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북한/경제
북한의 계층 돈주 | |
<colbgcolor=#ED1C27,#222222><colcolor=white> 지위 | 민족자본가 (기본 군중 ~ 복잡한 군중 사이) |
등장 시기 | 1990년대 이후 - 계기: '고난의 행군' (1996. 01.) |
인정과 발전 | 2000년대 이후 - 계기: '새로운 경제관리개선조치' (2002.7.1.) |
거주 | 평양시 등 |
업종 | 운송업, 경공업, 건설업, 고리대금업, 상업 등 |
[clearfix]
1. 개요
고난의 행군으로 북한의 배급제가 무너지고, 민간경제만킁은 장마당이 중심이 된 시장경제가 형성된 덕분에 생긴 신흥 자본가 계층이다. 돈의 주인의 줄임말로 1990년대 새로 생긴 신조어이기도 하다.북한이탈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보통 최소 1만 달러[1] 이상의 자산을 운용할 수 있는 재력가들이 돈주로 불릴 수 있다고 한다.[2][3] 2017년 기준으로 평양에서만 돈주로 불릴 수 있는 인구가 약 50만 명[4][5]이었고 전국에 존재하는 돈주는 약 80만 명 정도[6]였다고 한다. 돈주가 가장 많았을 때는 2020년이었고[7], 북한이 2021년에 유행한 코로나19를 빌미로 국경을 완전봉쇄하고 밀수를 원천차단한 이후부터 장마당과 함께 돈주들이 몰락하기 시작했다. 2024년에는 돈주의 70%에서 80%가 파산했으며#, 특히 국경에서 밀수로 성장한 돈주는 사실상 절멸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2. 상세
<rowcolor=white> 매일 수 백 달러를 소비하는 '돈의 주인', 북한 '돈주' 북한 상위 1%, 돈주 (2023년 12월 9일 방송분) |
돈주는 1990년대 북한이 한창 고난의 행군을 겪고 있을 때 등장하였다. 당시 북한은 월급을 주기는 했지만 기초식료품, 생필품, 옷가지, 학용품 등은 배급으로 해결했는데 1990년대에 소련 붕괴와 함께 찾아온 경제위기 속에서 극심한 자연재해와 흉작, 그리고 에너지난 등으로 배급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렸고, 물가는 나날히 폭등하여 월급으로는 도저히 먹고살 수 없게 되었으니 북한의 많은 시민들이 굶어죽고 기아가 퍼졌다. 고난의 행군이 북한 사회에 끼친 영향은 여러 가지 다양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돈주의 탄생이었다. 고난의 행군 이후 사실상 무너져 버린 배급제도와 공공인프라의 빈틈을 장마당과 돈주들이 메꾸면서 북한 사회 내부에서 알게 모르게 자본주의 시장경제 시스템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장마당의 활성화와 함께 돈주들은 조선로동당 산하 사업에 손을 대면서 사업의 규모를 키우며 성장하였다.
대표적인 돈주들의 직업으로는 무역업자(밀수업자 포함), 차판 장사꾼(운송업자), 선주(어업), 돈 데꼬(환전상) 등을 꼽을 수 있다. 초기 돈주들은 장마당에 중국산 물건들을 공급하면서 사업하는 자영업에 가까운 보따리상이었으나 시장의 존재가 인정되고 장마당의 규모가 커지면서 초기 장사에서 벗어나 유통업, 건설업, 해외무역업, 운송업, 대부업 등을 담당하면서 점차 체급을 올리며 북한 내 국가 기관 산하에서 운영되는 사업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사실상 이들은 북한 내 자본주의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으며 조선로동당도 이들의 존재를 어느 정도 인정해 주고 있고 특히 김정은 시대 들어서는 그 정도가 심화되어서 우상화 작업에 자금을 쾌척하면 조선로동당에 입당하기가 쉬워져 돈주들이 로동당원인 경우가 많아졌고 류경관 같은 돈주들을 위한 시설들도 잇따라 건설되었다. 실제로 2010년대 평양에 아파트가 급속히 늘어났던 것이나 지방에서도 건설 붐이 분 것도 돈주들의 투자 덕택이었다.
