 '인민'들과 함께 총공세를 벌여 일본군, 일본 경찰, 헌병들을 전부 쓸어버리며 우리 민족의 힘만으로 8월 15일에 해방시켰다는 날조된 주장을 주입한다. 한반도 남부가 실제 역사 속에서 일제를 패망시킨 미국에 '점령'당한 이유로는 '미국이 김일성을 너무나 두려워한 나머지 일본을 일부러 봐주고 재무장시켜 부랴부랴 38선 남쪽을 점령했다'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관련 글 1 관련 글 2
  • 김일성의 독립운동 중 유일하게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다는 보천보 전투[40]살수 대첩, 귀주 대첩, 한산도 대첩, 명량 대첩을 합한 것을 능가하는 포지션의 전투로 과대평가되었는데 정확히는 '조선사람은 죽지 않고 살아있으며 일제와 싸우면 반드시 승 리할수 있다는 신념을 북돋아준'로 평가하고 있다.[41][42]
  • 1999년에 북한을 방문한 일본인[43]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 출신 여성 가이드[44]가 "조선혁명투쟁은 좁은 의미로 포착하면 1925년 김일성 주석이 항일혁명투쟁을 일으키기 위해 고향을 뒤로 했을 때 시작됩니다"[45]라며 김일성이 한반도 독립운동의 시작인 것마냥 말했고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를 "힘도 없는데 무모하게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여 자신은 체포되어 처형될 뿐만 아니라 한일병합의 계기를 만들어 버려 역사에 큰 오점을 남긴 장본인이다. 그리고 그 식민지 지배에서 조국을 해방한 것이 김일성 주석이다."라고 폄하하고 김일성 우상화에 역이용했다.[46] 출처(방문 후기) 이 주장은 북한의 역사 교과서 조선력사에서도 판박이로 나온다. 관련 글
  • 김일성 휘하의 유격대원들이 나무에 김일성을 찬미하는 구호를 새겼다는 구호나무를 무려 2천여 개나 날조해 만들어가며 외국산 통유리와 스프링클러를 설치하고 산불을 막기 위해 주변의 나무를 모두 벌채한 것도 모자라 컴퓨터로 온도를 조절해 가며 보호한다. 이렇게 1년에 낭비되는 돈이 무려 한 그루당 2천만 원이다.
  • 북한에서는 3.1 운동도 김일성의 친부인 (골수 반공주의자) 김형직이 주도했고[47] 3.1 운동의 중심지는 김일성의 고향인 평양이고 세는나이로 8세의 김일성이 민중들의 선두에 서서 '조선 독립 만세!'를 열렬히 외쳤다고 주장한다.
    더불어 3.1 운동이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김일성이라는 훌륭한 '수령'의 지도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3.1 운동에 대해 만약 김일성이 처음부터 끝까지 지도해줬다면 당연히 일제를 몰아내고 독립을 이룰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지도가 없었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한마디로 '조선 민중들의 독립 의지를 보여준 봉기였으나 수령의 부재 때문에 실패한 봉기'라고 주장한 데다 진정한 독립운동은 김일성이 이끌었던 항일유격대 무장투쟁 단 하나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1912년 태어난 김일성이 1919년 전국에서 일어난 3.1 운동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관련 글 1 관련 글 2 자유아시아방송 기사
    참고로 19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북한은 3.1운동을 “10월 혁명의 영향을 받아 서울시민 수십만 명이 반일 투쟁을 시작하여 발생한 사건”이라고 기술하다가 1980년대 들어 김형직&김일성 부자가 주도했다고 역사를 바꾸었다.
  • 북한에서는 원래부터 김일성파였거나 김일성파로 변절한 독립운동가들을 제외하면 과장 안 보태고 죄다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간 후 독립운동 기록을 말소하였다. 일례로 북한에서 신채호를 소개할 때 김일성에게 숙청당한 김원봉이 이끌던 의열단 소속으로 조선혁명선언을 썼다는 것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관련 기사 그 공적은 전부 김일성과 그의 부하들이 가져갔다. 북한에서도 존재를 인정하는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3.1 운동은 '김일성이 없었으니 실패했다'며 폄하한다.
  • 1995년 1월 중앙인민위 정령을 통해 김정숙의 고향인 회령고등중학교를 '김기송고등중학교'로 개칭하고 동년 8월에는 동상까지 만들면서 김정숙의 동생 김기송을 '김정숙과 함께 항일혁명투쟁에 참가하여 영웅적 위훈을 세운 소년혁명가', '항일아동단원들의 전형'으로 찬양했다. 출처
  • 북한의 국사 교과서에서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 기존 권력층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사건과 신미양요처럼 외세와 전투를 벌이는 일인데 이 사건들 모두 '김일성 같은 사람의 영도가 없다'는 '한계'가 있다고 주장하며 역사적 사건들까지 뜬금없이 김일성과 엮는다. 다만 왕실의 인물이라도 흥선대원군과 같이 쇄국정책을 펴면 그 부분은 나쁘지 않다는 식으로 서술된다. 기존 권력층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고구려의 왕조차도 '동명왕', '광개토왕'은 각기 한 페이지 정도 서술되어 자기들이 추구하는 군사력 강화 정도만 칭찬하는데 이는 다른 장군, 기타 동학농민운동 같은 사건보다도 서술이 적다. 동학농민운동은 '동학'이 종교(천도교)이기 때문인지 '갑오농민전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 고조선의 발생지가 만주가 아니라 평양임을 강조하면서 평양에 태어난 김일성을 제2의 단군, 즉 새민족의 창시자임을 드러낸다.
  • 김정일은 백두산지구 혁명전적지(백두산 밀영)에서 태어났다고[48] 날조했다. 이를 위해 1984년 6월 모교를 폐교하도록 지시했는데 학적부에 소련식 이름인 '유라'로 올랐기 때문이다. 이 시기부터 '백두산 밀영'이 북한 기록에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북한도 자신들이 주장하는 김정일의 출생지가 날조란 것을 의식한 모양인지 "위대한 장군님의 탄생은 호적이 아니라 백두산의 잎갈나무들의 구호로만 기록되었고 장군님의 존함과 생년월일은 출생증이 아니라 기억 속에만 새겨지게 됐습니다."라는 말을 남긴 바가 있고 심지어 김정일은 '생가'를 방문해도 기념사진을 단 1장도 남기지 않았다. 물론 북한은 이것도 '우리 '장군님'께서 오로지 우리 인민들을 위해 사셨다는 증거'로 포장한다. 출처[49]
  • 본격적으로 우상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1970년대 중후반에는 김씨 부자가 다녀온 곳이 '사적지'로 개발되어 이곳에 살던 수천 가구가 고향에서 강제로 쫓겨나는 일도 있었다.
  • 북한에서는 한글세종대왕이 아닌 김일성이 창제했다고 가르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는 실제와는 약간 거리가 있는 데다 진상은 이보다 더 터무니없다.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만든다고 가르치기는 하는데 창제 이후 일부 '미숙한' 글자들은 김일성이 '더욱 아름답게, 문화적, 창조적으로' 발전시켰다는 식으로 가르치고 있다. 쉽게 말해 한국에서의 주시경 이상의 포지션이라는 것이다.
    2019년 4월 로동신문에 실린 "민족의 자랑 조선어' 기사에서 한글을 김일성 일가가 발전시키고 완성시킨 것처럼 주장하니 북한인들이 한글을 김일성이 창제한 것처럼 착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듯하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것을 인정하는 것처럼 가장하면서도 이를 느닷없이 김일성과 엮은 셈이다.
    아래 내용은 로동신문 기사 내용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관련 기사 관련 영상
조선어의 우수성과 민족적 특성은 절세 위인들의 현명한 령도아래 더욱 더 빛을 뿌리게 되었다
(김일성이) 우리 민족어를 완전히 없애버리려고 식민지 동화 책동을 감행하던 일제를 때려 부수고 잃을 뻔했던 우리의 말과 글을 찾아줬다. 우리 말 속에 남아있던 사대주의, 교조주의적 잔재들을 말끔히 가셔내고 그것이 혁명적이며 인민적인 문화어로 활짝 꽃펴나도록 세심히 이끌어줬다
절세 위인(김일성·김정일)들의 숭고한 애국애족의 사상과 따뜻한 손길이 있었기에 우리의 말과 글은 발전의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우리의 말과 글은) 오늘 최고령도자 동지(김정은)에 의하여 더욱 세련되고 풍부화되고 있다
  • 한민족이 아닌 김일성 민족, 김정일 민족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일례로 1995년 평양방송에서 "우리 민족은 수령을 시조로 하는 김일성 민족이고, 현대 우리나라는 수령이 세운 김일성 조선"이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망언이 송출되었다. 북한 정권의 관점에서는 남한도 자기 땅이며 미국이 '강점'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남한 주민도 김일성 민족이며 남한은 수령이 세운 김일성 조선의 일부라는 망상적인 세계관을 나타낸다.

사실 1967년 유일사상체계 확립 이전까지도 김일성 가족에 대한 언급은 없다시피했으나 유일사상체계 확립 이후 가족들에 대한 우상화도 시작된 거라고 한다. #

4.3. 초상화 집착

북한에서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의 초상화는 거의 모든 곳에서 볼 수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며 단순한 초상화가 아닌 '지도자 그 자체'로 대접받는다.

