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5 21:55:32

박정희/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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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개인적 면모3. 일화
3.1. 대통령이 되기 이전3.2. 대통령 재임 시절
4. 기타
4.1. 키(신장) 관련

1. 개요

대한민국 제5·6·7·8·9대 대통령 박정희에 대한 여담을 다루는 문서.

2. 개인적 면모

  • 담배에 대한 특이한 에피소드가 또 하나 있는데, 측근들과 같이 있을때는 직접 불을 붙이지 않고 늘 측근인사가 라이터를 켜서 올리고 그것으로 담뱃불을 붙였다고 한다. 이때 그냥 불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라이터를 올린 측근의 손을 자기 두손으로 감싸쥐고 불을 붙이는데, 마치 "당신만이 내 사람이다"라는 메시지를 주는듯 했다고 한다.[3][4]
  • 교사 생활을 3년 했고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정규교육을 받아서 문예적인 소양이 깊었다. 시와 일기, 편지같은 글쓰기와 풍금, 클라리넷, 트럼펫 등 악기도 두루 다루었다.[6] 그림도 곧잘 그렸으며 서예에도 취미가 있었다. 서예 전문가들은 역대 대통령 중 최고의 명필로 이승만을 꼽지만, 가장 값을 비싸게 치는 것은 박정희의 서체라고 한다. 군인 출신답게 날카로운 판본체에 가까운 글씨를 고수했으며, 현재는 바뀐 이전의 광화문 현판도 그가 손수 쓴 것이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일본에서 되찾아온 소전 손재형에게 지도를 받기도 했고 승마검도, 국궁을 즐기기도 했었다.
  • 박정희가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는 새마을 노래 말고도 유신시절에 프로파간다를 위해 만들었던 나의 조국 등이 있다. 그런데 이 나의 조국이라는 노래를 직접 들어보면 알겠지만, 엔카풍 음계를 갖다 쓴 왜색가요나 다름없다. 박정희가 왜색을 몰아낸다면서 금지곡들을 선정한 시대였다는것을 감안한다면 상당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7]
  • 박정희는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고도 반말을 잘 하지 않았다고 한다. 장관이나 참모들은 물론 청와대의 이발사, 청소부 등에게도 꼬박꼬박 존대를 했다고 한다. 박정희 본인이 군인 출신인 데다가, 당시 사회는 평범한 사기업에서도 자기보다 직급이 낮은 직원에게는 서슴없이 반말을 하는 굉장히 권위주의적인 분위기였던 것을 감안하면 독특하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확실히 그가 반말을 한 것으로 증언으로 알려진 인물은 질서(조카사위)인 김종필과 고향 후배인 김재규, 격의 없이 친했던 김계원[8] 정도의 최측근뿐이었고 당연히 권력실세인 경우가 많았다.[9] 심지어 차지철에게도 존대를 했다고 한다.[10][11] 다만 남은 육성 자료들을 확인해 보면 1인칭은 거의 항상 '나'였고 대통령 선서를 존댓말로 개정할 때도 그 부분은 고치지 않았다.
  • 일상생활이 검소했다고 한다. 비름나물이나 두부 같은 향토음식을 좋아했다고 하며[12], 허리띠가 해져도 모르다가 청와대 전속 이발사가 알려줘서야 알아차렸다거나, 여름에도 에어컨을 틀지 않고 겨울 난방도 적정 온도를 유지했다는 증언도 있었으며, 변기물을 아끼려 변기 뒷칸에 벽돌을 놓았었다는 것. 빈농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배인 생활습관의 영향으로 추정된다고 하며, 해외의 한국 근현대사 관련 학자나 정치학자들도 박정희의 생활이 검소했다고 평가했다.출처# 하지만 사망 당시 술자리를 보면 소갈비, 장어, 송이, 전복 등의 고급 술안주를 차려놓고 연예인까지 불러 유흥을 즐긴 점을 감안하면 검소하다고 보기 어렵다는 의견도 있으므로,출처[13][14] 이에 대한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이와 관련해, "육영수 여사의 사망 이후 검소하던 박정희가 사치스러워졌다"가 현재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15] 다만, 보통 사람도 가끔씩은 비싼 거 먹는데 그냥 대통령도 아니고 무소불위의 독재자씩이나 되어서 아랫사람들과 연회를 갖는 데도 싸구려 술과 안주를 먹으며 궁상떠는 일도 우스운 일이고, 증언이 꽤 많이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평소 검소했다는 것 자체는 맞아 보인다.[16] 개인의 기호나 취향은 성장기나 젊은 시절에 굳어지는데 성장배경을 보면 사치스러울래야 사치스럽기가 힘든 성장배경을 지닌 사람이기도 하다.[17][18]
이한수 전 서울신문 사장은 "육 여사가 죽은 뒤 박 대통령의 주변에 '인의 장막'이 둘러쳐져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이씨뿐만 아니라 박 대통령 주변의 많은 인사들이 그의 '실정'의 원인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 박정희'의 소탈하고 서민적인 면모는 유신체제 출범 뒤 그 '물'이 많이 빠졌다는 게 주변 인사들의 증언이다. 이 무렵부터 그의 술자리에는 막걸리보다 '시바스 리갈'이 자주 올라왔고, 여자들과의 추문도 불거지기 시작했다. 물구나무 서기와 검도로 체력을 단련했던 그가 골프에 푹 빠진 것도 이 무렵부터다. 박 대통령이 '장학생'으로 관리하던 몇몇 기자들과 사이가 틀어진 것도 이 때다. 박 대통령은 1978년 출입기자들과의 만찬에서 술에 잔뜩 취한 채 자신에게 비판적인 기사를 쓴 한 일간지 기자의 이마를 들이받아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그의 독재권력이 종말에 가까울수록 ‘인간 박정희’도 서서히 망가져 갔던 것이다.
  • 조갑제의 말에 의하면, 박정희는 여자를 보는 눈이 꽤 높고 까다로웠다고 한다. 보통 키가 크고 얼굴이 긴 미인형 여자를 좋아했고, 자신처럼 근대교육을 받은 신여성(新女性)과 결혼하길 원했다고. 실제로 결혼을 전제로 동거했던 前 내연녀 이현란과 후처 육영수가 그런 스타일이었고, 10.26 사건 당시 박정희의 술시중을 들던 여대생 신재순도 키가 상당히 컸다. 전처였던 김호남은 전통적이고 순종적인 여성이였기에 시어머니의 마음에는 들었으나, 박정희의 이상형은 아니었기에 박정희는 김호남과의 결혼생활을 좋아하지 않았다.
파일:2번타자 박정희.jpg
타석에 들어선 2번 타자 2루수 박정희[19]
  • 1962년 11월 24일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정부기관 친선야구대회에 선수로서 참가한 적이 있었다.영상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신분이었기에 이는 한국 역사에서 국가 최고권력자가 야구 경기에서 직접 플레이한 유일한 사례로 남았다. 최고회의, 내각, 대법원, 까지 총 4개 팀이 참가했는데, 박정희는 대법원과의 경기에서 2번 타자 2루수로 출전해 안타 2개를 기록했다고 한다. 참고로 그 경기의 선발 투수김종필이었고, 경기는 17:16으로 최고회의가 승리했다.기사
  • 1962년 6월 12일 경향신문에선 스스로를 '장훈백인천 선수의 팬'이라 소개했으며,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 때 아내 육영수가 '가끔 남몰래 야구장에 가서 야구를 구경하는 것이 (남편의) 유일한 취미'라 언급한 적도 있다. 그의 집권기간에 향후 프로야구가 출범할 기반이 마련되기도 했다. 1960년대부터 한국실업야구 리그가 크게 성장했으며, 지방 각 도의 거점도시에 야구장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것이 이때였다.[20]