돈주의 활동은 북한 내에서 불법이며 일반적인 시장경제의 기준에서도 정상적인 경제 활동이 아니기 때문에 돈주의 행태에 대해 한마디로 정의하기에는 복잡한 실상들이 얽혀 있다. 작게는 농촌과 산골에서 약초, 나물, 산열매 등 특산품을 사람을 고용해 대량으로 매집하여 중국의 대방(무역업자)에게 넘기고 중국산 공산품을 넘겨받아 북한 내부로 유통하는 것에서부터 크게는 아파트 몇 세대를 대가로 평양 내 각종 권력기관들에게서 건설 허가를, 군대에게서는 노동력을 제공[8]받고 투자자를 모아 평양 시내에 아파트 건설하는 것까지 다양하다. 돈주가 활동하는 데 있어서 국가의 재정적, 제도적 지원은 전무하기 때문에 돈주 개인의 순수 능력만으로 모든 것을 진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돈주의 성공은 능력과 자본보다 그럴만한 권한을 획득하였는가에 좌우된다. 성공적인 사업을 위해서는 어떻게든 권한을 갖거나 권한을 가진 사람을 뒷배로 두어야 한다. 이렇게 공정한 룰이 보장되지 않는 약육강식의 세계이기 때문에 돈주의 사업 영역은 사채업, 상품위탁, 외상, 동업, 사기 등 다양한 수법과 수단이 모두 얽힌 부조리의 종합체라 할 수 있다.
개혁개방시에는 '당 자체의 기반'으로 사업을 벌인다면 전술한 건설업[9], 운송업[10], 금융업[11], 경공업, 중공업[12], 농업[13] 등 모든 업종에서 남한 기업에 상대조차 되지 않는다. 차라리 민간이 나서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서 황해남도 옹진군 같은 지역에서는 나라가 운영을 못하던 금광을 돈주들이 운영할 수 있었다고 할 정도다. 물론 이들은 당 자체 기반이 아니고 수입 기자재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외국 자본을 들여오든지 남한의 기술, 자본을 들여오는 것이 가장 빠르게 살길을 찾는 법이다. 지금도 운송에 필요한 트럭 같은 것은 중국산 트럭 등을 이용한다고 알려져 있다. 심지어 한국 주식에 관심이 있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
그나마 시장경제에 대한 이해도가 북한에서 가장 높은 집단은 맞고 적어도 재산권 걱정을 하며 사는 처지는 덜 수 있기 때문에 현재 한국의 지방에서 대기업이 잘 못 크지만 중소기업 사장들은 있듯 그들도 그 정도나 북한 사업장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신분은 보장받을 것이다. 남한 기업조차 북한에 대한 정보가 당연히 돈주보다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당장 체제전환한 구 공산권 국가에서 이런 사람들이 새로운 기회를 잡아서 성장한 경우도 있었다. 탈북자 중에서도 이와 유사하게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한국 사회 적응력이 가장 높은 편인데 경영학을 새로 공부하려고 한다든가, 심지어 그냥 장사를 하던 사람이 탈북 후 자신이 일하던 한국의 부도난 회사를 인수하여 2년 뒤 그 회사가 연매출 20억원을 넘기게 하던 탈북자가 실제로 존재한다. # 아예 경쟁업체 사장들에게 중국에 신고해서 북송시켜 버리겠다는 살해 협박에 가까운 협박까지 들었는데도 여성인데도 굴하지 않았다고 한다.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에서 고향의 몇 배의 소득을 올리는 것이 갑자기 그들이 몇 배 지혜로워진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자본이 적절하게 투자된 것이 원인인 이치와 같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유행으로 인해 국경 봉쇄와 함께 경제적 통제가 더욱 강해지면서 돈주의 대다수가 몰락했다고 한다.