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0-07 18:10:46

박정희/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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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친일 행적
2.1. 사실인 내용2.2. 논란이 있는 내용
2.2.1. 일본 식민지교육 찬양?2.2.2. 일본군복 코스프레?
2.3. 사실이 아닌 내용
3. 민주화 시위 발포 암시 발언?4. 탈일 행적
4.1. 셀프 훈장4.2. 기회주의자적 이중잣대 면모
4.2.1. 남조선로동당 활동 경력4.2.2. 일본 문화에 대한 이중성
5. 성추문과 섹스 스캔들

1. 개요

대한민국의 제5-9대 대통령 박정희에 대한 평가를 다루는 문서.

2. 친일 행적

2.1. 사실인 내용

박정희는 일제강점기 시절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재직하다가 한국인 교사 차별 문제로 일본인 교장과 갈등을 빚었다.

이 사건은 박 대통령이 일본군 육군 장교가 되기로 마음먹은 계기가 되었다.[1][2] 당시 일제는 군국주의 사회였기 때문에 장교만 되어도 지역 유지에 맞먹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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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ark_Chung-hee%2C_Manchu_Shinmun.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ark_Japan.jpg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 박정희
"대일본제국 최후의 군인이 죽었다." - <국가와 정보>, 주한일본외교관 저서, 10.26 사건 보고를 받고[4][5][6]

박정희는 구미역에서 기차를 타고 만주로 가서 (만주국)의 만주국육군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에 지원하였다. 하지만 나이 초과로 1차에서 탈락하자 재지원하면서 지원서류에 혈서와 채용을 호소하는 편지를 첨부하여 제출함으로써 반드시 만주군에 입대하고자 했다.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 기사에 박 대통령의 혈서와 편지 내용이 실려 있으며, 현재 일본 국회도서관이 이 신문기사를 소장하고 있다.

이때 박정희와 같이 교사 생활을 한 유증선은 나중에 조갑제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박정희에게 혈서를 쓰도록 권유했으며, 그 말을 들은 박정희가 즉시 시험지에다가 핏방울로 혈서를 썼다고 증언하였다. <박정희 평전 : 가난에서 권력까지>의 저자 이정식 경희대 석좌교수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 혈서에 대해 "1939년과 1940년 당시 일본군이나 만주국의 군대에 장교로 임관하기 위한 혈서 제출은 일종의 유행이었다"라고 말하였다.

1940년 4월 1일 박정희는 일제 신경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학할 수 있었고 우수한 능력을 발휘하여 주목받았다. 박정희의 제자 이순희의 증언[7]에 따르면, 재학 시절에 문경에 돌아와서 자신을 괴롭힌 지역 유지들을 협박하여 원한을 풀기도 했다. 당시 박정희의 동기생들 가운데는 5.16 군사정변에 가담한 군인이 없었으나, 간도와 용정의 광명중학교 출신의 선배 기수에서 5·16을 지지하는 군인들이 나오는 등 이때의 인맥은 박정희의 지지기반이 되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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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병적기록

졸업 성적 석차 2등으로 학교를 졸업한 박정희는 우등 졸업 기념으로 만주국 황제 푸이로부터 은사품으로 금시계를 하사받았다. 그 후 성적우수자 추천을 받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57기로 입학하고 1944년 300명의 동기생 가운데 3등의 성적으로 졸업하였으며, 수습 사관 과정을 거쳐 1944년 7월 열하성에 주둔한 만주국군 보병 제8단에 배속되었다. 그리고 1945년 2월 23일 정식 소위로 임관하면서 8.15 광복까지 만주국 육군 제8단에서 10개월 동안 만주국 장교로 근무하였다. 만주국군에서 함께 근무했던 신현준, 이주일, 방원철 등은 훗날 5.16 군사정변의 주축으로 활동한다.

1944년 중일전쟁의 전선은 황하 부근에서 화북에서 형성되어 있었는데 박정희가 소속된 제8단은 만주 열하성에 위치해 전선에서 먼 후방이었고 산발적인 팔로군 토벌이 임무였다. 그때 박정희는 단 본부(연대본부)의 을종부관(연대장을 보좌하는 갑종부관이 있고, 그 갑종부관이 또 부관으로 을종부관을 둠)으로서 팔로군 토벌에 나선적이 없었다.

한편 박정희와 같이 제8단에서 복무한 신현준, 방원철 등은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제8단 지역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전신인 팔로군 토벌을 위해 주둔하고 있었으나 박정희는 복무 당시 팔로군 토벌 기회가 전혀 없었으며 놀고 술 먹을 기회가 많았다”고 증언한 바도 있다. 그러나 일제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하면서 소속 부대가 없어지자, 동료들과 함께 한국광복군에 들어가 1946년 7월에 귀국하였다. 당시 광복군은 세 불리기에 혈안이 돼 있어 만주군 출신 한국인들을 대거 받아주었기 때문이다.

국가기록원은 친일파 청산 작업이 한창이던 참여정부 시절에 박 전 대통령의 병적 기록을 공개하였는데, 조선일보는 박정희가 표면상으로는 독립국인 만주국에 소속돼 있으므로 조사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당시 박정희는 창씨개명을 했기 때문에 '다카키 마사오'로 적혀 있으며, 박정희의 큰형인 박동희의 서명이 적혀 있어 일제가 군인과 군속 가족에게 나눠준 문서 양식에 박동희가 내용을 직접 적어 1945년 3월 경북 구미 면사무소에 제출한 것을 알 수 있다.

2004년 3월 22일 노무현 정부 시절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으로 출범한 대통령 소속 기관인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4년간 연구 끝에 친일반민족 진상규명 보고서를 발표하였는데 박정희는 이 명단에 없다. 친일진상규명위 "박정희=친일파 입증 불가"

민간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는 2009년에 박정희의 친일 행적을 입증하는 만주신문의 사본을 공개하였으며 ##2, 몇 년 뒤에는 박정희를 친일파로 분류하여 친일인명사전에 기재하여 서로 상반된 모습을 보였다.#3

이에 성대경 위원장은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반민규명위는 국회에서 만든 특별법에 의해 진행된다"며 "민간 연구소와는 달리 제약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우 일본군 장교로 재직한 이후 친일 행위가 확인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밝힌 박정희 전 대통령의 충성 혈서에 대해서도 그는 "<만주신문>을 통해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고 또한 보고서가 발간되기 직전 밝혀졌기 때문에 거론하기가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박정희는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뒤 1961년 11월 12일 일본을 처음 방문한다. 아카사카의 한 요정에서 일본의 유력인사들과 술자리를 가진 박정희는 자신이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던 시절 만주군관학교 교장으로 있던 나구모 신이치로 중장에게 큰 절을 올렸다. 그리고 유창한 일본어로 “나는 정치도 경제도 모르는 군인이지만 명치유신 당시 일본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지사들의 나라를 위한 정열만큼은 잘 알고 있다. 그들 지사와 같은 기분으로 해볼 생각”이라고 밝혀 동석한 일본 정객들을 흐뭇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1962년에는 자민당 부총재와 중의원 의장을 지낸 인물이자 대동아공영권 부활을 부르짖은 오노 반보쿠가 서울을 방문해 박정희와 두 차례 회담을 가졌는데, 도쿄를 떠나면서 기자들에게 “박정희 대통령과는 (피차에) 부자지간을 자인할 만큼 친한 사이”, “대통령 취임식에 가는 것은 아들의 경사를 보러 가는 것 같아 무엇보다도 기쁘다”고 말해 김영삼김대중의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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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에게 사신을 드리게 된 기회를 갖게 되어 극히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귀하가 귀국의 어느 위정자보다도 우리 대한민국과 국민에게 특히 깊은 이해와 호의를 가지고 한일양국의 백년대계를 위하여 양국의 견고한 유대를 주장하시며 그 실현에 많은 노력을 하시고 있는 한 분이라는 것을 금번 귀하가 파견하신 신영민씨를 통하여 잘 알게 되었습니다.

동씨는 더욱 나와는 중학 동창 중에서도 친우의 한 사람인 관계로 해서 하등의 격의라든가 기탄을 개입시키지 않은 자유로운 논의를 수차 장시간에 걸쳐서 교환하였기 때문에 어느 누구보다도 우리 군사혁명정부의 오늘까지의 시정성과와 향후의 방침과 전망에 대하여 가장 정확한 판단과 이해와 기대를 가지고 돌아가게 되었다고 확신하오니 금후에도 동씨를 통하여 귀하와 귀하를 위요한 제현의 호의로운 협력을 기대하여 마지 않습니다.

더욱 장차 재개하려는 한일국교정상화교섭에 있어서의 귀하(기시 노부스케)의 각별한 협력이야말로 대한민국과 귀국과의 강인한 유대는 양국의 역사적인 필연성이라고 주장하시는 귀의가 구현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귀하에게는 신영민씨가 약 이순에 걸쳐서 듣고 본 우리 국가의 정치경제 군사 민정 등 제 실정을 자세히 보고 설명 할 것으로 알고 나는 여기서 귀하의 건강을 축복하며 각필합니다.

1961년 8월 대한민국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거반(지난번) 귀국을 방문한 바 있는 박흥식씨 편으로 전해주신 귀하의 서한에 접하고 상금(이제까지) 회신을 드리지 못하고 있는 차에 금번 다시 박흥식 씨가 귀국을 방문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귀하에게 경의를 표하게 됨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한일 간의 국교가 하루 속히 정상화되어야 한다는 것은 본인의 변함없는 신념입니다. 이는 한일양국의 공동번영의 터를 마련할 것이며 현재의 국제사정하에서 극동의 안전과 평화에 기여하는 바 지대하리라고 믿습니다. 귀하께서도 항상 한일관계의 개선에 관심을 가지시어 적극적인 노력을 아끼시지 않는 데 대하여 본인은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이며 한일회담의 조기타결을 위하여 배전의 협조 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귀하의 가일층의 건승을 빕니다.

