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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이창동의 주요 수훈 및 수상 이력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대한민국 근정훈장 수훈자 | |
<colbgcolor=#980000><colcolor=#EDE4D3> 연도 | <colbgcolor=#EDE4D3><colcolor=#980000> 2005년 | |
이름 | 이창동 | |
소속 | 문화관광부 | |
청조근정훈장(1등급) |
대한민국 문화훈장 수훈자 | |
<colbgcolor=#980000><colcolor=#EDE4D3> 연도 | <colbgcolor=#EDE4D3><colcolor=#980000> 2002년 |
이름 | 이창동 |
분야 | 영화 |
보관문화훈장(3등급) |
역대 베니스 영화제 | ||||
은사자상 | ||||
제58회 (2001년) | → | 제59회 (2002년) | → | 제60회 (2003년) |
버박 파여미 (비밀투표) | → | 이창동 (오아시스) | → | 기타노 다케시 (자토이치) |
역대 칸 영화제 | ||||
각본상 | ||||
제62회 (2009년) | → | 제63회 (2010년) | → | 제64회 (2011년) |
메이 팡 (스프링 피버) | → | 이창동 (시) | → | 요세프 세다르 (아버지만의 영광) |
{{{#white 역대}}} | ||||
감독상 | ||||
제17회 (1996년) | → | 제18회 (1997년) | → | 제19회 (1998년) |
임권택 (축제) | → | 이창동 (초록물고기) | → | 홍상수 (강원도의 힘) |
각본상 | ||||
제20회 (1999년) | → | 제21회 (2000년) | → | 제22회 (2001년) |
이정향 (미술관 옆 동물원) | → | 이창동 (박하사탕) | → | 고은님 (번지점프를 하다) |
역대 | ||||
감독상 | ||||
제36회 (1999년) | → | 제37회 (2000년) | → | 제38회 (2001년) |
이광모 (아름다운 시절) | → | 이창동 (박하사탕) | → | 한지승 (하루) |
시나리오상 | ||||
제34회 (1996년) | → | 제35회 (1997년) | → | 제36회 (1999년) |
김상수 김상학 (학생부군신위) | → | 이창동 (초록물고기) | → | 오승욱 (8월의 크리스마스) |
제36회 (1999년) | → | 제37회 (2000년) | → | 제38회 (2001년) |
오승욱 (8월의 크리스마스) | → | 이창동 (박하사탕) | → | 고은님 (번지점프를 하다) |
제46회 (2009년) | → | 제47회 (2010년) | → | 제48회 (2011년) |
장훈 오세연 옥진곤 (영화는 영화다) | → | 이창동 (시) | → | 조민석 (블라인드) |
영화 부문 감독상 | ||||
제38회 (2002년) | → | 제39회 (2003년) | → | 제40회 (2004년) |
허진호 (봄날은 간다) | → | 이창동 (오아시스) | → | 박찬욱 (올드보이) |
제43회 (2007년) | → | 제44회 (2008년) | → | 제45회 (2009년) |
최동훈 (타짜) | → | 이창동 (밀양) | → | 이윤기 (멋진 하루) |
제46회 (2010년) | → | 제47회 (2011년) | → | 제48회 (2012년) |
장훈 (의형제) | → | 이창동 (시) | → | 변영주 (화차) |
영화 부문 시나리오상 | ||||
제31회 (1995년) | → | 제32회 (1996년) | → | 제33회 (1997년) |
육상효 (장미빛 인생) | → | 이창동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 → | 이창동 (초록물고기) |
제32회 (1996년) | → | 제33회 (1997년) | → | 제34회 (1998년) |
이창동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 → | 이창동 (초록물고기) | → | 송능한 (넘버 3) |
감독상 | ||||
→ | 제1회 (2002년) | → | 제2회 (2003년) | |
신설 | → | 이창동 (오아시스) | → | 봉준호 (살인의 추억) |
제5회 (2006년) | → | 제6회 (2007년) | → | 제7회 (2008년) |
봉준호 (괴물) | → | 이창동 (밀양) | → | 나홍진 (추격자) |
제7회 (2008년) | → | 제8회 (2010년) | → | |
나홍진 (추격자) | → | 이창동 (시) | → | 잠정 폐지 |
각본/각색상 | ||||
→ | 제1회 (2002년) | → | 제2회 (2003년) | |
신설 | → | 이창동 (오아시스) | → | 봉준호 심성보 (살인의 추억) |
제7회 (2008년) | → | 제8회 (2010년) | → | |
나홍진 (추격자) | → | 이창동 (시) | → | 잠정 폐지 |
}}} ||
<colbgcolor=#003764><colcolor=#fff> 대한민국 제40대 문화관광부장관 이창동 李滄東 | Lee Chang-dong | |||
출생 | 1954년 4월 1일 ([age(1954-04-01)]세) | ||
경상북도 대구시 대명동 (現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1] | |||
본관 | 진성 이씨 | ||
재임기간 | 제40대 문화관광부장관 | ||
2003년 2월 27일 ~ 2004년 6월 30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3764><colcolor=#fff> 형제자매 | 형 이필동, 이기동 남동생 이준동[2][3] | |