# 북한 정권에서 강력한 외화 통제 조치를 취하면서 환율이 급등락했고, 초유의 국경 봉쇄 조치로 인해 중국으로의 수출이 차단되었기 때문에 각종 수출품들의 가격이 폭락했다. 밀수업자들은 밀수를 하지 못하여 망했고, 그 물건을 받아다가 전국에 유통하던 운송업자, 도매업 돈주들도 줄줄이 망했다. 각종 수산물 양식장들은 양식을 위해 막대한 투자를 했는데 중국 수출길이 막혀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해 망했고, 코로나 바이러스가 바다로부터 전염될 수 있어 바다에 접근을 금지한다는 조선로동당의 황당한 명령으로 한 척당 1만 달러에 달하는 어선들은 거의 3년 동안 출항을 못했다. 심지어 어선 수리를 위해 해변가로 나가는 것조차 금지되어 어부들은 배가 망가지는 것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망해버린 돈주들의 자리는 '국영 판매소'가 차지하기 시작했다. 장마당에서 곡물 판매를 금지하고 '량곡 판매소' 이용을, 돈 데꼬(개인 환전상)를 체포하고 '국영환전소'로, 개인 약장사를 금지하고 '국영약국' 이용을 강제하는 식이다. 물론 계획경제체제로 돌아가려는 게 아니라 이름만 '국영'이고 투자와 운영은 개인[14]에게 일임하면서 운영 권한에 대한 이익분을 징수한다고 한다. 즉, 개인 돈주들이 시장경제 참여로 일궈놓은 이윤을 국가에서 상당 부분 수탈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이다.#
3. 실상
나는 그제야 회사 사장들이 빚더미에 올라앉을 수밖에 없는 구조에 대해 어렴풋이 느낄 수가 있었다. 아무런 자금보장의 원천이 없는 회사가 이렇게 정책과제가 내려지면 죽으나 사나 무조건 집행해야 하였기에 사장은 죽을힘을 다해 돈을 빌려오든지 아니면, 사기를 쳐서 가져오던지 그 모퉁이를 메워야 할 처지에 빠진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러니 회사는 자금적 원천이 들어 올 수 있는 것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하달되는 정책과제에 그들의 말과 같이 이 사는 집까지 팔아야 하는 처지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합작회사의 사장이 어떻게 돈을 보장하였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농업출판사가 맡은 일을 제 기일에 완수했다는것이 중요했다. 남철 사장이 돈을 어디서 어떻게 마련하였든 그것은 남철 사장 자기 일인 것이지 출판사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당비서를 비롯한 모든 사람의 생각이기도 한 것이다. 결국, 이렇게 계속 내려지는 정책관철로 하여 어쩔 수 없이 회사사장은 돈을 마련해야 하였고 그것이 쌓여 빚을 지게 되었으며 그로하여 '빚꾼'이라는 대명사로 불리게 되는 것이다. 수익이 없는 회사는 어쩔 수 없이 사장들이 빚을 떠안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되어 버렸다.
"회사가 돈을 벌어 회전이 되면서 이익을 대방들에게 돌려줘야겠는데 많은 정책과제를 처리하자니 미처 대금을 물어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투자 대방에게 신뢰를 잃어가는 게 지금의 현실입니다. 사장들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돈을 내겠느냐, 아니면 직급을 내놓겠느냐 하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별수가 없지요. 나도 과수농장에 들여온 사과나무 묘목에 대한 대금을 아직 처리 못 해주고 있습니다. 300만 달러분이 넘는데 말입니다."