서기 1963년 8월 1일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박정희

이전 일본 총리였던 아베 신조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와도 친한 사이였다. 기시를 필두로 한 일본 전범세력은 박정희의 군사정변과 정권을 적극 지지하였으며, 박정희가 두 번째 유신 대통령에 오른 1978년 12월에도 유일하게 비공식 축하 사절로 외국에서 올 정도로 친분이 깊었다. 심지어는 1965년 한일협정을 일본 정계 막후에서 지원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박정희는 기시 노부스케를 비롯한 A급 전범들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노부스케와 친서까지 교환할 정도로 친했는데[8], 2013년 10월 이 사실이 드러나 커다란 논란이 됐지만, 박근혜 정부는 과거 정부에서 적법하게 결정한 것이기 때문에 서훈을 취소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이번에 KBS에서 방영하기로 한 <친일과 훈장> 내용에서 관련 부분이 삭제돼서 외압이 있지 않았냐는 의혹을 샀다.##2 기시 노부스케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박정희가 "우리 젊은 육군 군인들이 군사혁명에 나선 것은 구국의 일념에 불탔기 때문인데, 그때 일본 메이지유신의 지사들을 떠올렸다"며 기술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재일교포 학자인 강상중 교수와 현무암 두 사람이 같이 저술한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를 보면 된다.

여담이지만 만주군 장교 선배인 신현준의 회고에 의하면, 1946년 5월 10일 박정희는 해방된 조국의 모습에 실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조선 사람은 풀어놓으면 모두가 지 잘났다는 것뿐이고, 지멋대로 아닙니까? 조센징과 명태는 두들겨패야 한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왜놈들을 패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꼬라지를 보니 그런 비아냥을 들어도 싸다 싶습니다. 누군가 매를 들고 두들겨 주기 전에는 이런 무질서는 백년하청일 겁니다."[9] 일제의 식민사관 교육으로 인한 관점일 수도 있지만 고려해야 할 점은 당시 사회 분위기가 각종 이념으로 인해 많이 혼란스러운 상황도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즉, 공식적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인정한 친일파는 아니다.[10] 다만 박정희를 을사오적이나 이광수, 윤치호 등의 악질 친일파와 동등하게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직접적으로 항일투사나 독립운동가와 그 일가를 핍박한 기록이나 증언은 없으며, 이는 같은 대구사범학교 출신인 신상묵과 대조적이다. 거기다 박정희는 셋쩨 형인 박상희 덕분에 개인적으로 독립운동가에 대해 정보망이 넓은 편이었다. 박상희신간회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였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친형의 동료를 밀고해 얼마든지 공훈을 세울 수 있었다. 또한 일제 패망 뒤 광복군 입대, 귀국 이후 국민들 사이에서 인기였던 공산주의 정당인 남조선로동당에 참여한 행적을 보면 박정희는 출세하려는 의도로 친일을 한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또한 박정희 정도의 경력은 해방 직후 반민특위를 결성할 때나 각 정치단체에서 내건 악질 친일파 처단 기준에 들어가지 않는 수준이었다. 한국 군부에는 백선엽과 같이 만주군 출신 인물이 많았던 데다가 알고 보면 식민지배국 군대 출신 군인들을 독립한 고국의 군대에 편입하는 일은 신흥독립국 대다수가 거쳤던 일이었기에[11][12]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13]

다만, 군사정변 이후에 박흥식[14] 등의 국내 친일파와 함께 일본의 전범들과 국교정상화를 논의하여 과거사 배상 문제를 묵인한 점을 들어 박정희를 악질 친일파로 보는 사람도 있다. 특히 이러한 시각은 박정희의 차녀 박근혜 정부 시절 한일 위안부 합의가 타결된 이후 더 커졌다. 두 합의 모두 격렬한 반대 여론을 일방적으로 묵살했다는 것도 반감을 키우는 원인이 되었다.

한편 이런 친일 행적이란 요소 때문에 비밀 독립군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박정희가 광복군이 된 것은 사실이나 문제는 그것이 8.15 광복 이후라는 것이다. 해방 직후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은 '해방 조국의 군대'를 만들고자 했다. 기존의 3개 지대로 구성된 대한 광복군의 인원만으로는 부족해서 7개의 잠편지대를 확충하고, 이 잠편지대에 구 일본군 출신의 인재 또한 받아들이려 했다. 이 때 박정희가 광복군에 가담한 것이다.[15] 이 낭설이 처음 퍼지게 된 것은 1967년 박영만이란 사람이 대한광복군의 활동을 소재로 한 '광복군'이라는 소설을 쓰면서부터다. 박영만은 박정희 등 일부 군인들이 광복군과 접촉해서[16] 몰래 비밀 독립운동을 했다는 내용을 창작해 소설에 적었다. 물론 사실이 아니며 박정희 본인도 책을 읽은 뒤 사실이 아닌 내용을 왜 썼냐며 화를 내 결국 그 소설의 출판기념회는 열리지 못했다고 한다.

새누리당에서도 박정희가 비밀 독립군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박정희가 백강 조경한 선생을 도왔다는 주장인데, 물론 조경한 선생의 외손자이자 독립운동 연구가인 심정섭씨는 이러한 주장은 거짓이며 박정희 본인은 친일파란 부끄러운 이력을 감추거나 조작하려 들지는 않았다고 비판하였다.

2.2. 논란이 있는 내용

2.2.1. 일본 식민지교육 찬양?

1970년 내한했을 때 동아일보에서 진행한 이시하라 신타로와의 인터뷰에서, 이시하라는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例えば韓国の日本の統治の問題。あれは合法的にやって、しかも世界が是として、べつに外国から文句が出たものでもない。しかも韓国、朝鮮人が自分たちで選んだ道なんだ。

その判断を、ある意味で冷静に評価したのは韓国の大統領だった朴正煕さんだ。私も何度かお目にかかった。あるとき、向こうの閣僚とお酒を飲んでいて、みんな日本語がうまい連中で、日本への不満もあるからいろいろ言い出した。朴さんは雰囲気が険悪になりかけたころ「まあまあ」と座を制して、「しかしあのとき、われわれは自分たちで選択したんだ。日本が侵略したんじゃない。私たちの先祖が選択した。もし清国を選んでいたら、清はすぐ滅びて、もっと大きな混乱が朝鮮半島に起こったろう。もしロシアを選んでいたら、ロシアはそのあと倒れて半島全体が共産主義国家になっていた。そしたら北も南も完全に共産化された半島になっていた。日本を選んだということは、ベストとはいわないけど、仕方なしに選ばざるを得なかったならば、セコンド・ベストとして私は評価もしている」(拍手)。

いや、こんなところで拍手しなくていい。

朴さんが、「石原さん、大事なのは教育だ。このことに限ってみても、日本人は非常に冷静に、本国でやってるのと同じ教育をこの朝鮮でもやった。これは多とすべきだ。私がそのいい例ですよ」と言う。

「私は貧農の息子で、学校に行きたいなと思っても行けなかった。日本人がやってきて義務教育の制度を敷いて子供を学校に送らない親は処罰するといった。日本人にしかられるからというんで学校に行けた。その後、師範学校、軍官学校に進み、そこの日本人教官が、お前よくできるな。日本の市谷の士官学校に推薦するから行けといって入学。首席で卒業し、言葉も完璧でなかったかもしれないが、生徒を代表して答辞を読んだ。私はこのことを非常に多とする。相対的に白人がやった植民地支配に比べて日本は教育ひとつとってみても、かなり公平な、水準の高い政策をやったと思う」

...예를 들면 일본이 한국을 통치한 문제. 그것은 합법적이고 게다가 세계도 인정하고 외국이 불평하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한국인, 북한인들이 스스로 선택한 겁니다.

그 판단을 냉정하게 평가한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이었습니다. 나도 몇번인가 만나뵈었습니다. 어느 날, 박 대통령은 각료들과 술을 마셨는데 모두들 일본어를 잘했고 일본에 대해 여러 불만도 있어서 여러 가지 말을 꺼냈습니다. 박 대통령은 분위기가 험악해질 즈음에 "자자..."라고 말하며 진정시키고 난 뒤 이리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 우리 민족은 스스로 선택했습니다. 일본이 침략한 게 아닙니다. 우리 선조들이 선택한 겁니다. 만약 청나라를 선택했다면 청은 바로 멸망해서 더 큰 혼란이 한반도에 일어났겠죠. 만약 러시아를 선택했다면 러시아는 바로 쓰러져 반도 전체가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을 겁니다. 그렇게 됐다면 북도 남도 완전히 공산화가 되었겠지요. 일본을 선택한건 최고라고는 말 안하겠지만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만 했다면 두 번째로 최고라고 나는 평가합니다."

아니, 여기서 박수칠 게 아닙니다.

박 대통령은 "이시하라 씨, 중요한 건 교육입니다. 여기에 한해서 일본인은 매우 냉정하고 우리나라가 행하고 있는 똑같은 교육을 조선에서도 행했습니다. 이건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내가 좋은 例(예)지'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학교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습니다. 일본인이 행한 의무교육제도에 따라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는 부모는 처벌한다고 했습니다. 일본인에게 혼난다고 하니까 학교에 갈 수 있었습니다. 그 뒤에 사범학교, 군관학교에 갔고 그곳의 일본인 교관이 "넌 기특하구나"라고 말한뒤 일본 시부야 사관학교에 추천해준다고 해서 그곳으로 입학, 수석으로 졸업했고 말은 완벽하지 않았을지도 몰라도 학생을 대표해서 답사를 읽었습니다. 이 점에서 나는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백인이 행한 식민지 지배에 비해 일본은 교육 하나에도 꽤나 공평하고 수준 높은 정책을 행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이 인터뷰는 미심쩍은 점이 있는데 일제는 한국 강점기 동안 의무교육을 실시하지 않았을 뿐더러 시부야 사관학교는 일본 본토에 있었단 점이다. 박정희 본인의 기억이 잘못됐거나 혹은 이시하라 신타로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 둘 중 하나이지만 아직까지도 진위여부는 불명.

2.2.2. 일본군복 코스프레?

해방되고 대통령 된 후에도 일본 군복을 입고 코스프레를 했다는 말이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이 1991년 12월 24일자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 뒤에 집무실에서 일본 군복을 입고 있었다는 걸 목격했다는 증언을 말하는 것이다.
계엄선포 한 달 전쯤인가 박대통령이 나를 불러요.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박대통령은 일본군 장교 복장을 하고 있더라고요. 가죽장화에 점퍼차림인데 말채찍을 들고 있었어요. 박 대통령은 가끔 이런 복장을 즐기곤 했지요. 일본군 장교 시절이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다카키 마사오 중위로 정일권 대위 등과 함께 일본군으로서 말을 타고 달리던 시절로 돌아가는 거죠. 박 대통령이 이런 모습을 할 때면 그분은 항상 기분이 좋은 것 같았어요.