배우자 | 이정란[4] | ||
자녀 | 1남 1녀 | ||
학력 | 대구고등학교 (졸업)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 / 학사) | ||
약력 |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제40대 문화관광부장관 (참여정부) 신일고등학교 교사 | ||
데뷔 |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전리(戰利)》,(중편소설), 1997년 《초록물고기》,(영화), | ||
수상 | 2011년 제47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감독상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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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현대 사회를 응시하며 인생을 그리는 거장 |
대한민국의 영화감독이자 소설가, 각본가. 문화관광부장관,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신일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일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해 활동하다가 영화계에 투신, 마흔이 넘는 나이에 초록물고기를 내놓으며 당시 천편일률적인 섹시코미디 장르로 일관하던 한국영화계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5]
2. 생애
2.1. 학창 시절
4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6] 이상주의 좌파였던 아버지 때문에 유년 시절을 굉장히 가난하게 보냈으며, 그의 어머니는 한복 삯바느질로 6남매를 키웠다. 늘 빈곤했으나 자존심과 명분에 관한 교육만큼은 철저했던 가풍은 자신의 인생관에 큰 영향을 끼친다.[7] 그의 가문은 '진성 이씨 송당파'로 퇴계 이황의 숙부인 송재 이우[8]의 직계 자손[9]이다. 이 가문은 안동지방에서도 손꼽히는 양반가로 그가 고백했던 소년시절의 "근거 없는(?) 엘리트주의"의 원천이 되었을 것이다. 방학이면 안동의 할머니집에서 머물며 자연의 풍경과 소리들을 만끽하며 지냈는데 이때의 경험으로 미적 기준이 상당히 높아졌으며 그것이 훗날 영화 감독으로서 끊임없이 느끼는 자학의 원천이 된다. 지적 엘리트 의식에 빠져 있었으며 남달리 작문 실력이 뛰어났던 그는 편지를 잘 쓰는 걸로 동네에서 유명했다.지식채널e-소년은 달린다 편대구고 시절엔 문예반에 가입했고 백일장을 투어 돌듯이 돌며 상을 휩쓸던 문학 소년이었다. 삼수 끝에 1975년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입학했다.[10] 대학 시절은 10살 많은 큰형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연극판에서 주로 활동했다고 한다. 비록 지방 극단이었으나, 그는 대구 지역에서는 연기를 잘 하는 배우로 소문났었다.
2.2. 소설가로 데뷔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던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 <전리>가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1992년에는 <녹천에는 똥이 많다>[11]로 <한국일보> 창작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가로 데뷔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사건이 바로 5.18 민주화운동이었다고 하며, 이는 이후 2000년작 장편영화 박하사탕에서도 엿볼 수 있다. 분단, 도시화, 산업화의 문제를 주로 다루었던 그의 소설은 비평가들에게 극찬을 받으면서도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의식화되지 못한 민중들의 우매함에 대한 합리화를 부추긴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도 그럴것이 그의 소설에 주된 주인공들은 분단의 비극에 희생된 보통 사람들 또는 운동권을 탄압하는 정권과 그 정권에 맞서 민중을 계몽하려했던 운동권, 지식인 사이에 끼여서 생각없이 살아가다 민주화의 물결에 휩쓸리는 소시민이었기 때문이다.2.3. 영화계 1기
등단 후 문단에서 뛰어난 소설가로 인정받았지만, 그 자신은 순수문학이 가지는 힘에 회의를 느끼고 나이 40이 넘어 지인인 박광수 감독의 권유로 영화계에 입문한다. 영화 '그 섬에 가고 싶다'에서 각본과 조연출을 담당하였다.[12] 이 당시 몇가지 에피소드가 있는데, 소설가로는 유명했지만 영화 경험이 없는 이창동이 연출부도 아닌 조연출을 한다는 것 때문에 뒷말이 나왔으나 충분히 제몫을 함으로써 역량을 증명했다. 각본을 완성하고 시나리오를 주는 대가로 본인은 조연출 이름만 걸어놓고 어깨너머로 배워보려 했는데, 공동 조연출이 그만둬서 본인이 실업무를 봐야했다고 한다.. 또 하나의 에피소드는 땡볕에 군중들을 모아놓고 찍는 씬이 있었는데, 박광수 감독이 설명을 잘 안하는 스타일이라, 그는 그들을 계속 땡볕에 둬야 하는지, 잠깐이라도 쉬게 해주어야 하는지 쉽게 결정할 수 없어 눈물이 났다고.1996년에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의 시나리오 작가로서 백상예술대상 각본상을 받았다.
