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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국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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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대통령기.svg 대한민국 여당
민주자유당
(1990.1.22.~1992.10.5.)
(1993.2.25.~1995.12.6.)
신한국당
(1995.12.6.~1997.11.7.)
새정치국민회의
(1998.2.25.~2000.1.20.)
민주자유당신한국당한나라당
신민당
(개별 합류)
국민신당
무정파전국연합 무당파국민연합
(개별 합류)
파일:신한국당 당기.svg
신한국당
영문명<colbgcolor=#fff,#1F2023>New Korea Party (NKP)
한문명 新韓國黨
창당일1990년 1월 22일 (민주자유당)
당명 변경1995년 12월 6일 (신한국당)
해산일1997년 11월 21일
(통합민주당과 합당, 한나라당 창당)
중앙당사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 18
(여의도동, 아시아원빌딩)
총재이회창 / 초선 (15대)
대표위원이한동 / 5선 (11-15대)
원내총무목요상 / 3선 (11·12·15대)
사무총장김태호 / 3선 (12·13·15대)
정책위의장이해구 / 3선 (13-15대)
대통령/명예총재김영삼[1]/ 제14대 (1995.12.6.~1997.11.7.)
의석 수
152석 / 298석 (한나라당 창당 직전)
당 색
파란색 (#003990)
정책 연구소여의도연구소
국제 조직

1. 개요2. 상세3. 강령과 정책4. 상징5. 당가6. 역대 전당대회7. 역대 지도부
7.1. 총재7.2. 대표위원7.3. 원내총무7.4. 사무총장
8. 출신 대통령9. 역대 선거 결과
9.1. 국회의원 선거9.2. 재보궐선거
10. 비판11. 관련 문서12.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파일:김영삼_신한국.jpg
1995년 12월 6일부터 1997년 11월 21일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의 보수정당.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이 당명을 단순 변경한 보수정당이다. 실질적으로 민주자유당 법인은 1990년 1월 22일부터 1997년 11월 21일까지 7년 10개월간 존속했다.

보수 정당 역사상 손꼽힐 만큼 개혁적이었으며, 대구/경북에서 가장 외면받았던 보수정당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문민정부가 PK만 편애하고 TK를 홀대한다는 불만과[2][3] 신한국당이 TK 출신이 대부분인 5공, 6공 시절의 군인 출신 정치인들을 숙청한다는 불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여파로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TK에서 자유민주연합무소속 후보들이 약진하는 돌풍이 일어나기도 했다.[4] 하지만 5공, 6공 출신의 인사들을 밀어낸 자리에 신세대 정치인들을 대거 공천해서 당의 분위기를 바꾸는 데 성공했고 이때 당선된 초, 재선의원들 중 상당수가 중량감 있는 정치인으로 자라나면서 보수정당이 정권을 빼앗아오는 데 성공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러나 1997년을 전후로 해서 1996년 연말에 일어난 국회 크리스마스 노동법 날치기,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인 차남 김현철이 비리에 연루되어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 여파가 IMF 외환위기까지 이어지면서 문민정부와 신한국당의 이미지는 상당히 실추된다. 결정적으로 신한국당과 통합민주당이 합당하면서 새롭게 총재직에 취임한 민선 초대 서울특별시장 출신 조순에 의해 한나라당이라는 이름으로 창당하였다.

참고로 김영삼은 1997년 대선 직전 신한국당을 탈당했고, 이후 쭉 무소속으로 지냈다. 후신 정당인 한나라당에는 한 번도 몸 담은 적이 없는데, 이미 정계은퇴를 한 지 오래되기도 했고 또한 대선 과정에서 자신과 크게 갈등을 빚었던 이회창 때문에 입당하는 것이 껄끄러운 상황이기도 했다.

당시 홈페이지 도메인은 'www.nkptel.or.kr'[5], PC통신(신한국텔) 접속 명령어는 'go nkptel'이었다.

