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7-23 11:51:22

10.26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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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헌정 쿠데타·반란 (시도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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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정부 사건 주동 세력
1948년 이승만 정부
제1공화국
제주 남로당 무장반란 사건*
(제주 4.3 사건)
남로당 제주도당
(김달삼 · 이덕구 등)
여수 14연대 반란 사건*
(여수·순천 10.19 사건)
남로당 좌익세력
(지창수 · 김지회 등)
1952년 1차 개헌
(발췌 개헌)
이승만 정권
1954년 2차 개헌
(사사오입 개헌)
이승만 정권
1961년 장면 내각
제2공화국
5.16 군사정변 군사혁명위원회
(박정희 · 김종필 등)
1972년 박정희 정부
제3공화국
10월 유신 박정희 정권
1979년 박정희 정부
제4공화국
10.26 사건 김재규 등
위기관리정부
제4공화국
12.12 군사반란 하나회
(전두환 · 노태우 등)
1980년 5.17 내란 신군부
(전두환 · 노태우 등)
1990년 노태우 정부
제6공화국
청명계획* 국군보안사령부
2013년 박근혜정부
제6공화국
이석기 내란선동 사건* 통합진보당
(이석기 등)
2017년 2017년 계엄령 문건 사건* 국군기무사령부 및 군 일부 세력
*표시가 붙은 경우는 성공하지 못한 쿠데타 및 반란을 의미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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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이후 현장 검증에서 김재규김계원(왼쪽에 묶여있는 안경 낀 인물)이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모습. 사건 관련으로 제일 유명한 사진일 듯하다.


당시 사건 관련 TBC의 라디오 뉴스 보도.

1. 개요2. 사건의 전말
2.1. 사건 직전2.2. 밤하늘을 가른 총격
3. 후속조치
3.1. 결과
4. 원인
4.1. 왜 10.26이 발생하였는가?4.2. 재조명
4.2.1. 김계원의 증언4.2.2. 정보부 수사 국장의 진술
4.3. 자신이 최고에 오르려는 정변
5. 트리비아6. 어록7. 사진8. 창작물9. 관련 인물
9.1. 가해자9.2. 사망자9.3. 생존자9.4. 후속 조치
10. 관련 문헌

1. 개요

1979년 10월 26일[1] 저녁 7시 40분쯤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전가옥[2]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박정희대통령경호실장 차지철 등을 암살한 사건이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현직 국가원수가 살해당한 대사건이다.[3]

1972년에 시작한 유신이래 1차오일쇼크를 극복하며 고도경제성장을 이룩하였지만 1970년대 후반에 고도성장을 뒷받침한 매우 왕성한 설비투자가 과잉투자로 독변해 부작용이 나타나 이는 부실기업 및 재고정리 문제가 발생하고 결정적으로 제2차 석유 파동의 여파로 경제 위기에 직면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미국과의 불화와 대내적으로는 김영삼이 총재에 당선된 이후 대여강경투쟁노선을 내걸어 YH 사건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 등으로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1979년 10월 16일 부마항쟁이라는 반정부 시위의 형태로 폭발하면서 박정희 정권에 큰 위기가 닥치게 된다.

이렇게 어지러운 시절에 10월 26일, 궁정동 안가에서의 만찬 도중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박정희와 차지철 경호실장을 PPK 권총으로 저격하였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의 몇 가지 설이 있다.
  • 차지철과 갈등을 빚던 김재규가 차지철을 제거하면서 박정희도 같이 암살했다는 설. 이 시기 차지철과 김재규의 상호견제는 극에 달해있었는데, 이러한 암투 속에서 박정희가 차지철 손을 들어주는 경우가 많자 결국 자신이 밀렸다고 판단한 김재규가 10.26이라고 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내렸다는 것이다. 게다가 차지철은 성격이 안하무인이라 박정희의 총애를 받자 경호라는 본연의 임무를 넘어서서 기타 영역에까지 손을 뻗치는 월권 행위를 일삼았는데, 이에 김재규 등 측근들이 차지철의 월권을 경계하는 충언을 했지만 그때마다 박정희는 차지철을 오히려 두둔했고, 도리어 차지철 앞에서 김재규에게 면박을 주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로 인해 차지철의 횡포는 더 심해졌고, 때문에 거사했다는 것. 이는 과거 그의 제자였던 이만섭이 추정하는 설이기도 하다. ##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던 김계원도 김재규가 거사 직전 " '대위밖에 안 지낸 자식이 장군, 장관 알기를 우습게 여겨! 내가 하는 일을 모조리 사사건건 방해하며 각하께 바르게 보고하지도 않고...' 하고 말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4]
  • 여기서 한 발짝 더 들어가면 10.26이 사전계획된 것이 아니라 순간적인 분노를 못 이겨 충동적으로 저지른 우발적 살인이라는 설도 있는데, 이는 김재규가 거사 직후 중정이 아닌 육본으로 가는 등 김재규의 행동이 계획적이라기엔 너무 어설펐기 때문이다. 김종필도 10.26의 발단은 차지철과 김재규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며, 법정에서 김재규가 민주화투사로 둔갑되었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5]
  • 그 밖에 미국의 음모라는 설, 김재규가 CIA 요원이라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부터, 미국에 포섭된 주변 인물들이 그를 그렇게 몰아갔다는 버젼까지 다양한 바리에이션이 있다. 미국의 동기로는 “박정희가 미국의 의사를 거스르며 핵무기를 개발하려 했기 때문에 제거했다”는 것이 단골 레퍼토리.하지만 당연히 신빙성 없는 음모론일 뿐이다.

JP의 경우 10.26 직후 그는 민주공화당의 총재로 추대되었는데, JP는 김재규가 중앙정보부장으로 있던 시절, 청구동 가택수색까지 당한터라[6] 김재규에게 그닥 호의적이지 않았다.# 거기다 10.26 이후 JP는 YS, DJ과 함께 개헌과 민주회복 이행에 공감하고 협조해나갔던 행보로 미루어보았을 때, 김재규의 구상에 따랐을지도 의문이 존재한다.##

아무튼 이 10.26 사건으로 말미암아 핵심인물이 제거되었으니 자연히 유신 체제는 붕괴되었다. 다만 이후 군부의 사조직 하나회 세력을 업은 전두환이 등장해 12.12 군사반란으로 새로운 군부독재를 불러온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또한 김재규 한 개인의 행위로 인해 유신 체제가 붕괴된 것은 단견이며, 유신 체제는 이미 내부 권력의 모순과 사회 구조적으로 붕괴의 전조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김재규 한 개인의 행위는 민주화운동의 큰 흐름과는 관계가 없다는 주장과 이를 부정하는 주장이 대립하기도 한다.

2. 사건의 전말

2.1. 사건 직전

1979년 10월 26일 아침,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날 박정희는 충청남도 당진군에서 열린 삽교천방조제 완공식과 KBS 당진 송신소 완공식에 참석할 계획이었는데, 이 중 당진송신소는 대북방송 송신 기능 때문에 중앙정보부가 관리하던 보안시설[7]이었고, 중앙정보부의 수장인 자신도 박정희와 같이 완공식(삽교천 포함)에 참석하려고 전화를 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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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삽교천에서.[8]

박정희와 차지철은 일정대로 삽교천과 당진송신소 완공식에 참석한 뒤 오후 2시 반경에 청와대로 돌아온다.

여담으로 당일 아침 박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2층 부속실 옆 식당에서 두 딸 박근혜, 박근영과 식사를 하였는데 이 날도 식사를 마친 다음 1층 집무실에 내려오며 "나 오늘 삽교천에(간다)"라는 말을 하고는 떠났다. 이것이 아버지와 두 딸의 마지막 대화였다.

오후 4시, 경호실장 차지철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전화를 했다. “오늘 저녁 6시, 각하께서 궁정동 안가에서 만찬을 하실 것이니 준비를 해주시오. 참석인원은 김계원 비서실장, 중앙정보부장 그리고 나요."

궁정동 안가는 담장이 드높은 청와대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담장 밖에 별도로 위치한 ‘안전가옥’이였으며, 주로 박정희와 중앙정보부장이 식사모임이나 작은 연회를 가질 때 사용되었다. 안가는 박정희와 비서실, 경호실, 중앙정보부의 관계자 일부만 아는 보안시설이라,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 장군이나 보안사령관 전두환도 암살 사건 수사를 개시하고서야 그 존재를 알았다고 한다.

오후 4시 10분 쯤 차지철은 남산 중앙정보부 집무실로 전화를 걸어 김재규에게 "오늘 대행사가 있으니 궁정동 안전가옥으로 오라"고 연락했고, 김재규는 궁정동에 도착한 후 안전가옥 집무실에서 오후 4시 40분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 육군대장에게 전화로 "오늘 궁정동에서 저녁이나 하면서 조용히 시국 얘기 좀 나누자"며 그를 초대한 뒤, 중앙정보부 제2차장보(국내담당)김정섭을 저녁 6시 30분까지 궁정동 안가로 오도록 했다. 이날 저녁 정승화 총장은 김재규가 대행사에 호출되었다는 핑계[9]를 대었기에, 대신 연회장 옆의 본관 식당에서 김정섭 차장보와 저녁을 같이 했다. 그리고 김재규는 집무실 금고에 보관 중이던 PPK[10]를 꺼내어 탄환 7발을 장전하고, 언제든 쉽게 꺼낼 수 있도록 책장에 숨겨놓았다.

한편 대통령비서실장 김계원은 삽교천 행사에서 돌아온 후 집무실에서 유신정우회 총무 최영희 의원과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날 김계원의 군사영어학교 선배인 최영희가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고 권했지만 김계원은 "언제 각하가 부르실지 모르니 (저녁) 5시까지 기다려 보자"고 했는데, 예상대로 오후 4시 30분 경 차지철로부터 궁정동에 대행사가 있다는 전화 통보를 받았다. 김계원은 "이러니 제가 약속을 못합니다" 라고 쓴웃음을 지으며 최영희의 양해를 구한 후 궁정동으로 이동했다.

오후 4시 30분, 김재규는 곧바로 궁정동 안가, 별채 연회장에 가서 김계원 비서실장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김계원은 오후 5시 40분경에야 나타났다. 두 사람은 안가 정원에 쪼그려 앉았다. 김계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차지철 그 사람 월권을 해서 야단이야, 야당 친구 몇 사람의 말만 듣고 각하에게 보고하여 각하를 강경하게 몰아가고 있단 말야.

기다렸다는 듯이 김재규가 내심을 털어놓았다.
형님, 오늘 저녁 이놈을 해치우겠습니다. 뒷일은 형님이 책임져 주시오.
  • 김재규와 김계원이 친밀한 관계가 된 사연은 196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재규가 당시 육군대학 부총장으로 재직할 때 신임 총장으로 김계원이 취임했고, 그 무렵 마산 시내에서 해군 장교들과 회식 후에 부대로 복귀하던 김재규의 지프가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때 김계원은 벼랑 밑에서 중상을 입은 김재규를 직접 업고 올라와 병원으로 후송시켰고, 이 일을 계기로 둘은 호형호제 하는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 이후 김계원은 예편 후 1969년 10월 김형욱의 후임 중앙정보부 부장으로 취임했으나 불과 1년 2개월 만인 1970년 12월,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인 신민당의 선거 운동에 미온적으로 대응했다며[11] 이후락으로 교체되었고, 이후 김계원은 수 년간 중화민국 대사를 역임한 뒤 귀국하여 10대 총선에 출마하려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 포기하자 김재규가 그를 김정렴의 후임 비서실장으로 천거했다고 한다. 이 때 김계원은 박정희에게 "저는 (비서)실장 그릇이 못 됩니다" 라고 사양할 의사를 보였지만, 박정희는 "실장 일은 안 해도 돼. 나랑 말동무나 해 주면 좋겠네"라고 말했다 한다.

이 말에 김계원이 고개를 끄덕여 이에 동의를 표시했다. 김재규는 차지철로부터 늘 인격 이하의 대우를 받아왔으며 박정희가 있는 앞에서 면박을 많이 받아왔기 때문에, 차지철에 대한 분노는 뼈에 사무쳐 있었다.

차지철의 오만과 월권에 대한 소문은 당시 사회 전반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차지철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김계원 역시 그를 눈엣가시로 생각해 왔다. 김계원은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던 사람이었고, 차지철은 5.16군사혁명 당시의 계급인 대위로 군생활을 마감한 사람이었지만, 당시의 차지철은 박정희 말고는 안하무인 식으로 행동했다. 김계원이 김재규에게 던진 이 말은, 김재규의 가슴속에 불타고 있는 차지철에 대한 증오심에 불을 질렀을지 모른다. “오늘 해치우겠습니다. 뒷일을 책임져 주시오.” 이 엄청난 말에 김계원이 선뜻 동의한 것은 2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는 차지철만이 아니라 박정희까지도 해치우겠다는 의도에 동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김재규가 언젠가는 그런 일을 벌일 것이라는 데 대해 익히 알고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이 된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게 무슨 말이요? 경호실장을 죽이다니?자초지명을 설명해보시오!라며 크게 놀랐어야했는데 이렇지 않았다

비슷한 시각 박선호는 서울 중구 태평로 플라자호텔에서 신재순을, 종로구 내자동 내자호텔에서 심수봉을 태우고 궁정동 안가에 도착했고, 평소 무좀으로 고생하던 중앙정보부 부장 수행비서 박흥주 육군 포병 대령은 잠시 시간을 내서 광화문 에스콰이어 지점에서 새 구두를 샀다고 전해진다. 이 구두는 그날 밤 박정희와 차지철을 쏜 후 자기 구두도 팽개친 채 양말만 신고 차에 오른 김재규가 빌려 신게 된다.

저녁 6시경, 박정희차지철 일행이 궁정동 안전가옥에 도착했고, 대기 중이던 김계원김재규가 맞이하여 안가의 나동 연회장으로 안내하면서 운명의 만찬이 시작되었다. 이 날, 만찬에서 은 박정희와 김계원이 주로 마셨고, 간경변을 앓고 있던 김재규는 박정희의 강권으로 억지로 몇 잔을 마신 반면, 독실한 크리스천인 차지철은 술잔에 입만 대는 시늉만 하였다. 연회 당시 술 이외의 만찬 메뉴는 에 재운 인삼송이버섯 구이 정도를 제외하고는 도라지나물, 전, 생채, 편육 등으로 의외로 평범했지만, 한 상에 30접시 정도가 놓인 호화상이었다.

이때 유명해졌던 술로 당시 박정희가 마셨다던 시바스 리갈이 놓여 있었으며, 현장검증 사진에도 이 술이 재현된 상 위에 올려진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당시 현장을 검증한 장경삼 당시 검찰관의 증언에 의하면, 박정희는 국산양주를 주전자에 담아 마셨는데 사건현장에 가까이 접근할 수 없었던 기자들이 병 모양의 모습만 보고 지레짐작으로 시바스리갈로 착각해 그대로 보도해 잘못된 사실로 굳어졌다고 한다. 판단은 각자 알아서.

또 다른 안가 요리사였던 김일선은 "(박정희는) 콩나물밥을 좋아했고, 대가리 뗀 멸치를 참기름에 볶은 것을 술안주로 즐겨먹었다"라고 회상하였다(출처: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5년 5월 29일 (일) / 제 96 회, 10.26 궁정동 사람들 참고).

당시 언론에서 말했던 사치스러웠던 연회장은 아직 개장을 하지 못했던 연회장으로, 실제 연회와 암살이 벌어진 나관의 시설은 그렇게 화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후 6시 05분, 박정희와 차지철이 현관에 도착했다. 그리고 곧바로 만찬 방으로 안내됐다.
박정희: 오늘 가보니 삽교천 공기는 좋고 공해도 없는데 신민당은 왜 그 모양이오. 오늘 삽교천 준공식 광경을 왜 KBS TV에 보도하지 않지? 정보부장, 신민당 상황은 어떻소?
김재규: 공화당 발표 때문에 다 틀렸습니다. 사표 내겠다고 한 친구들이 다 강경으로 돌아섰습니다. 아무래도 당분간 정 대행체제의 출범은 어렵겠습니다. 그리고 주류가 강해져서 다소 시끄럽겠습니다.
차지철: 그까짓 새끼들 까불면 신민당이고 학생이고 전차로 싹 깔아뭉개 버리겠습니다.
여기에서 정 대행체제라는 것은 9월 7일, 서울민사지방법원이, ‘김영삼이 불법으로 총재가 되었다’며 조일환을 포함한 3명의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들이 제출한 “총재집무집행정지가처분신청”을 서울지방법원이 정당한 사유로 인정해 정운갑 신민당 총재 직무권한체제가 되었음을 말한다.

차지철은 “깔아뭉개 버리겠다”는 말을 던져 놓고 옆 대기실로 가서 기다리고 있던 두 여인을 데리고 들어왔다. 한 여인은 24세의 여가수 심수봉(명지대 경영학과)이었고, 다른 한 여인은 22세의 광고모델 신재순이었다. 박정희 오른쪽에는 신재순이, 왼쪽에는 심수봉이 앉았고, 심수봉은 그녀의 기타를 옆 문갑에 기대어 세워놓았다. 술잔이 돌고 잡담이 오가는 등 주석 분위기가 익어가고 있었다.

