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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조선폭동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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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개요2. 발단3. 전개
3.1. 9월 18일3.2. 9월 19일3.3. 9월 20일
4. 결과5.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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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74년 9월 19일 울산 현대조선중공업(이하 현대조선)에서 발생한 대규모 노사분규 및 폭동.

2. 발단

1973년 발생한 제1차 오일쇼크의 여파로 선박 수주의 급격한 감소와 기존에 계약된 선박 발주 해약으로 점점 위기가 고조되던 1974년 9월 현대조선은 새로운 형태의 위기를 맞이했다.

사태의 직접적인 발단은 선박 건조 공정의 일부를 하도급 업자에게 넘기는 위임관리제의 도입과 시행에 대한 기능공(생산직)들의 반발에서 비롯되었다. 사태가 발생하기 전인 1973년 7월까지만 해도 현대조선은 기능공들을 사원대우로 채용해 신분을 보장받는 이른바 직영체제[1]로 운영되고 있었는데 동년 7월에 이 직영체제를 폐지하고 위임관리제를 새로 도입했다. 직영체제로 선박을 건조해 본 결과 일부 조장급 기능공들이 적당주의에 빠져 작업 능률이 오르지 않는 등의 문제점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며 당시 선진국들의 조선소에서는 이미 공정별 도급제를 시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대조선에서 이런 제도로 회사를 운영하기 위해 과도기적 단계로 직영체제와 공정별 도급제의 중간형태인 위임관리제를 채택했다.

다시 말해 위임관리제는 분야별로 하청업체나 개인에게 하도급을 주면 이들 업체나 하도급자가 다시 기능공들에게 도급을 주는 시스템이다.[2] 사건이 발생하기 직전인 1974년 9월 기준으로 취부·용접·사상 등 16개 직종의 기능공들을 단계적으로 하청 기능공으로 전환했고 현대조선에서 창사 2번째로 건조하고 있던 애틀랜틱 배러니스호[3] 정리공들 일부만 전환을 앞두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현대조선 사측이 9월 8일자로 건조부[4] 소속 직영 기능공 2,455명을 위임관리제로 전환한다는 방침을 세웠고 9월 11일에는 23일자로 건조부 소속 기능공 전원을 위임관리로 운영, 실시한다고 통보했다.

당연히 기능공들은 위임관리제로의 전환을 바라지 않았다. 정규직 사원으로서 누리던 보너스와 퇴직금 등의 혜택도 받지 못하고 오일쇼크로 인한 경제 불황이 지속되자 언제 일자리를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3. 전개

3.1. 9월 18일

현대조선 사측에서 일을 잘 못 한 조장급 기능공의 해임을 단행했다. 해임된 조장은 '사측이 한 사람에게 도급을 다 주려고 한다'면서 집단항의를 부추겼다.

이를 계기로 기능공들의 불만과 불안감이 더욱 팽배해졌으며 이런 분위기는 삽시간에 전사로 확산되었다.

3.2. 9월 19일

아침에 출근한 건조부 소속 기능공 300여명이 오전 7시 30분부로 작업을 거부하고 단체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이런 집단 작업 거부는 건조부뿐만이 아니라 다른 부서로 확산되기 시작해 600여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은 사측에 위임관리제 전환 실시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고 사측에서는 '선진국에서 이미 시행하고 있는 제도'라며 고압적인 자세로 되받아치자 금세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이에 기능공들은 13개 항의 요구 조건을 내걸고 회사 본관과 작업장 등에서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는데 요구 조건의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① 위임관리제 철폐
② 사원(사무직, 기술직)과 기능공(생산직)간의 차별대우 폐지[5]
③ 부당해고 반대
④ 시간당 임금 100%인상
⑤ 상여급 지급
⑥ 재교육 반대
⑦ 견습기간 단축
⑧ 노동조합 설립 보장
⑨ 임시직의 공원화(비정규직 기능공의 정규직화)
하지만 이들의 농성은 출동한 경찰 150여명에 의해 2시간 만에 강제 해산되어 버렸고 해산된 기능공들은 오후 4시에 출근한 야간 작업조 3,000여명과 같이 회사 정문 근처에서 시위를 계속했다. 울산경찰서장과 노동부 울산사무소장의 중재 노력에 오후 5시경에 기능공들이 대표를 뽑아 회사측과 협상에 들어갔지만 협상은 결렬되었고 사태는 점점 악화되기 시작했다.

