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11-29 13:27:25

경부고속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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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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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釜高速道路
Gyeongbu Express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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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방면
번영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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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 하이웨이
1호선
카프쿨레 방면
경부간선도로
파일:경부고속도로_지도.png
경부고속도로 노선도[1]
노선 번호
1번
기점
부산광역시 금정구 구서동 구서IC
종점
서울특별시 서초구 양재동 양재IC[2]
연장
416.05 km[3]
개통
1968. 12. 21. 수원 - 반포[4]
1968. 12. 30. 오산 - 수원
1969. 9. 29. 천안 - 오산
1969. 12. 10 대전 - 천안
1969. 12. 26. 반포 - 한남[5]
1969. 12. 29. 구서 - 동대구
1970. 7. 7. 동대구 - 대전
관리
파일:한국도로공사 CI.svg
왕복 차로 수
4차로 청성 졸음쉼터 - 옥천
6차로 구서 - 양산JC
양산IC - 경산
김천JC - 청성 졸음쉼터
옥천 - 회덕JC
남이JC - 옥산IC(~7차로)[6]
청주IC - 천안JC
8차로 양산JC - 양산
경산 - 북대구IC
북대구IC - 금호JC(~9차로)[7]
금호JC - 김천JC
회덕JC - 청주JC
천안JC - 천안삼거리휴게소(~9차로)[8]
천안삼거리휴게소 - 안성(~10차로)[9]
안성JC - 신갈JC(~10차로)[10]
신갈JC - 서울TG(~10차로)[11]
10차로 판교 - 양재
청주JC - 남이JC
안성IC - 안성JC
12차로 서울TG - 판교[12]
구조
나들목 41개소[13], 분기점 20개소[14]
터널 12개소[15], 휴게소 33개소[16]
주요 경유지
부산대구대전서울
1. 개요2. 개통 시기3. 구간4. 계획 입안과 건설
4.1. 한국의 고속도로 건설계획4.2. 건설 배경4.3. 공사4.4. 고속도로에 대한 무지4.5. 고속도로 반대론4.6. 건설비보다 많은 유지보수 비용4.7. 통행량 논란4.8. 비판
5. 개통 이후6.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지 않았다면?7. 구간별 정보 및 통행량
7.1. 수도권7.2. 충청권7.3. 김천/구미/대구7.4. 울산/부산
8. 연휴 이용 팁9. 선형 개량 및 확장10. 도로 통행 정책11. 주행 영상12. 기타 일화13. 관련 문서1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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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부고속도로의 경관, 상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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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서울-부산간고속도로 개통.jpg
개통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사진[17]
파일:판교의 오후.png
한국도로공사 제16회 길 사진 공모전 은상 수상작인 "판교의 오후" 작품.
출처: Studio Alux, 라이선스: CC BY-NC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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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만 온 겨레가 힘과 뜻을 한데 뭉쳐
이 나라 근대화의 길로 줄달음질 이 해는 왔네
보아라 저 험산 뚫고 뻗어가는 고속도로
대국토 건설의 맥박이 뛴다
건설의 노래
부산광역시 금정구에서 시작해 서울특별시 서초구까지 연결되어 있는 대한민국 고속도로.[18] 흔히 '국토의 대동맥'이라 불리며, 이른바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한국 고도 경제 성장의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교통량이 많고 단일 노선으로 총 연장이 가장 긴 고속도로다. 종축과 횡축이 적절히 혼합되어 대한민국을 대각선으로 완전 가로질러 통과하는 선형이기 때문에 서해안고속도로, 남해고속도로, 동해고속도로 등의 해안 노선을 제외하면 주요 축선으로 활약하는 웬만한 내륙 통과 노선들이 대부분 접속하게 되어 있을 정도니, 단순히 교통량이나 역사로만 볼 것이 아니라 실제 도로 연결망 차원에서 생각해 보아도 '국토의 대동맥'이라 불릴 자격이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노선 번호는 1번인데, 2001년 8월 25일에 노선 번호 체계가 변경된 후에도 기존 번호를 그대로 존치하게 되었다. 한국도로공사의 설명에 따르면 국토의 대동맥이라는 상징성을 감안하여 존치하였으며, 도로 선형으로 보아도[19] 굳이 개편된 노선 번호를 적용하기에 애매한 점도 한몫했다고 볼 수 있다. 지금 상황에서 굳이 노선 체계에 따라 번호를 매긴다면 구간별로 번호들이 모조리 쪼개져 버려서 경부고속도로의 상징성은 물론이고 명칭마저도 사라졌을지 모른다.

서울 ~ 대전 구간은 1번 국도, 대전 ~ 경주 구간은 4번 국도, 경주 ~ 부산 구간은 35번 국도 등을 대체 도로로 이용할 수 있다.

이 고속도로의 개통으로 대한민국에서 고속버스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전에도 장거리 버스가 운행되었으나, 좁은 산길에서 저속으로 운행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대한민국의 고속도로 중 최초로 버스전용차로제를 시행함으로써 효율성까지 높여 장거리 고속 수송이 가능하게 되었다.

전 구간이 아시안 하이웨이 1호선이다.

2. 개통 시기

개통 당시 영상[20]

3. 구간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경부고속도로/구간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7KeaG5E.jpg
경부고속도로의 구간
부산광역시 - 양산시 - 울산광역시 - 경주시 - 영천시 - 경산시 - 대구광역시 - 칠곡군 - 구미시 - 김천시 - 영동군 - 옥천군 - 대전광역시 - 청주시 - 천안시 - 안성시 - 용인시 - 평택시 - 오산시 - 화성시 - 용인시 - 성남시 - 서울특별시로 이어진다.
이런 S자 선형이 탄생한 이유는 경부선 철도 남동임해공업지구 때문으로,[21] 후에 경부선과 경부고속도로 수송량을 보완하기 위해 경부고속철도중부고속도로, 중부내륙고속도로, 대구부산고속도로, 서산영덕고속도로, 용인서울고속도로, 상주영천고속도로 등의 다양한 철도노선과 고속도로가 지어지게 된다. 근데 이래도 모자라서 중앙선 철도를 준고속으로 개량하고 이와 연계되는 동해선 철도를 복선 전철화 중이며 중부내륙고속도로와 유사 구간을 거치는 중부내륙선 철도가 현재 건설 중이다. 또한 제2경부고속도로라고도 불리는 세종포천고속도로가 현재 공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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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구간은 고속도로 노선을 따라 포도송이처럼 신도시와 택지지구들이 줄줄이 들어서 있는데, 위성 지도를 보면 서울을 중심으로 엄청난 연담 도시화가 진행되어 있다. 1989년에 개발 계획이 수립된 분당을 시작으로, 판교, 수지, 죽전, 구성, 신갈, 광교, 영통, 동탄, 세교 등 끝없이 이어지며 거대한 신도시 벨트를 형성하고 있다. 인근의 수원시, 성남시, 용인시 인구가 각각 100만명을 넘어섰거나 이에 육박하고 있으며, 강남구, 서초구, 화성시(동탄, 병점권), 오산시, 평택시, 안성시까지 포함하면 도합 500만여 명에 육박하는 인구가 인근에 집중되어 있다. 이 때문에 수도권 구간은 출퇴근 시간대만 되면 전쟁이 벌어진다. 다른 노선들은 명절이나 주말 등 특수할 때에만 밀리는데, 안성 이북은 정말 대책이 없다.[22] 특히 수원(신갈) 구간과 서울 구간설명할 필요가 없다.

경부고속도로라는 편리한 교통망 때문에, 정부의 신도시 정책 및 지자체ㆍ민간 건설사들의 택지지구 개발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것. 중앙 정부(한국토지주택공사에서 1990년대분당1기 신도시를 조성할 당시에는 나름대로 개념 있게 교통정책을 세워 분당 - 내곡간, 분당 - 수서간 고속화도로를 개통시켰고, 경부고속도로 4차로→8차로 확장도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다. 문제는 민간건설사에서 토지를 매입하여 교통대책은 나 몰라라 하고 만든 용인시 북서부(수지구, 기흥구) 등 아파트 개발 지역들. 교통대책은 물론 심지어 학교도 안 지으려고 온갖 꼼수를 부려 아파트 건설했고, 지자체 역시 이런 무분별한 개발 행위에 대해 체계적인 계획 수립 없이 건설 허가를 남발했다.[23] 결국 경부고속도로가 혼잡해지는데에 일조했다.

그 뒤로도 대전광역시, 대구광역시, 울산광역시 등 대도시들이 계속 이어져 있다. 더 놀라운 점은 서울에서 경부고속도로를 출발하여 최초로 나오는 충청북도 옥천군이다![24] 청주시청원군이 통합하고 세종특별자치시가 출범하기 전에는 충청북도 청원군이었다. 반대로 부산에서 서울 방향으로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광역시란 점을 제외하면 경상북도 칠곡군이 서울 방향에서 최초로 나타나는 군이다. 즉 서울 ~ 대전 구간 행정구역들이 모두 시이며, 경부고속도로상 군은 옥천군, 영동군, 칠곡군. 단 셋이다. 사실 개통 당시에는 대부분이 군(郡)이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하행선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 군은 경기도 용인군이었고, 상행선에서는 경상남도 양산군이었다. 용인과 양산의 시 승격은 둘 다 1996년으로, 시 승격 25년을 맞이하였다.

구미시, 경산시, 경주시 등의 중형 도시와 지방 중소도시(김천시, 칠곡군 등), 지방 소도시(옥천군, 영동군, 영천시 등), 경부선과 연계되어 있는 포항시를 포함하면 얼추 인근에 사는 사람은 서울·부산을 제외해도 1,300~1,400만 명이다.

4. 계획 입안과 건설

4.1. 한국의 고속도로 건설계획

일제강점기 이후 1960년대 중반까지 대한민국 교통 인프라는 철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950년대 중반 도로기술 공무원들이 미국의 도로 및 도로공사를 연수 시찰하면서 미국의 고속도로를 처음 접한 바 있으나, 당시 자동차는 부유층들이나 가질 수 있던 비싼 사치품이었던 데다가, 천문학적인 예산 소요 등으로 고속도로 건설은 꿈도 꾸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한편 1950년대 후반부터 국토종합개발계획의 필요성이 정부 내에서 논의되기 시작하여, 1960년에 이르러 국토건설본부가 설립되고 1961년 국토개발문제를 우선적 과제로 삼기 시작했다.[25] 이에 국토계획기본구상(1963년 7월), 국토건설종합계획법(1963년 10월 14일) 등을 통해 국토종합개발을 위한 제도적 기틀을 마련하는 한편 국토개발사업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러나 1960년대 초반까지 정부는 향후 수십년간 한국에 고속도로 따위는 필요없다는 한미합동조사위원회 등 국내외 전문가들의 용역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고속도로 건설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었다. 1960년대초부터 시행된 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물론 2차 경제개발계획에서도 철도 예산이 도로 예산의 3.5배로 책정[26]되는 등 그때까지 과거 일본처럼 철도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교통수단으로서 자동차 성능 향상과 보급이 눈부시게 이루어지던 당시 사회 전반에서 자동차 도로 확충에 대한 요구가 나오게 된다. 60년 중반 도로의 향후 수요 증가량, 도로가 여객, 물류 두 부분에서 철도를 압도한다는 전망들이 속출하면서[27] 1960년대 후반부터 정부도 전향적으로 이러한 요구와 전망을 수용했다. 1967년 국토계획기본구상이 수정ㆍ보완되어 대국토건설계획서(안)이 나왔고, 경인 6차선 도로(경인고속도로) 계획 등이 최초로 정부 문서에 명문화되기 시작했다.

주원 전 건설부 장관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은 집권 초부터 이미 고속도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1964년 서독 방문 당시 박정희는 굳이 - 쾰른 아우토반을 여러 번 왕복했다고 한다. 아우토반을 달리다가 잠시 차를 세우도록 하더니 수첩을 꺼내 서울에서 시작해 전국 주요도시를 잇는 줄을 쭉쭉 그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박정희 전기를 작성한 마이클 키온에 따르면, 박정희는 어느 날 고속도로에 관한 모든 자료들을 내 앞에 가져다놓으라 지시했다고 한다. 소련 등 공산주의 국가의 고속도로 관련 정보도 가리지 말고 전부 구해다 놓으라 지시했다. 그리고 그 자료들을 매우 자세히 읽으면서 직접 공사비를 산출해 보기도 했다고 한다.
파일:external/blog.joins.com/map.jpg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직접 스케치한 경부고속도로의 구상도
박정희 대통령은 구상도를 직접 스케치할 정도로 고속도로 건설에 열의를 보였고, 이후 1967년 12월 15일에 '국가기간 고속도로 건설 계획 조사단'을 발족시켜서 건설을 체계적으로 준비했다.