만찬을 시작한 지 벌써 1시간이 지났다. 7시 뉴스가 시작되기 바로 직전 김재규는 정승화가 와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만찬장을 빠져나와 작은 정원을 사이에 두고 50m 가량 떨어진 본관(김재규 집무실) 1층 식당 문을 열었다. 정승화는 오후 6시 35분에 안가 별채에 도착하여 중앙정보부 2차장보 김정섭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취기가 오른 박정희는 김계원을 도승지, 김재규를 포도대장이라 부르면서 술을 따라 주었고, 신재순과 심수봉에게 "김 부장은 술이 아주 세니까 많이 권해주게" 라며 농담을 던졌고, 김재규는 연회장을 나와 김정섭 차장보와 저녁 식사 중이던 정승화 장군에게 가서 "갑자기 각하의 부름을 받고 연회에 참석 중이다. 김 차장보가 국내 정치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이 친구와 시국 얘기 좀 나누고 계시라. 끝나는 대로 곧 오겠다."라며 해명한 후, 집무실 책장에 숨겨놓은 자신의 PPK를 바지 호주머니에 숨겨 나왔다. 그리고 김재규 자신과 인연이 오래된 심복들인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과 박선호를 궁정동 안전가옥 마당으로 불러내어 아래와 같이 명령을 내렸다.
김재규: (호주머니의 권총을 보이며) 자네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일이 잘못되면 자네들이나 나나 죽은 목숨이다. 오늘 저녁, 내가(차지철을) 해치우겠다. 방에서 총소리가 나면 너희들은 경호원들을 처치하라. 지금 본관에 육군참모총장과 2차장보도 와 있다. 각오는 되어 있지?
박선호: 부장님, 각하도 포함됩니까?
김재규: 그래.
박선호: 오늘은 경호원이 7명[12]이나 와 있고 날이 좋지 않습니다. 다른 날을 고르시지요.
김재규: 안 돼, 오늘 해치우지 않으면 보안이 누설된다. 똑똑한 녀석 세 놈만 골라 나를 지원하라. 다 해치워 버려. 믿을 만한 놈 세 놈 있겠지.
박선호: 예,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장님, 30분만 여유를 주십시오.
김재규: 30분은 너무 길다.
박선호: 30분이 필요합니다. 30분 전에는 절대 행동하시면 안 됩니다.
김재규: 알았다.

그리고 김재규는 "자유민주주의를 위하여" 라고 중얼거리고는 권총이 든 호주머니를 탁 치면서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일방적인 명령에 박선호와 박흥주 대령은 처음엔 크게 놀랐지만 김재규의 명령에 성실히 따랐고, 같은 해병대 출신으로 박선호의 신임을 받던 안가 경비조장 이기주 예비역 해군 보병하사와 의전과장 차량 운전사 유성옥을 암살조에 합류시켰다. 유성옥은 육군 중사 출신으로 제대 후 중정 운전사로 취직했다가 박선호의 도움으로 1급 근무지인 안전가옥로 배치되었으며, 그 해 11월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김재규는 "3명을 차출하라"고 했으나, 어째선지 박선호는 이기주와 유성옥 2명만 차출했고, 결과적으로 거사를 치르기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추후 동원된 안가 경비원 김태원은 이기주를 따라다니며 차지철과 운전수, 경호원들의 확인 사살만 맡았다.
정총장, 미안하오. 내가 저쪽 행사를 마치고 올 터이니 두 분이 식사를 하고 계시오.

그리고 같은 건물 2층 직무실로 올라가 책장 뒤에 숨겨 두었던 소형 권총을 하의 주머니에 넣고 나왔다. 이 때 해병대령 출신 박선호와 현역 육군대령 박흥주(육사18기)가 뒤를 따랐다. 김재규는 식당 문 어두운 곳에서, 두 사람에게 손짓을 하여 그에게 바짝 다가오라 손짓을 하고는 무서운 얼굴로 말했다

현장에서 박흥주와 이기주, 유성옥은 안가 나동 주방 근처에 세워둔 의전과장 차량인 제미니 승용차 내부에 숨어서 연회장에서 총소리가 나길 기다렸다. 한편 박선호는 안가 경호원 대기실에 있던 청와대 경호실 경호처장 정인형과 부처장 안재송을 처치할 준비를 했지만, 사실 박선호는 이 둘을 사살하기 보다는 잘 설득하여 어떻게든 죽이지 않고 살려볼 속셈이었다. 정인형은 해병장교 동기이자 둘도 없는 친구였으며, 안재송 또한 해병대 후배였기 때문이다.

같은 시각 궁정동 안전가옥에는 정인형과 안재송 외의 차지철의 청와대 경호실 소속 수행원으로 김용태 특수차량 운행계장[13], 박상범 경호계장, 김용섭 경호관이 있었다. 이들은 평소의 관례대로 박정희 경호는 중정 경비원들에게 맡긴 채 나동 주방에서 안가 직원들과 같이 맥주를 곁들여 저녁을 먹었고, 정인형과 안재송은 경호원 대기실에서 별도로 저녁식사를 한 후 AFKN TV 방송[14]을 보고 있던 상황이었다.

* 당시 중앙정보부 안전가옥에서 행사가 있으면 박정희 경호는 중앙정보부 소속의 안전가옥 경비원들이 담당하고 대통령경호실 소속 경호원들은 별도 장소에서 식사를 하거나 휴식을 취하는 것이 일종의 관례였다.[15][16] 청와대 경호실 내에서 경호원들이 사실상 무장해제 당하는 안전가옥의 상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고, 이런 안전가옥의 특성이 박정희의 암살을 초래한 한 요인일 수도 있겠다.

김재규는 주머니에 권총을 넣은 채 만찬장으로 돌아왔다. 7시가 가까워지자 박정희가 시계를 자주 보았다. 이에 차지철이 “각하, 시간이 되면 TV를 켜 드리겠습니다” 하고 안심을 시켰다. 그리고 잠시 후 자동스위치로 TV를 켜서 KBS를 시청했다. 삽교천 제방 준공식 장면이 나왔고, 김영삼과 미국 대사가 만난다는 뉴스가 나왔다. 이 뉴스에 박정희는 심기가 상한 듯 “총재 아닌 사람과 무슨 이야기를 한다는 건지 모르겠다”는 말을 했다. 8군 뉴스를 보면서 카터 이야기도 했다. "헬기를 타고 오면서 보니까 한강에 다리가 많더라"는 말도 했다. 이 때 김재규가 들어와 TV를 끄자고 제의해서 차지철이 TV를 껐다. 박정희는 김재규에게 부산사태 사진을 하나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고, 김재규는 “예” 하고 대답했다. 대통령은 “김 부장이 술을 좋아하니 많이 권하라” 했지만, 김재규의 얼굴은 시종 굳어져 있었다(심수봉, 신재순 진술)

박정희가 "노래나 한 곡 들어볼까"라고 하자, 심수봉이 기타를 연주하면서 ‘그 때 그 사람[17]’을 불렀다. 앙코르가 요청됐고, 이에 심수봉은 ‘두만강’을 부른 후 차지철을 지명했다. 차지철은 ‘도라지’를 부른 후 신재순을 지명했다

7시 35분이었다. 연회장에서 심부름을 하던 남효주가 들어와 “부장님, 전화입니다” 하고 암호를 전했다. 김재규가 박선호가 있는 부속실로 들어가니 박선호가 대기하고 있었다.
김재규: 준비되었는가?
박선호: 완료됐습니다.

2.2. 밤하늘을 가른 총격

저녁 7시 38분경 박선호에게 준비가 다 되었다는 소식[18]을 들은 김재규는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대통령의 양 옆에 있던 신재순이 심수봉의 기타반주로 혼성 듀오 라나에로스포의 ‘사랑해’를 부르고 있었고, 대통령은 간간히 흥얼거리며 신재순의 가락에 장단을 맞추고 있었다. 바로 이 때 김재규가 권총을 하의 주머니에 넣고 들어온 것이다

신재순이 중간에 한 번 틀려서 다시 부르던 중, 1절 후렴을 막 시작하려는 차에 7시 40분 바지 주머니에 숨겨둔 PPK를 꺼내어 노래를 끊으며 차지철을 향해 이 말을 외치며 제1발을 발사했다.
차지철 이 새끼! 너 건방져!

김재규의 제1발은 차지철의 오른쪽 손목을 관통했고, 갑자기 저격당해 당황한 차지철은 관통당한 손목을 움켜쥐며 "김 부장, 왜 이래!" 라고 외쳤다. 박정희가 "지금 뭐 하는 짓들이야!" 라며 소리치자, 김재규는 "야, 너도 죽어봐!" 라고 받아치며 박정희의 오른쪽 가슴에 제2발을 발사했다. 이 총격으로 박정희는 오른쪽 허파에 관통상을 입었다.

참고로 이때 김재규는 차지철을 쏘고 바로 박정희도 쏘았다고 증언했으나, 같은 안가에 있었던 박선호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첫 발 사격 후 4~5초 이상의 간격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제3발을 쏘려 했으나 발터 PPK가 격발 불량을 일으켜 발사되지 않자 밖으로 뛰어나갔고, 차지철은 화장실로 도망치는 추태를 보였다. 차지철이 입은 부상은 생명에 지장이 없었고, 현장에는 대통령 경호원들도 있던 현장이었던만큼 만일 차지철이 도망치지 않고 김재규를 저지했다면 사건은 실패로 끝나고 현대사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뒤바뀌었을 것이다.

이때 김계원은 곧바로 문 밖 입구로 나와 사건현장을 진전되는 것을 감시하는 공범자 역할을 하고있었다. 박정희는 곧바로 쓰러져 얼굴을 식탁에 묻었고, 차지철은 대통령을 팽개친 채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차지철이 총을 팔뚝에 맞은 것은 김재규의 옆쪽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고, 박정희가 가슴에 맞은 것은 마주보고 앉았기 때문이었다.

김재규는 아직 살아있는 두 사람에게 다시 총을 쏘려 했으나, 총이 격발 불량을 일으켜 반사적으로 뛰어나가자 마루에는 박선호가 권총을 들고 있었다. 김재규는 그 총을 빼앗아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바로 이때 차지철이 문 쪽으로 문갑을 밀고 나왔다. 김재규는 차지철의 복부를 향해 한 발을 더 쏘았고, 이어서 심수봉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던 박정희의 머리에 총 한 발을 더 쏘아 확인사살했다. 이 장면을 심수봉은 이렇게 진술했다.
가슴에 총을 맞은 각하를 보니 호흡이 이상하여 ‘각하 괜찮으십니까’하고 묻자 ‘응, 괜찮아’하셨지만 등에서는 피가 많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상체를 부축하고 있었고, 신재순양은 손으로 피를 막고 있었다. 내가 무릎 가까이 각하를 부축하고 있을 때 김재규 부장이 각하 뒤로 와서 총을 더 쏘고 나갔다. 공포에 질린 두 사람은 무서워서 마루로 나와 관리인 사무실로 들어가 숨어있었다. 그 동안 밖에서는 총소리가 5-6발정도 더 났다.
  • 김재규가 총을 쏘기 직전에 한 발언은 위에서 언급한 "너 건방져!" 가 아니라는 설이 존재했다. 김계원에게 "각하를 똑바로 모시라" 라고 충고한 후 박정희에게 "각하, 차지철 저 버러지 같은 놈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 올바로 되겠습니까?" 라면서 발사했다는 게 2000년대까지의 다수설이었다. 이 발언은 신재순의 진술에 의거한 것인데, 2011년 중앙일보 기사에서 신재순은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본부장 전두환) 측의 강압에 못 이겨 위증한 것이라고 밝혔다.[19] 버러지 발언은 우발적이거나 개인적 원한에 의한 단순 살인이 아니었음을 강조하려고)로 추정된다. 이 증언 차이는 의자매까지 맺으며 친밀했던 신재순심수봉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김재규의 총소리를 신호로 박흥주와 이기주, 유성옥 일행은 주방으로 달려가 식사 중이던 김용태 경호실 운행계장과 김용섭 경호관을 사살했고,[20] 그 과정에서 안가 요리사 이정오는 허리에, 식당차 운전사 김용남은 어깨에 총을 맞는 부상을 입었다. 그 난리 중에 같이 주방에 있던 경호계장 박상범[21]은 총 4발을 맞았는데, 두 발은 옷만 뚫었고 한 발은 허리띠에 차고 있던 예비 실탄에 맞고 튕겨나갔다. 나머지 한 발에 허리 관통상만 입었는데, 총을 맞고 쓰러질 때 주방 조리대에 머리를 세게 부딪쳐 완전히 의식불명이 되어 죽은 것으로 오인되었고 총상도 뼈나 내장은 상하지 않은 채 살만 관통하여 자연 지혈되면서 출혈도 적었으며, 나중에 안가 경비원인 김태원의 확인 사살시 박상범 옆에 안가 직원 김용남이 부상을 입고 누워있어 잘못 맞을까봐 사격을 포기한 행운도 따르면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박선호는 경호원 대기실에서 마른안주를 먹으며 TV 방송을 보고 있던 경호처장 정인형과 경호부처장 안재송과 같이 있었는데, 김재규의 총소리를 듣고 정인형과 안재송이 뛰어나가려 하는 것을 박선호가 권총[22]으로 제지하며 "움직이지 마라, 제발 우리 같이 살자!"라고 애원했지만 안재송이 총을 뽑으려 했고, 어쩔 수 없이 박선호는 안재송을 사살한 데 이어서 친구인 정인형도 암살하고 말았다. 이 일화는 총을 먼저 겨눈다는 것이 얼마나 절대적이고 무서운 것인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자주 거론된다. 안재송은 해병 장교 출신으로 권총부문 사격 국가대표로 선발된 적도 있으며, 특히 속사가 주특기인 명 사수였다.[23][24] 박선호가 권총을 겨누자 안재송은 반격을 하기 위해서 일어서면서 권총을 뽑았지만, 박선호의 선제 사격에 흉부관통상을 입고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나중에 시체 검안 결과에 따르면 안재송은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한 상황에서 총탄을 맞았다고 한다.[25] 대한민국 제일의 속사권총 명인도 상대방이 먼저 총을 겨눈 상태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박선호가 안재송, 정인형을 사살하던 시점에서 안전가옥 나동 전체의 조명이 나갔는데, 이는 지하 보일러실에서 신문을 읽고 있던 안가 영선(営繕)담당 강무홍이 총성을 전기 합선으로 착각하고[26] 차단기를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밖에서 계속 이어지는 총소리와 고함소리에 합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 강무홍은 다시 차단기를 올린 후 보일러실 문을 잠근 채 몸을 숨겼다고 한다. 만약 불이 조금 일찍 꺼졌더라면 박선호는 오히려 정인형과 안재송에게 역습을 당할 수도 있었다.

한편 총기고장 때문에 밖으로 나간 김재규는 정인형과 안재송을 처치하고 나온 박선호의 S&W M36 치프 스페셜[27] 리볼버를 넘겨받아 연회장으로 돌아왔고, 화장실에서 나와 경호원을 찾던 차지철은 김재규와 맞닥뜨리자 문 옆의 문갑을 치켜들고 거세게 저항했으나, 김재규는 차지철의 복부에 총을 발사하여 치명상을 입혔다. 차지철을 완전히 거꾸러뜨린 후 신재순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던 박정희를 발견한 뒤 # 우측 관자놀이를 향하여 마지막 탄을 발사했다. # 이 마지막 탄은 관통하지 않고 박정희의 왼쪽 광대뼈에서 멈췄는데, 국군수도병원장 김병수 준장이 수술로 제거해서 고인을 깨끗이 모시자고 건의하였으나 장녀 박근혜가 시신에 다시 칼질을 할수 없다고 반대하여 결국 시신과 함께 지금도 국립묘지에 묻혀있다.출처

박정희의 최후를 가장 잘 알고있던 사람은 끝까지 옆에 있었던 신재순이었는데 조갑제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그 사람의 눈과 마주쳤을 때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인간의 눈이 아니라 미친 짐승의 눈이었어요. 그가 대통령의 머리에 총을 갖다대었을 때는 다음에는 나를 쏘겠구나 생각하고 후다닥 일어나 실내 화장실로 뛰었습니다. 저의 등뒤로 총성이 들렸습니다. 화장실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도 문 손잡이를 꼭 쥐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 대통령께서는 좀 취하셨던 것 같아요. 하지만 몸을 가누지 못하거나 말이 헛 나올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인자한 아버지 같았어요. 피를 쏟으면서도 '난 괜찮아'라는 말을 또박 또박 했으니까요. 그 말은 '난 괜찮으니 자네들은 어서 피하게'라는 뜻이었습니다. 대통령이시니까 역시 절박한 순간에도 우리를 더 생각해주시는 구나 라고 생각했었죠. 그분의 마지막은 체념한 모습이었는데 허무적이라기보다는 해탈한 모습 같았다고 할까요. 총을 맞기 전에는 '뭣들 하는 거야'하고 화를 내셨지만 총을 맞고서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겠다는 자세였어요. 어차피 일은 벌어졌으니까요.'

시해현장 약도(김계원 작성)

파일:jeestar_402.jpg

3. 후속조치

만찬장 밖으로 나온 김재규는 마루에 서있는 김계원과 아주 짤막한 대화를 나눴다.
김재규: 나는 한다면 합니다. 이젠 다 끝났습니다. 보안을 유지하십시오.
김계원: 뭐라고 하지?
김재규: 각하께서 과로로 졸도했다고 하던지 적당히 하십시오.
김계원: 하여튼 알았오.

