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30 23:05:53

대한항공 F27기 납북 미수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항공 사건 사고 요약표
발생일 1971년 1월 23일
유형 하이재킹
발생 위치 대한민국 강원도 홍천군 상공
탑승인원 승객: 54명[1]
승무원: 5명
사망자 승객: 0명[2]
승무원: 1명[3]
생존자 승객: 54명
승무원: 4명
기종 포커 F27-500
항공사 대한항공
기체 등록번호 HL5212
출발지 속초공항
도착지 김포국제공항

1. 개요2. 이전 납북 사건과 정부의 대처3. 승무원 인적 정보4. 납치범 인적 정보5. 전개
5.1. 탑승과 이륙5.2. 납치 개시5.3. 공군의 긴급출격5.4. 제압과 희생
6. 사건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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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200506200099_02.jpg
사고 전 촬영된 해당 기체
파일:20151113TLM00000814.jpg
사고 후 해당 기체의 잔해[4]

1971년 1월 23일 오후 1시 34분경 승객 55명과 승무원 5명을 태운 속초공항김포국제공항대한항공 소속 포커 F27이 홍천 상공에서 하이재킹당해 납북될 뻔한 사건.

사건 재구성 영상
사고 직후 대한뉴스 보도영상
관련 영상

2. 이전 납북 사건과 정부의 대처

대한국민항공사 시절인 1958년 2월 16일에 터진 창랑호 납북 사건1969년 12월 11일 대한항공 YS-11기 납북 사건으로 인해 정부는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이에 따라 국무회의 의결로 보안검색의 강화, 승객의 익명 및 타인 명의의 사용 금지, 비행장 직원에게 사법권 부여, 무장한 항공보안관[5]을 탑승시키고 조종사에게 권총 지급, 조종실 문을 반드시 잠그도록 규정하는 등 조치를 취했다.

3. 승무원 인적 정보

  • 기장 이강흔은 당시 37세로 공군 대령으로 예편한 뒤, 대한항공에 입사했다.
  • 부기장 박완규는 6.25 전쟁 때 공군에 자원입대해 소티 100회를 갖고 있는 베테랑 조종사였으며 포로로 잡혔던 경험이 있었다.
  • 수습 조종사 전명세는 육군항공대 조종사 출신으로, 중령으로 예편한 후 대한항공에 입사하여 이강흔 기장에게 교육을 받고 있었으며 이 사건에서 자신의 몸을 던져 수류탄 폭발을 막아냈다.
  • 항공 보안관 최천일은 이전에 일어난 두 번의 납북 사건에 대한 조치로 훈련받은 14명의 항공 보안관 중 한 명이었다.
  • 이외에 객실 승무원 최석자가 탑승했다.

4. 납치범 인적 정보

파일:납치범김상태.jpg

납치범인 김상태는 당시 22세였고 무직으로,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거진3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왜 여객기를 납치했는지는 그가 사살되었기 때문에 불명이지만 추측에 따르면 납북에 성공한 공작원들이 북한에서 엄청난 대접을 받았다는 기사를 보고 사건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높다.

사건 이후 중앙정보부와 군, 경찰이 김상태의 집을 수색했으나 간첩은 아니라는 것을 파악했으며 북한의 대남 도발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경찰은 수사 초기 고정간첩이라는 심증을 굳히고 수사를 했었다고 한다. # 69년 6월부터 직업없이 갑자기 윤택하게 살았고 행방도 알리지 않고 돌아다녔으며, 북한의 비행장 위치 등 지리에 밝고 맏6.25월북하여 북한군이 된 정황 등으로 의심했다.

사제 수류탄을 만드는 법은 자기 집에 든 청년에게 5000원을 주고 배웠으며, 소형 어선 엔진에서 사용하는 발동기 시동화약(길이 6㎝, 지름 1㎝)과 어린이 딱총용 화약으로 폭발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

5. 전개

5.1. 탑승과 이륙

보안검색이 이전의 납북 사건 당시보다는 강화되긴 했지만 불행히도 범인인 김상태는 폭탄을 무사히 통과시켜 대한항공 포커 27 여객기에 탑승했다.

