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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2대 특임장관 | |||
<colbgcolor=#232f20><colcolor=#fff> 제8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이재오 李在五[3]伍였으나 동사무소 직원이 호적을 만들 때에 '뭐 그렇게 어려운 한자를 쓰냐'며 李在五로 호적에 올라가게 되어 지금에 이른다.] | Yi Jae-oh | |||
출생 | 음력 1945년 1월 11일[4] ([age(1945-01-11)]세) | ||
강원도 강릉군 묵호읍 부곡리[5] | |||
본적 |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답곡1리 174번지[6] | ||
자택 | 서울특별시 은평구 구산동 | ||
호 | 남산(南山)[7] | ||
본관 | 재령 이씨[8] | ||
현직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국민의힘 상임고문 국민의힘 서울특별시당 고문 건국대학교 석좌교수 창릉천 통합하천사업 자문단 위원장 | ||
재임기간 | 제2대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 (장관급) | ||
2009년 9월 30일 ~ 2010년 6월 30일 | |||
제2대 특임장관 | |||
2010년 8월 30일 ~ 2011년 9월 19일 | |||
제8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 |||
2023년 7월 5일 ~ 현직 | |||
링크 | [9]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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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장녀 이고은[10], 차녀 이은별, 아들 이민호[11] | ||
학력 | 석보국민학교[12] (35회 / 졸업) 석보중학교[13] (졸업) 영양고등학교 (졸업) 중앙대학교 경상대학 (농촌사회개발학 / 중퇴) 중앙농민학교 (농업경영학 / 학사)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학[14] / 석사[15]) 중앙대학교 정경대학 (경제학 / 학사) | ||
병역 | 육군 제5보병사단 병장 만기전역 (1966년 4월 23일 ~ 1969년 4월 5일) | ||
종교 | 개신교 (예장합동) | ||
소속 정당 | |||
의원 선수 | 5 | ||
의원 대수 | 15, 16, 17, 18, 19 | ||
약력 | 포천이동중학교 교사 제2대 민주수호청년협의회 회장 장훈고등학교 교사 서울 대성고등학교 교사 송곡여자고등학교 교사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사무국장 국제사면위원회 한국위원회 사무국장 민중당 사무총장 제15대 국회의원 (서울 은평구 을 / 신한국당) 한나라당 원내부총무 한나라당 교육위원회 위원장 한나라당 제1사무부총장 제16대 국회의원 (서울 은평구 을 / 한나라당) 한나라당 원내총무 한나라당 사무총장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16] 제16대 국회 후반기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 제17대 국회의원 (서울 은평구 을 / 한나라당) 한나라당 원내대표 한나라당 수석최고위원 중앙대학교 행정대학원 객원교수 중국 베이징대학 국제전략연구중심 방문교수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교 국제관계대학원 겸임교수 중앙대학교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제2대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 (이명박 정부) 제18대 국회의원 (서울 은평구 을 / 한나라당) 제2대 특임장관 (이명박 정부) 제19대 국회의원 (서울 은평구 을 / 새누리당) 새누리당 상임고문 늘푸른한국당 공동창당준비위원장 늘푸른한국당 대표 늘푸른한국당 제19대 대통령 선거 후보 자유한국당 상임고문 미래통합당 상임고문 문재인하야범국민투쟁본부 총괄본부장 4대강보 해체 저지 범국민연합 공동위원장[17] 비상시국국민회의 상임의장 비상시국국민회의 상임대표 국민통합연대 중앙집행위원장 국민의힘 상임고문 국민의힘 서울특별시당 고문 건국대학교 석좌교수 제8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윤석열 정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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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정치인, 사회운동가. 5선 국회의원 출신이다.운동권, 노동운동가 출신으로 민중당 출신이었으나 낙선 이후 YS의 신한국당에 입당하였고, 이후 국회의원에도 당선되어 MB정부 실세로 친이계 좌장을 지냈다. 초기부터 쓴소리하다 날아간 정두언이나 후기에 부패 스캔들로 날아간 이상득과 달리 지금도 MB 곁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허나 그러다 보니 대표적으로 호불호가 갈리는 MB 시절 정책이랄 수 있는 대운하와 4대강 정비 사업 옹호 때문에 지금도 진보 진영 쪽에선 상당한 비판을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과거 운동권 전설이었던 이력과 여전히 버리지 않은 개혁적인 성향[18], 그리고 친박 세력과 적대적이라는 점 때문에 나름 좋게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19] 실제 박근혜와 대립각을 세워 친박 진영에서도 곱게 보진 않는 인물이다. 2024년 현직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국민의힘 상임고문이다.
2. 생애
음력 1945년 1월 11일(양력 2월 23일), 강원도 강릉군 묵호읍 부곡리(현 강원특별자치도 동해시 부곡동)에서 아버지(1907년생)[20]와 어머니 한양 조씨(1909년생) 사이에서 4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전기기술을 배우고 돌아와 강원도 삼척군 탄광지대에 정착해 전기기사로 일했다.8.15 광복 후 1948년 아버지가 근무하던 탄광이 문을 닫자 본적지인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답곡1리 174번지로 가족과 함께 이주했고, 이곳에서 성장해 영양 석보국민학교(35회), 석보중학교, 1963년 영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석보중학교 1학년 때 4H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석보면 4H클럽연합회 회장을 지냈다. 영양고등학교 1학년 재학 중이던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난 뒤 영양고등학교 교장이 경상북도교육감에 밉보여 시골 중학교로 발령나자, 이에 분개하여 영양군 관내 중·고등학교 재학생들을 모아 교장 전근반대 시위를 주도했고, 이 때문에 경찰서 유치장에 20일간 갇히기도 했다. 영양고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4H 영양군 회장을, 3학년 때 경상북도지부 부회장을 지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영양군청에 공무원으로 특채되어 농작물 재배기술 보급 및 관리를 맡아보았고, 박영준(朴永俊) 당시 영양군수로부터 미국 해외연수를 제안받기도 했지만,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교에 진학한 친구들이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에 내려온 것을 보고 문득 농촌운동을 하더라도 좀 더 배우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대학교 진학을 결심했다. 이에 1963년 9월 공무원을 사직하고 1964년 중앙대학교 경상대학 농촌사회개발학과[21](64학번)[22]에 4년 전액 장학생으로 수석합격하였다.
입학 직후 농촌사회개발학과 대표를 맡으면서 학생회 활동에 참여했고, 4H 전국연합을 결성하고 농어촌 사회연구회를 결성했다. 그 뒤 6.3 항쟁이 일어나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중앙대학교에서도 학생회 간부들이 모두 체포되어 학생회가 마비되자 '한일회담반대 구국 투쟁위원회'라는 임시 학생기구가 결성되었다. 이에 가입해 6.3 항쟁에 참여하게 되었고, 학과 대표 및 경상대학 대의원으로서 시위의 선두에 섰다.[23] 2학년 때이던 1965년 8월 14일 국회에서 한일기본조약 비준안이 통과되자, 중앙대학교에 '중앙대학교 비준 반대 전국학생연합'이 결성되었고, 이에 가입해 중앙대학교 구국투쟁 위원장으로서 한일협정 반대투쟁을 주도했다. 이후 학생군사교육단에 응시하였고, 위수령이 내려진 뒤 학생군사교육단 합격자 발표를 확인하러 갔다가 중앙대학교 111학생군사교육단 연대장으로부터 학생군사교육단에 합격은 했으나 수배 중이라는 사실을 들었고, 농민운동가 서정(墅丁) 김동혁(金東赫)의 도움으로 전라남도 광양군(현 광양시) 옥룡면 동곡리 동동마을과 용곡리 옥동마을을 전전하며 피신했다. 그러던 1965년 12월 친구 집에서 체포되어 29일간 구류를 살았다. 그 직후 중앙대학교로부터 제적 처분을 받았다.