“나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고 한 것은 김계원에게 확고한 결의를 보여주고 믿음을 주기 위해 했던 의미 있는 말인 것으로 생각된다. 김계원으로부터 협조하겠다는 의지를 확인한 김재규는 현장수습을 김계원에 맡기고 맨발로 정승화에게 달려갔다. 불과 50m의 거리를 달려가는 데는 불과 몇 초 정도만 걸렸을 것이다. 그의 와이셔츠 자락은 밖으로 나와 있었고, 와이셔츠의 허리와 목 부분 여기저기에는 피가 묻어있었다. 그리고 허리에 찔러진 총에서는 화약 냄새가 진동했을 것이다.“물, 물” 김재규는 본관 1층의 식당으로 뛰어들자마자 비서에게 이렇게 외쳤다. 비서가 컵과 물주전자를 가져오자 주전자를 낚아채 벌컥 벌컥 마시고는 “차량 차량, 손님 나오라고 해” 이렇게 외쳤다. 이 순간을 정승화는 1979년 12월 15일에 이렇게 묘사했다.
19시 45분경 김정섭과 본인은 총소리를 듣고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밖에서 떠드는 소리가 나더니 김재규의 비서가 급히 식당 안으로 들어와 그 옆에 있는 주방에서 물을 가지고 나가서 김정섭도 따라 나가므로 본인도 궁금하여 따라 나가니 식당 문 앞에 있는 복도에 김재규가 숨을 헐떡이며 물을 마시고 당황한 표정으로 본인을 보고 본인의 팔을 붙들고 ‘총장 큰일 났습니다.’ 라고 3회 가량 되풀이 하므로 본인은 무슨 일입니까? 라고 수차 물었으나 김재규는 거기에는 답변치 않고 빨리 차에 타고 차안에서 이야기 합시다 라고 하여 본인은 만찬회 장소에서 무슨 긴박한 사태가 발생되었다고 생각하고 우선 김재규가 하자는 대로 따르기로 하고 19시 50분경 현관 앞에 대기한 김재규 차에 타자 우측에 있는 김정섭에게 김재규가 차에 타라고 하여 김정섭이가 좌측으로 탐으로서 우측에는 김재규 중간에 본인이, 앞 운전석 옆에는 김재규의 비서인 박흥주 대령이 타고 차가 출발하였다.

한편, 박정희는 김계원에 의해 만찬장 근처의 미국인 의사가 운영하는 병원으로 우선 옮겨졌다. 비서실장은 심폐소생술을 실시하였으나 박정희는 소생하지 않았고 병원 도착 5분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사실은 비밀해제된 미국자료에 의해 밝혀졌다.[28] 후에 박정희는 이미 사망한 상태로 국군서울지구병원에 실려갔다.[29]

김재규가 궁정동을 떠난 후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은 김재규가 시킨 대로 뒤처리를 했다. 7시 55분, 김계원은 박정희의 시신을 보안사 영내에 있는 국군서울지구병원에 옮기고, 당직군의관에게 용태를 물어 사망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시신은 중정 요원들이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이날 김재규의 판단은 최대 최악의 실책이었다고 아직도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김재규 입장에서는 자신의 거점인 중앙정보부로 가서 사건 수습과 뒷공작을 하는 것이 최선책이었다. 차지철과 박정희가 죽고 없는 시점에서 제 3의 실권자인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에게 대놓고 반대할 인사도 없고, 박정희 암살 사건에 간첩이 개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명분을 내세워서 대공 업무를 담당하는 중앙정보부가 조사를 전담하는 것이 마땅하다며 우길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여차하면 '차지철이 박정희를 쐈기 때문에 내가 차지철을 사살했다'고 둘러대는 것도 가능했다. 사건을 목격한 생존자라고 해봐야 김재규 자신과 암살 공범인 정보부 요원들을 제외하면 연회장의 김계원과 신재순, 심수봉 그리고 안전가옥에 있던 일부 청와대 경호원과 안전가옥 직원들이 고작이었다

김계원은 김재규에게 한참 밀린 데다 차지철에 대한 반감은 김재규와 마찬가지였으며, 신재순과 심수봉은 일개 대학생과 가수였고 나머지 직원과 경호원들도 이미 부상을 입거나 제압당한 상황에서 김재규와 중앙정보부가 이들을 입막음하는 것 정도야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당시 차지철은 평소 행적 때문에 박정희 암살 혐의를 뒤집어 씌우더라도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상황이었다. 차지철은 월권 행위에 박정희를 제외한 고위층, 심지어 김계원이나 김재규를 비롯한 장성 출신들에 대해 오만불손한 태도를 일삼았고, 권력 문제에도 마구 개입하며 김재규 뿐 아니라 건방진 새끼 차지철에게 반감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일례로 후쿠다 다케오 전 일본 수상이 방한하여 박정희와 일부 고위 인사들과 함께 골프를 치러 갔는데, 라운딩이 끝난 후 백두진 유신정우회 의장이 먼저 클럽 하우스의 샤워실로 들어간 뒤 시간이 지체되자 차지철이 샤워실 문을 두들기며 "왜 이렇게 늦는 거요. 각하 기다리시는데 빨리 나오시오. 이 늙은이가 뭘 이리 우물대는가. 늙으면 빨리 죽어야지..." 라며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

이처럼 김재규는 사건을 조작할 만한 능력도, 명분도 충분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슨 생각에서인지 자신의 본거지인 중앙정보부도, 간첩 사건 등으로 인맥이 있었을 법한 대한민국 검찰청이나 치안본부도 아닌, 자신과 그다지 연관성이 없는 육군본부로 향했다'

박정희 사망을 확인한 김계원은 곧바로 청와대에 돌아와 비상소집을 했다. 최규하 국무총리, 장관들, 경호실이 그 대상이었다.
“청와대 비서실입니다. 각하께서 유고이십니다. 속히 청와대로 와 주십시오”

김계원 비서실장의 비상소집에 따라 고관들이 속속 도착했다. 오후 8시 25분부터 8시 40분 사이에 최광수, 고건, 유혁인 등이 나왔고, 이어서 다른 수석비서관들이 줄을 이었다. 8시40분, 최규하 국무총리가 나오자 김계원은 다른 사람들을 부속실로 내보낸 후, 총리에게만 이렇게 말했다.
오늘 만찬장에서 김재규와 차지철이 싸우다가 김재규가 잘못 쏜 총에 각하가 맞아 서거하셨습니다. 계엄을 선포해야 합니다.

최규하를 물렁하게 보고 하는 말이었다. 행여 최규하의 입에서 조사를 해야 한다는 말이 나올까봐 미리 계엄을 선포해야 한다며 입막음을 한 것이다. 바로 이 시점에서 최규하 총리는 박정희와 차지철이 함께 김재규의 총에 사살됐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사실을 인지하게 된 것이다. 국무총리는 대통령 유고시에 자동적으로 권한을 대행한다. 그런데도 최규하는 김계원에게 더 이상 아무 것도 캐묻지 않았고, 조사를 시키지도 않았다. 박정희와 경호실장이 중정부장의 총에 살해되고, 이를 김계원이 알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암시하는가? 김계원과 김재규가 한 통이 되어 새 세상을 열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이를 직감했기에 최규하는 입을 닫은 것이다.

밤 9시 30분경, 국방장관실에는 사건 관련자인 김재규(중앙정보부장), 김계원(대통령비서실장), 정승화(육참총장) 이외에도 최규하(국무총리), 신현확(부총리), 노재현(국방장관), 구자춘(내무장관), 박동진(외무장관), 김치열(법무장관), 김성진(문공장관), 서종철(안보특별보좌관), 류혁인(정무1수석) 등이 있었다.
김계원: (최규하에게) 비상계엄을 선포하려면 국무회의를 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최규하: 물론이지요. 계엄 사유를 무엇으로 할까요, 유고로 할까요, 서거로 할까요?
김계원: 대통령각하 유고로 인하여 27일 00:00부로 계엄을 선포한다고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최규하: 유고만 가지고 납득하겠습니까? 무언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국무위원들도 내용을 알아야 의견을 교환할 수 있지요.
김재규: 유고는 안 됩니다. 국내치안이 좋지 않아서 계엄령을 선포하는 것으로 해야 합니다.
최규하: 국내에 데모가 난 것도 아니고, 계엄이 선포돼 있는 부산도 조용한데 그건 이유가 안 됩니다. 대통령 유고를 어떻게 국민에 안 알리겠습니까? 계속 보안을 유지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며 우선은 국무위원들도 납득하지 못할 것입니다.
김재규: 왜 안 됩니까? 소련은 1주일 이상이나 브레즈네프의 행적을 발표하지 않고 있었는데 2-3일 동안 왜 보안유지가 안 됩니까?
최규하: 그러면 김 부장이 국무회의에서 사유를 설명해 줄 수 있습니까?
김재규: 예, 하지요
김치열: 비상계엄과 국장문제 등을 검토해야 합니다.
김재규: 지금 보안을 지켜야지 국장문제를 앞세울 수는 없습니다.
김성진: 비상계엄의 사유를 명백히 해야 합니다.
김재규: 소련의 브레즈네프는 1주일간이나 그 행적[30] 보안유지 했는데 우리는 왜 며칠간 보안유지를 못합니까?국가에 비상사태가 발생하여 계엄선포 한다 하면 되지 사유를 자세히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같은 시각인 오후 8시 40분경, 경호실 차장 이재전 중장이 비서실장실로 달려 왔다. 김계원이 달려온 이재전 차장에게 차디찬 음성으로 말했다.
각하가 유고다. 지구병원에 모셔놓고 오는 길이다. 차지철 실장은 부대를 지휘할 처지가 아니다. 경호실장 직무를 대행하라. 이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마라. 경거망동 하지 마라. 경호실 병력 출동을 금한다.

박정희와 차지철이 사고를 당했다면 이재전 경호실차장은 당연히 청와대 경호비상 제1호인 “호랑이1호”를 발령하여 경호실 병력을 사고현장으로 출동시켜 박정희와 차지철의 신원을 확보해야 했다. 이런 입장에 있었던 그가 김계원으로부터 “경거망동하지 말고 병력출동을 하지 말라”는 말을 들은 것이다. 이는 “나도 관련돼 있으니 너는 더 이상 알려하지 말고 이 사건에서 손을 떼라”는 명령이었다. 이재전은 8시 40분, 제22특경대에게 안가접근을 금지시켰고, 이에 따라 안가로 출동하던 태양요원들이 즉시 발길을 돌려 되돌아 왔다. 여기까지의 행위로 인해 김계원은 10월 29일 구속됐고, 12월 20일 계엄보통 군법회의에서 김재규 등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날 재판장은 사형선고를 일곱 번이나 내렸다. 죄명은 내란목적 살인 및 내란 중요임무 종사 미수죄였다. 그러나 며칠 뒤 김계원의 사형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1982년 5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경호실 병력의 출동을 금지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경호실 병력이 사건 현장으로 출동하여 진실을 밝혀내는 것을 방해하고, 범인을 체포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위한 조치인 것이다. 계엄을 선포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쿠데타 또는 혁명에서나 생각할 수 있는 초비상조치인 것이다. 당시 청와대에서 이런 김계원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김계원이 쿠데타의 중심축에 서 있다는 것을 직감했을 것이다. 이재전 경호실차장에게 “경호실 병력 출동금지”를 지시한 것은 김계원만 취한 조치가 아니었다. 8시 5분경에 육군 B-2 벙커에 도착한 정승화 역시 거의 같은 시각에 이재전에게 전화를 걸어 경호병력 출동을 금지시킨 것이다. 이때 정승화는 김재규가 박정희와 차지철을 제거한 줄은 모르고, 오히려 차지철이 (계획적이던 우발적이던) 사고를 일으켰다는 쪽에 무게를 두었다. 따라서 경호실 병력이 차지철에 의해 동원되지 않도록 장악을 지시한 것이다.[31]
오후 9시5분, 구자춘 내부, 김치열 법무가 비서실 직원으로부터 ‘각하가 변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달려와 김계원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다그쳐 물었지만 김계원은 “간신배를 제거한다는 것이 각하가 다치셨다”라고만 말했다. 법무장관이 “차지철이 그 새끼 무엇을 했어”하고 흥분하자 김계원은 “죽었을지 모른다”라고 대답했다. 여기까지 김계원이 한 발언들을 통해 그 자리에 있었던 국무총리, 장관들 그리고 청와대 수석들은 박정희와 차지철이 동시에 총에 맞아 사망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누군가가 박정희와 차지철을 쏘았고, 그 사실을 김계원이 알고 있다는 것까지 안 것이다. 박정희와 차지철을 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직감적으로 김재규 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차지철은 이들 누구나 싫어했고, 김계원도 싫어했으며, 특히 김재규와 차지철과는 앙숙관계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김계원이 사고에 관련되지 않았다면 김계원은 누구보다도 흥분하며 진상을 밝히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김계원은 사고의 공론화를 막고 있었다. 아마도 그가 던지는 어두운 그림자에서 나오는 무성의 언어는 입에서 나오는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달했을 것이다. 박정희와 차지철이 동시에 암살됐다는 사실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이다. 각료들이라면 김계원에게 자초지종을 캐물었어야 했다. 그런데 매우 이상하게도 이들 중에 이를 채근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들 각료들이 침묵한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김계원이 박정희 암살 사건에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김계원은 김재규가 요청한 바와 같이 비밀을 지키며, 박정희 시신을 수도병원에 옮겨 사망했음을 확인한 후 비서실장실로 돌아와 계엄선포를 위한 비상국무회의를 준비하고, 국무총리에게는 계엄령을 선포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경호실 차장에게는 경호실 병력이 암살 현장으로 출동하지 못하도록 지시하는 등 뒷일을 착실하게 수행했다. 이 정도의 뒷일은 김계원이 충분히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마지막 실탄을 발사하자마자 대기 중이던 정승화에게로 달려갔을 것이다.

김재규는 정승화와 함께 8시 5분에 B-2 방카에 도착한 이후 체포될 때까지 ‘살해사실을 숨긴 상태에서 비상계엄령을 발동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국무위원들은 국방장관실에 모여 국무회의를 하자면서도 회의의 목적을 “계엄선포”를 위한 것으로 했다. 그 많은 장관들 중에 “사건의 진상부터 따지고 조사해야 한다” “누가 살해했느냐” 이렇게 따지는 사람이 없었다. 살아있는 박정희 앞에서는 충성을 보였을 장관들일 테지만, 일단 사망하고 보니 진상을 캐기보다는 권력이 누구에게 가는가에 대한 눈치부터 본 것이다. 권력의 태양은 서서히 저문 것이 아니라 카메라의 셔터처럼 한순간에 낙하한 것이다.

후에 박정희는 이미 사망한 상태로 국군서울지구병원에 실려갔다. 당직 군의관이던 송계용 육군 군의소령의 연락을 받고 달려온 박정희 주치의인 병원장이던 공군 군의준장 김병수 장군이 시체를 검안하는 과정에서 하복부의 피부병 자국에 의해 시체가 바로 박정희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운전사 유성옥과 안가 경비원 서영준이 총으로 위협하는 와중에 보안사 참모장인 육군 준장 우국일 장군의 전화를 받은 김병수 장군은 아래와 같이 박정희가 죽었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김병수: 예 병원장입니다.
우국일: 보안사 참모장입니다. 지금 그쪽 상황이 많이 곤란하지요? 대략 어떤 상황인지 알 것 같으니 제 질문에 예, 아니오로만 답하시오.
김병수: 예.
우국일: 죽었습니까?
김병수: 예.
우국일: (경호)실장입니까?
김병수: 아니, 그런 거 없습니다(옆의 경비원을 의식하여 일부러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우국일: 코드 원입니까?
김병수: 예.
우국일: ...알겠소,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비상국무회의는 단지 10.27일 새벽 4시에 제주도를 제외한 전 지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할 것과 계엄사령관에 정승화, 합동수사 본부장에 전두환을 임명한다는 것만 의결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최규하는 국방장관실에 앉아있는 김재규에 가서 이 결정된 사실을 귀띔해주었다. 김재규가 범인인줄 뻔히 알면서 말이다.

박정희 앞에서는 그토록 충성심을 자랑했던 국무위원들은 박정희가 왜 사망했는지에 대해 따지려 하지 않고 권력이 누구에게 가느냐에 대한 계산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국가는 무주공산이었고 국무회의는 익일 새벽 00:25에 끝났다. 회의 결과는 익일 아침 4시에 비상계엄을 선포할 것, 정승화를 계엄사령관으로 할 것이었다. 최규하는 이 회의 결과를 즉시 회의장 밖에 있는 김재규에게 귀띔까지 해주었다. 총리가 이러했으니 다른 국무위원들이야 오죽 눈치를 보았겠는가? 그 많은 국무위원들 가운데 범인이 누구냐를 따지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차기권력이 어찌될지에만 괌심이 쏠려있었던 것이다.

11:40분은 역사적인 시간이었다, 벙커에 온 김계원은 김재규에게 동조세력이 없다는 것을 간파한 후 노재현과 정승화가 있는 자리에서 김재규가 범행에 사용했던 권총을 내놓으면서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노재현 국방장관은 정승화에게 김재규를 체포하라 명했다. 그러나 정승화는 헌병대장 김진기와 보안사령관 전두환에게 김재규를 안가에 정중히 모시라고 했다. 이상한 것을 눈치 챈 전두환은 육군본부 부안대장 오일랑 중령에게 전화를 했다.
전두환: “자네 김재규 얼굴 아나?”
오일랑: “네”
전두환: “김재규는 네 얼굴 아나?”
오일랑: “모를 겁니다”
전두환: "지금 헌병복으로 갈아입고 애들 데리고 국방부에 와서 김재규 체포해“

정동 안가로 연행된 김재규는 누가 묻지 않는데도 제1성을 이렇게 냈다.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 나에게 협력하라.” “내가 박정희를 살해했다. 내일이면 세상이 바뀐다” 수사관들은 김재규의 언행으로부터 김재규가 대통령 살해범이라는 확신을 얻었고, 이는 즉시 전두환에게 보고됐다. 전두환은 정승화에게 “대통령 살해범은 김재규입니다. 구속해야 합니다” 라며 압박했다.