김일성 초상화는 갑산파 숙청 사건 후인 1968년부터 쓰이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굳은 표정의 정면상 초상화를 썼다가[50] 1년 후 약간 몸을 비껴선 모습[51]으로 변경[52]되었다. 이 초상화는 1960년대에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그린 것으로 보이며 26년간 쓰이다가 김일성 사후 우리가 잘 아는 '태양상'으로 변경되었다.
  • 모든 공공시설과 교실은 물론이요 살림집(가정집), 선박 갑판, 지하철 객차 안에도 초상화를 걸어야 한다. 극심한 인권 침해가 이루어지는 정치범수용소 완전통제구역[53]국가보위성 특별재판소[54], 북한의 유일한 항공사인 고려항공 여객기[55]를 제외한 모든 곳에 초상화가 걸린다.
  • 김일성 시절에는 초상화가 걸린 벽에는 다른 어떤 것도 걸 수 없도록 했다. 1984년 경 김일성종합대학에 온 중국인 유학생들이 자신들이 그린 평양 풍경화를 김일성 부자의 초상화가 걸린 기숙사 벽에 걸었다가 이를 본 북한인 동숙생들과 패싸움을 벌이다가 굴복하고 풍경화를 내린 적도 있었는데 학교 측에서는 김일성 부자의 초상화가 걸린 벽에서 그림을 내리도록 요구한 북한인 학생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 초상화를 제대로 '모시지' 않으면 하루 동안 강제로 건설현장에서 중노동을 해야만 한다.
  • 매일 아침저녁마다 집에 있는 사람들은 초상화에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해야 한다.
  • 초상화를 관리하는 정성사업은 '매일 충성심에 티끝만한 먼지라도 앉지 않았는지 반성하면서 닦아야' 한다며 매일 이루어지는데 그냥 걸레도 아닌 정성걸레라고 하는 부드러운 재질의 걸레로 매일같이 닦아주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강요한다. 각 가정으로 불시에 당직자(당일꾼)들이 방문해 검사하는데 당연히 제대로 관리가 안 되면 불순분자 취급받는다. 먼지가 쌓인다거나, 잉크가 살짝이라도 튀었다던가[56] 하는 이유만으로 3대가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거나 아예 처형된다는 것은 과장이다. 안드레이 란코프는 이런 주장에 대해 "미국인이 과속 딱지를 끊어도 처형될 수 있다는 것과 같다"고 비판했으며 북한에서도 이런 것은 '경미한 범죄' 로 취급된다고 언급했다. 사실 지도자 초상화에 먼지가 묻었다고 사람을 가두거나 죽인다는 것 자체가 이미 "우리는 크메르 루주도 능가하는 집단이다"라고 선언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긴 하다. 북한도 어느 정도는 현실과 타협(?)한 셈이다.
    대신 이 사실은 반드시 생활총화에서 언급해야 하고 언급하면 '당연히' 공개적으로 대대적인 비판을 들어야 한다. 초상화가 찢어지거나 구겨지거나 눈이 찔리는 등 초상화가 크게 훼손됐으면 진짜로 완전통제구역으로 끌려가게 되며 심지어 지도자 사진이 들어간 신문이나 책을 깔고 앉는다거나 하는 행위도 처벌받는다. 실제로 무고한 미국 유대인 청년 오토 웜비어는 겨우 김정은 사진이 실린 신문을 흙 묻은 신발을 싸는 데 썼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참혹한 고문을 당하고 식물인간이 되어 사망했다. 신문과 잡지에 실린 지도자 초상화를 접을 때 훼손하면 안 된다는 것은 2024년 러시아 관광객의 증언으로도 입증된 사실이다. #
    심지어 이것도 김일성 시절에 비해 완화(!)된 것이다. 1987년에 남한으로 탈북한 김만철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과 김정일의 초상화를 청소할 때는 먼저 '정성함'에 들어있는 청소도구 중 닭털로 된 먼지떨이로 초상화의 먼지를 털고 그 다음에는 세면수건으로 유리와 사진틀을 닦은 뒤 가제수건으로 한 번 더 닦아내고 다시 솜으로 부드럽게 손질하고 융걸레로 마무리를 해야 했다고 한다. 이때 물걸레를 사용하면 절대로 안 됐는데 물기가 있으면 '수령님'의 초상화에 곰팡이가 필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초상화 보위사업'에 쓰이는 청소도구만 20종류나 됐다고 한다.
    김일성 시절 초상화 청소를 위해서는 붉은색 비단천[57]향수병도 필수적으로 갖춰져 있어야 했는데 이는 "'수령님'의 초상화에서는 언제나 향기로운 냄새가 풍겨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 북한 주민들은 암시장을 돌아다니며 초상화에 뿌릴 향수를 구해야 했으며 중국에 사는 동포들이 향수를 북한에 수출하여 이득을 본 경우도 있었다. 향수병까지 준비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수 있으나 탈북 기자 주성하도 언급한 내용이다. 관련 글 주성하 기자 증언 물론 이는 북한 입장에서도 너무 과한 행동으로 여겨졌는지 후에 자취를 감춘 것으로 보인다.
  • 교실 벽면을 도색할 때는 초상화를 떼어 투명 기름종이로 감싼 후 적색 나일론 보자기로 싸서 교탁 안에 보관해야 한다.
  • 1993년 초에는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유사시 김일성 부자와 김정숙의 동상[58], 석고상, 초상화를 대피시킬 수 있는 특제 승강기와 지하보관고를 전국적으로 건설했는데, 지하에 갱도을 뚫고 약 15~20평의 공간을 '1호모심실'이라는 이름으로 마련한 후 수령(김일성)관, 지도자(김정일)관, 어머니(김정숙)관을 만들고 각 방을 카펫과 호화로운 벽지로 치장했다. 유사시에는 동상과 석고상은 철제 상자에 넣어 포장한 후 이동해야 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김일성 동상이 포탄에 맞으면 수령이 죽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믿음 때문이라고...
    2022년 남한에서 '김일성 전기'를 출판한 표도르 째르치즈스키(이휘성)[59]가 입수한 2004년자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지시에 따르면 전쟁이 발생할 경우 인민의 첫 번째 의무는 대피가 아닌 백두혈통 우상화 선전물을 1호모심실에 이동하여 보위하는 것이라고 한다.
  • 북한에서는 휴지가 귀한 물건이라 휴지를 사서 쓸 형편이 안되는 가정에서는 로동신문 따위의 신문지를 휴지 대용으로 사용한다고 하는데 이때 김부자 의 사진이 인쇄된 부분은 절대로 휴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알려져 있다. 심지어 이들의 얼굴이 나온 페이지는 특별히 좋은 잉크로 인쇄되며 아예 접으면 안 된다.
  • 김만철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 생전에는 결혼식을 올릴 때 초상화 앞에 꽃다발을 놓고 큰절을 올린 뒤 '위대하신 수령님께 충성을 다할것을 맹세합니다'고 하고는 돌아서서 초상화를 배경삼아 결혼 기념사진을 찍어야 했다.
  • 자식이 실수로 초상화를 훼손하면 부모가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간다. 과장 안 보태고 북한에서 실수로 김일성 초상화를 훼손한 사람의 가족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가족보다 더한 탄압을 받는 셈이다! 하다못해 일본 제국마저 이봉창, 윤봉길 의사가 순국한 후 그들의 일가족들을 감시할지언정 '불령선인'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모조리 감옥에 집어넣고 고문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막장 중 막장이다. 일제강점기를 몸소 겪은 노인들은 "차라리 '왜정' 시기가 낫다"고까지 하는 경우도 있다.
  • 1979년부터 2014년 경까지 일부 북한 지폐에는 김일성 얼굴이 들어갔다.[60] 상기한 초상화 집착에 비하면 그나마 나아 보인다[61] 당연히 2014년까지 지폐를 버리는 것은 수령 모독으로 간주되어 엄하게 처벌받았다.

4.3.1. 재난에서의 초상화 집착

집에 불이 나거나 홍수로 집이 물에 잠길 때 재산, 가족보다 지도자 초상화부터 챙겨 탈출해야 한다. 지도자의 사진을 챙기려다가 재해에 휩쓸려서 희생되고, 안 챙기면 끌려가서 처형당하고... 실제로 초상화를 건지려다가 정작 중요한 인명이 희생되어 공분을 사는 뉴스도 나온 적이 있다. 심지어 이를 북한 주민들에게 "수령, 영도자의 손길만 꼭 잡으면 그 어떤 재난 속에서도 살아날 수 있으며 설사 죽음을 향해 마주 향해 가는 길이라도 영생할 수 있는 믿음", "죽어서도 그 품('수령님들'의 품)에 안겨 영원히 행복하게 살고 싶은 최후의 열망"이 굳게 자리잡았다는 증거로 포장한다고... 이 정도면 진짜 빼도 박도 못하는 사이비 종교다. 연구에 따르면 이는 일제의 천황 숭배를 참조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 북한에서 널리 선전되는 우상화 일화 중에는 대흥무역지도국 무역화물선 장진강호의 기관장이자 당세포위원장인 김명호가 폭풍우를 만나 배가 침몰하려 하자 배의 교양실, 면담실에 있던 김일성, 김정일의 초상화를 안전하게 홀로 38시간 동안 지켜내고 북한으로 돌아왔다는 일화가 있다. 김명호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초상화를 몸에서 떼지 않았으며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그가 표류한 해안가에 있던 외국의 어부들과 그를 치료한 의사가 김명호가 지켜낸 초상화를 보고 일제히 엄지손가락을 펴보이며 탄성을 지르고 박수갈채를 터트렸다고 한다. 그 의사들은 '주체조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지만 자기 수령에 대한 조선 인민의 절대적인 충성심을 목격하기는 처음'에 '조선의 힘의 원천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다'고 '격정에 넘쳐' 말했다고 한다.
  • 2004년 4월 27일 조선중앙통신은 <수령결사옹위의 숭고한 화폭>라는 기사에서 룡천역 열차 폭발사고가 발생했을 때 점심 먹으러 가던 중 강한 폭음소리를 듣고 기업소로 달려가 김일성 부자의 초상화를 품에 안고 나오다 무너지는 건물에 깔려 사망한 상점 직원 2명, 수업 중 폭발의 여파로 초등학교가 붕괴되고 불이 나자 3층 교실에 있던 김일성 부자 초상화를 안전한 곳으로 옮긴 뒤에 제자 7명을 구해내고 사망한 초등학교 교사, 초상화를 품에 안은 채 사망한 다른 교사, 건물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초상화를 챙기던 탁아소 직원들, 화염과 싸우며 초상화들을 다른 곳으로 옮긴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장들의 사례를 다루며 "주민들은 가족의 생사 여부와 가장집물들을 찾기에 앞서 가정에 모신 초상화들을 안전하게 모시었다. 뜻하지 않은 피해 속에서도 김일성동지를 영원한 주석으로 높이 모시고 김정일동지를 끝없이 신뢰하고 따르는 조선인민의 고결한 사상정신세계가 수령결사옹위의 숭고한 화폭을 펼치었다"고 주장했다.
  • 2007년 8월 집중호우가 일어났을 때 평강군 정동협동농장 농장원 차향미는 자신의 손 대신 초상화부터 넘기다 목숨을 잃었고 박종렬은 아내와 자녀를 산사태에 잃으면서도 초상화를 먼저 건졌다. 평안남도 성천군의 광부 김승진은 집이 물속에 잠긴 상태에서 가족보다 초상화를 먼저 구했고 평남 양덕 임업설계연구소 설계원 김덕찬은 산사태가 집을 덮치자 아내에게 김일성 부자의 초상화를 먼저 건네고[62] 자신은 흙더미에 묻히고 말았으며 강원도 회양군 회양읍 1천여 가구 주민들은 가구, 집기가 아닌 초상화만을 들고 안전지대로 피했다.

