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Vinalon/Vinylon1939년 리승기 박사와 사쿠라다 이치로(桜田一郎)[1], 카와카미 히로시(川上博) 등이 당시 일본 제국 교토제국대학 타카츠키(高槻) 화학연구소에서 만든 세계 두 번째 합성섬유다.[2]
1935년에 개발되어서 1938년 발표한 나일론에 자극을 받아 나일론 발표 1년 만에 폴리비닐 알코올(polyvinyl alcohol; PVA)에서 개발했으며 가볍고 질기고 화학약품에 강하면서 천연섬유에 가까운 특성을 지녔다.
본래 비닐론(Vinylon)이라고 했지만 리승기가 북한으로 넘어가서 이를 보급하자 김일성이 비날론(Vinalon)으로 개명했다. 김일성이 "옛날 우리 조상들이 무명낳이(무명을 짜는일) 할 때 날실, 들실이라고 말했다"고 하여 '우리 맛이 나게' 비날론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비날론'이라는 명칭은 북한에서만 쓰이고 다른 나라에서는 그대로 비닐론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도 정식 명칭은 비닐론이지만 북한의 임팩트가 상당히 큰데다[3] 비날론이라는 이름이 주는 묘한 어감(…)[4]으로 인해 비날론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2. 특성
북한의 풍부한 석탄과 석회석[5]을 원료로 하고, 부산물로 각종 화학 원자재가 나오기 때문에 공업과 연계되고, 자체발명 & 자체생산이라는 점이 체제 선전에도 좋아서 김일성의 구미를 당겼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북한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는 옷을 국가에서 직접 배급했으니 김일성 시기에는 편의성과는 별개로 쓸모가 있는 섬유이기는 했다. 이른바 주체사상의 상징인 "주체섬유".비날론 공업은 완전한 우리의 주체적 공업입니다. 그것은 첫째로 비날론을 발명한 것도 조선 사람이고 그것을 생산하는 공장을 설계하고 건설한 것도 조선 사람이기 때문이며, 둘째로 우리나라의 풍부한 원료에 의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김일성
- 김일성
하지만 단점도
그리고 화학 약품에 강한 특성 때문에 염색이 잘 되지 않았다. 따라서 단순한[6] 색으로밖에 만들 수 없었고 그나마 젖은 상태에서 다리미로 다리면 탈색되었다. 게다가 비날론 옷은 뻣뻣하여 착용감이 좋지 않으며 너무 번들거리고 쉽게 줄어든다.
좀 더 화학적으로 생각해 보면 어디가 문제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비날론은 폴리비닐 알콜(PVA)에 포름알데하이드를 반응시켜 합성한다. 문제는 여기서 PVA가 하이드록실기(-OH)를 가지기 때문에 물에 잘 녹는 수용성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의류용 비날론은 포르말화 과정을 통해 하이드록실기를 어느 정도 없애 친수성을 줄인다.
게다가 PVA는 수용성이라서 지용성의 화학 약품이나 유기용매에 반응하지 않는다. 이 특성을 이용해서 다른 용매에 저항성을 가지는 용도의 코팅이나 각종 공정에는 유용하게 사용되겠지만 이걸 범용수지로 쓴다는 건… 근데 이걸 섬유[7]로 만들었으니 실용성이 없다시피한 게 당연하다. 사실 북한의 경제가 멀쩡했을 적에는 국가가 직접 옷을 배급해주었고 비날론 옷을 공짜나 선물로 얻은 옷으로 보면 나쁘지는 않기 때문에 수요는 있었지만 1990년대에 북한의 섬유산업이 배급제가 마비된 이후로는 옷을 자기가 알아서 사 입는 시대가 오며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한창 때에는 주구장창 입었던 것이 비날론 옷인지라 아직도 작업복으로 쓰이거나 중년층 이상에서는 비날론 옷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많다.
