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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도봉구 갑) | ||||||||||||||||||||||||||||||||||||||||||||||||||||||||||||||||||||||||||||||||||||||||||||||||||||||||||||||||||||||
제14대 유인태 | → | 제15-17대 김근태 | → | 제18대 신지호 |
<colbgcolor=#003764><colcolor=#fff> 출생 | 1947년 2월 14일[1] | ||
경기도 부천군 오정면 (現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오정동) | |||
사망 | 2011년 12월 30일 (향년 64세) | ||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 |||
묘소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 모란공원 | ||
본관 | 경주 김씨[2]# | ||
SNS | tistory | ||
재임기간 | 제43대 보건복지부장관 | ||
2004년 7월 1일 ~ 2006년 2월 10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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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아들 김병준(1979년생), 딸 김병민(1982년생) | ||
학력 | 양수초등학교 (졸업) 광신중학교 (졸업) 경기고등학교 (졸업 / 61회)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 / 학사) | ||
병역 | 육군 병장 만기전역 | ||
신체 | 176cm, 72kg, AB형 | ||
종교 | 무종교 → 천주교 (세례명: 즈카르야)[3] | ||
최종 당적 | [[민주통합당|]] | ||
의원 선수 | 3 | ||
의원 대수 | 15, 16, 17 | ||
약력 |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초대의장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정책기획실장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집행위원장 민주당 부총재 제15대 국회의원 (서울 도봉구 갑 / 새정치국민회의)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제16대 국회의원 (서울 도봉구 갑 / 새천년민주당)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 한반도재단 이사장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제17대 국회의원 (서울 도봉구 갑 / 열린우리당) 제43대 보건복지부장관 (참여정부) 열린우리당 중앙위원 열린우리당 의장 열린정책연구원 이사장 대통합민주신당 상임고문 통합민주당 상임고문 민주당 상임고문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민주화운동청년연대 의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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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정치인. 1980년대 민주화청년운동연합 의장을 지내는 등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민주화운동가로 활동했다.종교는 원래는 무종교였으나, 2011년에 가톨릭에 귀의하였고, 세례명은 즈카르야이다.[4]
서울특별시 도봉구 15-17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열린우리당 의장(2006년 6월 9일 ~ 2007년 2월 14일)[5], 원내대표(2003년 10월 27일 ~ 2004년 5월 11일) 및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보건복지부장관(2004년 7월 1일 ~ 2006년 2월 10일, 1년 7개월 5일)을 지냈다.
언론에서는 그의 마지막 직책이었던 '고문' 으로 호칭하는 경우가 많지만, 민청련 의장과 열린우리당 의장을 지낸 사람인 만큼 운동권 출신 쪽에서는 전(前) 의장 등으로 표현되는 경우도 많다. 장관은 확실히 흔하고 상임고문은 사실 큰 의미는 없는 직위라. 70~80년대 민주화 운동 시절 대학생이었던 386 인사들은 대개 "김근태 선배"라고 부른다. 빈소를 취재했던 한 젊은 기자는 "빈소에 다녀간 사람들이 고인을 모두 선배로 부른다는 게 신기하다"는 기사를 쓴 적도 있다. 물론 고인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예외이다. 추모 영상(8분)
2000년경부터 'www.gtcamp.or.kr'이란 도메인으로 개인 홈페이지를 차린 뒤 2004년 도메인을 'www.gt21.or.kr'로 고쳤다가, 2008년 이후 티스토리로 옮겼다. 같은 시기 싸이월드 미니홈피도 운영한 바 있다. 특히 티스토리 블로그의 경우 그의 사후인 2023년까지 운영되었다.
2. 활동
2.1. 민주화 운동
제4공화국 및 제5공화국 당시 민주화운동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 65학번으로, 대학 초년생 시절부터 경기고등학교 동문이자 대학동기인 조영래, 손학규[6]와 더불어 서울대 65학번 삼총사로 불리며 한일회담 반대운동, 삼성그룹 사카린 밀수 규탄 시위 등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했다.그러다가 박정희가 학생운동을 하는 대학생들(미필자들 한정)을 강제적으로 군대에 보낸 탓에 육군으로 입대, 병장 만기 제대하였다.[7]
군대에 갔다 온 이후에도 1971년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 1974년 민청학련 사건, 긴급조치 9호 위반 등의 사건에 관여되어 고난의 청년기를 보냈다. 1983년에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약칭 민청련) 초대 의장이 되었다. 부의장은 장영달이었고, 그 외 집행위 간부로는 박계동, 박우섭, 연성수 등이 있었으며, 상임위원회에는 김근태를 설득해서 민청련 설립을 주도했던 최민화가 의장으로 있었다. 상임위 부의장은 이해찬과 이을호였다.