당시 국제부흥개발은행 총재 유진 블랙은 개도국이 고속도로를 건설하는데 돈을 쓸 필요는 없다는 이유로 건설 차관 발급을 거부하였다. 결국 차관을 확보하지 못한 정부가 건설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선택한 고육지책이 1968년 2월 29일 통과시킨 휘발유세 인상안이었다.

4.2. 건설 배경

하지만 건설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는데, 재정적, 기술적 문제 못지 않게 여론이 문제였다. 당시 연구와 용역조사에서는 후순위에 건설해야 할 도로라는 주장도 있었다. 위에도 언급된 당시 한미합동조사위원회는 서울 - 부산간 훼손된 국도를 다시 포장하는 경부 국도 포장 및 정비 사업이 완료되면 경부고속도로는 따로 필요하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경부 국도 정비사업이 계속 시행 중인 데다 조만간 사업이 완료될 예정이라, 국도와 경부선 철도가 있기 때문에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당시 건설부는 이러한 미국 의견을 수용해, 국도 포장 및 정비 사업이 완료되면 국도라는 대안을 사용할 수 있으므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효과가 그리 크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도 과제에서 제외되었다. 비상식적으로 막대한 규모에 무리한 자금 동원을 요구하고 있었기에 건설부는 비현실적인 계획으로 생각했고, 나중에 도로를 지을 수 있을 만큼 부강해지기 전까지 무기한 보류해 놓기로 결정한다.

이후 국제부흥개발은행의 한국 도로 인프라 건설 원조가 이루어진다고 하자 막대한 자금 동원에 숨통이 트여 불가능한 줄로만 알았던 건설이 가능해져, 고속도로 건설 이야기가 정부 부처에서 다시 제시되었으나 이는 큰 반항을 일으키진 못하였다. 1965~66년 사이 제안된 계획은 대전이 아닌 청주를 관통해 대구를 찍고, 마산쪽 길목을 통해 부산으로 들어오는 노선이었으나 이 당시에는 고속도로 관련 지식이나 다른 모든 게 열악한 상황이라 그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아 사안이 묻히게 된다.

당시 국토개발계획에서는 해외 전문가들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서울 - 강릉'과 '포항 - 목포'가 실질적으로 가장 필요한 고속도로로 고려되고 있었다. 허나 상황은 다음 2가지에 의해 급변하기 시작했다. 첫째는 새로 부임한 건설부 장관 주원이 원점에서 새로 짠 개발 계획 때문이었다. 주원은 여러 가지 국토 사정을 고려해,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1순위가 되어야 한다 생각했으며, 박정희를 설득해 끝내 건설안을 날치기로 재가받는다.

이러한 날치기 재가로 인해 야당은 "어떻게 예산안 편성도 안 되어 있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고속도로를 가장 먼저, 그것도 올해 바로 공사하자는 계획을 꺼내냐"며 주원의 자질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청문 과정에서 주원은 아무런 답변도 하지 못하고 쩔쩔맸다. 조작된 공사 대장이 제출되자 "내가 하라고 지시했다." 라고 발언하고, 건설 이유를 제시해 보라 하자 일본 문학 작품인 <호조키>의 바람이 불면 통장수가 부자가 된다는 내용을 인용해 그 이유를 설명하니 의원들은 전혀 공감을 하지 못했다.

결국 장관 사퇴를 촉구하는 항의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허나 정부 예산안 편성 없이도 삽을 뜰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국제개발부흥은행이 막대한 차관을 제공하기로 하였는데, 이 차관을 이용해 건설하기로 정부가 결정한 것이다. 이 때문에 투입 비용 대비 편익이 낮은 사업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한다고 건설을 반대한 경제기획원을 '국가 재정 투입을 자제하고, 차관으로 막대한 공사비의 70%를 조달한다는 조건'으로 시행하겠다는 제안'을 내걸어 끝내 동의를 받아내는 데 성공한다.

당시 국가 최고의 싱크탱크였던 경제기획원도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자금을 차라리 다른 산업에 투자하는 게 훨씬 이득인데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반발이 심했는데, 국제개발부흥은행으로부터 싼값에 차관을 들여 건설비의 70%를 해외 자본으로 유치할 수 있게 되자 끝내 승인을 내준 것이다. 건설 이후 7년간은 거의 쓰이지 않고 비어 있어 관광하려고 만들었냐는 언론사들의 비아냥을 받았으니 당장 1순위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자는 주장에 반대한 경제기획원이 틀리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국제부흥개발은행은 유진 총재가 개도국이 고속도로를 건설하는데 돈을 쓸 필요는 없다며 차관 발급에 제재를 걸었고 결국 자금을 국제개발협회에서 받아와야 했는데 국제개발협회는 본인들 건설안을 수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원금 지급에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여, 결국 대일보상청구금과 유류세 인상 등으로 건설 자금을 메꾸게 된다.

노선안이 대강 잡히고 공사 시행이 떨어지자 경부고속도로의 혜택을 못 받는 호남 지역과 강원도 기반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강한 반발이 터져 나왔다. 노선안이 복선화 완료된 철도가 지나는 지역을 거의 그대로 통과하니, 심지어 일부 영남 정치계에서도 강하게 반발하였다. 이러한 불만을 무마시키고자 기존 청주 외곽을 지나가던 노선을 아예 대전 중심으로 변경하여, 대전을 분기점으로 호남고속도로를 건설해 주겠다는 약속을 해 호남 정치계 반발을 무마하려 하였다. 이 대전 분기는 호남고속도로 총연장을 줄여 건설비를 절감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리고 포항 - 목포간 고속도로 계획은 경부고속도로 계획 때문에 아예 증발해 버렸으나, 영동고속도로 계획은 그대로 유지하기로 결정해 강원도의 반발을 잠재웠다. 그리고 원래는 울산과 경주, 포항을 별도로 차기 고속도로 노선으로 이으려 계획했으나, 주원 장관 노선안[28]으로 인해 이들 도시들로부터 강한 반발이 터져 나오자 선형을 공사비 증대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경주쪽으로 꺾어 아예 처음부터 경주와 인근 도시들을 경부고속도로 권역에 포함시키는 방법을 써 불만을 잠재운다. 참고로 원래 계획했던 차기 고속도로가 바로 현재의 동해고속도로로, 본래 계획은 부산 - 울산 - (경주) - 포항 였으나 뜻하지 않은 경부고속도로 우회로 인해 동해고속도로는 현재 경주를 통과하진 않는다.

실질적 모태는 대구 - 부산간 고속도로 계획에서 출발했다. 주원이 한국 2대 산업벨트로 경인벨트와 낙동강벨트를 제창한 걸 고려했을 때 대구 - 부산을 경인권에 비견 가능할 하나의 경제 권역으로 엮으려고 했던 게 확연히 드러난다. 박정희가 직접 헬기를 타고 전 국토를 다니면서 노선안을 디자인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KTV 국민방송에 따르면 이는 헬기를 타고 노선 확정지역 순시를 하고 다니던 사실이 와전된 것이다. 노선안은 주원이 작성했고, 박정희는 지도를 챙긴 뒤 헬리콥터를 타고 노선 확정지역을 시찰했다고 한다. 윤영호 대령 등이 시찰단 수행원으로 활동했는데, 시찰단의 주요 활동은 이 구간에 터널을 뚫을까 말까 등을 고민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4.3. 공사

고속도로 공사가 처음이다 보니 재원 조달에 앞서 도대체 얼마의 건설 예산이 필요한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그나마 공신력이 있어 보이는 곳들에 예산안을 내놓게 했는데, 건설부가 650억원(후에 450억으로 재조정), 현대건설이 380억원(혹은 280억원[29]), 육군 공병감실 490억원, 경제기획원 기권, 서울특별시 180억원이었다.[30] 최종안은 아무래도 해외 고속도로 공사 경험도 있는 현대건설 안에 가까운 330억원으로 결정되었다. 실제 비용은 이보다 100억원 더 추가한 430억원이었다.#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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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준공된 경부고속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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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공된 경부고속도로에 술을 뿌리는 박정희 전 대통령
어쨌거나 많은 반대와 우려를 무릅쓰고 경부고속도로는 건설되었다. 과거 정권의 치적 중에서도 유독 자주 거론되는 편인데, 이는 그 시기 개발 정책을 대표하는 기념비적인 구조물로서 단순한 고속도로 이상의 의미를 가졌기 때문이다. 먼저 완공된 고속도로인천서울을 연결하는 정도였던 것에 반해, 국토를 종으로 꿰뚫는 한국의 대동맥이자 고속버스 탄생과 함께 전국을 반나절 생활권으로 만듦으로써 한반도를 심리적으로 가깝게 해 줬다. 그래서인지 강준만은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에서 전태일과 함께 '1970년대를 상징하는 두 가지 중 하나'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전태일이 1970년대 산업화의 '암(暗)'이라면 경부고속도로는 '명(明)'을 상징하는 것이다.

공사 중 희생된 사람들은 공식으로 77명[32], 비공식적으로는 수백명이다. 건국 이래 최대 건설 사업이었던 만큼 희생자가 많았다.[33] 이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위령탑이 충청북도 옥천군 금강휴게소 부근에 있다. 그 이유는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에서 옥천군 청성면 묘금리까지 이어지는 대전공구 70㎞ 구간이 난공사 구간이었고, 특히 가장 악명 높았던 당재터널(現 옥천터널)도 이 근방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영동터널은 아직도 옛 토목 기술을 느낄 수 있고 내부에 요철이 있다. 현재 확장으로 인해 다른 구간으로 대체되었고, 한때는 폐쇄되었으나 최근에 한 마을 진입로와 국도 진입로를 서로 연결하여 일부만 통행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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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재터널(現 옥천터널)
옥천군 금강휴게소 동남쪽 3㎞ 지점에 있는 당재터널 구간은 난공사 중 난공사였다. 해당 지역이 절암토사로 된 퇴적층이었기 때문인데, 발파 작업을 하면 토사가 무너져 내리기 일쑤였다. 처음 20m 정도 파고들어 갔을 때는 낙반 사고로 3명이 숨지고 1명이 중상을 입었다. 지금이야 이 정도 터널은 어렵지 않게 뚫을 수 있지만 당시의 토목 기술로는 한계가 있었다. 인근 주민들이 신령이 깃들었다고 믿고 있던 느티나무를 벤 군 책임자가 사고를 당하자 많은 작업자들이 일당의 몇 배를 더 주겠다는 시공사측 제안에도 불구하고 도망치기도 했을 정도로 마의 구간이었다. 결국 시공사인 현대건설이 흑자를 포기하고 공기를 맞추기 위해 20배나 빨리 굳는 데다 서너 배 튼튼하기까지 한 조강시멘트[34]를 현장에 전격 투입하는 한편 인부를 세 배로 증원해 공사 속도를 올려서[35][36] 개통 예정일 이틀 전에 겨우 완공했다. 정말 기적과 같은 공사였으며, 정주영이 조강 시멘트 사용을 과감히 결정하지 않았다면 절대 개통 예정일에 맞추어 완공하지 못했을 것이다.[37]

그렇게 어렵게 뚫었던 당재터널은 중간에 옥천터널로 이름이 바뀌며 30년 넘게 경부고속도로 구간으로 활약하였다. 아치형 터널로 경부고속도로를 한 번이라도 이용해 본 사람에게는 가장 인상 깊게 기억에 남는 구간 중 하나다. 2002년 선형 개량 구간이 개통하면서 옥천터널은 고속도로 구간에서 해제되었다. 현재 옥천터널 하행선은 지방도인 금강로의 터널로 활용 중이고, 끝에 아치 구조물이 함께하는 상행선은 사시사철 습도와 온도 변화가 크지 않고 안정적인 터널 특성을 이용하여 전세계 최대 크기의 터널 기반 스마트 팜으로 사용중이고, 최근에 상행선에서 영화 '터널'[38]을 촬영하기도 했다.

4.4. 고속도로에 대한 무지

건설될 당시 한국엔 고속도로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조차도 사람들 머릿속에 잡혀 있지 않던 시절이었다. 박정희 대통령과 그의 보좌진들이 예전에 아우토반을 구경하고 왔었어도 고속도로가 "그거 그냥 자동차가 빨리 다닐 수 있는 길 아니야?" 정도 말고는 아무도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나마 독일에서 고속도로를 구경하고 온 사람들이 가장 상황이 나았다. 고속도로 작동 원리는 몰랐어도 입체 교차와 신호등 없는 교통체계로 자동차가 빨리 달릴 수 있도록 한다는 개념은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한국에는 가장 기초적인 개념인 고속도로의 폐쇄식 영업체제와 톨게이트마저도 워낙 생소해 알던 사람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나마 여기서 조금 더 알고 있는 사람도 "철도와 똑같은 방식으로 작동하는 도로다."라고 생각했을 정도라고 하니 심각하기 그지없었다. 건설 당시 한국에 고속도로 논문이 딱 한 개 있었는데, 쓴 사람이 나중에 건설부 장관이 된 주원이었다고 한다. 그가 사실 건설부 장관이 된 이유도 당시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고속도로 지어주겠다 말도 했고 고속도로인가 뭔가 하는 것도 지을 때가 되었는데 한국에 고속도로 전문가가 주원밖에 없다고 하길래 앉혀 놓은 것이었다.