3. 역사
3.1. 리승기의 개발
1939년, 당시 리승기 박사는 '합성1호'라는 시제품의 개발에 성공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엄청난 자랑거리였다. 과학잡지 '과학조선'은 조선인 과학자의 대표적인 인물로 리승기를 지목했고, 종합잡지 '조광'(朝光)도 '세계의 학계에 파문을 던진 합성1호의 기염-리승기 박사의 고심 연구달성'(1939년 12월호)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실었다. 해방 때까지 조선인 출신으로 이학, 공학, 농학 등 이공계열에서 박사를 받은 인물은 우장춘, 리승기를 포함해 12명에 불과했으니 정말 드문 일이긴 했다.그러나 비날론은 상용화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하였다. 그 당시가 이미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 대전(태평양 전쟁)의 전쟁통이었기 때문이었다.
리승기 박사는 광복 이후 귀국하여 경성대학 이공학부 교수로 부임했으나, 1947년 국립서울대학교설립안(국대안) 파동으로 인해 교수직을 던지고 고향 담양군으로 내려와 있다가, 6.25 전쟁 직후인 1950년 7월 31일, 북한 산업성 부상 리종옥의 설득으로 서울대학교 응용화학과 출신 제자들까지 전원 같이 데리고 월북을 해버렸다. 이때 월북한 박사 출신으로는 도쿄제국대학 공업박사 최삼열, 도쿄제대 농예화학 학사, 화학과 박사였던 김량하 등 111명이었다. 당시 북한의 주요 과학자들 대부분이 월북 과학자였다.
3.2. 염화비닐/비날론 논쟁과 양산화
리승기는 흥남시 비료공장에서 근무한 적도 있으며, 이후 1960년 북한 과학원(평양)의 첫 번째 분원인 함흥분원을 설립해 함경남도를 산학협동, 비날론 산업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활동했다.1950년대부터 공업화가 시작되었다. 1951년 첫 공업화, 1958년 공장 건설이 결정되었으며, 1961년 5월 드디어 양산화(연간 2만 톤)에 성공한다.[8] 이 당시에 북한이 급속한 전후복구로 연 10%가 훌쩍 뛰어넘는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있었지만 면 생산을 늘리는 데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비날론에 많은 주목을 하였다.
당시 흥남 비날론 공장은 4월 1일에서 5월 6일까지 36일만에 건설되었다. 또 이 건설을 독려하기 위해 돌격대를 조직했는데 이른바 '8·28돌격대', '4·1돌격대' 등이 대표적이었다. 이때 벌어진 "비날론 속도", 속도전 운동은 하루 계획 목표의 3,500%를 달성해야만 비로소 '비날론 속도'라고 불렀다. 거꾸로 대입하면 35x36 = 1260일, 3년 반 동안 지어야 했을 공장을 36일만에 날림으로 지었다는 뜻이다.[9]
비날론 공업화에 대한 반대는 1950년대부터 꾸준했다. 니트론(아크리라)이나 나일론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폴리염화 비닐을 지지하며 비날론은 경제성이 없다며 반대한 려경구 박사[10]가 '귀족적인 섬유'를 지지했다며 사상검토를 받고 1977년 사망[11]함으로써 결국 비날론의 승리로 끝났다. “비날론은 면(棉)에 가까워 아이들의 옷으로부터 어른들의 의복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한 옷을 만들 수 있는 대중성 있는 섬유”라는 김일성의 논리였다.
황당한 점은, 비날론이 처음 개발되었을 때의 목표는 주로 나일론과 나일론이 대체하고자 했던 실크(비단)나 양모를 대체하는 것이었지 면을 대체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결국 비날론이 원료를 수입하지 않아도 되는 이른바 주체적인 섬유였기 때문에 선택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비슷한 예로 비스코스(인견, 레이온의 일종)가 있다. 목재나 갈대 같은 셀룰로오스로 만드는 섬유이기에 역시 북한에서 큰 지지를 받았다. 역시 비스코스도 수분의 침투가 쉬워 자체 무게의 무려 13%나 흡수한다고 한다.[12]
실제로 한국에서 사상 최악의 산업재해 사건 중 하나인 원진레이온 사태를 일으킨 바로 그 비스코스 생산 설비[13]가 원진레이온 및 기타 레이온 업체들의 줄폐업 후 헐값에 중국에 넘어갔고, 거기서도 수많은 인명사고를 낸 끝에 결국 북한으로 흘러들어가 사용 중이라는 증언이 있다.