이후 학과 교수 등의 권유로 1966년 3월 중앙농민학교 농업경영학과(66학번)에 입학하였고, 얼마 안 가 강제징집되어 1966년 4월 23일 육군에 입대하였다. 병적기록표 상으로는 제36보병사단 소속 정비병(공병장비정비·수리 특기)으로 복무한 것으로 나타나나 실제로는 경기도 포천군(현 포천시)에 있던 제5보병사단[24] 공병대대에서 2·4종 보급병으로 복무했다. 군 복무 시절 베트남 전쟁에 차출 명령을 받기도 했으나 거부했다.
그 뒤 주둔지 관할에 있던 이동삼육고등공민학교가 포천 이동중학교로 승격되는 과정에서 교사가 부족하자 제5군단의 방침으로 제3보병사단, 제5보병사단, 제8보병사단에서 복무 중이던 현역 병사를 대상으로 대민지원을 나갈 파견교사 5명을 선발하는 시험을 치렀다. 이에 응시하여 합격했고, 영외 거주를 하며 2년간 포천 이동중학교에서 국어교사로 복무했다. 이때 교사 생활을 2년간 하면서 중앙대학교 시절 교수 등의 도움으로 중앙농민학교로부터 중앙대학교에서 2학년 1학기까지 수료한 것을 인정받아 소정의 학점을 이수하여 학적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방학을 이용해 계절학기 수업을 듣고 과제를 제출하는 등 군 복무 중에도 틈틈이 학점을 이수했다.[25]
1969년 4월 5일 병장으로 만기전역하여 병역을 마친 뒤 중앙대학교에 복학 신청을 했으나 당시 3선 개헌 등을 치른 박정희 정부에서 시대적인 이유로 복학 불허 지시가 내려졌다. 이에 어쩔 수 없이 학점을 유지하던 중앙농민학교[26]를 마저 다니고 1970년 2월 졸업했다. 이후 1971년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국어교육 전공으로 교육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71년 4월 21일 김지하·김정남·정수일[27] 등과 함께 민주수호청년협의회를 결성하였고, 이후 백기완에 이어 제2대 회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되어 모든 사회단체가 해산되자 장훈고등학교 국어교사에 부임했다. 같은 해 12월 유신체제 반대 시위에 가담했고, 이에 수업 중에 이근안 당시 경감에 체포되어 투옥된 뒤 1973년 10월 징역 2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첫 번째 출소 후 서울 대성고등학교 국어교사로 부임해 근무하는 한편, 의식 있는 교사들을 모아 극단 '상황'을 결성하여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연극을 연출하고 평론을 썼다. 이때 교사로서 가르쳤던 제자 중 한 사람이 4선 국회의원인 노웅래이다. 그러다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오류동[28]에서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호되게 꾸짖는 단막극을 공연했는데, 내부고발로 인해 긴급조치 9호를 위반한 혐의로 체포되어 두 번째 구속을 당했다. 이후 1977년 2월 징역 2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두 번째 출소 후에는 국제앰네스티 한국사무소 사무국장을 맡았는데, 1979년 6월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조사하기 위해 경상북도 안동시로 내려가 안동댐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때 현장에 1977년 5월 28일 박근혜 당시 한국자연보존협회 총재가 세운 물고기 방생비는 크게 서 있었는데, 안동댐 건설 공사로 숨진 노동자 위령비는 훨씬 초라할 만치 작은데다가 풀숲에 가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이후 어느 특강에서 이에 대해 "이것이 10월 유신독재의 실체"라고 비판하고 그날 밤 안동시내에서 촛불시위를 주도했다. 이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면서 1979년 8월 세 번째 구속을 당했다. 이후 10.26 사건으로 긴급조치가 해제되면서 석방되었다.
그러나 극단 상황 멤버를 중심으로 당시 한국민족민주투쟁연합(약칭:한민투련)이라는 지하 조직이 결성되었는데, 이 조직 멤버 중 2명이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었다. 이 때문에 석방과 동시에 네 번째 구속을 당했고, 이에 모진 고문을 당했다. 1980년 대법원에서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송곡여자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재직했고, 1984년 특별사면으로 풀어주었다. 이후에도 계속 재야 민주화운동에 몸담으면서 1985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민족통일위원회 위원장,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 1989년 창립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약칭: 전민련)의 조국통일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이후 제1차 범민족대회를 개최했다가 이후 체포되어 다섯 번째 구속을 당했다.
이렇듯 군부 독재 시절 5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렀다.[29][30] 자그마치 10년 6개월간 옥살이를 했고 제6공화국의 노태우 정부 시절에도 사찰을 당했다. 이러니 군부독재 세력의 후예라고 할 수 있는 박근혜에게 호감을 느낄 리 만무하며, 박근혜 정부에서도 여러모로 박근혜와 친박에게 계속 적대적인 스탠스를 취하며 자신의 소신을 끝까지 주장하는 인사 중 한명이였다. 오죽하면 영화 변호인을 관람한 후 은근히 박근혜 정부를 까는 글을 SNS에 올릴 정도였으니.
이후 재심을 통해서 긴급조치 9호 위반 사건, 반공법 위반 사건, 남민전 사건과 관련해서 처벌받은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등 그의 전과 4건에 대해서 모두 무죄가 선고되었다.
3. 정치인 생활
1988년 민중의당에 입당했고[31], 1990년 노동정당인 민중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이후 사무총장에 취임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중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은평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이원형 후보에 밀려 4위로 낙선하였다. 그러다 김영삼이 이끌던 문민정부 시절이던 1994년 김문수, 이우재 등과 함께 당시 여당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였다.1994년 중앙대학교 정경대학 경제학과(64학번)에 복학하여 1996년에 입학 32년 만에 졸업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은평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이던 새정치국민회의 이원형 후보를 8.17%p 차이로 꺾고 당선되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은평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새천년민주당 이석형 후보를 9.18%p 차이로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제16대 국회에서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은평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열린우리당 송미화 후보를 2.17%p(2,541표) 차이로 꺾고 3선에 성공했다. 이후 한나라당에서 최고위원을 지냈다.
2005년 10월 28일 '한국4에이치활동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발의했는데, 이 법안은 2007년 11월 22일 '한국4에이치활동 지원법'이라는 제명으로 수정가결되었다.
