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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0년 4월 12일부터 5월 18일까지 KBS 사원들이 방송민주화를 쟁취하기 위해 진행한 파업투쟁. 'KBS 4월 투쟁'이라고도 불린다.2. 배경
1987년 6월 항쟁과 6.29 선언을 계기로 방송민주화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거기에 1987년 노동자 대투쟁에도 영향을 받아 방송사 단위로 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KBS의 <논픽션 드라마>, <뉴스비전 동서남북>이나 MBC의 <MBC를 말한다>, <MBC 리포트(2차)>, <어머니의 노래>와 같은 현대사 재조명 다큐, 탐사보도 프로그램, 사회고발성 드라마 등의 제작이 활성화되기도 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정부 여당은 독재 시절 시녀로만 보았던 방송인들의 방송민주화 운동에 대한 불만을 표하기 시작했다.이러한 불만은 1989년 3월 KBS1에서 만든 <광주는 말한다>라는 5.18 민주화운동 관련 다큐멘터리가 전국적으로 전파를 탈 때 민주정의당 대변인 박희태의 성명을 통해 잘 드러났다. 그는 "우리가 믿고 사랑하던 KBS의 품위, 양식 깊이가 그 정도 밖에 안 되는지 실망치 않을 수 없다."고 하여 공영방송 KBS가 어떻게 그런 프로그램을 방송할 수 있냐는 식으로 실망을 품은 채 개탄한 것이다. 이로써 노태우 정부는 개탄을 넘어 위기의식을 느끼고 방송민주화운동을 좌시하지 않고 탄압에 돌입했다.
3. 발단
1990년 2월에 감사원은 KBS 직원에 대한 법정수당 지급을 '예산 변칙 지출'로 몰았고 28일 감사위원회에서 방송민주화에 호의적이었던 서영훈 사장에겐 '중요통보', 윤혁기 부사장과 김은구 인사관리실장, 김부억 노무국장 등 3명을 해임하기로 결정했으며 이들은 KBS 이사회에 일괄 사표를 냈다. 3월 3일 이사회는 서영훈 사장, 윤혁기 부사장, 유태완 감사의 사표를 수리하고 대통령과 공보처장관에게 각각 제청했으며 서영훈은 당초 제출된 이정석 기획조정실장 등 본부장 7명의 사표를 반려했다.#[1]동년 4월 들어서 정부는 서기원 서울신문 사장을 부임시켰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임명된 서기원 사장이 바로 낙하산이었으며 1989년 서울신문 26일 파업 당시 노조에 강경한 입장을 내비친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사실 KBS 특근수당 변칙지출 사건은 당사 직원들이 당연히 받아야 할 돈을 경리상의 실수로 절차상의 하자를 범한 채 1989년 12월에 몰아서 받은 기술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이 언론의 왜곡보도로 KBS가 마치 노사합작으로 34억원을 횡령이라도 한 것처럼 세상에 퍼졌다. 이에 KBS 노조는 이러한 왜곡 보도에 대해 "악의에 찬 행위이거나 정확한 취재와 사실 확인에 게으른 언론이 일부 음모자들의 농간에 넘어간 선정주의"라고 비난했다.
사실 수상한 조짐은 서영훈 사장 해임 한 달 전에도 있었는데 그해 1월 24일에 검찰이 연예PD 6명을 배임수뢰혐의로 구속한 사건은 당시 신문들의 극성스러운 선정주의적 보도경향에 힘입어 방송인들의 윤리성에 일대 치명타를 가했다. 당시 이 보도를 접한 사람들은 이를 우연의 일치로 보왔고 검찰의 선의를 믿고자 했으나 나중에 해당 PD들은 검찰이 고문으로 공소사실의 대부분을 조작했다고 폭로함으로써 이 사건의 정치적 흑막에 대한 의혹을 강하게 부각시킨 바 있었다. 그 증거로 해당 PD들은 한국방송프로듀서연합회 회보 <프로듀서> 4월 1일자에서도 검찰이 방송에 대한 전문성의 이해가 전무한 상태에서 이들을 곡괭이로 때리거나 토끼뜀 등 온갖 가혹행위까지 가하며 무리한 수사를 했다고 증언한 바 있었다.