김재규를 체포시키고, 동행자였던 박흥주 대령까지 도주하면서 쿠데타는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더불어 내막을 알아챈 김정섭 차장보가 자신의 부하들로 안가를 습격해 이기주 등 안가의 중정 요원들을 습격, 체포했으며, 박선호와 박흥주 대령도 그 다음 날 전부 체포되어 김재규와 함께 보안사 분실로 연행되었다.

서빙고의 보안사 분실로 끌려온 김재규를 처음엔 군과의 밀약을 통한 쿠데타 시도일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여 수사관들이 쉽사리 심문하지 못했다. 보안사는 방첩기관이지 전문 전투부대, 방어부대가 아니라 전투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 상황에서 쿠데타에 가담한 전투부대라도 들이닥친다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32] 애초에 보안사가 김재규를 정동 분실에서 서빙고 분실로 이송한 것도 대장이 끌려간 것을 알면 중앙정보부가 기습을 걸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기도 했다. 거기에 더해 김재규는 과거 보안사령관을 역임한 적이 있어서 다들 전관예우로 "부장님, 부장님" 하며 쩔쩔맸다고 한다. 김재규를 체포하여 호송해 온 육군 헌병수사관 신동기 준위도 한 달 전 중앙정보부 부설 정보학교에서 6개월 과정 정보교육 수료 시 성적 우수자로 부장인 김재규에게 직접 표창을 받았고, 김재규를 정동 분실[33]에서 서빙고 분실로 호송하는 과정에서 정도 들었는지라,[34] 김재규를 함부로 대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박정희 암살 사건이 김재규의 단독 범행임이 밝혀지면서, 안면몰수하고 강력하게 수사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은 신동기 준위는 김재규에 대해 바로 폭행과 고문을 동반한 심문에 돌입했다.

3.1. 결과

이 사건의 전말은 합동수사본부 본부장으로 임명된 보안사령관 전두환의 수사 보고에 의해 10월 28일 세간에 알려졌다. 그 후 재판을 통해 주모자인 김재규, 그리고 암살에 참여한 박선호와 박흥주, 이기주, 유성옥, 김태원[35] 전원과 현장에 있었던 김계원에게 내란음모죄로 사형선고가 떨어졌고(80도306), 1980년 5월 24일 이전에 총살된 박흥주와 감형된 김계원을 제외한 5명은 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국내외에서 김재규의 구명 운동이 전개되기도 했으나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또한 당시 대통령 경호실 차장이었던 이재전 중장은 직접적인 책임은 없었으나 직무유기 혐의로 조사를 받다가 정승화 참모총장의 만류로 풀려나서 예편했다.

박정희의 죽음으로 생긴 권력의 공백기를 잽싸게 파고든 이가 바로 전두환이었다. 그는 계엄사령관 정승화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을 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내란음모죄 혐의로 체포하는 12.12를 일으키고, 최규하를 김재규가 범인임을 알면서도 육군본부에 갔다는 사실을 약점으로 잡아 허수아비로 만든 이후, 1980년 5월의 5.17과 그 다음날부터 벌어진 광주민주화운동 무력진압을 거치면서 결국 자신이 대통령 자리에 올라 권력의 꼭짓점에 서는 데 성공하며, 아이러니하게도 김재규가 박정희를 쏨으로서,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 것이다.

이 죽음을 두고 박정희의 죽음으로 인해 대한민국 발전의 맥이 끊겼다는 인식을 심어주며 이른바 박정희 신화가 생기게 되었고, 반대로 당시 운동권 진영의 사람들은 박정희가 이승만, 전두환처럼 시민 혁명으로 물러나야 했는데 하면서 안타깝다고 여기는 의견이 생겼다. 그러나 이 의견의 경우 갈리는데, 진보진영이라고 해도 모두가 시민혁명의 성공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한편, 박정희가 사망함으로써 막 삽을 떴던 대대적인 서해안 무역벨트 사업, 가로림만 계획이 좌절되었다. 박정희는 충청 해안을 중심으로 대규모 중화학 공단과 무역항 사업을 현 공주시로의 수도 이전을 전제로 추진하였는데, 10.26 사건 직전 고인의 마지막 공식 일정이었던 삽교천 행사 또한 이 일환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정권 차원에서 추진되었던 수도 이전 계획도 영영 중단되었다. 그러면서 수도 관련 계획과 해안 공단사업을 받기로 한 충청도, 특히 충남은 박정희의 사망으로 모든 계획이 엎어지고 이후 경상도, 전라도에 편중된 집중개발로 가장 큰 피해를 보기도 했다. 그나마 최근에 세종시 계획 하나를 받았지만 정말 이거 하나가 끝이다.

1979년 10월 27일,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은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국민 여러분! 우리는 오늘 민족중흥의 지도자인 박정희 대통령 각하가 졸지에 서거하신 데 대해 그 충격과 애통함을 가눌 길 없습니다. . . 군은 비상시국에 국가수호의 막중한 책임을 다해 북한 공산집단의 동향을 주시하며 철통같은 방위태세에 임하고 있습니다. . . 헌법 제48조 규정에 따라 본인이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게 되었습니다. . .우리의 맹방인 미국정부는 즉각 협조할 것을 명백히 했습니다 . . 모두 다 같이 굳게 뭉쳐 위기를 극복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이어서 계엄포고 제1호가 발령됐다. 모든 집회는 사전허가를 받아야 하고, 시위 등의 단체 활동을 금하고, 언론 및 출판은 사전검열을 받아야 하고, 통행금지시간은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로 하고, 태업을 금지하고 유언비어 날조 유포행위를 엄금하고, 대학은 휴교한다는 등의 내용들이었다. 같은 날, 계엄공고 제5호에 의해 합동수사본부(합수부)가 설치되었고, 합수부가 모든 정보 수사기관(검찰, 군검찰, 중앙정보부, 경찰, 헌병, 보안사)의 업무를 조정감독 하도록 했다.

4. 원인

4.1. 왜 10.26이 발생하였는가?

현재 10.26 사태의 발생 원인에 대해서는 김재규의 개인적 쿠데타라는 견해, 미국의 사주에 의해 발생했다는 견해가 세간에서 많이 떠돈다. 미국의 사주라는 견해는 공산진영이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한반도의 비정상적 상황을 일부러 만들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가능성이 떨어진다. 또 김재규가 미국의 사주를 받았다는 뚜렷한 정황 역시 나타나고 있지 않다. 한편 김재규의 개인적 쿠데타라는 견해는 위에서 언급한 김재규의 우발적 행동이라는 설과 최근에 김종필의 회고록에서 제기된 김재규가 분노조절장애를 가지고 있었다는 설 등을 포함하고 있는데, 10.26 사태가 김재규의 분노로 인한 우발적 행동으로 나타났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 이전에 국내 정치와 국외 정치의 상황을 고려하여야 한다.

국내적으로 박정희 정권은 1979년에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1차 석유 파동을 수출증진과 중동진출로 극복해 고도성장을 하는데 고성장의 토대들이 이상징후들이 나타나는 동시에 1차때보다 극심한 2차 석유 파동은 국내 경제를 피폐하게 만들었는데 발생하기 이전 부가가치세 도입으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화당이 신민당-무소속에게 패배하는 이변이 발생했다. 이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 감소로 이어졌다.

이 선거에서 신민당이 집권여당을 총 득표수에서 이기는 상황이 발생하였고,박정희 및 공화당에 국내정치에 협력하는 이철승 대신 강경투쟁농선의 김영삼이 총재가 되어 이는 정면으로 도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이는 YH여공 사건에서 신민당사를 내주어 여공들과 연계하여 반기를 들었다

대외적으로는 미국에서 카터 행정부가 등장하면서 미국과의 불화가 심해지고 있었다. 카터 행정부는 인권이라는 기치 아래 한국을 포함한 제3세계의 인권 상황을 개선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박정희 정권이 로비스트 박동선을 이용해 이런 상황을 무마하고자 하였는데, 오히려 카터 행정부가 주한미군 철수를 계획하게 하였고 한국의 핵무장미사일 등 군사관련문제도 양국간에는 관계가 매우 악화되었다
  • 민주화에 대한 요구
법정에서 김재규 본인이 한 주장. 김재규는 재판 과정에서 항상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억압하는 박정희 정권에 염증을 느껴서 독재 종식을 위해서 박정희를 암살했다고 주장했다. 이전에 바로 부마항쟁이 일어나서 김재규가 사건의 진상을 파해치러 부산, 마산 지역으로 내려갔는데, 거기서 큰 충격을 받고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이 정권을 막아야겠다고 결심했다는 설이다.

김재규가 과연 정말로 민주주의에 관심이 있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자기 합리화를 위해서 즉흥적으로 외친 것인 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논쟁이 진행 중이다. 다만 김재규를 다룬 재판이 전두환의 압력을 받아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였음을 감안하면 김재규의 목적은 명확하게 규명되었다고 볼 수 없다. 이것 외에도 김재규의 집안에서 '자유 민주', '대의' 등을 적은 붓글씨가 발견되기도 했으며, 이를 근거로 그가 민주화에 대한 관심이 깊었다는 견해가 있지만, 부정하는 견해도 많기 때문에 지속적인 논쟁이 진행 중이다.
  • 차지철과의 갈등
김재규와 차지철 사이의 권력 투쟁과 갈등 속에서 10.26이 발발했다는 것이다. 주변 인사들에 의해서 주로 증언되고 있고 드라마 제4공화국, 제5공화국 등에서도 이러한 관점에서 묘사되고 있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 역시도 김재규가 10.26을 일으킨 것은 차지철과의 갈등에 있었다는 주장을 폈다. 김재규는 자기보다 새파랗게 젊고 군대 계급도 낮은 차지철에게 면박을 당하거나 무시당하는 수모를 당해서 이에 대해서 격분했고, 이것이 10.26의 발단이 되었다는 주변인물들의 증언이 있다. 출처. 김재규가 교사 시절 아끼던 제자였고 가깝게 지냈던 이만섭 국회의장 역시도 김재규와 차지철의 관계가 사건의 발단이 된 것 아닌가 추측한다고 방송이나 그의 회고록에서 말하기도 했다. 출처.
  • 미국의 사주
당시 박정희와 지미 카터 대통령의 관계가 좋지 못했으므로, 미국이 김재규를 사주해서 박정희를 제거하려 했다는 설. 어르신들 중에 이 설을 진지하게 여기는 분들이 제법 있다. 특히 이 시기에 군문에 몸 담았던 사람(간부), 군과 관계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이 설을 정설로 여기고 있다. 남재희 전 장관의 증언.
그렇지만 이 주장도 당시 미국 상황을 보면 이런 초대형 사건을 계획하기에는 상당히 무리가 있는 상황이었다. 불과 4년 전에 쿠데타로 휘청거리던 남베트남이 완전히 공산화가 되어버렸고, 중동의 최대 친미 정권이었던 이란팔레비 왕조가 79년 초 혁명으로 무너졌고, 여름에는 훗날 이란-콘트라 사건의 배경 중 하나가 된 니카라과가 공산화되었다. 그리고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으로 CIA가 대단히 바쁠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 암살은 뒷수습도 뒷수습이며, 암살로 인한 독재 권력의 공백은 쿠데타의 완벽한 배경이 될 수 있고, 이런 혼란 상황은 베트남 공화국의 재현과 한반도 공산화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에 엄청나게 위험한 선택이였다. 그리고 이런 제의를 위해선 대통령 암살 이후의 계획 또한 제공되어야 하는데, 쿠데타 이후의 행적이 일관성과 계획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여담으로 김진명의 소설 '1026'도 이 설을 채택하고 있다. 미국이 박정희의 자주국방을 견제하기 위해 김재규를 시켜 박정희를 암살하려고 했다는 이야기. 하지만 김진명 소설이 늘 그렇듯이, 애초 미국이 박정희의 '자주국방'을 부담스러워할 만한 이유도 없고, 미국이 완전한 악역 수준으로 한국을 견제하려 했다고 보여지지 않기에 이러한 견해는 설득력이 낮다. 이 경우는 박정희가 미국을 무시하고 핵을 개발하려고 했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미국이 김재규를 사주하여 박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김진명의 불쏘시개와는 관계 없는 이야기.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다"는 말에서, 사실 '야수(Brute)'가 아니라 '브루투스[36]'라고 써놓고 미국이 대본을 준 건데, 김재규 일당이 해석을 잘못해서 브루투스의 심정이 졸지에 야수의 심정으로 바뀐 거라는 그럴싸한 농담도 있다. 어디까지나 농담이니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말자.
  • 민주화+미국의 사주
3번(민주화)이 2번(미국)과 결합한 가설도 있다. 일단 김재규는 박정희를 죽이기만 하면, 그 다음은 미국이 어떻게든 알아서 자기를 도와줄 거라고 추측했을 것이라는 시각이다. 미국이 명시적으로 김재규를 사주한 것은 아니지만, 뭔가 책임을 져줄 것처럼 잘못된 사인을 줬을 가능성도 있다. 김재규가 사인을 잘못 읽었거나. 이 이론은 암살 이전의 치밀한 계획 + 암살 이후의 우왕좌왕을 설명해주는 가설이다.

실제 김재규는 1979년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과는 정기적으로 만났으며, 대부분의 대화 내용은 한국의 인권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고 한다. 미국에서 공개된 비밀 문서에 따르면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이 10.26의 주모자가 김재규라는 것을 몰랐기에 글라이스틴이 박정희 암살을 권유하거나 지시했을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글라이스틴이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을 김재규가 암살에 대한 암시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없진 않다. 원래 외교적 수사라는 게 그런 식이니까.
  • 미국의 묵인
미국의 영향에 대한 또 다른 가능성은 '암살 묵인'과 '사후 추인'을 구두 승인했을 가능성이다. 김재규의 공작이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가정해보자면, "박정희는 암살되고, 새롭게 정부가 구성된다"는 결론이 나게 된다. 여기서 미국과의 관계가 문제가 되는 것은, 미국이 박정희 암살과 민주화를 일종의 "반역죄"로 보고 승인을 하지 않을 것인가, 일종의 "혁명"으로 보고 승인을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즉, 김재규의 암살로 만들어질 "새로운 민주 정부"가 미국으로부터 승인을 받을 수 있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쟁점이다.