    • 심지어 이천기초식품공장 노동자 강형권은 홍수를 당하자 초상화가 물에 젖지 않도록 비닐 봉투에 담아 옮기는 동안 다섯 살 먹은 딸이 물에 휩쓸렸는데 로동신문은 강형권이 딸보다 '성스러운' 초상화를 더 꽉 붙잡고 있었다고 보도했고[63] 딸이 살았는지는 밝히지 않고 초상화가 무사했다고 전했다. 안드레이 란코프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 언론들은 강형권을 '진정한 영웅', '살아 있는 영웅'으로 미화하며 주민들이 이런 모습을 본받기를 권했다고 한다.
      조선중앙통신은 이런 끔찍한 사례를 "가정보다도 자기 수령, 영도자를 옹위하는 길에 남 먼저 뛰어들었다", "바로 오늘 자기의 존재도, 값높은 존엄과 행복도 수령결사옹위의 길에서 찾는 조선인민의 인생관", "이런 감동적인 이야기는 피해지역 그 어디에나 있었다", "조선 인민은 수령을 위해서라면 자기의 생명도 기꺼이 바칠 줄 아는 의리 깊은 인민"이라고 평했다. 출처 1 출처 2 출처 3 출처 4 출처 5
위대한 대원수님들의 초상화를
목숨바쳐 보위한 열네살 중학생
그 어머니의 아픈 심정 헤아려
사랑의 친필도 안겨주신 원수님
2023년 12월 5일 로동신문에 실린 <조선소년단축하단 축하시 '위대한 어머니께 영광드려요'>에서 인용
  • 2012년에는 만으로 겨우 14살밖에 안 된 소녀가 새벽에 산사태 속에서 집이 무너질 때 피난가라는 어머니의 말도 안 듣고 김씨 부자의 초상화부터 구하려고 하다가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 사실이 김정은에게 보고되자 김정은은 '영웅적이고 고귀한' 소녀를 키워낸 공로로 소녀의 어머니와 학교 교장에게 1급 공화국 훈장을 수여하고 아버지와 몇몇 교사들에게도 다른 훈장들을 수여하도록 지시했다. 관련 기사 1 관련 기사 2 그 소녀는 현재까지도 북한의 프로파간다에 쓰이고 있다.
그 준엄했던 나날엔 70년의 인민을 마지막으로 검증하려는듯 또 다른 시련이 들이닥쳤다.조국의 최북단에 무섭게 터진 라선의 대홍수는 아름다운 거리와 인민의 보금자리를 삽시에 휩쓸어갔다. 참혹한 재난의 광경앞에서 우리도 가슴치며 보고 세계도 깜짝 놀란 하나의 눈물겨운 사실이 펼쳐졌다. 물결에 휘말려 숨진 거의 모든 사람들이 움켜쥔 손에는 가슴에 정중히 모시였던 위대한 수령님들의 초상휘장이 있었다. 또 보였다. 흙속에 묻혀 다같이 숨진 한 가족, 두살 난 아이는 할머니등에 업혀 숨지고 그 어린 자식을 업었어야 할 어머니의 잔등에는 하나의 배낭이 지워져있었다. 그 배낭속에는 물 한방울 스며들지 않은 위대한 수령님들의 초상화가 정히 보존되여있었다.[64]
세상에 이런 인민이 어디에 있는가!
돈도 아니고 가산을 쥐고 죽은것도 아니다. 제살붙이부터 등에 업은것도 아니다. 숨을 돌릴새도 없이 순간에 들이닥친 죽음앞에서 위대한 수령님들의 태양의 영상만을 가슴과 두손에 꼭 품고 눈을 감은 사람들,
명줄이였다. 죽어도 그것만은 놓을수 없는 운명의 명줄이였다. 그것이 바로 죽어서도 그 품에 안겨 영원히 행복하게 살고싶은 최후의 열망이었고 바로 그것이 목숨보다 더 소중히 품고 사는 당에 대한 이 나라 인민의 깊은 사랑이고 산악같은 믿음이다.
2015년 10월 7일 로동신문 동태관 정론 《위대한 우리 인민 - 조선로동당창건 70돐에 삼가 이 글을 드린다》 중[65]
그의 이름은 엄송화, 25살의 꽃나이처녀, 우리는 그의 얼굴은 보지 못하였다. 그와 말 한마디 나누어보지 못하였다. 다만 이제는 온 읍거리가 환하게 더 밝게 모셔져있는 위대한 수령님들의 태양상모자이크벽화앞에 찾아가 그가 섰던 자리에 서서 최후의 그밤을 상상해볼뿐이다. 물사태와 밀려오는 통나무들을 손으로 밀고 가슴으로 막아내며 수령님들의 태양상을 필사적으로 보위하던 그의 불붙는 눈빛과 죽음을 각오한 비장한 얼굴이 생생히 살아온다.마지막으로 물살에 휘말려들면서도 그 통나무들을 다 끌어안고 떠내려갔던 로동자처녀, 캄캄한 밤에 누가 시킨 사람도 없었고 누가 지켜본 사람도 없었다. 평시에는 말이 없고 한마디 칭찬만 해도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던 순박하기 이를데 없는 그였지만 왜 그밤에는 그렇게도 불사신처럼 광란하는 란파와 그렇게도 무섭게 싸웠던가. 대사하치기전투에서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을 호위하여 한몸그대로 방패가 되시였던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을 그대로 닮은 이 시대의 청춘, 길영조[66]영웅의 수령결사옹위의 25초를 다시 보는것과도 같이 그의 최후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것이 평범하게 여겨지리만큼 목숨을 내걸고 나섰던 수령결사옹위의 주인공들이 이 크지 않은 피해지역에 헤아릴수없이 많았다.
시의 책임일군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폭우가 지나간 다음날 아침 감탕우에 낸 외통길로 흘러가는 수재민들의 행렬과 함께 걷던 그는 하나와 같이 정히 보에 싸고 함에 넣은것을 목에도 걸고 가슴에도 꼭 감싸안고 가는것을 보고 왜 짐들은 없는가, 그건 무엇인가고 물었다고 한다. 위대한 수령님들의 초상화라고 하면서 우리는 이 초상화만 간직하면 된다, 쌀도 집도 당에서 다시 다 마련해주기때문에 걱정할것이 없다, 제일 큰 근심은 우리 원수님께서 우리때문에 얼마나 가슴아파하시겠는가 하는 생각이라고 대답하는 그 말을 듣고 우리 라선사람들이 이렇게도 훌륭한 사람들이였구나 하는 생각에 눈물이 쏟아져내렸다고 하였다.
듣고들어도 끝이 없었다. 무너지는 집을 눈앞에 보면서도 혁명사적지와 영생탑부터 지켜야 한다고 정신없이 달려갔던 사람들, 한손에는 초상화를 받들어모시고 다른 손에는 안해와 아이들의 손을 잡고 물속을 헤치면서 가다가 물살에 말려드는 순간 혈육들과의 손은 놓쳤어도 초상화만은 더 안전하게 받들어모신 그 농장원, 선봉초급중학교 교직원들이 밀려오는 물속에서 의식을 잃고 떠내려오는 한 녀성을 구원하였을 때 옷은 다 찢겨지고 몸엔 온통 상처투성이였지만 놓치지 않으려고 꽉 구부린 팔에는 배낭이 매달려있었다. 그속에도 다름아닌 물방울 하나 스며들지 않은 우리 수령님들의 환하신 태양상초상화가 정히 보존되여있었다.
취재수첩에 넘쳐나는 이 라선땅의 모든 이야기는 이런 눈물없이는 적을수 없는 사실들이다. 우리만이 보고 들은것이 아니다. 이곳에 많이 오는 외국인들까지도 소문이 아니라 제눈으로 다 보고 조선에 대하여, 우리 인민에 대하여 이름할수 없는 충격과 감동에 휩싸였다.[67]
온밤 비가 쏟아지는 속에서 큰물을 피해 오는 조선사람들을 잠시 우리 건물에 들어와있게 했댔는데 전 깜짝 놀랐습니다. 가산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어른이고 아이고 가슴에 꼭 안고있는것이 있어서 무엇인가고 물었더니 조선의 위대한 령도자들의 초상화였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같으면 돈이나 물건부터 건지고 제 목숨부터 생각했을것인데 이런 깨끗한 인민들을 처음 봅니다.…
라선에 와서 오래전부터 경영활동을 하고있는 한 외국인녀성이 한 이 말은 세계가 본 조선의 진짜모습이고 세계가 탄복하는 조선의 진짜본태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보다 깊은것은 아직은 다 모를것이다. 가산보다도, 혈육보다도, 숨이 지면서도 왜 위대한 수령님들의 초상화를 그렇게도 가슴에 품고 절대로 놓지 못했으며 거기에서 뿌듯한 만족을 느꼈는가를.
그 대답을 우리가 줄수 있다.그것은 바로 당에 대한 믿음이다. 우리 수령님들의 태양의 모습을 가슴에 안으면, 우리 원수님의 따뜻한 손길만 꼭 잡으면 억만금을 잃어도 다시 얻을수 있고 설사 몇번을 죽어도 다시 태여날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것은 인민자신이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마음에 세운 자기의 운명철학이다.
2015년 10월 10일 로동신문 동태관[68] 정론 <나선땅에 펼쳐진 전화위복의 기적> 중.
  • 2015년 8월 22~23일 라선시에 온 호우로 40명이 죽어가면서도 초상화를 건지려는 행위는 계속되었다. "눈앞에서 정든 집이 무너져내리는것을 보면서도 사품치는 물속에서 아이들이 어떻게 되였는지 미처 알아볼 경황도 없이 사람들마다 제일먼저 가슴에 품어안은것은 백두산절세위인들의 초상화였고 제일먼저 달려가는 곳은 위대한 수령님들의 영상이 모셔져있는 태양상모자이크벽화앞이였다."는 외부인들이 보기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모습들을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또 하나의 가슴울리는 광경'이라고 묘사했다.
  • 2016년에는 홍수 속에서 회령시의 한 고등중학교에서 초상화를 구하려다가 무려 13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는 비극을 겪기도 했는데 홍수 속에서 초상화를 구해내지 못해 처벌받을 게 두려웠던 학교 교감이 교사 7명과 학생 6명에게 물이 불어난 학교에 들어가 초상화를 구해오라고 시켜서 학교에 들어갔다가 급류에 휩쓸려 변을 당했다고 한다.[69] 북한은 이에 대해 "수령님들의 초상화를 보위하는 길에 서슴없이 목숨을 내댄 회령시 송학고급중학교 10명[70] 교원, 학생들의 최후를 영원히 기억하리라"라고 칭송했으며 심지어 물에 떠내려가는 아내와 딸을 버리고 김일성 부자의 초상화를 건지고 숨진 주민의 일화를 "습기 한 점 배지 않은 20여 상의 초상화, 한목숨 바쳐 신념과 의리를 지킨 그 충정의 인간 앞에 누구나 숙연히 머리 숙였다"며 칭송하였다.
  • 2019년에는 함경북도 온성군에서 집에서 화재가 일어나자 불길을 뚫고 들어가 어린이 3명을 구한 여성이 '초상화를 구해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보위부의 취조를 받은 반면 폭력 사건으로 교화소에서 출소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은 바로 옆집으로 뛰어들어가 초상화를 건져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화마의 불길 속에서도 초상화를 모셔 내온 청년 영웅'으로 포장되었다는 기막힌 이야기도 있다.
  • 북한의 초상화 집착은 2020년대에도 계속되고 있다. 2023년 8월 10일 로동신문 기사 <일군들이 서야 할 위치>에서 태풍과 큰물에 의한 피해 최소화에 참여하는 일군들에게 "무엇보다도 지역과 단위들에 모신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초상화, 동상, 절세위인들의 영상을 형상한 모자이크벽화와 영생탑, 당의 기본구호, 혁명전적지, 혁명사적지, 혁명사적표식비, 혁명박물관, 혁명사적관, 김일성-김정일주의연구실, 구호나무를 비롯하여 중요대상들의 안전상태를 다시한번 확인하고 철저한 보위대책을 세우는데 첫째가는 관심을 돌려야 한다."라고 하며 북한 주민들의 목숨보다 우상화물을 먼저 지킬 것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무려 2023년 기사다.