게다가 2월 14일 최병렬 공보처장관이 대통령에 대한 새해 업무보고에서 새 민간 TV방송 설립을 위해 1990년대에 방송법을 개정하겠다고 말한 것이 밝혀지면서 KBS의 수당 변태지급 파문은 결코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의혹을 짙게 했으며 정부는 1989년 4월에 설립된 '방송제도연구위원회'를 독촉하여 예정보다 한 달을 앞당긴 3월 31일에 민영방송 신설을 골자로 하는 보고서를 확정 발표하게 했다.
4. 전개
민주화 바람을 타고 노동활동이 활발해지던 때에[2] 1989년 공안정국과 1990년 1월 3당 합당에 따라 공안통치로 돌입해 분위기가 역전되어 같은 달 현대자동차 쟁의 중 '무노동 무임금' 원칙 적용, 3월 현대중공업 노동조합 골리앗 농성 강제진압과 같이 노동운동 탄압이 강해졌고 새 사장 부임과 함께 군사정권 시절 관제방송으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되었다.당시 정부와 방송사의 처사에 견디다 못해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언노련)과 KBS 노동조합[3]은 3월 6일 낮 12시 서울 태평로 언론회관 앞에서 '방송자주권 쟁취 결의대회'를 개최했고 다음날 무소속 의원 이철은 <KBS 사태 진상보고서>를 통해 서영훈 사장 퇴임 전 정부의 외압과 안기부 개입 의혹을 제기했지만 일련의 사건들은 한겨레와 일부 지방지들을 제외한 모든 중앙지들이 보도를 외면했다.
3월 8일 노태우 대통령이 서영훈 사장의 면직안을 허가한 후 12일에 서영훈 사장은 이임식을 통해 물러났으며 4월 3일에 KBS 이사회는 3차 투표를 통해 서기원 사장 임명제청을 결의했다. 다음날 KBS 노동조합은 비상대책위원회를 확대 개편 후 농성을 확대해 4일에는 '서기원 출근저지 특별감시조'까지 만들었다. 이러한 노동조합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4월 9일 노태우 대통령은 서기원 당시 서울신문 사장을 KBS 사장으로 임명시켰다. 당초 4월 11일에 취임하려던 서기원 사장이 KBS 노동조합 서기원 사장 출근 저지조에 의해 출근을 못 하자[4] 12일에 청원경찰과 각 본부장, 국/실장 등 2백여 명의 호위를 받아 사장실로 몰래 기습 출근했는데 직후 KBS 본관의 모든 엘리베이터 작동을 중단시키고 6층으로 향하는 모든 출입구의 셔터를 내려 노동조합 측의 진입을 차단시키고 KBS 노조 위원장을 사장실로 불러 노조원들의 행동을 자제시키라고 지시했다. 그제서야 서기원 사장이 KBS 사장실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게 된 노조원들은 오전 10시 25분경에 계단으로 6층을 올라간 뒤 닫힌 셔터를 장비를 이용해 부수고(!) 사장실 앞 복도로 진입해 농성을 하였다. 이에 경찰 측은 백골단 3백여 명을 여의도 본사에 투입시켜 사원 117명을 강제연행해 갔다. 이에 13일 비대위 측은 전국비상사원총회를 통해 서기원 사장의 퇴진을 요구하며 송출기술부를 빼고 무기한 제작거부 투쟁에 돌입하였으며 25일에는 3,000여 명의 조합원이 참가한 가운데 남산에서 여의도까지 '언론민주화쟁취요구 평화행진'을 진행했다.
경찰은 14일에 일단 철수 후 연행자 전원을 석방하는 한편 9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동월 28일 비대위 측은 농성을 해제한 후 30일부터 방송 정상화를 하기로 뜻을 밝혔다. 그러나 30일 오후 사원총회의 비대위 결의사항 찬반투표에서 정상화 방안을 거부하는 쪽으로 기울자 경찰은 여의도 KBS 본사 주변에 전의경 3천여 명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사원들의 투표 결과가 예상대로 부결 쪽으로 나타나자 개표 종료 2시 30분 만에 KBS에 들어갔다. 경찰측은 밤 11시 5분에 '여의도 진압작전'이란 명칭으로 KBS 농성 강제해산에 돌입해 50여분 만에 본관 2층 로비에서 사원 333명을 강제로 끌고 갔고, 이들 중 7명을 구속했다.