강창성의 이 같은 증언은 아직 연구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박정희를 비판하는 데 이용되고 있지만, 반대로 이 주장에 대해 공적인 출처를 통한 반박 또한 제시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개인블로그 등 일부에선 강창성이 박정희가 승마복을 입은 것을 일본군복을 입은 것으로 착각한 것이라 주장한다. 당시 일본군이나 만주군에서 점퍼 스타일의 옷을 착용한 건 항공대의 파일럿들 뿐이고, 기병 제복에는 점퍼가 없으며 박정희의 만주군 시절 병과는 보병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거를 회상하는 코스프레를 즐겼다는 사람이 점퍼 입고 기병 장교 코스프레를 한다? 차라리 망토를 걸치고 칼을 차고 있더라고 했다면 더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 발언은 하나회 적발 사건 이후 군사정권과 정치적으로 등진 강창성이 비난을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내뱉은 발언일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승마복이라고 해서 승마 경기에서 입는 연미복 스타일만이 아니라 점퍼 스타일의 승마복도 있기는 있으며, 사실 "추억을 되살린다"는 목적에 맞추려면 일본군복이 아니라 만주군복을 입는 게 맞다.

하지만 강창성의 발언을 자세히 살펴보면 강청성은 박정희가 기병 코스프레를 했다고 하지 않았고 "일본군 장교로 말을 타던 추억을 떠올렸다"고 했다. 강창성은 박정희가 기병이란 얘기는 하지도 않았고, 일본군 장교로서 말을 탔다고 얘기하였다. 그런데도 위의 서술은 '박정희가 기병코스프레를 했다'는 식으로 엉뚱하게 해석하여 당시 기병 복장을 운운하고 있다. 위의 서술처럼 '강창성은 박정희가 기병코스프레를 했다고 하는데, 당시 기병복장은 이러이러했으니 강창성의 발언은 거짓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억측이다. 게다가 청년기에 일제시대를 경험하고, 해방직후에 육사에서 군사관련지식을 습득한 강창성이 일본군복과 승마복을 헛갈렸을 가능성은 극히 낮다. 강창성은 분명히 박정희가 "일본군 장교 복장"을 하고 있었다고 증언했음을 유념하자.

아무튼 논란이 되는 문제이니만큼 강창성의 발언에 대한 진위여부는 읽는 사람의 판단에 맡긴다. 다만 최대한 양측 주장을 절충해서 해석해 보자면 박정희가 일본군복을 그대로 입은 것은 아니고 일본군복을 떠올리게 하는 밀리터리 룩을 입었다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참고로 보자면 박정희는 골프를 치러 갈 때점퍼를 입고 가죽장화를 신고 말채찍을 들었다(...). 아마 강창성이 보았다고 하는 "점퍼에 가죽장화에 말채찍"은 이 복장일 가능성도 있다.[17]

2.3. 사실이 아닌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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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에 출간된 <일본 육해군 총합사전>(2판)에는 박정희의 일본명이 '오카모토 미노루'로 나와 있다.

2005년 출간된 일본 육해군 총합사전에 박정희 일본명이 오카모토 미노루로 게재되면서 "박정희가 창씨개명을 두 번이나 했으니 악질 친일파가 아니냐?"는 논란이 생겨났다.[18] 조희연 교수도 저서에서 이러한 내용을 주장하였으며, 김병태 건국대학교 명예교수는 "박정희가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관동군 23사단 72연대에 배속됐는데 거기 연대장의 이름이 오카모토였다."고 말해 박정희=오카모토 미노루 설과의 깊은 연관성을 표명하였고, 나아가 박정희가 당시 연대장의 성을 따라 오카모토로 개명하였다는 주장으로 발전한다. 친일인명사전에서는 박정희가 만주국군 보병 제8단에 배속되기 전의 행적으로 치치하얼(齊齊哈爾)에 주둔한 관동군 635부대 혹은 관동군 23사단 72연대[19]에 배속되었다고 기재되어 있으므로 박정희가 잠깐동안 착임하여 복무하였던 72연대에서 김병태 명예교수의 주장대로 창씨개명의 두 번째 기회를 얻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72연대의 당시 연대장은 물론, 역대 연대장의 이름에서 오카모토라는 성은 찾아볼 수 없다. #1, #2

박정희=오카모토 미노루 설은 역사가 길다. 2005년 일본 육해군 총합사전 이전에도 2002년 한국의 저널리스트 지동욱이 일본에서 출판한 '한국 대통령 열전(韓国大統領列伝:権力者の栄華と転落)에서 박정희가 두번째로 개명한 이름이 오카모토 미노루라고 서술하였고, 더 이전으로는 1987년 미국에서 출판된 'Two Koreas-One Future?'라는 서적에서 재일교포 김일면(金一勉)의 저서 '일본인과 조선인(日本人と朝鮮人)'을 근거로 인용하여 박정희의 일본명이 오카모토 미노루이며 육사 동기들로부터 '특등 일본인'이라 불렸다고 서술하였다.[20] 세카이 1975년 12월호에 재일언론인 정경모가 기고한 '장준하는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었나'에서도 박정희를 오카모토 미노루로 지칭하고 있는데, 이 기고문 역시 '일본인과 조선인'을 그 근거로 삼고 있다. '일본인과 조선인'은 1975년 5월 출판되었으며, 이보다 더 일찍 오카모토를 언급한 매체는 1973년 8월 11일자 로동신문이라는 말이 있다.#[21]

'일본인과 조선인'은 박정희의 만주국 장교 시절 행적을 묘사한 초기 서적으로서 여러모로 흥미롭다고 할 수 있는데, 박정희의 만주국 당시 친일 의혹을 대부분 망라하고 있다. 만주군관학교로 혈서를 보낸 사례 등의 실제 에피소드는 물론 "요시 토벌이다!"의 원형이라 볼 수 있는 "조선인 토벌이라면 내게 맡기라"는 발언 소개, 박정희가 만주국 황제 앞에서 충성 답사를 했다는 주장[22], 일본육사 57기생으로 들어온 박정희를 일본육사 교장 나구모 중장[23]이 "일본인보다도 일본인답다"고 극찬하였다는 일화 게재 등, 현재까지 인터넷에서도 종종 찾아볼 수 있는 박정희 관련 친일의혹 프로토타입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1973년 로동신문 기사내용과 '일본인과 조선인' 에서 오카모토 미노루 즉 박정희 과거행적 표현의 상당수가 겹치기 때문에 내용적 유사성 면에서도 상당히 흥미롭다. 예를 들어 박정희의 육사 시절 별명을 '특등 일본인'과 '돌격대장'으로 표현한 점은 로동신문과 '일본인과 조선인', 그리고 이를 인용한 후대의 서적에서만 찾아볼 수 있으며, 로동신문에서는 아직까지도 박정희를 가리키는 주된 비하표현으로 특등 일본인을 사용하고 있다.‘항일운동 탄압에 앞장섰던 특등 일본인의 후예’ 반면 차이점으로는, 로동신문에서는 박정희의 일본명을 '오까모도중위'라 하여 성만 표기함과 동시에 이것이 두 번째 이름이라는 주장은 싣지 않았으나 '일본인과 조선인'에서는 '오까모도 미노루'라는 성명 전체를 공개하였고 이 이름이 두 번째 창씨명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로동신문의 기사와 '일본인과 조선인' 양쪽의 뿌리가 되는 더 이전의 자료가 있는 것인지, 혹은 로동신문 기사를 토대로 발전시킨 것이 '일본인과 조선인'인지는 관련자료가 더 모여야 알 수 있을 듯하다.

현 시점까지는 오마이뉴스한겨레 등 언론에서 기사를 내고 "자료로 입증된 사실이 없거나 공식 기록으로 확인된 바 없으며 다카기 마사오로 한 차례 개명한 사실만 확인되었으며 자료로 입증된 사실은 아니다"고 밝히면서 해당 설이 사실일 가능성은 낮다고 하였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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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 또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만주군 복무 시절의 사진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실제로는 1941년경 동부 뉴기니 전선의 일본 육군대위 사진을 합성한 것이다.

심지어 박정희가 독립군들을 처형장으로 인솔하는 모습이라면서 떠돌아다니는 사진난징대학살 때 찍은 사진이다.[24]

박정희가 엔카를 즐겨 들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심수봉에 따르면 이는 사실이 아니며, 오히려 엔카를 부르자 어디서 왜년을 데리고 왔느냐고 화냈다고 한다.

반박정희 성향의 재미교포 언론인 문명자는 박정희가 간도에서 독립군 토벌하러 나갈 때마다 "요시 토벌이다!" 라는 전투함성을 지르곤 했다고 주장하며 박정희의 독립군 토벌설을 제기하였으며, 이후 만화가 백무현이 이 떡밥을 물면서 '요시 토벌이다!'는 널리 퍼지게 되었다. 다만 반박정희 성향의 민족주의 좌파 역사학자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25]는 당시 만주에 활동한 독립군 부대나 공산유격대가 없었다는 점에서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굳이 따지면 당시 팔로군이라는 공산군에 일부 독립군이 합류하기도 했었는데, 당시 박정희가 속한 부대는 팔로군과 교전한 적 자체가 없으며, 박정희가 속한 부대 자체도 팔로군 전선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후방[26]에 있었다.