3. 일화

3.1. 대통령이 되기 이전

  • 구미보통학교에 다니던 시절 박정희는 처음에는 역사 수업에서 배운 일본 위인들을 좋아하다가, 5학년 때 춘원 이광수가 쓴 《이순신》을 읽고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게 되었다. 6학년 때 나폴레옹 전기를 읽고 나서부터는 나폴레옹을 숭배하게 되었다. 교사 시절엔 문경에 있는 하숙집에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걸어둘 정도였다. 그는 이순신과 나폴레옹 등 군인을 동경하였고, 결국 교직을 버리고 사관학교에 진학하여 장교가 되었다.
  • 생전에 짧은 옷을 입지 않던 습관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돌이 될 무렵에 집 마루에서 굴렀다가 마루 밑에 놓인 화로에 떨어져[21] 화상을 입어 피부가 그을렸던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 박정희는 교사 생활이나 아버지의 강요로 이뤄진 첫번째 결혼 생활을 탐탁찮게 여겼다. 특히 결혼 생활이 불성실해서 형인 박상희에게 잔소리를 많이 들었다. 박정희의 초혼은 당시 농업국가의 사회분위기처럼 나이 차면 집안에서 결혼하라고 시켜서 결혼한 것이었다. 첫째 부인 김호남은 유순한 성격이라 시어머니의 마음에는 들었다.
  • 박정희가 문경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시절 이미 김호남과 결혼한 유부남이고 딸(박재옥)도 하나 두었음에도, 결혼 사실을 감추고 한동안 '총각선생님' 행세를 했다고 한다. 더러 중매가 들어왔지만 기혼자임을 밝히지 않았는데, 당시 문경초등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던 제자 정순옥을 제자 이상으로 좋아했다고 한다. 정순옥의 증언으론 본인의 언니와 혼담이 오갔다고 한다. 정순옥의 아버지를 장인으로 부를만큼 사이가 진전됐으나, 박정희가 유부남이란 사실이 들통나는 바람에 관계가 깨졌다고 한다.#이후 1939년 교사를 그만두고 만주국 육사에 입교하여 만주군 중위- 남로당 군사총책 - 국군 장교를 거치며 소장까지 오른 20년이 지난 1959년에도 서로 편지로 안부를 주고 받으며, 가족동반 만남을 기약할 정도로 정순옥과 그 일가와 여전히 친하게 지냈다.#
  • 박정희가 친누나만큼이나 좋아했던 주현숙의 말에 의하면 1939년말 박정희가 주현숙의 집에 놀러와서는 "군인이 돼 높은 사람이 돼서 오겠다" 며 일본군가를 불렀고, 얼마 뒤 실제로 일본군 장교가 되었다고 한다.#
  • 군인 시절 천황이었던 히로히토에게 진충보국 멸사봉공(盡忠報國 滅私奉公)이라는 글을 혈서로 써서 바쳤다. 뜻은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당시 일본) 보답하고, 나를(私) 죽여서 국가를(公) 받들겠습니다." 였다고. 그러나 30년 후에 육영수 암살 사건 이후로 도쿄를 폭격하겠다고 한 적이 있다.
  • 일제가 패망한 이후 만주에서 강제로 무장 해제를 당한후 1946년 5월 구미 고향집에 지휘봉 하나만 가진채 거지꼴로 돌아와 9월 조선경비학교에 입교하기 전까지 5개월간 고향집에서 백수 생활을 보낸적이 있었다. 불과 2년 전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당당하게 긴 칼과 함께 망토를 입고 구미역에 내렸을 때와 상반된 모습으로, 4살위 누나인 박재희의 증언에 따르면 형들에게 그냥 교사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고집대로 했다가 거지가 되지 않았느냐고 면박을 받았으며, 이전에 박정희를 크게 아끼던 박상희도 실망했는지 가족들 보고 박정희에게 돈을 주지 말라하거나 식사자리에도 부르지 않는 등 당시 박정희를 냉랭하게 대했다고 한다.#
  • 1951년 6.25 전쟁 중 9사단 참모장으로 강원도 동부 전선에서 복무하던 당시 결혼식을 올린 지 닷새만에 헤어진 육영수를 그리워 해 대구와 정선 사이를 오고가는 보급부대 편으로 편지를 주고 받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향후 중앙정보부장까지 지내게 되는 당시 박정희의 측근 병참참모 김재춘은 참모장이 너무 쓸쓸하게 보여, 이전 박정희와 육영수를 중매 시켜주었던 대구로 출장가는 육영수의 이종 조카 중위 송재천에게 아무래도 참모장 사모님을 한번 모시고 오는 게 좋겠다고 지시하여, 몰래 육영수에게 파커를 입히고 방한모를 쓰게 한 뒤 스리쿼터의 운전석에 앉혀 군인으로 위장시켜 대구에서 정선까지 몰래 데려온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 이후 몰래 육영수를 데리고 정선으로 복귀한 송재천이 이 사실을 모르던 박정희에게 보고하자 박정희는 "그 사람 뭐하러 왔대?"라고 퉁명스럽게 이야기했지만, 내심 즐거워 했다고 한다. 중공군은 2월16일부터 중동부 전선에서 총공세를 폈다. 인민군 2, 3군단이 9사단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결국 9사단은 정선 사령부를 포기하고 후퇴의 길에 올랐다. 박정희는 육영수를 지프의 뒷자리에 태우고 후퇴행렬에 끼였고, 육영수는 후퇴하는 길로 대구로 돌아왔다. 1주간의 진중체험을 한 셈이다. 이후 육영수는 당시 상황에 대해 청와대에서 이런 회고담을 털어놓았다.
    "그분이 계시던 민가의 침구는 형편이 없었어요. 그런데 밤에 보니까 깨끗한 흰 수건으로 이불깃이 대어져 있었습니다. 누가 이렇게 정성스럽게해 놓았나 싶었지만 혼인한 지 얼마 안되어 물어보기가 쑥스러웠지요. 그래도 용기를 내어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은 쑥스러운지 씩 웃기만 했습니다. 그 태도가 아무래도 본인이 그랬다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는 전쟁으로 떨어진 신혼부부의 훈훈한 이야기라 할 수도 있겠지만, 다만 군용차가 민간인을 전투지역으로 수송하는 것은 명백한 군율 위반이다. 당시 워낙 비밀이 철저했던지 작전참모 손희선 중령은 육영수가 일주일간 진중에 와 있었다는 것을 몰랐다고 하며,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매우 놀랐으며 이는 상상도 못할 군기 문란이라고 지적했다.[22]#
  • 1951년 전쟁 중 복무하던 강원도 9사단에서는 큰 접전이 없더라도 인민군의 포격과 기습으로 하루 평균 서른 명꼴로 전사자가 발생했고, 어느 날 두명밖에 죽지 않았다는 보고를 올린 작전참모가 사단장 깁종갑에게 "오늘은 좋은 날이니 회식을 시켜주십시오"라고 했다. 사단장 김종갑은 참모장 박정희를 불러 준비를 시켰더니 정색을 하고는, "한 명도 안죽었다면 모르지만 두 명밖에 안죽었다고 축하하자는 데는 반대합니다. 그 두사람의 부모는 아마도 대통령이 죽은 것보다도 더 슬플 겁니다라"며 반대했다고 한다.김종갑 사단장은 당시 속으로 '건방지게 무슨 반대야'라고 생각했지만, 무시하고 넘겼지만 이후 그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문득 그때 그 말이 떠올랐다며 조갑제와의 인터뷰에서 회상했다.#
  • 1953년 7월부터 휴전 직전 당시 강원도 양구에서 복무했던 3군단 포병단장 시절 박정희의 전속부관은 원병오(전 경희대 교수) 중위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는 포병단에 파견된미군 고문단과는 사이가 매우 나빴다고 한다. 미군 장교가 턱 도 없는 참견을 한다 싶으면 한국말로 "그 잠꼬대 그만하라고 해!"라고 소리를 질러 통역장교는 적당히 통역하느라고 애를 먹었다고 한다.
  • 1953년 박정희가 3군단 포병 단장으로 복무했을 시점 미군고문단은 한 국군 취사장에서 한 200m 떨어진 위쪽에 변소를 지으려고 했는데, 박정희가 따져 미군 측에선 지하수에 분뇨가 스며들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럼에도 박정희는 "밥짓는 데 가까이 변소를 내는 것은 우리 풍습에 어긋난다. 한국 땅에서는 한국 풍습에 따르라"고 하여 끝내 못짓게 했으며, 박정희는 고문단장 베이커 중령이 자신에 대해서 나쁜 보고를 상부에 올린 것을 알고는 베이커 중령을 불러 꼬치꼬치 따지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당시 박정희의 직속 부관인 포병 부단장은 낙동강 전선에서 박정희 소관의 정보과가 직접 귀순 절차를 수행한 인민군 포병중좌 출신 정봉욱 대령이었다. 미군은 남로당 전력자와 인민군출신이 같이 근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하여 정봉위을 다른 부대로 보내도록 하였고, 박정희는 "정 대령이 귀순한 것은 인민군이 유리할 때인데 그를 의심해선 안된다"고 변호했지만 결국 정봉욱은 전출된다. 이후 정봉욱은 5·16 군사정변채명신과 5사단에서 가담하여 소장으로 진급한다.
  • 1953년 전속부관인 원병오의 눈에 비친 박정희는 부하들에게 '손찌검이나 욕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박정희가 쓴 가장 큰 욕은 지휘봉으로 철모를 가볍게 치면서 "밥통!"이라고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원병오는 담대하게만 보이는 박정희 단장이 의외로 소심한 면이 있다는 점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상관들에게 브리핑할 때는 긴장하여 손을 떨곤 했다는 것이다.
  • 조갑제가 저술한 박정희 전기 중 "4.19 혁명 이후, 이병주(국제일보 주필, 소설가) 황용주(부산일보 주필) 조증출(대구 사범 동기)와의 술자리"에서 박정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교포들을 모아 놓고 연설이나 하고 미국 대통령에게 진정서나 올리고 한 게 독립 운동이 되는 건가요? 똑바로 말해 그 사람들 독립 운동 때문에 우리가 독립된 거요? 독립 운동 했다는 거 말짱 엉터리요, 엉터리 해방 직후 우후죽순처럼 정당이 생겨갖고 나라 망신시킨 자들이 누군데. 독립 운동 했습네 하고 나선 자들이 아닌가. 독립 운동을 합네 하고 모두들 당파 싸움만 하고 있었던 거여. 그 습성이 해방 직후의 혼란으로 이어진 기라 말이다. 그런데도 민족의 체면을 유지했다고?"[23]#

