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17 21:58:50

북한의 전쟁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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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시기별 분류
2.1. 6.25 전쟁 이전2.2. 6.25 전쟁
2.2.1. 피학살자 수 추산2.2.2. 학살 건수 추산2.2.3. 목록
2.2.3.1. 학살 목록2.2.3.2. 그 외 전쟁범죄 목록
2.3. 전후
3. 관련 문서

1. 개요

북한의 전쟁범죄에 대해 기술하는 항목이다. 건군기와 6.25 전쟁 당시 남로당빨치산 등 좌익 무장세력에 의한 학살 역시 포괄하나, 이 경우 별도로 표기한다.

2. 시기별 분류

2.1. 6.25 전쟁 이전

2.2. 6.25 전쟁

6.25 전쟁 시기 북한군남로당 좌익 세력들은 우익 세력, 정치인, 군인, 경찰, 공무원, 지주, 교사, 자본가, 기독교인[1], 지역 토호 혹은 그들의 가족 및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는 "적대세력 사건"이라고 지칭한다. 여기서 '적대세력'이라 함은 비단 북한군 외에도 중공군, 남로당, 빨치산, 지방 좌익, 민병대 등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이 적대한 공산권 세력 전반을 아우른다. 가령 퇴각하던 북한군이 약 500명의 희생자들을 집단 살해했던 전주형무소 2차 학살 사건의 경우, 진화위에서 지칭하는 공식 명칭은 전주형무소 적대세력사건이다.

중국 인민지원군에 의한 학살은 중국의 전쟁범죄 문서에서 기술하며, 소련 공군의 폭격의 경우 러시아의 전쟁범죄 문서에서 다룬다.

2.2.1. 피학살자 수 추산

  •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20,000 ~ 30,000명[5]
  • 정전협정 후 전범재판을 준비하는 데 참여했던 미국인들 : 29,915명[6]

2.2.2. 학살 건수 추산

  • 약 1,100건(브루스 커밍스)[8]

2.2.3. 목록

2.2.3.1. 학살 목록
  • 화순군 학살사건#[10]
  • 6.25 전쟁기 부역혐의 학살
  • 좌익 치안대의 학살
2.2.3.2. 그 외 전쟁범죄 목록

2.3. 전후

3. 관련 문서


[1] 북한군과 좌익세력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퇴각하면서 집중적으로 기독교인을 학살했다.#[2] <대한민국 통계연감> 1952년 판에서는 122,799명, 1955년 판에서는 128,000명으로 나와 있다.[3] 사회학자이자 진실화해위원회 상임위원[4] 김동춘,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 사계절, 2013, 334쪽.[5] 미국과 한국의 조사를 토대로 계산한다면, 북한군과 남한의 공산주의 협력자들이 학살한 사람의 수는 대략 20,000 ~ 30,000명 사이라고 하지만, 그런 수치의 방법은 의문이라고 보았다.[6] 이 수치에는 1950년 여름 한국에서 인민군과 좌익에 의해 자행된 몇몇 잔학 행위가 포함되었다고 한다. 브루스 커밍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현실문화, 2017, 261 ~ 262쪽. 물론 이와 더불어 브루스 커밍스는 6.25 전쟁 당시 좌익에 의한 학살은 경찰과 우익 청년단체들을 노린 학살이었음을 강조하지만, 북한군과 좌익이 100,000명이 아니라 30,000명을 죽였다 해도 위안이 되지 않는다고 언급했다.[7] 중공군의 학살만 포함했을 시[8] 브루스 커밍스는, 2010년에 낸 저서『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에서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좌익에 의한 학살은 1,100건이었던 반면, 우익이 저지른 학살은 그 보다 더 많았고, 학살 비율로 따졌을때, 좌익의 학살 비율이 우익들의 학살 비율에 1/6 수준이라고 주장했다.[9] 한국 전쟁 시기 지주와 기독교인이 많았던 전남 지역에 좌익의 학살이 집중됐는데 그 중에서도 영광군에서 최대 피해가 났다.#[10] 좌우익의 대립으로 인한 상호 학살. 빨치산과 좌익이 학살을 하고 보복으로 군경이 좌익 시민들을 학살했다.[11] 좌우익의 대립으로 인한 상호 학살. 빨치산의 준동과 저항이 극심했으며 기독교인과 우익시민들이 학살 당하자(이 기사에 따르면 1954명이라고 한다.) 11사단을 중심으로 좌익 시민들을 보복 학살했다.[12] 좌우익의 대립으로 인한 상호 학살이었다.[13] 6.25 전쟁 시기에만 최대 120,000명에 달한다.# 또한 전쟁 이후에도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