의장이 된 김근태는 이른바 깃발 사건이라 불리는 1985년 서울대 민추위 사건으로 구속되었다.[8] 정확히는 8월 24일 민청련 제5차 총회 관련하여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서울서부경찰서에서 구류 10일을 선고받다가[9] 9월 2일 종료 시점서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간 것. 이후 이근안과 김수현 등 경찰관 총 8명에게 22일 동안 고문을 당했다. 이로 인해 받은 피해는 이근안 문서 참조. 이 사건을 통해 소문만 무성하던 민주화운동가에 대한 군부독재정권의 고문의 실체가 드러나며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 고문 증언.
군부독재정권 시절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모두 갖은 고초를 겪었지만, 김근태는 그 중에서도 유독 고문의 강도가 심했다. 이근안은 김근태에게 안 재우기, 날개꺾기,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며칠에 걸쳐 행했는데 이를 모두 버텼을 뿐 아니라 고문의 실체까지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선 하기 힘든 일이다. 결국 모진 고문에 버티지 못하고 살려 달라는 애원을 하며 저들이 원하는 조서를 써줄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고문의 기억과 함께 고인의 가장 큰 트라우마가 되었다.
전기고문, 물고문 후유증으로 발병한 파킨슨병과 뇌정맥혈전증 등으로 몸이 망가질대로 망가졌고, 고문으로 생긴 PTSD 때문에 병원에도 제대로 가지 못했다. 병원이 무슨 상관이냐면, 수술대에 눕거나 치과 치료용 드릴 돌아가는 소리만으로도 고문에 대한 기억이 다시 되살아났기 때문이다.[10] 충치 치료를 위해 치과에 찾아갔으나, 치료용 의자에 앉아서 드릴 돌아가는 소리를 듣자마자 박차고 뛰쳐 나왔다고 한다.[11]
고문당한 후에는 큰 소리로 연설하지도 못했고, 연설을 할 때면 콧물이 쏟아져서 항상 손수건을 가지고 다녔을 정도였다.[12]
1986년 9월, 징역 5년과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아 옥살이를 하다가 1988년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되었다. 이후 1989년 전민련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정책실장 등을 맡다가 1990년에 또다시 구속되어 2년을 영어의 몸이 되어야 했다.
2.2. 정계 입문
1995년 초에 들어 자신을 따르는 재야인사들과 함께 민주당에 입당하여 부총재를 맡으면서 제도권 정치를 시작하였다. 그해 8월 특별사면에 따라 복권된 후 김대중이 전격적으로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민주당을 탈당하고 국민회의에 합류하였다. 다음해인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도봉(갑) 지역구에서 당선되었다.1998년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당 주류인 동교동계를 겨냥해 호된 비판을 퍼부었다. 특히 권노갑이 주 타깃이었다. 물론 권노갑은 김근태 외에도 당내 소장파 인사들이 주된 타깃으로 삼던 정치인이긴 했지만. 동교동계가 그를 견제하면서 결과적으로 이 시기 정치적 성장을 그다지 하지 못한다.
기자들이 뽑은 대통령 후보로서는 조선일보도 부고논평에서 인정할 정도로 항상 1위를 도맡아 했던 인물이지만, 당내 세력과 권력욕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고 평가 받는다. 그가 사망한 후 아내인 인재근 의원을 중심으로 그와 교류한 정치인들이 결집한 것을 보면 아이러니.
비슷한 목소리를 내고도 차세대 정치인으로 주목받으며 중진으로 자리매김 했던 천정배, 신기남, 정동영과 비교되는 대목. 아예 그쪽 편이던 이인제는 차치하고라도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결국 대통령 자리를 차지한 노무현과 비교해도 안타까운 점이다. 2000년 후반에서 2001년 연말까지는 이인제에 맞설 이른바 비주류 대표인사로 두 사람의 동정과 대권전략이 정가의 주요화제이기도 했다.