오후 1시 7분 폭탄으로 무장한 김상태와 54명의 승객, 그리고 승무원 5명과 함께 포커 27 여객기는 속초공항을 이륙했다.

공항 검문을 어떻게 피했는지 궁금할 수 있는데, 속초공항에 배치된 금속탐지기는 구형이라 비닐이나 기름종이 등으로 싸면 찾아내지 못하는 데다가 검은색 비닐 가방에 사제 폭발물이 들어 있었으나 검문 경찰관이 휴대품 검사 등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한다.

5.2. 납치 개시

이륙한 지 27분이 지난 1시 34분 홍천 1만 피트(3,048m) 상공에서 폭탄 2개가 폭발했는데 이 폭발로 기체에 20cm 가량의 큰 구멍이 나고 이륙할 때 잠가 놓았던 조종실 문이 부서져 버렸다. 최천일은 폭발 지점에서 불과 50cm 떨어져 있었으나 기적적으로 부상은 피할 수 있었다.

조종실 문이 부서지자 김상태는 남은 폭탄 2개를 들고 조종사들에게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나온 놈이다. 북으로 기수를 돌려라!"고 강요했다.

이강흔 기장은 일단 납치범의 협박에 순응하는 척하며 기수를 북쪽으로 돌리는 한편 강원도 고성군비상착륙하기로 했다.

강원도 고성군 화진포 해변에 낮게 접근하면서 '북한에 다 왔다'며 랜딩기어를 내렸으나 하필 고성군이 고향이었던[6] 김상태가 착륙하는 곳이 화진포임을 알아채고 "야 이 새끼야, 화진포인데 왜 내려, 그러면 정말 조종실에 이걸 던져!"라며 조종사를 협박했다. 조종사들은 할 수 없이 랜딩 기어를 올리고 계속 북으로 향했다.

5.3. 공군의 긴급출격

폭탄이 터지자마자 이강흔 기장은 비행기가 납치됐다는 무전을 남겼다. 무전 내용은 "납치범이 탔다. 위치는 강릉 서쪽 30km 지점."

다행히 이 무전은 관제센터와 속초공항 관제탑에 무사히 청취되었고 대한민국 공군은 납치 소식을 전해 들어 연료와 무장을 만재한 F-5A 2대를 긴급출격시켰다. 이 F-5 두 대는 15분만에 납치된 포커 27과 조우했다.

5.4. 제압과 희생

휴전선 이남 20km, 공군에서 발진시킨 F-5 2대는 기체가 더 이상 북쪽으로 가는 걸 막기 위해 납치된 여객기를 에워쌌다. 객실에서 몰래 조종실과 인터폰을 하던 최석자 씨와 최천일 씨는 기지를 발휘해 승객들에게 범인을 속이기 위해 크게 통곡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이와 함께 "북한 상공에 들어왔습니다, 이북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으니 가지고 있는 증명서를 모두 찢어 버리십시오"라는 거짓 기내 방송을 했다. 여기저기서 승객들이 통곡하자 최천일은 승객들을 달래는 척하면서 김상태에게 천천히 접근했다.

여기에 이강흔 기장은 급하게 출격한 공군 F-5를 북한군 전투기가 마중 나왔다고 속였다. F-5는 대한민국 국군이 1968년에 도입한 전투기로, 정보를 찾아보기 어려웠던 당시의 상황과 맞물려서 1971년까지도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외형의 신형 기종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김상태는 이 전투기가 대한민국 공군의 전투기라는 것을 모른 채 정말 북한 전투기라고 믿었다.

김상태가 창밖의 F-5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항공 보안관 최천일과 수습 조종사 전명세가 즉시 권총을 뽑아 그를 저격했다. 김상태는 최천일이 쏜 총탄에 머리를 맞고 쓰러지며 제압되었지만, 그가 손에 들고 있던 폭탄이 바닥으로 떨어져 나뒹굴면서 점화되고 말았다. 이때 전명세가 달려들어 폭탄을 자신의 몸으로 덮으며 엎드렸고, 그대로 기내 폭발이 일어났으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다만 스스로를 희생한 전명세는 왼팔과 오른다리를 잃는 중상을 당해 심한 출혈을 일으켰다.