KBS 9시 뉴스도 파업으로 인해 4월 12일부터 임시 스튜디오에서 진행했고 박성범 보도본부장 겸 당시 KBS 9시 뉴스 앵커는 사원들의 파업 보도 요구를 무시해서 KBS 사태를 보도하지 않자 노조원들이 스튜디오에 들어오면서 날씨와 스포츠 뉴스, 클로징도 하지 못한 채 12분만에 방송이 일찍 종료되어 버렸다. 그 다음 날인 13일은 9시 뉴스 중단을 단행해서 내용을 엄청나게 간추려 버려 당초 45분짜리가 13분으로 줄어든 채 뉴스가 나간 후 방송이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도 벌어졌다.[5] 14일에는 양휘부 외신부장이 임시로 앵커를 맡아 상당수 보도내용을 연합통신 기사로 때웠다.
타 방송사 노조들의 연대투쟁도 시작됐는데 MBC 노조는 KBS 2차 경찰 투입 직후 비상대책위원회를 열었고 그 결의에 따라 서울 본사는 5월 1일 10시에 비상총회를 열어 전면 제작거부에 들어갔다. 19개 지방 MBC도 비대위의 결정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연대 제작거부에 들어갔다. 이미 4월 23일부터 무기한 철야농성을 벌여 왔던 CBS 노조도 같은 날 MBC와 동시에 제작 거부에 돌입하여 모든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음악만 내보냈다. 5월 2일엔 KBS-MBC 양 방송사 노조가 '구속동지 석방촉구 및 노태우정권 규탄대회'를 열었고 5월 4일에는 지난 달 30일부터 피신 중이던 안동수 비대위원장 대신 김철수 기획제작국 PD를 새 위원장으로 선출해 방송 정상화와 서기원 퇴진을 요구하며 100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결과적으로 이 파업은 노조의 역할을 공고히 했다는 나름대로의 성과를 거두었지만 후술할 언론들의 편파보도로 인해 폭넓은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날이 갈수록 내부 분열까지 겹쳐 어려움을 겪었다. 5월 10일에 수배 중이던 안동수 전 비대위원장과 김영달 노조 무임소국장이 검찰 및 경찰에 각각 자진출두 후 구속되었고 KBS 노조는 11일에 7일 후 방송 제작업무에 복귀한다고 다짐하여 18일 방송 제작업무에 복귀했다.
5. 언론들의 반응
5.1. 사설
4월 12일 공권력 투입을 수반한 서기원의 사장 취임 이후 발생된 KBS 사원들의 방송파업에 대한 일간신문 사설 내용들도 하나같이 사원들에 대해 한결같이 비판 일변도였다. 한겨레만이 4월 14일자 사설 <언론계가 힘을 모아 KBS 살리자>를 비롯해 19일자 <서기원씨 사퇴가 유일한 해결책>, 21일자 사설 <정권의 '방송 장악'은 허망한 꿈>까지 세 차례에 걸쳐 KBS 사원들의 입장을 지지했을 뿐 나머지 8개 중앙지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정부도 잘못됐고 KBS 사원들 역시 잘못했다는 소위 '양비론'을 펼쳤다. 거의 모든 사설들이 천편일률적으로 KBS에 대한 정부의 공권력 투입은 성급했다는 것을 지적하는 한편 파업을 하는 KBS 사원들에게도 '파업 그만하고 방송 정상화나 해라'는 식으로 본업 복귀를 촉구했다.대표적인 사례로 경향신문은 4월 14일자 사설 <KBS는 국민의 것이다>에서 "교조적인 논리에 얽매여 타협 없는 극한투쟁으로 치달을 경우 더 큰 불행을 초래하게 된다."는 식으로 KBS 사원들을 꾸짖었다. 국민일보도 사설 <방송은 일단 정상화시켜야>에서 "국가에 비상사태가 나거나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에는 방송이 중단되지 않아야 한다"며 "국민을 경시하고 우롱하는 처사는 당장이라도 중지해야 할 것이다."고 밝혔다.
같은 날 동아일보 사설 <심심찮은 KBS 사태>, 중앙일보 사설 <일단 방송은 제대로 하라>, 한국일보 사설 <우려되는 KBS사태>에서도 비슷한 주장을 했고 4월 15일자 서울신문 사설 <방송은 정상화돼야>, 조선일보 사설 <KBS는 누구와 싸우나>에서도 파업을 맹비난하고 제작복귀를 촉구했다.