2002년에는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하였으나, 제주와 울산 2번의 개표결과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자 운명의 광주경선을 앞두고 중도 사퇴하였다. 경선 과정에서 자신이 권노갑에게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고 '양심선언'한 뒤, 경선 주자들에게(특히 권노갑이 지원하고 있던 이인제를 겨냥해) 정치자금 문제를 다 까보자고 말했다가 역풍이 분 것이 치명타였다. 이인제 대세론을 흔드는 노풍이 분 것은 덤.
이 사건은 당시 한국 정치계가 정치자금 문제에서 얼마나 골때리는 상황이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종종 언급된다. 존경 받던 재야 운동가이자, 정계에서 가장 깨끗한 정치인으로 꼽히던 김근태마저 불법 정치자금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훗날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의 상징색이라 할 수 있는 노란색은 원래 김근태 경선캠프의 상징인 노란 손수건에서 일부 차용 혹은 의미를 이어받은 것이기도 하다.
참여정부에서는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입각하였는데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공약 중 하나였던 주택 분양원가 공개 방침을 번복하자 "계급장 떼고 제대로 논쟁하자" 라고 요구하는 등 대통령 당선 후 신자유주의 친화적으로 변한 노무현 대통령의 경제 정책에 가장 강하게 브레이크를 걸었던 인사 중 하나였다. 때문에 당시 온라인상에서 고문 후유증 드립 치는 안티에게 인신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또한 2007년 한미자유무역협정에 대해서도 "FTA를 통과시키려거든 나를 밟고 가라"라고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이 점 때문에 재야 출신으로 정치권에 들어가 몇 안 되게 자기 목소리를 낸 인물이라고 평가 받는다.
그 때문인지 친노, 특히 그 후계를 자처하는 친문 지지자들은 김근태의 뜻을 이어받는 비노비문 그룹 중 하나인 민평련을 크게 견제 하는 모습을 보인다. 민평련에 대한 반감은 김근태 개인에 대한 반감 외에도 친문 인사 대부분이 소위 '패권주의' 논란을 의식해 극도로 조심스레 처신하는 반면 민평련은 대놓고 계파를 드러내고 단체행동을 하는 데 대한 못마땅함도 크다. 비록 김근태 사후 민평련이 당 전면에 나선 적은 없긴 하지만. 대놓고 싫어한다.
그나마 우호적인 시선이란게 '민주화 운동가의 공적은 존경하나 정치인으로서는 존경하지 못한다'라는 수준이고 아예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주장이 김근태가 사망한 이후에도 많이 나왔다. 김근태가 대선후보로서 2% 지지율이 나오고 18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조차 되지 못한 것은 친노 시민들이 투표장에 안 갔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을 정도다.
다만 18대 총선의 경우는 당시 서울은 강북구 을 을 제외하고는 민주당 강세 지역구들이 전부 한나라당으로 넘어갔던 시기였다. 성북구를 제외하고는 갑이나 을 지역구 하나만 건졌다. 아예 통째로 넘어간 지역구들도 많다. 수도권 뿐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민주당이 전멸했던 시기이기도 하고. 그리고 이후 이인영등 민평련과 친문이 손을 잡는 케이스도 많기 때문에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친노가 김근태를 싫어한다는 내용은 낭설에 불과할 뿐, 실제로 친노지지자들에게도 여전히 존경받는 존재라는 평이 압도적이다.
장관으로 재임하면서 국개론스러운 발언을 했다가 사과하는 등 말도 많았고, 2006년 열린우리당이 쇠퇴 일로를 걷는 와중에 당의장직[13]에 올라 당시 당정에 대한 여론의 뭇매를 집중적으로 받기도 했다. 다만 다른 정당들이라면 단명 소리를 들었을 그의 재임기간 8개월은, 열린우리당에서는 최장기이다. 또한 여러 나름대로 의미 있는 법들을 조율해서 통과시키기도 했다. 보건복지부 장관을 재임한 기간도 1년 7개월로 다른 장관들보다는 비교적 긴 편이었다. 전임인 김화중의 재임 기간은 1년 4개월, 후임인 유시민의 재임 기간은 1년 3개월이었다.