4.4. 동상 집착

김일성은 집권 직후인 1948년부터 만경대혁명학원에 젊은 자신의 동상을 세울 정도로 동상을 좋아했는데 후계자들도 이를 물려받아 북한은 세계에서 지도자 동상이 가장 많은 나라가 되었다. 김일성 하나만의 석고상과 흉상, 동상 다 합쳐서 3만 5천 개[71]나 될 정도로 하도 많이 만들어서 북한은 이런 거대 동상의 제작 기술만은 세계적인 수준이라는 카더라도 있을 정도다.[72]
  • 1972년 4월 김일성의 60세 생일을 기념하고자 높이만 23 m(기단 3 m, 본체 20 m)인 거대 청동상을 평양 조선혁명박물관 인근에 세웠는데 심지어 1977년에는 그 동상에 금박을 37kg씩이나 입히기도 했으나[73] 1978년 9월 북한을 방문한 덩샤오핑이 '돈이 없다고 우리에게 지원을 요구하는데 왜 이런 데에 쓸 금은 있나?'고 지적하자 '금색은 햇빛에 너무 번쩍이므로 좋지 않다'며 금박을 모두 떼어냈다고 한다. 금박을 그대로 두고 동색을 칠했다는 말도 있다.
  • 김일성 부자의 형상작품은 각 도 미술창작사 및 만수대창작사 '1호작품과'에서 전담 제작한다. '1호작품'이라 일컫는 김일성 부자 초상화, 동상·석고상, 배지 및 각종 출판물은 특별히 당성과 기량을 심사받고 엄격하게 선발된 '1호작품과' 소속 1호작품 미술가만 당 선전선동부에 계획을 제출하고 허락을 받은 후에야 제작할 수 있고 결과물은 단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아 우상화물 제작 작업에 임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한다.
  • 김일성김정일동상은 '살아 있는 수령'과 다름없는 것으로 간주되어 건립장소까지 운반되는 동안 현지지도 때와 마찬가지로 보안원들이 쫙 길에 서서 동상에 경례하고 동상이 지나가는 도로는 차단되어 다른 모든 차량들을 일절 움직일 수 없게 하며 보행자로 하여금 건립장소로 운반되는 김일성 부자 동상에 경의를 표하게 한다. 동상에 손을 대는 것은 금지된다. 유지보수 시에는 하얀 천을 씌워 동상을 만지는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한다.
  •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2013년 기준 평양시 기관조직별로는 남성 성인 평균 신장 크기인 김일성김정일동상이 80여 개, 구글 어스로 확인한 결과 평양 시내에는 김일성김정일동상이 정확히 12개나 있었다고 한다.
  • 고영환은 김일성 부자 동상을 세척할 때에는 '수령님과 장군님이 추워하지 말고 더워하지 말라고' 정확히 36.5도로 체온과 똑같이 따뜻하게 데운 물로 세척을 해야 한다고 증언하였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히 동상에 향수를 뿌리게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대신 동상 청소를 맡은 사람들로 하여금 반드시 새 옷을 입고 머리를 가지런히 한 후 손에 향수를 뿌리도록 했다. 관련 기사 1 관련 기사 2
  • 평양에 들어오면 외국인도 예외없이 김일성 동상에 경례를 강요한다. 거절하면 불경죄가 씌워져 오토 웜비어처럼 사망할 수 있다.
  • 동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때 발가락 하나라도 잘리거나 동상 뒷모습을 찍으면 안 된다.
  • 동상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충성심 표현'을 명분으로 매일 당번을 정해 새벽에 동상과 그 인근을 청소해야만 하며 이를 소홀히 하면 매주 토요일에 있는 생활총화에서 비판 대상이 된다.
  • 동상, 초상화 주변에 초소와 감시카메라가 많은 편이며 이는 그 동상을 훼손하려는 자를 잡기 위함이다. 그 감시카메라가 다른 범죄를 잡는데 사용되는 지는 불명이다.
  • 북한은 전력난이 극심한데도[74] 동상을 밝히는 전등에는 전기가 최우선 공급되고 이를 위해 다른 곳으로 갈 전기마저 끌어다 쓰는 것도 모자라 갑작스러운 정전[75]에 대비하여 비상 발전기를 5대 이상 구비했다.
    2002년 평양시 보안부 청사 내 김일성 동상의 야간 조명이 17분 동안 꺼졌다는 이유로 부국장이 총살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정전되면 10분 내 비상 발전기를 가동해 전등을 밝혀야 하는데, 5대 모두 제때 가동되지 않아 평소 발전기 정비를 제대로 하지 않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사건 이후 보안부 청사 동상에는 비상용 발전기가 7개로 늘고 상시 가동 중이라고 한다.