한때 박정희가 만주군에 복무한 것을 넘어 독립군 토벌 전문 부대인 간도특설대에 복무했다는 주장이 제기된 적이 있다. 주재덕의 서적 탄백서[27]에서 박정희가 간도 특설대원으로 근무하였다고 적힌 것을 보았다고 차상훈이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4)의 결전편에서 증언을 실었다. 하지만 그 외의 근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탄백서란 내용을 바탕으로 한 박정희 간도특설대 근무설의 골자는 1939년 대사하 전투에 참여하여 무공훈장까지 받은 간도 특설대원 마츠모토란 인물이 있는데 그 인물이 박정희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리고 류연산 작가는 박정희가 간도특설대 소속이었다고 주장했으나, 역시 학계에서는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

헌데 박정희의 간도특설대 소문에서 박정희의 이름이나 박정희의 일본식 이름인 다카키 마사오는 언급되지 않았다. 게다가 박정희는 1939년 9월까진 교사로 근무했고 동년 10월에 시험을 쳐서 1940년 4월에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했는데 위에서 언급한 마츠모토란 자는 박정희가 입학하기 전부터 복무했다는 기록이 있다. 게다가 박정희가 창씨개명을 한 것은 1940년 2월 17일인데 창씨개명을 하기도 전이고 군관학교 입학을 하기도 전인 1939년에 전투에 참여해서 일본 이름을 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오마이뉴스의 기자 정운현[28]과 연변의 역사학자 박창욱[29]도 박정희 간도특설대 근무설을 조사한 끝에 간도특설대 명단에도 없으며 심지어 임관 이후에 만주군에서 전투에 참여한 기록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박정희와 함께 복무했던 조선인 장교들의 증언에 따르면,[30] 박정희는 단(연대) 을종부관[31]이라서 전투 경험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마츠모토란 자의 정체도 박정희가 아닌 현학춘이란 자로 밝혀졌다.

3. 민주화 시위 발포 암시 발언?

박 대통령은 버럭 화를 내면서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하겠느냐"고 역정을 내셨고, 같은 자리에 있던 차지철은 이 말 끝에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 정도를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가 데모대원 100~200만 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 하는 무시무시한 말들을 함부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김재규, 1980년 1월 28일 항소이유 보충서 中
나는 그런 짓[32] 안 한다. 나는 내가 (발포 명령을) 직접 한다. 그렇게 해서 대통령 물러가면 그만이지. 나를 사임까지 시키겠느냐?
김재규의 최초 진술 녹음 녹취록 중 #

10.26 사태로 박정희를 암살한 김재규의 진술에 따르면 박정희는 부마민주항쟁 이후 앞으로 민주화 시위가 일어나면[33]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는 발언을 하였다. 이에 의거해 부마민주항쟁 이후 일어날 민주화 시위에서 결국 국민들에게 총부리를 들이미는 발포 명령을 고려하여 사실상 전두환과 다를 바 없이 비난받을 여지가 많다는 평가가 상당수 존재한다. 다만 박정희는 10.26 사태로 피살되었기에 이후 일어난 민주화 시위에서 발포 명령을 내릴 기회조차 오지 않았다.

하지만 민주화 시위에서의 발포 관련하여 당시 청와대 주요 인사들 중 김재규를 제외하면 당시 박정희의 발포 명령에 관해 증언한 이가 없고, 이와 반대되게 10.26 사태 불과 두달 전 1979년 긴급조치 9호보다 더욱 더 강경한 긴급조치 10호를 박정희에게 적극적으로 제안한 인물이 김재규이며 오히려 박정희가 이를 부결했다는 것이 고건, 김계원, 김정섭 등 당시 관련 청와대 관련 인사의 다수의 증언으로, 확실시되고, 당시 정무 제2 수석이던 고건 전 총리에 따르면 이전 사망자[34]까지 발생한 YH무역 사건에 대한 강경 진압도 중앙정보부의 결정이었고 밀고 나간 인물은 김재규 부장이었다는 오히려 시위 진압에 있어 온건파보다 강경파에 해당했다는 증언도 존재하기에, 암살의 명분을 쌓기 위해 거짓으로 한 발언 아니냐며 부정하는 주장도 존재한다.#

결론적으로는 현장에 있던 당사자들이 없는 이상 발포 발언의 진위 여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어쨋든 발포 발언의 진위 여부를 떠나 당시 취재기자인 조갑제에 따르면 곤봉으로 머리를 내려치는 강경한 진압방식이 이루어졌다고 하며, 정부 공식 발표로는 사망자가 단 한명도 없었지만 당시 정부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인한 사망이 의심되는 사망자가 나왔다.[35] 결국 40년이 지난 2019년에 당시 과도한 진압으로의 사망이 의심되었던 유치준씨가 공식적으로 부마항쟁에서의 첫 사망자[36]로 인정받음에 따라(#) 이에 대하여 비난의 여지를 피하기는 힘들다.

한편 문영심이 2014년 쓴 김재규 평전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에서 박정희가 차지철의 킬링필드 발언을 듣고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김재규에게 "정보부가 좀 무서워야지. 그렇게 물러서야 무슨 일을 제대로 하겠나?"라고 면박을 주었다고 하지만,(#) 이는 문영심의 책 외에는 아무런 출처가 없다. 극적 전개를 위한 창작이라 봐도 무방할 듯.

4. 탈일 행적

4.1. 셀프 훈장


박정희는 재임 기간 동안 스스로에게 다섯 차례 훈장을 수여하여 비판을 받았다. 박 대통령은 1963년 12월 17일에 수여한 무궁화대훈장을 제외하고 일등보국훈장과 태극무공훈장, 수교훈장은 변명할 수 없는 '셀프 훈장'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민족문제연구소 조세열 사무총장은 "셀프 훈장은 좀 민망한 일"이라며 "후임 대통령이 전임 대통령에게 업적을 치하하면서 수여하는 것이 상식"이라고 지적하였다.[37] 박 전 대통령은 10.26 사태 이후인 1979년 11월 3일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도 받았는데, 일제 시절 만주군 출신 식민부역자였던 박 대통령이 이승만 대통령과 김구 선생,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 유관순 열사 등 대한민국 국가 수립에 뚜렷한 공을 세운 독립운동가들과 동격의 상을 받았다는 점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4.2. 기회주의자적 이중잣대 면모

"박정희 동상을 세운다고 난리더라."

"그러게, 누구는 상대한테 빨갱이라고 욕하고 누구는 친일파라고 욕하면서 시위하더라."

"근데 정작 박정희는 양쪽 다 가담했더라."

- 남조선 유머, 박정희 동상.

일제강점기 때 만주군관학교 및 일본육사 졸업 후 만주군 장교로서의 활동, 만주군 해산 직후에는 고국에 돌아갈 방법이 없자 광복군에 들어갔고, 해방이후 남조선로동당 입당 및 프락치로 활동 이후 깨끗히 바로 전향을 인정하고, 같은 만주군 출신 장성인 백선엽의 선처로 총살형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아 살아남는다.[38]

다만 6.25 전쟁 당시 정보장교였던 김종필에게 남침 징후를 보고받은 후 도주하지 않고 신설된 9사단 참모장으로서 최전선에서 참전하였기 때문에 악질 기회주의자 꼬리표를 붙이는건 무리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후 국군 내 사조직을 통한 5.16 군사정변를 주도하였고 헌법 개정을 가장한 친위 쿠데타였던 10월 유신을 저질렀으며, 하나회의 존재를 방치하는 등 일관적인 모습보단 현재 자신한테 가장 유리한 쪽을 택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비판이 있다.[39]

남로당 경력 때문에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에게 '사상이 의심된다'는 공격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이에 반박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메카시즘을 타도하자는 내용의 신문광고를 올리기도 했다. 훗날의 행보를 생각해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행보다.

4.2.1. 남조선로동당 활동 경력

박정희는 남한 공산주의 정당인 남조선로동당에서 활동했으며, # 대구 10.1 사건에서 친형 박상희가 죽은 후 여수·순천 10.19 사건에도 남로당 군사총책으로써 연루돼 숙군된 바 있다. 다만 엄밀히 따지자면 여순사건 당시 박정희는 사실상 얼굴마담격이었다고 봐도 무방한데, 실제로 박정희는 사건 발발 다음 날 도착한 토벌군 정보국장 김점곤의 안내를 맡았었고 여순사건이 끝난 11월 11일에야 체포되었기에 직접적으로 여순 사건에 가담하지는 않았다. ##2 #3[40]

4.2.2. 일본 문화에 대한 이중성

본인부터 친일 논란이 있으며, 한일 정치인들 양쪽, 특히 만주국 시절 인연으로 얽힌 사람들(이른바 '만주국 커넥션')끼리 친분을 쌓았으며# 일제의 군사주의, 권위주의 문화를 도입했음에도 사회, 문화적인 면에서는 왜색과 친일 잔재를 몰아낸다는 이유로 표면상 일본의 대중문화[41]를 통제하고 금지했다. 이는 자신의 친일 성향을 숨기기 위한 기만이라는 분석이 많다. 본인은 조선일보의 방일영과 일본 춤을 추거나 구일본군 군가 등을 본떠서 나의 조국을 작성하는 등 일본 문화를 긍정하고 향유했다.

아울러 박정희는 술을 마시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일본의 한시를 읊곤 했는데 한 번은 박정희가 육군 준장 시절 술에 취해서 "말채찍 소리도 고요히 밤을 타서 강을 건너니, 새벽에 대장기를 에워싼 병사떼를 보네."라는 일본 시를 읊었는데 박정희와 함께 술자리에 있던 한 육군 소장이 그 시가 사무라이를 주제로 한 시라는 사실을 알아채고는 박정희를 향해 "그, 일본 것 되게 좋아하네~"라고 비아냥거리자, 박정희는 기분이 상했는지 벌떡 일어나 술자리를 뛰쳐나간 적도 있었다.[42]

또한 박정희는 일본 사무라이 문화(부시도)의 열렬한 팬이었다. 박정희의 정보담당관이었던 최세현은 박정희에 대해서 "그(박정희)는 일본에서 만들어지는 사무라이 영화는 거의 대부분 (직접) 들여와서 보곤 했었다."라고 말했으며, 일본으로 파견된 중앙정보부 간부는 "일본에 근무할 때 사무라이 영화나 메이지 유신 전후를 소재로 한 영화와 드라마는 거의 다 사 모아 고국(한국)에 보냈었다."라고 증언했다.[43]

다만 식민지배국의 문화에 빠진 신흥독립국 지도자가 박정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태어났을 때부터 식민지 시절이었고, 주류 문화도 식민지배국의 입김이 강했던 때이니 박정희가 일본 문화에 심취해 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지만, 그것을 금지시키면서 본인만 향유했다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다. 이 때문에 국민들은 일본의 무해한 문화는 향유하지 못하면서 군국주의나 전체주의와 같은 부정적인 문화들에 영향을 크게 받으면서 동시에 그것들이 전통문화로 오인되는 경우들이 생겨났다.