현실적으로 일국의 국가 지도자를 암살하는 것은 아무리 미국이라고 해도 정치적 부담이 큰 일이다. 뭐 대놓고 쳐들어가서 체포도 한 적 있지만 그러나 김재규가 모든 책임을 지고 암살 사건을 저지른 다음, 한국 정부가 자체적으로 민주화를 하고, 미국은 사후에 승인을 하는 형식이라면 정치적 부담은 거의 없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김재규의 신변은 미국에서 미국의 압력에 따라 민주화 정부에서 단순살인죄에 대한 '사면' 혹은 미국이나 제3국으로 '망명'하는 형식으로 '신변 보장'을 할 수도 있다.
  • 분노에 의한 우발적 암살
전제는 3, 내용은 변형인 4와 거의 비슷하다. 박정희와의 자리에서 김재규가 부마항쟁 등 민주화 시위에 대한 온건한 대응을 주장했는데, 차지철이 김재규의 말에 대해 비꼬는 투로 비난했다.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한 소리를 할 당시 차지철이 이때 전차로 밀어야 한다는 발언을 했다고 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만든 만화 '박정희'에 등장하는 것으로서, 차지철이 부마항쟁에 대해 캄보디아폴 포트처럼 싹 쓸어야 한다고 했던 것이 화근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김재규는 차지철보다 나이도 많고 군 경력에서 비교도 안되게 우위에 있던 사람인데, 보잘 것 없던 차지철이 자신을 무시하기에 순간적 분노에서 차지철을 쏘고, 박정희도 뒤이어 쏘았을 거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차지철은 특전사 창설 멤버로 육군 중령으로 진급 후 바로 전역했지만 김재규는 박정희와 육사 동기였고[37], 실제 3군단장까지 했던 3성장군 출신이다. 워낙 권력의 중심에 있던 사람이다보니 흔히들 김재규를 4성장군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김재규는 예비역 중장이다. 의외로 10.26 당시 동석자 중 한 명이었던 김계원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육군 대장 출신이다. 당시 참석했던 인물의 병역 사항을 살펴보면 박정희는 대장 예편, 김계원도 대장 예편, 김재규는 중장 예편, 차지철은 중령 예편이다. 별들의 향연 그만큼 차지철과 계급차가 컸다. 하지만 이 역시 이미 술자리 이전부터 심복들에게 "오늘밤 거사하겠다"라고 말하고, 박정희 사살 이후에 "난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단 것을 보면 단순 우발적 암살이라고 보기엔 근거가 부족하다는 의견도 있다.[38] 이후 행동의 어설픔들은 거사 직후의 당황, 거사 직전까지 자신의 최측근들에게조차 속내를 숨겼던 내부사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아니겠냔 의견도 있다. 즉, 평소 가지던 불만에 당일의 분노가 기름을 부은 것이라는 의견.
  • 중앙정보부 부장이라는 위치의 위험성
중앙정보부는 박정희정권의 정치공작에서 최전선을 담당했으며, 역대 중정부장은 사실상 박정희 정권의 2인자였다. 하지만 박정희가 장기 집권하고 있는 한 중정부장의 막강한 권력도 시한부에 지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거대한 위치가 중정부장 개인의 일신에는 위험을 안겨다 주는 것이었다.
김종필, 이후락, 김형욱 등 권력을 휘두르던 중정부장들은 최종적으로 박정희의 견제를 받아 몰락하는 수순을 받았다. 특히 김형욱의 말로는 후임인 김재규가 보낸 중정요원들에게 암살당하는 비참한 최후였다. 김형욱의 죽음을 보고 김재규가 자신 역시 단지 박정희의 소모품일 뿐, 언젠가는 실각 당하거나 처참한 말로를 맞을 것이라는 생각에 위기감을 가지게 되어 박정희 정권에 회의를 느끼게 했다는 분석이다.
  • 장준하-김재규 밀약설
한편 장준하와의 밀약이 있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밀약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이론에 불과하지만 평소에 장준하와 김재규가 어느 정도 친분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장준하 선생의 아들인 장호권에 의하면 장준하 선생 사후 김재규가 여러 모로 유족들을 도와줬다고 하며, 장준하 선생이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기 며칠 전 김재규와 만났다는 이야기를 한 적 있다. 다만 김재규의 행동이 장준하의 영향을 받은 것인가에 대해서는 주변 인물들의 증언 외에는 확실한 증거가 부족한 상태다. 이런 밀약설 중에는 시인 김지하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재규 사이에도 쿠데타에 대한 의논이 있었으며, 성공할 경우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내세우고 국회의원의 1/3 이상을 자기쪽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한다. 즉, 실제로 시행 가능성을 전제로 둔 밀약이었다는 것. 이 밀약설을 주장한 사람은 김지하 본인인데, 그 외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 김영삼 지지설
당시 제1야당인 신민당 당수 김영삼을 지원하기 위해서라는 설. 김재규와 김영삼 두 사람은 김녕(金寧) 김씨 문중의 종친이었고, 이 점에서 야당 지도자임에도 김영삼에 대한 거부감이 적었으며, 도리어 그가 박정희 대신 대통령이 되는 것을 지지하여 10.26을 저질렀다는 주장. 다만 이는 관련자의 증언, 물적 증거가 전혀 없는 개연성, 추측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므로 그다지 진지하게 고려할 내용은 아닌 듯하다. 그래도 다음에 나올 건강이상설보다는 그럴듯해 보인다.
  • 건강설
前 중앙일보 김진 논설위원은 발기 부전(...)을 비롯한 건강 문제가 하나의 원인이라고 근거 없는 주장을 했다. 링크. 실제로 김재규는 간경변을 앓고 있었고, 10.26 당시엔 중정부장 직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 때의 간 기능 장애로 극심한 발기부전을 앓게 되어 스트레스와 우울증이 생겼고, 이것이 10.26 같은 암살을 저지른 한가지 먼 원인이 되었다는 것. 그저 당시 김재규의 정신적 혼란에 대한 먼 원인을 추측한 것일 뿐 큰 의미는 부여하지 말자. 해당 칼럼에 대한 비판.
다만 위의 김진의 억측말고 김재규의 건강문제도 생각해볼 여지가 있는게 당시 김재규는 간경변을 앓고 있었다 간경변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간경변 환자에게 술은 독약이나 다름 없다. 이런데도 김재규는 박정희의 강권으로 연회때마다 술을 마셔야 했다. 반면에 차지철은 건강한데도 종교적 이유로 술을 마시지 않았다. 술 하나만으로는 사람을 죽일 정도로 분노하는 것이 어렵지만 이전부터 분노가 쌓인 상황에서 박정희가 독약이나 다름없는 술을 강권하는 것 때문에 분노가 폭발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술기운과 분노가 쌓이자 원래 계획한 치밀한 암살계획 대신 급작스럽게 암살을 진행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 외에도 여러가지 주장들이 존재하며, 위의 추측 중 여러 개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해석도 매우 많다. 그만큼 김재규의 암살은 이해하기 어려운 뜻밖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평소 가지고 있던 생각과 차지철에 대한 적개심 등 여러가지 복잡한 심리가 뒤죽박죽 짬뽕 극대화되어서 저지른 행동이라고 생각하면 암살이나 이후의 판단 미스도 이해는 간다. 예를 들어, 유신 체제를 지속하는 박정희에 대한 실망감과 함께 선임자 김형욱 부장의 암살을 지켜본뒤 불안감을 키우던 김재규가 부마항쟁 현장을 방문하고는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갈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껴 박정희 암살을 계획하기 시작했으나, 26일 궁정동에서 차지철의 도를 지나친 무례한 행동과 술기운에 욱하는 바람에 "궁정동 안가에서 중정 직원들만으로 현장을 제압할 수 있는 지금이 기회"라는 판단을 굳히고는 아직 미완이었던 계획을 급하게 앞당겨 실행한 것이라고도 추측할 수 있다. 이후 김재규의 혼란스러운 행동은 아무리 계획된 암살이었더라도 자신이 수십 년 충심으로 따르던 박정희를 막상 자기 손으로 암살하고 나자, 김재규 스스로도 충격과 공황 상태에 빠져 정승화가 하자는 대로 육본에 따라가는 등 판단 미스를 거듭한 것일 수도 있다.

4.2. 재조명

대중적 층위에서는 당시 김재규가 항소했을 시 밝힌 동기가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재조명을 받고 있다.
구국여성봉사단이라는 단체는 총재에 최태민, 명예총재에 박근혜이었는바, 이 단체가 얼마나 많은 부정을 저질러왔고 따라서 국민, 특히 여성단체들의 원성이 되어왔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아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영애가 관여하고 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아무도 문제삼은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민정수석(民情首席) 박승규 비서관조차도 말도 못 꺼내고 중정부장인 본인에게 호소할 정도였읍니다.

본인은 백광현 당시 안전국장을 시켜 상세한 조사를 시킨 뒤 그 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던 것이나 박대통령은 근혜양의 말과 다른 이 보고를 믿지 않고 직접 친국까지 시행하였고, 그 결과 최태민의 부정행위를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면서도 근혜양을 그 단체에서 손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근혜양을 총재로 하여, 최태민을 명예총재로 올려 놓은 일이 있었읍니다. 중정본부에서 한 조사보고서는 현재까지 안전국(6국)에 보관되어 있을 것입니다.

4.2.1. 김계원의 증언[39]

이호 객원기자는 2005년, 10.26 사건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이던 김계원과 인터뷰를 했고, 이것은 이코노미스트 811호(2005.10.31)에 실려있다.

https://jmagazine.joins.com/economist/view/244751
http://blog.naver.com/palhj/100038634428

묻는 사람이 이호 기자고 답변하는 사람이 김계원이다.
「김계원:
그게 이제 (잠시 망설이다가) 차지철하고 김재규 최태민 때문에 많이 싸웠습니다. 최태민 아시죠? 다른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두 사람이 싸운 걸 나중에 보면 최태민 때문이야. 차지철이 최태민을 앞세우고 박근혜양을 너무 업고 다니니까. 그러면 김재규가 '그러지 마라. 그러면 안 된다' 그러거든? 근혜양은 그 때 어머니는 없고 외로운 그런 떄인데. 근혜양은 자기가 퍼스트레이디로 활동해야 하는데 주위 사람들이 왜 자꾸 나서서 그러느냐, 이런 소리가 나오니까 이 소리가 최태민을 통해 많이 들어가거든요. 최태민이 근혜양 앞에서 자꾸 알랑거리면서. 그러니까 근혜양은 어렵게 만든 놈이 다 최태민이야! 그래서 저놈을 때려잡아라, 그래 가지고 박대통령이 최태민을 데려다 야단친 일이 있죠."

기자:
박 대통령이 최태민을 직접 불러 혼을 냈다는 말씀 아닙니까.

김계원:
예. 이건 내가 들어가기 전 얘기입니다. 내가 비서실장 되기 전에 있었던 일이고, 비서실장이 돼 내가 김재규에게 '뭐가 제일 문제냐' 그랬더니 '큰 영애 문제가 있습니다'라고 그래요. 그게 뭐냐 했더니, 최태민 문제다 그래요.
(중간생략 - 글쓴이)

기자:
최태민씨가 청와대 드나드는 것은 경호실 문제 아닙니까?

김계원:
뭐 본론으로 이야기하면 그렇게 되는 건데, 최태민이 문제 있다는 걸 김재규가 얘기해 박 대통령이 최태민을 데려다 야단치고 막 이랬거든요. 나도 비서실장 하면서 중정이나 각 정보기관에서 올라오는 정보 보고서를 보니까 이건 뭐... 최태민이 그놈하고 관계가 이런저런 문제가 많아요.
(최태민이) 나쁜 놈이야. 근데 근혜양은 이게 중앙정보부에서 모함해 그런 거다, 최태민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아주 선량한 사람인데 왜 정보부에서 모략을 해 자기 아버지 생각을 흐려 놓느냐고 하면서 오해가 생겼어요.

그런데 대통령한테 혼나고 나서는 최태민이 청와대에 못 들어왔죠. 또 근혜양한테는 못 나가게 했어요. 외출을 못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했는데도 근혜양이 밖으로 나가니까 그건 경호실 문제지. 그래서 박 대통령께 내가 한 번 물어봤어. 이 문제는 내가 청와대 들어오기 전에 있었고 김재규를 통해 주로 들은 얘기니까. 그걸 확인하려고 비서실장 된 뒤에 박 대통령한테 물어봤어.

'각하. 요즘도 최태민이 근혜양과 만났습니까.' 내가 그랬거든. 그랬더니 '아니야. 그놈의 자식 내가 아주 그냥 혼내놨어. 요즘은 근혜도 자주 못 나가. 자주 나가지 말라고 그랬어.' 이러시잖아요. 그러니까 대통령께서도 자식이지만 속이 아프고 하시겠는데 내가 직접 확인한 거니까.
(중간생략 - 글쓴이)

기자:
청와대 출입을 못하게 됐는데 왜 최태민 때문에 차지철과 김재규가 다투게 됩니까.

김계원:
그 구국여성봉사단인가 뭔가가 집회를 청와대에서 합니다. 그런데 그 모임 멤버가 한 200여 명 된다고 들었는데 재벌들이 그 모인 멤버가 되는 것을 굉장히 큰 영광으로 생각해요. 청와대에서 그 모임을 한 번 하면 말이야, 재벌들이 큰 뭐나 된 것처럼 으스대고 이런 판이거든. 그걸 정보부에서 다 보거든. 문제가 된다 이거지. 그런데 출입증은 경호실에서 발행하는 거거든. 그러니까 또 싸움이 되고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지요. 김재규는 못하게 하고 차치철은 왜 막느냐 하고. 그래서 차지철은 김재규가 청와대 들어오는 것까지 막거든? 대통령한테 보고할까봐.

기자:
중정부장이 대통령한테 긴급 보고도 할 수 있는데 차지철이 김재규가 들어오는 것조차 막았다는 겁니까.

김계원:
그래서 내가 청와대 간 뒤로 얼마 후에 김재규가 나에게 '실장이, 실장님도 과거에 청와대 들어오는 게 이렇게 어려웠습니까?' 그래요. 그래서 '자네가 청와대 들어와 대통령께 보고드리는데 그렇게 들어오는 것이 어렵단 말이냐'내가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아유. 지금 저 차지철이란 놈이 어떻게 제한하는지, 왜 들어가느냐, 뭣 때문에 들어가느냐, 빠르다, 늦아, 시간이 길다.' 자꾸 자기 하는 일에 제동을 건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아. 정보부장은 국가 유사시에 언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데 대통령을 못 만난다니 말이 되느냐, 난 어떨 때 새벽 1시에 가 대통령 주무시는 걸 깨워 보고드린 일도 있어' 그래서 경호실장이 하는 일을 내가 도중에 막을 순 없으니까 '자네가 정 급한 일로 들어와야 되는데 들어오기 어려울 때는 비서실장 만나러 온다'고 전화하라고 했어요. 비서실장이 오라고 하면 그건 누구도 못 막거든. 그래서 내가 한 네댓 번 바로 넣어준 일이 있어요 대통령한테. 차지철이가 그랬다고 글쎄. 그러니 김재규하고 안 싸워요?"
(중간생략 - 글쓴이)

기자:
차지철이 그토록 김재규를 막고, 김재규는 가까우니까 실장님한테 얘기하고, 그러면 결국 근혜양에게 실장님이 오해받을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김계원:
그것만큼은 사실일 겁니다. 왜냐하면 노골적으로 정보부하고 쉬 틀어졌던 것이 김재규가 최태민 일로 자꾸 여러 가지 귀찮게 했는데, 그러니까 김재규는 김계원 사람이다, 왜냐하면 김재규가 나하고 가까웠고, 뭐든지 나한테 얘기하고 그랬거든. 김재규가 해군하고 같이 술 먹고 오다 차가 전복돼 거의 죽게 됐을 때 내가 언덕 밑에서 신음하고 있는 걸 업고 와 살린 그런 인연이 있어요.

그래서 김재규가 그랬죠. 자기가 세상에 은인이 세 사람 있는데 하나는 박 대통령, 하나는 고 이종찬 국방부 장관, 그 다음에 김계원이라고 했거든? 그러니까 여태까지 박근혜가 아무 지장 없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됐는데 이게 자꾸, 김재규가 정보부장 되더니 브레이크가 걸리거든. 그러니 이건 틀림없이 김계원 지시다, 그런데다 큰 영애가 볼 떄는 김재규가 하는 일이 김계원이 정보부장 할 때 하고 똑같구나, 그렇게 느껴질 거 아니겠어요?

기자:
실장님하고 근혜양도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겠습니다.

김계원:
또 하나는 최태민이 대통령한테 혼나고 그 후에 내가 최태민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비서질장 밑에 큰 영애 전속 비서실을 만들어야겠다 싶어 대통령한테 '각하 비서실을 개편해야겠습니다. 영부인이 안 계시지만 큰 영애가 영부인 역할을 하고 있으니 공식 비서를 하나 따로 두어야겠습니다.' 그래서 재가받았어요. 그런 다음 내가 큰 영애에게 '비서를 따로 하나 두려고 그러는데 누가 좋겠습니까, 추천할 사람 있습니다'라고 했더니 좋아하면서 그때 구로공단 책임자로 있던 최명헌씨를 지명해요.

근데 그 사람이 또 최태민과 가까워요. 아주 곤란해 다른 이유를 대고 다른 사람을 말해 보라고 했어요. 그랬으니 큰 영애가 나를 좋게 생각했겠어요? 그러고 나서 며칠 있다 최필립 비서관이라고, 우리 비서실에 있던 사람인데 걜 지명하더구먼. 그래서 그렇게 하십시오, 그랬더니 걜 예뻐해요, 큰 영애가. 아 그런데 나중에 보니 최필립도 최태민을 아는 거야. 난 몰랐지 첨엔. 어떻게 이상하게, 최씨 세 사람이 그렇게 합쳐 움직여, 나 참"」

최태민이란 자가 박정희 딸인 박근혜를 위시하여 각종 비리를 저지르고 있다는 내용이 중앙정보부에 들어왔고, 이에 따라 김재규는 조사를 통해 박정희에게 보고했으나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김재규는 사안이 중하다고 판단해 최태민을 처벌해야 한다는 식으로 재차 건의했고, 이에 따라 박정희는 최태민을 직접 불러 김재규와 같이 심문을 시작한다. 문제는 이 조사에 박근혜가 동행했었다는 것이고, 박근혜는 최태민 관련 의혹이 사실이 아니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박정희는 이러한 박근혜의 태도만 보고 최태민을 처벌하지 않았고, 오히려 김재규를 강하게 질책했다고 한다

조갑제 기자는 월간조선 2006년 2월호에서 역시 김계원과 인터뷰 한 적이 있다. 여기서 최태민 문제가 이야기에 나타난다.

https://pub.chosun.com/client/news/print.asp?cate=C01&mcate=M1001&nNewsNumb=20161222249

기자:
얼마 전 金실장께서 차지철과 김재규의 사이가 나빴던 것은 대통령의 큰 딸인 槿惠씨를 둘러싼 힘겨루기가 원인』이라고 말씀하신 게 한 주간지에 실렸는데, 무슨 의미인가요.

김계원:
자꾸 차지철이 김재규가 하는 일에 제동을 거는데, 그중 하나가 박근혜와 崔太敏(최태민) 목사 문제였습니다. 최태민 때문에 여러 사람에게 (청와대로)비난이 꽤 많이 들어왔어요. 결국 대통령에게 보고되는데… 구국봉사단 총재였던 최태민이 재벌 사람을 불러 돈을 모으는데… (액수가) 꽤 큽니다.

박근혜씨가 앞서서 돕기 때문에 김재규가 朴대통령에게 몇 번 말씀을 드렸는데, 「朴대통령이 딸 얘기만 듣는다」고 해요

기자:
당시 朴槿惠씨를 시집보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나요.

김계원:
朴대통령께 두어 번 말씀드린 일이 있어요. 그런데 한번은 朴대통령께서 최태민 얘기를 했어요.「최태민이라고 있는데 金실장 알아?」 그래요. >제가 알 수 없죠. 「얘기를 들었습니다만… 목사라고 하던데요」 하니, 「글쎄 목사라고 하는데 진짜인지 뭔지 모르겠어. 내가 불러 親鞫(친국)을 했는데, 요즘은 덜 만나는 모양인데」 그래요

기자:
최태민을 직접 불러 친국을 했다는 겁니까.

김계원:
네, 朴대통령에게서 직접 들었습니다. 김재규에게 사실이냐고 물으니 「親鞫을 했다」고 해요. 꿇어 앉혀서... 그런데 그 배후에 차지철이 있다는 겁니다. 김재규는 「차지철이 최태민의 청와대 출입을 방조해 놓고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불만이 높았어요.

김재규는 자기 나름대로 대통령에게 보고하는데, 차지철이 볼 때는 김재규가 옆에서 자꾸 자기가 하는 일에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니, 둘 사이가 점점 나빠졌다고 봅니다. 김재규는 자연 청와대 출입이 어려워지게 된 겁니다

기자:
朴槿惠씨도 朴대통령에게 김재규를 많이 비난했겠네요.