3.3. 순천비날론련합기업소
자세한 내용은 순천화학련합기업소 문서 참고하십시오.1970년대 들어서는 북한의 베이비붐 세대들이 한창 사회에 진입하고 있을 때라 옷의 수요가 매년 크게 늘어나고 있었고, 기존의 공장만으로는 옷 수요를 총족시키기에 빠듯했던지라[14] 북한 수뇌부의 지시에 따라 기존 함흥에 있던 2·8비날론련합기업소의 2배 규모에 해당되는 평안남도 순천시의 순천비날론련합기업소를 1983년 4월부터 건설했다. 북한 정부는 이 공장이 완공되면 400여 가지 화학제품 생산이 가능하고 빠듯한 옷 공급도 크게 늘리는 등 경공업 발전의 토대가 되어 이밥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상적으로 만들었어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을 실험실 단계에서나 성공시킨 산소열병 기법을 무리하게 적용하려다가 건설비만 크게 불려놓았고, 결국 1989년 1단계 공사를 끝낸 뒤 건설이 중단되었으며 오래 지나지 않아 고철덩어리가 되어버렸다. 김일성이 승인했다는 이유로 겨우 실험실 규모에서만 성공시켰을 뿐 실용화 단계에서도 성공할지는 장담할 수 없었던 산소열법 공법을 수많은 과학자의 반대를 묵살하고 무리하게 대형 공업화한 것이 실패의 원인이었다. 하지만 이미 매몰비용만으로도 100억 달러를 날려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경제성보다 사상을 앞세우는 북한이라고 할지라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타격이었다.
또한 이 시기에 노동집약적 증산을 위해 산을 무리하게 개간했고, 거기에다가 소련이 붕괴되면서 석유와 비료를 헐값에 수입해올 길이 끊기자 발생한 전력난과 연료난으로 더더욱 농경지 마련을 위해 다락밭을 만들게 되었고 90년대 들어서는 민둥산에 대홍수가 끊이지 않게 되자, 그나마 돌아가던 기존 비날론 생산도 연이은 대홍수로 석탄 가격을 감당하지 못해 1994년에 이르면 모두 중지되었을 정도였다. 건설이 중단된 순천공장 안의 설비들은 1990년대 '고난의 행군' 기간에는 할 일 없는 직원들이 돈벌이를 위해 몰래몰래 뜯어내 중국에 팔았다.
정작 리승기 본인은 비날론 공장의 대규모 건설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는 탈북 과학자의 증언도 있다. 또한 리승기는 석탄화학 뿐만 아니라 석유화학의 중요성도 제기했지만 주체과학 때문에 묻혔다. 리승기 박사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흐른 1996년 2월 8일에 사망했다. 향년 90세.
3.4. 부활?
리승기가 사망하기 직전인 1990년대 비날론은 북한에서도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다.[15] 1950년대에서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는 북한에서 기본적인 의류품은 국가에서 직접 제공해주어서 입었고, 부족한 여분의 의류품을 백화점이나 장마당에서 몇 벌, 몇 컬례식 사다가 입었으므로 비날론을 대량생산하는 것 자체는 타당성이 있었지만 1990년대에는 전력난과 고난의 행군으로 비날론 생산을 비롯한 북한의 섬유산업 자체가 마비되며 비날론이 경제성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전기가 제대로 공급되어야 비날론을 만들 수 있는데 전기공급이 안 되니 비날론 소재의 옷을 제대로 만들 수가 없었다. 김일성의 경제 브레인으로 김정일의 눈엣가시였던 부총리이자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김달현의 운명은 비날론의 역사에서 상징성이 있다. 그는 이미 김일성 생전인 1993년 국가계획위원장에서 해임되고 김일성 사후엔 부총리에서까지 밀려나 2.8비날론연합기업소 지배인으로 좌천되었다. 한동안은 복권설이 돌았으나, 죽기 전까지 함경남도 인민위원회 참사로 머물렀다. 그것도 모자라 자력갱생 정책의 추진자인 연형묵[16]을 검열단장으로 보냈다. 김달현이 2000년에 죽은 것은 그를 두려워해 자살했다는 말까지 있었다.[17] 물론 이렇게 좌천되었다 해도 비날론 생산량을 제대로 늘렸으면 그래도 다시 눈에 들어올 법도 하겠지만 비날론 생산량을 늘릴 길이 없었으니 다시 눈에 들어올 일도 없었고 결국 김달현이 심장병으로 세상을 뜬 2000년에 공장은 가동을 중단한다.