5. 성추문과 섹스 스캔들

절대권력을 휘두르던 박정희의 여성 관계는 대단히 복잡하고 문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정희의 부름을 받은 젊은 여성들은 권력이 무서워서 반강제적으로 술자리에 참석하였다고 한다. 박정희는 육영수 생전에도 바람을 피웠다. 박정희의 자녀들도 아버지의 외도에 대해 증언한 바가 있다. 이것은 박정희가 청렴하고 도덕적인 지도자랑은 한참 거리가 멀었다는 방증이다. 그때 그 사람들, 남산의 부장들에서도 이 이야기가 나온다.
대통령 박정희에게 여자를 조달하는 일은 본래 경호실이 시작했다. 5·16쿠데타를 거사할 때부터 충직한 경호대장이던 박종규가 모든 것을 관장했다. 박은 각하의 심기관리에서부터 술자리까지 챙겼다.
박정희의 술과 여자는 많은 비화를 남겼다. 70년대 초 어느 날 대통령부인 육영수 여사를 면담한 어느 여성은 육여사의 얼굴에 멍이 든 것을 본다. 소문은 퍼지고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그 배경을 취재했다. 부부싸움을 하다가 박정희가 재떨이를 던졌다느니 손찌검을 했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한 기자가 직접 박정희에게 물었다.

『영부인 얼굴에 멍이 들었던데, 부부싸움을 하신 겁니까?』

이 말에 대통령은 몹시 어색한 얼굴로 헛기침만 했다.

『어허, 음, 흠…』

부부싸움은 대통령의 주색 때문이었다.
충격적인 것은 그 자리 「술시중 여인」으로 일류 탤런트와 가수를 비롯해서 연예인을 지망하는 나이 어린 여대생까지 불러들였다는 사실이다. 그 대통령 전용 비밀 요정의 호스티스를 시중에서 조달하는 책임자가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였다.
한번씩 왔다 간 여자들은 당시 이름만 대면 누구나 입을 벌릴만한 TV탤런트와 가수 등 연예계의 일류 스타들이었다고 대통령 박정희의 채홍사는 증언했다.
기성 여배우나 탤런트들 보다는 20대 초반의 파릇파릇한 연예계 지망생과 여대생을 선호하셨답니다.
이미 유명해진 기성 배우보다는 20대 초반의 연예계 지망생이 더 선호됐다.
그중엔 유수한 대학의 연예 관련학과 재학생도 있었다. 채홍사가 구해 온 여자들은 먼저 경호실장 차지철이 심사했다.
누구나 한번 듣기만 하면 입을 딱 벌릴 만한 TV 드라마와 은막의 스타들인 C, C1, C2, L, L1, W 양 등이 궁정동 안가의 밤 연회에 왔던 것으로 확인됐다.
[비화] 10·26사건 이후 19년만의 최초 전면공개 '채홍사’박선호 군법회의 증언 녹취록, 신동아 1998년 11월호

박정희의 일생을 연구하는 조갑제 기자가 조선일보에 기고한 내용에 따르면[44] 따르면 박정희는 1955년 경 휴전 직후 2군단 포병사령관으로 복무할 당시부터 육영수와 일찍부터 여자 문제로 부부싸움을 벌여왔다고 한다.
박정희는 야전에 근무할 때는 꼭 단골술집과 단골작부를 정해놓고 다녔다고 한다. 일과시간엔 엄격한 군인, 일과 후엔 소탈한 인간으로 돌아가 술과 여자를 가까이 한 박정희는, 이 2가지 면을 혼합시키지 않고 선명하게 구분해 놓았다.

그러나 육영수의 입장은 달랐다. 육영수는 소실을 5명이나 둔 아버지 아래에서 본처인 어머니가 얼마나 마음고생하는지 지켜보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남편의 외도를 허용하면 자신도 어머니처럼 될 위험이 있다고 판단했는지, 박정희의 여자 문제에 대해서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중략) 이런 태도는 청와대 생활에까지 이어져, 대통령 수행 경호원들은 육영수만 보면 숨거나 달아나곤 했다. 영부인에게 붙들려 가서 간밤 대통령의 행적에 대해서 문초를 당한 경호원도 많았다.
[박정희 생애] 제7부 가난한 군인의 길(조선일보, 1998. 6. 7)
두 분과 함께 사는 동안 두 분이 크게 싸우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도 이상하게 육 여사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혹시 나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닐까, 나는 늘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때 왜 육 여사의 얼굴이 그렇게 어두웠는지 그 의문이 풀린 것은 내가 결혼한 후였다. 아버지의 부관이었던 남편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아버지의 여자 문제 때문에 당시 육 여사는 늘 수심에 잠겨 있었다는 것이다.
박재옥, 박정희의 장녀[45]

박정희는 집안 어른들이 정해준 여자김호남결혼하여 딸 박재옥을 낳았으나, 억지로 했던 결혼인 탓에 김호남에게는 별로 정이 없었다. 김호남과 이혼하기도 전에 이화여대생 이현란과 동거하며 사실혼 관계로 몇 년을 지냈으나,[46] 이현란과는 결혼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박정희는 이현란과 헤어지고 김호남과 이혼한 후 육영수재혼했다.

대통령이 된 이후까지도 박정희의 복잡한 여성관계와 권력을 남용하여 연예인과 밀회하고 접대를 받았다는 논란은 10.26 사건 전에도 공공연히 알려져 있었다. 영부인 육영수는 박정희의 외도에 자주 문제를 제기했으며, 박 전 대통령 기념도서관 사이트에도 여자 문제로 부부싸움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육영수는 방첩부대장이었던 윤필용에게 "이건 절대로 여자의 시샘에서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각하께 여자를 소개하면 소개했지, 왜 꼭 말썽날 만한 탤런트들을 소개합니까?"라고 하소연한 적도 있다. 영화 효자동 이발사의 실제인물인 박수웅 씨도 원래는 대연각 호텔의 여자 이발사가 이발을 담당했는데, 이를 탐탁치 않게 여긴 육영수 여사에 의해 자신이 담당하게 되었다고 증언했다.

간혹 박정희가 육영수가 죽은 이후부터 외로움 때문에 여성편력이 생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실제로는 육영수가 살아있을 때부터 박정희의 여성편력은 심각했다. 육영수가 생존해 있을 때도 박정희는 경호원 1명만 대동하고 나가는 '심야 단독행사'도 자주 즐겼다.[47] 애초에 상기한 이현란과의 연애 자체가 불륜으로 시작했으며, 심지어 전쟁 중에 참견할 사람이 없어지자마자 조강지처인 김호남을 버리고 바로 육영수와 결혼해버렸다. 친딸인 박재옥도 엄연히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박정희의 요정 출입 문제로 청와대에서 부부싸움이 난 일화도 있습니다. 육영수 여사가 "혁명 정신을 잊으셨어요? 여자들과 술이나 드시고"라고 말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재떨이를 집어던졌다고 합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 '참모형 기획가' 박정희, 출구전략 실패로 몰락했다고?(2023. 7. 21)

한 번은 육영수가 ‘현장’을 덮친 적도 있는데, 1970년대 초반 유명 여배우를 박 대통령이 청와대 인근의 한 기업체 사장 집에서 몰래 만난다는 정보를 입수한 육 여사는 방문 앞에서 ‘나예요, 문 열어요’ 하고는 박 대통령과 맞부딪친 적도 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나중에는 손찌검까지 동원된 육박전으로까지 번져 청와대 출입 기자들이 육영수 여사의 얼굴에 멍이 든 것을 포착하는 등 파란이 있었다.[48] 이렇게 박정희는 육영수를 상습적으로 폭행했다.
  • 10.26 사건과 궁정동 안가
궁정동 안가를 다녀간 연예인은 100명 정도 된다. 임신해서 낙태한 사람도 있고…. 징징 울고 불응하겠다고 해서 배우 K모, H모양은 오지 않은 일도 있었지만 간호여성이 임신해서 애먹기도 하고…
강신옥 변호사의 접견메모[49]
궁정동 안가에서 박 대통령을 거쳐간 여성이 200명 가량 되는데, 이 때문에 박선호가 무척 고생했다고 한다. 웬만한 일류 연예인은 대통령에게 다 불려갔었다. 당시 항간에 나돌던 간호장교 이야기, 인기 연예인 모녀 이야기 등이 모두 사실이었다.
안동일 변호사[50]
재판부는 "씨가 언급한 내용과 관련해 다른 곳에서도 상당한 의혹이 제기됐고 비슷한 취지의 자료도 많이 나와 있다"며 "이런 현대사 사건은 의견과 논쟁을 통해 사실 규명이 이뤄져야 하며 주씨의 발언은 이런 진실 규명의 과정 중 하나이기에 위법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 주씨는 2011년 10월 '박정희의 맨얼굴'이란 책의 출판기념회에서 "대학생이나 자기 딸뻘 되는 여자를 데려다가 저녁에 이렇게 성상납 받으면서 총 맞아 죽은 독재자는 어디에도 없다"고 발언했다.
법원 "'박정희 성상납 받았다' 발언 명예훼손 아니다"(법률신문, 2014. 8. 8)
안가에 도착하자마자 한 남자가 그를 방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이미 한복으로 갈아입은 가수와 서너 명의 낯익은 영화배우가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한복을 갈아입는 H씨에게 한 가수가 다가와 한숨을 내쉬며 나도 너만 할 때 여기 와서 못 볼 꼴을 많이 봤지. 다 지난 얘기이긴 하지만… 하고 말끝을 흐렸다고 한다.
"대통령으로부터 술잔을 받을 때는 '저는 지금 어떤 노래를 부르고 있는 가수 누구이옵니다, 각하', 또는 '저는 지금 어느 드라마에 출연하고 있는 탤런트 누구이옵니다, 각하'라고 자신을 소개하라고 했어요.

대통령이 연예인에게 술잔을 건네면 '저는 현재 무슨 일을 하고 있는 누구입니다. 제 잔을 받으시옵소서, 각하'라고 응대해야 한다는 교육도 받았지요. 각하와 대화를 할 때는 말 끝에 '옵소서'나 '이옵니다'라는 표현과 더불어 '각하'라는 호칭을 반드시 붙여야 한다고 강조했어요.