1997년 한석규 주연의 '초록물고기'를 통해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흥행하지는 못했지만, 평단에 큰 호응을 받으며 그 해 청룡영화제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을 비롯하여 국내 유수 영화제의 주요상을 휩쓸었고 해외영화제에도 초청받았다. 당시 한참 신도시가 건설되던 일산신도시를 주 무대로, 정체성을 잃어버린 한 청년의 비극적인 삶을 리얼하게 그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2년 10월의 설문조사에서 다시 보고 싶은 한국영화 2위에 선정되었다.[13] 나중에 한석규는 이 때의 배역 이름인 "막동이"를 본떠서 시나리오 공모전을 열기도 했다.
2000년 1월 1일 2번째 영화 '박하사탕'을 발표했다. 대학 시절 자신이 겪었던 5.18 경험[14]을 바탕으로 역사의 광풍 속에 휘말린 한 남자의 삶을 처절하게 담았다는 평을 들었다. 원래 이 영화는 한석규가 출연할 예정이었으나, 스릴러를 하고 싶었던 한석규가 고사해서 그때까지 영화계에서는 무명에 가까웠던 설경구를 주연으로 발탁했다. 그전까지 처녀들의 저녁식사, 송어 등에 조연으로 나왔던 설경구는 이 영화 한편으로 충무로의 기린아로 등극한다. 이후 잇다른 흥행작에 출연, 한동안 '송강호', '최민식' 과 함께 한국 남자배우 트로이카로 불리게 된다.[15]
이후 3번째 작품인 '오아시스'가 2002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FIPRESCI상과 특별감독상을 수상하며 점차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감독으로 자리잡았다. 이 작품은 사회 부적응자인 종두와 지체장애자인 공주가 사랑을 한다는 평범한 이야기에서 출발해서, 두 남녀가 가족, 사회에 철저하게 냉대를 당하고 박해를 받는 현실을 날 것 그대로 조명한 영화이다. 박하사탕에서 설경구의 첫사랑 순임 역으로 데뷔했던 문소리는 이 작품에서 지체장애인 역을 훌륭하게 소화했다. 실제로 네티즌들의 영화평을 보면 문소리가 정말 장애인인 줄 알았다는 반응이 자주 보인다. 문소리는 이 작품으로 큰 주목을 받는다.
2.4. 관료 시절
앞선 세 편의 영화를 만들고 난 뒤 노무현 대통령 재임 시절 참여정부의 첫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1년 4개월동안 재직한 후 2004년 6월에 사임한다. 첫날부터 운전기사를 대동하지 않고 직접 자신의 싼타페 차량을 이끌고 출근, 취임식을 직접 직원들을 찾아다니면서 일일이 인사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식이 없으니 당연히 할 리 없었던 취임사는 며칠 후 홈페이지에 올렸는데, 이 글은 지금까지도 명문으로 평가받고 있다.{{{#!folding [ 전문 ]
안녕하십니까. 이창동입니다.제가 문화관광부 장관이란 중책을 맡은 지 어느새 두 주일이 훌쩍 지났습니다. "취임식을 생략하는 대신 취임사는 인터넷으로 올리겠다."고 약속을 해놓고도 이제사 인사의 글을 올려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럴싸한 포부나 의례적인 인사보다는 뭔가 생각을 가다듬어 말씀을 드리고자 했지만, 취임한 이후 지금까지 너무나 정신없이 바쁜 일정을 보내느라 단 30분도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어쨌든 무엇보다 먼저, 취임한 첫날부터 지금까지 저를 따뜻하게 맞아주시고 도와주신 여러분들께 진심 어린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지난 3월 1일 국립극장에서 3·1절 기념행사를 마친 뒤 대구로 내려가 지하철 참사 현장을 다녀왔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그 형체도 찾지 못하는 유가족들의 핏발선 눈들을 만날 수 있었고 시커멓게 그을음으로 뒤덮인 지하철역 구내 곳곳에 깨알같은 글씨로 쓰여진 망자들의 온갖 아름답고 슬픈 사연들을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참담한 심정과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솟구치는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느껴야 했습니다. 한 성격이상자의 우발적 범죄, 또는 우리 사회의 안전불감증, 재난 시스템의 부재 등, 많은 이유와 원인을 말하고 있지만, 저는 그 가운데서도 주범은 한국사회의 관료주의라고 말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한낱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사건을 이처럼 끔찍한 비극으로 확대시키고 악화시킨 것은 분명 아무도 스스로 책임지거나 판단하지 않는, 오직 무사안일 속에 자신을 숨기고 마는 관료주의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프란츠 카프카는 일찍이 자신의 소설을 통해 개인의 운명과 성스러운 실존적 삶이 관료들이 앉은 책상들과 서류더미 사이로 내던져지고 결정되어지는 관료주의의 거대한 성(城)을 묘사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카프카의 뛰어난 상상력으로도 수백명의 무고한 시민들이 두 대의 전철 안에 갇힌 채 2000도 가까운 고열로 통째로 불타고 있는 그 무시무시한 묵시록적인 광경을 감히 상상해낼 순 없었을 것입니다. 그 무고한 피해자들은 오늘 합동분향소의 영정사진으로, 또는 실종자 가족의 애타는 호소문 속에 남아 있는데, 가해자들은 어디 있습니까? 가해자들의 맨 앞에는 자신이 이 사회 전체로부터 무시당하고 있다고, 아무도 자신의 사정을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뒤틀리고 왜곡된 심사의 한 초라한 사내가 서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뒤에 늘어서 있는 수많은 다른 가해자들은 마치 흐릿한 그림자처럼 이름도 얼굴도 알아볼 수 없습니다. 그 얼굴 흐릿한 익명의 가해자들 중에 나도 끼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 공직자들은 뼈아프게 자인해야만 합니다.