    이번에는 박정희는 5.15 사건, 2.26 사건을 말하며 찬사를 하자, 황용주가 "천황 절대주의자이고 국수주의자 놈들이며 그들이 일본을 망쳤다"고 반박한다. 그러자 다음과 같이 답한다.
    "일본의 군인이 천황 절대주의자 하는 게 왜 나쁜가. 그리고 국수주의가 어째서 나쁜가. 그런 잠꼬대 같은 소릴 하고 있으니까 글 쓰는 놈들을 믿을 수 없다. 일본이 망한 게 뭐꼬. 지금 잘해 나가고 있지 않나. 역사를 바로 봐야 해. 패전 후 얼마 되지 않아 일본은 일어서지 않았나.” “자유주의? 자유주의 갖고 뭐가 돼. 국수주의자들의 기백이 오늘의 일본을 만든 거야. 우리는 그 기백을 배워야 하네.”[24]
  • 박정희는 6군단 부군단장에서 보직해임을 당해서 7사단장[25]으로 부임했다. 보직해임 사유가 부군단장 신분으로 군단장과 싸워서 였다. 그 당시 6군단장이 백인엽 장군이었는데 이 백인엽 장군은 다름아닌 백선엽 당시 육군참모총장의 친동생이었다. 백선엽의 입장에서 보면 친동생인 백인엽이나 아끼는 후배인 박정희나 둘 다 자신이 매우 아끼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 둘이 싸우면 백선엽의 입장이 난처해지는 것이고 박정희의 보직해임은 사실상 둘을 분리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군법상으로도 그게 맞기도 하다.[26]

3.2. 대통령 재임 시절

  • 대통령 권한대행 시절인 1962년 연말 기자간담회에서 한 기자가 "화폐개혁 실패에 대해 관계자를 처벌해야 할 것 아닙니까?"라고 질문하자 "처벌한다면 의장인 내가 처벌 받아야지요"라고 웃어넘긴 적이 있다. #
  • '밤의 대통령'이라 불리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방일영 조선일보 고문과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 박정희는 첫 대통령 유세를 마친 뒤 방일영의 집으로 가서 기생들과 함께 '야스기부시(미꾸라지 잡기)'라는 일본의 민속춤을 추면서 밤새 놀았는데, 이 사실이 육영수의 귀에 들어가 육영수는 청와대 비서들에게 다시는 박정희가 방일영의 집에 가지 못하게 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 이동원 비서실장이 박정희가 서독방문 후 오는 길에 영국런던에 가서 도시계획을 직접 한 번 보시는 게 좋겠다고 하니까 박 대통령이 버럭 화를 내면서 "나라에 돈도 없는데 관광이나 다니게 됐어?"라고 한다. (이동원 회고록에서)
  • 유럽 방문 당시, 한자로 서명하려는 걸 본 측근 한 사람이 "각하는 대한민국 대통령이십니다."라 조언하자, 즉시 한글 사인으로 바꾸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후에도 박 대통령은 한글 서명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 미국을 세번째 방문한 박정희는 한일수교에서 독도영유권 문제가 발생하자, 데이비드 딘 러스크 미국 국무장관과의 대화 중에 박정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미국 기록이 있다.
    ‘수교 협상에서 짜증스런 문제 가운데 하나가 독도문제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도를 폭파시켜 없애버리고 싶다.'
    (President Park said he would like to bomb the island out of existence to resolve the problem)



    1965년 5월 18일, <한일협정 반대운동(6·3운동) 사료총집> 2권 231쪽##
  • 1965년 미국 웨스트포인트에 있는 미국육군사관학교에 방문했을 때, 생도들을 사면해 준 일이 있었다. 미 육사는 방문하는 귀빈에게 특권 하나를 주는데, 대개 퍼레이드를 요청하거나 기념품을 받거나, 특별연설 정도였다. 그런데 박정희는 그 특권으로 현재 교정에서 징벌 중인 생도들의 사면을 요청하였고, 덕분에 크고 작은 징계를 받고 있던 260명의 생도들이 사면되었다 당시 뉴욕타임즈 기사. 훗날 이 생도들은 임관 후 다들 기피하는 한국 근무에 자원했다고 한다.
  • "박정희와 육영수가 싸우면?" 이라는질문에 육박전이라는 단어가 탄생했다. 이 드립을 고안한 전유성은 방송에서 이 언어유희를 자문자답하다가 3개월 동안 방송출연을 정지당했다.# 그런데 대통령 전용 비행기 스튜어디스인 최은자 씨가 경남 진주로 가는 비행기에서 대통령 부부 앞에서 육박전 얘기를 했더니 둘 다 박장대소했다고 증언하였다.#
  • 이 시대 사람이 그렇듯 술을 좋아했다. 그런데 단 한 번도 취했다는 말은 전해지지 않는다.그럼 아래 만취하여 동아일보 기자에게 박치기를 날렸다는 일화는???
    대통령이니만큼 아내의 눈치와 더불어 본인이 주량을 조절한 듯 싶지만, 일단 술 자체에 굉장히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내려오는 일화로 태국의 라마 9세과 만나 회담을 가진 적이 있었는데 박정희 대통령은 대단한 미인인 시리낏 왕비를 보고 혼자 신이 나서 만찬장에서 엄청난 양의 술을 마셔댔다. 이에 영부인 육영수 여사와 태국 외무장관이 그만 마시라고 눈치를 줄 정도였다. 하지만 박정희는 술을 마시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28], 박정희가 발언할 차례가 되자 다들 혹시 술주정이라도 하거나 제대로 걸을 수나 있었는지 싶어 긴장한 눈으로 박정희를 쳐다보았는데 박정희는 단상까지 매우 멀쩡하게 걸어가더니 술취한 기미가 전혀 없이 발언을 마쳤다.
    그런데 자리로 돌아와서 또 술을 마셨다고 한다. 이러고도 한참 뒤에야 만찬이 끝났다고 하니 얼마나 마셨을지는 짐작이 안 간다. 참고로 원래 이런 만찬에서 술은 정상 간 우애를 다지는 목적으로 한잔 마시고 그 이후부터는 상황에 따라 적당히 한두잔 더 마시고 끝내는 편인데, 가끔 두 정상 모두 주당이거나 하는 경우에는 둘 다 술에 정신을 못 차리고 정상끼리 부어라 마셔라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서로 주고받지 않고 블라디미르 푸틴처럼 상대 정상이 술을 전혀 안 마시는데도 혼자서 미친듯이 말술을 말아먹는 경우도 있긴 하다. 당연히 러시아이니만큼 마신 술은 보드카다.
    그런데, 이러한 '단 한번도 취했다는 말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아래에 나온 '술에 만취해 동아일보 강성재기자에게 박치기를 날렸다'는 일화와는 또 서로 모순되나, 사실 아무리 당시 시국이 시국이라도 대통령이나 되는 사람이 공식 술자리에서 주요 일간지 기자를 때렸다는 것 또한 말이 안 되는 사태인 만큼, 술 마시고 실수했다는 핑계로 폭력행위를 무마했을 가능성도 적지는 않다. 여튼 말술을 영웅시하던 당시의 풍습상, 대통령을 영웅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주장일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 1967년, 광복군 출신 박영만은 픽션 소설 <광복군>이라는 책(上下 전2권, 협동출판사)을 출판한다. 흔히 비밀광복군설의 ‘원전’이다. 내용은 '박정희가 1945년 2월 광복군에 가담한 뒤 부대 안에 비밀조직을 만들었고 김학규 장군의 명령에 대기하고 있다가 일본이 명령을 대기하고 있었다'는 내용의 소설이다. 박정희를 찾아가기 전에 박영만은 만주군 간도특설대 하사이자 박정희의 후배 박창암에게도 찾아갔었다.
    "5·16 이후 반혁명사건으로 옥살이를 마치고 풀려난 박창암 前혁명검찰부장 앞에 박영만이 찾아왔다. 대뜸 ‘같이 박 대통령을 한번 도와보자. 어느 지하운동 리더의 공적을 박 대통령 것으로 만들고 싶으니 도와 달라’고 부탁했는데 박창암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러나 1967년 박영만은 기어이 ‘광복군’을 출간했다. 박영만은 책을 박정희에게 전달했으나 환대는커녕 호통을 들은 것으로 전해진다."