지금이야 고속도로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당시엔 고속도로에 대한 무지가 워낙 심했다 보니 웃긴 일들도 많았다. 고속도로가 수원 도심과 왜 떨어져 지나가냐면서 허리를 아주 제대로 꺾어서 수원 가운데를 지나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갑론을박이 벌어지는 바람에 결국 대규모 용역과 연구를 통해 고속도로는 무조건 수원 외곽을 지나가야 하는 게 맞다고 입증까지 해 준 끝에야 반대파들을 납득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고속도로에 대해 뭔가 알고 있기는 한데 얕게 알고 있는 사람들은 고속도로 운영 시스템이 철도와 비슷하다고 생각해 고속도로 인터체인지를 철도역 같은 거로 생각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당시 김옥현 천안시장은 천안IC를 제2의 천안역 같은 거라고 생각해, 지금 같으면 님비 시설이라고 주민들 단체로 건설을 반대할 고속도로 나들목을 천안 도심부 한가운데를 관통해 입지 좋은 곳에 설치해야 한다고 중앙정부에 추한 떼를 쓴 전적이 있다. 고속도로 IC는 도심부를 확장시켜야 할 목적이 없는 한, 도심부 바깥쪽에 지어야 정상인데 이런 어처구니없는 핌피가 나오니 기겁을 할 수밖에. 결국 지금도 웃긴 사례로 가끔씩 도로 교통 관련한 정부 보고서 같은 데 언급되면서 그 당시 천안시장은 자기 이름을 역사에 오래도록 알릴 수 있게 되었다.

4.5. 고속도로 반대론

이렇듯 고속도로 건설 자체가 당시 한국에서는 사상 초유의 거대한 사업이었을뿐더러, 당시 아시아 최고 경제대국이었던 일본조차 1963년이 되어서야 최초의 고속도로를 개통한 판국에 5년도 지나지 않아 한국에서 국토종단 고속도로를 놓는다 하니 각계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고 야당의 비판이 쏟아졌다. 위에서 보듯 고속도로 건설 구상은 기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없었기에 새로운 예산 승인 과정이 필요했는데, 예산 의결권을 가진 국회에서 야당은 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반대를 쏟아냈다.

당시 야당은 지역 편중론 등을 들면서 건설을 반대했다.[39] 설상가상으로 1967~1968년에는 남부 지방에 극심한 가뭄이 들어, 1968년 당시 야당에서는 경부고속도로 건설비를 가뭄 대책비로 전용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때의 가뭄은 한해지구(旱害地區)가 선포되고 영호남 통틀어 장기결석 학생이 20만 명, 전국적으로 이재민 돕기 운동이 벌어질 정도였다.[40] 참고로 당시의 가뭄은 영호남을 아울러 발생한 것이었고 야당의 한해대책비 편성 요구도 당연히 영호남을 아우른 것이었다. 이처럼 많은 비판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정부는 건설을 추진하였고,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건설되었는데 경제성장이 화두였던 시기에 빨리빨리식 공사가 일반적이었던 데다가 1971년 대선총선에서 압승을 거두려면 빨리 성과를 내세워서 보여 주어야 했으니 별수 없는 일이기는 했을 것이다.[41]

당시 건설 반대를 강력하게 주장했던 소장파 의원들 중에는 훗날 대통령이 되는 김대중김영삼도 있었다. 당시 신민당 의원이던 김대중도 1967년 12월 8일 국회 건설위원회에서 "가뜩이나 모든 투자가 경상도로 집중되고 전라도에서는 푸대접 운운하는 이때, 어찌 한쪽은 철도 복선(複線)이 있는 곳에 다시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파행적 건설을 할 수 있는가"라고 발언했다. IBRD 보고서를 근거로 "서울 - 부산은 철도망과 국도·지방도가 잘 갖춰져 있으므로 서울 - 강릉 고속도로를 먼저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영삼 등 다른 야당 인사들도 반대에 가세했다. 당시 유진오 신민당수는 1968년 1월 인터뷰에서 "경부고속도로 계획은 그 취지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나 현 경제 실정에 비춰 사업의 우선순위에 의문을 갖고 있으며, 남북 간보다는 오히려 동서 간을 뚫는 일이 급한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당시 언론도 대체로 비판 논조였다. 조선일보 등은 고속도로 필요성 자체는 인정하면서도 충분한 시간을 갖고 신중하게 추진하라는 '속도조절론'을 펼쳤다. 당장 사업비조차 제대로 추산이 안 되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조선일보는 1967년 12월 7일자 사설 '꿈의 고속도로 계획'에서 "부풀어오르는 꿈을 현실화시키는 데에 따른 그만큼의 난관을 각오해야 하고, 철저한 계획이 따라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공사비로는 국제적인 표준을 감안해 최소한이라도 600억(원)은 들 것으로 예상되는데, 그런 방대한 자금을 어떻게 염출하느냐가 또한 커다란 문제"라며 "충분한 대책을 세워 전 국민의 협력을 얻도록 하는 여유 있는 건설의 자세를 바란다"고 썼다.

동아일보는 1967년 11월 21일자 기사 '의욕만 앞선 경부 간 고속도로의 문제점'에서 "심각한 주택난 하나도 제대로 해소시킬 능력을 갖지 못한 우리나라 재정 형편에 어떻게 이처럼 방대한 사업을, 그나마도 4년 만에 완성시킬 수 있다는 건가"라고 했다.

사실 기껏 개통시켜 놓고도 이런 국가 역량에 대한 회의와 부정적 인식이 바로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전 구간이 개통된 1970년, 서울 지하철 1호선 건설을 놓고 다른 사람도 아닌 김학렬 경제부총리가, 그것도 대통령 면전에서 지하철을 건설하면 나라가 망합니다라는 극언을 올렸을 정도였고, # 서울에서 개최 예정이었던 1970년 아시안게임은 재정 부담을 이유로 반납해 1970 방콕 아시안 게임이 되어 버렸으며, 1988 서울 올림픽 유치 당시에도 남덕우 국무총리가 전 국민 앞에서 올림픽 망국론을 부르짖는 판이었다. 일본에서 1964년 개통된 고속철도를 1990년대 한국에서 도입하려 하자 얼마나 많은 반대와 난관이 있었는지는 지금 세대도 익히 알고 있는 일이다.[42] 지금도 수많은 저개발국에서 고속도로·철도, 지하철 같은 전시성 대형 인프라 사업을 제대로 완공을 못 하고 주저앉거나 있으나 마나 한 반쪽짜리를 대강 날림으로 지어 놓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한편 건설 당시 야당 의원들이 굴삭기 앞에 누워 공사를 방해했다는 이야기가 돌아다니나 이는 왜곡이다. 두 사람이 굴삭기 앞에 드러누운 흑백 사진을 뿌려 '김영삼, 김대중이 반대하며 드러누웠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합성이다.[43] 경향신문

지금 시점에서 당시 경부고속도로 건설 반대론을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 단견으로 취급하는 것은 옳지 않다. 60년대 후반 시점에서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필요성 만큼이나, 경부고속도로 건설 반대론의 주장도 일리가 있었다. 그리고 천만다행으로 당초 예상했던 고속도로 건설의 효과가 십분 확인되었으니 망정이지, 이런 주먹구구식 사업추진이 만에하나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면 대한민국의 운명은 겉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을 것이다.

4.6. 건설비보다 많은 유지보수 비용

개통 이후 유지 보수에 많은 비용이 들어서 건설을 반대했던 야당 측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유지 보수비가 많이 들었던 이유는 당시 도로 포장재로 사용했던 아스팔트의 품질이 좋지 않았으며, 노반도 고르지 않아 침하가 지속적으로 일어났으며 과적 화물차들이 다니면서 도로가 망가지는 것도 있었다. 1990년대 말까지 들어간 보수비는 약 1,527억원으로 건설비 4배에 가까운 비용이 들었다.

경부고속도로를 비롯하여 경인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 영동고속도로 등 산업화 시기 초기에 건설된 고속도로들은 모두 아스팔트 포장으로 건설되었다.[44] 이후 1980년대 중반에 건설된 88올림픽고속도로 부터는 콘크리트 포장을 사용했다가 최근에는 다시 아스팔트 포장으로 돌아가는 추세이다.

콘크리트 고속도로는 소음, 승차감, 접지력, 밝은 노면 색깔 문제 등으로 아스팔트에 비해 사고 위험 또한 높다.

이 많은 보수 비용은 사실 의도된 것이다. 박정희 정부에서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의 저서 '최빈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에 따르면, 박정희는 고속도로를 짓는 데 너무 많은 재원이 들기 때문에 일단은 싸게 짓되, 나중에 보수할 비용은 얼마 안 들 것이므로 '선 시공 후 보완'을 주장했고 이 전략대로 건설했다고 한다. 이 '선 시공 후 보완' 전략을 통해 공기를 어마어마하게 단축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건설 딱 10년이 되던 해에 보수비가 고속도로 건설비를 넘겨 버렸다. 1990년 말까지 경부고속도로의 보수비는 건설비의 4배 수준인 1,527억원에 달했다.#

도로를 유지·보수비가 건설비에 육박할 정도이므로 손해라는 지적이 많지만, 당시 고속도로 건설은 아무 기술없이 맨 땅에 헤딩하는 방식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직접 고속도로를 만들고 그것을 유지보수하면서 쌓은 기술력으로, 지금은 어떤 산이든 그냥 일직선으로 뚫어버리는 시공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특히 2020년 기준 누적 도로건설 해외수주액만 187조 7223억원으로 해외에서도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보수비용이 건설비보다 비싸다고 까이기는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1987년 개통된 중부고속도로 건설비가 1990년까지 경부고속도로 건설+보수비의 2배 수준인 4,000억원이 넘은 것을 보면 경부고속도로의 가성비는 세계구급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4.7. 통행량 논란

개통 당시는 자동차가 부유층 전유물이었던 시절이고[45], 물자도 별로 없었으니[46] 경제에 즉각적인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주장이 있다. 수송량이 유의미한 수준으로 올라선 건 70년대 후반이고, 80년대 초중반이 돼서야 경부선을 실질적으로 대체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간접자본 투자 사업은 그때 그때 필요한 순간 뚝딱 해결하거나 손쉽게 고칠 수 있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기획을 하는 것이 우선시되는 경우가 많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또한 1960년대 당시 대한민국의 사업 수행 능력치를 크게 넘어서는 감이 있더라도, 초고속 성장을 염두에 두고 미래를 위한 개발로써 정확한 방향을 잡은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당시 낙후된 도로로 인해 서울에서 부산까지 15시간 정도가 걸렸다. 김포에서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보다도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차가 오래 걸렸던 셈. 그러나 고속도로를 이용하면 5시간 이내로 엄청나게 단축된다. 고속도로는 국도처럼 정지했다가 출발하는 형태가 아니므로 당연히 기름값도 줄일 수 있다.

수송량은 절대적인 수치로는 당연히 적었고 별다른 변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국민 평균 소득 수준에 비해 자동차 보유세 및 유류세를 엄청나게 많이 매겨서 일반인의 자가용 보유 자체가 불가능한 시절이었기 때문에 1970년대 경부고속도로 영상이나 사진들을 보면 거의 트럭 아니면 고속버스들 위주로 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건설 목적 또한 소수의 자가용 운전자들 통행 편의가 아닌[47] 버스와 트럭들이 빠른 시간 내에 목적지에 도달하여 국가의 인적 및 물적 교류의 첨병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개통 당시에는 산업도로가 아닌 관광도로라는 비아냥을 들었지만 이후 울산, 구미 등지의 인근 공단들에서 본격적으로 물동량이 쏟아지면서 개통 4년 만에 화물트럭이 전체 운행량 과반수를 점하게 되었다. 수도권 근교 작물농업이 본격화된 것도 경부고속도로를 통해 서울 등 대도시와의 차량 접근성이 좋아진 영향을 크게 받았다.#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 역시 고속도로 개통으로 탄력을 받으면서 1965년까지만 해도 연간 100대 수준이던 한국 자동차 생산량은 1970년에 이미 3만대에 육박해 북한을 추월했고 현대자동차포니를 런칭한 1975년에는 4만대에 육박하는 등 탄탄대로를 달렸다.#

4.8. 비판

경부고속도로 공사 당시 사망자는 77명이다. 그리고 이 수치는 일용직과 미연고자를 제외한# 수치인 것을 감안하면 사망자 수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이 공사에 16개 업체가 참여했는데 그 중 도로 공사를 해 본 경험이 있는 업체는 단 한 곳 뿐이었다. 한 마디로 경험 미숙이 부른 참사였다. 둘째는 짧은 기간 안에 빠른 성과#를 내려 하다 보니[48] 계속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셋째는 장비가 부족해서 어지간한 작업은 전부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는 바람에 공사 규모 대비 인력이 많이 투입된 것이다.