김계원:
그렇죠. 자연 그렇게 될게 아닙니까. 자기가 하는 일에 감시하는 것처럼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니…

기자:
최태민이 기업체 회장에게 일종의 압력을 넣어 돈을 많이 모은다」는 보고가 청와대로 올라온 거죠.

김계원
그때 잘못한 일이 있는데, 최○○이라고 있어요. 그 친구가 청와대 비서로 있었는데, 제가 판단을 잘못해서 朴대통령에게 「槿惠양이 영부인 일을 하고 있으니 그를 보좌하는 비서관을 두는 게 좋겠다」고 보고했어요. 대통령께서 「글쎄...」 이러시면서 「누가 좋겠냐」고 묻길래 「槿惠양에게 물어보는 게 좋겠다」고 했어요. 그때 의전수석인 최광수 이야기가 「최○○이 담당하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추천하지 않았겠어요? 최씨 몇이 몰리게 된 것이지요』

기자:
최○○은 최태민과 가까워졌겠네요.

김계원:
그렇죠. 제가 생각한 것과 영 달라지게 됐어요.

기자:
참 이상한 게 그전의 朴대통령 같으면 최태민을 잡아넣었을 텐데.

김계원:
한 번은 「야단치려고 해도 에미 없는 것이 불쌍해서 눈물 나더라」고 하시던데요
조갑제는 박정희가 최태민을 잡아넣을텐데라고 의문을 품지만 김계원 전 비서실장은 "야단치려고 해도 에미 없는 것이 불쌍해서 눈물 나더라"고 답변하고 있다.

4.2.2. 정보부 수사 국장의 진술

<김부장은 '최같은 자는 백해무익하므로 교통사고라도 나서 죽어 없어져야 한다'고 증오를 표시했다. 새마음봉사단의 부총재(총재 박근혜)인 사이비 목사 최가 사기 횡령 등 비위 사실로 퇴임한 후에도 계속 막후에서 실력자로 영향력을 행사하여 각 기업체 사장들을 운영위원으로 선임하고 성금을 뜯어내는 등 새마음운동 취지를 흐리게 해서 계속 동향을 감시하라는 김부장의 지시를 받았다. 79년 내사 결과 최의 이권 개입, 여자봉사단원과의 추문 등 비위사실을 탐지하여 김재규부장에게 보고한 바 그렇게 말했다.>
동아일보, 1992.08.29. 남산의 부장들 (107) 10.26의 서막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4.3. 자신이 최고에 오르려는 정변

1979.10.27. 김재규 심문조서 및 10.28. 김재규 자필진술서(수사기록66-71쪽)에는 김재규가 쓴 범행동기가 자백돼 있다.
“본인은 76.12.4.부터 정보부장으로 근무해 왔다. 정국이 시끄럽고, 야당의 활동이 날로 적극화돼 가고 있었다. 이에 대한 본인의 수습방안이 실패를 반복하여 무능함이 노출됐다. 본인 및 형제 등의 이권개입과 비위가 노출되어 대통령으로부터 경고친서를 받아 놓고 있었다. 군 후배이자 연하의 차지철이 너무 오만방자하여 수차에 걸쳐 수모를 당했고, 대통령은 이런 차지철만 편애했다. 이런 사유로 79.4월 경부터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암살하고 군부의 지지를 받아 직접 집권하려고 결심했다. 그 후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곧 있을 대통령의 중요 인사 단행에 본인이 포함될 것이라는 데 대해 불안을 느꼈다. 10.19. 부산지역 소요사태를 관찰했다. 정부에 대한 불신이 매우 컸다. 이런 소요가 서울 대구 등 5대 도시로 확산되면 경제가 침체되고 현정권이 끝장을 맞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럴 때에 거사를 하면 국민적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보아 본인은 10.26. 만찬기회가 결행의 적기라고 생각하게 됐다.

당시 언론들은 개각과 당직개편 계획을 보도했다. “여당은 경화정국 타개를 위한 방안을 논의했으며 정부-여당의 개편을 통해 국민들에게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는 방법도 거론한 것으로 알려졌다”정국수습|민심일신 위해 개각.여권 개편설
11월17일에는 이러한 자백을 내놓았다
문: 범행의 구체적인 계획은 언제부터 어떻게 세웠나요?
답: 본인은 금년 4월경부터 보안유지를 위하여 단독으로 구상하여 왔습니다. 왜냐하면 이조시대 이래 2人 이상이 역모를 해서 성공한 사례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혼자서 골똘히 구상했습니다. 그 내용은 대통령 각하를 시해한 후 우선 늘 참석하는 김계원 실장에게는 보안을 유지시키고 현장목격자로서 동조자로 확보하고 현장부근에 군 실력자를 유인 대기시켜 놓고 거사 직후 본인의 거사 목적과 의도를 설득 또는 협박하여 끌어들이고 비상 국무회의를 소집하여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 후 계엄사령관을 조종하여 사태를 장악하고 계엄사령부를 서서히 군사혁명 위원회로 전환시키어 국민혁명으로 이끌려고 하였습니다.그리고 최단시일 내에 혁명과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기존정당을 해체시키고 집행기관인 혁명위원회를 구성하여 위원장은 본인이, 부위원장은 육군참모총장으로 하여 군인들로만 구성하고 이를 감독하기 위하여 혁명회의를 설치 구성함에 있어서는 본인이 의장이 되고 국무총리는 부의장으로 하고 혁명위원은 관구사령관급 이상의 육군주요지휘관, 함대사령관급 이상의 해군주요지휘관 작전사령관급 이상의 공군주요지휘관 도지사급 이상의 각료전원으로 하고 다시 재경지구에 재직하는 사람은 상임의원으로 지방에 재직하는 사람은 비상임 의원으로 구성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로도 계속하여 기회를 엿보던 중 최근 일련의 정치사태가 강경정국으로 발전하여 사회적 혼란이 야기되고 또한 10월19일 본인도 대통령각하의 명에 따라 부산지역의 소요사태를 관찰 지도하려고 다녀왔었던바 소요사태의 성격이 학생보다도 일반인 숫자가 월등한 것으로 보아 이는 서민의 조세정책에 대한 저항 및 정부불신임에 기인한 민란이라고 판단되었고 이것은 조속한 시일 내에 진정되지 않을 것이고 5대도시 (서울 대구등)로 확산되어 현 정권이 국내적으로 한계점에 이른 것이라고 판단되었고 국외적으로는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 국가들이 유신체제는 비민주적이라고 평가하므로 대외의존적인 한국경제가 여러 가지로 난관에 봉착할 것으로 판단 지금이 거사의 적기로서 더 이상 늦출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에는 식당밖에도 경호차가 2대 이상 대기하고 경호관 숫자도 7~8명 정도여서 경비가 삼엄하였으나 최근에는 밖에 경호차도 대기하지 않고 경호관도 4~5명 정도여서 경비가 허술하므로 더욱 용이하였고 궁정동 소재 위 식당은 전부 본인의 심복인 경비원들이 경계를 담당하는 중정 자체 시설이므로 거사에 용이한 점을 감안 범행 장소로 선택하였고 대통령과 차지철은 본인이 직접 시해하기로 하고 수행 경호관들은 중앙정보부 비서실 직원인 본인의 심복으로 처치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대통령과 차지철을 본인이 직접 하지 않으면 실패할 염려가 있고 (심경변화로) 또한 다른 직원들은 접근이 용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혁명회의는 입법과 행정을 관장하고 부설기구로서 혁명재판소와 혁명검찰부를 그 산하에 설치하되 혁명검찰부는 군민합동으로 참신한 검사와 군검찰관으로 구성하고 재판부는 군에서 명망 있는 장관급으로 구성하여 유신헌법 기초에 참여한 자. 5·16혁명 주체로 권력 주변에서 치부한 자 및 악덕기업 및 특혜 재벌 등 비 동조 세력을 처단하고 재산을 국고에 환수한 후 본인의 거사목적과 의도를 국민에게 널리 홍보하여 국민의 지지기반을 확보하려고 하였으며 또한 헌법기초위원회를 설치하여 국민이 원하는 헌법만을 연구 작성케 하여 국민투표에 회부함으로써 확정시킨 후에 선거를 실시하려고 하였습니다.
문: 대통령 시해 후의 정국혼란을 수습하고 주도권을 장악할 적임자는 누구라고 생각하였습니까?
답: 기존의 정치인 중 여당권에서는 대통령감이라고 생각되었던 인사는 전부 부정부패에 관련되어 있어 부적합하다고 생각되었고 야당권에서는 김대중이는 사상적인 하자가 있어서 곤란하고 김영삼 의원은 일응 출마는 할 수 있지만. 그 역량을 높이 평가하지는 않았고 이철승 의원은 당 자체에서 사꾸라시 하므로 국민의 지지기반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대통령 시해 후의 혼란된 정국을 수습하여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갈 적임자는 우선 본인뿐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이런 과도기적 단계를 일정기간 지나 사태를 수습한 후에 새 헌법에 의한 선거를 실시하려고 한 바 대통령 출마후보자는 일응 최규하 국무총리나 태완선 유정회 의장 등을 꼽을 수 있고 본인도 상황에 따라서 출마여부를 결정하려고 하였습니다.
문: 이번 거사를 위한 동조세력 규합은 어떤 방식으로 하려고 하였나요.
​답: 별도의 조직을 활용하려고 한 것은 아니고 기존체재의 조직을 설득 내지는 협박을 통하여 활용하려고 했습니다. 특히 중앙정보부 조직은 본인이 약 3년간 정보부장으로 재직하고 있어서 부하들이 본인의 의도를 잘 받들 것으로 생각하고 있고 무력은 없지만 전국적인 광범위한 조직이고 군 조직은 본인이 오랫동안 몸 바쳐 왔기 때문에 본인이 의도한 바의 혁명목적을 제일 먼저 동조할 것으로 생각하였고 평상시에도 본인은 군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주 접촉과 노력은 하였으나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보안문제가 있어서 의도를 노출시키거나 거사에 가담하라고 권유한 사실은 없습니다.
문: 대통령을 시해한 후 어떠한 방법으로 범행을 은폐하려고 하였나요.
답: 궁정동 소재 중정식당은 중정자체의 시설임을 주장하여 비상 국무회의의 결의 하에 따라 그날 밤으로 본인이 평소부터 신임하던 안전국장 김근수 등 안전국요원으로 하여금 궁정동 현장에 보내어 궁정동 소재 보안을 유지시키고 사건현장은 안전국 요원이 조사 중이라는 구실로 일체 비밀로 하고 본인이 의도하는 혁명이 성공단계로 접어든다고 판단될 때 국민 앞에 진상을 발표하려고 하였습니다.
문: 이번 범행이 실패한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답: 결국은 보안이 유지되지 않고 가장 믿었던 김계원 실장이 너무 빨리 변심을 하였기 때문에 본인의 의도와 목적이 채 관철될 시간여유가 없어 중도에서 실패로 돌아간 것입니다.

이학봉은 김재규와 잘 아는 사이였다. 김재규가 보안사령관이었을 때 보안사에서 함께 근무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학봉은 41세였지만 친화력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김재규가 경계심을 늦추기 위해 필기를 하지 않고 옛날 상사와 부하 사이의 대화인 것처럼 꾸며 안심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가기 위해 필기를 일체 하지 않고 머리에만 입력했다.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매우 허심탄회하게 진전됐다.
이학봉 : 왜 그렇게 허술하게 일을 저지르셨습니까?
김재규 : 내 원대한 꿈이 앞섰다.
이학봉 : 부장님은 박 대통령이 살아계실 때 인정도 받고 빛이 나는 것이지 박 대통령이 돌아기시면 부장님의 입지도 동시에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까?
김재규 : 모두가 나에게 절절 매고 따르기에 거사 후에도 계속 그렇게 하리라 생각했다.
이학봉 : 이번 거사에 동원될 부대는 어느 부대였습니까?
김재규 : 정승화가 내편이라 그런 건 염려하지 않았다.
이학봉 : 대통령을 시해하려면 누구를 시키던지 하시지 왜 부장님의 손에 직접 피를 묻히셨습니까? 부장님이 직접 대통령을 시해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나중에 얼마나 많은 비난을 받으시려구요?
김재규 : 나의 심복인 안전국장 김근수를 시키면 내가 직접 하지 않은 것으로 다 처리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수사가 이루어지고 있을 동안 전두환으로부터 자주 전화가 왔다. 거사에 동원되는 부대가 분명히 있을 텐데 빨리 알아내라는 전화였다. 그만큼 초조했던 것이다. 이를 지켜본 김재규는 전두환을 빨리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이학봉은 “이유만 정당하면 금방이라도 만나 뵙게 해드릴 수 있습니다. 이유를 어떻게 전해드릴까요?”하고 물었다. 이에 김재규는“지금 곧바로 혁명을 해야 한다. 시간을 지체할 겨를이 없다. 매우 안타깝다. 빨리 만나야 한다”며 시간을 재촉했다. 이때부터 3단계 혁명 계획에 대한 구체적인 진술이 술술 풀려나오기 시작했다. 11월 8일. 김재규는 구체적인 “3단계 혁명 계획”을 실토했다. 제1단계는 정승화를 시해현장에 유인, 공범자로 만듦으로써 군이 ‘혁명’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는 것이고, 제2단계는 정승화로 하여금 군주도 하에 계엄을 선포하고 군부대를 동원케 하여 주요 기관과 시설을 장악케 하는 것이며, 제3단계는 ‘혁명위원회’를 발족하여 김재규가 의장, 정승화가 위원장을 맡도록 하는 것이었다. 김재규의 이 3단계 혁명계획은 매유 정교하게 진술됐다.

중장에 남아 있을 요원들을 연행, 남산에 수용시키고, 사건현장만 조사케 한 후, 현장증거를 인멸케 한 후 중정 간부를 소집하여 나의 범행에 대해서는 일체 함구한 채, 안전국장이 진상을 조사하고 있다고만 알리게 할 계획이었다. 육군총장을 설득 또는 협박하여 혁명위원회를 발족시켜 국민이 납득-호응할 수 있게 홍보하고, ‘10.26 혁명’을 ‘국민혁명’으로 전환한다. 현 정부 조직을 최대로 활용, 참여의식을 갖게 한다. 혁명위원회 의장은 내가 되고, 부의장은 국무총리, 위원장은 정승화와 상의하여 총장 또는 국방장관으로 하고, 위원은 전 각료, 각군 총장, 군사령관, 군단장, 관구사령관, 해군함대사령관, 공군작전사령관, 각 도지사로 한다. 위원은 상임위원과 비상임위원으로 한다. 혁명검찰부와 혁명대판소를 설치하고, 검찰부는 군민 합동으로 참신한 검사 및 검찰관으로 임명하고, 재판부는 군에서 명망 있는 장성급으로 구성하고, 반혁명분자를 처단케 한다. 빠른 시일 내에 내가 대통령에 출마하여 집권하고자 했다. 내가 정보부장으로 국내외 정보를 분석해 보니 우리나라에는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인물이 없고, 나의 권한을 최대로 활용하면 대통령 시해도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으며, 중정의 조직력과 권한으로 군부의 세력을 장악할 수 있어, 본인은 일약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김재규의 군맥은 대단했다. 정승화는 김재규의 강력한 추천에 의해 육군참모총장이 된 사람, 특전사라는 최정예 부대를 이끌고 있던 정병주는 김재규가 5사단 36연대장을 할 때 대대장으로 시작해 줄곧 인연을 맺어온 사람, 수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3사령관인 이건영은 김재규가 정보부장일 때 차장으로 데리고 있다가 다시 3군사령관으로 내보낸 심복. 이처럼 당시 김재규는 사실상의 군권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러한 군맥이라면 쿠데타를 꿈꾼다면 실행할수 있는 힘이 있었던 것이다.
11월 8일, 이렇게 오랫동안 자신이 구상해왓다는 '3단계 혁명계획'을 실토했다. 제1단계는 정승화를 시해현장에 유인, 공범자로 만듦으로써 군이 '혁명'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는 것이고, 제2단계는 정승화로 하여금 군 주도하에 계엄을 선포하고 군부대를 동원케 하여 주요 기관과 시설을 장악케 하는 것이며, 제3단계는 '혁명위원회'를 발족하여 김재규가 의장, 정승화가 위원장을 맡도록 하는 것이었다.

제2단계까지 대성공이었고 3단계까지 성공할 찰나에 김계원의 배신으로 자신이 체포되고 순순히 인정함으로써 물거품이 된 것이다.