만약 여기서 전명세가 폭탄을 몸으로 막지 않았다면 이강흔 기장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사망했을 것이고 조종 장치들도 모조리 망가져 이 사건은 납북 미수 사건이 아니라 추락 사건이 되었을 것이다.

2022년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보안관이 쏜 총알이 김상태의 이마에 정통으로 맞아 즉사했고[7] 땅바닥에 떨어진 수류탄을 수습 조종사가 몸으로 덮쳐서 막았다고 방영했으나, 경향신문의 보도는 좀 다르게 묘사하고 있다. 보안관이 김상태에게 총을 쏜 것은 맞지만 정확히 어디에 맞았는지는 나오지 않았으며, 범인이 쓰러지자 수습 조종사가 진압하려 몸싸움을 벌이는 도중에 폭발물을 덮쳤다고 한다. #

김상태가 사살되었고 기적적으로 항공기가 공중분해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객실이 파손되며 여압이 상실된 데다 조종계통이 손상된 탓에 이강흔 기장은 기체를 급강하해 이륙한 지 1시간 11분이 지난 오후 2시 18분 고성군 현내면 초도리 바닷가에 불시착했다. 속초에서 김포행 여객기였기 때문에 적은 연료만 주유했지만 예비 연료가 있었고 문서 위 사진에서 보이듯 양 주익이 다 뜯겨나갈 정도로 거친 착륙이었기 때문에 폭발이나 화재로 이어질 위험성이 있었으나 천만다행히도 그런 일은 없었다. 승객들은 대부분 가벼운 부상만 입었으나 폭탄을 몸으로 막았던 전명세 수습 조종사를 비롯해 이강흔 기장, 객실승무원 최석자 등 8명이 중상을 입었다.

가장 심각한 부상을 입은 전명세 조종사는 비상착륙 당시까지만 해도 살아있었으나, 인근 군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어 응급 치료를 받은 뒤 수술을 위해 구급차에 실려 서울로 이송되던 중 끝내 과다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언"탑승객이 다칠까봐 몸을 던졌다"는 한 마디였다.[8]

수류탄을 들고 위협을 가하는 상대방에게 총을 쏘아 제압을 시도했던 것은 너무 위험천만한 행동이 아니었느냐는 지적도 있다. 수습 조종사가 몸을 던져 희생하여 폭탄을 덮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거나 조금이라도 타이밍이 늦어 못했다면 기내 폭발로 인한 동체 파괴 후 추락으로 전원 사망이라는 극단적 결말을 맞을 수도 있었기에 '하이리스크-하이리턴' 작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납치범이 왼쪽 창밖을 내다보며 지상을 확인하는 순간 보안관석에서 인터폰으로 기장에게 "총을 쏠까요"하고 질문을 해왔다는데 그래서 기장도 굉장히 망설였다고 한다. 납치범을 사살한다 해도 그의 손아귀 힘이 풀려 폭탄의 안전핀을 놓친다면 기내 탑승자 모두가 끝장이라는 것을 기장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사람들이 보기에는 범인의 요구대로 일단 북한으로 가서 착륙한 뒤 상황을 충분히 설명하고 외교 협상을 진행해 추후 한국으로 송환되는 것이 훨씬 안전하지 않았겠느냐고 나이브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불과 2년 전인 1969년 벌어진 대한항공 YS-11기 납북 사건[9] 당시에는 북한은 다음 해에서야 50명 가운데 39명을 송환했으며, 그마저도 승객 7명, 승무원 4명 등 11명은 돌려보내지 않았을 만큼 반인륜적인 행태를 보였던 전적이 있다.[10] 13개월 전 사건을 잘 알고 있을 기장이나 보안관 등은 북으로 넘어가면 다시는 못 돌아올 가능성이 100%이니 북한으로 넘어가면 끝장이고, 이판사판의 작전을 감행해야 할 상황이었다. 게다가 비행기 자체가 이미 수류탄에 타격을 입고 오래 못갈 상황이었던 지라 예비 연료가 있었음에도 회항도 못하고 근처에서 비상착륙을 시도했을 정도니 하물며 북한으로 넘어가면 바로 전투기가 뜰 텐데 그것도 어찌저찌 무마하고 북한과 연락해서 활주로를 빌리고 할 시간적 여유가 없기도 했다.