    정윤회 저자 <실록 군인 박정희>, 2004, p. 118 중에서

    이를 두고 김승곤 前광복회장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한다.
    “박영만은 청와대에서 돈을 받을 줄 알고 <광복군>을 썼는데, 내용을 훑어본 박정희 대통령은 ‘내가 어디 광복군이냐. 누가 이 따위 책을 쓰라고 했냐’며 화를 냈고, 결국 박영만은 돈 한푼 못 받고 거창하게 준비한 출판기념회도 치르지 못했다”#
  •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될 무렵(1970년 7월 7일), 당시 김종신 사회언론담당 비서관(전 부산문화방송 사장)은 박정희와 정강 장군을 만났는데, 정강 장군이 말하기를 "5.16 쿠데타가 일어난 아침 주동자가 박정희 소장이라는 말을 듣고 나라가 뒤엎어질 줄만 알았다. 나는 그(박정희)와 동기생이기 때문에 그의 전력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 위험한 인물로 봐 왔다" 그 후, 김종신 비서관은 선거 때마다 '사상논쟁'이 벌어졌으나 한번도 당사자의 시원한 해명이 없었기에 궁금해 용기를 내 물어본다. 그러자, 박정희는 이렇게 답변한다.
    "육사 교관으로 있을 때 형님 친구(이재복)되는 분이 찾아와 다음 일요일 모 장소에서 향우회가 있다면서 나더러 꼭 참석해 달라는 거야. 처음엔 거절하려다 사관학교 교관생활이 따분하기도 하고 해서 거길 갔었지. 그런데 그게 화근이 될 줄이야. 그날 향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빨갱이였어. 나는 거기서 (남로당 입당원서에) 사인하거나 도장을 찍은 적은 없지만 그 일로 김창룡한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재판도 받았지."#
  • 경부고속도로 공사 당시, 박정희가 현장을 지휘하던 정주영 회장을 호출해서 만났는데, 정 회장이 하도 피곤해서 대통령이 이야기 하던 중에 졸았다고 한다. 하지만 박정희는 이를 탓하지 않고 오히려 "정사장, 내가 미안하구료"라며 피곤한 사람을 잡아두었다고 사과했다고. 이런 일과 달리, 박정희가 조선소 건립을 지시했는데 정 회장이 기술과 자본 문제로 난색을 보이자, "현대가 정 회장 개인 거요?"라고 호통치기도 했다고 한다. 다만 일방적으로 까라면 까라는 식은 아니었고, 조선소 건립 외자 유치에 있어 정부가 보증을 서주기로 약속했다.
  • 스웨터 수출하는 공장 시찰을 갔을때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누던 어린 여공이 "공부 못한 게 한입니다."라고 하자, 사장과 논의해 야간학교를 세우기로 결정이 되었다. 고등공민학교, 혹은 산업학교라고 불린 이 교육기관은 정식학교가 아니었기 때문에 문교부에서 수료증은 몰라도 졸업증은 불허한다는 지침을 내리자, 다음 날 문교부 장관이 청와대에 불려가더니 관련 규정이 바뀌었다.
  • 지방순시 중에는 전용차를 놔두고 슬쩍 지나가던 시외버스를 타고 승객들이랑 노가리 깐 적도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승객들은 앞에 가는 전용차를 타신 높으신 양반에 대해 씹고 뜯었지만, 정작 그 높으신 양반이 자기네와 같은 차를 타고 있는 건 몰랐다고 한다. 식당에서 자신보고 박정희를 닮았다고 하는 주인장에게 "박정희가 날 닮았지, 어찌 날 보고 박정희를 닮았다고 하는거요?"라며 뻔뻔하게 대꾸한 적도 있다는데, 아마 밑에도 있는 전주 삼백집 일화의 일부인 듯하다.
  • 전주 지역 시찰을 마친 후 술을 마신 다음 날 아침에 콩나물국밥으로 유명한 삼백집에 수행원을 시켜서 배달을 요청했는데, 하필이면 주인이 욕쟁이 할머니였다. 당연히 "이 썩을 놈아, 얻다 대고 배달을 해달라고 XX이야! 와서 처먹어!"라는 호통이 날아왔고 이에 사색이 된 수행원이 보고하자 박정희는 "허허허, 그럼 가야지?" 라면서 국밥집을 찾아갔다. 물론, 수행원들이 미리 찾아가서 제발 욕을 하지 마시라고 신신당부했지만 개무시했다. 이에 개의치 않은 할머니는 계속 욕설섞인 응대를 했고, 와이셔츠 차림으로 국밥을 먹던 박정희가 "장사는 잘 되십니까?" 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할머니는 "아, 씨X. 웬 사내놈들이[29] 와가지고 일하는데 자꾸 옆으로 찾아와서 나한테 욕을 하지 말라고 헝게 답답해 죽겄어! 이 놈아! 얼씨구? 네놈은 생긴게 꼭 박정희를 닮아서 밥을 잘도 쳐먹네? 어찌 그리 박정희를 쏙 빼닮았냐? 누가 보면 네놈이 대통령인 줄 알겄다 이놈아!" 라고 지나가다가 다시 "그래도 그놈은 큰일이나 했지. 옛다, 여기 계란이나 하나 더 쳐먹어!" 라면서 계란을 하나 더 서비스로 까서 넣어 주었다고 한다. 이에 박정희도 지지 않고 껄껄 웃으면서 "허허허, 할머님? 박정희가 날 닮았지, 어찌 나더러 박정희를 닮았다고 하슈?" 라는 말로 응수했으며 연신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맛있게 국밥을 다 먹고 자리를 떴다고 한다. 나름대로 칭찬도 들었으니 그렇게 기분은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다. 일설에 따르면 그 할머니는 작고하기 직전까지도 "그 때 그 놈팽이는 절대 박정희가 아니야!"라고 자신이 욕을 퍼부은 상대가 박정희였다는 것을 끝까지 믿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그 할머니는 1972년 78세로 작고한 이봉순 씨로, 1917년생의 박정희와 무려 20년 이상 차이나는 어머니 나이뻘 되는 사람[30]이었다. 그때 당시의 여자들은 20세 이전에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는 경우가 아주 흔했기 때문에, 젊은 시절의 박정희에게도 충분히 어른 대접을 받았을 나이였다. 비록 거친 말이긴 하지만, 어머니 나이뻘 되는 어른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면서도 큰일을 했다고 칭찬을 하였으니 크게 기분이 나쁠 리는 없었을 것이다.
  • 70년대 중반 쯤 혜화동로터리 근처의 막걸리집에 박정희가 혼자 들어와 막걸리 한 사발을 시켜서 김치를 안주 삼아 마셨다는 말이 있다. 잠시 후 주인이 부스럭 소리가 나서 뒤돌아보니, 대통령이 막걸리 독에서 직접 또 한 잔을 퍼고 있더란다. 다 먹고 나서 "얼마입니까?" 라고 묻고는 호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계산하고 나갔다고 한다. 실제로 박정희는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가끔 대폿집을 찾아다닌것 같다.#
  • 박지만이 육사에서 친구와 휴가를 나왔을 때, 아들 친구가 온다고 하니 대통령이라고 너무 무섭고 딱딱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되겠다 싶어서 꽃남방을 입었다고 한다. 아들 친구와 만났을 때는 아니지만, 휴가를 가서 입은 모습이 찍힌 사진은 있다.
  • 의외로 성형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다만 외형적인 측면을 위해서가 아니라 축농증으로 알려진 부비동염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호흡곤란이나 감기 증세를 동반한 장애를 고치려 60년대부터 수술을 하였으나 적절한 치료 방법이 없어 78년도에 다시 수술을 진행하여 완쾌하였다고 한다. 한국에서 2번에 걸친 성형을 했지만 결국 실패하여 일본인 의사에게 수술을 받아서야 증세가 없어졌다고 하는데, 이에 이전 수술 실패에 대해서 아무런 불평을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김유혁 단국대 종신명예교수 증언
  • 청와대 출입기자와 4선 국회의원을 역임한 하순봉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81년 국군의 날 행사에서 한국 기술로 개발한 핵무기를 공개한 뒤 전격 하야할 생각이었다”고 주장했다. 후계자로는 김종필을 생각해 두고 있었다고 한다.# 박상범 전 경호실장도 1978년 3월에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는데
    “경상북도 순시를 하고 구미 관광호텔에 하루 묵으신 다음 날이었어요. 여느 날처럼 새벽 6시에 일어나 산책을 나가셨어요. 대통령도 저희 수행원들도 모두 쓰레기봉투를 들고 따라 나섰습니다. 박 전 대통령은 산책을 나갈 때 늘 쓰레기를 주웠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박 군만 따라오라’ 하셔서 저만 따라 나갔습니다. 말없이 한참 걷다가 벤치에 앉았는데 ‘같이 앉으라’ 하시고는 ‘집은 샀느냐’ ‘가족들은 건강하냐’ 물으셨죠. 그러더니 잠시 침묵이 흐른 후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내가 (집권이) 18년 됐지? 지금 정리를 하고 있는데…. 20년 되는 해에 전격 하야하고 떠나야겠다. 어때? 그러는 게 좋겠지?’ 물으시는 거예요. 그냥 한 번 생각난 김에 툭 던진 말이 아니라는 게 표정에서 다 느껴졌습니다. 속으로 너무 놀랐죠.”


    ―뭐라고 답했나요.


    “감히 제가 뭐라고 해요. 그날 전 너무 놀라 며칠 멍하게 보냈습니다.”

    라고 진술했으며# 남덕우 전 총리도 식사 중에 개헌하고 그만둔다는 말을 들었다고 회고했다. 이쪽은 말투가 좀 급조적인 감은 있지만.# 이들이 지어낸 일화인지는 각자의 판단이다. 최고회의 부의장, 대통령 취임 때를 넘어서 5.16부터 잡아도 1978년 3월이면 18년은커녕 17년도 다 안 된 시점이기도 하고. 햇수로 따진 거라면 말은 된다.
  • 1979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새마을운동 홍보 질문'을 배정받은 동아일보 강성재 기자가 사전 시나리오를 깨고, '각하' 호칭을 '대통령께서'로 바꾸고 미리 짜여진 질문에 이어 새마을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차지철 경호실장은 눈초리를 올리며 권총을 만지작거렸다. 2달 뒤, 박정희는 청와대 출입기자 술자리에서 만취해 그 기자의 이마에 박치기를 날렸다고 한다. 그로부터 열흘 후, 박정희는 강 기자에게 정식 사과했다.#[31]
  • 1971년 대선 유세 중에 황윤길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가리켜 '몸이 마르고 키가 작으나 눈이 호랑이 눈 같아 일을 저지를 것 같다'고 말한 대목을 언급하며 자신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외모가 닮았다고 한 적이 있다.#
  • 대통령 집권 전에는 가끔씩 안경을 쓰곤 했으나, 대통령 집권 후에는 안경을 거의 쓰지 않았다. 다만 대통령 집권 후에도 안경을 쓴 시각자료가 적어도 두 종 있다. 1966년 기자회견 1979년 연두기자회견
  • 1963년 유세 당시 연설 녹음이 2024년 3월 21일 공개되었다. #