2007년에는 김정일이 비날론 재건을 지시해 2010년 2·8비날론연합기업소가 2000년 이후 10년 만에 재가동에 들어갔다. 선전에 따르면 김정일은 인민들 입을 걱정이 없어졌다고 눈물을 흘렸다고 하며 "새로운 원자탄을 쏜 것과 같은 특대형 사변[18]이고 사회주의의 대승리"라고 한다. 2010년대인 지금도 "주체섬유"란 이름으로 CNC 등과 북한 공업의 핵심으로 주장되고는 있다. 하지만 북한 섬유산업이 재건되는 과정에서 북한의 의류업체들이 시장에 팔릴만한 제품들을 주로 생산하고 있고 비날론은 찬밥신세이다. 즉, 국가가 의류산업에 손을 댔던 때와는 패러다임이 바뀐 것인데 북한 당국이 이쪽에 손을 대기에는 애로사항이 많다.
그나마 CNC는 북녘에서 이런 걸 왜 아득바득 해서라도 장려했는지를 감안하면 최소 삽질은 아니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지만, 비날론은 국외수출에 전혀 도움 안 되는 실패작이다. 결국 이런 지시는 실제로 경제 개발이나 인민의 삶에 생각이 있기보다는 "변화는 없다. 개방은 없다."라는 상징적인 태도라는 것이다. 이를 이어받은 김정은 역시 마찬가지.
물론 순천비날론련합기업소는 손도 못 대고, 결국 고철 상태로 방치되다가 철거된 것으로 추정된다.
2009년 5월, 인공위성이 촬영한 '순천 비날론연합기업소'의 사진을 2004년에 촬영한 모습과 비교해보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북한 정권은 여전히 비날론에 미련을 못 버려서 석탄가스화를 통해 에틸렌을 직접 수급할 수 있게 되면서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고 우기고 있다. 기존의 연료먹는 하마였던 무연탄과 석회석에서 카바이드를 얻는 공정을 생략하고 에틸렌→아세트알데히드→아세트산→아세트산비닐→폴리아세트산비닐→폴리비닐알콜→비날론 의 과정을 거쳐 비날론을 합성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북한 매체는 이와 같은 에너지 절약형 공법으로 비날론 공업부문에서 사용되던 전력을 9만 8천 kW에서 1만 3천 kW로 끌어 내리는 데 성공하여, 약 70%까지 절약하는 데 성공했다고 주장하고 있다.[19] 그러나 암만 획기적인 에너지 절약 공법으로 생산을 한들 그렇게 해서 나오는 결과물인 비날론의 실효성이 꽝인 이상 별 의미가 없다.