4.5. 피휘, 이름 강조

북한에서 지도자는 '신'이므로 지도자 이름도 '신'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이름으로 간주되어 피휘 대상이 된다.
  • 글을 쓸 때 지도자 이름과 직책이 줄바꿈으로 잘리면 안 된다.[76]
  • 지도자 이름은 굵고 크게 적는다. 불가피할 경우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적용한다.[77]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을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적는다는 말이다. 이것은 로제타 석 같은 고전 이집트어 문헌에서 신이나 왕의 이름을 나타내는 상형문자 주위에 테두리를 쳐서 강조했던 관행에 비견할 만하다. 즉, 북한에서는 방법은 좀 다르지만 고대에나 하던 짓을 하는 셈이다.[78]
  • 심지어 같은 줄에는 두 번 쓰지 않는다.
  • 북한에서 사용하는 문자 처리 전산 시스템 국규 9566은 아예 9개 글자를 굵은 형태로 만들어 특수문자 영역에 집어넣었다. 때문에 외국 프로그램으로 북한 논문 등을 열어 보면 김씨 삼부자 이름이 □□□ 형태로 깨질 수 있다.
  • 컴퓨터에 지도자 이름을 입력하면 자동으로 굵게 바뀌는데 미리 만들어 둔 9개 글자로 치환한다. 휴대전화로 입력해도 마찬가지지만 외국어는 바뀌지 않는 기종도 있다.
  • 심지어 이 9개 글자를 특수문자로 유니코드 등록 신청까지 하였으나 당연히 거절당했다.
  • 아기 이름을 지을 때 지도자의 이름 또는 그와 유사한 이름은 사용할 수 없으며 이들의 집권 전에 태어나 이름을 정한 사람은 개명해야 한다. 전제군주제 국가에서 이렇게 이름의 글자를 피하는 것을 '피휘'라고 하는데 조선에서는 저런 사태로 인한 불편함을 방지하기 위해 왕의 이름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한자를 쓰거나 아예 한자를 새로 만들기도 했고 이방원처럼 너무 흔히 쓰여서 피휘가 곤란한 경우 그냥 무시하거나 왕이 자기 이름을 잘 안 쓰이는 한자로 바꿔버리기도 했다. 어찌 보면 과거보다 더 심해진 셈이다.
    • '일성', '정일', '정은'은 절대로 안 된다.
    • 지도자의 가족이나 지도자와 관련된 사람 이름도 쓸 수 없다. 민주조선 책임주필 김정숙(金貞淑)처럼 김일성의 친척(정확히는 사촌누이) 정도는 되어야 개명을 피할 수 있다.
    • 그리고 김일성의 원래 이름 '성주'는 개명 대상에 해당되지 않는다. 2020년에 '박성주'가 소장 진급에 성공했을 정도다. 북한에서는 김성주라는 이름도 김형직이 '나라의 기둥이 되어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라는 것도 밝히고 있으며 평양김성주소학교까지 있고 이를 "수령님의 어린시절 존함"으로 명명한 것도 밝히고 있다.
  • 체제 선전을 위해 행정구역 이름을 지도자 일가, 정권 기여자 및 선전용 인물 이름 또는 선전선동 단어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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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북한 주민들의 반응

고난의 행군 이전이면 모를까 김정은 시기 이후에는 큰 효과가 없다. 해외발 정보를 통해 김씨 일가와 북한 체제에 대한 진실이 널리 퍼져 있기에 북한의 허무맹랑한 우상화 선전이 더 이상, 최소한 젊은 세대들에게는 먹히지 않는다.[82]
  • 김만철의 증언에 따르면 과거에 북한 주민들은 자신들의 생활이 어려운 이유가 위(김일성, 김정일)에서는 정치를 잘하는데 중간에서 간부들이 잘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수 년 전부터 위에서 지시를 잘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참고로 김만철 일가가 탈북한 시기는 1987년 1월 15일.[83]
  • 1990년에도 북한 고등학생들은 김일성 부자 명령에 무조건 절대복종, 관철해야 한다고 인식하면서도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드는 등 김일성이 가졌다는 초자연적 재주는 단지 '신화'로만 여겼다고 한다.
  • 2012년 김정일 사망 직후 첫 광명성절(김정일 생일, 2월 16일) 즈음 로동신문은 "가장 많이 배를 곯아본 위인"이라는 정론을 내었다. 주민들은 '쪽잠에 줴기밥' 운운[쪽잠에줴기밥]을 믿지 않고 "장군님의 쪽잠은 푹신한 곳, 줴기밥도 영양가가 다 들어간 것"이라며 믿는 주민은 단 한 명도 없다,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데 누가 믿겠냐는 반응을 보였다.
  • 2013년 4월 데일리NK 보도에 따르면 일반 주민들과 당 간부들은 이미 김정은이 20대 초반에 (스위스에서) 유학 시절을 보낸 사실을 다 알고 있다고 한다. 때문에 거짓으로 체제 선전&우상화 강연을 해야 하는 당 간부들은 자괴감까지 느낄 정도라고 한다.
  • 2015년 3월 13일, 자유아시아방송평안북도의 한 소식통을 통해 "김일성, 김정일을 '최고존엄'으로 떠받들던 시기는 고난의 행군 시대에 이미 끝났다"는 사실을 전하기도 했다. 모든 집에 있었던 김일성 부자 초상화가 있는 저작과 김일성 회고록은 북한 주민들에게는 오래전부터 휴지와 땔감으로 애용[85]되었고 김정은 정권이 새로 만든 김일성·김정일 배지는 장마당에서 입쌀 1kg 값도 되지 않는 5천 원에 팔리고 "북한 주민들에게 '최고존엄'은 내 주머니에 들어 있는 밖에 없다"는 말을 하며 북한 주민들도 자본주의 맛(?)에 익숙해졌다고 언급했다.
    소식통은 북한 주민들이 노작을 땔감과 휴지로 애용하는 것은 조선로동당 선전선동부발 주기적 도서검열 시 노작이 없어도 처벌받지 않고 지적만 받는 것으로 규정이 완화되어 관리 소홀로 처벌받는 것을 피하려는 목적도 있다.[86]
    당시 검열에 동원된 선전부 간부들은 1개 인민반[87]에 한두 집만 김일성 부자의 서적이 없는 줄 알았더니 거의 모든 집에 없어서 난감해할 정도라고 하며 상부에 보고하면 도리어 자신들이 처벌받을 것 같아 일부러 묻어두고 있다고 한다. 자유아시아방송 보도 관련 언론 기사
  • 2016년 4월 데일리NK 보도에 의하면 주민들은 김일성이 태어난 날 일어난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를 "한날한시에 태어난 '수령님'이 몰고 온 재앙"으로 여겼다고 하며 4월만 되면 세월호 사고2015년 네팔 대지진, 2016년 구마모토 지진 같은 참사가 발생하는 것을 다 세상에 태어나지 말아야 할 사람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겉으로는 김일성을 찬양하는 척을 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김일성을 '태어나서는 안 될 사람'으로 여기는 셈이다.[88][89]
  • 2017년 9월 월간조선 보도에 따르면 이미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김정은의 존재 자체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고 한다. 사실 한 장이라도 있었다면 북한이 그렇게나 자랑해대며 선전했을 김일성과 김정은이 함께 찍은 사진을 단 한 장도 공개하지 못하고 있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지만.
  • 2018년 12월, 자유아시아방송은 김정일 사망 7주기 추도문에 또 "쪽잠에 줴기밥" 운운[쪽잠에줴기밥]이 나왔다며 이를 듣고 고난의 행군 시기 수백만의 주민들이 굶어 죽어도 위에서는 호의호식하면서 잘 살았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는데 쪽잠과 줴기밥으로 한 생을 보냈다는 추도문 내용이 어이가 없다며 대놓고 분노한 사람까지 나왔다고 보도하였다.
  • 2020년 7월, 자유아시아방송은 함경북도 거주 소식통의 발언을 인용해 젊은 세대는 김일성을 단순히 '옛날 할아버지'로만 취급하며 김일성 일가에 대한 존경심은 커녕 우상화 장소를 데이트 장소 정도로만 여긴다고 보도하였다. 이들은 고난의 행군 이후 태어나 배급 대신 장마당을 경험한 '장마당 세대'로, 우상화 선전이 먹힐 리가 없다.
    우상화 장소가 데이트 장소로 전락한 이유는 북한 지방 도시에는 젊은 남녀가 만날 수 있는 야외 공원과 대중문화장소가 많지 않은 것은 물론 전기도 극히 부족한 반면 넓은 잔디밭이 조성되고 밤에도 조명이 들어오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다. 소식통은 북한에서 배급제 시대에 성장한 주민들은 아직도 '혁명사적지'나 '혁명전적지'를 신성한 공간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했으니 기성세대와 신세대 간 인식 차이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런 경우가 하도 많았는지, 당연하게도 당국이 제동을 걸었다. 2023년 9월 자유아시아방송은 '청년들의 사상이 변질되어 일어난 일', '혁명사적지가 자본주의 날라리 문화의 장소로 변질된다'고 우기며 엄포를 놓았고 도당 간부가 반당반혁명분자로 엄벌할 것이라 발언하였다고 보도하였다.
  • 2020년 8월 자유아시아방송은 외부 정보 유입으로 우상화를 믿는 주민은 없다. 김일성 우상화의 핵심인 해방 전 행적조차 간부들과 지식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웬만큼 의식 있는 주민들은 장마당에서 몰래 구매한 금서를 통해 진실을 파악하고 있다고 보도하였다.
    '장마당 세대'는 짬만 있으면 손전화에 메모리 카드를 끼워 라이언 일병 구하기 같은 외국 영화를 보며 8.15 광복의 역사적 배경을 다시 생각하게 되면서 북한 역사 교과서 내용에 의문을 갖고 있다고 한다.
  • 2022년 10월 자유아시아방송은 북한의 젊은 세대는 김정은의 '위대성' 선전에 대해 '희극배우'라며 조롱한다는 소식통 발언을 인용 보도하였다.
  • 2023년 8월 자유아시아방송은 21일부터 평안남도, 평안북도 등지에서 '사회주의 붕괴는 당의 후비대 청년들의 사상이 자본주의 문화에 물드는 순간부터 시작되니 청년들에 대한 사상교양은 하루도 멈추면 안 된다.', '우리나라 청년들이 사상적으로 흔들리지 않아야 공화국을 허물려는 적대세력과 대결할 수 있다.'는 취지에 따라 청년동맹조직에서 '사상교양'이라며 항일빨치산 회상기를 읽고 느낀 점을 발표하도록 강요[91]한다고 보도하였다.
    '사상교양'에서는 '대내외 복잡한 정세 속에서 항일빨치산의 투쟁 정신을 따라 배워 최고존엄결사옹위하는 것이 청년들의 중요한 사명이고 조선청년운동의 역사적 전통'이랍시고 청년들에게 맨손으로 산에서 연길폭탄[92]을 만들어 수령을 목숨으로 보위하였던 항일빨치산의 정신과 김일성이 축지법으로 일제와 싸워 승리했다는 '전설'[93]을 가르쳤다.
    당연하게도 장마당 세대에게는 우상화 선전이 먹힐 리가 없어 '인공위성 만들어 우주에 쏘아올리는 시대에 연길폭탄 만들었던 빨치산 회상기를 학습해야 하냐', '우리도 축지법을 배워 경계가 상엄한 국경을 탈북했으면 좋겠다'며 비웃고 있다고 한다.
  • 2024년 1월, 자유아시아방송은 4일 주민들이 정기적으로 참가해야 하는 새해 첫 정기 강습에서 김정은을 우상화하는 문건으로 토론할 것을 강요하자 강의실의 분위기가 싸늘해지는 것을 넘어 강의 중 졸거나 잡담을 하는 주민들도 보였고 심지어 강의 중 대놓고 코웃음을 치거나 반발한 주민들도 있었다고 한다. 북한 주민들은 북한의 선전에 대해 '허황된 거짓선동'이라고 평하며 "더 이상 가난할 수 없는 국가(북한)를 놓고 '우리국가제일주의시대'를 선전하고 있냐", "'우리국가제일주의'가 그(김정은)에게 절대 필요하겠지만 굶주리는 우리에겐 필요 없다", "시대와 세계를 평정하는 위인이 자기 나라의 식량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냐"고 비꼬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하였다.
  • 2024년 2월 2일 자유아시아방송 보도에 따르면 이제는 북한에서도 김정일의 생가가 백두산 밀영이 아니란 것을 아는 사람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양강도 청년부문 소식통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이후 처음으로 시작된 백두산 혁명전적지 답사행군에 대해 다루며 "백두산 혁명전적지 1만명 답사행군은 해마다 2월 5일부터 2월 20일까지 기간에 양강도 혜산시에 있는 '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에서 출발해 김정일의 생가라고 하는 삼지연시 백두밀영에서 끝이 난다"고 언급했다. 애초에 김일성의 해방전 주도가 거짓이라는 사람도 많은 만큼 당연한 귀결이다.