이런 대규모 공사를 진행하는 경우 시간을 좀 더 두고 차근차근 해야 하지만 박정희 정부에서는 오직 '시간 안에 완료'에만 집착하다 보니 이렇게 많은 인명이 희생된 것이다.

5. 개통 이후

처음 개통했을 당시에는 "서울에서 아침을 먹고 부산에서 점심을 즐길 수 있다!"라는 말이 생겼다.

건설을 깎아내리는 측에서는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직전 1969년에 경부선 호화 특급열차인 관광호(새마을호)가 개통하면서 서울 - 부산은 최대 속도 4시간 45분 거리로 단축되었다는 사실을 든다. 하지만 기차였고, 당시 관광호는 하루에 몇 편 없어서 통일호를 이용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4시간 45분은 서울 - 부산간 최속달인데, 보통은 5시간 이상 걸렸다. 개통 당시 초호화 열차를 표방했지만, 수요 확보를 위해 관광호의 급을 조금 낮추고 중간 정차역이 추가되면서 점점 시간이 늘어났다.[49]

처음 건설되었을 당시만 해도 자가용은 부유층 전유물이었지만, 이후 국민소득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80년대 중반에는 중산층과 사회 지도층의 사이라고 할 수 있는 계층으로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가 있는 가정마다 자가용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경부고속도로 교통량도 폭증했다. 특히, 명절 때는 엄청난 교통체증을 유발했는데 1980년대 말 ~ 1990년대 초 명절 때는 서울 - 부산 소요시간이 10시간 이상, 심할 때는 20시간이 훨씬 넘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특히 설 명절은 눈이 내려 교통체증이 더욱 심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거대한 주차장이 된 경부고속도로에 갇혀 요즘만큼 성능이 좋지는 않은 라디에이터 열기로 몸을 녹이면서 밤을 지새웠던 경험을 한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서울에서 호남으로 귀향하는 귀성객들도 대전까지는 경부고속도로를 타다가 회덕 분기점에서부터 호남고속도로를 탔기 때문에 서울 - 대전 구간의 정체가 특히 극심했다. 보통은 회덕 분기점을 지나면 부산 방향이든 광주 방향이든 체증이 조금 풀렸지만, 설 명절에는 회덕 분기점 이후가 더 문제였다. 대전에서 대구 사이 소백산맥 관통 구간은 지리적인 이유로 눈이 자주 내려 설 명절 때마다 체증이 야기되기 일쑤였고, 호남고속도로도 왕복 2차로 구간도 있어서 눈이 내리면 체증이 심해졌다.

대체, 우회 도로는 고사하고 왕복 4차로[50]인 상황에서 자동차 숫자는 대책 없이 늘어났던 1980년대 말 ~ 1990년대 초쯤은 서울 - 부산이 22시간에 달해 거의 하루를 꼬박 고속도로에서 보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며, 서울 - 대전 구간이 확장된 1990년대 중후반에도 17시간이라는 만만치 않은 소요 시간을 자랑했었다. 그나마 4차로여서 이 모양이었지, 1994년까지도 여전히 전 구간 왕복 2차로였던 영동고속도로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극심한 체증을 완화하기 위해 중부고속도로를 시작으로 대체 고속도로들이 건설되었고, 경부고속도로도 지속적으로 확장하여 현재는 극심한 체증이 많이 줄어들었다. 1987년 12월, 서울 - 대전 구간 대체 중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서울 - 천안간 경부고속도로 체증이 다소 완화되었다. 그러나 경부고속도로와 중부고속도로가 합쳐지는 남이 분기점에서 극심한 정체가 발생했다. 2000년대 들어서 중부내륙고속도로논산천안고속도로가 뚫리면서 교통량이 많이 분산되었다. 오늘날에는 영남 내륙지방으로 갈 때 이용하는 중부내륙고속도로+서산영덕고속도로(청주 - 상주 구간), 호남 서해안 지방으로 갈 때 이용하는 서해안고속도로, 충남 내륙지방으로 갈 때 이용하는 논산천안고속도로 - 서산영덕고속도로(당진 - 대전) 등의 강력한 대체 도로들이 포진해 있다.

특히 명절 때는 정체 구간이 서울 - 대전일 만큼 워낙 길기 때문에 웬만해서 대전이나, 대구, 부산 쪽으로 가는 사람들은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하지 않는다. 명절 때 가장 막히는 구간이 서울 요금소를 지나서부터 신탄진, 회덕 분기점까지다. 조금만 더 가면 대전 나들목까지. 그나마 대전을 지나면 정체가 조금씩 풀린다. 그러나 대구쯤 가서 다시 막히기 시작한다.

1980년대에는 고속도로 요금에 지금보다 더 훨씬 서민들이 민감했다. 그래서 국도를 타고 왕복하는 여행길로 여행 계획을 하였으나, 계획을 여행중에 즉흥적으로 바꾸어 돌아오는 길만 부분적으로 잠깐 고속도로를 타서, 여행 경비를 통행료 문제로 계획보다 초과하더라도 여행의 피로를 덜자는 식에 일들이 빈번했다. 국도는 무궁화호, 고속도로는 KTX라는 인식 수준이 1980년대였다. 이런 인식이 당연한거 아니냐는 반론도 있겠으나, 지금은 여러분이 국도는 전철, 고속도로는 무궁화호로 여길 것이다. 그리고 1980년대 고속도로 휴게소에 있는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는 일은 거의 비상 주유로 생각하였다. 동네에 주유소보다 기름 값이 고속도로 주유소는 크게 티가 날 정도로 너무 비쌌기 때문이다. 1990년대에는 국도변 주유소들도 늘어나서 깡촌에서 주유 독점이 전국적으로 적어지고, 상승된 생활비 물가에 비해서는 기름 값이 상대적으로 비싸지 않은 시대가 되어서 이런 생각은 줄어들게 된다. 2010년대 이후로는 한국도로공사가 ex-OIL 브랜드의 알뜰주유소를 런칭하면서 오히려 일부러 고속도로 구간에서 기름 넣는 양상으로 바뀌었다.

특이하게 콘크리트 노면에 중앙분리대가 없는 네 구간이 있다. 첫 번째는 죽전휴게소 - 신갈 분기점 구간, 두 번째는 성환활주로 구간, 세 번째는 김천 분기점 서측 김천활주로 구간, 네 번째는 통도사 나들목 - 언양 분기점 구간이다. 이 네 곳은 비상시 활주로로 쓰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곳이다.[51] 이들 비상활주로가 생기게 된 이유는 유사시 군사용으로 사용할 목적도 있었겠지만, 건설 당시 항공관제가 지금에 비해 발달이 덜된 상황에서 혹시 모를 불시착에 대비한 측면이 더 강하다고 볼 수 있다. 대부분 비상활주로에는 보잉 747이나 에어버스 A340, A380 같은 대형기 이/착륙이 사실상 불가능하고, 보잉 737이나 에어버스 A320 같은 중/소형 기종만 가능한 경우가 많았다. 모든 비상활주로 끝에는 항공기 계류장이 있고. 현재 비상 활주로는 모두 해제됐고, 일부 비상활주로의 계류장은 현재 헬기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성환활주로 구간은 북천안 나들목을 만들면서 완전히 기능을 상실했지만 아직도 교통 안내에는 꾸준히 거론되고 있다.

공식적으로 한남대교 남단이 기점이었고, 2001년 8월, 전국 고속도로 체계를 정비하면서[52] 공식적으로는 부산광역시(구서 나들목)가 기점이 되었으며, 2002년부터는 종점이 양재 나들목으로 바뀌고 양재 나들목 북쪽(양재 - 한남) 구간을 경부고속도로에서 제외시켜서 서울특별시 고속화도로경부간선도로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53] 사실 서울시 구간이 단축되어 양재 나들목으로 종점이 변경된 것은 판교 나들목을 출퇴근 경로로 이용하는 성남시 분당구 주민들이 통행 요금 징수가 부당하다며 형평성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며 통행료 폐지 운동을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판교 나들목 통행료 징수 논란 문서를 참고 바람.

6.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지 않았다면?

사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우선순위 문제는 한때 논란거리였다. 이는 주로 1967년 IDA(국제개발협회)에서 종단노선보다 서울 - 강릉간 / 포항 - 광주간 고속도로 건설이 시급하다고 진단한 데서 기인한다. 이것은 당시에도 복선 철도를 포함하여 전국에서 가장 양호한 경부축 인프라 때문에 나온 주장이었으며 영호남간 경제 격차에 대해서 역사가 지난 현재에서야 비난을 받는 것이지 농업/경공업 중심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호남은 부촌이었다는 주장이 있다.[54] 당시 영남은 뚜렷한 인프라 설비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으며 이후 울산 자동차/화학 공단, 창원 산업지구, 포항 제철소 등이 갖추어지면서 격차가 역전된 것이다는 주장이다.

냉정히 말해 호남권은 영남권에 비해 지리적 위치 자체가 경제개발 우선순위에서 뒤쳐질 수 밖에 없었는데, 우선 호남은 영남에 비해 복잡한 해안선과 자잘이 흩어진 수천개의 섬들이 관광자원으로선 쓸모가 있으나 무역선들이 드나들기에는 너무 힘들어 이미 고려 및 조선시대부터 조운선이 가장 많이 침몰하는 지역이었다. 자원도 없고 기술도 없고 인구도 2,500만에 불과한 한국으로선 도저히 내수로는 잘살 가능성이 보이지 않아 거의 반쯤은 울며 겨자먹기로 국제무역을 통한 성장을 노린 것인데, 이러한 상황에서 단조로운 해안선과 깊은 수심, 훨씬 적은 수의 섬과 암초를 활용해 국제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영남 지방이 호남 지방에 비해 더 많은 투자를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IDA의 권위를 빌어오는 부분도 선진 공여국이 계획 입안-후진 수원국이 실행이라는 ODA(공적개발원조)의 기존 방식이 20세기 말 엄청난 실패를 겪고 21세기 들어서는 공여국의 인적 기반 양성 프로그램-수원국 주도의 개발계획 작성-공여국의 계획 지원이라는 패턴이 자리를 잡아가는 현실로 간단히 반박된다. 나아가 개발도상국끼리 협력을 한다는 내용의 남남협력과 3개 이상의 국가[55]/단체가 협력하는 삼각협력, 민간의 참여를 강조하는 PPP라는 방법이 쓰이고 있다. 이런 면에서 IDA라는 권위 있는 기관에 맞서서 선진국에 비해 그 완성도는 낮았지만 주도적으로 개발 전략을 설정하고 밀어붙인 후진국 한국 정부의 과거 경험과 이를 밀어붙일 수 있었던 개발독재 방식이 이른바 한국형 모델로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56] 오히려 한국이 선진국의 고속도로 계획을 그대로 수용했다면 그 도로를 통해 강원도의 석탄과 석회석, 전라도 곡창지대의 식량이 수출되고 단물만 빼먹히는 바나나 공화국 신세가 되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오늘날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나온 대표적인 현상이 수도권 집중이다. 당시 수출 상당수는 부산을 통해 여러 태평양 국가들을 상대로 수출하는 구조였다. 따라서 당연히 대한민국의 많은 인재와 자본이 모여 있는 서울과 수출 최전선인 항구도시 부산을 연결하는 도로가 꼭 필요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서울 - 강원도간을 빨리 건설했으면 몇몇 부유층 스키어들의 전유물이라고 비판받았을 확률이 100%다.[57] 그리고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기 전에 이미 수도권 인구는 증가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6.25 전쟁 이후 계속된 현상이다.

게다가 영동권에는 부산항을 대체할 수 있는 항구가 존재하지 않는다. 동해바다는 바닷가에서 항구로 쓸 수 있는 구역은 한정되어 있다. 대체로 움푹 들어간 만들이 풍랑을 막을 수 있고 매립 등 건설 비용도 많이 들지 않기 때문에 수심이 확보된다는 전제 하에 선호되며, 부산항이 대표적으로 남구, 영도구, 서구의 지형이 자연적 방파제 역할을 하는 항구이다. 반면 강원 영동권의 해안선은 단조로워 이런 만을 찾기 힘들다. 만 지형이 없으면 목포, 군산처럼 큰 하천 하구에 만드는데 강원 영동엔 그런 큰 강 하구도 없다. 이도 저도 안 되면 영일신항만이나 제주항처럼 아예 바다 한복판에 방파제를 쌓아서 어거지로 만드는 수가 있긴 한데 건설비 및 유지비가 엄청나게 드는 데다가 이것도 아무 데나 되는 건 아니고 매우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해야 하고 그나마도 큰 기능 제약이 존재한다. (예로 든 영일신항만도 부두 수심이 얕아 고민이다.) 이게 안 되면 지금 영동권 수많은 항구들처럼 옹색한 방파제 하나 두른 조그마한 항구밖에 못 짓는 것이다.