4. 이용
사실 이렇게 실패사가 장황하게 쓰였지만 1960년대에 비날론 섬유가 공급되었을 때 주민들의 반응은 괜찮았다. 1950년대에는 면이 부족해서 갈대를 재료로 한 조잡한 섬유로 만든 옷이 지급되었고 이런 옷은 입기도 불편할뿐더러 통풍성도 영 아니었던지라 상대적으로 비날론이 나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1960년대에서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생산된 의류품의 상당수는 비날론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북한의 중년층 이상은 이 비날론 옷에 대해 추억이 있는 경우가 많다.앞에서도 나왔지만 부산물로 폐기물이 너무 많이 나와서 친환경 공정 산업으로도 불합격. 사실상 석유가 부족하고 석탄과 석회석이 남아도는 북한 같은 환경에서나 만들 가치가 조금이나마 있는 섬유였다. 더군다나 북한의 섬유산업이 마비되고 중국산 옷이 북한에 대규모로 들어온 뒤로는 비날론을 걸레짝으로 쓰고 있다고 한다. 농담이 아니고 수용성이라서 수분 흡수가 좋아 정말 좋은 걸레라고 한다. 한 번 빨면 줄어들고 이물질이 묻으면 잘 떨어지지도 않는다나. 그런데 옷으로 만들면 땀 흡수가 안 된다고 하니… 거기에 보온성도 없다고 한다.
2010년대에 탈북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사실 1990년대 이후로는 몇 년간 생산이 중단되어 비날론 옷은 거의 중고품으로 돌아다니다보니 그리 이상할 것도 없기는 하다.
저도 북한에서 살면서 비날론으로 만든 옷을 입어본 적이 없습니다. 어쩌다 셔츠나 동복이 나오는데 너무도 번들거리고 주름이 많이 가서 탄광이나 광산 같은 데서 노동자들이 작업복으로 입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산사업소들에서 배를 견인하는 밧줄로 많이 사용하였고 청소용 밀대를 만들 때 썼습니다.
한편 일본에서는 비옷, 앞치마나 밧줄을 만드는 데 사용된다. 일웹에서 비닐론(ビニロン)이라 검색하면 대부분 밧줄 사진이 나온다. 첨언하자면 일본에서 비닐론 밧줄은 대개 비닐론 단일 재료만으로 만들다 보면 여러모로 불리한 점이 있기 때문에, 폴리에스터를 섞은 크레모나(クレモナ; 쿠라레(クラレ)사의 상표명)가 주로 쓰인다. 염색이 잘 되지 않는다는 특성이 사실인 것이, 염색되어 있는 크레모나 밧줄도 풀어보면 겉만 염색이 되어있고 속은 흰색 그대로인 채이다. 촉감은 나일론보다 훨씬 부들부들한 편이긴 하다.
5. 한국의 비닐론
지금은 더 이상 생산되지 않지만 한국에서도 한때 비날론이 생산되었다. 석회석이 풍부한 건 한국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다만 반공국가인 대한민국의 특성상 북한에서 만든 명칭인 비날론은 쓰지 않고 비닐론이나 미구론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1959년 8월 미진화학섬유공업사가 미국의 원조자금 47만 달러를 자본금으로 하여 부산에 비닐론 제조공장을 세웠다. 북한처럼 의복용이 아닌, 처음부터 산업용이나 이불솜 대용으로 용도를 정한 것이 특징이다. 초창기에는 원료를 일본에서 수입해왔고, 북한과 달리 석유를 이용해 석회석에서 원료를 뽑을 계획이었다. 관련기사
물론 한국은 북한처럼 비닐론에 올인한 것이 아니고, 다양한 합성 섬유 기술을 도입하여 생산했기에 북한 같은 문제는 벌어지지 않았다.
이후 미진화학은 한국비닐론으로 회사 이름을 바꾸고, 한국 유일의 비닐론 제조 업체가 된다. 1969년에는 생산시절을 확충하여 비닐론 파이버를 생산하는 등 꽤 잘 나갔다. 관련기사. 그러나 1970년에 수입제품에 밀려 비닐론 파이버의 판로에 차질이 생기고, 종업원들의 월급도 3개월 밀리고, 공장 가동이 중지되는 등 한바탕 난리를 치렀다. 결국 다음해인 1971년 산업은행의 관리하에 공장 가동이 재개되었다.
이후 1973년 당시 한국철강 회장이었던 신영술이 한국비닐론을 인수, 동양비닐론을 세운다. 그러나 1975년 신영술은 재산을 해외로 빼돌리려고 하다가 적발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처음으로 재산해외도피를 적발한 사례라고… 이런 상황에서 비닐론 제조업이 제대로 진행되었을 리 없다. 공장은 계속 파행으로 운영되다가 1978년 11월 25일 폐업했다.