3회에 걸쳐 국회의원을 지낸 다선의원이었지만 인생 마지막으로 도전한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한나라당 신지호 후보에게 1,000여 표 차이로 석패했다. 사실 경기동부연합 계열 민주노동당 후보도 이 지역에 출마해서 대략 1,000여표를 차지했다는 걸 감안하면, 꽤나 아까운 패배였다.[14]
2.3. 국회의원 퇴임 이후
2008년 17대 국회의원 퇴임 후에는 한양대에서 강의를 맡기도 하고,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으로 활동하면서 한반도재단을 설립하여 연구 활동도 병행하였다. 예전부터 지원 유세를 하러 가는 일이 많았다고 하는데, 생애 마지막으로 유세를 지원한 것은 2011년 서울특별시장 보궐선거였다. 개인적으로는 다음해 치러질 총선도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하지만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끝난 직후부터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앞서 서술된 대로 전두환 정권 시절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김근태는 말년까지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는데, 지병이었던 뇌정맥혈전증이 악화되어 결국 12월 초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했다. 입원 치료 도중 딸의 결혼식에 축하메세지까지 보냈지만 끝내 참석은 하지 못했고,[15] 끝내 2011년 12월 30일 새벽 5시 경 별세했다.[16] 향년 64세로, 장례식은 천주교식으로 진행되어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 내 민주 열사 묘역에 안장됐다.
빈소에는 과거 민주화운동을 함께했던 정치인들과 여러 인사들이 조문을 왔다. 특이하게도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김근태를 장관이나 의장, 고문이 아닌 '선배님' 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1980년대에 김근태가 민주화 진영에서 가지고 있던 위상을 생각하면 여러 인사들의 존경이 담긴 표현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모란공원은 전태일 열사, 문익환 목사, 박종철 열사 등 민주화/노동운동가들이 안장된 곳인데, 김근태는 비교적 최근에 별세했기에 묘역 위치는 맨 바깥쪽에 있으며 올라가는 뒷길이 따로 나 있다. 모란공원에서는 참배객들을 위해 직접 안내판을 걸어두었다. 생전 민주화운동가로서 쌓았던 공적과 별개로 너무 작고 소박한 묘소가 인상적이다. 매년 더불어민주당과 시민단체 주제로 추모행사를 열고 있으며, 성당에서 추도미사도 열리고 있다.
같은 해 노동운동계의 대모였던 이소선 여사도 별세해서,[17] 일각에서는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의 거목이 모두 떠났다는 논평을 하기도 했다.
2011년 10월 18일, 자신의 블로그에 '2012년을 점령하라' 는 제목으로 글을 남겼는데 이것은 그의 마지막 논평으로 남게 되었다. 자세한 것은 해당 링크로.
말아톤의 정윤철 감독이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촬영한 영상은, 그가 미디어에 등장한 마지막 모습이다. 이른바 "김근태의 마지막 메시지(유언)". 자세한 것은 해당 링크로. 두 사람은 이런 인연이 있다.
2001년 딴지일보가 했던 고인과의 인터뷰.
3. 사건 사고
- 2002년 당내 대통령 후보 경선 중에 당시 권노갑 의원에게 불법정치자금 2,000만원을 제공받은 사실을 스스로 고백하며 경선 후보 자리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물론 발뺌하다 걸린 것은 아니고 본인이 먼저 돈을 받은 사실을 자백했지만, 어쨌든 범죄는 범죄인지라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 2006년 당시 북한 핵실험에 따른 안보위기로 국내외적인 혼란 상황일 때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개성공단에 들어갔는데, 여기서 북한 여종업원과 춤을 춘 일이 있다고 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본인의 해명에 따르면 북측이 권해서 마지못해 했다고는 하나, 북측의 미사일 발사 실험 등 국가적으로 뒤숭숭한 때 북한에서 여종업원과 춤을 췄다는 사실은 부적절했다는 평가가 있다.
4. 여담
-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김대중 지지선언을 발표해 통일민주당 당원들이 분열되어 단일화가 무산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당시 김근태는 통일민주당 당원이 아닌 재야 민주화운동가였으며, 재야 민주화운동 진영이 YS보다 DJ에게 좀 더 비판적 지지를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걸 떠나서 그는 1985년부터 1988년 6월까지 감옥에 있었다.