첫 인사말에서부터 이런 무거운 이야기로 시작해서 송구스럽지만, 참여정부의 출범 직전에 터진 이 사고를 저는 이제 막 공공의 직무를 시작하는 저 자신을 위한 무거운 교훈으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사고가 난 뒤 전에도 늘 그랬듯 우리는 지금 우리 사회의 안전 시스템을 부산하게 재점검하고 있습니다. 재난에 대한 효율적 관리를 위하여 새 정부는 재난방지청의 신설을 준비하고 있고, 각종의 안전에 관한 매뉴얼도 만들고자 합니다. 물론 마땅히 해야만 할 일이지만, 그러나 이러한 시스템적 접근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시스템이 개선된다 하더라도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그 시스템은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대구 지하철에서 증명되었듯이 수많은 모니터가 있어도 그것을 들여다볼 사람이 없었고, 고급 통신장비가 있어도 가장 위급한 순간에 최소한의 필요한 정보조차 주고받질 못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날 사고가 나던 대구 지하철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소통이 막혀 있었습니다. 자신이 이 사회와 전혀 소통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한 사내는 플라스틱 휘발유 통을 들고 소통 대신 파괴를 선택합니다. 1079호, 1080호의 기관실과 조종실 사이에도 의사소통이 막혀 있으며, 객차에 있는 무고한 시민들은 한 마디의 경고도 듣지 못한 채 운명의 시간 직전까지 그냥 앉아 있습니다. 사고 발생 후, 대구시 당국과 희생자 가족들 사이에는 어떤 대화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소통의 기능이 얼마나 막혀 있는가를 비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오늘날의 현대사회에서 소통이란 그 사회의 성격과 질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즉 과거에는 사회가 신분이나 집단으로 구성되었다면, 오늘날에는 의사소통으로 구성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사회가 민주화 되었다는 증거를 얻기 위해서는 의사소통의 방식이 민주화 되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국사회는, 정치적 제도는 민주화 되었으면서도 그 소통의 방식은 전혀 민주화 되지 않았습니다. 청와대와 행정부, 국회와 정당에 이르기까지 의사소통의 사회적 기능을 맡은 공적조직은 권위주의와 관료주의에 눌려 마비되고 왜곡되어 기형화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대구지하철 사고는 그것의 비극적이고 상징적인 예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화를 생각하게 됩니다. 흔히 문화의 역할이란 지하철역 구내에 보다 세련된 의미있는 장식물이나 걸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우리네 삶에서 문화란 그런 작은 디테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만,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보다 본질적인 것, 즉 사람과 사람 사이, 집단과 집단 사이의 소통의 형식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 그것이 곧 문화의 역할입니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천년, 새로운 세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세기에서 인류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도도한 물결을 이루고 있는 정보통신 기술, 컴퓨터, 디지털 문명 등이 이미 우리의 일상을 시시각각 바꾸어놓고 있음을 우리는 생생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문명이 엄청난 양과 속도로 실어 나르고 있는 것은 바로 소위 문화 컨텐츠라고 불리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새로운 세기를 문화의 세기라고 명명하는 것입니다. 문화를 정치나 경제의 부수적인 영역으로 보는 낡은 시각으로는 결코 오늘의 변화에 대처해낼 수 없습니다. 문화예술적 창의성과 자율성이 모든 생산·유통·소비 영역에서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모든 영역에서 문화적 관점이 요구되고 있다는 분명한 사실을 확인해야만 합니다.