4. 기타

  • 블라디미르 푸틴이 박정희를 존경한다고 한다. 실제로 그도 러시아의 박정희였으나 이후 학살자가 되었다.박정희는 유신 헌법에 대해서 반대하는 사람들이나 자신의 경제 성장 정책이 결국 국민의 기본권조차 못 지켜지지 않는 독재 속에서 이루어낸 것이라고 하거나 그 부의 비중이 고르지 않았다는 비판이 들어와도 그냥 유신 헌법으로 자기 경제 성장 정책을 반대를 무릎쓰고 밀어붙였을 뿐이지 차지철이 하자는 것처럼 진짜로 대학살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 일제강점기에 사용했던 일본식 이름은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 박정희가 신경군관학교에 입교한 다음해인 1941년에 바꾼 것이다. '高'는 본관 고령(高靈), '木'은 성씨 박(朴), '正'은 이름 정희(正熙)에서 따왔다. 인터넷상에서는 다카'키'로 잘못 알려진 경우가 많은데, 다카키 마사오 쪽이 다카기 마사오보다 구글 검색결과 6배 가량 더 많다.
  • 2005년 출간된 일본 육해군 총합사전에 박정희의 일본명이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実)로 게재되면서 창씨개명을 두 번 했다는 주장이 나왔으나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한겨레오마이뉴스는 "자료로 입증된 사실이 없거나 공식 기록으로 확인된 바 없으며 다카기 마사오로 한 차례 개명한 사실만 확인되었다"고 밝히면서 해당 설이 사실일 가능성은 낮다고 하였다.#1#2
  • 사후 1979년 11월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는데, 이는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주요 친일 행각을 행한 인물들을 담은 '친일인명사전'에 해당 인물명이 포함되어 있어 논란이 일었다. 비단 박정희 뿐만 아니라 친일 활동을 공고히 한 장면 전 총리도 이 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조카사위인 김종필의 둘째형인 김종익과는 촌수상 박정희가 아저씨임에도 나이 차는 딱 1살밖에 안 난다. 이는 김종필의 장인이자 박정희의 셋째형인 박상희와 박정희 간의 나이 차이가 10살 넘게 나기 때문이다.
  • 아버지 박성빈 - 본인 - 아들 박지만 - 손자 박세현 간 각각의 나이 차가 엄청나게 심하다. 박정희 본인은 박성빈의 막내 아들이라서 그렇다 쳐도 아들 박지만에게 손자 박세현은 장남인데도 나이 차가 심하다. 박성빈과 박정희는 46년 차, 박정희와 박지만은 41년 차, 박지만과 박세현은 47년 차로 죄다 40살 이상씩 차이난다. 즉 박정희가 유명을 달리하지 않았어도 손자를 볼 가능성은 심히 낮았다.
  • 지금의 세종특별자치시 일대인 공주시연기군 주변으로 행정중심복합도시의 서쪽 지역에 천도하려고 계획했다는 사실이 사후에 알려졌다. 이 계획을 백지계획이라고 하며 대대적인 서해안 중화학/무역벨트 사업인 가로림만 계획과 연계되어 있었다. 하지만 박정희가 10.26 사건으로 죽어 실행되지 못하였다. 70년대에 수도 이전과 충청 지역의 경제수준을 영남권 정도로 끌어올리는 사업을 단행했다면 지금의 수도권 과밀화 현상이 많이 완화되었을 것이라는 측면에서 꽤나 아쉬움이 남는다. 충청도 수도 계획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세종시 계획으로 간접 계승된다.
  • 영원한 유작이 있는데, 10·26 이후 보좌진들이 집무실을 정리할 때 발견된 돋보기와 청사진이 그것이다. 이는 수도를 서울에서 대전인근으로 옮기는것과 수심 20m 대형선박이 출입할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지닌 가로림만에 대규모 공단을 건설해 수도권집중문제를 해결할 겸 최대 600만명이 이주하는 국토균형개발 프로젝트를 기획하였다. 이는 KBS역사스페셜에서 "박정희 최후의 프로젝트"로 방영한 바 있다.
  •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에 남한 면적 정도의 땅을 사서 대규모 농업 이민을 시키자는 계획을 세운 적이 있었다. 왜 그런 계획을 생각하냐는 물음에 "국내에 있을 땐 불만이 많더라도 외국 나가면 다들 애국자가 된다"라 했다고. 일본의 남미 이민을 보고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이때 시험적으로 매입한 토지가 아르헨티나에 있다. 야따마우까 농장으로서, 면적은 9만평. 서울시의 30~40% 정도 된다고 한다. 하지만 해당 토지는 염분이 많아 농장 경영에는 실패했다. 이때 아르헨티나에 이민 갔던 사람들은 다른 사업을 하면서 현지에서 기반을 잡았다. 오랫동안 있으나 마나 했던 이 땅에 대해 최근에 탄소 배출권 문제 해결에 이용해 보자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었고, 실제로 노무현 정권 시절 활용계획을 지시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후 활용계획은 백지화되었다. 이후 박근혜 정권 시절 불법점거중인 현지인들에게 무상으로 양도하기로 합의하고 공증까지 채결했다고 했다고 알려졌지만사실이 아니었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태극기에는 태극이 아닌 웬 펩시가 그려져 있다.
  • 청와대에서 진돗개 백구 한마리를 키웠다고 한다.정성스럽게 길렀고 진돗개는 박정희를 주인으로 모시고 충성을 바쳤으나 다른 사람들에겐매우 사나워서 차지철 경호실장도 물어뜯었다고 한다.
  • 박정희의 큰형과 다섯째형은 일찍 죽었고 둘째형 박동희(朴東熙)는 66세 때 동생이 정변에 성공하여 대한민국 대통령이 된 뒤에도 고향인 구미면 상모동에서 평범한 농부로 살다가 1972년 사망하였다. 그는 행여라도 자신이 동생에게 짐이 될까 몹시 염려했다. 때문에 생전에 박정희의 초청에도 불구하고 청와대는 커녕 서울 근처에도 가려 하지 않았고, 어느 날 고향에 들린 박정희가 아직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호롱불을 쓰고 있는 박동희의 집안 형편을 보고 상모동에 전기를 공급해주려하자 특혜 소문을 우려해 이를 완강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그의 집에 늦게 전기가 들어오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박동희는 슬하에 1남 1녀가 있었는데, 아들 박재홍(朴在鴻)은 백수로 있다가 작은아버지가 대통령이 된 다음 포항제철 행정실장과 동양철관 회장을 지냈고, 이후 민주정의당에 입당하여 4선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딸 박재선은 의사와 결혼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박정희의 셋째 형 박무희(朴武熙)는 연안 차씨와 결혼해 2남 1녀를 두었고 형과 함께 농부로 살았다. 박무희 일가는 박정희가 집권하기 전까지는 매우 궁핍하게 생활했다. 그러나 작은아버지가 등극한 이후 연필장사를 하던 장남 박재석(朴在錫)은 국제전기기업 회장이 되었고, 벽돌공장에 다니던 차남 박재호(朴在浩)는 동양육운 회장이 되었다. 딸은 구미에서 결혼해 살았다. 박정희의 큰누나 박귀희(朴貴熙)는 박정희가 태어나기전에 딸을 출산해 노산으로 모유가 안나오던 모친을 대신해 유아기인 박정희에게 젖을 먹여 돌아주었다. 박귀희는 칠곡군 석적면의 은용표(殷龍杓)와 결혼해 3남 2녀를 두었는데[32], 그 중 3남 은희만(殷熙萬)[33][34]의 재혼처[35][36] 소생 막내아들이 바로 연예인 은지원이다. 넷째형 박상희(朴相熙)는 거물급 공산주의자였다. 이 때문에 박정희도 덩달아 잡혀가서 문초를 당했다. 해방 정국 당시에는 아직 연좌제가 있던 시절이었다. 참고로 그 박상희의 딸 박영옥(朴榮玉)이 김종필(金鍾泌)과 결혼해서 김종필은 박정희의 조카사위가 되었다. 작은누나 박재희(朴在熙)는 박정희가 어릴 때 잘 돌봐주었고, 박정희가 대구사범학교에 다닐 때 남편 한정봉이 학비를 대주기도 했다. 당시 한정봉은 기자로 일했는데, 박정희가 만주에 갈 때 밑천으로 쓰려고 매형의 밥줄인 카메라를 가져갔다. 박정희가 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나서 이들 부부가 성북동으로 이사를 왔는데, 청탁꾼들이 하도 찾아와서 박정희는 경찰을 배치하고 작은누나 일가에 대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함은 물론 상주군으로 내려가라고 압박을 가했다. 이 때문에 박재희는 단식투쟁을 하며 섭섭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 제9대 박정희 대통령 취임기념 시계가 있는데, 역대 대통령 시계 중에서 가장 비싼 값에 거래되고 있다. 사유는 매물도 적은데다[37], 역대 대통령 시계 중에서 유일한 기계식 시계라 인기가 많다고 한다. 또한 요일 표시는 한자와 영어가 가능하다.
    파일:external/image.ytn.co.kr/201401241146572382_h.jpg
  • 처음 최태민박근혜와의 관계를 들었을 때 화가 나서 최태민거세시키고 박근혜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를 내렸으나 공교롭게도 얼마 안 있어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한테 암살 당했고, 이후엔 '애미 없는 것'이라고 딸을 감쌌으며 결국 주변의 충언에도 불구하고 지시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나중엔 오히려 최태민이 마음에 안드는 도지사나 경찰총장을 호출하여 호통치거나 구국십자군이란 단체를 만들어 돈을 갈취하는 국정농단 행위를 방조하기까지 하였다. 결국 "최태민의 전횡을 방조하던 박정희를 보다못하여 결국 저격하게 되었다"고, 김재규는 항소이유보충서에서 주장하였다.
  • 국방에 대해서는 큰 실책이 하나 존재한다. 군 장성 인사문제를 많이 황폐화시켰는데 그게 바로 하나회를 창설한 일이었다. 이게 얼마나 황폐화 시켰는지 그 단적인 예시가 있다면 두 장교인 장태완전두환을 비교하면 되는데 장태완은 1950년 소위 임관 후 6.25 전쟁도 참전한 참전용사인 반면 전두환은 1955년, 전쟁이 완전히 끝난 이후에야 소위 임관했으며 전두환의 소위 임관 시점에서 장태완은 이미 1차 중대장을 완료한 중참 대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1978년 동일한 소장이 되었다. 더군다나 전두환의 육군사관학교 임관 성적이라는 게 126/156 등이라는 처참한 성적이며 베트남 전쟁에서도 연대장으로써 노골적인 수준미달의 행위들을 했는데도 처벌은 커녕 중용되었다. 이렇게 편파적인 장교 인사로 인해 대한민국 국군 장교단은 점점 썩어 문드러져 갔으며 결국 그 전두환박정희가 한 행동똑같은 행동으로 대한민국을 집어 삼키게 된다.
  • 더군다나 하나회가 무럭무럭 잘 성장하라고 병출장교를 법으로 막아 버렸다. 적어도 이승만 정부 시절에는 당대의 명장임부택 등 사병 출신 장교들이 꽤 나왔지만 박정희는 이를 원천 차단하고 처음부터 장교였던 사람만 장교가 될 수 있도록 바꿔 놓았다. 특히 장교임관 과정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지원하거나 대학교 재학중에 지원하도록 바꿔 놓아 예비역 상병 및 병장은 나이에 걸려서 지원을 못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 결과 1969년에 갑종장교를 230기를 끝으로 폐지한 반면 그 대신 육군3사관학교를 고등학교만 졸업하자마자 바로 진학하는 과정으로 창설했다. 이후 병출장교는 김영삼간부사관 제도를 창설하고 장교 지원연령을 크게 완화시킴으로서 되살려 놓게 된다.
  • 2017년 박근혜 파면 이후 박정희는 자식농사가 크게 망했다는 부정적 이미지가 늘었다.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대통령이 된 박근혜가 아버지인 자신의 평판을 완전히 손상시켰고, 헌정사상 최악의 부패 사태를 초래하여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직에서 탄핵 당했다. 박근령은 일제 시기 친일 망언과 국정농단 사범인 동복언니 박근혜를 대놓고 찬양하고 미화하거나 그들의 악행을 부정하는 등 행위로 논란이 되고 있으며, 박지만은 상습적인 마약 복용으로 구속과 투옥을 반복했고, 마약 문제 뿐만 아니라 박근혜 5촌 살인사건 등 살인 범죄에 개입하였다는 의혹이 있다. 다만, 박지만은 10대 ~ 20대 사이에 부모를 한꺼번에 잃은 트라우마로 마약쟁이가 된만큼 동정 여론은 상당했다. 다만 박정희와 전처 김호남 소생의 장녀 박재옥정치에는 평생동안 발도 일체 들여놓지 않았고, 또한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살다가 2020년 사망했으므로 제외. 그러나 일부에서는 박재옥 역시 그의 일가족들이 설악산 케이블카 사업의 경영권을 독점하고 과거 박정희 정권 시기 특혜를 받았다는 이유로 "박재옥도 박근혜, 박근령, 박지만보다 덜할 뿐 몰염치하고 부패한 인물"이라고 비판하는 이들도 더러 있다. 물론 박재옥 역시 논란이 없진 않아도, 여전히 비난을 받고 있는 이복동생들다는 성품이 좋은 것은 분명하다.[38]
  • 딸인 박근혜가 참담한 국정농단을 일으켜서 박정희에 대한 평가도 깎이자 충무공의 15대 종부인 최순선 여사[39]는 박정희가 쓴 한글 현판을 철거하고 이전의 숙종 사액 현판을 걸 것을 문화재청에 요구하고 있다. 기사. 다만, 덕수 이씨 충무공파 종회는 현판 교체 요구에 즉각 반대 의사를 밝혔다. 문화재청현충사를 박정희 정권의 작품이라고 여겨 현판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결정하였다.
  •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중 유일한 왼손잡이다. 단, 대통령 재임 시 공문 처리를 위한 서류 작업 시의 필기는 오른손으로 했다고 한다.
  • 10월 26일 사망하고 42년 후 같은 날 13대 대통령 노태우도 사망하였다.
  •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이던 1961년. 미국의 존 F. 케네디 당시 대통령과 회담을 하기 위해 방미에 나섰던 일정이 상세히 담긴 미 국무부 비밀해제문서가 공개되었다. 문서에 따르면 박정희 의장과 수행원등의 방미 일정이 매우 험난했던걸 알수 있는데, 먼저 11월 11일 정오에 KNA사발전세기를 타고 일본에 도착한 뒤, 일본에서 미국 노스웨스트오리엔트항공사의 민항기로 환승해서 알래스카 시간으로 11월 12일 오전 9시경에 앵커리지 국제공항에 도착했다고 한다. 여기서 1시간 40분을 기다렸다가 오전 11시경에 앵커리지를 출발해서 서부시간 기준 오후 4시경에 시애틀 타코마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이후 다시 1시간 15분을 기다려서 오후 5시 30분경에 시애틀을 출발해서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 한밤중에 도착해서 하룻밤을 머문 뒤, 다음날인 13일 정오에 미 공군이 제공해준 수송기를 타고 시카고 미드웨이공항을 출발해서 3시간의 비행 끝에 동부시간 기준 13일 오후 4시가 돼서야 겨우 워싱턴 D.C.에 도착해서 케네디 대통령을 만날 수 있었다. 한국시간 기준 14일 오전 6시였으니 실질적으로 한국에서 출발해서 4일이 돼서야 워싱턴에 도착했던 매우 험난한 여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 관동군 장교 출신이지만 독립유공자들과도 친분이 있는 편이다. 백범 김구의 차남 김신공군참모총장은 5.16 군사정변에 협조하기도 했고, 육영수 여사 사망 후 부인을 일찍 여의었다는 점에서 심흥선 전 총무처장관과 동변상련을 느꼈다고 한다. 이용상은 9사단 복무 당시 같이 근무한 인연으로 친해졌으며, 지만이 아버지라 부를만큼 친분이 두터웠다 한다. 광복군 출신인 박영준 장군은 5.16 당시 9사단장으로 쿠데타에 협조하였고 한국전력 초대 사장을 역임했다. 그 외에도 김홍일 장군이 국가재건최고회의 당시 외무부장관을 역임[42]하고, 조경한 임정 외무차장이 제6대 공화당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등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박정희 정권에서 활동하였다.
  • 르완다의 대통령 폴 카가메가 모델로 삼은 사람이기도 하다. 사실 폴 카가메의 행보를 보면 박정희와 많이 닮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구글을 검색해보면 아프리카쪽에서 박정희를 호평하는 여론들을 확인할 수 있으며, 특히 나이지리아 쪽에서 인기가 많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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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키(신장) 관련