나에게 돈을 찍어내는 기계가 있어도 계속 제기되는 정책과제들을 수행하기 힘들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과연 내가 왜 무역회사를 내왔는가? 돈을 벌려고 내왔는가? 아니면 돈을 바치려고 내왔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돈소리만 들어도 신물이 날 정도였고 모임에서 "녹색무역회사 사장동무," 라는 말만 하여도 또 돈이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정책과제와 돈이라는 결과물은 나의 어깨와 정신을 한없이 짓누르고 있었다. 빠져나오려고 하여도 나올 수 없는 상황이다. 외국에 다니면서 슬슬 바람이나 쏘이고 경치나 보면서 돈이나 벌어보겠다고 하던 꿈은 아득히 멀어져만 가고 있었고 그간에 벌어 놓았던 돈도 계속 지출해야만 하는 이 상황이 끝없이 저주스러워졌다.
- 구대명, 《거품 2》[15]
합작회사의 사장이 어떻게 돈을 보장하였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농업출판사가 맡은 일을 제 기일에 완수했다는것이 중요했다. 남철 사장이 돈을 어디서 어떻게 마련하였든 그것은 남철 사장 자기 일인 것이지 출판사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당비서를 비롯한 모든 사람의 생각이기도 한 것이다. 결국, 이렇게 계속 내려지는 정책관철로 하여 어쩔 수 없이 회사사장은 돈을 마련해야 하였고 그것이 쌓여 빚을 지게 되었으며 그로하여 '빚꾼'이라는 대명사로 불리게 되는 것이다. 수익이 없는 회사는 어쩔 수 없이 사장들이 빚을 떠안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되어 버렸다.
"회사가 돈을 벌어 회전이 되면서 이익을 대방들에게 돌려줘야겠는데 많은 정책과제를 처리하자니 미처 대금을 물어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투자 대방에게 신뢰를 잃어가는 게 지금의 현실입니다. 사장들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돈을 내겠느냐, 아니면 직급을 내놓겠느냐 하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별수가 없지요. 나도 과수농장에 들여온 사과나무 묘목에 대한 대금을 아직 처리 못 해주고 있습니다. 300만 달러분이 넘는데 말입니다."
나에게 돈을 찍어내는 기계가 있어도 계속 제기되는 정책과제들을 수행하기 힘들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과연 내가 왜 무역회사를 내왔는가? 돈을 벌려고 내왔는가? 아니면 돈을 바치려고 내왔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돈소리만 들어도 신물이 날 정도였고 모임에서 "녹색무역회사 사장동무," 라는 말만 하여도 또 돈이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정책과제와 돈이라는 결과물은 나의 어깨와 정신을 한없이 짓누르고 있었다. 빠져나오려고 하여도 나올 수 없는 상황이다. 외국에 다니면서 슬슬 바람이나 쏘이고 경치나 보면서 돈이나 벌어보겠다고 하던 꿈은 아득히 멀어져만 가고 있었고 그간에 벌어 놓았던 돈도 계속 지출해야만 하는 이 상황이 끝없이 저주스러워졌다.
- 구대명, 《거품 2》[15]
돈주들의 삶도 평탄한 것이 아니다. 당장은 정경유착을 통해 부를 쌓을 수 있어도 권력기관의 눈밖에 나면 언제든지 돼지저금통의 배를 가르듯 비사회주의 딱지를 붙여 사업체와 재산을 몰수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업 수완이 뛰어난 돈주는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국가기관의 명의를 빌려 산하에 회사를 세우거나 투자 자금을 유치하려는 국가기관이 돈주에게 기업소의 지배인, 사장 직위를 제안해 경영자 겸 물주로 임명될 수 있다. 문제는 기업소와 회사도 조직이므로 조선로동당의 통제를 받아야 하며 이를 관할하는 당비서는 사장보다 사내권력이 강하기 때문에 지배인과 사장은 당비서에게 경영을 간섭받을 수밖에 없으므로 자기 마음대로 회사를 운영할 수 없다는 점이다. 당비서는 군대의 정치장교와 같은 역할을 맡기 때문에 감시와 견제가 일상이며 사장에게는 족쇄가 달린 것과 같다. 즉, 경영 책임은 자신이 지는데 경영권과 수익은 조선로동당이 대부분을 가진다는 것이다.