6. 사건 후

파일:전명세_기장.jpg 파일:서울현충원_기장_전명세의_묘.jpg
전명세 기장의 영정 서울현충원 전명세 기장의 묘

폭탄을 자신의 몸으로 덮어 기내 폭발을 오롯이 받아내 탑승자들을 모두 살리고 순직한 전명세 수습조종사는 사후 기장으로 추서되었다. # 그의 시신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며 일등 보국훈장과 함께 조종사 정복을 수여받았다. 장례식 때 그가 당시 대한항공 전무이사 전명섭[11]의 친동생임이 밝혀지기도 했다.

이강흔 기장은 왼쪽 눈을 크게 다쳐 1.2 정도였던 시력이 0.3으로 나빠졌지만 치료 후 대한항공에 복귀하여 B727, DC-10, B747-200 등을 조종한 후 조종사로서 정년 퇴임하였다. 이강흔 기장의 자녀들은 미국에서 살아가고 있다.

사건 당시의 승무원들의 이야기는 이념 선전이 강했던 1980년대 말까지 반공교육에서 널리 활용되었다.

알쓸범잡에서 이 사건에 대해 다룬 적이 있다. # 2022년 9월 22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도 이 사건을 방송했다. #

2024년 6월 21일 해당 사건을 토대로 제작한 영화 하이재킹이 개봉했다. 영화가 개봉된 후, 53년만에 해당 사건의 생존자 2명(승무원 최석자, 승객 정근봉)이 만남을 가지기도 했다.#


[1] 납치범 1명 제외[2] 납치범 제외[3] 수습 조종사 전명세[4]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초도리[5] 처음에는 경찰이 투입됐지만 이후 항공사에서 고용한 청원경찰이 보안관 역할을 하게 됐다. 정윤회가 대한항공 소속 청원경찰로 항공보안관을 했던 바 있다.[6] 화진포는 김상태의 고향인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에 위치해 있다.[7] 사실 꼬꼬무만 보면 저격수도 아니고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 그것도 수류탄을 든 범인을 상대로 빗나가면 큰일나는 긴장된 상황에서 제법 떨어진 거리에서 권총만으로 정확히 헤드샷을 명중시킬 정도면 특급 명사수 아닌가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게다가 이미 수류탄이 한 번 터졌던 상황이라서 뒤쪽 바닥엔 30~40㎝쯤의 구멍이 뚫렸으며 바닥에서 올라오는 세찬 바람으로 인해 신문지 종이 부스러기 등이 마구 휘날려 승객들은 비명을 질러댔으며 기체 안은 흰 스모그가 일어난 것처럼 뿌옇던 아비규환 상황이었다.[8] 과다출혈로 의식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 "승객들이 위험하다"고 혼잣말처럼 되뇌인 후 "폭탄! 폭탄!"을 연발하다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전자가 맞다면 최소한 자신의 의사는 남기고 죽은 것이고 후자가 맞다면 의식을 잃던 와중에도 승객 걱정을 했다는 뜻이 된다. 꼬꼬무에선 후자를 토대로 방송하였다.[9] 말이 2년이지, YS-11기 납북 사건은 1969년 12월이었고 이 사건은 1971년 1월에 일어났다. 즉 불과 13개월 전의 사건이다.[10] 이때 돌려보내지 않은 승객들은 기술자, 언론인등의 지식인들이었다고 한다.[11] 공군 소장 출신으로 1989년에 사망했으며 동생이 안장된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그의 아들들과 손자도 공군 장교로 복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