거기에 4월 19일 세계일보 사설 <방송부터 정상화시켜라>에서 "국민들은 방송사 내부 분쟁으로 알 권리를 차단당하고 있는 셈"이라며 다른 문제는 뒤로 미루고 방송을 우선 정상화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20일자 경향신문 사설 <방송은 정상화해야>, 중앙일보 사설 <KBS사태 수습의 원칙>에서도 비슷한 주장을 폈다.
5.2. 칼럼
대다수 중앙 일간지 칼럼들도 양비론을 펼치면서 KBS 사원들의 방송 정상화를 촉구했다. 다만 동아측 칼럼들만이 사설에 비해 비교적 KBS 사원들의 입장에 동조하는 성향을 보였다.1990년 4월 15일 당시 서울신문 논평위원이었던 송복 연세대 교수는 칼럼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라>에서 "이번에 KBS 노조가 하고 있는 행동은 철저히 남의 영역에 대한 월권행위"라고 주장하고 KBS 사원들이 "어떻게 얼굴을 들고 활보할 수 있겠는가"라며 의문을 제기하는 등 KBS 사원들을 강하게 비판했다. 조선일보 4월 18일자 홍사중 칼럼 <중단된 방송>에서도 비슷한 의견을 냈다.
4월 17일 동아일보 <동아시론>에서 박권상 당시 시사저널 편집인은 <KBS 사태의 실마리를 풀려면>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구체적인 주장의 개진 없이 사태해결 방법으로 영국 BBC처럼 우리 정부가 진정한 방송의 공영화를 스스로 정치철학으로 삼고 있느냐는 여부에 대한 확고한 의지표명이 있어야 한다고 원론적인 주장을 폈다. 반면 같은 날 조선일보 <TV 주평>에서는 노사 양측이 방송민주화나 공영방송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의지를 독점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4월 19일에 동아일보 생활부장 어경택은 '오늘과 내일'이라는 칼럼란에서 <서 사장 용퇴하시오>라는 칼럼을 내 서기원의 용퇴를 요구하면서 "사원들이 대적하고 있는 상대방은 파행방송에 따른 시청자들의 불만을 모아 그 비난의 화살을 제작을 거부하고 있는 사원들에게 돌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여 조속히 방송을 정상화하라는 충고를 했다. 거기에 당일 서울신문 '방송칼럼'은 "KBS의 사내 문제로 시청자 권리를 박탈당한 많은 시청자들의 분노의 표출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KBS 사원 대표 고희일은 같은 날 국회 문공위 증언에서 "녹슨 수돗물을 계속 가정에 보낼 수 없어 잠시 수도관 공사를 한 뒤 맑은 수돗물을 보내고자 하는 것이니 양해를 바란다."고 밝혔다.
6. 이후
KBS 사태를 진압한 노태우 정부는 그 여세를 몰아 6월 14일에 새로운 방송제도 개편안을 발표하고 7월 11일과 14일에 방송법과 한국방송공사법, 한국방송광고공사법 등 방송 관련 3개 법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이 법안들의 핵심 골자는 민방 신설과 방송위원회, 한국방송광고공사, 교육방송에 대한 정부의 통제 강화 등이었는데 특히 개정 방송법은 방송위의 고유 권한이었던 방송정책 최고결정권을 공보처에 넘긴 채 방송내용 심의에만 국한시키도록 했고 한국방송공사법은 KBS 이사회의 기능을 경영에만 국한시켜 사장이 직접 본부장을 임명하도록 했으며 이사회는 매년 경영평가를 실시해 그 결과를 매년 공보처에 보고하고 KBS 경영과 관련해 공보처장관 요청도 신중히 검토토록 했다. 방송광고공사법도 '공익자금관리위원회'를 설치해 그 자리를 친정부 인사로 채우도록 했다.이에 방송인들은 노태우 정부의 방송장악 음모를 읽고 다시 저항에 나섰다. 7월 12일에 MBC 노조가 먼저 제작거부에 돌입하여 KBS, CBS, PBC 등 나머지 3개 방송사 노조는 '연대 제작거부'라는 결의를 표명하기에 이르렀지만 연대 제작거부도 한계가 있었고 결국 4개 방송사 노조는 투쟁 3일 만에 '프로그램을 통한 투쟁'이라는 대안을 내건 채 제작을 재개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프로그램 투쟁의 허점은 KBS는 물론이요 MBC에서도 곧 드러나고 말았다. 1989년에 부임한 MBC 최초의 방송인 출신 사장 최창봉이 1990년 3당 합당, KBS 사태, 방송법 날치기 통과 등으로 정권 눈치를 보며 태도를 바꾸었다. 최 사장은 8월 24일에 보도국장을 포함한 11명의 국장급 인사를 단행하면서 국장 추천제를 규정한 단체협약을 위반하더니 9월 15일에는 PD수첩 - '그래도 농촌을 포기할 수는 없다[6]' 편의 방송 취소에 항의한 안성일 노조위원장에게 6개월 정직, 김평호 노조사무국장에게 해고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9월 21일에 자신에 대한 노조의 불신임안이 가결되자 10월 6일에는 안 위원장까지 해고시켰다.