2001년과 2006년 두 차례에 걸쳐 한나라당의 원내대표(원내총무)를 지냈다.[32] 2000년대의 이재오는 한나라당의 대표적인 개혁파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16대 대선과 17대 대선에서 각각 이회창, 이명박을 지지하고 지원했다. 특히 2004~2006년 사이에는 당시 한나라당의 당대표였던 박근혜와 끊임없이 대립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한나라당의 대표 비박계 인사로 여겨지기도 했다. 박근혜에게 친일청산 문제와 정수장학회 문제, 인혁당 사건 등 과거사에 대해 제대로 처리하고 넘어가라고 여러차례 비판하기도 했으며, 이에 박근혜는 대표 흔들기를 하지 말라며 응수하기도 했다. 이 후에도 이재오와 박근혜의 불편한 관계는 박근혜 정부 시기까지 계속되어, 이재오는 박근혜 정부 시절에도 대표적인 비박근혜 인사로 당내에서 활동하며 박근혜 정부에 대한 비판을 쏟아내기도 했고 이 여파로 20대 총선에서는 공천도 못 받았다.[33] 탄핵 사태로 두 사람의 불편한 관계는 정점을 찍게 되었으니.
3.1. 이명박 정부 시절
이명박 대통령과는 대학 시절 한일회담 반대 학생운동(6.3 항쟁)때부터 알고 지내다가, 6.3동지회의 전임회장과 후임회장으로 인연으로 이어지고, 15대 국회에서 같이 의정활동을 하면서 가까워졌다. 이명박이 15대 국회 첫 질문에서 낙동강과 한강을 잇는 경부운하를 언급한 것에, '형님 진짜 그거야말로 나라를 바꾸는 거다. 그러면 이걸하려면 형님이 대통령 해야 되니깐, 국회는 내가 할 테니 형님은 대통령 하시오'라고 담화를 나눴다고 한다.2007년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MB 캠프'의 좌장으로 활동하면서 캠프 내 조직과 구성원들의 인사(人事) 문제에 이르기까지 깊숙이 관여해 이명박 후보의 경선 승리를 가져온 1등 공신으로 활약했다. 당시 열심히 이상득, 정두언과 더불어 친이계의 실세였다.[34]
하지만 계파 갈등[35] 속에 치러진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한나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은평구 을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창조한국당 문국현 후보에 11.21%p 차이로 밀려 낙선했다. 이후 원외 신분이던 2009년 9월부터 2010년 6월까지 제2대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는데, 친이계 실세라서 당시 국민권익위원회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문국현이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국회의원직을 상실함에 따라 치러진 2010년 7월 재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은평구 을 선거구에 다시 출마하여 민주당 장상 후보를 18.43%p 차이로 크게 누르고 4선에 성공했으며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된지 11일만인 2010년 8월 8일 이명박 정부 제2대 특임장관에 내정되었다.
친이계 좌장으로 친박계와 다툼을 자주 벌였고, 실제 친이계가 당권을 잡은 18대 총선에선 친박계 공천학살을 주도했다는 의혹도 있다.[36] 당연히 독재자의 딸이라고 비판하는 등 박근혜와도 사이가 좋지 않아, 2012년 박근혜가 당권을 장악한 후 치러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진수희 등 자신을 제외한 측근들이 모두 공천에서 대거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다.[37] 그럼에도 자신은 본 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은평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통합진보당 천호선 후보를 1.14%p(1,459표) 차이로 꺾고 5선에 성공했다.
3.2. 박근혜 정부 시절
비박계와 손잡고 19대 국회에서 친박계의 불통, 권위주의를 비판하다가 결국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새누리당 공천에서 탈락하여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 비박계 김무성 대표가 당직인 파동까지 벌이며 은평구 을에 대해 무공천을 선언하며 당선 가능성이 높아졌고, 실제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진보 진영의 표가 분산되어 이재오 의원의 무난한 승리가 예상되었다. 하지만 정의당의 김제남 의원이 더불어민주당의 강병원 후보와 단일화를 하면서 분위기가 전환되었고, 본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강병원 후보에 7.22%p 차이로 밀려 6선 도전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총선 이후 새누리당에 복당하지 않고 최병국 전 의원과 함께 중도 신당 창당 작업에 착수했다.[38]
2016년 말 박근혜 정부 최악의 오점으로 남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고 11월 20일 검찰이 헌정 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을 피의자로 규정하자, 21일 박근혜 대통령의 검찰수사 전면 거부와 관련 "국민들은 대통령을 뽑을 권리와 의무도 있지만, 범죄자인 대통령을 끌어내릴 권리와 의무도 있다"며 맹디스를 날렸다. 그러면서 "범죄자를 대통령으로 받들고 그 하수인이 된 새누리당도 공범이다. 더 이상 당이 존립할 근거가 없다. 즉각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불어 이날, 이명박도 "참담한 심정이다. 박근혜는 민심에 따라 당장 퇴진해야 한다."라며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다.
3.3. 제19대 대선 출마
2017년 1월 11일, 늘푸른한국당을 창당하였다.[39] 정운찬을 늘푸른한국당 대선주자로 세우는 것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2017년 3월 20일 본인의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였다.대선 후보 등록 후 2017년 4월 17일 사진처럼 복면을 하고 나와서 대선 후보간 복면 토론을 제안하였다. 이재오가 친이계 및 정치계의 중진급 인사이기는 하나 아직 늘푸른한국당이 원외 정당인 데다가 역대급의 사태가 터져 보수계열 정당의 당선 확률 자체가 희박한 만큼 차차기 친이계 재건 및 대권을 노린 대선 출마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4월 24일 군소후보 토론회에서는 그래도 정치계에서 잔뼈가 굵었던 사람답게 9명 중 제일 정상적이라는 평가[40]를 받고 있다. 오영국 같이 정말 허황된 공약들을 내세우는 군소후보들과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체계적으로 짜인 공약들+진보적 통일관은 그가 괜히 5선 의원에 특임장관까지 역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한다. 실제로 이 토론에서의 승자는 이재오라는 게 중론이다.[41] 다만 특유의 쉰 목소리 때문인지 어딘가 모르게 답답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은 아쉬운 점.
토론에서 '신6자회담, 남북자유왕래, 한반도평화조약' 등 진보계에서 먼저 나올 법한[42] 통일관을 제시하며 이재오 특유의 노련미를 뽐냈다. 다만 일부 극우인사들에겐 이재오의 통일관이 종북 수준이라는 논평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개표 결과 1만 표도 얻지 못하며 12위로 낙선하고 만다. 그의 이력을 생각해보면 정치생명에 치명타란 평가도 있었지만, 애초에 대선출마는 어디까지나 일반 대중들에게 신생정당인 늘푸른한국당을 알리기 위해 출마한 것에 가까워서 정치생명에 큰 타격은 없을 거란 평가도 있었다.[43] 게다가 이미 이재오는 70대로, 정계에서 은퇴해도 무방한 나이라 그냥 본인이 하고 싶은거 말년에 맘껏 하고 있다고 보면 될 듯.
여담으로, 투표권이 없는 10대들이 '청소년이 직접 뽑는 제19대 대한민국 대통령 운동본부'의 주최하에 대선 모의 투표를 했는데 60,075표 중 13표를 획득하며 꼴찌를 차지하였다고 한다.