6. 김정은 집권 이후

이렇듯 더 이상 기존 선전이 먹히지 않으니 우상화 방법도 바뀌고 있다.

2024년부터는 선대 김일성과 김정일을 지우고 자신을 띄우는 정황도 드러난다.
  • 2024년 신년경축대공연 종곡으로 공연된 세상에 부럼없어라[94]는 가사에서 김일성김정은으로 고쳐 불렀다. 김일성을 신으로 떠받드는 북한에서는 굉장히 이례적인 행보로, 김일성을 지워 김정은 우상화와 권력 강화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것으로 해석된다.
    록화실황 보도를 맡은 조선중앙텔레비죤 리춘히 아나운서는 공연이 끝난 뒤 김정은이 관객들을 향해 인사하는 장면에서 "강대한 김정은 조선의 영광을 무궁토록 떨쳐가렵니다"라고 말하며 김일성 조선이 김정은 조선으로 바뀌었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관련 기사 1 관련 기사 2
  • 2024년 2월 27일 자유아시아방송이 입수한 선서문에 따르면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가 언급된 것 외에 김일성, 김정일에 대한 언급은 없었고 그 대신 '위대한 김정은 동지'라는 표현이 많이 쓰였다고 한다. 이는 김정은에 대한 절대적 충성과 함께 선대와의 차별화를 선언했다는 징표로 풀이된다. #
  • 2024년 태양절을 앞두고 북한 매체에서 '태양절'이라는 단어가 사라지고 언급하더라도 '4월 명절'이라는 식으로 축소되어 언급되게 되었는데, 이에 대해 집권 10년을 넘어가면서 더는 선대의 후광에 기대지 않겠다는 자신감의 표현임과 동시에 선대에 대한 지나친 우상화를 경계하려는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 아니나다를까 중앙당 측에서 주민들에게 '태양절' '광명성절'이라는 단어를 쓰지 말라고 했다는 증언이 들어왔다. # 4월 14일 로동신문에서도 만경대고향집을 기존의 '태양의 성지'가 아닌 '애국의 성지'로 격하(?)했다. 반면 김정은은 '주체 조선의 태양'이라고 부르는 중이다. #