- 수감 생활 중 변호사 접견권을 보장해달라는 요구를 교도소장이 거절하자 소송,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기본권’(대판 91누7552)이라는 판단을 받아내기도 했다. 소송대리인은 천정배. 다만, 김근태 등의 접견 제한은 정당했다는 원고 패소로 끝났다.
- 가족으로 아내 인재근과 두 자녀가 있다. 참고로 민주화운동가이자 여성운동가이기도 했던 인재근은 2012년 4월 11일 제19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고인이 된 김근태의 지역구였던 도봉구 갑에 출마하여 60%라는 높은 지지율로 당선되었다. 애초에 인재근의 출마를 권유하기 위해 또 그녀가 승낙할 것을 염두에 두고 당내 지역구 인사들은 예비후보 등록을 하지도 않았다. 즉, 그녀가 남편의 유지를 이어받길 원했다고 볼 수 있으며 그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엿볼 수가 있다. 49재 이후 그녀의 출마를 설득했고 당내에서도 권유했으며 그녀가 출마를 승낙하자마자 바로 1호로 전략공천했다. 이 때 개표방송 카메라를 통해 눈물바다가 된 인재근 후보 캠프가 전파를 타며 새삼 고인이 재조명받기도 했다. 인재근 의원은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도 도봉구 갑에서 지지율 60.1%로 재선에 성공하였다. 이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54.0%의 특표율로 3선에 성공. 김근태 의원이 한나라당 신지호 의원에게 패한 제18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제외하면 15~17, 19~21대까지 부부 6선이라는 진기록.
- 이근안이 김근태가 자신을 용서했다고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이건 논란이 갈린다. 보건복지부 장관 재임 시절이었던 2005년 2월 7일 이근안이 수감중이던 여주교도소에 김근태가 면회를 가서 만난 사실은 있지만, 김근태가 이 자리에서 이근안을 정말 용서했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1주기 인터뷰에 따르면, 김근태는 이근안을 진심으로 용서하지 못했고 이근안을 만난 뒤 혼란스러워하다 한 신부를 찾아갔는데 신부는 "용서는 하느님의 것이니 이근안이 진정 반성하면 용서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용서받지 못할 거다"라는 조언을 들었다고 한다. # 이와 별개로 이근안은 2010년 목사로 임직된 뒤 자신의 고문행위를 정당화하는 발언을 여러차례 하면서 사실상 고문을 전혀 반성하지 않았고
고문은 예술이라는 망언은 덤결국 목사직에서도 면직당했다.
- 2005년 2월 배우 이은주가 사망했을 때 직접 자신의 홈페이지에 추모글을 올리기도 했다. # 이 때 이은주의 죽음을 전태일에 비유해서 잠시 논쟁이 있었는데, 둘의 상황이 직접적으로 같다기보다는 청년으로서의 '외로움' 을 지닌 점이 비슷해서 이러한 글을 올리게 됐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이은주는 보건복지부 호스피스 홍보대사였다.
- 메이리다오 사건을 주동한 스밍더라는 대만의 민주화 운동가가 있는데, 중화권에서 '대만의 김근태'로 소개된 적이 있다. 다만 공통점이라고 분석한게 민주화 운동 경력과 정치력이 꼭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점 곧, 민주운동 시절에 비해 정치적으로 크게 성공하진 못했다는 점이라 묘하긴 하다.
- 석호필 박사의 제자이기도 했다. 중학교 시절 가난한 학생이던 소년 김근태는 무료 영어강의 봉사를 하던 석호필 교수의 클래스에서 수업을 듣게 되며 그의 제자가 되었다. 같이 공부를 한 정운찬 서울대 전 총장과는 경기고와 서울대 경제학과 동문이다.
-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인 손혜원의 남편과 서울대 경제학과 동기로 절친한 친구였으며 손혜원의 남편은 '근우회'(槿友會·김근태의 친구 모임)'라는 모임의 후원회 회장까지 맡았었다고 한다.