3.4. 문재인 정부 시절
2017년 12월 5일 정영진 최욱의 불금쇼에서 이명박에게 매우 적대적인 기자 주진우와 만나서 약 1시간 반가량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또한 채널A의 시사 프로그램 '외부자들'에서 이명박 공격수로 가장 유명한 정봉주[44]와도 두 차례에 걸쳐 살벌한 설전을 벌였다. 처음(47회)에는 정봉주가 '의리는 좋지만 이젠 떠나실 때 됐는데' 라고 말하자 이재오는 '없는 사람들끼리 의리라도 있어야 되지 않나'라며 되받았고, 두 번째(56회)에는 김백준과 국정원 특수활동비유용건을 두고 이재오와 정봉주와 진중권이 격렬하게 대립하였다.이명박 前 대통령에 대해 수사 압력이 거세지고 있는 상황에서 보수 통합을 명목으로 늘푸른한국당을 해체하고 2018년 2월 12일, 자유한국당에 복당하였다. 복당하면서 이명박에 대한 수사를 정치보복이라며 비난하였고, # 2018년 12월에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석방을 촉구하였다.#
2019년 9월 전광훈 목사가 출범시킨 문재인하야범국민투쟁본부에서 총괄본부장직을 맡고 범투본측에서 10월 3일 개천절 집회를 기획하였고.# 집회를 주관하며 문재인 정부에 대해 날을 세웠으나, 참가자들에게 질서있는 비폭력 평화집회가 되도록 이끌었다.그러나 정작 자유한국당 대표인 황교안에게도 자유한국당은 집회에서 빠지라는 발언을 하는 등 여전히 친이 좌장의 입장에서 황교안의 친박, 친황과 대립하는 모습을 보였다.
2019년 12월 23일, 소설가 이문열, 송복 연세대 교수 등과 함께 보수계열 시민단체인 국민통합연대를 출범시켰는데 이곳에는 친이, 비박, 친홍 계열 정치인들도 여럿 왔다. 이에 대해 직접, 정치인 여러분들은 개인적 친분 때문에 온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 자리에 전광훈 목사가 와 축사를 해서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후 문재인 하야하라는 전광훈 집회에도 몇번 모습을 보여 이재오가 전광훈에 물든 것 아니냔 우려가 나오기도 했는데, 본인 왈론 초대를 받아 몇번 간거라고 밝혀서 10월 이후에는 이름 빌려준 값만 해준 듯 하다. 본인 스스로도 모 팟캐스트 방송에 출연해 '군복 입고 태극기 들면 그게 애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태극기 부대를 은근히 디스하는 거를 보면 더 그렇다.
2020년 21대 총선에서 미래통합당이 대참패한 이후엔 몇몇 보수인사들과 함께 성명을 내고, 미래통합당은 자진 해산하고 중도실용 정당으로 환골탈태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 물론 문재인 정부가 잘했다는건 아니고, 이런 정권 하나 심판못하는 무능한 야당에 대한 질타가 강했다고 보면 될듯. 이명박 정부 때엔 전성기를 누렸지만 그에 못지 않은 숱한 비난과 질타를 받았던 MB맨이었으나 박근혜와 각을 세운 이후, 잇따른 친박내홍사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는 어마어마한 사건이 터지면서 온건보수의 이미지가 생겼다. 친이계도 이명박 정부 이후 각종 내분과 이합집산으로 그 흔적이 옅어져서 그런지 친박이 욕을 먹는 것에 비하면 굉장히 운좋게 이미지 타격을 많이 입지 않았다.
2020년 5월 이후에는 KBS 정치시사프로그램 더 라이브 에 보수측 정치원로 패널로 출연하고 있다. 8월 24일자 방송에서 8.15 광복절 문재인 정부 규탄 집회 참석 후 코로나 검체검사 결과 음성이 나온 것을 밝혔다.
2020년 9월 1일 건국대학교 석좌교수로 임용되었다.
2021년 3월 18일 야권단일화를 촉구하며 김무성, 김문수와 함깨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 ##
윤석열이 제20대 대통령 선거 유력 대권주자로 주목받을 때부터 비판의 목소리를 자주 냈다. 윤석열이 뚜렷한 정치적 노선과 국가 경영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 및 정치력을 드러내지 않는 점을 근거로 들며 인기가 꺼지는 건 한순간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또한 국민의힘 제20대 대통령 후보 경선에선 윤석열 보다는 홍준표가 대선후보가 되는 것이 낫다고 평가했었고, 윤석열의 선거대책위원회를 평가하는 자리에서는 100점 만점에 40점이라고 말했으며, 김병준-김한길 등을 포함시킨 것에 대해 올드보이의 총체라며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를 매섭게 비판했다. 이후 윤석열 후보와 안철수 후보의 야권 단일화에 대해서는 단일화를 안 한다면 정권교체는 못한다고 평가했다.[45]
친이계 중진답게, 2022년 1월 24일에는 이명박 전 대통령 석방을 촉구하기 위한 전직 국회의원들의 성명서에 이름을 올렸다. #
3.5. 윤석열 정부 시절
윤석열 정부 출범 직후에는 잠시나마 친윤 성향이었으나[46] 윤석열 정부 대통령 집무실 용산 이전에 대해 대놓고 비판적 의견을 냈으며 새 정부 출범 뒤 처음으로 단행된 광복절 특별사면을 앞두고 최근 정부와 여당의 잇단 불통 행보로 인해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이 20%대까지 떨어지자 특별사면 명단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을 제외시키면서 이에 이재오 국민의힘 상임고문은 언론을 통해 윤 대통령이 신의의 문제를 저버렸다며 날카로운 쓴소리를 냈다. 이후 출연하는 프로그램에서 윤석열 정부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이태원 압사 사고에 대해 총리, 행안부 장관, 경찰청장, 서울경찰청장, 용산경찰서장, 용산구청장이 사퇴하고 전면 개각해야 할 사안이라고 주장했다.
2022년 12월 말, 이명박 전 대통령이 사면된 직후 그의 자택 앞에서 재회하여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2023년, 국민의힘 3.8 전당대회를 앞두고 안철수를 공격하는 윤핵관들을 향해 조폭처럼 집단린치 테러를 가한다고 비판을 가세했다.
김기현 지도부의 논란들에 대해 당대표가 된 김기현은 점잖은 사람이고 혼자 독단적으로 정책결정을 내릴 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즉 대통령실 배후설을 주장했다.
윤석열 일본 사죄 관련 외신 인터뷰 논란 때문에 더 라이브에서 불러서 독해를 시켰는데 당연하다, 한국어로 말할 때는 주어가 없어도 되며 , 있든 없든 뜻이 바뀌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 , 발화자가 주어가 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고[47] 일본과는 과거사를 잊지 않더라도 함께 가야 하는 사이다. 제대로 말하면 전혀 문제가 아닌 이야긴데 말한 사람도 그렇지만 당이나 대통령실에서 받아서 확대재생산시킨 게 더 큰 문제다.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윤석열, 친윤계에게 거의 유승민 전 의원 못지않는 척을 진 발언을 그동안 지속적으로 보여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공직에 임용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을 완전히 뒤집고, 2023년 7월에 윤석열 정부에서 행정안전부 산하 공공기관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이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래서인지 이때부터 반윤 행보를 그만둔 것으로 보인다.