바로 이런 새로운 세기의 출발점에서 참여정부가 출범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또한 앞으로의 문화적 변화를 주도할 중대한 역할이 바로 우리 문화관광부에 맡겨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가슴 깊이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문화가 산업적으로 중요하다는 인식은 지난 정부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문화산업을 지원하기 위한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또 상당한 성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화의 산업적 논리에는 상당한 오해가 존재합니다. 즉, 문화를 산업적, 또는 경제적 측면으로만 바라본다면 문화도 돈 된다는 식의 단순논리에 머물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 되는 문화(이를테면 게임이나 영화, 에니메이션, 관광 등)는 투자, 육성하고, 돈 안되는 문화(문학, 연극, 미술, 박물관 등)는 직접 지원해서 보호한다는 분리적 접근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접근은 근본적으로 지난 시대의 낡은 패러다임에 사로잡혀 있다는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제 문화도 돈 된다가 아니라, 돈 되는 문화, 돈 안되는 문화가 따로 없다는 사고로 바뀌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경제적 관점에서 문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관점에서 경제를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화가 새로운 세기를 이끌어 나갈 것이라는 것은 어떤 특정한 문화상품들이 중요해진다는 뜻이 아니라 문화적 형식과 관점, 문화적 자율성과 창조성이 모든 영역에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참여정부의 문화관광부의 정책은 이런 관점에서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각 영역에서 문화적 창조성과 자율성의 불씨를 불어 일으키도록 환경을 만들고 틀을 짜도록 하는 것이 정책의 방향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모두가 돈 되게 할 수 있고, 나아가 우리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방향으로 가기 위한 첫번째 과제 또는 목표는 문화예술, 체육, 관광 등의 각 분야에 자율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각 분야에서 스스로 고민하고, 의견을 모으고, 자신들에게 필요한 정책을 만들어 집행하도록 하며 정부는 지원만 할 뿐 민간에 권한과 책임을 대폭 넘겨주는 것으로 제도를 바꾸는 것입니다. 문화란 자율과 창조가 생명인데, 지금처럼 정부의 관료들이 책상 위에서 정책을 만들어 현장으로 내려 보내는 방식으로는 그 자율과 창조성을 살려낼 수 없음은 자명합니다.
물론 이것이 말은 쉽지만 매우 어려운 과제라는 사실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현재 각 분야의 현장에 그만한 자율성을 갖추고 있는가, 또 그럴 준비가 되어 있는가 살펴보면 사정은 그리 낙관적이지 못합니다. 각 분야마다 온갖 갈등과 이해관계가 상충하고 있으며, 자율적 논의를 하고 의견수렴을 할 수 있는 토양도 사람도 부족한 것이 솔직한 현실입니다. 아마 숱한 어려움과 좌절을 겪을 것임을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부터 우리는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정부가 분명히 그런 방향으로 갈 것이라는 점을 알리고, 그들이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상당한 기간 동안 비효율과 시행착오가 드러나더라도 정부는 인내하고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문화행정에 있어서 민간의 자율적 참여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어떤 제도, 어떤 시스템과 방법이 필요한지 연구하고 마련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문화에 있어서 개혁의 분명한 방향이며, 참여정부가 내세우고 있는 자율, 개방, 그리고 참여와 분권이라는 개혁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장관인 제 개인만의 믿음도 아니며 참여정부의 의지만도 아닙니다. 시대의 흐름과 세계사적 변화의 요구이며, 오히려 우리나라는 너무나 늦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화란 삶의 형식이며 동시에 본질입니다. 우리가 개혁을 이야기합니다만, 삶의 형식이 바뀌지 않는 한 그 본질은 결코 바뀔 수 없습니다. 장관이 되고 난 뒤에 저는 우리 행정부 내의 권위주의적 문화에 대하여 꽤 놀랐습니다. 임명장 수여식, 취임식 등에서부터 장관에 대한 의전에 이르기까지 행정부 내에서 지켜져 오고 있는 관습과 문화가 일반대중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권위주의적이라고 느꼈습니다.