김정은의 딸 김주애에게 4대 세습을 하려는 정황이 지속적으로 포착되는 바 김주애 우상화가 이루어질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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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단 영상 속 기사 초반에 북한의 선전용 동요 세상에 부럼없어라가 나온다. '세상에 부럼없어라'는 북한 어린이들이 지도자와 (북한은 일당제 국가라 조선로동당을 그냥 '당'이라고 부른다.)의 품에서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내용의 동요로, 후렴이 "우리의 아버진 김일성원수님 / 우리의 집은 당의 품"으로 시작한다.[2] 이 구절 다음에는 "나라들 사이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자주성이 없이 남을 쳐다보며 의존하고 그 나라의 눈치를 보면 궁극에는 눈뜨고 망국멸족될 수 있다."고 적혀 있다.[3] 김정일과 김정은은 실제로 애정결핍이 있었다. 김정일은 6살 때 남동생이 수영장에서 익사하는 모습을 목격한 데다가 8살 때 어머니를 잃었고 김정은도 어머니의 출신 때문에 할아버지조차 존재를 모를 정도로 대외적으로 없는 자식 취급이었다.[4] 세금이 아니다. 북한은 1974년 4월 1일 "세금"을 폐지한 명목상 무세국가다. 때문에 '세외부담'이라는 이름 하에 온갖 명목으로 현금과 현물을 가히 착취 수준으로 걷어간다. 당국은 "세금"을 걷은 것이 아니라고 우기고 있다.[5]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의 권위를 강화하며 황제를 로마의 수호신 그 자체로 일컬었다.[6] 파라오를 태양신 의 현신이자 라의 아들로 일컬었다.[7] 주체사상을 '김일성교'라는 문자 그대로의 종교에 빗대기도 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초월적 존재에 대한 믿음과 사후세계의 부재를 들어 종교 그 자체로 보기는 어렵기는 하지만 그래도 유교와 마찬가지로 주체사상을 종교에 준하는 수준으로 보는 것 정도는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8] 이상조는 이 문서를 소련에 보내고 3년 후인 1961년에 소련으로 망명했으며 1989년 9월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6.25 전쟁은 김일성이 주도한 남침이라는 사실을 강연을 통해 증언하기도 하였다.[9] 스탈린도 위압적 우상화로 악명이 높았는데 북한은 정권 수립 이후 불과 10년 만인 1958년에 이를 압도했다는 소리다. 스탈린 우상화를 경험한 소련인들조차 러시아어로 번역된 북한 선전 잡지들의 김일성 우상화 내용들을 보면서 너무 웃기다는 이유로 이 선전 잡지를 '유머 잡지'로 여기며 일부러 구독하고 밥상머리에서 가족끼리 읽으면서 같이 웃을 정도였다는 것에서 북한의 지도자 우상화 수준이 어느 수준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는 한국에서 장군님 축지법 쓰신다가 네티즌들 사이에서 조롱거리가 된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10] 투르크메니스탄은 원래 소련에 속했던 국가였다. 니야조프 역시 인류 역사상 가장 우상화를 극단적으로 시행한 지도자 중 하나로 꼽히며 전세계적인 조롱거리가 되었다.[11] 응게마는 북한과 유사하게 자신에게 초자연적 힘이 있다고 국민들에게 선전했으며, 심지어 1978년에는 국가 모토를 대놓고 '마시아스 응게마 외의 신은 없다'로 바꾸기도 했다.[12] 참고로 스탈린과 마오쩌둥 우상화가 김일성 우상화의 원류이며 차우셰스쿠와 응게마, 니야조프의 우상화의 원류는 김일성이다.[13] 공식 애도기간은 10~11일. 100일은 암묵적인 애도기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14] 물론 이때 술을 마셔 놓고 '장군님이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맨 정신으로 버티냐'고 해서 빠져 나간 경우도 많다.[15] 김일성 사망 당시 선포된 애도기간은 3개월이었으며 인민무력부 간부 중에서도 술을 마시다가 적발돼 공개처형당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북한 출신 월간조선 기자가 작성한 기사[16] 김정일 사망 공표 거의 직후인 2011년 12월 19일 밤 11시 30분에 탈북하다가 체포된 일가족에게 김정은은 "이런 때에 월경하는 자들은 모두 역적이니 그 일족의 3족을 멸족해버리라."며 막말을 내뱉었다.[17] 전자를 패배시킨 것은 미국이었고 후자는 오히려 북한이 미국에게 졌다고 봐도 무방하다.[18] 출처: 강광식 편저, 북한의 실태 - 분야별 경험자료 및 예비적 고찰, 1987,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9&142쪽[19] 물론 이들도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라 몇 달 전부터 미리 뽑아 놓고 모의접견에서는 김정은은 닮은 사람까지 내세우며 엄격한 훈련을 거치게 한다.[내용]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김정은동지께서 보아주신 <화성-13>형 발사대[21] 현지지도 대상이 되는 가정은 이를 반기는 마음 절반, 싫어하는 마음 절반이라고 한다. 먼저 방문 준비를 위해 환경이 개선되고(페인트 칠부터 시작해서 동네 진입로까지 싹 다 새로 깔린다고 한다.) 기본 군중(핵심계층) 중 '접견자'라는 북한에서 최고의 끗발을 날릴 수 있는 뒷배가 생기기 때문에 절반은 기쁜 마음이지만 방문 이후 다녀간 집 자체를 돈이 있건 없건, 지원이 있건 없건 방문 시점의 그 상태 그대로 유지시켜야 할 의무가 생기기 때문에 싫어하는 마음이 같이 생긴다고 한다.[22] 대규모 혁명박물관과 기념물을 넘어 모든 공장, 기관, 학교, 농장, 군대에 설치되어 1990년 기준으로 정확히 37,950개에 달했다고 한다.[23] 이게 사실 매우 중요한데 실제로 '집중학습'에 참여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김정은이 그처럼 탁월하고 세련된 영도로 적대세력의 도전을 짓부시고 자력 부강한 나라를 열어 놓았다면서 왜 우리에게 식량도 땔감도 공급해주지 않느냐"고 반문하며 우상화 선전이라면 지긋지긋하다고 여긴고 한다. 사실 후술하듯 이제 북한도 해외 정보가 많이 유입되어 북한 체제의 진실이 어느 정도 알려졌기 때문에 우상화 선전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24] 물론 북한에서는 이를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에 대한 존경과 흠모심이 강한 우리 민족의 심리적 습성을 드러낸다"고 포장한다.[25]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1923년에 김일성이 '조선을 알아야 한다'는 친부 김형직의 뜻에 따라 만주 팔도구-평양 만강도까지 14일 동안 천리길을 걸었다. 참고로 이때 김일성은 만 10세였다.[26] 가장 신성시(?)되는 답사지는 김정일의 거짓된 생가인 백두산 밀영이라고 한다. 김정은 시기에 들어서는 '백두의 칼바람을 맞아봐야 선대의 혁명성을 알 수 있다'며 백두산 답사를 강요하는데 애초에 고난의 행군 시기에 '백두의 칼바람'을 맞기는 커녕 스위스에서 편안한 유학 생활을 보낸 김정은이 자신은 남들이 모르는 것을 다 통달한 것마냥 말하는 것이 어불성설이다.[27] 평양에서는 만수대 동상, 각 도에서는 도청 소재지 인근의 동상[28] 실제로 서양권에서는 사리분별력과 판단능력이 성인에 비해 떨어지는 어린이들에게 정치적 사상을 주입하는 것은 정서적 학대로 여긴다. 그런데 북한은 이 정서적 학대를 북한에 사는 모든 어린이들에게, 그것도 국가적 차원에서 강제적으로, 지속적으로 자행하고 이를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29] 특히 니야조프의 국민 세뇌는 "투르크메니스탄에서는 1 ~ 2세대 내에 완전히 쓸모없고 현대 사회에서 살 수 없는 젊은이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까지 나오게 할 정도로 심각했는데 북한의 세뇌는 그보다 훨씬 극심하다. 니야조프의 후임 독재자인 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하메도프도 학생들에게 자신의 일대기를 가르치는 등의 세뇌 교육을 자행했다.[30] 내용은 대략적으로 '국가는 모든 어린이들을 탁아소와 유치원에서 주체형의 혁명가로 교육하는데 선차적인 힘을 넣는다'이다.[31] 이는 논문에서 다루는 내용이 북한 체제에 반하지 않으며, 따라서 연구해도 괜찮다는 근거가 있음을 김씨 일가의 어록을 통해 증명해보여야 하기 때문이다.[32] 무역관계로 북한을 방문했다고 한다.[33] 김정은의 생일은 북한에서는 기념일이 아니다.[34] 물론 완전통제구역 수감자들은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35] 김일성 시기에는 태어난 지 75일이 된 아이들은 누구나 탁아소에 보내졌다고 한다. 김정일, 김정은 시기에도 이런지는 불명.[36] 이 글에는 '특별 교실' 사진이 담겨 있다. '특별 교실'에는 김일성 생가 만경대를 본뜬 모형이 있다.[37] 아이들이 부모를 보고 싶다면 연계를 지어줬다고는 하지만 부모를 보고 싶어하는 아이들이 없어서 그런 '불편이나 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북한의 보육원은 일반적인 집보다는 시설이 좋았다고 하지만 애초에 국가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친부모와 가정으로부터 아이들을 분리한다는 것은 김일성 시기 북한 외에는 민주 캄푸치아 정도만이 할 수 있던 일이다.[38] 다만 이는 아이의 진심이 아니라 보육원이 강요한 대답이긴 하다.[39] 조선인민군의 전신으로 날조 주장하는 가상의 군대. 실제 김일성은 중국공산당 간부이자 소련군 대위였다. 중국/소련과 연이 있었기 때문에 북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40] 실제로는 170여 명이 순사 5명(보조원 2명 포함)이 있는 작은 마을을 침투해 오발로 2살짜리 아이와 요리사를 죽인 것 외에는 제대로 된 성과도 전혀 없는 전투라고 보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었다.[41] 마찬가지로 북한에서 보천보 전투 버금가는 포지션의 전투인 '무산지구 전투'는 "적들이 전멸당했다고 선전하던 조선인민혁명군이 건재할 뿐 아니라 오히려 더욱더 강대한 역량으로 자라나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계속 철추를 내리고 있다는것을 실지로 보여준 전투"로 자찬하지만 이 전투는 실제로는 김일성의 최측근 최현의 전공을 훔친 것이다. 자세한 것은 대홍단군 문서 참조.[42] 수십만 병력을 무찔렀다는 것은 북한에서도 주장하지 않았는데 과거 북한에서 보천보 전투의 구체적 전과를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위대한 전투라고 하니 이런가 보구나'하고 착각했을 가능성이 더 높긴 하다. 북한에서도 보천보 전투의 의의가 '일본놈을 몇 명 죽인데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일단 북한에서는 보천보 전투 당시 참여한 일본군이 2000명이었으며, 이들 중 200명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전사했다고 선전하고 있는데 그것도 1:10으로 싸웠는데 1 쪽에게 10 쪽의 90%가 몰살당했다는 내용이다.[43] 1991년부터 2002년까지 고려항공평양나고야를 잇는 전세편을 운항하였다.[44] 고등학교 시절까지 일본에서 살았고 한국식 이름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보아 정황상 재일교포 북송의 피해자로 보인다.[45] 그 가이드는 뒤이어 "더 넓은 의미로 포착해 조선에 침입 하고자 하는 제국주의적 외국세력을 배제하기 위한 혁명투쟁까지 포함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1866년의 샤먼호 사건이나 1875년의 강화도 사건 등에까지 빠진다고 생각해야 합니다"라며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운요호 사건을 모두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가 막았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는 아무 근거도 없는 북한의 허위 날조이며 무엇보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 당시 김응우는 고작 만 18세의 새파란 소년이었다.