토목기술이 어마어마하게 발전한 지금도 그냥 맨땅에 항구 만드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고 영동권처럼 해안선은 단조로우면서 수심은 급격히 깊어지며 그렇다고 하구항을 개발할 만한 큰 하천도 없는 조건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포항 이북지역에서 그나마 항구다운 항구는 동해항 한 곳뿐인데 지금 한창 쪼그라든 부산 북항보다도 작으니 이런 곳을 국가 중심축으로 설정했으면 대한민국은 매일같이 동해안 항구들의 물동량 포화로 몸살을 앓으면서 이웃나라 허브항에 열심히 환적화물을 갖다 바친 채 경부선만 터져 나갔을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에는 그나마 욕 오지게 먹는 수도권 - 영남의 양대 축 형성도 아닌 완전 수도권 몰빵으로 전환되었을 공산이 크다.

그리고 한반도를 찾는 상선들은 말라카 해협에서 대한해협쓰가루 해협을 통과해서 북미로 향하는 축선에 걸쳐 항해할 가능성이 높은데, 그런 측면에서도 여기에 가장 가까운 대한해협 쪽에 큰 항구를 만드는 것이 합리적이다. 배는 육상교통이나 비행기보다 훨씬 많은 양을 실을 수 있지만 속도는 훨씬 느리기 때문에 항구는 배들의 접근성을 더 고려해야 하므로, 배들이 한참 돌아서 가야 하는 영동이 남동임해권을 대체하는 가정은 무리가 있었다.

한편 경부선 철도 인근 중심으로 개발했다면 일본처럼 철도 강국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종종 나온다. 한국이 철도 강국이 되지 못한 이유는 고속도로 위주로 개발한 이유도 있지만, 대한민국 철도청이 경부선 중심 편성체제로 가면서 정작 인구가 적은 타 지역은 열차 편성이 부족해지는 현상이 발생하여 결국 경부선을 제외한 모든 철도 노선이 쇠퇴했기 때문이다.[58]

그러나 1960년대는 대부분의 선진국에서조차 철도는 고속도로비행기에 밀려 점차 경쟁력을 잃어 가던 때였으니 한국에서 철도 투자가 지지부진한 것은 당연했다. 1964년에 개통한 고속철도가 사양산업 취급 받던 철도를 부활시킬 물건으로서 세계의 주목을 받았지만, 당시 고속철도가 있었던 나라는 일본뿐이었고 일본 이외에서 고속철도가 생기는 것은 1981년까지 흘러야 한다. 그 와중에 미국은 미국 전차 스캔들이라는 미국 교통역사상 최악의 흑역사를 저질러 놓아서 최악의 시장실패를 겪고야 만다.

사실 한국이 경부고속철도 개통 이후 철도에 전례 없는 투자를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고속철도를 통해 철도의 이점을 알았기 때문이 아닌, 고속철도 덕분에 신규 투자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경부고속선은 경부선 복복선화 대안으로 출발한 프로젝트였고, 고속철도라는 고부가가치 서비스가 시장에서 확실한 성공을 거둔 덕에 추가로 재원을 투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재 코레일의 고속철도 이하 등급 여객열차들과 화물열차의 처참한 경영 실적을 보자면 고속철도 등장 이전 철도 투자가 왜 답보상태였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사실 해외에서도 철도회사들은 역세권 개발이나 장거리 화물운송 및 철도망을 활용한 각종 유통사업 등을 통해 수익을 거두지 철도사업만으로는 제대로 수익을 얻기 힘들다.

중국 공산화와 냉전체제라는 특수한 조건하에서 남동임해벨트 성장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원료 수입도, 제품 수출도 모두 바다를 통해야 하며 그 최대 시장이 일본과 북미 대륙인 상황이다. 게다가 안보 문제까지 겹쳐 부산항이 대한민국의 생명선인 상황에서 주요공업지대로 동남해안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부산이 부지가 넓은 평야지대였다면 경부선 1축에 대한 집중투자로 어떻게 해 볼 수도 있었겠지만 동남해안은 백두대간 끝자락으로 해안가 소분지들이 좁은 회랑으로 연결된 지역이었고 결국 그나마 상태가 좋았던 경부선 권역 바깥으로 도시권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 권역의 여객, 산업운송까지 철도가 커버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인프라 투자를 요구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철도 중심 경제성장이라는 전략이 효용성있냐는 것이 옹호파의 논지 중 하나이다.

게다가 경부선 철도 역시 상당히 심각한 수준으로 포화되어 가고 있었던 당시 상황을 보자면 경-부 축선의 여객 및 화물 운송량 분담을 위해서라도 고속도로의 건설은 필요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경부고속도로 이외에 다른 고속도로가 지나가지 않는 옥천군영동군은 교통의 오지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59][60] 그나마 옥천은 통영대전고속도로 판암IC에서 4번 국도, 혹은 같은 노선의 추부IC에서 내려서 37번 국도를 타도 별 문제가 없지만[61][62], 영동은 아예 읍내에서 고속도로가 모두 떨어져 있어 교통의 오지 신세를 졌을지도 모른다.[63]

7. 구간별 정보 및 통행량

7.1. 수도권

수도권에서 서울 강남한남대교를 통한 사대문안으로 이동할 때 핵심 교통로로 활약한다. 버스전용차로를 이용하는 고속버스들을 비롯해 대중교통 수단인 M버스와 직행죄석버스도 상당히 많이 다녀서 거의 경기도 도시고속도로 수준이다.

교통량은 어느 수도권 고속도로와 마찬가지로 상당한 교통량을 자랑한다. 이 구간은 다른 고속도로들과는 다르게 왕복8~10차선으로 넓은 차로를 갖고 있어서 수도권 구간의 다른 고속도로보다 그나마 가장 통행하기 수월한 고속도로다. 교통량이 가장 집중되는 구간은 천안 분기점 - 양재 나들목까지의 86km 구간으로 평소시간대엔 천안부터 오산 나들목까지는 수월하게 이동할 수 있다. 하지만 기흥 나들목부터는 동탄 분기점에서 나오는 차량들이 집중되면서 교통량이 폭증하더니 수원신갈 나들목부터는 사실상 고속도로의 스펙만 가진 고속화도로 수준을 보인다.[64] 그러다가 서울 초입인 달래내고개를 넘어가면 양재 나들목이 나오면서 서울시구간이 시작되는데 그때부턴 매일 정체를 보이며 야간 빼고는 항상 꾸준하게 늘 엄청 막히며 원활한 날이 없다. 그나마 양재 나들목 이남구간으로는 용인서울고속도로 개통, 달래나고개 왕복10차로 확장, 가변차로 상시운영 등등 경부고속도로의 통행량을 최대한 보조하기 위한 노력을 한 덕분에 이 정도 수준에서 끝나는 것이다. 하지만 출퇴근 시간대에는 안성 분기점부터 서울까지 정체를 보이며 거북이 걸음을 하는 것이 다반사이다. 특히, 출퇴근시간대 신갈 분기점 구간과 달래내고개를 넘는 구간은 지옥이 따로 없을 정도다. 심지어 버스전용차로의 수많은 버스들이 줄지어서 막히는 것도 볼 수 있다.

현재 동탄JC ~ 기흥동탄IC 구간은 직선화공사로 지하터널을 공사중이다. 이 터널이 완공되면 동탄구간을 완전히 지하로 통과하게 된다.[65] 더불어 경부고속도로의 첫 터널이자 마지막 터널이 대전터널에서 이 지하터널이 될 전망이다. 근데 예전에 표지판에 2022년 6월 완공예정이라고 대놓고 적혀 있었는데, 공사가 장기화되면서… 아예 날짜를 지워버렸다.

7.2. 충청권

천안 분기점에서 호남권 교통량과 영남권 교통량이 분리되면서 통행량이 현격히 줄어든다. 그래도 청주 분기점까지는 영남권으로 가는 교통량이 일부 남아있어 적다고 볼 순 없으나 그래도 천안 분기점 이북구간 보다 훨씬 낫다. 남이 분기점부터 대전광역시를 통과하면서 다시 통행량이 늘어난다. 출퇴근 시간대 신탄진 나들목 - 회덕 분기점 일대는 상습정체구간이다.

이후 비룡 분기점을 지나면서 지방의 흔한 한적한 고속도로 모습을 보인다. 원래 서산영덕고속도로가 개통이 되지 않았다면 이 구간이 많이 붐빌 수도 있었지만 저 고속도로가 백업역할을 충실히 해주어 비룡 분기점 - 김천 나들목 구간은 많이 한적해졌다.

7.3. 김천/구미/대구

7.4. 울산/부산

울산 서부지역에서 양산을 거쳐 부산 금정구에서 끝난다.

언양분기점 이북으로는 확장 및 선형개량 공사가 완료된 이후 선형이 매우 좋은 편이지만, 언양분기점 이남으로는 선형이 좋은 편이 아니다. 특히 구서IC에서 양산IC까지는 도로의 고저차가 심하고 커브가 많아 빠르게 달리기 좋은 길이 아니다. 차로 수는 6~8차로로 많지만 전형적인 옛날 고속도로 느낌이다.

부산에 개통된 최초의 고속도로라 과거 부산의 관문 역할을 해서 그런지 금정구에 있는 톨게이트 이름이 부산TG이다. 하지만 통행량은 남해2지선 서부산TG가 훨씬 더 많다.[66] 지금은 여러 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인해 부산에서 타지로 나가는 가장 중요한 루트 역할은 하지 못하고[67], 주로 양산이나 경주를 목적지로 하는 차들이 지나가는 길이다.

8. 연휴 이용 팁

과거에는 설, 추석 연휴 기간에 서울 - 부산 간 20시간 이상 걸리는 것은 기본이었으며, 호남 쪽으로 가는 사람들도 죄다 회덕 분기점까지 와서 호남고속도로를 이용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회덕 분기점 부근은 정체가 매우 심했다. 요즘은 논산천안고속도로가 신설되어 호남 쪽으로 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천안 분기점을 이용한다. 대신 이곳의 정체가 매우 심해졌다.

요즘은 중부내륙고속도로가 생겨서 대구부산 쪽으로 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쪽을 이용한다. 중부고속도로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다. 대전이 목적지일 경우 중부고속도로를 이용하거나 국도를 이용하는 편이 좋다. 대구의 경우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하더라도 김천 분기점에서 타며, 부산까지 가는 경우에도 영동고속도로중부내륙고속도로, 상주영천고속도로를 통해 가거나[68] 김천 분기점에서 타는데 동대구 분기점까지 가서 대구부산고속도로를 이용한다. 아니면 아예 경부고속도로를 타지 않고 칠원 분기점까지 내려가서 남해고속도로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울산언양 분기점까지 계속 가는 방법밖엔 없다.

현재 명절 때 가장 막히는 구간이 서울요금소를 지나서부터 정확하게는 죽전 부근, 신갈 분기점부터 신탄진, 회덕 분기점까지이다. 신탄진이 서울 한남동에서 시작된 경부고속도로 버스전용차로가 끝나는 지점인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정체 길이인 것을 알 수 있으며, 고속버스들이 차로 변경으로 몰리면서 정체가 더욱 심해지곤 한다.[69] 여기서 더 막히게 되면 대전 나들목까지 쭉 정체나 지체서행이 이어진다. 그나마 대전을 지나면 조금씩 풀린다. 그러나 대구에 가까워질수록 조금씩 막히기 시작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흥, 오산, 안성 등에서 진입 통제를 한다.

추석, 설날 당일에는 대전 이남과 대구 이북인 옥천, 영동, 왜관, 칠곡에서도 정체가 나타난다.