심지어 공정방송 최후의 보루였던 MBC 보도국도 노태우 정부에 굴복해 절망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이러한 세태를 보여주듯 10월 17일에 기자 일동이 발표한 성명서에서는 "MBC 보도국이 다시 신분상승과 권력 배분을 위한 복마전이 돼 가고 있으며, 편집은 귓속말과 은밀한 전화로 이루어지고 눈치가 편집방향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가고 있다."고 비판했다. 게다가 이달 19일에 전체 MBC 보도국 소속 기자들도 "늘상 집권세력에 야합하려는 습기찬 음모와 알량한 기득권을 향유하려는 독기가 서려 있음"이라고 개탄했다. 이러한 노사 간의 대립은 1992년 총파업으로 이어지는 요인들 중 하나가 됐다.
다른 한편 동년 8월 7일에는 KBS 사태 구속자들 중 이경희 KBS 노조 여성국장과 김영달 전 무임소국장이 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에서 징역 1년 및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고 16일에 김만석 기자, 9월 3일에 노조 조직국장 전영일 및 기술인협회장 안덕상, 25일 공정방송위원회 간사 이임호 기자와 구능회 노조 청주지부장 등도 각각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당시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9명은 1991년 3월부터 업무에 복귀됐지만 이들 중 6명은 12월에 안동수 및 김철수와 함께 유죄가 확정됐다는 이유로 해고 처분을 받았다.[7] 이임호 기자도 9월 23일 과로로 숨을 거뒀다.
10월 19일에 KBS 사태와 관련하여 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구속된 KBS 전 노조위원장 안동수와 당시 노조위원장 김철수는 서울지법 남부지원 선고공판에서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들이 적법절차에 따른 공정방송 추구 노력을 저버렸고 극단적 제작 거부로 인한 파행 방송이 국민생활 전반에 불안을 초래한 점은 실정법 차원에서 정당화 될 수 없다"는 취지를 밝혔다. 이에 안동수와 김철수가 항소했으나 1991년에 안동수는 서울형사지법 항소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은 후 동년 5월 20일 만기 출소됐고 김철수는 1991년 항소심에서 징역 1년 6개월 및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이에 구속됐던 이들은 'KBS구속자원상회복투쟁위원회'를 결성해 노조간부 8명의 원직복직 투쟁을 벌여왔으며 문민정부 출범 후인 1993년 3월에 구속자들 중 10명이 사면되었다.
1991년 1월 서기원 사장이 KBS 정상화를 이유로 사표를 제출했다가 반려됐고 그 사이 지방선거에서도 민주자유당이 압승을 거두었고 1992년 총선 결과에도 민주자유당이 무소속 의원 확보로 과반은 넘게 차지하였기에 서기원 사장은 3년 임기를 다 채우고 물러났다. 한편 이 기간 동안 노태우 정부에게 친화적인 논조로 되돌아오면서 KBS 9시 뉴스의 시청률은 내려앉아서 10%대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8]
7. 여담
재야 현대사학자 임영태는 해당 파업에 대해 방송인들의 의식구조를 변화시켰다고 해석했다. 5공 시절 언론인들은 권력에 굴종하며 높은 보수와 사회적 지위를 누려 왔지만 KBS 파업 당시 이들에게도 공권력이 가차없이 폭력을 가함으로써 그때의 특권은 상대적인 것이었다고 깨달은 것이다. 그는 이 상황으로 볼 때 방송이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하지 않으면 국민들의 진정한 스타는 될 수 없었던 것이라고 견해를 피력했다.당시 이계진 아나운서도 파업에 참여하였다.