한편 1976년 남양자재가 일본과의 합작으로 이리(현 익산)에 비닐론 실 생산공장을 세웠으나 1994년에 폐업했다. 따라서 1994년 이후로 대한민국에서 비닐론은 생산되는 곳이 없다.
6. 비날론 남북합작?
그 이후에도 여기에 가치가 있다고 투자하는 남쪽 사업자들이 있었다. 2001년 코리아 비날론의 경우인데, "비날론은 폴리비닐알코올 합성섬유 중에서 유일하게 물에 녹는 데다 인체에 무해해, 인공 장기·건축자재·암치료 등에 이용될 수 있는 미래형 소재로 "완제품과정을 거쳐 액정표시장치(LCD)나 석면 대체용 고강력사 등의 소재로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으며 인공뼈 항암제 등 생명공학제품용으로도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하지만 사장은 6년 뒤 고양시의원이 되었다. "남북한 간의 협력사업은 상당히 신중히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 역시 북한과 사업을 하면서 우리와 다른 시스템 때문에 고생도 많이 하고 회사 자금도 상당히 지출하였습니다."라는 대목을 보아 사업에 성공하지 못한 것 같다.
2001년 당시에는 "북의 기술 수준은 일본과 함께 세계 최고입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북한의 박사급 인력이 많아봤자 산업적으로는 쓸모가 없다.
불순물이 문젠데… 그러나 북에서 보낸 비날론 샘플을 검사해 봤는데 불순물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자체적으로 불순물 제거 기술을 개발한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일본은 1950년대부터 쿠라시키 레이온(현 쿠라레), 닛신방적 등의 기업을 통해 유사한 섬유를 생산하기 시작했으며 현재도 쿠라레(Kuraray, クラレ)사가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 북한과 달리 일본의 비닐론은 석탄이 아닌 석유로 만든다. 그게 에너지 소비가 훨씬 적기 때문이다.[20]북한은 석탄 생산량이 많은 데다가 석유를 수입할 여건이 되어있지 않다는 점 때문에 여전히 효율성 최악인 석탄으로 비날론을 만드는 것인데 그 비날론도 전기가 있어야 만드는 것이 문제점이었다. 요즘 세상에 반응공식을 몰라 거의 한 세기 전에 발명된 섬유를 못 만드는 곳은 없다. 공정이 관건인데 그 공정이 거의 한 세기 전 것에서 발전이 없다면… 물론, 북한도 그 공정을 개선하겠답시고 삽질하다 날려먹은 게 순천 공장이지만.
이렇게만 보면 비날론에 투자하거나 연구하는 사람들이 다 멍청해서 그런건가 싶겠지만, 꼭 그렇진 않다. 앞서 설명한대로 의류 소재로는 단점이 많지만, 용도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단점이 장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21] 접착력이 형편없지만 덕분에 쉽게 붙였다 떼는 용도로 쓰게 된 포스트잇이 대표적인 사례. 남한 역시 비날론의 원료인 석회석이 풍부하기에, 어떻게든 활용할 방법만 찾았다면 상당히 유용하게 쓰였을지도 모른다. 다만 인공 장기 소재니 뭐니 하는 건 좀 과장에 가까웠고 결국 이렇다할 진전은 없는 걸 봐선 실패한 듯 하다.