- 생전에 축구를 굉장히 좋아한 축빠였다. 어렸을 때부터 새끼끈을 뭉쳐 만든 공이나 돼지 방광을 부풀려 만든 공을 이용해 동네 친구들과 노는 것을 시작으로 장성한 이후에도 틈만 나면 조기축구를 즐겼다고 한다. 현역 의원이던 시절엔 국회의원들끼리 하던 축구 모임에서도 정봉주와 같이 스트라이커로 이름을 날렸다. 오죽하면 파킨슨병 진단을 받고 18대 총선에서 낙선한 이후에도 조기축구 등을 통해 축구를 꾸준히 즐겼을 정도다. 고문에 의한 후유증으로 몸은 매우 허약했지만, 축구를 즐길 때는 건강한 모습을 보였기에, 많은 사람들은 그가 병상에 누웠을 때 "다시 금방 일어나서 공 차러 갈 것"이라 생각했다고. 덧붙여 그와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에서 동문수학한 후배인 이준구 교수의 증언에 따르면 농구도 잘 했다는 모양으로, 한마디로 구기종목 매니아. 이준구 교수가 홈페이지에 쓴 김근태 선배를 추억하는 글. 하지만 말년에는 고문 후유증으로 그렇게 즐겨 마지 않았던 축구마저도 못하게 된 것을 보면, 고문이란 것이 그에게 얼마나 큰 상흔을 주었는지 알게 해준다.
- 그가 사망한 이후 인재근 의원과 천주교 서울대교구 함세웅 아우구스티노 신부, 내과 전문의 이화영 박사 등의 주도로 인권의학연구소와 김근태와 같은 고문피해자 및 국가폭력에 몸과 마음을 다친 이들을 치료하는 김근태기념치유센터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그의 유지를 계승하기 위해 김근태재단이 설립되었다. 2021년 김근태기념도서관이 도봉구에 개관했다.
- 그의 보좌관을 지냈던 허영이 정치적 스승으로 여기는 사람이다. 그는 본디 유학을 가려고 대학 선배에게 인사를 했는데, 그가 난데없이 어디론가 허영을 데리고 간 곳이 바로 김근태의 사무실. 김근태는 보좌관을 구하고 있었고, 면접을 보더니 "당장 다음날부터 나오라"고 했고 허영은 그대로 정계에 입문했다. 김근태는 그에게 "수도권보다는 고향인 강원도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편이 좋다"고 충고했고, 허영은 이를 받들어 고향 양구군과 가까운 춘천시를 기반으로 활동하기 시작해 2020년 드디어 춘천을 민주당계 정당의 품에 안겨주었다.
- 영화 '노무현입니다'에서 유시민은 "김근태 의장이 존경스러웠던 분이라면 노무현 대통령은 사랑스러운 분이셨어요. 김근태 의장이 따라배우고 싶으신 분이었다면 노무현 대통령은 뭔가를 해주고 싶은 분이었어요" 라고 하였다.
- 그가 사망한 후 1년 뒤, 동명이인인 군인 출신 정치인 김근태가 당선무효형을 선고받고 의원직을 상실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 때 MBC는 자료 사진에 해당 인물 대신 이 김근태의 사진을 잘못 인용하는 오보를 내보내 빈축을 샀다.[18]
- 그의 평전인 '민주주의자 김근태 평전'을 따르면, 2012년에 박근혜에 대항하겠단 의미에서 범야권을 주창한 인물로, 민주당과 진보정당을 하나의 범주로 뭉쳐놓은 사람이기도 하다. 노무현이 운동권의 저주에 가까운 비난을 감내하면서 운동권과 민주당이 벌어질 수 있었지만, 정치권으론 범야권 연대, 정치 외적으론 나꼼수의 프로파간다[19]가 성공하면서 결국 민주당은 운동권을 품은 연대를 이어갈 수 밖에 없게 된다.[20] 이 후 이해찬계나 민평련, 친이재명으로 이어지는 운동권 성향의 계파가 김노문과 다른 색채를 가진 입장[21]임에도 민주당의 당권을 쥔 것은 사실상 김근태가 원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4.1. 라이카 카메라 수증
2005년 8월 복지부 장관 재직시 독일의 카메라 메이커인 라이카에서 대한민국 광복 60주년을 기념하여 안중근 의사의 손바닥 인장과 "大韓國人" 이 각인된 카메라를 딱 60대 한정 제작했는데, 이 첫 번째로 제작된 카메라를 김근태 장관에게 선물해 화제가 된 바 있다.#
라이카는 이렇게 한정판 카메라를 생산할 때 바디에 일련번호를 붙이는데, 그 중 1번이라면 가격은 둘째 치고 평생 한 번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인 수준이다. 참고로 당시 해당 카메라의 가격은 1천만원이었으나, 세계적으로 60대 한정판인 데다가 그 중 일련번호 1번이면 그 가치는 수십억을 호가한다.