5. 트리비아

  • 사건 현장인 궁정동 안가는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인 1993년 철거되어 시민공원인 무궁화동산으로 바뀌었다.
  • MBC에서 매년 12월 31일에 열리는 MBC 가요대제전의 전신은 10대 가수 가요제 였는데, 원래는 10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 열리다가 이 사건 때문에 연기되어 12월 31일에 열리게 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 북한에서는 김정일이 1979년 10월 20일 신묘한 통찰력으로 박정희의 죽음을 예언했다고 하는 말도 안되는 선전이 있다고 한다.
  • 이 사건의 생생한 목격자였던 심수봉은 전두환이 집권한후 2년 동안이나 가수 활동을 정지당해야 했고, 신재순 또한 주변의 따가운 눈총에 시달려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고 말았다. 참고로 김재규의 유족들도 이후 상당수는 미국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또 김수환 추기경이 김재규와 그의 부하들 사후 유족들을 어느 정도 챙겨줬다고.
  • 대전광역시홍선기는 10.26 사건 당시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아산군수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 유례 없는 현직 국가 원수 저격 사건이라 사건 전 불길한 징조가 있었다고 한다. 삽교천 방조제 준공 치사를 박정희가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으나 참석자들의 말에 따르면, 여느 때와 달리 힘이 없어보였고[40], 준공비 제막식에서는 가림막이 벗겨지지 않아 경호원들이 뛰어올라가 낑낑거리며 가림막을 내렸고[41], 행사를 마치고 전용 헬기를 타고 도고온천으로 갔을 땐 근처 울타리에 갇혀 있던 사슴이 헬기 착륙 소리에 놀라 날뛰다 기둥에 머리를 부딪혀 뇌진탕으로 즉사하기도 했다.[42]
  • 2016년 10월 24일 JTBC의 태블릿PC 관련 보도가 나가며 본격적으로 촉발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나라가 뒤집어진 상황 속에서 10월 26일을 맞이하고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계속 실검 순위에 오르는 등, 10.26에 대한 재평가가 역사학계를 넘어 일반 대중에게도 본격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공교롭게도 박정희와 그의 딸 박근혜가 서로 비슷한 날 정치적으로 사망 선고를 받은 셈.[43] 김재규를 평가하는 책들이 다시 서점가에 재발간되기도 했으며, 박근혜 탄핵안이 가결되었을 때와 탄핵안이 헌재에서 인용되었을 때 김재규 묘소에 탄핵 관련 기사가 올라온 신문을 놓고 가는 등 많은 참배객들이 다녀가기도 했다.
  • 박근혜 대통령에게 탄핵 주문을 선고한 이정미 헌법재판관(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은 임명 청문회에서 "고등학생 때 원래 수학교사가 꿈이었는데, 10.26 사건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보고 법률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고 말한 바 있다. # 운명의 장난이라면 장난일 수도 있겠지만, 10.26은 여러모로 민주주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한 사건이 된 셈이다. 이러한 아이러니로 인해 한때 아버지는 탕탕탕 딸은 땅땅땅이라는 단어가 반짝 유행한 적도 있다.
  • 박정희의 동거녀 였던 이현란[44]은, 前 동거남의 갑작스러운 죽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식사하던 중에 텔레비전에서 뉴스를 접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밥을 다 먹었다고.
  • 사건 당시 김재규가 사용한 총기인 PPKM36 리볼버는 증거품으로 보안사령부에서 몰수하였는데 그 뒤의 행적이 묘연하다. 당시 수사기록을 보면 원래 서류상 중앙정보부가 소유한 총기여서 중앙정보부에 반납했다고 나오는데, 정작 국가정보원에서 확인 결과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6. 어록

박정희의 죽음은 한국사 최대의 비극이다. 마치 호랑이가 날개를 꺾인 것 같은.
다나카 가쿠에이
그분이 그렇게 빨리 허무하게 돌아가실 줄은 몰랐어. 인생도 허무하고 정치도 무상한 거야.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 10.26 소식을 전해 들은 직후.
하나님도 원수를 용서하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를 용서해야 합니다.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가 박정희를 조문하면서[45]
고인께서 군인과 대통령으로서 보여주신 애국심은 열정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고인은 국토 구석구석, 국민 생활 속속들이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삼천리 방방곡곡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 이르기까지 그분의 마음이 닿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고인은 산업화와 경제 발전에 실로 빛나는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충격적 사건에서 뼈아픈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아집과 탐욕, 증오와 폭력을 우리 가슴속에서 씻어 내고 용서와 화해, 사랑을 채워 넣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나라는 국민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나라, 억압과 폭력의 공포가 없는 나라입니다. 이제 중요한 문제는 국상을 끝낸 후에 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역사적 운명은 크게 발전할 수도, 침체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이 곧 갈림길이며 위기의 고비입니다.
김수환 추기경. 1979년 11월 2일 명동성당 박정희 대통령 추도 미사에서.#
‘국민으로서는 열여덟 해난 받든 지도자요 개인으로는 서른 해나 된 오랜 친구 하느님! 하찮은 저의 축원이오나 인류의 속죄양 예수의 이름으로 비오니 그의 영혼이 당신 안에 고이 쉬게 하소서 이 세상에서 그가 지니고 떨쳤던 그 장한 의기와 행동력과 질박한 인간성과 이 나라 이 겨레에 그가 남긴 바 그 크고 많은 공덕의 자취를 헤아리시고 하느님, 그지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 설령 그가 당신 뜻에 어긋난 잘못이 있었거나 그 스스로가 깨닫지 못한 허물이 있었더라도 그가 앞장 서 흘린 땀과 그가 마침내 흘린 피를 굽어 보사 그의 영혼이 당신 안에 길이 살게 하소서’
구상 시인이 10.26소식을 듣고 쓴
민주주의쿠데타암살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힘으로 이뤄야 진정한 민주주의입니다.
김대중 당시 민민연합 공동의장, 10.26 직후 인터뷰 당시.

7.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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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에 증인으로 출두한 가수 심수봉(왼쪽 모자 눌러쓴 여성)과 신재순(오른쪽).[46]

파일:attachment/10.26 사건/10.26.jpg

10.26과 관련된 인물들. 박정희를 중심으로 왼쪽에서 두 번째가 김재규, 오른쪽 끝이 차지철이다. 사진 로고에 가려서 눈치채기 어려운데, 사진 맨 왼쪽은 비서실장 김계원이다. 박정희 머리 위에 얼굴을 돌리고 서있는 인물은 박상범 경호관으로 추정된다. 10.26 사건 4년 전 사방공사 시찰 때의 모습이다. 사진에 나와 있는 좌우 김재규 차지철 두 인물의 위치가 박정희의 왼팔과 오른팔의 위치와 같다는 점이 흥미롭다. - 사진 출처 : 뉴스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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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전모를 브리핑하는 당시 보안사령관 겸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육군 소장.

8. 창작물

  • 제4공화국
    박근형이 극강의 김재규 포스를 보여주었다. 역대 최강의 포스를 자랑하는 김재규로 차지철을 쏠 때에 "이 새끼 너 건방져!"는 가히 명대사로서, 삽교천 행사 참석을 하지 말라는 차지철(이대근 역)과의 전화상 말싸움과 전화가 끊기자 "이런 개새끼!"라고 뇌까린 적도 있다. 박정희를 저격하기 전 집무실에서 빈 총의 방아쇠를 당기며 일본어로 '코로시마스(殺します, 죽여 버리겠습니다)'라고 중얼거릴 때의 포스는 압도적이다. 10.26 사건을 다룬 영상 매체에서 김재규가 '코로시마스'라고 중얼거리는 장면은 거의 빠지지 않고 나온다. 4공의 해당 장면에서는 자막은 '고로시마스'라고 뜨는데, 김재규 역을 맡은 박근형의 대사는 "코로스(殺す, 죽인다)"였다. 존댓말과 반말의 차이. 그 장면에선 아이러니하게 박정희의 사진이 배경으로 보이면서 총을 겨누니, 가히 긴장감을 일으키게 만드는 명장면.(근데 이건 영화 택시 드라이버 표절 냄새가 나긴 한다.)[47]
    박정희 저격 후 체포되고 난 다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후 등장이 없다가, 5.18 이후 4공을 본격적으로 다루면서 차지철과 말싸움을 주고받으면서 개그 캐릭터화가 되실 뻔하였으나 배우의 포스로 그나마 무게를 잡았다. 다만 육군본부 앞에서 보초병이 정승화를 알아보지 못해 "어느 대학 총장님이신지?" 라고 묻는 부분은 없다. 또한 김치열 법무장관이 "그놈의 새끼가 기고만장하며 까불더니 결국 일을 저질렀구나!" 라고 외치는 대신,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재규의 총에 맞아 서거라니..."라고 말한다.
  • 코리아게이트
    사극에서 정도전 전문 배우로 유명했던 김흥기가 김재규 역을 맡았다. 제4공화국과 같은 시기에 방영되어 드라마는 신통치 않았고 4공에 묻힌 감도 있다. 배우가 배우인지라 연기력 자체는 훌륭했지만, 워낙 4공에서의 박근형 포스가 막강했던지라 그에 비하면 살짝 역부족. 그런데 드라마 초반에는 중앙정보부장 시절에도 안경을 착용하지 않았다가 후반부에 착용한다. 이 드라마 19화와 마지막화 20화는 김재규의 일생이 중심이다.
  • 그때 그 사람들
    김재규와 10.26 사건을 주제로 한 블랙 코미디 영화. 백윤식이 김재규 역을 맡았는데, 특유의 능글맞은 이미지가 김재규 역에 잘 녹아들었다. 이런 류의 풍자 코미디가 드문 한국에서는 괜찮은 편에 속하는 수작이다. 다만 조롱과 희화에 중점을 둔 나머지 영화 속 청와대 사람들을 묘사할 때의 고증은 떨어진다는 평가도 있다. 또한 박정희와 관련자를 풍자하는 부분에서 역사 사실과 다른 경우도 있다. 자세한 건 해당 문서 참조.

    김재규: 야, 임마 차실장.

    차지철: 어?

    김재규: 만 명?

    차지철: 만 명.

    김재규: 너 하나 죽으면 돼.(탕!)

    차지철: 어얽!

    박정희: 뭐꼬?

    김재규: 나야.(탕!)

    (꺄아아악)(철컥)

    차지철: 잠시만! 잠시만! 잠시만! 으아앍! 다아앍!(불꺼짐)

    김재규: 불켜어ㅇㄺ!
김재규 역을 맡은 김형일이 실제 김재규와 외모, 분위기가 매우 흡사하다. 다만 연기는 너무 점잖아보이는 감도 있다(사실 큰 차이라면 배우와 실존 인물의 음성 차이). 또한 어느 국밥집에서 박정희의 유고를 다룬 뉴스가 보도되자 "잘 죽었다! 독재자!"라고 하는 사람과 "각하께서는 나라의 아버지인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라는 사람이 싸움이 붙는 장면 또한 백미. 별것 아닌 장면 같지만 이는 오늘날까지도 극명하게 엇갈리는 박정희에 대한 평가를 간단명료하게 보여준 장면이다. 참고로 문서 맨 위의 10.26 사건에 대한 여러 인물들의 평 가운데 백동림 당시 합동수사본부 수사 1국장이 한 말을 이 드라마에서는 이학봉이 하는 것으로 나온다.
  • 10.26 사태를 다룬 소설로 김진명의 '한반도'가 있다. 10.26 사태의 CIA 개입설을 다룬 이 소설은 최근 1026으로 개작되어 재출간되었다.
  • 증발(1994)
    김형욱[48] 암살 사건을 다룬 신상옥 감독의 영화로 최후반부에 묘사된다. 다만 시대 때문에 사전조사를 못했는지[49], 극적 연출을 위해서였는지 고증오류가 제일 심한 축에 든다. 궁정동부터가 정말 중세시대 양식의 궁전 같은 인테리어로 나오고, PPK의 탄걸림이나 정전에 관한 묘사도 없이 그냥 이상규(신성일 분, 김재규)와 국가보안부 요원들이 권총과 M16까지 쏴대며 대통령 한성태(조지 타케이 분, 박정희)와 경호실장 김영철(김동현 분, 차지철), 경호실 요원들을 한큐에 몰살시켜 버린다. 묘사를 보면 도망가는 경호실 요원들을 중정 요원들이 쫓아가서 총을 난사해 죽이는 등 엄청 요란하다. 그리고 일을 끝마치고 난 뒤 이상규가 궁정동을 나서려는데, 이미 헌병들이 체포하려고 와 있었다. 근데 개연성도 진짜 엉망인 게, 분명히 일을 저지르고 나온 지 시간상으로 1시간도 안 된 거처럼 묘사되는데 헌병 장교는 "미국은 이미 비상 사태에 들어갔어!"라는 말과 함께 "미국은 대통령 시해 사태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라는 뉴스 속보가 흘러나온다(...) 거사를 치른 지 한 시간도 안 됐는데!
  • 송강호 주연의 영화 효자동 이발사에서도 나온다. 다만 이 작품은 실제 역사와 많이 다른 부분이 있다. 예로 경호실장은 1974년 육영수 저격 이후 박종규에서 차지철로 바뀌었으나, 여기서는 차지철이 모티브인 인물이 그냥 5.16 이후 그대로 경호실장이다. 애당초 풍자 영화에 가까우니 역사적 고증은 별로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
  • 웹툰 제 0시 : 대통령을 죽여라에서 주요 소재로 등장하다가 뜬금없이 다른 전개로 흘러간다. <26년>보다 자극적인 소재이기도 하다 보니 댓글 상황은 개판. 게다가 원래 사건과는 다르게 자신이 수족처럼 부리는 전 중앙정보부장을 암살했다는 식으로 더 저평가를 내리려고 작가가 노력하는 바람에, 은유라고 보기에 너무 직설적으로 비방하는 내용이 되어 버렸다.


  • 윗동네에서는 당연히 왜곡되어 다뤄지고 있는데, 남한 출신의 고위급 월북자의 전기를 다룬 민족과 운명 13부 홍영자 편 3화[50]에서 그려지고 있다(다른 월북자와 달리 홍영자는 가상의 인물이다). 여기서는 궁정동 비밀 요정에서 여자들을 데리고 니나노를 벌이던 중 박정희가 김재규를 김영삼 구속 건으로 질책하고 차지철이 신민당 놈들 탱크로 어쩌고라고 떠들자, 김재규가 비서실장에게 "각하를 똑바로 모시라"고 한 뒤에 "각하, 저런 버러지 같은 놈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 (올바로) 되겠습니까"라 하고 차지철의 팔뚝을 쏴버렸다. 박정희가 삿대질을 하며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이러느냐. 그만두지 못해" 라고 외치자 김재규는 비웃음을 흘리며 "야, 박정희" 라고 일갈하며 발사했고, 박정희는 테이블보를 붙잡고 술상을 와장창 무너뜨리며 쓰러졌다. 이후 중정 요원들이 경호원들을 처치한 후 김재규는 의전과장의 총을 빌려 차지철을 쏜 뒤에 네 발의 확인 사살로 박정희의 숨통을 끊었다. 몇 가지 왜곡된 장면(ex. 경호원들이 군복 차림에 거의 한개 소대 병력인 점, 김재규가 박선호, 박흥주만 따로 불러 쿠데타를 지시한 것과 달리 안가 요원을 전부 불러놓고 모의한 점, 김재규가 평소 형님으로 모신 김계원에게 반말을 하는 점, 나름 개신교 신자라 술을 마시지 않던 차지철이 꽐라가 된 점 등)을 빼면 위에서 언급한 다수설에 근거하는 내용이다.
  • 미국 소설가 스티브 쉐건이 쓴 박정희/전두환 시대를 소재 음모론 소설 <The Circle>[51]에서는 말 그대로 마약을 동원한 환락파티 끝에 김재규가 몇 달 전부터 준비한 총과 기생들의 독침에 의해서 벌어진다. 박정희는 원래대로 총, 차지철은 독침에 찔려죽는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은 독실한 불교도인 박정희가 핵개발을 하고 미국과 단교하고 기독교를 불법화할 계획을 세운 것을 알게 된 미국에서 꾸민 일이였고 이미 기생 대장 이손지[52]와 짠 갑툭튀한 전두환이 그걸 낼름했다는 이야기. 어느 정도냐면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이자마자 전두환이 공수부대 병력을 끌고 안가에 들이닥친다. 소설 마지막에는 미국에서 전두환도 그렇게 처리할 준비를 하지만 전두환은 이미 눈치 챘다는 걸 암시한다. 당연히 내용이 내용인지라 1984년에 일월서각이 <π=10.26 회귀>란 제목으로 번역판을 냈으나, 번역자 김자동과 발행인 김승균이 유언비어 유포혐의로 경찰에 끌려가 구류를 살았다. 그래서 80년대 해적판에서는 하나같이 파르크 대통령, 큐우 부장, 츙크[53] 장군 등으로 표기되었다. 1987년 6.29선언 후 이듬해 일월서각판 역자 등 2명이 항소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 팬텀 하록의 만화 포천에서 프롤로그에 70년 간격으로 같은 날 벌어진 하얼빈 의거와 교차해서 등장한다.
  • 영화 동감에서 아침에 등교하기 전 TV를 보던 여대생 윤소은(김하늘)이 10.26 사태를 다룬 뉴스를 보면서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고, 소은의 아버지는 나라에 큰 일이 일어날까봐 딸이 두려워하는 줄 알고 당장 달려가 딸을 토닥이며 달래주는데[54], 사실 소은에게 있어 박정희의 사망 따윈 아오안(...) 소은은 단지 1979년에 10.26 사태가 벌어질 거라는 걸 미리 알려준 2000년의 지인(유지태)이 실존하는 인물임을 이를 통해 알았고, 현재 소은이 짝사랑하는 선배와 자신의 절친 사이에서 태어난 인의 존재로 인해 자신의 짝사랑이 결코 이뤄질 수 없음을 깨닫고 슬퍼한 거다.

9. 관련 인물

9.1. 가해자

  • 김재규 - 중앙정보부장, 가해자.
  • 박선호 - 중앙정보부 비서실 의전과장, 가해자.
  • 박흥주 -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육군 포병대령, 가해자.
  • 이기주 - 중앙정보부 안가 경비조장, 가해자.
  • 유성옥 -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운전기사, 가해자.
  • 김태원 - 중앙정보부 안가 경비원, 가해자.[55]
  • 이 외 중정 안가 경비원 유석술이 증거 인멸 혐의(사건에 사용된 총기를 안가 정원에 매장)로 체포되었다. 또다른 경비원 서영준은 박정희를 병원으로 옮길 때 유성옥과 같이 가 병원 관계자 및 대통령 주치의를 총기로 위협했다가 체포, 같이 징역형을 받았다.