이 사태로 당시 코스피지수는 대 폭락했다. 특히 1990년 4월 26일은 28.96포인트, 3.83%의 폭락한 726.11포인트를 기록했는데 이는 1990년 당시 최대 하락폭 및 하락률을 기록했다. 당시 전 업종이 하락했으며, 오른 종목[9]은 하나도 없는 날이 되었다.
한편 이 사태 당시 대하드라마 <역사는 흐른다>를 비롯해 <TV 손자병법>, <울밑에선 봉선화>, <파천무>, <겨울나그네> 등 각종 드라마들이 잠정 중단되었으며 특히 <역사는 흐른다>는 한 달여 전 2부로 돌입했으나 파업 때문에 3주 간 맥빠진 적 있었다. 새로 방영하려던 <꽃피고 새울면>과 <아내의 뜰>은 스튜디오 극화를 못해 첫 회부터 펑크났고 <토요극장>은 첫 방영도 하기 전에 촬영은 커녕 대사 연습조차 못 하고 아예 엎어졌다. 이들 중 <꽃피고 새울면>에 출연할 나한일은 이 드라마를 통해 멜로 스타로 변신하려고 했으나 파업 때문에 늦어져 부인의 출산 및 육아에 신경써 왔고 <울밑에 선 봉선화>에 출연해 온 김미숙은 이 작품이 잠정 중단된 후 <어둔 하늘 어둔 새>를 통해 MBC로 자리를 옮겼다.[10]
아울러 김미숙 외에도 전인화, 김희애, 조민수, 김영철, 최재성 등의 인기 배우들이 KBS 사태 후 MBC를 비롯한 다른 방송사로 자리를 옮겨야 했고 반대로 <겨울나그네>를 통해 첫 KBS 드라마에 출연한 정성모는 이 파업으로 인해 사실상 실업자로 잠깐 전락했으며 동 드라마 주연이던 최화정은 CBS 라디오 <12시에 만납시다> MC로 열을 올리기도 했다.[11] 유동근-전인화 부부는 파업 기간 동안 연기를 못 했으나 그나마 전인화가 MBC <오늘의 요리> MC를 맡아 한숨을 돌리긴 했으며 유동근과 같이 <파천무>에 나온 조민수는 막 개국한 불교방송의 음악 프로 <BBS 음악여행> MC로 연기 외적인 활동을 처음 시도했다.
김혜수, 이미연, 손창민, 하희라 등 대학교-대학원 학생 연기자들은 학점 만회에 전념해 왔고 특히 김혜수는 밀린 학업 겸 CF 2개 출연으로 수입을 더 올렸다. 손창민은 영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이후 드라마 주연을 거듭 맡다가 대학원 과정이 밀렸으나 파업 이후 전부 해결했지만 이 여파로 7월 예정이던 미국 연수 계획 무산을 걱정하기도 했다. 코미디언들 중 장두석(당시 KBS 희극인실장)은 당시 건강이 안 좋던 터라 전라도 지역을 배낭여행하면서 피로를 풀었고 오재미와 김진호는 밤낚시, 전유성과 김정식은 미국 로스앤젤레스 한인나이트클럽 출연차 해외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심형래는 파업 기간 동안 <심형래의 쫄병군단>, <별난 두 영웅> 같은 영화 겹치기 출연 등으로 바쁘게 보내기도 했고 김한국은 파업 기간 중 집에서 책을 보며 개그 아이디어 구상에 전념했으며 당시 청주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졸업반이었던 성낙앙은 졸업을 위해 교수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학점 구걸로 바쁘기도 했다. 김미화도 그간 바빠서 못한 충치 12개 치료를 마쳤다는 등 소소한 일화들도 있었다.[12]
가요계에서는 조정현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가수로 꼽히는데, <그 아픔까지 사랑한거야>가 골든컵을 놓치고 3주 수상에 그쳤으며[13] 후속곡인 <슬픈 바다>도 충분히 1위 할 만한 노래인데도 불구하고 시간이 흘러 버려 10위권 정도에 그쳤다.
KBS2의 주말 음악 프로그램 '쇼 특급'의 후속작인 '쇼 토요특급'은 1990년 3월 첫 방송 예정이었으나 이 사태로 인해 방송이 연기되고 3개월 후에 첫방송되었다. 이에 따라 MC로 내정된 임하룡은 파업 기간 동안 MC 구상에 매진해야 했다.