카메라랑 별 상관도 없어보이는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준 이유는 안중근 의사와 가장 이미지가 닮은 사람이라서라고. 다른 곳도 아닌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의 의견이다. 본인은 과찬이라며 이를 국가에 기증했다.
4.2. 그를 소재로 한 작품들
정지영 감독이 연출, 박원상, 이경영이 주연을 맡은 남영동1985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되고 2012년 11월 22일 개봉했다. 다만 비슷한 시기 개봉한 26년(영화) 때문에 관객을 뺏겨 흥행에서는 전국 관객 33만(전산망 공식집계 기준)으로 참패했다. 애초에 흥행성을 노린 영화라기보다 사회고발 성격이 강한데다 독립영화로 구분되는 작품이라 어쩔수 없기는 했다.시사만화가이자 민중화가 박건웅이 2014년 6월 <짐승의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남영동 사건을 만화화하였는데, 5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으로 고증이 매우 잘 돼 있고, 이야기가 탄탄해 몇 시간이면 일독 가능하다. 고문 이야기와 김근태-인재근 부부의 절절한 사랑을 보고 있으면 절로 코 끝이 찡해진다.
소설가 방현석이 김근태의 삶을 소재로 소설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때>를 발표했다. 담담하고 깔끔한 문체지만, 다 읽고 나면 먹먹해진다. 특히 유명한 고문사건은 "이근안 개새끼"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만든다. 이근안은 <고문 기술자 이근안의 고백>이라는 책을 낼 정도로 양심 따윈 없다. 한국 현대사에 관심이 많다면 읽어 보도록 하자.
전 독립기념관장을 보낸 김삼웅이 쓴 <김근태 평전>이 있다.
5. 선거 이력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ffd504><rowbgcolor=#ffd504><tablebgcolor=#fff,#1c1d1f>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96 |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 서울 도봉 갑 | [[새정치국민회의|]] | 27,768 (38.85%) | 당선 (1위) | 초선 |
2000 |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 [[새천년민주당|]] | 34,233 (50.85%) | 재선 | ||
2004 |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 [[열린우리당|]] | 42,583 (52.13%) | 3선 | ||
2008 |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 [[통합민주당(2008년)|]] | 31,335 (46.16%) | 낙선 (2위) | [22] |
역대 선거 벽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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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대 총선 (서울 도봉구 갑) | 16대 총선 (서울 도봉구 갑) | |
17대 총선 (서울 도봉구 갑) | 18대 총선 (서울 도봉구 갑) | }}}}}}}}} |
6.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평화민주당|]] | 1988 - 1990 | 정계 입문[23]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90 - 1995 | 탈당 |
| 1995 | 입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95 | 탈당[24] |
[[새정치국민회의|]] | 1995 - 2000 | 창당 |
[[새천년민주당|]] | 2000 - 2003 | 합당[25]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003 | 탈당[26] |
[[열린우리당|]] | 2003 - 2007 | 창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007 | 탈당[27] |
[[대통합민주신당|]] | 2007 - 2008 | 창당 |
[[통합민주당(2008년)|]] | 2008 | 합당[28] |
[[민주당(2008년)|]] | 2008 - 2011 | 당명 변경 |
[[민주통합당|]] | 2011 | 합당[29] 사망[30] |