장관실 앞에만 깔려 있는 붉은 카펫, 장관이 나타나면 부동자세로 서 있는 직원들, 행정고시를 통과한 사무관 비서가 꼬박꼬박 장관의 차 문을 대신 열어주는 것, 장관에게 누구나 허리를 90도로 꺾고 절을 하는 모습을 보며 저는 좀 실례되는 비유인지 모르겠으나 조폭문화를 연상했습니다. 조폭이란 조직의 특징은 그것이 일반사회와 격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격리되어 있으므로 자기만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고 그래서 곧잘 영화나 드라마에서 흥미롭게 묘사되기도 합니다. 오늘날 행정문화 속에 이런 권위주의적인 독특한 문화와 관습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은 행정부와 일반국민과의 거리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께 우리 문화관광부에서부터 과감히 이런 권위주의적 관습과 문화를 버리자고 권합니다. 장관이라는 직위에 걸맞은 권위와 책임을 인정하고 자연스런 예의를 표시하는 것과 권위주의적인 형식을 통해 장관을 대접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공무원이므로 반드시 넥타이와 양복을 매고 일을 해야 한다는 것과 공무원으로서의 품위와 도덕적 엄격함을 지녀야 한다는 것 또한 전혀 다른 것입니다. 저는 영화감독으로서 해외를 다니며 그 나라 문화부 공직자들을 더러 만나보았지만 그 누구도 복장에서부터 공무원 냄새를 피우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복장이 자유로운 만큼 그들의 사고와 행동은 자유롭고 유연했습니다. 그런데도 21세기의 언필칭 세계화 시대에 아직도 우린 장관이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느냐 어쩌냐가 신문 방송의 뉴스꺼리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권위주의적인 문화 속에서 진정한 토론, 소통과 이해가 이루어지리라 믿을 수는 없습니다.
문화예술 행정을 담당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문화예술인이 되어야 합니다. 체육행정과 관광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공직의 의무 속에 갇혀 있지만,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 사회적 관계 속에서 자신을 성찰하고 그들과 끊임없이 교감하고 소통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우리는 권위주의의 두꺼운 철갑 옷을 벗어 던지고 부드러운 문화의 비단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문화관광부가 국민들에게 문화가 어떻게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꿈을 부여하는지 안내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여기에 우리 문화관광부의 위상이 자리 매김 되도록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함께, 감동이 살아 있는 문화 행정을 펼쳐나갈 것을 약속하면서 두서없는 인사말을 마치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3월 13일 오후
이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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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뜨거운 이슈였던 스크린 쿼터제에 대해 장관 재직 초기에는 축소를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퇴임을 앞둔 2004년 6월 돌연 입장을 선회하여, 당시 '스크린쿼터 지키기 영화인 대책위원회' 위원들과 면담을 나눈 자리에서 '스크린 쿼터 축소와 관련된 영화인들의 입장을 정리해달라'고 요청했다. 이것을 두고 당시 '스크린 쿼터 축소'를 강력하게 요구했던 재정경제부와의 파워게임에서 밀린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실제로 그가 입장을 선회한 것에 영화계 일각에서는 '배신자'라는 말까지 나왔는데, 선회했다기보다는 스크린 쿼터 축소를 막지 못해 정부의 입장만 전달하고 그 자신은 책임지고 사퇴했다는 평이 우세했다.
2.5. 영화계 2기
장관직에서 물러나고 3년 후인 2007년 5월 4번째 작품 '밀양'을 발표한다. 당시 한국 영화계에서 가장 연기력이 출중하다고 평가받던 전도연, 송강호를 주연으로 한 영화로, 원작은 소설가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 남편을 잃고 남편의 고향에 내려와 사는 신애(전도연)가 아들을 유괴당한 뒤 종교에 귀의하면서 벌어지는 용서와 구원에 대한 이야기다. 이 영화로 전도연은 한국배우 사상 최초로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 전도연은 아들을 잃고 개신교를 믿게된 신애로, 송강호는 그런 신애를 쫓아다니는 카센터 사장 종찬을 연기했다. 이 영화는 특히 종교를 믿지 않던 인간이 절망에 빠졌을 때 신에게 의지하는 과정과 그 주변인물을 굉장히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한때 이 영화를 두고 개신교도와 비개신교도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지만, 전문가들은 이 영화가 개신교의 문제점들을 비판적으로만 다루고 있다는 주장은 영화를 지극히 단선적으로 보는 것이라 입을 모았다.3년 후인 2010년 5월에 다섯 번째 작품 '시'를 발표한다. 영화 '만무방'을 끝으로 15년간 작품을 하지 않고 있던 배우 윤정희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했다. 20대 배우가 하나도 안 나오는 영화를 찍었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노인이 시를 배우는 과정에서, 충격적인 사건에 휘말리는 과정을 그린 영화로,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다. 비슷한 사건에서 피해자와 가해자 측을 다뤘다는 점에서 '밀양'과 '시'는 종종 같이 묶여 회자된다. '시'는 호평을 얻은 작품이지만 예술성이 강해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하고 저조한 흥행스코어를 남겼다.