4. 여담
- 저서로 '한국학생운동사'가 있는데, 1984년에 초판이 나왔다. 이 책은 1945년부터 1979년까지 학생운동의 역사를, 직접 활동하던 운동권 출신이 쓴 최초의 책이라는 점에서, 학생운동사에서 굉장히 가치가 높은 저서로 평가받는다. 재미있는 것은 이 책이 워낙 의미가 있다 보니 꾸준히 재판(再版)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 행정구역 개편에 관심있는 정치인 중 하나라서 여러 번 자신만의 (도 폐지 뉘앙스를 지닌) 행정제도 개편안을 제안한 적이 있다. 전국을 50여 개 광역시로 개편하자는 것. 또 내각제에 관심이 있어서 이원집정부제를 골자로 한[48] 개헌 제안도 종종 하고 있다. 이는 그가 차린 정당인 늘푸른한국당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 이명박과 이재오가 같은 경주 이씨라는 이야기나 재령 이씨가 분적한 성씨이나 이재오가 항렬상 손자뻘이라는 이야기가 있으나, 재령 이씨의 분적 이후 고려시대의 기록이 미비하여 항렬을 세는 중시조가 다르므로 항렬을 비교할 수 없다. 그러므로 2010년대 들어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같은 항렬이라는 이야기도 사실이 아니다. 실제 이재오는 23세로 추정된다.
- 국회 신상 발언에서 "나 같은 사람이 청춘을 바쳐 민주화 운동을 했기 때문에 오늘날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가능했던 것", "노무현 대통령은 독재하에서 경찰서 유치장도 한 번 안 가본 사람"이라고 말했을 정도로[49] 자신이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것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
- 민중당 사무총장시절 자금모금을 위해 민중당 지지자였던 유명가수 민해경을 섭외해서 디너갈라쇼 기획을 했다고 한다. 민해경은 무료로 출연했고 수입은 민중당에 기부했다고 한다.
-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사이는 당시 이재오가 야당 원내대표로 정적 관계였지만 개인적으로는 나쁘지 않았다. 나름 유명한 일화로, 참여정부 시절 사학법 문제로 여야가 치열하게 대립하던 당시 청와대에서 대통령이 부르자 여당 원내대표(김한길)까지 포함해 셋이서 만났는데 자신이 야당의 원내대표로서 양보를 부탁하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번엔 야당에 양보해 주시죠"라고 여당 원내대표에게 부탁했고 그는 당 분위기가 그렇지 않다는 말을 남긴 뒤 여당에 이를 전하러 떠났다. 이후 노 전 대통령은 이 원내대표와 함께 청와대를 둘러보며 또 만날 수 있겠냐고 물었는데 훗날 보니 그게 설마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은 몰랐다고. 이 사건을 겪고 이재오는 친이계 좌장인 것과는 별개로, 노무현에 대해 "정국이 꼬여 여야가 싸울 당시 야당의 편도 들어줄 줄 알던 여유를 가진 자"였다며 호평했다.#[50]
- 2013년 영화 변호인을 관람한 후 "잊고 살았던 고문 당한 전신이 스믈스믈거리고 온몸이 근질근질하고 전신이 옥죄이면서 아파온다. 비단 나뿐일까? 아, 그런데 지금 이 나라 민주주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눈물이 난다"라는 트윗을 올리기도 했다.
- 보수정당에 대해 '독재당이다, 수구보수꼴통당이다 이런 소릴 탈피하자'고 주창했는데,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롯한 친박계와 견원지간으로 지낸 것도 이런 그의 사상적 신념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 2014년 12월 29일 올라온 노유진의 정치까페에 보수 여당 의원 중 최초 게스트로 출연해 노회찬, 유시민, 진중권 교수와 정치 입문 계기부터 시작해서 MB 정권 시절 일들과 박근혜 정부 평가 등 여러 만담을 나눴다. 본인 왈 야당보다도 당시 여당인 보수를 개혁하는 게 급선무란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보수 정당으로 입문한 게 컸다고...
- 유튜브 채널을 통해 자신이 소속된 보수정당에 관련된 썰을 푸는 편인데 한번은 게스트로 출연한 박재홍의 한판승부 채널에선 대통령 선거와 정부 시절을 통틀어 박근혜와 완전히 틀어지며 그녀와 갈등관계가 된 결정적 계기가 세 번의 상황이 있었다고 한다.
- 첫 번째는 박근혜가 당 대표이던 시절 대구의 보궐선거가 있었을 때 박근혜를 도와 대구의 대표로서 당원이 되어줄 것을 부탁받자 흔쾌히 제안을 수락하여 대구에서 보궐선거 운동을 하며 갖은 고생을 한 끝에 대구 출신으로 당원이 되는 것에 성공했으나 이렇게까지 살신성인하며 도와줬음에도 일말의 감사 인사는 커녕 당원이 되어준 자신을 박근혜 측이 개무시를 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박근혜에 대한 분노와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고.
- 두 번째는 스포츠조선과의 인터뷰를 할 때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에 대한 평가를 질문받자 "공적인 부분에선 대한민국의 부흥과 부활을 이끈 사람의 딸이지만 인권 탄압에 대해선 독재자의 딸이다."고 공과 사를 명확히 구분하여 평가했다. 그러나 스포츠조선은 일부러 공적인 부분의 평가를 배제하고 사적인 평가를 악의적으로 보도해버렸는데 이 때문에 박근혜와 고성방가 수준의 언쟁을 벌였다고 한다.한 술 더떠 한번은 이재오가 친일을 찬양하는 연설이 있던 프레젠테이션에 박근혜가 참가하자 열받은 이재오는 직접 무대로 올라와 고성방가를 지르며 항의를 했고 박근혜는 이걸 불쾌해하며 떠나버렸다고 한다. 여기서부터 이재오의 박근혜에 대한 시선과 평가가 수직하락함과 동시에 틀어지게 된 것은 덤.
- 마지막 세 번째는 박근혜가 당 대표를 사직하고 대통령 후보로 나섰을 때 당시 당 내에선 박근혜를 돕기 위해 원내 대표를 맡고 있던 이재오에게 당시 당의 주축이던 친박 세력들이 원내 대표를 내려놓아달라는 제안을 했고 이재오는 박근혜가 마음에 안들긴 했지만 당을 위해서 기꺼이 원내 대표를 사직하고 당 대표를 뽑기 위한 대회에 나서게 되었다. 그런데 정작 이재오가 사직을 하자 이때다 싶은 당원들은 박근혜의 지시대로 강재섭 대표를 당 대표 후보로 내세웠고 이재오가 당시 여당 위원들 중에서 인기가 상당함에도 강재섭을 밀어붙일 뿐더러 이재오가 연설을 하면 박근혜와 친박 세력은 이재오를 무시하며 자리를 떠나는 등의 무례를 일삼았다고 한다. 결국 이로 인해 제대로 폭발한 이재오는 박근혜와 친박 세력을 손절해버리고 박근혜 정부에게 적대적인 여당 위원이 되었다고 한다.