라디오는 수도권 기준으로 KBS 1FM과 KBS 2FM이 같은 내용으로 방송되었고 지역국 음악FM에서만 하던 혼합편성을 1990년 4월 13일 오전까지 적용하다가 오후부터 진행자 없이 음악만 송출하였다. AM방송인 KBS 제1라디오와 KBS 제2라디오, KBS 라디오서울도 같은 내용으로 음악만 송출하였다. #[14]
KBS3는 교육 프로그램만 그대로 정상 방송했다.[15]
8. 출처
- <KBS 연지 1991> - 한국방송공사. 1991. p38~39.
- <한국 현대사 산책 - 1990년대편 1권> - 강준만 저. 인물과사상사(2006) p50~58.
-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6. p557
9. 관련 자료
10. 관련 문서
11. 둘러보기
A: 산업재해 / B: 직장 내 괴롭힘 / G: 갑질 사건 / L: 노동운동 / X: 노동착취 / Na: 국가조직 연루 및 개입 / ?: 사건 경위 불명 | }}}}}}}}} |
[1] 사태 후 김은구 인사관리실장과 김부억 노무국장은 각각 방송연수원, 방송심의실로 각각 전보.#[2] 1990년도의 국가슬로건이 '산업평화 정착의 해'였을 정도. 1989년에 메이데이 100주년과 공안정국 등의 영향으로 노동쟁의가 최고조에 달했기 때문이다.[3] 지금의 제1노동조합에 해당한다. 2009년에 파업했던 언론노조 KBS본부는 제2노동조합에 해당하며 이 안의 역학관계는 복잡하다. 이 때만 해도 제1노조가 진보적 성향이었으나 2000년대에 들어와 보수화되면서 진보적인 성향의 사원들이 갈라져 나간 것이 제2노동조합이다.[4] 4월 11일 오전 10시 25분경에 KBS 본관 정문 앞에 도착해서 사옥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노동조합원들에 의해 들어가지 못했고 오후 2시 20분경에 간부 직원, 청원경찰을 대동하고 다시 KBS 사옥 출입을 기습적으로 시도하였다. 이번엔 본관 6층에 있던 사장실에 출입하는 데 성공했으나 얼마 안 가 노동조합원들이 사장실에 몰려 들어가서 서기원 사장을 사장실에서 강제로 쫓아냈다.[5] 이러한 중단은 뉴스9 역사상 초유의 사건이다. 정확히 24년 후 길환영 사장 퇴임을 위한 총파업 때도 이 상황은 이어졌다.[6] 9월 18일 방영 예정분.[7] 당시 해고자 8명 중 6명은 1992년에 회사 측이 자회사 취업 형식으로 복직시키기로 했으나 실제로 안 된 것으로 보이며 당사자였던 8명은 서울지법 남부지원에 KBS를 상대로 해고무효확인소송을 내 1993년에 승소 판결을 받아냈다.[8] 의외로 KBS 9시 뉴스가 수위권의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중장년층 이상 시청자층에게 압도적인 시청률을 기록하게 된 것은 홍두표 시절부터였고 서기원 사장 때까지는 MBC 뉴스데스크가 똑같이 친정부 성향임에도 불구하고 시청률면에서 압도적이었다.[9] 실제로는 하락종목이 743개, 보합이 20개이다.[10] 이 작품에서 홍이숙 역을 맡았던 김보연은 <어둔 하늘 어둔 새>에 앞서 KBS 2TV <꽃피고 새울면>에 캐스팅되었으나 작가와의 불화로 출연을 중단한 데 이어 KBS 사태까지 발생하자 <어둔 하늘 어둔 새>로 발길을 돌렸다.[11] 이후 최화정은 1993년 KBS 2FM 가요광장 DJ로 KBS에 복귀했고 1996년 11월 14일 SBS 파워FM 개국 이후 파워타임을 28년 동안 진행하여 명DJ의 커리어를 쌓았다.[12] 이하 <조선일보> 1990년 5월 8일, <TV가이드> 10권 19호 p48~51 등 참고.[13] 특히 1주 1위 후 5주 간 결방된 뒤에도 연속 1위를 한 걸 감안하면 무난하게 골든컵을 탈 수 있었을 것이다.[14] 2FM이 광고방송을 시작한 후 2017년 공영방송 총파업 기간에 2라디오의 일부 프로그램이 결방하고 2FM의 프로그램을 릴레이한 적이 있고 MBC 라디오 음악여행으로 진행자 없이 음악만 송출하였다.[15] 그 뒤 KBS3은 EBS로 개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