박정희는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중 유일하게 단신 이미지를 갖고 있는 대통령이다.[45][46] 세간에는 박정희의 신장이 158cm로 알려져 있다. 이를 두고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키 작아도 유능하고 카리스마 넘친다'라며 치켜세우는 반면, 싫어하는 사람들은 '키 작은 놈이 포악하다'는 식으로 깎아내리곤 한다.[47] 그런데 구글 검색 결과 박정희의 신장은 165cm로 나오고,[48] 대통령 재임 시절 작성된 공무원 인사기록카드상 신장은 163cm 또는 165cm로 기재되어 있다. 박정희에 대해 연구한 조갑제는 그 중간인 164cm인 걸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는 박정희가 1910년대생임을 생각하면 평균 수준의 신장이다.

사실 박정희는 키가 작지 않았으며,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해 단신으로 알려졌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첫째로 그의 아버지 박성빈과 형 박상희의 신장은 각각 170cm와 180cm 정도였는데, 그들이 살던 시대에 이는 상당히 장신이었다. 특히 박상희는 현대에도 충분히 장신으로 취급받는다. 그의 다른 형제들도 모두 장신이었다고 전해진다. 그에 반해 박정희는 나이 차이가 40살이 넘는 아버지보다도 작은 키였기에, '가족들은 다 장신인데 박정희만 작았다'가 당시 평균 이하의 단신인 걸로 와전된 게 아니냐는 것이다. 둘째로 그의 배우자인 육영수의 신장은 170cm로, 당시 여성으로선 엄청난 장신이었다는 점이다.[49] 남편인 박정희보다도 클 정도였으니 대통령 내외가 함께 다니면 박정희는 더욱 작아보였기에 단신이라는 말이 퍼졌다는 설이다. 셋째로 박정희는 소년 시절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롤 모델로 존경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나폴레옹은 단신의 대명사로 유명한 인물이기 때문에[50] 사람들이 박정희가 같은 단신으로서 나폴레옹을 존경한 걸로 와전됐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일단 박정희 본인부터가 자신을 단신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잦았다. 일례로,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유세 중에 박정희는 조선시대 황윤길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 '키가 작고 몸이 마르나 눈이 호랑이 같다'고 평한 것을 '나와 닮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또한 대통령이 되기 전에도 박정희는 누가 자신의 키에 대해 언급하면 '작은 고추가 맵다'고 맞받아쳤다 하며, 자신의 단신을 유머 소재로 삼아 주변 사람들을 웃기기도 했다고 한다.# 박정희와 가까웠던 사람들이 그의 첫인상으로 단신을 꼽은 사례도 많다. 최측근 김종필은 박정희의 첫인상을 '참 키가 조그맣고 얼굴이 새카맸다'고 회고한 바 있다.# 영부인 육영수는 박정희와의 맞선 때 첫인상을 떠올리며 '남자가 체구가 작은 게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말하는 태도가 아주 침착해보였다'고 증언했으며,# 박정희의 前 내연녀 이현란도 '키도 조그마한 양반이 볼품이 없었다만, 일본 육사를 나와서 그런지 박력과 기품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박근혜도 2024년 11월 14일 박정희 탄생 107돌 행사에서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나 작은 체구로 어찌 그런 인생을 사셨는지"라고 언급했다.#