살인 가해자 6명은 모두 사형이 집행되었고, 증거 인멸에 가담한 유석술과 서영준은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유석술은 26년 뒤인 2005년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96회에서 사건증언을 하기도 했다.

9.2. 사망자

  • 박정희
    - 김재규의 저격에 우측 허파 관통상과 후두부 총상으로 사망.
  • 차지철 - 대통령 경호 실장,
    - 김재규의 저격에 우측 손목 관통상과 복부 총상을 입은 후 안가 경비원 김태원에게 확인 사살 당함.
  • 정인형 - 대통령 경호실 경호처장,
    - 박선호의 저격에 목 관통상으로 사망. 해병대 간부사관 장교 출신이자 박선호의 동기였다.
  • 안재송 - 대통령 경호실 경호부처장,
    - 박선호의 저격에 흉부 총상으로 사망. 정인형과 같은 해병대 간부사관 장교 출신이었고 정인형과 박선호의 후배였다.
  • 김용섭 - 대통령 경호실 경호관,
    - 별관 식당에서 안가 경비원들의 저격에 의해 사망.
  • 김용태 - 대통령 경호실 특수차량운행계장,
    - 별관 식당에서 안가 경비원들의 저격에 의해 사망.

9.3. 생존자

  • 김계원 - 대통령 비서실장, 사건 목격자.
  • 심수봉 - 가수, 사건 목격자.
  • 신재순 - 모델, 사건 목격자.
  • 박상범 - 대통령 경호실 경호계장, 사건 피해자.[56]
  • 이정오 - 중앙정보부 안가 요리사, 사건 피해자. 별관 식당에서 대통령 경호원들과 식사중 안가 경비원의 소총 사격에 허리 총상을 입고 후송. 이후의 소식이 없다.
  • 김용남 - 중앙정보부 안가 식당 차량 운전사, 사건 피해자. 별관 식당에서 대통령 경호원들과 식사 중 안가 경비원의 총격에 어깨 총상을 입고 후송. 이 사람도 이후 소식이 없는데 역시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은 상황에서 어렵게 살았을 법 싶다.

9.4. 후속 조치

  • 정승화 - 육군참모총장, 박정희 사망 후 계엄사령관.
  • 최규하 - 국무총리, 박정희 유고 후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비상국무회의 주관. 이후 10대 대통령으로 취임.
  • 김정섭 - 중앙정보부 제2차장보. 사건 당일 김재규의 지시로 정승화 장군을 김재규 대신 영접했고, 직후 김재규가 암살범임을 안 뒤 보안사와 협조해 중정 내 자신들의 직원들을 동원, 안가에 남아있던 김재규의 부하들을 체포하고 만약을 대비해 안가 내 탄약고를 처리하는 등[57] 뒷수습을 맡았다.
  • 전두환 - 당시 국군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으로서 10.26 사건 수사 지휘자. 그리고 동년 12월에 12.12 군사반란을 주도했다.

10. 관련 문헌

  • 남산의 부장들 - 김충식 저.
  •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제1권 - 조갑제 저.
  • 실록 청와대: 궁정동 총소리 - 정병진 저. 한국일보사. 1992/2010(재출간)
  •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 - 문영심 저. 시사IN북. 2017.

[1] 공교롭게도 70년 전 이 날에,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총격했다.[2] 한때 백의사의 단장 염동진이 살았던 곳으로, 10.26 이후에 철거되었다. 철거된 자리에는 무궁화 동산이 생겼다.[3] 교과서에서 가장 많이 퍼진 표현은 "10.26 사태 or 궁정동 사건". 나이드신 할아버지 세대는 '궁정동 사건'으로 많이들 알고 있다. 한국 전쟁을 '육-이오'라고 하듯이 이를 '십-이륙'으로 읽는 경우가 많다. 여담이지만 12.12 군사반란의 경우 '십이-일이'라고 읽는 경우는 매우 드문데, 이걸로 보아 딱히 날짜를 읽는데 규칙성은 없는 듯 보일 수 있으나, 단지 우연히 12라는 날짜가 반복되어 부르기 쉽게 같은 단어를 반복한, 예외적인 경우로도 볼 수 있다.[4] 사실 이 둘만의 문제는 아니고 전두환까지 끼어서 알고보면 셋이 서로 속으로는 갈등이 매우 심한 상태였는데, 다만 전두환은 두 사람과는 달리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꾹 눌러 참았다고 한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인데, 아무리 보안사령관이라지만 고작 소장인 전두환은 경호실장 차지철(소장을 경호차장으로 둘 만큼 기세등등했다), 중정부장 김재규(당시 중앙정보부 부장은 의전상 부총리급이었다)에 비해 끗발이 달렸다.[5] 김종필은 10.26이 계획적인 거사라면 상태가 불량한 총을 사용할 리가 있겠냐며 그 사건은 우발적인 것임이 틀림없다고 단언했는데, 이에 대해 김계원조갑제와의 인터뷰에서 김재규의 총기는 불량이 아니었으나, 본인이 김재규의 총격을 방해하는 과정에서 내구성에 문제가 생겨 격발이상이 발생한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미 술자리 이전부터 심복들에게 "오늘 밤 거사하겠다"라고 말하고, 박정희 암살 이후에 "난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는 것을 보면 단순 우발적 암살이라고 보기엔 근거가 부족하다는 의견도 있다. 이후 행동의 어설픔들은 거사 직후의 당황, 거사 직전까지 자신의 최측근들에게조차 속내를 숨겼던 내부사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아니겠냐는 의견도 있다.[6] 그러면서도 김재규는 김종필을 항상 각하라고 불렀다. 김종필이 "이미 각하가 계신데 그런 호칭은 그만 둬 달라"고 했지만 김재규는 "습관이니 양해하시라"며 눙쳤다고 한다. 육사 기수는 김재규가 김종필보다 6기 선배이다.[7] 이 때문에 송신소 행사는 민간에 공개되지 않고 치러져, 일반인들에겐 당진 송신소가 아닌 삽교천 방조제 완공식이 박정희 생전의 마지막 공식 행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송신소 행사 장면이 민간에 처음으로 공개된 것은 1999년 KBS 박정희 특집 다큐멘터리를 통해서였다.[8] 그리고 이 행사는 박정희의 생애 마지막 공개 행사가 되었다.[9] "대행사를 준비하고 참여하라"는 통보를 받고 나서 정승화 총장을 불렀으나, 정 총장에겐 약속을 잡고 나서 "급작스레 대통령이 불러 본의 아니게 폐를 끼쳤으니 행사 끝나고 바로 오겠다"고 둘러댔다.[10] 이 권총은 김재규가 육군대학 부총장이던 1960년, 당시 총장 이성가 장군에게 선물받은 것으로 예편 후 주소 관할지의 성북경찰서에 맡겨 놓았다가 중정부장 취임 후인 1977년 반환받아 집무실 금고에 보관하고 있었다.[11] 김계원이 중정부장에 오른 뒤, 1970년 3월 발생한 정인숙 살해사건에 중정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여 청와대를 포함한 고위층이 장안의 웃음거리로 전락했다는 오명을 썼다. 결정적으로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김영삼김대중이 이른바 40대 기수론을 외치며 급부상했을 때, 박정희는 김계원에게 "노회한 이미지에 상대하기도 쉽다고 생각되는 유진산이 대선에 나오도록 뒷공작을 펼쳐 보라"며 지시했지만 무위에 그치면서 김대중이 대선후보로 선출되었다. 결국 박정희에게 미운털이 박힌 김계원은 중정부장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12] 실제로는 정인형, 안재송, 박상범, 김용섭에 경호실 운전기사 김용태까지 합쳐도 5명이었다. 김재규의 마음을 돌리려고 박선호가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물론 경호실장 차지철까지 포함하면 6명이라 7명에 근접한 수치이기는 하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총기를 소유한 인원은 4명(...)[13] 평소 청와대 관용차량은 박정희의 육군포병학교 교장 시절 운전병으로 복무한 인연으로 채용된 이타관이 몰았지만 대, 소 행사 때는 비공식 행사용 차량인 토요타 크라운 슈퍼살롱을 운행했기 때문에 이날은 김용태가 슈퍼살롱 운전을 맡았다.[14] 국내 컬러방송 송출은 1980년에 시작되었기에, 몇몇 컬러 TV를 볼 수 있었던 이들이 주한미군을 위한 이 방송을 꽤 많이 시청했다.[15] 드라마 제4공화국에서 경호실 내부 회의 중에 경호실 수행계장 박상범이 "청와대 경호원들의 영향이 안가에선 무력화된다. 조치가 필요하다"라는 건의를 올렸는데, 차지철이 "김재규 부장 정도야 내 파워로 꽉 누르고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 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는 장면이 있었다.[16]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은 서로 잡아먹지 못해 으르렁대는 사이였지만, 원래 그 쪽 세계가 다 그렇듯, 그 밑의 대통령 경호관들과 중앙정보부 직원들은 거의 다 친구들이었다. 당장 박선호 중앙정보부 의전과장과 정인형 청와대경호실 경호처장은 해병 동기로 친형제보다 더 친하단 소리를 들을 정도였고, 또 박선호는 경호부처장 안재송과도 해병 선후배로 절친한 사이였다. 중앙정보부 부장 비서 박흥주 육군대령도 경호실 사람들과 친했다. 10. 26 사건은 친한 사람들끼리의 총질이기도 했던 것이다(...)[17] 때문에 이 노래는 후대에 10.26을 상징하는 노래로 기억된다[18] 박선호가 안가 관리인 남효주에게 "(김재규)부장님께 전화가 왔다고 전해달라"고 지시하여 아무것도 모르던 남효주는 연회장에 들어가 김재규에게 그대로 귀띔했고, 김재규는 박선호가 대기하던 안가 부속실로 가서 거사 준비가 다 되었음을 확인했다.[19] 한편 심수봉은 꾸준히 (당시의) 소수설을 밀어, 제4공화국에서 직접 고증을 맡을 때에도 김재규의 대사를 "이 새끼! 너 건방져!"로 정했다. 근데 총을 쏠 때 차지철 팔은 식탁에 붙어 있었다[20] 안가 요원들의 사격은 거구의 김용섭에게 집중되었고, 김용섭은 다섯 발 중 네 발을 가슴에 피격당하여 쓰러진 채 한동안 신음하다 사망했다.[21] 한국 경호계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1974년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때도 현장에 있었고(현장 사진에 무대 맨 앞에 권총을 뽑아들고 있는 인물이다), 10. 26에서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으며, 나중에 아웅산 테러에서도 살아남았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경호실장을 지냈고 이어 국가보훈처장도 역임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22] 스미스 앤 웨슨 M36 리볼버. 박선호가 정인형과 안재송을 사살한 이 권총은 잠시 뒤에 김재규가 넘겨받아 차지철, 그리고 박정희에게 사격하여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 당시 궁정동에 모였던 박정희와 핵심 인물 3명을 모두 사살하여 현대사를 통째로 바꾼 총이다. 이 S&W M36과 김재규의 발터 PPK는 현재 행방이 알려져 있지 않다. 총기번호까지 기록에 명확히 남아있는데도. 총기 행방에 관한 기사[23] 가슴에 찬 권총을 뽑아 0.7초 내에 25미터 앞의 박카스 병을 명중시켰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출처[24] 안재송은 해병 대위 시절에 미국 해병학교에 유학했었는데, 당시 어떤 미 해병대 장교도 안재송의 45구경 권총 속사 사격 기록을 넘지 못했다고 한다. 출처 : 이근식(예비역 해병대령), 노해병의 어제와 오늘.[25] 출처 : 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제1권.[26] 갑자기 합선되면 펑 하는 폭발음이 난다.[27] 남아있는 증거 사진을 보면 확실히 이 총이다. 아이러니한 건 육영수문세광에게 같은 모델의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는 것.[28] #기사[29] 박정희가 타고 온 슈퍼살롱 운전사 김용태는 총격으로 숨진 상태라 유성옥이 대신 운전대를 잡았고, 박정희의 시신을 차로 옮긴 안가 경비원 서영준도 같이 병원으로 이동했다.[30] 영화 그때 그사람들 때문에 브레즈네프의 사망을 보안유지했다고 잘못 알려진 고증 오류의 원래 내용. 브레즈네프는 김재규가 사형에 처해지고도 뒤인 1982년에 사망했다.[31] 이재전 경호실 차장은 경호실 직제에서는 차지철의 아랫사람이었지만 민간인이 아닌 현역 중장 신분이었으며, 한국전쟁에도 참전한 차지철의 까마득한 군 선배이다. 차지철의 오만한 행위가 이미 도를 넘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정승화가 이쯤 명령을 내렸다면 차지철이 나타났더라도 그의 뜻대로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32] 권위주의정부 당시 중앙정보부(안기부), 보안사령부가 위세를 떨쳤지만, 그들의 순수한 전투력은 수도경비사령부보다 열세였다. 12.12 당시 전두환에게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이 장태완 수경사령관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33] 현 세종대로 21길 TV조선 별관 건물[34] 조갑제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 따르면 정동 분실에서 서빙고로 가던 김재규를 태운 호송차가 잠수교에서 전복 사고를 일으켰는데, 차가 뒤집어질 때 기절한 신동기 준위가 정신을 차려보니 김재규가 엉덩이로 신동기 준위의 머리를 깔고 앉아 있었다고. 김재규가 "아이고 내가 신 선생을 깔고 앉았구먼. 미안하오." 라며 비켜주자 수갑이나 포승줄이 없어서 김재규가 도주하지 못하게 바지춤을 잡고 있던 신동기 준위는 "부장님 어디 도망가시면 안돼요" 라며 손을 놓았고, 김재규도 "내가 어딜 도망가나. 빨리 (전복된) 차나 세우시오" 라면서 조용히 호송에 응했다고 한다.[35] 안가 경비원으로 이날 피해자들에게 M16 소총으로 확인사살을 했다는 혐의로 체포[36] 이름은 물론 Brutus이지만 '브루투스, 너마저!' 하는 라틴어 문장에서는 호격어미인 'Brute, et tu!'라고 쓰기 때문에 브루투스의 라틴어 이름을 Brute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있다.[37] 박정희는 훗날 육사가 되는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2기생이었고 김재규도 이곳 2기생이었다.[38] 하지만 분노라는 감정을 나타내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고 특히 당일 삽교천과 관련하여 분노의 방아쇠를 당긴 사건이 있었기에 더 분노설이 지지받기도 한다.[39] 이 문단에서 김계원의 증언은 김계원 생전의 증언이다.[40] 1979년 10월 28일자 동아일보.[41] 이 때 준공비에서 가림막이 내려가지 않고 걸려있는건 당시 대한뉴스 등 기록 영상에서도 확인된다.[42] 준공비 제막식 및 사슴 즉사 에피소드 출처 : 조갑제 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제1권.[43] 10월 24일 보도 이후 25일 대국민 사과, 26일 퇴진 시위 본격화가 일어났으니 같은 날이라고 봐도 어찌 보면 무방할 듯. 또 하나 재미있는 점은 박정희는 1961.5.16 쿠데타 이후 18년 만인 79년 비극을 맞이하였는데, 박근혜도 98년 정치 입문 이후 18년 만인 2016년 정치적 사망 선고를 받았다는 점이다.[44] 김호남과 이혼하기 전~육영수와 재혼하기 전 사이에 동거했다.[45] 다만 이건 겉치레일 확률이 높은게, 2003년 일본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김영삼은 10.26 당시 소회를 전하며, 박정희 사망 시 솔직히 죽어도 싸다(...)고 생각했다고 밝히기도 했다.[46] 신재순은 지금 기준으로 봐도 상당한 미인임을 알 수 있다.[47] 이 장면에서 2분 뒤에 나오는 장면인 김계원과의 대화에서는 코로시마스라고 한다.[48] 극중에서는 박진욱이라는 이름으로 김희라가 역할을 맡았다.[49] 신상옥 감독은 사건 당시 전 아내 최은희와 함께 북에 납치된 상태였다.[50] 시간 없으면 8분 13초부터.[51] 툼스톤의 비밀, 파문, 10.26과 기생 이손지 등등의 여러 버전으로 국내 출간되었다.[52] 아버지가 민주화 인사였다가 고문당해 사망하고 이 여자도 연좌제에 걸려서 체포되었다가 중정에 의해 기쁨조로 키워졌단다...[53] 혹은 이중 장군.[54] 달래는 대사가 "괜찮아, 전쟁 안 나"다.[55] 위에 나열한 5명들처럼 직접 총격에 가담하진 않았으나, 사건 직후 뒷처리 중 박선호의 명령을 받고 M16 소총으로 피해자들의 주검에 총격을 가해 확인사살을 하였다. 본래 이 날은 비번이었으나, 다른 경비원의 사정으로 대신 근무하러 나왔다가 이 사건에 휘말렸다.[56] 기적적으로 총알이 치명적 부위를 피해간 데다 쓰러지면서 머리를 찧어 기절해 죽은 것처럼 보였고, 중정 요원들이 경호원들을 습격하는 과정에서 중정 직원들(요리사 이정오, 운전사 김용남)까지 다치는 바람에 확인사살에 소극적이어서 죽음을 면했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 시절에도 계속 경호실에서 근무했고, 김영삼 정권 출범 때 경호실장으로 임명되어 최초의 민간인 출신 경호실장이 되었다. 육영수 저격 사건 때 직접 총을 들고 뛰쳐나왔던 경호원 중의 한 명이었고,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때도 경호원으로 있다가 살아남았다.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에 얽힌 인물.[57] 일설에 따르면 1개 사단 평시 재고분의 소총 탄약을 전부 그 자리에서 실탄 사격해 소모시켰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