7. 관련 문서
[1] 리승기의 지도교수였다.[2] 참고로 일본 측에서는 비날론을 일본의 발명품이라고 여기고 있으며, 나 먼저 원리에 따라 발명자 명단에 사쿠라다 이치로를 리승기 앞에 뒀다. #[3] 후술하겠지만 단점이 너무 많아 (한국을 포함한)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에서는 사장되었고, 현재 생산하는 국가들에서도 대부분 아주 마이너한 합성섬유 취급을 받는다. 비닐론을 주력으로 생산하는 나라는 북한이 사실상 유일하다.[4] 김일성이 의도한 바이기도 하다.[5] 석회석과 무연탄에서 얻은 카바이드.[6] 색을 고른다 하더라도 고동색, 연갈색, 회색 같은 어둡고 칙칙한 색들밖에 못 써먹었다.[7] 별거 아닌 듯 보여서 그렇지 화학섬유를 뽑는 건 상당한 양의 수지가 가공되는 작업이다.[8] 같은 해 리승기는 1961년에는 사회주의권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레닌상까지 수상했으며, 1967년부터는 영변 핵개발 연구소로 북핵 개발의 총 책임자가 되었다. 화공과 출신이었으니 충분히 가능했을만한 일이었다. 물론 소장이니 직접적인 일은 안 했겠지만.[9] 물론 그때 한국이 북한의 속도전 가지고 마냥 비웃을만한 처지는 안 되기는 했다. 경부고속도로과 88올림픽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그야말로 속도전식으로 짓다보니 막상 개통되고나서는 보수하느라 추가 지출로 만만치 않은 예산이 들어갔다는 후일담이나, 시민아파트를 빨리빨리식으로 건설하다가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라는 참사가 벌어졌었고, 이 당시의 빨리빨리식 건축행태로 인해 많은 건물들이 부실한 채로 지어져서 1990년대 성수대교 붕괴 사고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등 여러 건축물 붕괴사고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긍정적으로 볼 때 간척사업을 벌일 때 폐선된 배를 이용해서 하는 에피소드도 있었지만. 물론 3500%의 '비날론 속도' 정도로 막장이지는 않았다. 와우아파트도 6개월은 걸렸고, 경부고속도로도 2년~3년은 걸렸다. 천리마운동에서 60일 전투니, 200일 전투니 하는 식의 날림에 비하면 양반인 셈.[10] 여운형의 5촌조카. 와세다대학 화학과 박사로, 광복 직후에 경성대학(서울대) 교수로 있었으나, 여운형의 딸 려연구의 증언에 따르면 여운형의 권유에 따라 1946년에서 1947년 사이 월북했다. 다만 이 증언의 신빙성이 적다는 의견도 있다. 려경구 역시 리승기의 월북을 몇 차례 설득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리승기의 과학원 원사 바로 다음 급인 과학원 후보원사를 지냈다.[11] 자살설이 있다. 나일론의 발명자 월리스 캐러더스(Wallace H. Carothers, 1896 - 1937)도 자살했다.[12] 그래서 비스코스는 때수건 원단으로 쓰인다.[13] 본래는 멀쩡한 설비였지만, 일본 등 외국에서 오랫동안 쓰다 노후화된 것을 원진레이온에서 헐값에 사들인 것이었다.[14] 여담이지만 8.3 인민소비품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양산되기 시작한다.[15] 소련이 한국과 수교를 맺음과 동시에 냉전에서도 미국에게 밀릴 대로 밀린 시기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소련이 북한에게 지원도 제대로 하지 못했을 걸 생각하면 북한 입장에선 답이 없던 때.[16] 사실 연형묵 역시 권력이 김정일에게로 넘어간 1993년 총리에서 해임되어 자강도당 책임비서로 격하되었으나 선군정치와 군수공장으로 부활해 1990년대 후반에는 노력영웅으로 복권했다.[17] 국정원까지 파악한 원인은 지병인 심장병이었다.[18] 사변이란 부정적 의미의 단어지만 북한에서는 60년대 이후로 긍정적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사변 참조.[19] 출처: 탄소하나화학공업과 인민생활[20] 이는 2차 대전 이전 유럽-일본의 석탄 중심 전력 고소비형 화공업에서 미국의 석유 중심 화공업으로 산업구조가 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해방 당시 남았던 노구치의 흥남비료공업의 설비는 물론이고, 리승기 박사도 2차 대전 이후로 새로운 산업기술 업데이트가 안 되었을테니.[21] 당장 일본에서도 북한처럼 옷으로만 안쓰지, 밧줄용으로는 잘만 쓰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