호칭 교육이 끝나고 절하는 방법과 앉는 방법, 그리고 식사예절과 웃는 법뿐만 아니라 파트너에게 술 따르는 방법 등 짧은 시간에 엄청나게 많은 교육을 받았어요."
이날 초대받은 11명의 연예인은 대통령이 있는 룸으로 안내되기 직전에는 이런 말까지 들어야 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눈도 멀고 귀도 멀었다고 생각하라. 룸에서 오가는 대화나 이 자리에 누가 참석했는지에 대해서는 기억하지 말라. 여러분이 만약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밖에 나가서 발설하거나 은근히 자랑한다면 연예계 활동이 끝장난다는 걸 명심해라. 어리석은 행동으로 그런 일을 겪지 않기를 바란다."
1980년대 후반 속세를 떠나 지금은 출가해 비구니가 된 H씨는 소문으로 떠돌던 정·관계 인사들과 연예인들의 ‘밤 문화’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궁정동 안가에 초대받은 연예인들 가운데에는 '그런 일(성관계)'을 한 사람도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적이 있어요. 안가에 초대받은 연예인들은 바깥에 나오면 안가에서 있었던 일은 입밖에도 꺼내지 않는 게 불문율이었어요. 지금 하는 얘기도 사실은 무덤까지 갖고 가야 하는데….
정치인과 여자연예인, 그 묘한 관계 - 밥자리가 잠자리로… 돈·인기 위해 몸던진 스타들(신동아, 2003. 7. 29)
오늘 처음으로 공개된 한국관과 영빈관 등 안가 2곳에는 안가가 만들어진 70년대로서는 꽤 호화스러운 응접세트에 침실까지 갖추고 있어 안가의 용도를 짐작게 해주고 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 밀실정치의 무대가 되었던 청와대 안가 철거(MBC, 1993. 3. 4)

10.26 사건이 발생했을 때 박정희는 궁정동 안가에서 당시 대학생이던[51] 유명 모델 신재순과 가수 심수봉 등 여성들과 술을 마시다 피살당했다. 전 세계의 국가 지도자 중에서 여자와 놀며 마시다 부하 손에 죽음을 맞이한 사례는 없다는 점에서 두고두고 놀림거리가 되었다. 1980년 항소심 2차 공판에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과 박선호 전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을 비롯, 박 전 대통령의 측근들은 궁정동을 거쳐간 여성들에 대한 증언을 했다. #, #2, #3 박정희 정권의 밀실정치 역할을 한 궁정동 안가는 YS 정권 때 철거되었는데, 당시 보도를 통해 2인용 침대가 있는 침실 바로 옆에 접대 장소가 위치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MBC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보도에서 궁정동 안가가 박 대통령의 사생활을 은밀히 영위하려는 목적으로 운영됐다고 주장하며, 해당 방송에서 안가 경비원들의 증언과 조서가 공개되는 등 성접대 논란 의혹에 무게를 더했다.
이들 프로[52]는 박 전대통령이 측근 및 술마시며 연회를 즐기는 '대행사'와 유명 여배우들과 단 둘이 침실에서 보내는 '소행사'를 침실과 함께 소개하였다.
한겨례 1998.10.31. <생생한 증언 통해 박정희 말년 파헤쳐> 일부 발췌 #

궁정동 안가에서의 박정희의 술판은 10.26의 그날처럼 박정희, 경호실장, 중정부장 등 3~4명의 최측근이 함께 하는 '대행사'와 대통령 혼자 즐기는 '소행사'가 있었다고 한다. 대행사는 월 2회, 소행사는 월 8회 정도 치러졌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과의 술자리에 한 번씩 왔다 간 여성들은 당시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TV탤런트와 가수 등 연예계의 일류 스타들이었다고 '대통령의 채홍사' 노릇을 한 박선호 전 중정부 의전과장은 증언한다. 또한 10.26 재판에서는 진술을 거부[53]했지만, 변호사에 따르면 박선호는 "소행사, 대행사의 빈도가 하도 심해서 남효주 사무관하고 같이 앉아서 '대통령이지만 너무 심하다'는 불평을 주고 받았다'고 한다.

증언에 따르면 술자리 여성으로는 유명한 기성 배우보다는 20대 초반의 연예계 지망생이 더 선호됐다고 하며, 그 중에는 유수한 대학의 연예 관련학과 재학생도 있었다고 한다. 채홍사가 구해 온 여성들은 먼저 경호실장 차지철이 심사했으며, 심사에 이어 여성들은 술자리에 들어가기 전 보안서약과 동시에 접대법을 교육받았다고 한다.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의 특별한 만찬은, 절대군주나 봉건영주 시대가 아닌 20세기 말 자유민주주의 국가 한국에서 벌어진 일”이라며 개탄했다.

차지철의 심사에 이어 여인들은 술자리에 들어가기 전 경호실의 규칙에 따라 보안서약과 함께 그날의 접대법을 엄격하게 교육받았다. "우선 그 자리에 참석했던 사실을 외부에 발설하면 안 된다, 술자리에 들어가면 대통령을 비롯해서 고위 인사들의 대화 내용에 관심을 표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대통령이 말을 걸어오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응석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 등등 이었다고 한다. 박정희의 술자리 동원에는 엄격한 규칙이 있었다. 첫째, 단독 후보는 안되며 반드시 복수로 부르는 것이고, 둘째로 결코 동일인을 두 번 이상 들이지 않는 것[54]이 그것이다. 복수 후보로 하는 것은 그의 선택 폭을 보장하기 위함이었고, 한 여인을 두 번 이상 부르지 않는 것은 박정희와 인연이 깊어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55][56]

또한 전직 중앙정보부장인 김형욱이 회고록 '혁명과 우상'에 남긴 기록을 보면, 박정희의 여자 문제와 관련한 소문은 일본 정치계에까지 흘러들어가, 일본 정치인 고다마 요시오는 그 소문이 일본에까지 자자하게 퍼졌다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57]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던 강신옥 변호사[58]는 김재규로부터 박정희의 엽색행각에 대해 자세하게 전해들었는데, 당시 현역 연예인들 중 수많은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었다고 한다.[59] 박정희는 특히 연예인들을 밝혔다면서 당시 박정희의 엽색행각이 도를 넘는 수준이었으나 재판에선 거론하지 않았다고 한다. #

박정희의 엽색행각은 당연히 세간에 퍼졌고, 김재규의 여동생은 가족모임 때 김재규에게 이런 소문에 대해 물어보았다고 한다. 그러자 김재규는 “내가 그게 제일 고민이다. 여자 형제 다섯이나 둔 사람이 그런 짓을 하려니 나도 힘들다. 너희들은 모르는 척해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
이러한 박정희의 성접대 논란에 대해 부정하는 일각의 주장으로는, 김재규, 박선호, 김형욱 모두 박정희에게 숙청을 당한 사람들이니 앙심을 품고 발언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며, 10.26 사태의 증인이었던 심수봉과 신재순은 오히려 박정희를 호의적으로 묘사했고, 10.26 사태 때에 김재규가 발언했다는 말이 심수봉의 증언에 따르면 없었다는 점에서[60] 증언의 신빙성이 의심되고, 궁정동을 거쳐간 여성이 200명이 넘는다지만,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거나, 지금까지 신빙성 있는 증언을 통해 성상납당했다고 증언한 이가 단 한명도 없다는 점에서 이러한 상납 행위가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위 세 사람은 박 대통령을 오랜 시간 보좌한 심복이거니와 모두 숙청당한 시기(앞에서부터 1979년, 1977년)도 각각 다르지만, 모두가 박정희의 문란한 여성편력을 증언하였고, 당시 김재규 측의 변호인인 강신옥 변호사는 원래 박정희의 문란한 여성관계를 부각시키는 쪽으로 전략을 세웠지만, # 오히려 김재규는 이러한 발언을 자제하며 조사 과정에서 박선호가 박정희의 여성편력을 폭로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제지할 정도였다.

또한 지금까지 성삽납에 대한 증언의 당사자가 없다는 점에서는 철저하게 지켜졌던 궁정동의 보안 유지와 피해자와 당사자들조차 어려워하던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해야하며, 무엇보다도 10.26 사태 당시 청와대 깊숙한 궁정동에서 술시중을 받았고, 안의 2인용 침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성접대의 의혹을 뿌리치기는 어렵다. 애초에 관련 자료의 상당수는 박정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조선일보동아일보에서 취재하고 조사한 것이다.

한편 박정희의 이러한 문란한 여성편력은 1974년 육영수문세광의 총탄에 피살된 후로는 더욱 더 잦아진 대행사와 소행사로 인하여 자녀인 박근혜의 귀에도 흘러 들어갔고, # 이러한 연유로 딸에게 약점을 잡혀 박정희가 이후 박근혜와 최태민의 부적절한 관계를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못하고, 방조하게 만든 원인으로도 지목되기도 한다. 박지원 전 의원이 김종필 전 총리에게 들었던 관련된 내용에 따르면, 박정희는 처음에 이와 같은 행위를 알고 당시 김재규 중정부장을 시켜 조사하라고 했지만, 박근혜가 사생활 침해라며 적극 반발하였고, 이전 박정희가 못된 짓을 워낙 많이 하였기에 때문에 딸에게 약점이 잡혀 아무 소리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음의 사건은 관련자나 제3자를 통해서, 알려진 박정희의 성삽납 관련 의혹이다.
  • 압구정 현대아파트 아파트 목격 사건

1977년에는 어떤 가정주부 B씨가 지인인 가정주부 박 씨에게 "박 대통령이 유명 여성 탤런트의 집을 드나드는 것을 목격했다."고 얘기했다. 가정주부 B씨는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동승하게 되었고, 경호원이 "뒤돌아보지 마세요!"라고 해서 내렸고, 다음 날 탤런트 옆집에 사는 B씨에게 당시 남자 3∼4명이 찾아와 신분증을 보여주며 ‘어제 밤은 아무것도 보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다. 혹여 당신이 어떤 사람이나 장면을 보았다고 말한다면 상당히 재미가 없을 것이다. 남편의 직장이 어딘지 알고 싶다’고 했다”면서 “이에 B씨가 ‘(그 남자가) 대통령이 틀림없구나’라고 생각했다”고 가정주부 박 씨에게 전했고, 가정주부 박 씨는 긴급조치 위반으로 유죄를 선고 받았으며 2014년에 열린 재심에서 37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박정희의 서울 압구정 현대아파트 출입 염문이 귀에서 귀로 번진 것은 1970년대 후반이었다. 당시 ‘현대 아파트에 사는 배우[61]를 만나기 위해 깊은 밤에 대통령이 나타난다.’, ‘그분의 여염집 나들이 때는 잠시 X동의 전깃불이 나간다.’, ‘K여고를 나온 재벌집 며느리가 목격담을 퍼뜨리다 혼쭐이 났다.’는 소문들이 꼬리를 물었으며, 이 귀를 의심할 만한 소문들이 대체로 사실로 확인된 것은 1981년 서울 민사지법에서였다.