대구 이남 부근은 반대인데, 귀성 때는 상행선이 많이 막히며, 귀경 때는 하행선이 많이 막힌다.[70]

9. 선형 개량 및 확장

경부고속도로 개통 이후 건설 기술의 발달 및 교통량 증가로 선형 개량 및 도로환경 개선이 꾸준히 이루어졌다.
  • 왕복 4차로 구간: 충북 옥천 ~ 충북 영동 청성 졸음쉼터
  • 왕복 6차로 구간: 충남 천안 천안 분기점 ~ 충북 청주 남이 분기점, 대전 회덕 분기점 ~ 충북 옥천, 충북 영동 청성 졸음쉼터 ~ 경북 김천 김천 분기점, 경북 경산 경산IC - 부산 종점
  • 왕복 8차로 구간: 서울 톨게이트 ~ 충남 천안 천안 분기점[71], 충북 청주 청주 분기점 ~ 대전 회덕 분기점, 경북 김천 김천 분기점 ~ 경북 경산 경산IC
  • 왕복 10차로 구간: 서울 양재 ~ 경기 성남 판교, 서울 톨게이트 ~ 충남 천안 천안 분기점[72], 충북 청주 남이 분기점 ~ 충북 청주 청주 분기점
  • 왕복 12차로 구간: 경기 성남 판교 ~ 서울 톨게이트

특히 추풍령 산악 지역을 가로지르는 대전 - 김천 구간은 완전히 새로 갈아엎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새롭게 직선화되었다. 초기 선형을 개량해야 했던 이유는 소백산맥을 통과하는 산악 지형 구간인데, 당시 토목 기술의 수준과 재정적 한계 등으로 커브길이 많았다. 1960년대 당시에는 한국 건설 회사들의 고속도로 건설 기술 및 경험이 거의 전무했던 상황[73]인데다 건설 자금도 부족했고 단기간에 완성해야 했다. 그래서 고속도로임에도 커브 반경이 겨우 300~400 m 수준인 국도급 급커브 구간이 상당히 많았다. 그래서 선형 개량 구간이 개통되기까지 근 30년 동안 대전 - 김천 옛 구간은 사고 다발이어서 제한속도를 80 km/h 이하로 제한[74]하는 구간들이 상당수였다.[75]

충북 옥천군 동이 ~ 청성 구간 11.5 km은 마의 구간으로 불리었는데 금강을 세 번 건너고 유명한 옥천터널을 지나는 이 구간은 뾰족한 산들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느라 급커브가 많았고 도로가 좁은 탓에 갓길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있던 장대교량 3개, 터널 1개에는 아예 없었다. 당시는 대체 도로인 중부내륙고속도로통영대전고속도로 개통 전이라 비좁고 위험한 도로가 넘쳐나는 수도권 - 영남권의 모든 도로 수송량을 감당해야 했으니 헬게이트가 따로 없었다. 당연히 사고도 많았다. 열흘에 한 번 꼴로 크고 작은 사고가 날 정도였고, 2002년에는 16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 구간을 기피하여 서울 ↔ 부산 등 원래 금강 구간을 다니던 일부 고속버스 노선들은 통영대전고속도로가 개통되자마자 중부내륙고속도로 개통 전까지 남해고속도로 - 통영대전고속도로 구간을 이용하기도 했다. 여기에 금강 2~4교 안전문제도 꾸준히 지적되었다.(보도영상) 선형 개량은 산악 지역에 터널 5개, 교량 6개를 설치하는 난공사라 1997년에 시작한 공사가 무려 6년이나 걸려 2003년에서야 완공되었다. 현재 옥천1~4터널, 영동1터널이 있는 구간이 그렇게 새로 만들어진 도로다. 하지만 아쉽게 이 구간은 선형 개량만 되었을 뿐, 여전히 왕복 4차로이며 확장 계획이 아직 없어 마지막으로 남을 왕복 4차로 구간이 될 것이다. 단, 터널과 일부 교량은 6차로 확장에 대비하여 만들었으므로 추후 확장 가능성이 있다.[76]

또 충북 영동군과 경북 김천 사이에 있는 추풍령 구간도 위험한 구간으로 꼽혔는데, 낮은 고개(고도 200 m)라 당시 기술로도 그냥 넘어가는 식으로 만들어서 경사와 커브가 심했다. 특히 2000년 7월, 경부고속도로 추풍령휴게소 부근 커브 내리막길에서 수학여행 버스들이 연쇄추돌하여 화재가 난 참사의 가장 큰 원인이 바로 초기 구간의 위험천만한 커브길 때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직선화 공사가 매우 시급하다는 사실을 공론화하는데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바로 다음 달에 예산이 배정되었다. 추풍령 구간에는 경부고속도로 최장 교량인 추풍령대교가 놓여 급경사와 급커브가 사라졌고[77], 황간터널 이설을 포함하여 김천 분기점 - 영동 나들목 구간 선형 개량 및 왕복 6차로 확장이 2006년에 완료되었다. 이로써 추풍령휴게소 부근 구간들 또한 왕복 6차로로 확장됨과 동시에 선형 개량이 이루어져 완전히 새길로 바뀌었다.

2015년 9월 대전 - 김천 구간에서 마지막으로 영동 나들목 - 청성 졸음쉼터 (7.1 km)간 6차로 선형 개량 및 확장 공사를 마침으로써 현재는 대전 - 김천 전 구간 모두 직선화가 완료되었다. 경주터널과 함께 개통 당시부터 현역이던 구 영동터널이 있었던 구간으로, 2015년 9월에 확장 및 이설 공사를 완료하여 폐도된 옛 구간을 가로지르는 고가도로인 금곡교와 영동2, 3터널을 경유하는 신도로로 대체되었다.

가장 최근인 2018년 12월 12일 정식으로 확장 개통된 언양 - 영천 구간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형사고가 나기도 했던 죽음의 도로였다. 기존 도로 옆에 새로운 도로를 덧대는 방식으로 확장 공사를 시행하였던 까닭에 폭이 일반적인 고속도로보다 훨씬 좁았으며 중앙분리대 및 가드레일과 주행차로가 거의 맞닿아 운전자들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는 구간이었다. 오죽했으면 영천 - 경주 구간은 4번 국도로 우회하고 경주 - 언양 구간은 35번 국도로 우회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을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나들목 역시 확장 공사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진출입로 및 가속차로가 대단히 짧아 하루에도 몇 번씩 아찔한 장면을 연출하는 아수라장이었다. 심지어 구간 단속을 걸어놓은 구간도 있었다.

지금은 임시 중앙분리대를 모두 철거하였으며, 나들목 공사도 완료하여 과거의 아찔했던 모습은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와 동시에 또 다른 구간 단속 구간이 생긴 것은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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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기준으로 개통이 50여 년을 바라보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왕복 4차로 구간이 남아있다. 옥천 - 청성 구간[78]이 그러한데, 사실 2007년에 청주상주고속도로가 개통하면서 차량이 분산되어 경제성이 떨어진 까닭에 지금까지 이뤄지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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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계속되는 노후화로 인해 생겨난 안전 문제와 농로에 심각한 교통체증을 유발하는 비좁은 통로암거는 날이 갈수록 문제점을 야기하였으며, 결국 민원에 이기지 못한 한국도로공사가 발벗고 나서게 되었다. 마지막 4차로 구간인 옥천IC - 청성 졸음쉼터 (15.8 km) 구간 중 일부(3.4 km)에 대해 2016년 12월 30일자로 공사 발주가 이루어졌으며, 2017년 4월 14일에 착공하였다.[79] 건설사는 성지건설로 정해졌으며 전 구간 6차로로 확장하며 2022년 9월 30일에 개통되었다.[80] 현재는 이미 확장에 대비하여 선시공을 해 놓은 소도교를 중심으로 공사가 이뤄지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나머지 12.4 km 구간 확장 공사는 아직 계획이 없었으나, 제1차 대한민국 고속도로 건설 5개년 계획 후보로 반영되어 있어 언제라도 추진이 가능하도록 여지를 남겨놓았다. 아마 2022년 이후 최후의 왕복 4차로 구간이 될 것이다. 다만 그 구간에 있는 터널과 교량 일부[81], 금강 나들목은 2003년 선형 개량 공사 때 왕복 6차로 확장에 대비한 형태로 만들어 두었기 때문에 추후 확장에 어려움이 전혀 없다는 것이 중론.[82] 그리고 2022년 제2차 대한민국 고속도로 건설 5개년 계획에 반영 되어 이 구간도 6차선 확장이 사실상 확정 되었다.[83] 따라서, 확장이 완료된다면 이젠 경부고속도로에서 왕복 4차로 구간은 완전히 없어진다.

그 외에도 동탄신도시 구간 직선화 및 지하화와 더불어 아산청주고속도로 개통에 대비한 천안JCT - 남이JCT간 왕복 8차로 확장 계획이 있는 등 미래에도 굵직한 확장 계획이 많이 남아있는 고속도로다. 그렇지만 수도권은 아무리 왕복 10차로로 확장해도 대한민국의 심장인 경부선이기 때문에 출퇴근시간엔 다 막힌다는 것을 알아두자.

10. 도로 통행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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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 하이웨이 이정표[84]
1994년 9월 17일부터 양재IC에서 신탄진IC까지의 하행선 구간에 대한민국 최초로 중앙버스전용차로가 지정되어 운영되기 시작하였고, 남청주IC에서 양재IC까지의 상행선 구간도 지정해서 운영한다. 1년 후에는 서울고속버스터미널(서울경부), 센트럴시티터미널(서울호남)서울남부터미널에서 시종착하는 고속버스시외버스의 통행 편의를 위해 시종점과 구간을 한남대교 남단~신탄진IC로 연장하였다.[85] 2008년 여름부터 수도권 구간의 대중교통 소통을 위해 한남IC~오산IC 양방향 구간에서 평일(월-금) 7시부터 21시까지 평일 버스전용차로 운영도 실시한다. 덕분에 광역버스와 고속버스 등의 소요 시간이 대폭 감소하였다. 그리고 중앙버스전용차로 때문에 고속도로에서 버스가 1차로로 주행한다는 인식이 박혀버려 버스들이 다른 고속도로나 중앙버스전용차로가 해제된 이후에도 1차로에서 계속 주행하는 지정차로 위반이 굉장히 심해졌다.

2010년 8월 30일부터 천안IC~양재IC(총 76 km) 구간 제한 최고속도가 100 km/h에서 110 km/h로 상향되었다. 최저속도는 50 km/h로 변동사항이 없다. 그리고 안전하고 원활한 소통을 위해 지정차로제 준수가 다시 한번 요구되었다.
1차로 추월차로
2차로 승용차와 소형 승합차의 주행차로
3차로 주행차량의 추월차로
3차로 1.5톤 이하 화물차 및 대형 승합차의 주행차로
4차로 주행차량의 추월차로
4차로 1.5톤 초과 화물차 및 건설기계, 특수차량의 주행차로
5차로 가변차로
이런 지정차로제는 모든 고속도로에서 시행하고 있는데, 1999년에 규제 개혁 및 화물차/승합차 차별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정치적인 이유로 폐지했다가 1년 만에 다시 시행하는 바람에 홍보가 덜 되어서 거의 단속하지 않았던 것뿐이다. 자세한 내용은 지정차로제 문서와 고속도로 문서의 지정차로제 문단에 나와 있다. 그러나 양재~수원신갈 구간은 통행량 대비 정체가 심해 차가 적어지는 늦은 밤이나 새벽이 되어서야 110 km/h를 낼 수 있어 실효성이 적다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출퇴근 시간대에 주행해 보면 2, 3차로같은 상위차로에서 80 km/h로 주행하는 운전자들 덕분에 [86] 최하위차로에서나 겨우 100 km/h 가깝게 속도를 낼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최하위차로에서 마구 달리면 상위차로 차량을 우측추월하는 행위이므로 불법이다. 이런 사람들 중 일부는 차라리 천안~부산을 110 km/h으로 상향하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주요 대체 도로인 논산천안고속도로, 서산영덕고속도로, 중부내륙고속도로, 대구부산고속도로와 속도가 연동되기 때문이다. 영동~옥천 등 남은 구간의 개량작업이 모두 끝나면 110 km/h로 증속할 가능성이 크다.

현실은 버스전용차로(실제 1차로)의 추월을 위해 1차로(실제 2차로) 역시 버스들이 넘나들면서 주행하고, 온갖 화물차가 1차로를 넘나든다. 덤프트럭이 1차선으로 들어오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못 믿겠다면 지금 신갈 부근의 CCTV를 틀어 보자. 출퇴근시간에는 추월차선에서 앞차와 간격이 얼마로 벌어지든 아랑곳하지 않고 100 km/h이하로 달리는 차들도 자주 볼 수 있다.

2010년대 들어 서울TG~안성휴게소 등 일부 구간에서는 갓길을 상시 주행하게 하고 있어 실제로 왕복 2차로씩 늘어나는 효과가 있다. [87]

11. 주행 영상

구서IC 방면 주행영상. 양재IC 방면 주행영상.[88]
구서IC양재IC 주행영상.[89]

12. 기타 일화

최초 교통사고는 1968년 12월 23일 발생했다. 당시는 부분개통 상태여서 일부 구간에 한해 차가 다닐 수 있었다. 주한미국대사관 차량이 서울 양재동 구간에서 앞 차량을 추월하려다 옆을 들이박고는 살얼음에 미끄러져 톨게이트와 충돌했다. 차가 완전 박살날 만큼 큰 사고였다고 한다.