결정적으로 대구사범학교 5학년이던 1936년에 받은 신체 검사에선 159.2cm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1936년은 박정희가 19세가 되던 해였는데, 일반적으로 남자의 성장기는 10대 후반에 끝나기 때문에 성인기에도 줄곧 이 정도 신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51] 1937년 징병검사 결과에 따르면 당시 한반도 청년 남성의 평균 신장은 164cm 정도로, 박정희의 신장은 평균보다 5cm 가량 작았던 것이다. 이는 1980년대~1990년대 출생자 기준(평균 173cm) 168cm, 2000년대 출생자 기준(평균 174cm) 169cm 포지션이다. 게다가 박정희는 키가 커 보일 목적으로 4cm 정도 높은 굽의 구두를 제작해 신었던 걸로 밝혀졌다.# 박근혜(162cm)와 찍은 사진으로 봐도 대략 158~160cm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김종필중앙일보에 연재한 회고록 '소이부답'에서 10.26 사건 당시를 회상하던 중 박정희의 키가 156cm라고 언급한 바 있다.[52]

결론적으로 프로필 키는 164cm 정도로 나오지만, 실제 키는 최대 160cm인 것으로 추정된다. 1917년 태생 대한민국 남성의 평균키가 164cm이므로 박정희는 당시 기준으로도 단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53]