- 주로 많이 참여하는 편인 유튜브 쇼 채널 정영진 최욱의 매일매일 불금쇼에서 밝히기를 자신의 아들이 학교폭력 피해자였단 사실을 밝혔다. 당시 이재오의 아들은 학교폭력을 심하게 당한 탓에 학교를 결석한 적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국회의원인 탓에 아버지에게 누를 끼치기 싫어 당시 전후사정을 몰랐던 아버지의 격노를 묵묵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2021년 학교폭력 폭로 사건, 더 글로리, 정순신 아들 학교폭력 가해 사건을 계기로 학교폭력의 문제점이 사회적 대두가 되자 그제서야 아들로부터 학교폭력을 당했단 점과 이 사실을 쉽게 말하지 못했던 이유를 듣게 되었고 가장 가까운 관계였던 아들마저 학교폭력의 대상이 되었단 사실에 크게 충격을 먹을 정도로 학교폭력 문제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정순신 사태를 누구보다도 가장 강력하게 비판하고 나서게 되었던 것.[51]
- 20대 총선을 1주일 앞둔 2016년 4월 6일 저녁 8시경, 서울 은평 을에서 유세 중 한 취객에게 "(국회의원) 그만 해먹어라, 왜 자꾸 나오냐"라며 가슴을 타격당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다만 사건 이후에도 이재오 후보는 별 문제없이 선거 유세운동을 진행했으며, 경찰은 경범죄 혐의로 취객을 체포했다. 이와 연관되어 19대 총선 때 은평구를 위해 마무리하지 못한 지역사업이 있다는 취지로 마지막 총선이라는 말을 했는데, 20대 총선 때도 비슷한 말을 하며 이번이 마지막 선거라고 해서 타격당한 거 아니냔 웃픈 소리가 떠돌기도 했다.
- 엄청난 자전거 애호가이다. 이명박도 상당한 자덕이라 둘이 같이 타고 다니기도 한다. 이 때문에 웃지 못할 일도 겪었는데, 2007년 10월 자동차 전용 도로인 올림픽대로에서 자전거를 탄 혐의로 즉결심판에 넘겨진 적이 있었다. 한반도 대운하 자전거 탐방을 마치고 서울로 오던 중이었는데, 같이 자전거를 타던 관계자 13명도 함께 즉결심판에 회부됐다고... #
- 과거 운동권 경력이 있어서인지 노회찬, 심상정 의원과도 면식이 있는 사이였다. 심지어 노회찬은 민중당도 같이 한 사이. 그래서인지 이명박 전 대통령도 대통령 당선 직후 심상정을 직접 찾아가 만나기도 했다. 한편, 이재오는 2013년 당시 안기부 X파일 문제로 노회찬 전 의원이 의원직을 상실할 때 안타까움을 표현한 적이 있었고, 그의 의원직 상실을 막고자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 발의에 이름을 올린 적이 있다. # 노회찬 의원이 2018년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하였을 때도 본인의 페이스북에 긴 추도사를 올려 안타까움을 표했다.
- 이명박, 이재오는 이명박 정부 시절 국무총리로 임명된 정운찬과 상당히 친해져서, 현재 이재오와 정운찬은 늘푸른한국당에서 행적을 같이하고 있으며 실제로 정운찬은 제19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하였다. 다만 아직까지는 국민의당, 바른정당, 늘푸른한국당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고 있는 편인지라[52], 늘푸른한국당 내에서는 이재오의 대선 등판 요구가 나오고 있다고... 그리고 이내 그 요구를 수락해 늘푸른한국당 대선 후보로 확정되었다.
- 이재오의 이름 석자의 뜻을 해석하면 있을 재(在)에 다섯 오(五)인데, 흥미로운 점은 이재오는 민주화 운동으로 감옥을 5번 갔었고, 국회의원 5선을 했다는 거다. 숫자 5랑 인연이 많은 듯. 또 이재오의 선조가 나름 유명한 갈암 이현일인데 숙종 시절 환국 두 차례 잠깐을 제외하고는 만년 야당이었던 영남 남인의 대표격 인물이라는 것도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반면 아랫문단의 서청원은 달성 서씨로서 선조가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를 배출했던 서인-소론의 명문가였고, 다산 정약용과 동시대인으로서 과거시험에서 그 정약용을 차석으로 밀어내고 수석을 했던 서영보의 6대손이다.
- 한때는 서청원과 같이 범(汎) 상도동계(민주계)이면서 중앙대 2년 선후배로 동세대고[53] 6.3항쟁도 같이 했었던 관계로 매우 친했으나 2000년대 중반의 당내 정치구도를 거치면서[54] 친이-친박의 구도가 굳어진 2007년부터는 견원지간이 되었다.[55] 기사(조선일보 프리미엄서비스 140113)에 두 사람 간의 관계가 아주 잘 정리되어 있다. 위의 집안 내력까지 해서 정치 호사가들이 참 좋아할 소재이긴 하다.
- 19대 대선 후보 15인 중에서 전과에 유일하게 반공법 위반이 있었다. 참고로 반공법이 폐지 혹은 국보법에 병합된 때는 1980년이다. 2019년 8월 13일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
- 정치 비평을 하는 유튜브 채널도 있었다. 채널 이름은 '이재오의 와이러니'이다. 2023년 이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에 취임했기에 재단 운영에 집중하고 있으며 국민의힘 상임고문과 건국대학교 석좌교수 등으로도 활동하고 있기에 유튜브 정치 비평은 휴지하게 되었다.
- 추미애 전 법무부장관의 아들 병역 의혹에 대해 자신은 외아들이 있는데 강원도 인제군에서 복무했으며 전방초소근무도 시켰고 복무 중 아버지를 밝히지 말고 휴가도 나오지 말라고 했다고 했었다면서 추 장관의 행실을 비판했다.[56]
- 자기 인생에 있어서 국회의원이 될 것이라고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 본인의 이름에 맞게 오(다섯 오) 국회의원 5번을 했는데 우스갯소리로 "아버지가 이재육이나 이재칠로 이름을 지었으면 6~7선을 했을 텐데 아쉽다고" 한다.
- 박근혜 정부 국정농단 정국에서 새누리당을 탈당하여 늘푸른한국당을 창당했다가 2018년 자진해산하고 제1야당 자유한국당에 복당하였다. 돌아오자마자 상임고문에 위촉되었다.그렇게 5년간 보수제1당 상임고문을 역임하던 중 홍준표 대구광역시장이 해촉되자 국민의힘에 쓴소리를 할 때마다 이러시다 다음 순번으로 해촉당하는거 아니냐 는 드립이 쏟아져 나온다. 본인은 그만하라면 그만하는거지 ! 하지 말라면 미련은 없다. 라고 입장을 밝히고 할 말을 다하는 중이다.