2. 상세

가장 짧게 존속했던 여당의 당명 가운데 하나로, 비슷한 예로는 열린우리당(3년 9개월), 대통합민주신당(6개월)이 있다. 그런데 대통합민주신당은 사실 대통령이 입당한 적은 없어서 엄밀한 의미의 여당이라고 하긴 어려우므로, 신한국당이 '가장 단명한 대통령 소속당명'이라 볼 수 있다.

김영삼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문민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도 여당인 민주자유당의 다수파는 여전히 민주정의당 출신의 민정계였는데[6], 김영삼은 김문수, 이재오민중당 출신들을 영입하며 민주계의 세를 강화하는 한편, 민정계와 공화계 의원들은 민자당 내에서 서서히 외곽으로 밀려나다가 1995년 초 김종필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며 공화계 의원들과 일부 민정계 의원들은 탈당했다. 1995년 12월 김영삼은 5.18 특별법을 제정하여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12.12 군사반란 가담자들을 전격 구속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노태우와 함께 만들었던 민주자유당의 간판을 내려버리고, 김영삼의 대선 슬로건이었던 신한국 창조에서 따온 신한국당으로 이름을 고치고 로고 역시 교체했다. 또한 중도 노선으로 방향을 돌리는데 이는 당시 야당이던 새정치국민회의도 취한 태도였다. 어찌보면 좋은 현상일지도 모르나 이 현상은 철새 국회의원의 대량 생산 원인이 되었다.[7]

1996년 실시된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수도권에서 선전했음에도[8][9] 전두환, 노태우 구속의 역풍을 맞고 대구광역시, 경상북도[10]에서 자유민주연합무소속에게 대거 의석을 내주는 바람에 과반수 확보에 일단 실패했으나, 선거 후 자민련과 민주당, 무소속 의원들을 끌어와 과반수를 확보하였다.[11]

1996년 12월 크리스마스 노동법 및 안기부법 "날치기"(직권상정) 파동[12]1997년 외환 위기로 지지율이 떨어지자,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1997년 11월 통합민주당과 합당하여 한나라당이 된다.

15대 대선에서는 경선을 통해 대선 후보를 선출했었다. 이 때 선출된 후보가 이회창. 당시 9명의 후보가 치열한 각축전을 벌인다 하여 9룡으로 불렸다. 마침 명사극 용의 눈물이 인기리에 방영될 때라서, 이들을 다룬 만평 중 용의 눈물 버전으로 된 9룡 풍자도 꽤나 등장했었다.

3. 강령과 정책

강령
1. 우리는 인간의 존엄에 기초하여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며 정치개혁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여 맑고 깨끗한 새로운 정치문화를 창출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를 정착∙발전시키고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주민자치생활정치를 실현한다.
2. 우리는 자율과 협동, 창의와 공정을 바탕으로 경제정의를 실현하고 민생안정을 기하며, 무한경쟁시대에 대응하여 국가경쟁력을 강화함으로써 ‘튼튼한 국민경제’를 달성한다.
3. 우리는 온 국민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고 성장과 복지의 조화를 통해 건강한 복지사회를 건설하며 참여와 협력의 공동체적 노사관계를 정착시켜 산업평화를 이룩한다.
4. 우리는 교육개혁 기회균등을 보장하고 지속적인 교육개혁으로 교육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높이며 미래를 이끌어 갈 도덕적이고 유능한 인재를 육성하고 민족문화의 정통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민족문화를 창달하여 인류문화 발전에 기여한다.
5. 우리는 쾌적한 환경을 향유할 인간의 기본적 생존권을 보장하며 환경친화적인 자원절약형 사회를 지향하여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건강한 녹색사회를 실현한다.
6. 우리는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영역에서 여성의 참여를 확대하여 국가발전에 여성의 잠재능력을 적극 활용하고 남녀가 평등하게 대우받는 사회를 이룩한다.
7. 우리는 민족이 공영과 공동발전을 적극 추진하여 평화적인 민족통일을 이룩하며 자유적 안보체제를 확립하고 능동적인 외교를 펼침으로써 세계의 중심국가로 도약하고 국제적 협력과 노력에 적극 참여하여 세계평화와 인류의 번영에 기여한다.
기본정책