모든 기업소와 회사는 여러 국가사업과 통치 자금을 위한 상납금, 일명 '정책과제'를 부과받으며 당비서와 상급자들을 챙겨주기 위한 뇌물은 덤이다. 가령 김정은이 려명거리 건설을 명령하면 조직지도부가 각 내각부서마다 건설해야 하는 아파트를 배정하고 각 부서들은 산하에 있는 모든 하부 기관, 회사에 건설 자금과 자재,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한 정책과제를 부여한다. 이는 사업체의 목적이나 실적과는 관계없이 무조건 납부해야 하는 것으로 만약 납부하지 못하면 사장에게 강한 처벌이 부과되고, 못 내겠다고 사임할 수도 없다. 북한에서 흔히 떠들어대는 집행할 의무밖에 없는 것이다. 중앙당이나 국가보위성, 조선인민군 산하의 회사들은 수익성 좋은 알짜배기 사업들을 선점하고 있으므로 이런 과제들을 부담할 여력이 있으나 개점휴업 상태나 다름 없는 기업소나 사업이 부진한 회사의 사장들은 처벌을 피하기 위해 사재를 팔아 충성자금과 각종 정책과제를 부담하는 경우도 있으며 급한대로 돈을 빌리거나 돌려막기 형식으로 사기라도 쳐서 과제를 수행할 수밖에 없다. 결국 든든한 뒷배가 없는 돈주들은 애써 모은 재산을 조선로동당에게 빼앗길 수밖에 없다. 결국 이러한 착취적인 경영 환경 때문에 북한에서 민간기업은 존립 자체가 불가능하며 국가 산하의 기업 또한 절대 성장할 수 없다. 당장 2009년 북한의 화폐개혁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조선로동당에게 있어 개인의 재산은 필요할 때 언제든지 몰수할 수 있는 대상일뿐 개인의 재산권을 절대 보장하지 않는다.
4. 여담
- 돈주의 삶이 구체적으로 묘사된 책으로는 2017년에 탈북한 구대명이 출간한 회고록 《거품 1》(2021), 《거품 2》(2022)가 있다. 돈주의 사업이 여러 권력기관과 개인의 이해관계가 얽혀 어떠한 방식으로 진행되는지 알 수 있다. 구대명은 국가보위성 운전수로 근무하다가 평양 시민권을 얻은 뒤 평양시 평천구역과 중구역 아파트 건설로 큰 돈을 벌고 김정은 시기에 평양에서 무역회사 사장을 하다가 끝없는 정책과제의 부담을 이기지 못해 탈북했다.#
- 북한이탈주민 출신 주성하 기자가 2020년대의 북한에서 떠오르는 신진계층으로 발전한 돈주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극단적인 빈부격차 사회로 변해가는 것을 설명한 유튜브 영상도 참고해볼 만 하다.#
- 과거 공산주의 경제체제를 이끌었던 소련에는 노멘클라투라가, 소련의 후신인 러시아에도 북한의 돈주와 거의 비슷한 올리가르히가 존재하며 중국에도 비슷한 개념의 얼다이가 존재한다. 물론 금수저는 태어날 때부터 부잣집 아이였다는 말이므로 전혀 공통점이라고는 없다. 차라리 중앙당 간부의 자식이 금수저라고 한다면 모를까... 사실 엄밀히 말하면 올리가르히도 소련 공산당 출신이었다가 그 연줄로 이어져서 재벌이 된 자들이므로 비록 비틀어졌긴 해도 순수 자본가 출신인 돈주와는 큰 차이가 있다. 정말 금수저와 비슷한 뜻을 가진 것은 중국의 얼다이뿐이다.