그런데 2010년, 영화진흥위원회의 거장 영화 감독의 제작을 지원하는 2회 마스터영화제작지원사업에서 신작 '시'가 탈락해 이래저래 말이 많다. 1차 지원에서도 임권택 감독의 작품과 함께 동반선정이 유력했으나, 심사위원들의 평점 평균이 70점을 넘기지 못해 탈락했다고 한다. 근데 그 탈락 이유를 알아보니, 한 심사위원이 '시'의 각본이 '시나리오가 각본의 포맷이 아니라 소설 같은 형식이라서'라며 "0점"을 줬다고 한다. 듣도 보도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창동 감독에 대한 비판으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 중 하나가 ‘문학적’이라는 표현을 쓴다. 허나 심사위원은 문학적이라서가 아니라 형식 탓에 무려 0점을 준고로 말이 안 되는 사건이다.
당시 이창동 감독과 제작사 파인하우스 필름[16]은 이 문제에 대해서 공식 입장은 커녕 일절 인터뷰조차 하지 않았는데, 황당한 건 이런 태도를 보고 영화진흥위원회가 '피해자인 척 침묵을 지키지 말라'는 성명을 낸 것. 이 소식을 접한 파인하우스 필름은 뒤늦게 공식입장을 발표했다.
당시 영진위원장 조희문은 교수 채용 비리로 구속되었다. #
그리고 그 0점 받은 각본으로 2010년 칸 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했다.[17] 그러자 이번엔 당시 문화부장관이던 유인촌은 기자들과의 사적인 자리에서 "(이 상은 칸 영화제 심사위원들이 이창동에게) 예의상 준 거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당시 문화관광부는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했지만 민주당 최문순 의원은 동석한 기자 7명 중 4명이 들었다며 확인사살했다. 이후 2010년 대종상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비롯해서 시나리오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 등 4개부분을 석권하기까지 했다.
2013년에는 장준환 감독의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를 제작하기도 했으며 같은 해 7월에는 원빈, 설경구, 장쯔이와 함께 차기작을 찍을 것이라는 뉴스가 나오기도 했다.[18] 하지만 본인이 시나리오에 만족하지 않아서 엎었다고 한다. 2014년에는 다른 영화를 준비 중이며,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 혹은 쌍용자동차 노조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루머가 여러 웹사이트에 돌았었다. #
2016년 7월 버닝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이창동의 차기작으로 공개됐다. 같은 해 10월 허우샤오셴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함께한 부산국제영화제 좌담에서 이창동은 11월 촬영을 목표로 차기작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으며, 젊은이들에 대한 영화로 미스터리한 이야기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촬영을 앞두고 원작자인 무라카미 하루키와 NHK 사이에 이견이 생기면서 제작이 무기한 연기됐다.[19] 2017년 7월 수정된 시놉시스[20]와 함께 버닝의 제작 소식이 다시 들리기 시작했으며 8월에는 여주인공의 공개 오디션을 진행했다. 이후 유아인, 스티븐 연, 공개 오디션으로 뽑힌 신인 전종서 등의 캐스팅을 확정했고 9월 11일 첫 촬영에 들어가 이듬해 1월 30일까지 촬영했다.
'버닝'은 하루키의 단편 소설인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하지만, 원작과는 다른 이야기며 서로 다른 위치와 처지인 세 명의 젊은이가 주인공인, 청춘들에 관한 영화로, 미스터리를 작품 외적으로 확장시키는 독특한 작품이다. 제71회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해 5월 16일 월드 프리미어로 선보였고, 다음 날인 5월 17일 한국에서 개봉했다. '버닝'은 평론가와 기자들로부터 경쟁부문 상영작 중 최고 평점을 얻었지만, 평점과는 달리 본상에서는 수상이 불발돼 아쉬움을 남겼으나, 비평가 그룹에서 수여하는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을 수상했다. 메타포가 많은 문학적인 작품이라 흥행은 하지 못했다. 긴장감과 스릴이 두드러지는 등 그간의 전작들과는 다른 결을 가졌고 이창동 말대로 어려운 질문을 던지는 영화라 이창동 팬들 사이에서는 다양한 해석과 논의가 오가는 작품이다.
8년이라는 긴 공백기를 거쳐 나온 영화라 그동안 정부의 외압이 있던 것 아니냐는 등의 얘기가 있었지만, 그동안 남들이 보기엔 의미있는 프로젝트를 맡더라도 전혀 끌리지 않았다며, 자신이 꼭 해야 하는 건가 의문이 들어 막판에 보류했던 적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버닝'은 자신을 환기시킨 작품인 동시에 영화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라고 했다. '버닝'의 주인공이자 작가 지망생인 종수가 막판에 자기 이야기를 쓰는 것처럼 자신도 영화감독으로서 어떤 영화를 만들지 고민이었는데, 그 고민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 초기 시나리오에는 종수가 공무원 준비생으로 설정되어 있었다가 소설가 지망생으로 바뀐 것은 바로 이 고민의 흔적으로 보인다. 리얼함을 위해서는 공시생이 어울리지만, 버닝에서 강조되는 미스테리나 예술성, 문학성에 초점을 둔다면 소설가 지망생이 훨 자연스럽다. 그리고 다음 영화는 4년 뒤에 내겠다고 말했다.