21세기 새로운 정치 구현
1. 깨끗하고 도덕적인 정치문화 창출
2. 경쟁력 있는 생활정치 추구
3. 행정의 선진화와 사회안정 확립
4. 세계화와 지방화를 선도
5. 대통령중심제에 의한 국민통합의 화합정치 지향
6. 통일에 대비한 새로운 정치세대 육성

활력있고 정의로운 선진국민경제 건설
7. 국가경쟁력 강화
8. 경제정의 구현
9. 새로운 세계경제질서에 능동적으로 대응
10. 중소기업을 중점적으로 육성∙발전
11. 농어민의 삶의 질을 향상
12. 주민생활의 안정과 질적 향상을 기함
13. 교통난을 완화
14. 정보화사회 촉진
15. 국토의 균형발전과 효율적 이용
16. 우주와 해양 개척

건강한 복지사회 실현
17. 사회보장제도를 확대∙발전
18. 노인 및 장애자복지 증진
19. 저소득층의 최저생활수준 보장
20. 공동체적인 노사관계 정착
21. 열심히 일하는 근로자가 우대받는 사회 구현
22. 국민건강 증진과 건전한 여가생활 영유

지속적인 교육개혁과 새로운 민족문화 창달
23. 창의적인 인간교육 실천
24. 쾌적한 교육환경 조성
25. 민족문화 창달로 국민의 문화생활수준 향상
26. 청소년을 밝고 건강하게 키움
27. 사회공동체의식 확산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조성
28. 신선하고 깨끗한 공기 회복
29. 맑고 안전한 물 공급
30. 폐기물 통합관리체계 강화
31. 환경보존과 경제발전의 조화 추구
32. 지구환경보존을 위한 국제협력에 적극적으로 참여

여성참여 확대와 남녀평등사회 실현
33. 여성들의 정치 및 행정참여 확대
34. 성차별적 고용관행을 타파하여 여성근로자의 권익과 평등 보장
35. 양성평등 의식과 문화 정착

민족통일과 세계평화 실현
36. 남북한간의 상호신뢰 기반 구축
37. 민족공동체 구성과 조국통일 실현
38. 적극적 외교로 세계평화와 인류복지 증진에 기여
39. 강력한 국가안전보장체제 확립
40. 해외동포 권익보호를 강화하고 한민족 역량 결집

4. 상징

파일:신한국당로고발표.png
▲ 신한국당 로고를 소개하는 강삼재 사무총장과 김윤환 대표위원(1995.12.16.)

웹상에 돌아다니는 #또다른 로고 이미지도 있는데, 실제 사용된 로고와는 곡선이 사뭇 다르다.

5. 당가


듣기
후렴구만 바꾸었을 뿐 민자당 시절과 가사가 동일하다.
(1절) 새시대 새역사의 아침을 열고
우리는 달린다 세계로 미래로

개혁의 큰 물결로 꿈과 희망을
민주 복지 통일의 선봉에 서서
세계속의 한국을 이끌어 나가자

(후렴) 아 세계로 미래로 힘차게 가는 그 길
그 길에 우뚝 선 신한국당

(2절) 새시대 새역사의 아침을 열고
우리는 뭉쳤다 하나로 뭉쳤다

희망의 새 정치로 더 크고 넓게
자유 평화 통일의 역군이 되어
세계속의 한국을 드높여 보자

6. 역대 전당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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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역대 지도부

파일:신한국당 로고.svg 파일: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총재 및 대표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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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재
<rowcolor=#003990> 초대
김영삼
제2대
이회창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대표위원
<rowcolor=#003990> 초대
김윤환
제2대
이홍구
제3대
이회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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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섭
제4대
이회창
제5대
이한동
}}}}}}}}}}}}}}}

7.1. 총재

7.2. 대표위원[15]

  • 1대 : 김윤환 (1995.12.6 ~ 1996.5.6)
  • 2대 : 이홍구 (1996.5.7 ~ 1997.3.12)
  • 3대 : 이회창 (1997.3.13 ~ 1997.6.30)
  • 대표위원 서리 : 이만섭 (1997.7.1 ~ 1997.7.20)
  • 4대 : 이회창 (1997.7.21 ~ 1997.9.29)
  • 5대 : 이한동 (1997.9.30 ~ 1997.11.21)