7. 관련 단체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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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1947년 1월 24일.[2] 계림군파 24세.[3]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아내 인재근의 세례명은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이다.[4] 임종 직전 대세를 받았고, 장례미사는 명동성당에서 치러졌다.[5] 8개월 5일에 걸쳐 재임, 단명한 의장이 대부분이었던 열린우리당 의장 중에서는 가장 길게 재임했다.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직후 정동영 전 의장의 사퇴로 2등이었던 그가 최고위원의 자격으로 비대위 체제하에서 의장으로 추대되었으나 결과적으로 최장 재임에 유일하게 임기를 채우고 물러난 인물이 되었다. 원 임기는 1년이다.[6] 조영래와 손학규는 경기중 시절부터의 동기동창이다. 김근태는 광신중학교를 나왔다.[7] 동명이인인 군인 김근태는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교로 대장까지 영전하고 제대하였다.[8] 이때 같이 구속된 인사 중 1명이 바로 아프리카TV 창업주 문용식이다.[9] 그에게는 민청련 결성 이후 겪어 본 6번째 구류였다.[10] 수술대가 고문 시 사람을 묶어놓는 일명 칠성판과 비슷하다고 한다.[11]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 정도로 고문 범죄를 저지른 이근안은 훗날 목사가 되어 "고문도 예술이다" 라는 망언을 날린 바 있다.[12] 결국 2001년 강북삼성병원에서 코수술을 받았다. 이 때도 수술대 위에 올라가기 어려워했으나 보좌진들의 설득 끝에 겨우 받은 것이라고 한다.[13] 원래는 2006년 2월 당의장 경선 전당대회에서 정동영에 밀린 2위를 기록했지만, 당시 열린우리당 전당대회 선거시스템이 거의 대부분 집단지도체제 방식으로 치러졌기 때문에 본인은 중앙위원(현 수석최고위원)에 당선되었다. 정동영이 그해 지방선거 참패로 당의장직에 물러나자 2위로 중앙위원에 당선된 본인이 당의장직을 승계받으면서 취임하였다.[14] 이후 보수정당이 도봉구 갑에서 깃발을 꽂기까지는 꼬박 16년이 걸렸다.[15] 원래 입원했을 당시만 해도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려 생각했지만, 치료 도중 증세가 극도로 악화되어 결국 참석하지 못하고 축사만 보냈다. 결혼식에서 이 메세지를 본 부부는 물론, 하객들까지 모두 눈물을 흘렸다고.[16] 임종 직전 함세웅 신부에게 세례성사를 받았다. 가톨릭에서 이는 '대세' 라고 부르는데, 정식으로 교리교육을 받고 배푸는 세례가 아닌 위급상황에서 세례까지 필요한 과정을 생략하고 행하는 세례를 말한다.[17] 전태일 열사의 모친으로, 아들의 사망 이후 평화시장에서 피복노조를 설립하는 등 평생을 노동운동에 헌신했다.[18] 공교롭게 김근태 장군이 제 1 야전군 사령관시절 서로 만난적이 있다.[19] 정확히 말하면 운동권에게 친노를 덮어씌우는 작업을 말한다.[20] 이게 성공적으로 진행된 것이 의원표는 민주당, 비례표는 정의당에게 몰아주잔 여론이었다.[21] 김대중은 운동권을 군사정권 못지않게 대화 없이 자기주장만 있다고 여겨 받아들이지 않았고, 노무현은 상술된 것 처럼 운동권에게 물어뜯기는 입장이었다. 그나마 문재인만 강한 지지세가 있었기에 대놓고 고개를 들어올리지 않았을 뿐, 퇴임 후 내놓는 메세지에서 한결같이 국민통합을 요구하나 이재명계는 당의 단결을 주장하면서 방향성이 다름을 드러내고 있다.[22] 4번의 선거 중 첫 낙선[23] #[24]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을 위한 탈당.[25] 새천년민주당에 흡수 합당.[26] 열린우리당 창당을 위한 탈당.[27]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28] 민주당과 신설 합당.[29] 시민통합당과 신설 합당.[30] 창당된지 2주일도 안되어서 사망하였기에 당 내부에서의 활동은 없었다.
분류
- 대한민국의 남성 정치인
- 부천시 출신 인물
- 1947년 출생
- 2011년 사망
- 대한민국의 고문 피해자
- 고문 후유증으로 죽은 인물
- 참여정부/인사
- 제15대 국회의원
- 제16대 국회의원
- 제17대 국회의원
- 새정치국민회의 국회의원
- 새천년민주당 국회의원
-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 대통합민주신당 국회의원
- 통합민주당(2008년) 국회의원
- 열린우리당 의장
-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 대한민국의 학생운동가
- 대한민국의 민주운동가
- 사회운동가 출신 정치인
- 경주 김씨 계림군파
- 광신중학교 출신
- 경기고등학교 출신
- 서울대학교 출신
- 보건복지부장관
- 모란공원 안장자
- 국민훈장 모란장
- 대한민국의 정치인 배우자
- 육군 출신
- 제16대 대통령 선거/후보 경선/후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