배우 신성일은 속도광이었는데,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는 날, 속도를 맘껏 즐겨볼 요량으로 머스탱을 끌고 개통 즉시 시속 200km로 부산을 향해 질주했다고 한다. 그때 부산에서 개통 테이프를 끊고 서울로 올라오던 대통령 일행 차량이 있었는데, 신성일이 추풍령 지나 19분쯤 지났을 무렵 대통령 일행을 지나쳤다고 한다. 나중에 박종규 경호실장을 통해 당시 대통령이 "저 빨간차 몰고 휙 지나가는 놈 당장 잡아와라"라고 불호령이 떨어져 신성일은 큰일이 났지만, 당시 신성일이 유명 배우라 간신히 용서를 받고 넘어갔다고 한다. '저거 누구야?'라고 대통령이 묻자, 수행원이 '영화배우 신성일입니다.'라고 하고, '그 친구 오래 살라고 해' 라고 말했다는 바리에이션이 있는데, 전자는 겁을 주기 위한 농담으로 보이고 후자의 사례가 실제인 것으로 보인다. 평소 친했던 경호실장을 만난 건 사실인데 용서 구할 것도 없고 딱히 별탈은 없었다고 한다.

위기탈출 넘버원 31회[90] 어린이 에어백 안전사고 편에서 2003년 4월에 경부고속도로 오산 부근에서 추돌사고가 발생했었는데 조수석에 앉은 엄마는 가벼운 부상을 입은 반면 엄마 품에 안겨있던 4살 아이는 앞유리로 튕겨나가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소유한 국유 재산 중 가장 가치가 크다. 2020년 기준으로 경부고속도로의 명목상 가치는 12조 3000억원에 이른다.# 물론 경부고속도로의 경제적 파급 효과 등을 생각하면 이조차 과소평가라고 여길 수 도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시설물, 부동산 등의 도로 자체의 가치만을 따진 것이다. 다른 국유재산도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가치를 계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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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0년 자료로, 현재는 서울주JC함양울산고속도로동대구JC대구외곽선, 칠곡JC대구외곽선, 북구미IC가 새로 개통되었으며 동탄JC수도권2순환선 곤지암 방면이 연장 개통되었다.[2] 2002년 단축 이전에는 강남구 신사동 한남대교 남단이었다.[3] 최초 개통 당시엔 428km였으나, 확장 및 선형 개량 공사를 거치고 경부간선도로(한남IC ~ 양재IC)가 고속도로 구간에서 해제되면서 단축되었다.[4] 2002년 11월 25일 한남IC ~ 양재IC 구간이 서울특별시도경부간선도로로 전환되며 고속도로 구간에서 제외되었다. 최초 개통 구간은 반포IC에서 끝나 이수교차로에서 구 395번 지방도와 합류해 한강대교 방향으로 직결되어 한강대교 남단에서 끝이 났다.[5] 당시 제3한강교 개통과 함께 완공.[6] 서울 방향 가변차로 시행.[7] 부산 방향 가변차로 시행.[8] 부산방향 가변차로 시행.[9] 양방향 가변차로 시행.[10] 양방향 가변차로 시행.[11] 양방향 가변차로 시행.[12] 서울방향 5차로, 부산방향 7차로.[13] 부산, 경남, 울산: 구서IC, 영락IC, 노포IC, 양산IC, 통도사하이패스IC, 통도사IC, 서울산IC, 활천IC
대구, 경북: 경주IC, 건천IC, 영천IC, 경산IC, 북대구IC, 칠곡물류IC, 왜관IC, 남구미IC, 구미IC, 북구미IC, 동김천IC, 김천IC, 추풍령IC
대전, 충청: 황간IC, 영동IC, 금강IC, 옥천IC, 대전IC, 신탄진IC, 남청주IC, 청주IC, 옥산하이패스IC, 목천IC, 천안IC, 북천안IC, 유성IC
서울, 경기: 안성IC, 오산IC, 기흥동탄IC, 기흥IC, 수원신갈IC, 판교IC, 대왕판교IC, 양재IC.
[14] 부산, 경남, 울산: 노포분기점(부산외곽순환고속도로), 양산분기점(중앙고속도로지선),서울주분기점(함양울산고속도로) 언양분기점(울산고속도로)
대구, 경북: 영천분기점(상주영천고속도로), 동대구분기점(대구부산고속도로), 도동분기점(새만금포항고속도로(대구-포항)), 금호분기점(중앙고속도로, 중부내륙고속도로지선), 김천분기점(중부내륙고속도로)
대전, 충청: 비룡분기점(통영대전고속도로), 회덕분기점(호남고속도로지선), 청주분기점(서산영덕고속도로(청주-영덕)), 남이분기점(중부고속도로), 옥산분기점(아산청주고속도로(옥산-오창)), 천안분기점(논산천안고속도로, 아산청주고속도로(아산-천안))
경기: 안성분기점(평택제천고속도로), 동탄분기점(수도권제2순환고속도로), 신갈분기점(영동고속도로), 판교분기점(수도권제1순환고속도로), 금토분기점(용인서울고속도로)
[15] 경북: 경주터널
충북, 대전: 황간터널, 영동1~3터널, 옥천1~4터널, 삼양터널, 증약터널, 대전터널. 최장터널: 옥천3터널(양방향 1,593m)
[16] 서울방면 16개소(양산휴게소, 언양휴게소, 건천휴게소, 경산휴게소, 칠곡휴게소, 김천휴게소, 추풍령휴게소, 황간휴게소, 옥천휴게소, 신탄진휴게소, 죽암휴게소, 청주휴게소, 천안삼거리휴게소, 입장휴게소, 안성휴게소, 죽전휴게소)
부산방면 16개소(서울만남의광장휴게소, 기흥휴게소, 안성휴게소, 망향휴게소, 천안휴게소, 옥산휴게소, 죽암휴게소, 옥천휴게소, 황간휴게소, 추풍령휴게소, 김천휴게소, 칠곡휴게소, 평사휴게소, 건천휴게소, 경주휴게소, 통도사휴게소)
양방향 통합형 1개소(금강휴게소)
[17] 저 버스는 구 유신고속(이후 코오롱고속으로 변경) 소속이다. 새 마크만 보고 한진고속 소속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당시 한진고속은 차체에 '한진고속버스'로 표기했다.[18] 1970년 개통 당시는 서울특별시 한남IC가 기점이고 부산직할시 동래IC가 종점이었으나, 2002년고속도로 노선 개편으로 시점을 구서IC로 바꾸고 종점은 양재IC로 변경되었다. 개편된 노선 규정에 따르면 남북축(세로축) 노선은 기점을 남쪽으로, 종점을 북쪽으로 설정한다.[19] 남 ↔ 북, 동 ↔ 서가 혼합되어 있다.[20] 대한뉴스 제784호로, 원본 유튜브에 올려놓은 것이다. 영상이 시작하면서 나오는 노래는 고속도로의 노래이다.[21] 경부선 철도는 대구 - 부산 간을 경주 - 울산 우회 경로가 아닌 경산 - 밀양의 직선 경로를 가지며 경부고속철도는 경부고속도로와 비슷한 선형으로 우회해서 지난다.[22] 수도권은 어느 도로든 아무리 확장하고 수요분산해봤자 출퇴근시간엔 다 밀리며 특히나 경부고속도로는 대한민국의 심장이기 때문에 절대 안막힐 수가 없다.[23] 이미 시 승격으로부터 20년이 지난 성남시와 달리, 당시 수지지구 관할관청은 무려 용인군청이었으니 이런 건설개발 업무에 미숙할수밖에 없었다. 시 승격 이후에도 한동안 구 용인군청이 시청으로 기구만 확대된 형태라 업무역량이 빠르게 개선되기는 힘들었다.[24] 읍, 면 단위로 확장할 경우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이 최초이다. 반대 방향에서는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이 최초이다.[25] #[26] 경향신문 1966년 6월 10일 2면 중앙[27] 경향신문 1966년 6월 20일[28] 이때 노선안은 청주와 창원을 스쳐 지나간다는 것만 빼면 사실상 서울 - 대구 - 부산을 직선으로 잇는 것과 다름없었다. 주원 장관의 경부고속도로 노선안이 대구 ~ 부산간 고속도로의 확장형에서 기원했기 때문이다. 기존 영동고속도로(서울 - 강릉), 남해고속도로(포항 - 목포) 계획은 재화 생산자와 사용자를 잇는 노선으로서 경제순환 모형 관점에서 봤을 때 가치가 큰 고속도로였지만, 주원 장관은 이런 고속도로 말고 산업단지와 물류허브를 잇는 수출 통로로서의 고속도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주요 수출품인 의류섬유 산업 도시인 대구와 대구와 가장 가까우면서도 큰 규모의 항구를 가진 부산을 잇는 고속도로가 그에게 가장 부합하는 노선이었던 것이다. 덤으로 이걸 서울까지 이어버리면, 대구에서 서울까지 가는 길목 사이 시골과 고속도로가 접하는 지역엔 도시와 마을들이 들어서면서, 농촌 몰락과 도시 집중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고 실제로 야당 의원들에게 이렇게 해명을 했다.[29] 국가기록원에서는 이쪽을 기록했다.[30] 이렇게 낮았던 이유는 시내 도로를 건설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비용을 산출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정주영 회장 자서전('이 땅에 태어나서')에도 언급된 내용. 당시엔 김포가도(현재 공항대로)를 '한국 최초의 고속도로'라고 부르는 수준이었다.#[31] 이때 비화로 청와대에서 km당 들어갈 예산을 짜보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건설부는 9억, 공병감실은 7억을 써냈다. 당연히 청와대에서는 왜 이렇게 비싸냐며 노발대발을 했는데 이때 현대의 정주영 회장이 km당 1억에 해 보겠다며 말을 했고, 이걸 기준으로 예산을 짰다. 사실 이건 현대가 엄청 적게 부른 것이다. 한마디로 이 공사는 대놓고 기업들에게 적자 사업이었다. 그 결과, 같이 참여한 다른 시공사들도 최고 큰형님 격인 현대가 1억을 불렀는데 자신들이 더 높게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라 울며 겨자 먹기로 저 예산에 맞춰 공사를 해야 했다. 현대나 동아같이 덩치가 있는 기업들은 어떻게든 버텼지만 그보다 작은 기업들은 결국 도산해 버리는 일이 속출했다.[32] 2018년에 이 77명을 위한 뮤지컬을 만들었는데 제목은 77인의 영웅이다.[33] 원래대로라면 16년이 걸렸어야 할 공사를 29개월만에 끝냈다. 정말 16년이 걸렸더라면 1983~84년경에 개통했을 것이었다.[34] 고급시멘트, 한국에서 생산하는 곳은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쌍용양회 단 한 곳이다. 그리고 조강 시멘트는 사용 물량이 많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문을 받아서만 생산하며, 일반 시멘트보다 몇 배로 가격이 비싸다.[35] 일반 시멘트가 타설 후 일주일 뒤 발파를 진행할 수 있다면 조강시멘트는 12시간 뒤 발파가 가능하다.[36] "주판을 엎고서 공사를 하자"며 일반 시멘트보다 가격이 2배 이상인 조강 시멘트 투입을 제안한 당시 현장소장이었던 고려산업개발 양봉웅 회장의 의견을 정주영이 과감히 수용한 것이었다. 시멘트 회사에게 조강시멘트를 주문하자 자기들은 생산만 해도 되냐고 되물었다 한다. 이는 운송은 현대건설이 해 줄 거냐는 뜻이었다. 당시는 화물 운송에 화차를 사용했기 때문으로. 황급히 여기저기 알아봐도 화차를 쓸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자 건설현장에서 쓰던 트럭을 불러서 운송했다 한다. 시멘트 회사가 운송까지 해야 했다면 돈이 문제가 아니라 불가능하다고 주문을 거절했을 것이다.[37] 이는 영웅시대 드라마에서도 언급되는 내용이다. 이 때 주판을 엎자고 한 양봉웅의 코멘트도 그대로 대사로 나왔고 심지어 공사 속도가 상당히 진척되자 대놓고 개통식 준비하라는 말까지 하는 배포를 보여주었다.[38] 버려진 터널 입구를 꾸며 작중 등장하는 하도터널 입구와 그 앞에 설치된 구조본부를 구현하였다.[39] 실제로 당시에는 호남선 철도 복선화만이라도 해달라고 이야기가 나올 수준이었다. 참조, 참고1 참고2 참고3[40] 특히 이 당시 구호용 겉보리와 현미를 수입해왔는데, 군산이나 목포 등 호남 지방 항구들을 이용하지 못해서 부산이나 인천에서 육로로 수송하는 바람에 엄청난 낭비와 사고가 발생했다. 관련기사 이는 부산과 인천을 제외하고는 대형선박이 접안할 수 있을 만큼 수심을 확보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토목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현재도 목포항해군 대형함들이 입항을 꺼린다. 