7.3. 원내총무

파일:신한국당 로고.svg 파일: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원내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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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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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서정화
제2대
서청원
제3대
박희태
제4대
강재섭
제5대
목요상
}}}}}}}}}}}}}}} ||

7.4. 사무총장

파일:신한국당 로고.svg 파일: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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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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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강삼재
제2대
박관용
제3대
강삼재
제4대
김태호
}}}}}}}}}}}}}}} ||

  • 1대 : 강삼재 (1995.12.6 ~ 1997.3.14)
  • 2대 : 박관용 (1997.3.15 ~ 1997.8.6)
  • 3대 : 강삼재 (1997.8.7 ~ 1997.10.24)
  • 4대 : 김태호 (1997.10.25 ~ 1997.11.21)

8. 출신 대통령

대한민국 대통령
파일:대한민국 대통령 문장.svg
이름 임기 선출 방식 정당
취임일 퇴임일
7 파일:Kim_Young-sam_presidential_portrait.jpg
파일:external/static.tumblr.com/purple_pixel.png
김영삼
(1927 ~ 2015)
14 1993년 2월 25일 1998년 2월 24일 1992년 대선
직선 42.0%
민주자유당 (1993 ~ 95)
신한국당 (1995 ~ 97)
무소속 (1997 ~ 98)

9. 역대 선거 결과

9.1. 국회의원 선거

연도 선거명 지역구 (비율) 비례대표 (득표율) 총 의석 (비율) 결과
1996년 15대 121 / 253 (47.8%) 18 / 46 (34.5%) 139 / 299 (46.5%) 원내 1당
파일:15대 전국구.jpg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선거 포스터 (1996)

9.2. 재보궐선거

연도 국회의원 광역단체장 기초단체장 광역의원 기초의원
1996년 4월 3 / 9
1996년 6월 0 / 1
1996년 6월 2 / 2
1996년 8월 0 / 1 0 / 1
1996년 9월 0 / 1 2 / 4
1996년 9월 0 / 2
1996년 10월 0 / 2
1996년 11월 0 / 1
1996년 11월 0 / 1
1996년 11월 1 / 1
1996년 12월 0 / 1
1997년 3월 0 / 2
1997년 3월 1 / 3
1997년 3월 1 / 1
1997년 4월 0 / 1
1997년 7월 1 / 2
1997년 9월 0 / 1

10. 비판

  • 1995년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이 발생하자 당시 신한국당 박찬종 전 의원[16]은 유세에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처벌하지 않았다면 전라도 데모대들이 국가를 위기로 빠트렸을 것"이라는 지역감정 조장 발언으로 큰 비난을 받았다.# 파문이 일자 박찬종은 "전두환, 노태우 정권의 최대 피해자가 전라도 사람들이기 때문에 한 표현이었을 뿐"라고 해명했으나#, 지역감정을 조장한 상식 이하의 망언으로 비난을 받았고 당시 5.18 민주화운동시민연합은 대국민 사과를 요구하는 등 지탄을 받았다.#
  • 신한국당은 1996년 노동법 날치기를 통해 오늘날 대한민국의 노동환경에 거대한 병폐들이 야기되는 원인이 되었다. 이들이 도입한 파견근로제도의 정착으로 비정규직 문제가 본격적으로 양산되기 시작했으며, 과시간 근로를 조장할 수 있는 탄력적 근로시간제 또한 이들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당시 직권상정 했던 시기는 시장에 고용의 탄력성이라는 효과를 통해 부실기업들의 도산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으나 야당의 보이콧[17]과 유력 인사들이 정치적으로 악용하면서 결국 원점으로 돌아간다. 이후 야당과의 영수회담을 통해 사실상 달라진 게 없는 합의안이 국회에 통과되고 외국 투자자들은 이 기간 동안 한국정부의 리스크 관리 능력에 의문을 품으며 투자금을 빠르게 회수하기 시작했다.
  • 신한국당은 1997년 대선 당시 전두환 사면을 추진하여 논란을 빚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후보가 이 전노 사면을 추진하고 전노사면에 여야 모두 찬성의사를 밝혔던 것이라 전노사면은 이미 기정사실화되었다.[20]