[1] 그래서 육영수 여사가 직접 최불암에게 전화를 걸어 "최불암 씨가 담배를 태우실 때마다 저 양반도 따라 태워요."라며 담배 피우는 장면을 줄여줄 것을 요청했고 그 다음 녹화분부터는 흡연 횟수를 회차당 1회로 줄였다고 한다.[2] 다만 딸인 박근혜는 비흡연자이며, 현재 한국의 보수정당에서는 흡연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많다고 한다.[3] 출처 : 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1권.[4]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 이를 참고한 듯한 묘사가 등장한다.[5] 김형욱의 회고록에서는 “박정희가 맘에 안 드는 사람에게 재떨이를 집어 던지는 특기가 있었다”고 묘사했다(…)[6] 새마을 노래를 직접 작사, 작곡하기도 했다. 단, 작곡은 음악을 전공한 셋째딸 박근령이 "아버지의 요청으로 내가 작곡했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반면, "풍금을 켜면서 직접 작곡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박정희가 풍금 코드를 기반으로 노래를 만들고, 박근령이 곡을 다듬고 악보작업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7] 일제시대 때 음악교사를 했으니 엔카 등 일본 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8] 김계원과 박정희는 서로 키를 맞대어 보고 누가 더 작은지 옥신각신할 정도로 어린이들처럼 노는 사이였다고. 김계원에 따르면 박정희, 김계원, 김재규는 삼총사로 불릴 정도로 어울려 다녔다고 한다. 심지어 박정희를 사살한 김재규 그 자신도 재판에서의 진술에서 자신과 박정희의 관계를 "형제라도 그렇게 할 수 없을 정도"의 친근한 사이었다고 묘사했다.[9] 저 자리를 역임했던 사람들을 보면 하나같이 박정희와 오랫동안 동고동락했던 사람들이니 사적으로 친분이 깊어서 반말을 썼을 가능성이 높다. 심지어 저 반말이라는 어투의 수위도 막대하는 어투가 아니라 "임자 생각은 어때?", "김형욱이처럼 사람 막 안패도 되니까 임자가 해!" 정도였다고. 다만 고향 후배인 김재규에게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도 유난히 공식석상이나 참모들 앞에서조차 거리낌없이 막대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습관들이 10.26 사태의 발화점이 되지 않았나 하는 의견도 존재한다.[10] 세간의 인식과 달리 차지철은 박정희와 그리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거니와 상당히 내성적인 사람이라서 박 대통령과도 철저히 상사-부하의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박정희 역시 차지철에게 말을 걸 때 "차 실장 생각은 어떻소?"와 같은 식의 어투를 유지했다고 한다.[11] 문제가 많은 인물이었으나 성격이 아이 같은 면이 있고, 호색하지 않고, 군부 인사들 중엔 그나마 돈을 덜 밝혀서 박정희와 육영수의 총애를 받은 것은 사실이다. 이런 차지철의 면모를 극대화해서 코믹하게 표현한 것이 제4공화국(드라마)에서 이대근이 연기한 차지철이다.[12] ##[13] 경제학자 장하준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시바스 리갈을 마시다 부하에게 암살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양주가 굉장히 좋은 술인 줄 알았어요. 영국에 와서 보니 가장 값싼 위스키 중 하나더군요. 어느 나라 독재자가 시바스 리갈 같은 싼 술을 마십니까?”#[14] 다만 장하준의 말대로 시바스 리갈이 지금에야 흔하디 흔하고 평범한 술이지만, 그의 주장에는 오류가 있다. 박정희 시대 당시 위스키의 위상을 현재와 대입해선 안되기 때문이다. 1970년대 한국에서 시바스 리갈 이나 조니워커 같은 위스키는 굉장히 구하기 힘들었고, 박정희는 외국에서 구한 로얄 살루트를 굉장히 아껴 먹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원액이 아예 없는 도라지 위스키나 원액을 아주 찔끔 넣은 대중 양주가 판을 치고 시바스리갈이나 조니워커 위스키 같은 양주는 사치품으로 가혹한 세금을 매기던 시절이기에 지금의 시바스리갈 12년의 위상과 1970년대 시바스리갈 12년의 위상은 다를 수 밖에 없다. 지금에야 시바스 리갈 12년은 코스트코나 대형마트, 편의점에서 4만원~5만원대면 구할 수 있을 정도로 널렸고, 로얄 살루트도 면세점에서 싸게 구하거나 코스트코에서 20만원대에 팔고 있으니 호기심으로나 장식용으로 눈 딱 한번 감고 사볼수 있는 정도이다. 여의치 않으면 로얄 살루트는 일본이나 대만에서 사오면 10만원대에 21년을 살 수 있다. 지금에야 싱글몰트 위스키 고숙성은 백만원, 천만원이 넘어가는 세상이고, 박정희가 먹었다는 로얄살루트나 시바스리갈이 코스트코나 마트에 쌓아놓고 파는 세상이지만, 박정희 시대의 시바스 리갈 12년과 로얄 살루트는 위상 자체가 아예 달랐으니(여전히 로얄 살루트는 발렌타인 30, 조니워커 블루와 함께 고급 블렌디드 위스키로 꼽히고, 박정희의 영향으로 2020년대 아직까지 시바스 리갈이 고급 술인줄 아는 노년층이 있긴 하지만) "세상에 어느 독재자가 값싼 시바스리갈을 마시냐"라는 장하준의 주장에는 허점이 있다. 가격이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로 특권층, 상류층이 아니면 구하기 힘든 사치품이었다는 것.[15] 박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금슬이 보통이 아니였던 모양인지 육영수 여사가 저격당한 이후부터 흡연과 폭음이 늘었었다는 당시 청와대 참모의 증언도 있고 술자리에서도 유독 슬픈 노래를 많이 불렀었다고 한다.[16] 남산의 부장들에서 이러한 모습이 잘 반영되었는데 김재규와 술을 먹는 장면에서 막걸리를 먹다가 예전같지 않다며 한 모금만 먹고 말아버린다던가 영화 후반부에는 차지철과 비싼 양주를 먹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인간성을 잃고 사치스러워지는 박 대통령의 모습이 그려졌다.[17] 이러한 것을 아비투스라고 부르는데, 자수성가한 사람들 중에서는 사회적 계급이 크게 올라가도 어린 시절에 겪은 생활 방식이나 어려서 먹던 음식 등을 여전히 찾는 사람들이 많다. 또 어릴 때 겪은 가난의 영향으로 인해 극도로 검소한 생활이 아예 몸에 배어서 딱히 의식적으로 아끼려 하지 않아도 습관적으로 그렇게 행동하는 경우도 많다.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흙수저 집안에서 자수성가한 이명박도 식성이 서민적이어서 음식을 별로 가리지 않고 뭐든 잘 먹기로 유명했다. 국밥이 바로 그것의 정점. 유일하게 싫어하는 음식이 잡곡밥이었다. 어린 시절 백미밥을 못 먹고 잡곡밥만 먹었던 게 한이 되었기 때문으로, 그 시절 어른들 중에는 지금도 가난의 트리거 때문에 잡곡밥이나 보리밥을 안 먹는 사람들이 많다.[18] 이런 면모는 박정희 뿐만 아니라 20세기 동시대 독재자들에게서도 흔히 발견된다. 김씨 3대, 모부투 세세 세코 등을 제외하면 의외로 많은 유명한 독재자들이 식생활이 사치스러운 경우가 극히 드물었는데, 가령 스탈린의 아침 식사는 우유를 섞은 쇠고기 국물에 오트밀을 넣은 죽이였고, 점심과 저녁에는 스프와 생선을 즐겼다고 한다. 호화로운 생일케이크로 악명높았던 무가베도 평소에는 고기는 조금만 먹고 야채는 많이 먹었으며, 짐바브웨인의 주식이자 옥수수가루를 반죽한 사자(sadza)를 선호했다고 한다.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는 장관들과 컵라면을 끓여먹었고,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는 염소 치즈, 사워 크림에 계란을 얹은 채식 라자냐, 젤리에 넣은 루마니아식 잉어, 간단한 토마토, 양파, 페타 샐러드를 곁들인 스테이크, 특히 닭 한 마리를 통째로 넣어 요리한 스튜 등 상당히 서민적인 식사를 즐겨 먹었다.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 역시 빵, 와인, 햄, 치즈, 올리브 등의 '스페인식' 음식을 즐겨 먹었다고 한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간소한 필리핀 음식'을 선호하여 고기는 잘 먹지 않는 대신 생선, 해산물, 야채를 좋아했고, 가장 좋아한 음식은 디넨뎅(Dinendeng)이라는 이름을 가진, 생선 튀김을 곁들인 야채 수프였다. 알바니아의 엔베르 호자의 식단은 아침으로 잼이 든 치즈 한 조각, 점심으로 야채 수프, 작은 양고기나 생선, 후식으로 신 자두, 저녁으로 요구르트였다고 한다.[19] 등번호는 1번, 왼손잡이지만 우투우타였다.[20] 도원 야구장(경기 인천시), 한밭 야구장(충남 대전시), 청주 야구장(충북 청주시), 전주 야구장(전북 전주시), 무등 야구장(전남 광주시), 구덕 야구장(부산직할시) 등.[21] 이때 화로 안에 불을 지핀 숯이 있었다.[22]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매우 놀랐습니다. 전투중인 사단 참모가 아내를 불러다가 며칠이지만 함께 생활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도할 수 없는 군기문란이었습니다. 박정희 참모장은 대구를 오고가는 보급차량대를 관리하고 있었으니 그런 일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23] 위 문장구조는 토론 AnIcyAndWillingAmusement에 근거합니다.[24] 토론 AnIcyAndWillingAmusement[25] 당시에는 둘 다 준장 보직이었다. 실제로도 박정희가 6군단 부군단장이 되기 직전의 보직이 5사단장이었다.[26] 박정희백인엽에게 한 행동이 하극상이기 때문이다.[27] 1년 전인 1957년 제6군단 부군단장으로 재직 중 군단장인 백인엽 중장과 싸운 일로 보직해임 당해 제7보병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했다. 이 일로 인해 진급에서 배제되었으나 당시 대한민국 국방부장관이었던 김정렬의 옹호로 간신히 소장에 진급한다.[28] 태국에 만찬장이니만큼 상당히 센 양주였을 가능성이 높다. 근데도 매우 빠른 속도로 거의 병째 마셨다는 언급을 보면 주량이 엄청나다는 것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29] 박정희의 수행원으로 추정된다.[30] 하지만 박정희가 늦둥이라 큰형보다 이봉순 씨가 2살 어리고 둘째형 박동희보단 1살 많았다.[31] 참고로 박치기 세례를 받은 강성재 기자는 이후 신군부에 언론통폐합 과정에서 해직당하였으나, 이후 민주정의당에 입당하여 정치에 입문했으며, 신한국당 소속으로 15대 총선에 당선(서울 성북구 을)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32] 장남 은희은(殷熙元)과 차남 은희준(殷熙俊)은 1950년 6.25 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했으며, 장녀 은봉남(殷鳳男)[54]은 구미, 차녀는 대구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33] 박정희 집권시 청와대 경호실에 근무, 은퇴 후 1980년 4월 서울 중구 장충동에서 외국인 전용 관광호텔을 준공하여 운영.[34] 2018년 9월 5일 사망.[35] 친자매 듀오 그룹 릴리시스터즈의 언니 김성아. 본명은 김금자다.[36] 전처 김연순(金蓮順) 사이에선 2남 3녀 5남매를 두었다.[37] 기계식 시계이기 때문에 오버홀을 제때 해주지 않으면 망가지기 쉬워서 있던 물건마저 고장나 폐기되고 있다는 듯 하다.[38] 근데 아무리 박정희빨이라고 해도 대통령에 국회의원 다선이 아무나 하는것도 아니고,오히려 부모로써는 크게 성공했다고 보는 게 맞다.어차피 박근혜는 출소한다고 해도 더 이상 정치나 돈에 미련도 없을 것인 데다가 지지세력도 진짜 자기 일가친척조원진 등, 정말 쥐어짜봤자 고작 은지원 정도로 정말 극소수에 불과하므로 사고도 칠 테니.[39] 과거 몰래 충무공의 유물을 팔아 치우려 했던 전적이 있다.[40] 그가 태어나서 자란 동네인 상모사곡동을 지나간다![41] 동백아가씨가 금지곡이 되었을 때 이미자를 불러서 직접 부르게 하였다고 한다.[42] 1961년 말 외무부장관 사임 후 신민당 당수를 역임하는 등 야당 인사로 돌아섰다.[43] 기묘하게도 타카기의 성우 타카하시 리에가 맡은 캐릭터 중 【최애의 아이】호시노 아이가 있는데, 후술하듯이 호시노 아이와 박정희가 비슷한 면이 많다.[44] 공통점은 대략 한때 자신을 추종하던 자(김재규/스가노 료스케)에게 살해당했고, 죽기 직전 '사랑해'(한국: 라나에로스포의 노래 사랑해(베댓)라는 말을 남겼고, 아들과 딸(아들: 박지만, 딸: 박근혜, 박근령/아들: 호시노 아쿠아마린, 딸: 호시노 루비)이 있고, 자식이 자신과 같은 직업(박근혜: 대통령/호시노 아쿠아마린, 호시노 루비: 아이돌)을 선택했고, 별이 2개 있다(소장, 두 눈에 별)는 것 등이 있다. 또 기묘하게도 아이의 성우 타카하시 리에가 맡은 캐릭터 중 타카기 성씨를 가진 사람이 있는데 박정희의 일본식 이름도 타카기 마사오고, 두 타카기 다 高木이다. 심지어 딸이 칼 테러를 당했다는 것까지 닮았다![45] 다른 남성 대통령들은 모두 자기 세대 평균보다 컸고, 노무현(168cm)이 평균 정도였다. 박정희의 장녀이자 역대 유일한 여성 대통령인 박근혜1950년대생 한국 여성치곤 큰 편으로 동년배 여성 대비 6cm 정도 큰 162cm이다.[46] 사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전 세계 국가 지도자 중 단신이었던 사례는 적은 편으로 평균 이상의 키를 가진 사람이 훨씬 많았다. 봉건 사회에선 잘 먹고 자란 상류층 출신이 국가 지도자가 되는 경우가 절대다수였으니 당연히 키가 클 수 밖에 없었고, 민주 사회에선 유권자들이 대체로 체격이 좋은 후보에 대해 더 좋은 이미지를 갖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처럼 마초 성향이 강한 나라일수록 더욱 그러한데,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힐러리 클린턴 후보의 키는 167cm로 1940년대생 여성으로선 장신이었지만, 상대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의 키가 무려 192cm였기에 미국 내에서 '힐러리는 폼이 안 산다. 키가 큰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제법 있었던 것이 그 일례다. 권위주의 국가에서도 예외는 아닌데, 김정일·김정은 부자나 블라디미르 푸틴처럼 단신 콤플렉스가 있는 독재자들도 키높이 구두를 애용할 만큼 키가 더 커 보이기 위해 애쓰는 것만 보아도 사람들이 키 큰 지도자를 더 선호한다는 것은 명백하다.[47] 마찬가지로 대머리라는 두드러진 외모적 특징을 갖고 있는 전두환소수의 지지자들에겐 '탈모에도 개의치 않고 당당하다'는 평을 받았지만, 대다수 국민들에겐 그저 좋은 까임 소재에 불과했다.[48] 다만, 구글 검색 결과 나온 신장 수치는 그저 알고리즘에 따라 나온 것이기에 정확한 자료는 아니다.[49] 2020년대 기준으로도 육영수는 20~30대 여성 평균(161~162cm)보다 훨씬 큰데, 저 시대엔 모델이나 농구·배구선수 수준이었을 것이다.[50] 그러나 나폴레옹은 당시 프랑스인 평균 키(164cm)보다 4cm나 더 컸다. 다만 18세기 프랑스의 징병검사 기록에 따르면 귀족이 대부분이었던 장교층의 평균 키는 174.6cm였고, 프랑스 상류층의 평균 키는 전체 평균보다 7cm 높은 171cm 정도였다는 통계를 볼 때 나폴레옹의 키는 본인이 소속된 계층 내에서는 작았던 것이 맞다.[51] 20대 초반까지 키가 크는 경우도 제법 있으나,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크더라도 1~2cm 정도에 그친다.[52] 직립보행을 하는 인간의 특성상 나이가 듦에 따라 50대 이후엔 키가 2cm 가량 줄어드는 것이 일반적인데, 10.26 사건 당시 박정희는 60대 초반이었으므로 156cm는 노화로 인해 줄어든 수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젊은 시절 키는 158cm 정도로 추측할 수 있다.[53] 2020년대를 기준으로 하면, 170cm에 근소하게 못 미치는 사람이 자신의 프로필 키를 174cm로 적어놓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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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위 부문에서 언급했던 박정희 자신보다 열흘 더 빨리 태어났다는 동갑내기 조카딸. 그래서 은지원과는 61살 차이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