5.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1988 | 창당 정계 입문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88 - 1990 | 정당 해산 |
| 1990 - 1992 | 창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92 - 1994 | 정당 해산 |
[[민주자유당|]] | 1994 - 1995 | 입당 정계 복귀 |
[[신한국당|]] | 1995 - 1997 | 당명 변경 |
| 1997 - 2012 | 합당[57] |
[[새누리당|]] | 2012 - 2016 | 당명 변경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016 - 2017 | 탈당[58] |
[[늘푸른한국당|]] | 2017 - 2018 | 창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018 | 자진 정당 해산 |
[[자유한국당|]] | 2018 - 2020 | 복당 |
[[미래통합당|]] | 2020 | 합당[59] |
| 2020 - 현재 | 당명 변경 |
6. 선거 이력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e61e2b><tablewidth=100%><rowbgcolor=#e61e2b><tablebgcolor=#fff,#1c1d1f>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92 |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 서울 은평 을 | | 21,716 (17.42%) | 낙선 (4위) | |
1996 |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 [[신한국당|]] | 48,146 (43.63%) | 당선 (1위) | 초선 | |
2000 |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 | 53,121 (51.04%) | 재선 | ||
2004 |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 | 53,107 (45.25%) | 3선 | ||
2008 |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 38,164 (40.81%) | 낙선 (2위) | |||
2010 | 상반기 재보궐선거 (국회의원) | 48,311 (58.33%) | 당선 (1위) | 4선[60] | ||
2012 |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 [[새누리당|]] | 63,238 (49.51%) | 5선 | ||
2016 |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34,318 (29.52%) | 낙선 (2위) | [61] | |
2017 | 제19대 대통령 선거 | 대한민국 | [[늘푸른한국당|]] | 9,140 (0.02%) | 낙선 (12위) | [62] |
역대 선거 벽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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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후보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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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담으로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재보궐 포함)까지 서울 은평구 을 지역에서만 24년동안 8번 출마했으며 보수정당에게 불리한 은평구에서 본인의 개인기로 5선에 성공하였다. 재미있는 점은 한나라당에 불리했던 탄핵 정국 시기인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접전끝에 당선되었지만,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 허니문 시기였던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때는 창조한국당의 문국현 후보에게 밀려 낙선되었다. 다만 본인을 꺾은 문국현이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이 상실되어서 2010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재출마해 2년만에 원내복귀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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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로 이명박 사퇴 (1998.2.21.) * 구로 을 이신행 의원직 상실 (1998.12.22.) * 구로 을 한광옥 사퇴 (1999.11.24.) * 서초 갑 최병렬 사퇴 (1998.4.29.) * 송파 갑 홍준표 사퇴 (1999.3.9.) * 강남 갑 서상목 사퇴 (1999.9.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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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별 계파 (기타 진보정당 · 진보 · 기본소득 · 정의 · 조국 · 민주 · 기후민생 · 새미래민주 · 개혁 · 국민의힘 · 극우정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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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선거법 위반으로 인한 의원직 상실.[A] [3] 본래는 李[4] 2012년 2월 3일 중앙일보 기사. 주민등록상 생일이며, 양력 출생으로는 1945년 2월 23일이다.[5] 現 강원특별자치도 동해시 부곡동[6] #. 강원도 강릉군 묵호읍 부곡리(現 강원특별자치도 동해시 부곡동)에서 태어났으나 3살이 되던 1948년 본적지인 이곳으로 이사하여 영양 석보국민학교와 영양 석보중학교, 영양고등학교까지 다녔기 때문에 실질적인 고향은 경상북도 영양군이다. 네이버 등 포털 사이트에도 경북 영양군으로 표기된 바 있으며, 밑의 선거 공보물들에도 잘 보면 '경북 영양 출생'이라 적혀있다.[7] 1980년대 초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을 때 옆방에 투옥되어 있던 홍남순이 '남인의 맥을 잇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붙여준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이재오는 영남남인의 영수였던 갈암 이현일의 16대손이기도 하다.[8] 경주 이씨의 분파이나 갈라져 나온 게 고려시대로 오래 되었다.[9] 본인이 직접 운영하는 것으로 보인다.[10] 1972년생[11] 1984년생. 이재오가 수감 생활을 마친 뒤 얻은 늦둥이로, 장녀와는 띠동갑이다.[12] 現 석보초등학교[13] 당시 고등공민학교(공민학교) 출신들은 고등학교에 진학이 불가하여, 고등학교에 진학하고자 웅변을 배웠다. 각종 웅변대회에서 다수의 상을 휩쓸었다고 한다.[14] 국어교육 전공[15] 석사 학위 논문: 경북 안동 방언의 음운체계 : 특히 운계체계를 중심으로(1971)[16] 당시 최병렬 대표최고위원이 단식투쟁에 들어가면서 잠시 비대위원장으로 당무회의를 했다.[17] 다른 위원장은 전광훈.[18] 친이계 좌장이다 보니 이재오도 뉴라이트 아니냐는 시각이 일부 있는데, 이재오의 언행을 보면 거리가 있다.[19] 다만 2010년대 후반 들어 전광훈과 같이 다니는 모습이 종종 포착되며 평이 깎인 측면이 있다. 본인은 일단 성향을 공유하는건 아니고(당장 YS, MB를 실패한 대통령으로 규정한 전광훈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오라고 부탁하니 갔을 뿐이라는 입장이다. 그나마 2020년 전광훈이 사실상 코로나 테러를 저지르고 재수감되면서 멀어졌다.[20] 3형제 중 둘째였다.[21] 현 중앙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도시계획부동산학과[22] 다만 일부 언론에서는 63학번이라고 기재한 곳도 있으나 1963년에는 영양군청 공무원을 지냈다.[23] 이 때 이명박, 손학규와도 친분이 생겼다. 또한 6.3 항쟁에서 중앙대 총학생회장이었던 대학 선배 서청원과도 친분이 생겼는데, 다만 둘은 우여곡절을 거쳐 2000년대 중반 한나라당 내 친이 - 친박의 분화가 이루어지면선 적대 관계로 변했다.