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31 03:54:43

옥구농민항쟁


<colcolor=#fff> 옥구농민항쟁[1][2]
파일:군산경찰서에 찾아간 조선인 소작농들.jpg

[3]
<colbgcolor=#bc002d> 발생일 1927년 11월 25일
발생 위치 일제강점기 조선 전라북도 옥구군 서수면
(現 대한민국 군산시 서수면)
유형 일본인 지주와 조선인 노동조합과 소작인들의 소작 쟁의
원인 일본인 농장 ‘이엽사농장’의 강제적인 소작료 인상,
농민조합 지도자 장태성 구금
결과 농민조합 지도자 장태성 처벌[4], 농장 지배인 사이토의 사과와 농장조합원들에게 비난받는 사무원 면직 및 근신처분[5]

1. 개요2. 전개
2.1. 원인2.2. 11월 이전2.3. 11월 20일~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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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27년 11월 25일을 전후해서 발생한 옥구농민항쟁은 기본적으로 '이엽사'라는 일제 농장회사의 무도한 수탈에 대항한 소작쟁의였다. 이후 직접적으로 농민조합원과 서수지역[6] 주민들이 농민조합 지도자 '장태성'[7]을 불법구금한 일본 제국 경찰에게 탄압당한 사태에 대항하여 장태성을 구출하는 등 일제의 폭압에 대항한 항일 항쟁이다.[8]
<옥구 농민 항쟁가>[9]
- 1절 -
동편하늘 검은 구름 힘차게 솟구쳐
밝고도 고운 햇살 온천지에 빛날 때
세상 만물은 기뻐서 좋아하건만
다만 울타리 아래 서리 맞은 무궁화는
홀로 남아 울고 있습니다.

- 2절[10] -
옥구평야 기름진 땅 내 나라 땅인데
서럽게 고인 눈물이 나라에 적시면
이땅 만물은 소생하여 싹이 트건만
삭풍에 쓰러진 벼 이삭은 홀로 서서 울고 있네

2. 전개

2.1. 원인

첫째. 옥구와 군산 평야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가와사키 농장[11]의 농장주 가와사키가 1926년 사망한 뒤, 농장을 인수한 이엽사[12]에 의해 자행된 소작료 7.5할(75%)이라는 고율의 소작료가 있었다.

둘째. 옥구농민항쟁의 주체적인 원인은 김행규, 김준철을 중심으로 하는 고려공산청년회[13] 옥구 야체이카(яче́йка)의 결성과 활동, 장태성, 박상호 중심으로 한 혁신청년들이 만든 서수청년회, 옥구농민조합 서수지부의 결성이 서수리 내에서 조직을 만들고, 서수리 내부에서부터 형성된 민족 항쟁 의식을 고취하였다.

셋째. 1927년 추수기, 이엽사의 소작농들은 이엽사농장에게서 소작료 7.5할을 납부하라는 통보를 받게된다. 이에 옥구농민조합 서수지부에선 소작료 인하를 위해 이엽사농장에게 교섭하려하였다. 하지만 일본제국 경찰이 전면적으로 개입하여 농민조합 대표 '장태성'을 불법 구금하는 사태가 일어나고, 조합 대표 '장태성'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옥구농민항쟁이 일어나게 된다.

2.2. 11월 이전

이엽사농장의 사업 통제체제는 지배인의 지휘 아래 사음(舍音)이라고 불리는 '사무원이 각각의 소작농을 개별적으로 통제'하는 것이다. 또한 사무원은 각각의 소작농에게서 소작료를 받아내게 하기 위해 막강한 권한[14]을 소유하고 있었다.

1927년 10월 추수기에 이엽사농장의 일본인 사무원 1명과 홍순영, 최장엽 등 한국인 사무원 2명이 3인 1조가 되어 소작료를 책정하였다. 이는 소작인의 입회 없이 비밀리에 다니며 자의적이고 일방적인 소작료 책정이었다. 더군다나 자신과 친분이 있는 지인과 친척의 소작료는 인하하였으나 농민조합원의 소작료는 악의적인 세율[15]을 부과하였다. 또한 추수가 전부 끝난 후에 소작료 납입 통지서[16]를 보내어 대응할 수 없게 하였다.
추가로 대부분의 소작농들은 농장 사무원들의 다양한 요구와 위협적인 언사로 고단한 이중, 삼중의 착취와 압박에 시달렸다.