11.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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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1948.7.~1951.12.)자유당 (1951.12.~1960.4.)
한국민주당 (1948.7.~1949.2.)
민주국민당 (1949.2.~1949.11.)
대한국민당 (1949.11.~1951.12.)
장면 내각 민주당 (1960.8.~1961.5.)
박정희 정부 민주공화당 (1963.12.~1979.10.)
유신정우회^[1]^ (1973.3.~1979.10.)
전두환 정부 민주정의당 (1981.1.~1988.2.)
노태우 정부 민주정의당 (1988.2.~1990.1.)민주자유당 (1990.1.~1992.10.)
문민정부 민주자유당 (1993.2.~1995.12.)신한국당 (1995.12.~1997.11.)
국민의 정부 새정치국민회의 (1998.2.~2000.1.)새천년민주당 (2000.1.~2002.5.)
자유민주연합 (1998.2.~2001.9.)
민주국민당 (2001.4.~2001.9.)
참여정부 새천년민주당 (2003.2.~2003.9.)열린우리당 (2004.5.~2007.2.)
이명박 정부 한나라당 (2008.2.~2012.2.)새누리당 (2012.2.~2013.2.)
박근혜 정부 새누리당 (2013.2.~2017.2)자유한국당 (2017.2.~2017.3.)
문재인 정부 더불어민주당 (2017.5.~2022.5.)
더불어시민당^[A]^ (2020.3.~2020.5.)
윤석열 정부 국민의힘 (2022.5.~현재)
국민의미래^[A]^ (2024.2.~2024.4.)
[1] 대통령이 임명하는 국회의원으로 구성되어 있는 교섭단체.
[A] 비례대표 득표용 위성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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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WTO 가입 · 도농복합시 제도 실시 · 쓰레기 종량제 실시 · KEDO 설립 · 영광 원전 3, 4호기 가동 · 정보통신윤리위원회 출범 ·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 · 1995년 한국통신 파업 사태 ·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 지방자치제 전면 실시 · 부동산 실명제 실시 · 고용보험제 실시 · 씨 프린스호 좌초사고 · 무궁화 1호 위성 발사 · 조선총독부 철거 · 경기여자기술학원 화재 · 중앙고속도로 일부 개통 · 광주비엔날레 개최 · 노태우 비자금 사건 · 앙골라 평화유지군 파병 · 부여 무장공비 침투사건 · 민주노총 출범 · 도로명주소 시범사업 · 금산분리 도입 ·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 · 5.18 특별법 국회 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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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당산철교 철거 · 화성 해안초소 K2 소총 사취 사건 · 신창원 탈옥 사건 · 한보 사태 · 1997 무주·전주 동계 유니버시아드 · 황장엽 망명 사건 · 이한영 암살 사건 · 청소년보호법 제정 · 이태원 살인 사건 · 공덕동 도시가스 폭발 사고 · 청주국제공항 개항 · 이종권 치사 사건 · 이석 치사 사건 · 울산 광역시 승격 ·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 · 1997년 재보궐선거 · 청소년보호법 파동 · 박초롱초롱빛나리 유괴 살인 사건 · 한일어업협정 · 최정남·강연정 부부간첩 사건 · 외환 위기 발생 · IMF 구제 금융 신청 · 대구 도시철도 1호선 개통 · 제15대 대통령 선거 · 전두환, 노태우 특별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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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민자당계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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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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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 총재직도 겸임했는데 후신인 한나라당 시절인 2002년 대선 앞두고 당총재직이 폐지되기 전에는 특히 여당 총재직이 현직 대통령이 당연직으로 겸임했다. 