서해안, 특히 호남 지방이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갯벌이 발달하여 항구 건설하기에 비효율적이다.[41] 막상 선거전에서는 그렇게까지 큰 도움은 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대선에서는 95만 표로 신승을 했고, 총선에서는 신민당이 개헌저지선을 훌쩍 뛰어넘는 의석을 확보했다.[42] 일본에서 최초의 고속도로인 메이신고속도로가 개통된 것이 1963년이니 신칸센과 별 차이도 나지 않는다. 당시 한국인들에게는 고속도로 놓자는 것이나 고속철도 놓자는 것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43] 당장 "고속도로 반대"라는 문구가 쓰여 있는 부분이 컴퓨터 서체로 쓰여 있어서 어색하다.[44] 사실 이 당시에 건설된 대부분 고속도로들은 최근까지도 구간 곳곳에서 선형 개량, 노면 보수 및 포장 교체 등 온갖 공사들이 진행되고 있다. 해당 고속도로 문서들을 참고 바람.[45] 1980년대 중후반이 되어서야 중산층에 자동차가 보급되기 시작하여 마이카 시대가 개막하였다.[46] 대형 유통망이 개설될 정도로 물자가 유통되기 시작한 건 1970년대 말은 되어야 했다.[47] 당시 자가용을 보유하는 수준이면 상당한 부자나 마찬가지인데, 이런 사람들이 서울에서 부산을 여행이나 유희 목적으로 이동하는 경우 차라리 1~2시간이면 갈 수 있는 항공편을 이용하는 게 훨씬 간편하지 굳이 저렇게 여론의 뭇매를 맞으면서까지 고속도로 건설을 요구하지도 않는다.[48] 서울에서 부산까지 꽤나 긴 거리에 도로 공사를 해야 하는데 고작 2년 5개월밖에 안 주어진 것이다.[49] 시간이 흘러 2004년 KTX 개통 이후부터는 더욱 빨라지게 되면서 아침을 늦게 먹는 현대인 감각으로도 8시쯤에 아침을 먹고 9시쯤 서울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12시쯤 부산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이 말이 완벽하게 들어맞게 된 시기는 2010년 11월 1일 경부고속선 2단계 개통 이후부터다.[50] 1988년 기준으로 경부고속도로, 중부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 회덕 분기점 - 서광주 나들목, 부마고속도로 냉정 분기점 - 사상 나들목(현 남해고속도로제2지선), 남해고속도로 냉정 분기점 - 내서 분기점(현 남해고속도로제1지선) 구간만 4차로였다. 그나마 경부고속도로를 제외하고는 이 시점에서 얼마 전에서야 확장이 이루어졌다.[51] 경부고속도로 이외에도 호남고속도로 정읍휴게소 - 태인 나들목 사이에도 있었다가 폐쇄 후 졸음쉼터가 설치되었으며, 국도에는 1번 국도 경수대로 - 경기대로 수원 세류 - 화성 병점 구간에 수원비상 활주로가 이와 같은 형태로 있다.[52] 이후 모든 고속도로 기점은 남북간은 남쪽, 동서간은 서쪽에 고정되었다.[53] 단, 행정안전부 도로명주소 체계에서는 서울시 관리 구간도 경부고속도로다.[54] 일단 호남 지방의 경우 영남 지방에 비해 넓은 평야를 활용한 농업이 유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경공업만 해도 호남에서는 영남권 대구에 근접한 도시가 없었고, 호남이 골고루 잘 사는 지역이 아니었음은 구한말 시기 수많은 농민 봉기를 통해 알 수 있다.[55] 공여국-수원국-수원국, 공여국-신흥국-수원국, 갈국-수원국-수원국 등의 형태로 짤 수 있다.[56] 2차 세계 대전 이후 독립한 신생국 중에서 공업화에 가장 먼저 성공한 대한민국, 대만, 싱가포르 그리고 중국의 공통점이 경제개발의 성과를 집권의 명분으로 삼는 개발 독재이며, 그 과정에서 자국 관리들이 주도적으로 정책을 입안했다는 것이다. 리비아무아마르 알 카다피이슬람 극단주의가 힘을 못 쓰고 근대화에 성공했다는 점에서는 아시아 개발 독재국가들과 공통점이 있다.[57] 남한 최초 공인 스키장은 1975년에 완공된 용평리조트다.[58] 정작 열차 편수가 많은 조치원, 옥천, 영동, 김천, 왜관, 청도, 밀양은 제대로 된 개발을 하지 못했고, 이는 경부선에 올인한 대한민국 철도청의 엄청난 오판이었다. 그래도 그 이후 한국철도공사로 전환하고 KTX 개통 이후에는 고속/대량 수송 장점을 톡톡히 알았는지, 기존 철도 노선 개량은 물론 중부내륙선이나 경강선과 같은 신규 간선 건설 또한 이루어지고 있다.[59] 이들도 경부선 철도가 지나가긴 하나 경부선 이외의 다른 철도조차도 지나가지 않는다. 경부고속철도야 정차하는 역이 없어서 말할것도 없다.[60] 그나마 최근에 옥천군과 영동군도 2021년 계획이 시작된 합천진천고속도로가 향후 건설될 가능성이 있다.[61] 사실상 지리적으로는 같은 노선의 남대전IC가 옥천군 땅에서 더 가깝다. 그러나 남대전IC에서 옥천으로 가려면 인근 2차선의 곤룡터널 쪽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그나마 추부IC 혹은 판암IC에서 내리는게 4차선 이상 개량된 도로로 갈 수 있기 때문에 더 편하다.[62] 시간은 좀 걸리긴 하지만 서산영덕고속도로보은IC에서 2018년 말에 개량된 37번 국도를 이용하는 것도 빠르긴 하다.[63] 참고로 영동읍은 고속도로가 지나가지 않아서 영동읍내에서 고속도로를 타려면 용산면의 영동IC나 황간면의 황간IC로 가야 하고, 경부고속도로 이외의 나들목은 모두 영동군 내에서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경부고속도로 이외에 제일 가깝고 빠른 나들목이 통영대전고속도로무주IC이며, 개량된 19번 국도를 통해 갈 수 있다.[64] 그래도 경부고속도로 정도면 양호한 편이다. 1기 신도시들이 몰려 있는 수도권제1순환고속도로는 왕복8차로급 스펙을 가지고 있음에도 평일 낮 시간대에 정체구간이 중동구간, 평촌구간 등등 몰려있다.[65] 사실 일부는 터널, 그외 구간은 지하터널 형태인 것으로 옛 구간은 한미약품 센터 옆의 언덕을 타고 올라갔는데 이곳까지 같이 직선화 하면서 터널이 되었다.[66] 차로 폭도 서부산TG를 통과하는 남해2지선 구간은 8차로인 반면, 부산TG를 통과하는 경부고속도로 구간은 6차로이다.[67] 대구로 갈거면 언양 - 경주를 거쳐서 빙 돌아가는 경부고속도로 대신 중앙고속도로를 타면 되고, 울산으로 갈거면 낙동강 인근 부산서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동해고속도로 또는 7번 국도를 이용하는 것이 유리하다. 단, 수도권으로 갈거면 구서IC부터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영천으로 가서 상주영천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게 더 빠를 수도 있다.[68] 네비에서 서울->부산을 검색하면 이 길이 가장 먼저 뜬다.[69] 역으로 고속버스들이 물밀듯이 들어오는 반포IC도 상습정체구간이다.[70] 대구 이남에서는 부산광역시, 울산광역시, 창원시, 김해시, 양산시 등 경남 중에서도 남쪽 도시들이 대도시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반면 경북 북쪽에는 영천시, 경산시, 상주시, 문경시 등 상대적으로 낙후되거나 사람이 적은 지역이 많다. 그렇기에 이쪽은 대구를 기준으로 하행선 방향이 상행선 방향보다 인구가 많다.[71] 가변차로 미시행시 한정[72] 가변차로 시행 시 한정[73] 당시에 현대건설이 유일하게 태국에 시공을 한 경험이 있었고, 나머지는 국도급 도로들만 시공해 보았을 뿐이다.[74] 개통 당시인 1970년대에는 당시 자동차 기술을 감안하면 설계속도인 80 km/h도 고속급에 속했으나, 1990년대부터 한국 자동차 시장이 커지고 국산차 성능도 자연스레 향상되면서 120~130 km/h 까지도 쉽게 달릴 수 있게 됨에 따라, 80 km/h 제한속도는 걸림돌이 되기 시작했다.[75] 88올림픽고속도로 같이 도로 폭이 좁고 중앙분리대가 없는 2차로 고속도로만 위험한 건 아니다. 왕복 4차로인 고속도로라 하더라도 옛 경부고속도로처럼 선형이 복잡하고 커브가 심한 구간은 고속도로 넓이만 생각하고 평소처럼 100 km/h 이상을 밟는 경우가 많아서 곳곳에 사고 위험이 도사린다. 이와 비슷한 예로 옛날 남해고속도로 또한 왕복 4차로 구간이긴 했어도 초기 선형에서 이런 위험 구간들이 많았다.[76] 이 구간을 체험해 보고 싶다면, 현재 선형 개량 후 남은 도로 대부분이 일반 군도로 격하되었으므로 고속도로가 아닌 옥천 ~ 영동간 지방도를 경유하다 보면 직접 달려 볼 수 있다. 물론 지금은 도로 관리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한쪽만 왕복 2차로로 바꾸었다. 하지만 그 시절의 커브길을 그대로 달려볼 수 있고, 도로 절반은 을씨년스럽게 방치된 채로 있기에 나름의 분위기가 있다. 금강변을 따라 도로를 만들어서 계곡을 따라 흐르는 금강을 구경할 수 있는 것도 매력이다. 참고로 해당 지방도로 전환된 구 도로 덕에 옥천군청과 거리가 먼 청성면, 청산면에서 옥천읍으로 접근성이 향상되었다.[77] 현재 옛 구간은 완전히 철거되어 흔적도 없다.[78] 그 중 옥천 - 동이 구간이 특히 노후화가 심각하다. 나머지 동이 - 청성 구간도 왕복 4차로지만, 2003년에 선형 개량이 완료되어 옛 모습은 전혀 없다.[79] 총 건설비가 500억원 미만인 사업으로서 기획재정부의 예타를 따로 받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즉시 착공이 가능하였다.[80] 원래 2020년 개통 예정이었으나 2021년으로 연기되고, 또 연기되어 2022년으로 연기되었다.[81] 금강2교, 햇무리교, 조령3교, 조령4교는 현재 폭이 왕복 4차로 기준이므로 왕복 6차로 운영을 위해서는 약간의 너비 확장이 필요하다.[82] 금강IC에서 서울방향으로는 교량구간까지 포함해서 전부 왕복4차선 기준이라(옥천1터널 제외) 확장을 위해서는 교량너비 확장 및 부지확보가 필요하나 금강IC - 영동1터널 구간에서는 조령3교/4교를 제외하면 3차로 노폭이 확보돼 있는 상태이므로 저 구간에서는 저 두 교량만 확장하면 그냥 차로 개방만 하면 되는 것이기에 공사가 크게 어렵지 않다는것이다.[83] 중부내륙고속도로, 당진영덕고속도로도 이미 포화상태이고, 화물차를 피해 이 구간으로 운행하는 고속버스와 운전자들도 많다.[84] 평일이라면 사진이 찍힌 곳에서의 일반 승용차의 1차로 진입은 위법행위가 아니다. 위 사진 속 구간은 청주IC에서 서울 방향으로 북쪽으로 약간 이동한 구간으로, 평일 버스전용차로 구간에 해당하지 않는다. 버스전용차로는 평일에는 오산IC~한남IC까지, 토/일요일에는 신탄진IC~한남IC까지이다. 참고로 버스전용차로는 13인승 이상의 차량이거나 9인 이상 탑승 가능한 승용차, 12인승 이하 승합차6인 이상이 탑승했다면 이용할 수 있다. 물론 중앙버스전용차로가 해제되었을 때 1차로는 추월차로이므로 지속 주행은 속도와 차종에 관계없이 위법행위이다. 2차로의 트럭 두 대 역시 지속 주행하고 있다면 위법행위 중이다. 또한 바로 앞에 보이는 기아 봉고 1톤 트럭은 화물칸에 안전망을 설치하지 않았다. 이것 역시 과태료 처분 대상이다. 그리고 위 사진에 나와 있는 표지판은 이미 한길체로 바뀐 지 한참 지났다.[85] 아이러니하게도 이 정책의 최대 수혜자는 동서울터미널 착발 고속/시외버스들이다. 강변북로를 나오자마자 바로 버스전용차로여서 중간에 끼어들 이유가 없다.[86] 실제로 버스차로에서 좌측 방향지시등(추월해 지나가라는 뜻)를 키고 있는 KD 소속 광역버스를 경기도 구간에서 많이 목격할 수 있다.[87] 이 가변차로는 추월 차선에 있는 차량들까지도 추월하려는 차량들이 많이 사용한다.[88]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이 아닌 중부내륙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를 거쳐 서울로 올라가는 서울행 최단루트 영상이다[89] 언양구간 확장공사 이전에 촬영되었다.[90] 2006년 3월 4일 방송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