5. 관련 링크
- 北경제 틀어쥔 ‘돈주’… 당국 비호 속 자본주의식 경영
- ‘제재할 테면 하라’는 北… 평양 상위 1% 부자가 증언한 호화생활
- 부의 사다리에 오르다…북한 자본가 돈주① [곽인옥 교수의 평양 시장경제 리포트]
- 부의 사다리에 오르다…북한 자본가 돈주② [곽인옥 교수의 평양 시장경제 리포트]
[1] 한국돈 약 1,330만 원 쯤되는 작은 돈이다.[2] 단 지역마다 돈주가 될 수 있는 기준은 다르다고 한다. 밀무역이 원활한 북중국경과 핵심계층이 사는 평양의 돈주 기준은 여타 지역보다 높다.[3] 보통 5만 달러 쯤 되어야 소(小)돈주 취급을 받을 수 있으며, 10만 달러 이상을 보유해야 중(中)돈주로 대접받을 수 있고, 100만 달러 이상을 보유해야 대(大)돈주로 대접받을 수 있다고 한다. 100만 달러면 한국 돈으로 13억 원 쯤 되는 돈인데, 북한에서 대(大)자본가로 대접받지만 막상 한국에서는 중산층 정도라는 점에서 남북 간의 경제격차를 느낄 수 있다.[4] 그 중에 사실상 중산층인 소(小)돈주를 제외하면 진짜 돈주는 10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5] 평양의 인구는 약 290만 명이다.[6] 대부분이 평안북도와 함경북도의 북중 국경에 존재한다고 했다. 양강도와 자강도도 북중국경에 있지만, 양강도는 영역 대부분이 개마고원이라 시장을 제공할 인구가 많이 없고 자강도는 군수공업이 중심산업이라서 로동당의 감시가 심해서 돈주가 많이 없었다고 한다.[7] 돈주에 대한 탄압은 장마당에 대한 탄압과 역사를 같이해서 상당히 오래되었지만, 북미회담이 실패한 2018년부터 그 강도가 상당히 강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배급제를 회복하지 못해서 돈주의 숫자는 계속 늘어났다고 한다.[8] 군인 노동력은 임금이 필요없는 공짜다.[9] 북한은 21세기에도 부실시공과 건물 붕괴 사고가 흔하지만 남한은 세계 곳곳의 마천루 공사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다.[10] 북한 화물선들이 외국의 추적을 받으며 쇠락하고 있지만 한국의 운송업은 우수하다.[11] 디폴트를 선언한 지 오래인 북한 경제와는 달리 한국의 국제 금융 신용도는 안정적인 편에 속한다.[12] 기껏해야 어뢰정이나 프로토타입 전차나 만드는 북한과 달리 남한은 대우조선해양 등 세계적인 조선기업들이 여럿 남아 있고 지상 중공업 기업들도 자주국방을 위해 다양한 군사장비들을 양산하고 있다.[13] 남한은 북한의 주요 농업장비인 28마력 천리마 트랙터보다 훨씬 우수한 농업장비를 이용하고 있지만 농업 여건의 변화에 한국산 장비의 성능이 알맞지 않으면 수입산 장비로 농사를 짓기도 한다. # 다만 북한은 이쪽은 사정이 나을 가능성이 있어 구 동독은 그나마 협동농장의 잔재로 미국 같은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여 생산성은 구 서독보다 좀 높다고 한다.[14] 이들도 또 다른 돈주다.[15] '거품'은 북한 국가보위부의 3국 해외반탐국에서 간부 운전수로 10년간 근무한 탈북자 구대명이 출간한 회고록이다.#[16] 주성하 기자에 따르면 이게 비유가 아니라 북한은 제대로 운영되는 은행이 없으므로, 돈이 정말 많은 간부는 차명으로 아파트를 사서 그곳에 쌓아둔다고 한다.[17] 북한의 경제 사정을 고려하면 정말 어마어마한 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