[46] 그 일본인의 말로는 전술한 발언이 "안중근은 김일성 주석의 할아버지나 아버지와 협력하지 않고, 혼자서 그런 일을 한 바보이기에 (한일병합을 막는 데에) 실패했다"는 뉘앙스로 말한 것 같았다고 한다.[47] 민족대표 33인은 '태화관에서 먹자판, 놀자판만 벌이고 조선총독부에 스스로 투항한 매국노'로 간주한다.[48] 실제 출생지는 소련이다. 과거에는 하바롭스크로, 현재는 우수리스크로 추정된다.[49] 다만 김정은은 출생지 성역화가 없으며 대내적으로도 출생지를 그다지 알리지 않는다. 이는 김정은이 김정일과 몰래 동거하던 재일동포 고용희에게 태어나 김일성이 죽을 때까지 김정은의 존재조차 몰랐기 때문이다.[50] 옆에 있는 김정일 초상화는 김일성 집권기에 그려진 초상화가 아니라 김정일이 노동당 총비서에 등극한 직후인 1997년 10월 9일 공개된 초상화다.[51] 즉, 향수를 뿌려야 했던 초상화는 바로 이것이다. 사진은 1968년 4월 15일 김일성의 56번째 생일을 기념해 만든 우표를 촬영한 것이다.[52] 전문가들은 정면 사진은 죽은 사람의 초상 사진처럼 보이기 때문에 재제작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다른 의견은 성경 속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정면이 아닌 비껴선 자세여서 김일성도 신적인 존재로 만들려고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만약 후자가 사실이면 주체사상에 기독교적 요소가 많이 스며들어 있음을 다시 한 번 드러내는 셈이다.[53] 완전통제구역에 수감되면 공민 자격을 말소할 정도로 대놓고 비국민 취급한다. 정치사회적 생명은 끝난 것. 사람 대우를 받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54] 박남기, 장성택이 처형 전 마지막으로 재판을 받은 곳이다. 여기 올 정도면 완전통제구역과 마찬가지 이유로 정치사회적 생명이 끝난 것이다.[55] 대신 기내 안내방송에 찬양 문구가 들어간다. 참고로 지도자 우상화가 북한 못지 않은 투르크메니스탄의 유일한 항공사 투르크메니스탄 항공은 2022년 부자 세습 전까지 초상화를 걸었다.[56] 다만 과거에는 진짜 이러면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57] 하필이면 빨간색인 이유는 빨간색을 '공산혁명의 상징'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58] 화강석 단까지 한꺼번에 대피시킬 수 있다고 한다.[59] 1988년생. 중학생 때부터 한 민족이지만 너무나 다른 길로 간 남북한에 흥미를 느껴 2011년 한국으로 이주했고 2017년 서울대학교에서 북한 군대의 사회사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고려대학교 사학과 강사 겸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60] 2014년 경부터는 김일성 얼굴이 만경대고향집(김일성 생가)으로 바뀌었다.[61] 사실 독재국가에서 독재자 얼굴이 화폐에 들어가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다. 당장 한국에서도 이승만 얼굴이 화폐에 들어갔던 적이 있다.[62] 그나마 초상화를 건지면서 아내의 목숨도 똑같이 건지라고 했기 때문에 다른 사례들보다는 훨씬 나은(?) 셈이다.[63] 정확히는 양손으로 둘 다 잡고 있었는데 거센 물살 때문에 딸의 손을 놓치면서도 초상화만큼은 놓치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딸보다 초상화를 더 꽉 잡았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64] 이와 거의 유사한 사례를 데일리NK에서 보도하기도 했다. # 물론 해당 기사에 따르면 라선 주민들은 이 여성의 모습에 충격받고 그녀가 처벌이 두려워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 아니냐며 합리적 의심을 했다. 이 소식을 접한 고위급 탈북자는 이에 대해 "나선 지역 주민들은 한국 드라마나 외부 정보를 많이 접하는 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자식보다 초상화를 챙긴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자본주의를 접한 기회가 비교적 많은 주민들이라고 할지라도 우상화 세뇌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했다.[65] 동태관은 해당 논설을 쓰고 하루 뒤 "1990년대부터 시대정신이 맥박 치는 정론들을 수많이 발표하여 일심단결 된 조선의 위력을 온 세상에 과시하고 천만군민을 당정책 관철에로 힘 있게 불러일으키는데 특출하게 공헌한 인물"로써 김정일훈장을 수여받았다.[66] 1963~1992. 인민군 비행사이자 편대장으로, 1992년 12월 23일 인민군 공군사령부 59추격비행연대(원산갈마비행장)에서에서 열병식을 앞두고 비행훈련을 하던 도중에 비행기가 고장나 김일성 동상으로 향하고 있는 것을 알고 탈출하라는 관제소의 명령을 거부하고 비행기의 기수를 바닷가 쪽으로 돌린 군인이다. #1 #2[67] 여기서 '이름하다'는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하여 사물, 단체, 현상 따위에 부르는 말을 붙이다.'라는 뜻의 '형언하다'와 유사한 의미의 말이다.[68] 정확히는 동태관 외에도 다른 논설위원 2명이 함께했다.[69] 그 교감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3명의 목숨을 미필적 고의로 앗아간 것이 아니라 '초상화를 구해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70] 13명이 아닌데 3명이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을 가능성도 있다.[71] 이 중 전신 동상은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으로만 72개 정도고 나머지는 흉상이나 석고상이라고 한다. 물론 실제로는 이보다 더 많겠지만.[72] 가격 대비 퀄리티가 훌륭해서 아프리카 이곳저곳에서 동상 제작 수주를 받아 외화를 벌어들였을 정도다. 2022년 7월 30일 북한의 만수대창작사가 베냉 코토누에 30m 높이의 여군인상을 만든 것이 알려지면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73]29억 2천만 원어치. 실제 동상 사진[74] 한반도 야간 위성지도를 보면 밝은 빛이 빽빽하게 들어찬 남한과는 정반대로 북한은 평양 외에는 희미한 점들만 보이는 거의 섬나라처럼 보일 정도이며 평양의 불빛도 인구가 평양의 1/10 정도인 춘천시만도 못하다.[75] 북한 전기는 품질이 매우 나쁘다. 발전소도 낡아 전기가 갑작스럽게 끊기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76] 북한 웹사이트 소스 코드를 열어 보면 개행을 막기 위해 '수령' 따위 문자열 앞뒤로 HTML <nobr> 태그를 적용하여 절대 줄이 바뀌지 않도록 처리됨을 확인할 수 있다.[77] 북한 웹사이트 소스 코드를 열어 보면 김씨 삼부자 이름에는 인라인 CSS 태그 font-size:110%; font-style:bold; 를 적용하는데 이는 글자 크기를 1.1 배로 설정하고 굵게 표기하도록 하는 코드다.[78] 사실 이는 문화대혁명 시기 마오쩌둥이 원조로, 1970년대 초부터 이랬다고 한다.[79] 이 지역 출신인 '김제원'이라는 농민이 소련군정 하에서 북한의 토지개혁을 통해 토지를 분배받게 되었다는 것에 감격하여 수확한 쌀 30가마니를 북한 공산주의 정권에 바쳤다는 이른바 애국미헌납운동을 기념하기 위해서라고 한다.[80] 여긴 김일성이 "조선 왕조의 흥업을 바란다"는 뜻이라는 이유로 바꾸었다.[81] 의외로 북한에 '김일성시'라는 도시는 없다.[82] 물론 북한 측에서는 자신들이 은폐해온 김씨 일가의 학정과 실정의 진실이 드러나며 북한 주민들의 지지와 신뢰감이 떨어진 것을 '제국주의자'들이 김씨 일가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지지와 신뢰감을 떨어뜨려 북한의 단결력과 공고성, 불패성을 떨어뜨리기 위해 김씨 일가를 '사상문화적침투책동'으로 공격하기 때문이라고 우기고 있다.[83] 참고로 김만철의 탈북 시점은 한국에서 6월 항쟁은커녕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한 직후였던 명백한 군사독재 시절이었고 당시 북한도 닐 암스트롱이 달에 착륙했다는 사실과 일본이 잘 사는 나라라는 사실까지 숨겨 (당시 최전성기였던) 일본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라고 착각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로 북한이 해외 정보를 21세기 이상으로 극단적으로 차단하던 시절이었다. 북한 주민들은 그런 시절부터 김일성에 대한 불신을 품었다는 것이다.[쪽잠에줴기밥] 고난의 행군 때부터 나온 전형적인 우상화 날조 선전. 김정일이 인민을 위해 불철주야 일하느라 잠은 야전 승용차에서 쪽잠, 식사는 '무우오가리(무말랭이)와 절인 오이, 까나리'/염장무가 든 소박한 줴기밥(주먹밥) 한두 덩어리만으로 때웠다는 내용으로 2024년 현재까지도 수십 년째 우려먹고 있다. 기본가격만 한화 수억 원인 벤츠 S클래스에 수억 원을 또 들여 방탄 개조한 차량을 야전 승용차로 썼고 소고기연어알, 캐비어가 들어가 재료비만 계산해도 하나당 6만 원인 줴기밥을 먹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겠다.[85] 북한 주민들도 이런 책들을 훼손하는 것이 처벌을 받는 '범죄'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책 한 권을 모두 태워 버리며 증거(?)를 인멸하기 때문에 처벌할 수도 없다고 한다. 장마당에서 책을 파는 장사꾼들도 실용적인 책들을 선호하지 김일성 부자 초상화가 들어간 책은 절대 사지 않는다고 한다.[86] 노작과 문헌마저 화장실 휴지로 사용해 초상화만 남고 너덜너덜 해지는 경우가 많은데, 검열로 적발되면 반동분자로 몰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소각해 버린다고 한다. 초상화를 남겼다는 것은 그 부분을 휴지로 썼다가 당할 후환이 어마어마한 수준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예감하게 해 준다.[87] 人民班. 북한 행정 조직의 가장 작은 단위로, 20~40가구 정도로 구성된다. 한국의 과 유사하다. 양육문제, 청소 노력동원, 공공질서 유지 등 거주지역 내 현안을 담당한다.[88] 참고로 북한 당국은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와 김일성의 탄생이 동시에 일어난 1912년 4월 15일을 "('자본주의의 상징'이 침몰하며) 서방세력의 몰락을 알리고 ('인류의 태양'이 떠오르며) 동방세력의 부상을 알리는 길조", "'위인'의 탄생은 충격적 사건을 동반한다" 등 소름끼치는 고인모독 발언을 태연하게 하고 있다.[89] 덤으로 타이타닉 영화가 북한에서 인기가 많고 지미 카터미국 대통령이 김일성에게 선물한 영화라는 소문이 북한에서 돌고 있다고 하는데 적어도 북한에서 타이타닉이 정확히 언제 만들어진 영화인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쪽잠에줴기밥] [91] 김정은이 손수 전국의 청년들에게 "강성국가건설의 어려운 부문에서 혁신을 창조한 청년들의 성과를 축하하면서 나라가 어려운 시기(전시를 의미)에 직면한다면 전 세대(항일빨치산과 6.25 전쟁 참전 세대)의 정신세계를 본받아 조국수호전에 나서라"는 축하문(?)을 보낼 정도였으면 김정은이 직접 이런 행위에 관여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92] 해방 전 김일성이 화약제조법을 창안해 제조했다는 폭탄을 의미한다.[93] 다만 현 북한의 우상화 방침을 보면 '김일성의 항일빨치산 활동이 민중들에겐 마치 축지법처럼 느껴졌다'는 비유적 의미일 가능성이 높다.[94] 로동당이 수십 년간 세뇌를 위해 사용한 대표적인 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