현직 법관 H씨는 “81년경 기이한 민사소송이 들어왔다. 그 아파트 6동엔가 사는 한 주부가, 경찰관을 상대로 갈취당한 돈에 대한 반환 청구소송을 낸 것이었다. 그 주부는 승강기에서 대통령을 목격했고, 즉각 경호원들에게 발설하지 말라는 경고를 들었다. 그런데 참지 못하고 동네 주부들에게 귀엣말을 해, 이 사실이 한 경찰관의 귀에 들어갔다. 문제의 경관은 발설한 아주머니를 유언비어 사범으로 입건하지 않고 눈감아 준다는 조건으로 돈을 갈취했다. 상당 기간 뜯어낸 액수가 1,000만 원도 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대통령이 죽고 세상이 바뀌자 주부는 분한 생각에”라고 증언했다.
군 병원의 간호장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고 해요. 사단과 군 병원 등에서 '괜찮다'싶은 여군이 있으면 여배우와 마찬가지로 궁정동 안가로 불러들여 대통령 수발을 들게 했다는 거죠.

그게 어디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세상에 어떤 여자가 아무리 대통령이라고 해도 그런 자리에 불려나가는 걸 달갑게 여기겠어요.

더군다나 궁정동 안가에 도착해서야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가 무엇인지 알게 되는데….

그곳에서 있었던 일은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는 협박성 주문도 뒤따랐고요.
김재규 변호인 안동일 변호사가 털어놓은 '대통령의 사생활'(신동아, 2005. 12. 14)

박정희는 정기적으로 서울지구 국군통합병원에서 정기적으로 건강 검진을 받았고, 여러 가지 검사를 그 수발을 현역 여자 간호장교가 맡았다고 한다. 박정희는 그 간호 장교를 범하였고, 결국 간호장교가 임신을 하게 되어 청와대에 알려지게 된다.

보안사령관을 지낸 A씨에 의하면 "박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가까운 통합 병원에서 안마를 받은 일이 많다. 안마를 받고는 사령관실로 직접 걸어오셔서 정보 보고를 받거나 관심사항을 묻곤 했다"고 동아일보 "남산의 부장들"에서 위와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대한 김재규의 변호사를 맡았던 안동일 변호사는 1980년의 재판부터 지금까지 책과 인터뷰를 통해 사실이라고 밝히고 있다. 추가 인터뷰에서 따르면 연예인 여성이 가장 많았지만 예쁜 여군도 여배우와 마찬가지로 궁정동 안가로 불러들여 대통령 수발을 들게 했다고 한다.
  • 인기 연예인 모녀 이야기
"딸이 대통령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 사실을 알게 된 모 여배우의 어머니가 박선호를 찾아와 '아랫사람들이 대통령과 내 딸이 만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면서 항의했다고 해요. 그러면서 '우리 딸이 대통령을 다시 만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구하더랍니다. 아마도 그 여배우 어머니는 든든한 '빽' 하나 생겼다고 여긴 모양이에요. 대통령의 품에 안겼으니 톱스타되고 출세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믿었던 것 같아요."

김재규 변호인 안동일 변호사가 털어놓은 '대통령의 사생활'(신동아, 2005. 12. 14)

김재규 측의 변호를 맡았던 안동일 변호사가 2005년 오마이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국군추문사건과 함께 짧게 사실이라고 증언한 내용이다.

일명 '후처 소동'으로 스타 C양이 궁정동에서 박정희와 한번 인연을 맺은 뒤, 영부인 자리를 노리고 C양은 궁정동 행사에 연속 출연을 요구했고, 박선호와 안가요원들이 같은 여자는 두 번 이상 불러들이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잘랐다. 그러자 박정희의 연심을 사로잡았다고 생각한 C양의 어머니가 박선호에게 찾아와 "각하께서 우리 아이를 좋아하는데 당신들이 중간에서 차단해도 되는 거요?"라며 큰소리를 쳤다고 한다.

선운각 호스티스로 일하던 '정인숙'은 박정희, 정일권 등의 고위층들을 상대하는 고급 종업원이었다. '정인숙'은 여러차례 임신중절 수술을 받았으나, 1968년 6월에 '정인숙'은 아들을 낳았다. 아이의 아버지가 고위층 인사라는 것은 당연했고, 끝내 친부에 대한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당시 대통령 박정희와 국무총리 정일권 두 사람 중 한 사람이라는 소문이 확산되었다. 해외로 떠났으나 타향살이를 견디지 못해 정일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귀국했다. 1970년 3월, 정인숙은 총격 암살 당한 미제사건으로, 박정희를 포함한 고위 저명인사 27명[62]의 명암이 발견되었다.[63] 정인숙의 아들이 박정희의 친자식이 아닌 정일권의 친자식임은 김종필의 회고에 의해 밝혀졌지만, 술자리를 함께 한 것은 사실로 확인된다.
그 외 여러 풍문이 있으나 신뢰할 만한 기록이 없고 어디까지가 정확히 사실인지 루머로 전해지며, 출처도 불분명하다. 그중엔 허위로 밝혀진 것도 있다. 박정희의 엽색 행각에 관해서는 충분히 알려져 있는데도, 이런 악의적인 가짜 뉴스가 마치 사실인 양 퍼져 있다.

대표적으로 2018년에 디시인사이드 등지에 올라온 글이 있는데, 이 글은 김충식의 1992년판 <남산의 부장들>이나 <1998년 실록 박정희>, 1990년대 신동아 기사처럼 현재는 입수하기 어려운 90년대 고서적을 인용한 것처럼 출처가 명시되어 있다. 막상 찾아보면 그러한 내용이 없다. 그런데도 박정희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이런 글을 인터넷에 최근까지 꾸준히 퍼 나르고 있다.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1960년대 당시 유부녀였던 배우 김삼화가 박정희에게 강제적으로 성상납을 당했다는 내용의 주장이 생겨나 한동안 인터넷에 떠돌았지만, 기본적인 사실관계조차 틀린 부분이 많으며, # 법원에서 허위사실 유포로 벌금형 처분을 받았다. #
  • 새마을 운동회 유부녀 강간 사건

인터넷에서 박정희가 유부녀를 강간했다며 알려진 사건이다. 마찬가지로 거짓이다.

거짓이다. 출처라고 적힌 '김교식 [다큐멘터리 박정희 3]. 평민사, 1990. 228쪽'을 보면 한혜숙에 대한 내용은 적혀 있지도 않다.