경찰도 늘어난 시위대에 경력을 증원하기 위해 울산경찰서뿐만 아니라 경남도경, 부산시경, 경북도경의 경력 1,200여명을 투입해 회사 정문을 차단하고 시위대가 늘어나는 것을 대비하기 위해 울산 시내와 방어진간 시내 버스 운행을 중단시켰지만 밤 10시 20분경부터 시위대가 사내로 진입하기 위해 정문으로 몰려들었고 결국 경찰 저지선이 뚫려 버렸다. 사내로 진입한 이들은 정문 경비실을 방화하고 본관 앞에 있던 '조선입국'이란 비석 밑에 깔린 돌로 구내식당과 본관 집기류를 파손시켰으며 매점에 들어가 빵과 담배 등을 바깥으로 집어던졌고 본관 뒤 창고에 들어가 보관중인 수건 등의 물품을 탈취해갔으며 본관 유리창 200여장이 깨지고 공장의 영국제 자동철판절단기 100대가 파손되는 등의 피해가 발생했으며 방화로 인해 출동한 소방차 3대에 돌을 던져 일부를 파손시키고 본관에 주차되어 있던 승용차와 지프차량을 불태웠고 다시 회사 정문 앞 도로로 진출해 영업용 택시와 버스를 방화했고 회사 맞은편 외국인 기술자와 선주 감독관 숙소에 침입해 식당과 휴게실 등의 유리창과 기물을 부수고 TV, 라디오 등을 약탈하는 등 폭동으로 발전했다. 이렇게 경찰력으로 진압이 되지 않자 나중에는 울산경비사령부의 군 병력까지 사태에 투입되었고 시위 진압 과정에서 경남도경 국장이 돌에 이마를 맞아 다쳤으며 시위대 50여명과 경찰 30여명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3.3. 9월 20일

경찰이 시위대를 체포하기 시작해 통금시간이 훨씬 지난 새벽 1시쯤에야 사태가 진정되었다. 흩어진 시위대를 추적한 경찰은 전하동 기능공 숙소 등에 진입해 시위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마구 연행해 663명을 검거했으며 이들 중 주동자급 13명을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위반, 특수공무집행 방해 혐의로, 5명을 특수절도 혐의로 각각 구속시켰으며 21명은 불구속으로 입건시켰고 나머지 432명은 훈방조치되었다.

이후 경찰이 사내 각 공장에 배치되어 정상조업은 이뤄지지 못했고 시위 소식을 들은 정주영 회장이 울산으로 내려와 기능공 대표들과 만나 9월 20일 현재 계약중인 하청이 만료된 이후에 다시 위임관리를 하지 않겠으며 기능공들이 요구한 13개항 요구조건 전부를 수용한다고 약속하고 사내 스피커로 이 사실을 알림으로서 사태가 일단락되었다.

4. 결과

  • 사태가 진정되자 현대조선은 9월 21일 밤 11시부터 22일 새벽 1시 30분까지 사태 수습을 위한 노사협의회를 소집해 김영주 부사장 등이 사측 대표로 나와 하청 기능공 대표 8명, 위임관리자 대표 3명 등과 회의를 가졌다. 이 회의에서 핵심 쟁점은 사건의 발단이 된 위임관리제의 존속 여부였다. 사측은 이 제도를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기능공 측은 당연히 반대 및 철폐를 요구했다. 결국 노동부 중재에 따라 사측이 하청 기능공을 직영 기능공과 같이 대우하며 신분 보장을 해 준다는 선에서 합의가 이뤄졌고 시간당 임금도 개인 기량에 따라 10월 부터 인상하기로 합의되어 마무리 되었다.
  • 이 사태는 국회에서도 큰 이슈로 부각되어 당시 야당이었던 신민당김수한 의원을 단장으로 하는 진상조사반을 울산에 파견했고 이후 국회 재무위원회에서 대정부 질의를 통해 노동조합 결성의 허용, 기업주의 의법 조치 등을 요구했으며 정부도 이 사태를 겪고나서야 노사협의회 제도를 활성화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 이 사태에서 발단이 된 현대조선의 위임관리제는 1974년 10월 완전히 정착되어 오늘날 하도급제에 이르고 있으며 사원들간 차별대우 철폐와 임금인상, 노동조합 설립 등은 해결되지 못한 한계가 존재한다. 결국 이런 요구 조건은 훗날 노동자 대투쟁에서 다시 수면 위로 등장했다.
  • 이 사건은 서슬퍼런 유신체제하에서 발생한 대규모 분규사태인 동시에 오일 쇼크 이후 한국 경제의 어두운 민낯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5. 참고 문헌

  • 現代重工業史(1992)
  • 신원철, 「사내하청공 제도의 형성과 전개: 현대중공업 사례」(『산업노동연구』9, 한국산업노동학회, 2003)
  • 울산발전연구원 부설 울산학연구센터 저: 산업화시대를 살아온 울산 근로자들의 생애사 - 근로자로, 아버지로 살아온 인생 - (2013)


[1] 생산직 작업자들을 정규직 사원으로 고용하는 형태.[2] 오늘날 조선업계의 병폐인 사내하청업체(하도급)→물량팀(재하도급) 시스템과 대동소이하다.[3] 그리스 리바노스사가 발주한 대형유조선(VLCC). 1호선 애틀랜틱 배런호와 같이 진수되었으나 리바노스사가 1호선만 인도받고 오일쇼크 여파로 여러가지 핑계를 대면서 이 2호선은 인수 거부를 선언해 현대조선과 국제재판까지 갔으나 현대조선측의 승리로 끝났다. 재판 결과 리바노스사가 1척의 선박을 더 주문하는 대신 이 배는 현대조선측이 인수해 훗날 현대상선(현재 HMM)이 되는 '아세아상선'의 유조선으로 주인이 바뀌었다.[4] 도크에서 선박 건조를 하는 부서. 옥외에서 근무하므로 조선소에서도 노동강도가 높은 부서다.[5] 나이 어린 사무직 직원이 나이 많은 기능공들에게 반말로 무시하면서 대하거나 구내 식당도 사무직과 생산직이 분리되어 이용하게 하는 등의 차별이 만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