참고로 명예총재직은 1997년 9월 30일부터 탈당 당일이었던 1997년 11월 7일까지 역임했다.[2] TK의 반 YS 정서는 이미 민주자유당 시절부터 김영삼이 당을 장악하고 치른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일국민당과 무소속 후보가 약진하며 드러나기 시작하여 문민정부 출범 이후 그 현상이 두드러져 대구광역시에서는 한 번도 민주자유당이 지방선거와 재보궐선거에서 승리하지 못했으며 경주시에서는 1994년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당 이상두 후보가 당선되기도 했다.[3]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 당시 YS의 망언도 한 몫 했다. 이로 인해 참사 직후 치러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자유당 대구광역시장 후보 조해녕4위로 참패했다.[4] 특히 대구광역시에서는 전체 13석 중 8석에서 자유민주연합 후보가 당선됐다. 다만 자민련이 1당을 차지한 대구와 달리 경상북도는 신한국당이 1당을 차지했다.[5] 당연히 현재는 접속이 불가능하다.[6] 다만 14대 대선 경선에서 김영삼을 지지한 이른바 민주계로 분류되는 민정계 인사들도 있었다.[7] 양당이 서로 중도화하면서 성향 차이가 거의 없어지다보니 소속 정치인들 또한 당적 변경에 거리낌없어지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8] 모래시계 검사로 떴던 홍준표, 민중당 출신의 이재오, 김문수 등 정치 신인들을 대거 공천하고 야권이 새정치국민회의통합민주당으로 분열한 영향이 컸다. 대략 수도권에서 30여개의 선거구가 야권 분열로 승패가 뒤집혔으며, 심지어 야권 단일화를 가정한 최상의 시나리오에서는 야당에게 1당을 내줄 수도 있었다.[9] 이렇게 개혁 공천으로 영입되어 당선된 인사들을 YS키즈라고도 칭한다. 이때 당선된 초선의원들이 정치적으로 성장하며 신한국당의 후신인 한나라당은 야당 시절에도 정국을 주도했고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정권을 탈환한다.[10] 다만 경상북도는 신한국당이 1당을 차지했다.[11] 이 때문에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를 증오하게 되었으며 훗날 김대중과의 관계가 틀어졌음에도 이회창에 대한 적개심을 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불과 2년 만에 김대중 정권이 거꾸로 한나라당(신한국당의 후신) 의원 영입을 통해 정계개편을 인위적으로 감행할 때는 이에 반발하던 하순봉 한나라당 원내총무를 향해 구천서 자민련 원내총무가 "우리는 원금 받으려면 아직 멀었다."라고 일갈하는 굴욕적인 상황도 있었다. 당시 MBC 뉴스데스크 보도[12] 그냥 "날치기"라고 하면 와닿지 않을지 모르겠으나 비정규직(변형근로제) 및 파견근로제를 골자로 한 새 노동관계법, 그리고 불고지죄 및 찬양고무죄 수사 부활을 골자로 한 새 안기부법이 이 때 통과되었다. 당시 안기부장은 하나회를 분쇄해버린 권영해. 대신 복수노조 허용이란 순기능이 있었다.[13] 1995.12.6.~1997.9.29. 제14대 대통령 겸임, 1997.9.30.~1997.11.7. 명예총재.[14] 1997.9.30.~11.21. 제15대 대통령 선거 신한국당 후보.[15] 집단지도체제의 대표최고위원이 아니라 총재 단일지도체제 아래 속한 '대표위원'이다.[16] 1회 지선에서 서울특별시장에 출마하며 의원직을 사퇴한 상태였다.[17] IMF의 요구이기는 했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당시 이를 비판했던 야권 인사들 또한 본인들이 집권하여 기득권층이 되자 이런 막장스런 노동제도들을 그대로 유지한 채 정권을 이어갔다. IMF는 진즉에 끝났지만 제도들은 없어지지 않았다. 지금 까지 이런 기조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18] 참고로 이 사고로 인해 새정치국민회의신기하 의원이 사망하였다.[19] 직접적인 원인은 그 유명한 IMF 사태다.[20] 전노 사면에 대한 청와대 정치권 반응 1997.12.21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