일단 박정희가 김세레나의 팬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김세레나, "박정희 대통령이 내게 푹 빠져"(조선일보, 2009. 4. 30) 하지만 김세레나가 김추자와 머리채를 잡고 싸우다 "네 이년, 각하가 내 서방이야, 일러서 혼내 줄텨" 하고 말한 사실이 알려져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6시간 동안 두들겨 맞았다는 글은 거짓이다. 출처로 적힌 김충식, [정치공작사령부 남산의 부장들]. 동아일보사, 1992. 191~192쪽에는 그러한 내용이 없다. 김세레나 또한 이 루머를 아는지 2021년에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1] 문경 교사 시절 제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일본인 교장과 교사들, 그 동네 순사와 사이가 매우 나빴다고 한다. 심지어 조선어 시간에 몰래 태극기나 한국의 역사를 가르쳐주었다는 증언도 있는데, 아마도 이 시기에는 독립운동가인 셋째 형 박상희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2] 그러다가 결국 교내 관련 인사들에게 린치를 당하고 홧김에 만주군에 지원했다고 하는 것이다.##2[3] 이게 얼마나 심한가 하면 군수가 하급 장교에게 싸대기를 맞아도 아무 소리를 못할 정도였다. 일본군의 흑역사 중 하나인 오사카 고스톱 사건이 논란이 된 것도 당시 일본군 입장에서는 '감히 짭새가 황군에게 깝치다니!'란 입장이었다.[4] 이상우. 1986. 《박정권 18년, 그 권력의 내막》[5] 김교식, 《다큐멘터리 박정희3》 (평민사, 1990) 222p[6] 강준만의 한국현대사산책, 1960년대편[7] “박 선생님이 만주로 떠난 지 3∼4년이 지난 어느 여름방학 때 긴 칼 차고 문경에 오셔서 십자거리에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달려갔지요. 하숙집으로 자리를 옮긴 뒤 박 선생님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턱에 그 긴 칼을 꽂고는 무릎을 꿇고 앉아 ‘군수, 서장, 교장을 불러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때 세 사람 모두 박 선생님 앞에 와서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아마 교사 시절 박 선생님을 괴롭혔던 걸 사과하는 것 같았습니다.”[8] 무려 수교훈장 중에서 1등급인 광화대장을 받았다.[9] 강준만의 한국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10] 애초에 광복 이후 50년간 친일파 청산을 하지 못한 나라에서, 당연히 정부에서 인정한 친일파보다 훨씬 더 많은 친일행위자들이 있을 거라 보는 게 타당하다.[11] 신흥독립국의 군사독재자들의 약력을 보면 대다수가 식민지 시절 식민지배국 군대에서 복무한 이력이 있다. '식민부역자'는 빼도 박도 못하는 사실이더라도 '민족반역자'라 부르기에는 힘든 수준인 셈. 그리고 신흥독립국의 독재자들이 과거 식민지배국의 고위층들과 유착 관계를 맺는 일과 이와 정반대로 이승만처럼 독립영웅이 잔혹한 독재자로 전락하는 것 역시 신흥독립국의 흔한 클리셰다.[12] 특히 토고에서는 건국 초 프랑스군 출신 군인들을 부역자 취급하며 토고군에서 홀대하다가 독립영웅 출신 대통령프랑스군 출신 부역자 군인에게 암살되었다.[13] 반박정희 성향 학자로 유명한 한홍구도 박정희의 (일제강점기) 친일은 '경미한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뒤이어 한홍구는 박정희가 한국사의 대표적 친일파로 꼽히는 이유에 대해서는 "가장 철저한 일본식 황국신민화 교육을 받았고, 대통령이 된 뒤에 일본 군국주의의 발전 모델, 특히 만주국에서의 경험에 따라 한국을 병영국가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14] 기시 노부스케의 친서를 전달하였다.[15] 당시 박정희의 상관이 김학규 장군이었다. 이런 인연 때문인지 박정희는 이승만 정권에 박해를 받아 병고를 치르고 있던 김학규를 보살피고 건국독립장도 수여했다.[16] 당시 대한 광복군 측에서 일본군 내 조선인 군인들에게 '겉으로는 친일하되 내부에서 일본군의 활동을 방해하라'는 선전문을 살포한 적은 있다.[17] 강창성의 증언 또한 의심해 봐야 한다. 이 사람은 채명신 장군도 월남에서 부정축재를 했다고 누명을 씌운 적도 있고, 자기 아들의 의심스런 병역면제에는 침묵하면서 반대 세력의 병역 비리에는 목소리를 높이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인 인물이다. 실제 강창성이 들먹인 병역비리 문제로 가장 피를 본 사람은 이회창이다. 즉, 이 코스프레 논란도 강창성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꾸며내거나 과장한 이야기일 수도 있는 것.[18] 일단 악질 친일 고문 경찰 하판락이 창씨개명을 2번 한 바가 있긴 하다.[19] 1944년까지 치치하얼 인근에 위치한 하이라얼에 주둔해 있었다[20] Sullivan, John, and Roberta Foss. "Two Koreas - one future?". Boston (Mass.): U Press of America, 1987. p. 146.[21] 해당 일자의 신문 사본은 한국학중앙연구원 도서관에서 마이크로필름 형태로 보관중이다.[22] 국내에서는 천황 앞에서 답사했다는 식으로 퍼져 있다[23] 나구모 신이치로(南雲親一郞)라는 인물이 있기는 하나 이는 만주군관학교장이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어째선지 나구모 주이치로 소개되는 듯. 후자는 해군 장성이다.[24] 덤으로 난징대학살 당시 박정희는 교사였고, 박정희가 관동군에 입대한 것도 난징대학살 7년 후인 1944년이다.[25] 반박정희 성향이 강한 인물이다. #[26] 당시 중일전쟁 전선이 황하 부근~화북이었는데, 박정희가 속한 부대는 만주 열하성에 있었다. 6.25 전쟁 대부분의 시기 경상남도 지역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27] 중국어로 坦白书. 과거를 솔직하게 털어놓은 글이라는 뜻인데 정치적으로 자아비판하는 책이란 뜻으로도 쓰인다.[28] 참고자료[29] 참고자료[30] 전술한 2004년 정운현 기사에 실렸다.[31] 대대급 부대의 작전장교인데, 단장(연대장)을 보좌하는 것도 아니고, 단장을 직접 보좌하는 상위(대위) 계급의 갑종부관을 보좌하여 단기(연대기) 관리 및 명령 전달 임무만을 하는 보직이라고 한다. 애초에 작전장교 자체가 직접적으로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직책이다.[32] 부하에게 발포 명령을 맡기는 일. 실제로 내무부 장관 최인규4.19 혁명 당시 발포 명령을 내린 혐의로 사형당했다.[33]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부마항쟁을 지칭한 말은 아니다. 그러나 저 해석이 더욱 심각한 것이, 서울에서 '부산 같은 사태'가 일어나면 서울에서 일어나는 시위에 발포명령을 내렸을 가능성을 상정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34] YH 사건 당시 사망자 김경숙(YH무역 여성 노동자)씨로 유족의 동의 없이 부검을 끝내고 신속한 화장을 종용하는 등 국가에 의한 조직적인 사건 은폐 시도가 있었다.[35] 사망자 신원은 마산 완월동에 살던 건설노무자 유치준(당시 51세)씨로 마산에서 항쟁이 발생한 10월 18일에 노무 일을 나갔다가 죽은 채로 발견됐다. 10월 19일에 작성된 마산경찰의 「마산 경남대 소요사건 1차 발생 보고서」에서는 "변사자 발생, 목림여관 앞 도로변에서 50여 세로 보이는 노동자풍에 작업복 차림의 남자가 왼쪽 눈에 멍이 들고 퉁퉁 부은 채(코와 입에서 피를 흘린 채) 죽어 있었음. 민방위 모자, 얼굴 둥근 편, 키 160cm 가량", "정황으로 판단, 타살체가 분명"이라 적혀져 있었지만. 진압에 따른 사망자로 인정되지 않았다.[36] 박정희 시기 시위 진압 과정에서의 유일한 사망자는 아니다. 전술한 김경숙도 그렇고 1965년 한일협정 반대투쟁 진압 과정에서 대학생 김중배가 경찰의 곤봉에 맞아 사망하기도 했다.[37] #[38] 새뮤얼 버거 전 주한미국 대사의 보고서인 한국의 변혁(1961~1965)에서는 박정희가 공산주의자 300명의 명단을 넘겨 숙군작업을 도왔기에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보고했으며, 조갑제 기자가 1989년 당시 숙군작업 방첩대장이였던 김안일씨를 인터뷰한 내용 따르면, 숙군작업을 대조하여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 사람은 이재복 남로당 군사부 책임자와 김종석 남로당 비서고, 박정희가 사형을 면하게 된 원인은 수사과정에서 박정희가 공산주의와 무관하고, 포섭되긴 하였지만 남로당 활동 경력이 전무하다는 걸 알아낸 김창룡이 김안일 방첩대장에게 소개시켜주었고, 김안일이 다시 같은 만주군 출신 백선엽에게 박정희를 소개시켜주면서 선처를 부탁한 까닭에 사형판결을 피할수 있었다고 한다.# 신빙성으로 볼때 당시 숙군작업 책임자이자 박정희를 대면하였던 직접적인 관련 당사자의 증언이기에 후자가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인터뷰 당시 조갑제는 오늘날과 정반대로 박정희에게 매우 비판적이었던 터라 박정희를 긍정적으로 묘사할 인물이 절대 아니었다.[39] 이는 인도네시아의 극우 군사독재자 수하르토도 마찬가지이다. 수하르토 역시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에는 네덜란드군으로 복무했으나 일본 제국이 인도네시아를 점령하자 네덜란드군에서 전역한 후 얼마 안 가 다시 일본군에 입대했고, 일본의 항복 후 네덜란드의 재침략으로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인도네시아 독립군 측에 가담하는 등 기회주의적인 면모를 강하게 보였다. 또 수하르토는 독립 후에도 좌익 독재자 수카르노의 부하였다가 극우 독재자가 되었다는 것까지 박정희와 유사하다.[40] 박정희의 남로당 행적이 정치적 목적이 더 컸다고 짚고 있다.[41] 대표적인 예가 일본 엔카, 몇몇 엔카 가수가 일본 군부에 협력했을 가능성도 있으나 엔카 자체는 음악 장르로써 일본 군부와는 무관하다.[42] 출처: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2권/ 125~126쪽[43] 출처: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3권/ 277~278쪽[44] 후일 이를 모두 묶어 출판한 박정희의 전기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가 된다.[45] 다시 읽는 '朴正熙-김호남 부부의 큰딸 朴在玉씨의 수기'[46] 이때 이현란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으나, 아들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났다.[47] 손광식, 한국의 이너서컬: 대기자 취재파일. 중심,2002 213쪽[48] 『강준만의 한국 현대사 산책 : 1970년대편 3권』(인물과 사상사, 2002년 11월)[49] 2012년 인터뷰에서 남산의 부장들의 저자로 유명한 김충식 교수가 밝힌 내용으로, 김재규가 1980년 1월 15일, 자신을 옥중 접견한 강신옥 변호사에게 했던 말이라고 전한다.#[50] 2005년 김재규 측의 변호를 맡았던 안동일 변호사의 오마이 뉴스와의 인터뷰에 따른 내용이다.[51] 한양대 연극영화과 3학년 재학 중, 대학 2학년 때 이미 부자집 아들과 결혼해 딸까지 낳았다가 이혼한 이혼녀.[52] <다큐 스페셜-4심, 10.26과 김재규>와 <시사매거진2580-10.26과 채홍사>[53] 이에 대해 박선호는 '답변하게 되면 지금 현재 시내에서 일류배우들로 활동하고 있고 이것이 역효과가 나고 사회적으로 혼란문제가 되고 돌아가신 분(박정희)에게 욕되고 했기 때문에 제가 그 문제를 피했습니다.'라고 말했다.[54] 물론 예외 경우도 많았다.[55] 박선호 전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의 군법회의 증언 녹취록, 김재규의 변호인, 안동일 변호사의 인터뷰, [우리가 몰랐던 박정희] 여자관계에서 ‘기자 박치기’까지… 당시 청와대 출입기자와 김재규 쪽 변호사의 증언을 토대로 구성한 우리가 몰랐던 ‘인간 박정희’.[56] [빛과 그림자③] 궁정동에 불려간 여자 연예인은 누구, 수고료는 얼마나 받았을까?, “박정희 궁정동 드나든 여인 100명도 넘어”.[57] 이는 윤필용 사건 문서를 참조.[58] 이후 재선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59] 10.26 사건이 터지기 전까진 여자연예인들이 자기만 박정희을 만난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60] 심수봉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를 향해 "정치를 대국적으로 하십시오!"나 차지철을 향해 "일갈했다는 각하를 똑바로 모셔!" 같은 김재규가 했다고 알려진 발언들에 대해서 "김재규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으며, 쏘는데 급했지 여유를 부리면서 그런 말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라고 증언을 했다.[61] 이 의혹의 배우가 1970년대 트로이카로 명성을 떨쳤던 정윤희라는 루머가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정윤희가 압구정동 아파트에 거주한 건 결혼 후 1988년부터이며, 이 의혹의 배우가 누구인지는 지금까지 영영 미스터리로 남았다. #[62] 정일권, 김형욱, 박종규, 장관, 차관, 국군 장성, 국회의원.[63]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6회 "땅에 묻은 스캔들 - 정인숙 피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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