11월 9일 오후 2시 옥구농민조합 서수지부의 전 조합원들은 정능학의 음식점[17]에서 전 조합원이 결집하는 확대회의를 개최하였다. 조선농민총동맹[18]의 대표와 조선공산당의 요인인 강철이 참여했고, 조선공산당 청년 하위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 옥구 야체이카(яче́йка)의 이대로가 참석하는 등 일반적인 조합회의가 아니었다.

회의는 조합원들의 이름을 한명씩 호명하여 서로를 모두 확인하는 의식을 한 뒤, 농민조합의 경과보고 후, 임시집행부 의장인 장태성이 사회를 보고, 박상호가 서기로 선출되어 당면한 문제인 '과다한 소작료'에 대처하는 중요한 결의 4개를 의결하였다.
11월 9일 옥구농민조합 서수지부 확대 긴급회의 <결의 내용>

1. 이엽사 농장이 무리하게 부과한 7.5할의 소작료를 4.5할로 이하로 감삭하도록 요구하고 이러한 대첵을 임시집행부에 일임할 것.
2. 소작료 납부에 사용되는 포대는 가마니를 사용하지 않고, 섬을 사용할 것.
3. 소작료 납입은 감하운동의 결과를 보고 하는데, 집행위원회의 통지에 따를 것.
4. 조합비 납부는 매년 30전으로 할 것.[19]

2.3. 11월 20일~24일

교섭위원인 장태성과 김행규는 이엽사농장 지배인 사이토 신이치(斎藤信一)를 찾아가 교섭하여하였으나 사이토는 농민조합을 인정하지 않았다. 또한 교섭원들과 이해관계가 맞지 아니하다고 교섭을 거부하였다.

이후 1927년 21일 옥구농민조합 서수지부 임시총회가 열리며 교섭 전말을 보고하였으며, 당시 참여한 인원들은 자체 결속을 위한 맹세와 함께 두번째 교섭을 결정하였다. 추가로 두번째 교섭도 실패한다면 '소작료 불납동맹'을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1] 이엽사 농민항쟁, 옥구서수농민항쟁, 서수 소작쟁의 등으로도 불린다.[2] 또한 현재 군산시의 행정구역과 다르기 때문에 현재 군산시의 행정구역으로 맞추어 부르게 될 경우 '옥구농민항쟁'이 아닌 '서수농민항쟁'이 옳은 표현이다.[3] 농민조합 지도자 장태성을 군산 경찰서로 압송하자, 노동조합원과 인근 소작인 500여 명이 시위를 하러 간 사진[4] 명예훼손 및 협박[5] 이는 농장의 문제점인 수탈을 일부 불량 사원의 문제로 치부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6] 舊 옥구, 현재 서수면 일대[7] 장공욱(張公郁)[8] 일반적인 일제강점기 소작쟁의와 달리, 일본 제국 경찰과 일본인 지주의 폭압에 맞서 생존권을 지켜내기 위한 농민 투쟁의 이미지가 강하다.[9] 옥구농민항쟁 당시, 장태성이 만든 야학(夜學)에서 10대 학생들이 배운 창가[10] 정확한 녹취는 없으나, 2절 또한 있엇던 것으로 추정됨.[11] 1905년 서수면에 설립된 농장이다.[12] 이엽사는 일본인 지주 시라세이(白勢春三)와 시라세이(白勢量作)가 1926년에 설립한 전형적인 식민농업회사이다. 본점은 전주[13] 조선공산당의 청년조직. 박헌영의 집에서 비밀리에 조직된 공산주의 청년동맹 조직이다.[14] 소작농의 소작권 이동, 소작료 결정, 소작료 수납 등의 소작농에게 압박을 줄 수 있는 권한이다.[15] 8할 이상의 경우도 적지 않았다.[16] 대부분이 7할 이상이다.[17] 정확한 위치가 확인되지 않았다.[18] 1927년 농민 운동의 전국적 지도 기관[19] 1928년 서울-인천 간 버스요금 95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