[24] 1960년부터 1971년까지 제5보병사단은 경기도 포천군에 있었다. 1971년에 주둔지를 양평군으로 이전했으나, 1977년에 제20보병사단에서 대대장이 월북하자 두 사단이 주둔지를 바꿔 현재 주둔지인 연천군으로 이동했다.[25] 이것이 2010년에 특임장관 청문회에서 문제가 되기도 했으나 2009년 출간한 자서전에 소상히 나와있는 내용이고 결국 특임장관이 되었다.[26] 1969년 당시에는 국민대학교를 운영하는 학교법인 국민학원에서 인수를 한 뒤였기에 국민산업학교라는 이름으로 개칭된 상태였다. 실제로 1968년 1월 24일 동아일보 광고·1968년 1월 28일 조선일보 광고를 보면 4년제 농과대학인 중앙농민학교로 되어 있는데, 1969년 2월 15일 동아일보 광고에는 4년제 대학인 국민산업학교로 바뀌어 있음을 알 수 있다.[27] 남파공작원 출신의 정수일과는 동명이인이다.[28] 1980년 4월 1일 구로구가 신설되자 이에 편입되었다.[29] 다만 3번째 투옥의 경우 판결 전에 긴급조치가 해제되었으므로 죄형법정주의에 따라 처벌받지 않고 풀려났다.[30] 박정희 시절에 3차례, 전두환 시절에 2차례 갔다 왔다.[31] 이재오 말고도 민중의당 당원이었던 대표적인 사람은 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인 김두관이 있다.[32] 사실 그보다 전인 1999년에도 한나라당 원내총무 경선에 나갔으나, 당시 서울 강동구 갑 지역 재선중진 이었던 이부영에게 밀려 낙선하였다. 원내총무(원내대표)는 원래 재선내지 3선이상이 대부분 맡았으나, 그 당시 이재오는 고작 초선 의원에 불과했는데도 원내총무 경선에 나갔다는 것은 초선치고는 중량감이 있었고 인지도가 높았다라는 걸 보여준 셈이었다.[33] 결국 비박계 당 대표인 김무성과 친박계가 타협하여 낸 결론은 친박계 후보 무공천을 통해서 더불어민주당 후보 VS 무소속 이재오 VS 국민의당 후보 구도였으나 결국 6선에는 실패한다. 내리 5선에 대한 피로감과 비박 성향과 별개로 새누리당 자체에 대해 부정적 여론이 강했기 때문.[34] 이후 친이계는 이 셋을 중심으로 분열되었다.[35] 이거 때문에 2008년 총선에서 꽤나 많은 친박계가 한나라당을 탈당해 친박연대를 결성했다. 심지어 당시 친박 공천 학살을 주도했다고 알려진 이명박 측근 이방호만큼은 낙선시키겠다고 친박계가 아예 대놓고 정치적으로 정 반대 성향인 민주노동당 강기갑을 팍팍 밀어주는, 희대의 정치 코미디가 벌어지기도 했다.[36] 그래서인지 박사모가 18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이재오, 이방호, 정종복 낙선 운동을 벌이기도 했고 이게 성공한다.[37] 다만 이 때는 18대 한나라당 국회의원 후보 공천 때 친박 중진들이 대거 학살당한 것과는 달리 친이계 중진들은 다수 공천을 받았고, 친이계 초재선이 대거 컷오프됐다는 차이점이 있다. 중진들이야 개개인이나 세력의 힘이 없지는 않았지만 초/재선은 나중에 성장할 수 있으니 아예 미리 싹을 잘라놓은 것에 가깝다. 또한 어느 정도 모양새도 적당하게, 친박계 중에서도 고령인 인사들은 전부 공천에서 잘라버리거나 용퇴시켰다. 가장 결정적으로, 말년이었긴 했지만 어쨌든 이명박이 현직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눈치를 아예 안 볼 수도 없었다. 하지만 20대 총선에선 얄짤없이 중진까지 대거 날려버린다.[38] 사실 최병국이 똑같은 친이계라고는 해도 출신이 공안검사(검사장까지 지냈다.)인 만큼 의외의 조합이기는 했다.[39] 이명박 대통령이 창당대회에 나오지 않았는데, 이는 여론 동향을 의식한 것으로 여겨진다.[40] 조원진 vs 김선동의 병림픽, 오영국의 기행과 제비족 내지 트로트 가수를 연상시키는 복장 등과 대비하여 그렇다는 얘기. 대통령 임기 6개월만에 개헌하고 3년만에 하야하겠다는 주장은 정말 뜬금없는 소리라는 악평을 받았다. 본인 딴에는 "5년이나 욕심내서 대통령 길게 하지 않고 적당히만 하고 내려오겠다"라는 의도로 말한 거지만, 6개월 이내 개헌도 말이 안 되고, 3년만에 하야하면 3년만에 대선을 다시 치러야 한다.[41] 당시 19대 대선 후보자 토론-비초청 영상.[42] 한반도평화조약은 심상정 후보의 공약이기도 했다.[43] 실제로 이번 대선에서 이재오와 늘푸른한국당의 행보는 대통령 당선에 중점을 두지 않고, 늘푸른한국당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대선 출마에 가까웠다. 원내정당이 아니라면 애초에 대권을 노린다는 자체가 현실성이 떨어지기도 하고...[44] 참고로 정봉주는 진중권이나 주진우를 능가할 정도로 이명박을 가장 맹렬하게 공격했던 인물이다.[45] 단일화를 하고도 1% 미만의 매우 근소한 차이로 윤석열이 당선된 것으로 얘기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46] 실제로 친이 성향의 주호영 등 주요 친이 인사들 다수가 친윤 세력으로 흡수되었다.[47] 이재오는 정계 입문 전 본업이 국어교사였어서 언어학적 지식에 해박하다. 그래서 국어교사 출신답게 이를 언어적으로 분석한 것.[48] 이재오의 제안은 "대통령이 비상대권과 외치(국방, 외교, 통일)"를 맡고, 국회에서 이루어진 "총리 내각이 내치(경제, 사회 등)"를 맡는 방안이다. 일종의 이원집정부제와 비슷하다 보면 되겠다.[49] 사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인권 & 노동 변호사 시절인 1987년 구속당한 적이 있다.[50] 한나라당, 새누리당 국회의원이었던 정두언 전 의원도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 자기 말만 하고 자기 식대로만 행동하는 것처럼 보여도 만나보면 타인이 바라는 것도 (납득만 시키면) 잘 들어주던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물론 문재인 전 대통령은 남 얘기 경청하는 듯 보여도 결국엔 본인 독단대로 한다고 디스하면서 나온 발언이긴 하지만..[51] 이 사실을 매불쇼를 통해 알게 된 진행자들과 게스트들마저 충격을 금치 못해 잠시 정숙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52] 다만 정운찬 역시 친박과 박근혜를 매우 싫어하기에, 자유한국당에 입당할 가능성은 없다. 당장에 친이계 인사이자 이재오와 함께 차기 친이계의 대권주자로 손꼽혔던 정운찬이 박근혜와 친박에게 호감 자체가 있을 리가 만무하다.[53] 하지만 정치경력 차이는 꽤 난다. 2014년 19대 국회 시절 서청원은 본인이 15대 국회 4선째 때 이재오가 초선으로 등원했기 때문에, 이재오와 싸울 군번이 아니라고 했었다.[54] 아래 조선일보 링크의 기사에 따르면, 2003년 당대표 경선에서 바로 앞문장에 썼듯이 계파가 큰 틀에서 같기 때문에 지지층이 겹쳐서 표가 갈라져 이재오가 독자출마를 하지 않았으면 충분히 이겼을 최병렬에게 경선에서 져서 대표직을 내주고 최고위원이 된 것에서부터 악연이 시작되었다고 한다.[55] 잘 알려졌듯 이명박도 6.3 항쟁에 참여했었기 때문에, 이 때문인지 이명박과도 인연이 있는 사이었으나, BBK, 도곡동 땅, 최씨 가족, 문고리 3인방 등의 소재가 전부 다 나온 대선 경선 과정의 그 유명한 공방을 거친 2007년 이후로 사이가 크게 나빠졌다고 한다.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부터 이명박이 상대 박근혜 진영의 서청원을 콕 찝어서 강하게 비난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명박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치러진 2008년 18대 총선 공천에서 예상대로 시원하게 떨어졌지만 친박연대 창설 및 친박 무소속 연대로 18대 국회에 생환했다.[56] 이재오는 슬하에 1남 2녀를 뒀는데, 이 중 아들은 이재오가 마흔이 넘어서 본 데다 장녀와 띠동갑일 정도로 늦둥이라고 한다. 인터뷰를 통해 2008년 당시 24세라고 했으니 1984년생인데, 병무청 공직자등의 병역사항열람을 참조하면, 2004년 12월 7일 육군에 입대하여 제12보병사단에서 보병(M60 기관총 사수 특기)으로 복무했고, 2006년 12월 6일 병장으로 만기전역한 것으로 병적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이재오가 제17대 국회의원(한나라당, 은평구 을)이었음을 생각하면, 이야기가 나온 순간 절대 강원도 최전방으로 갈 리가 없는 금수저였으나 이재오의 의지로 강원도로 갔다고 밝혔다.[57] 통합민주당과 신설 합당[58] 총선 공천 탈락 불복으로 인한 탈당[59] 새로운보수당, 미래를향한전진4.0과 신설 합당[60] 전임자 문국현 의원직 상실[61] 옥새런 사건의 결과로 새누리당 후보의 은평구 을 무공천이 합의되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새누리당 후보로 봐도 무방하다.[62] 전임자 박근혜 탄핵 인용에 따른 파면으로 인한 궐위에 의한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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