한편 2018년 4월 26일에는 박하사탕이 4K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18년 만에 재개봉했다.
2022년 4월 30일에 전주국제영화제에서 4년만의 신작이자 첫 단편영화인 심장소리가 세계 최초로 공개되었다. 세계보건기구(WHO)와 베이징현대예술기금(BCAF)이 세계적 감독들에게 우울증을 주제로 한 단편영화를 의뢰해 제작한 영화이다. '심장소리'는 우울증을 앓고 있는 엄마를 구하기 위해 집으로 달려가는 소년의 이야기를 원테이크로 담은 영화다.
3. 저서
3.1. 소설
<rowcolor=#eee> 연도 | 제목 | 비고 |
1983년 | 전리(戰利) | 등단작품 |
1992년 | 녹천에는 똥이 많다 | |
1995년 | 소지 | |
1996년 | 집념 | |
2004년 | 운명에관하여 | |
2007년 | Lee Chang-Dong | |
미정 | Snowy Day and Other Storie |
3.2. 예술·대중문화
<rowcolor=#eee> 연도 | 제목 | 비고 |
2005년 |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각본집 | |
2019년 | 오늘의 영화 | |
2021년 | 시 각본집 | |
버닝 각본집 | ||
2022년 | 밀양 각본집 | |
2024년 | 오아시스 각본집 |
4. 필모그래피
이창동 감독 장편 연출 작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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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eee> 연도 | 제목 | 역할 | 비고 |
1993년 | 그 섬에 가고 싶다 | 각본, 조연출 | |
1995년 |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 각본 | |
1997년 | <rowcolor=#373a3c> 초록물고기 | 연출, 각본 | 감독 데뷔작 |
1999년 | <rowcolor=#373a3c> 박하사탕 | 연출, 각본 | |
2002년 | <rowcolor=#373a3c> 오아시스 | 연출, 각본 | |
2005년 |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 출연 | 다큐멘터리 영화 |
2007년 | <rowcolor=#373a3c> 밀양 | 연출, 각본, 제작 | |
2007년 | 두번째 사랑 | 제작 | |
2009년 | 여행자 | 제작 | |
2010년 | <rowcolor=#373a3c> 시 | 연출, 각본 | |
2011년 | 영화판 | 조연 | 다큐멘터리 영화 |
2013년 |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 | 제작 | |
2014년 | 도희야 | 제작 | |
2015년 | 우리들 | 기획총괄 | |
2016년 | 싱글라이더 | 시나리오 기획 | |
2018년 | <rowcolor=#373a3c> 버닝 | 연출, 각본, 제작 | |
2019년 | 생일 | 제작 | |
2021년 | 십개월의 미래 | 시나리오 지도 | |
2022년 | 심장소리 | 연출, 각본 | 단편영화 |
이창동: 아이러니의 예술 | 출연 | 다큐멘터리 영화 |
5. 수상경력
<rowcolor=#eee> 연도 | 시상식 | 부문 | 작품 |
1983 | 동아일보 신춘문예 | 중편부문 당선 | 《전리(戰利)》 |
1992 | 제25회 한국일보문학상 | 창작문학상 | 《녹천에는 똥이 많다》 |
1996 | 제32회 백상예술대상 | 영화부문 시나리오상 |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
1997 | 제33회 백상예술대상 | 영화부문 작품상 | 초록물고기 |
제33회 백상예술대상 | 영화부문 시나리오상 | ||
제33회 백상예술대상 | 영화부문 신인감독상 | ||
제35회 대종상 | 심사위원 특별상 | ||
제35회 대종상 | 시나리오상 | ||
제18회 청룡영화상 | 최우수작품상 | ||
제18회 청룡영화상 | 감독상 | ||
제17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 최우수작품상 | ||
제17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 신인감독상 | ||
제17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 각본상 | ||
제16회 벤쿠버국제영화제 | 용호상 | ||
1998 | 제3회 씨네21영화상 | 올해의 영화상 | |
제3회 씨네21영화상 | 올해의 신인감독상 | ||
제27회 로테르담 국제영화제 | 넷팩상 특별 언급 | ||
2000 | 제35회 카를로비바리 국제영화제 | 심사위원특별상 | 박하사탕 |
제35회 카를로비바리 국제영화제 | 돈키호테상 | ||
제35회 카를로비바리 국제영화제 | 넷팩상 특별 언급 | ||
제8회 춘사대상영화제 | 각본상 | ||
제37회 대종상 | 최우수작품상 | ||
제37회대종상 | 감독상 | ||
제37회 대종상 | 시나리오상 | ||
제21회 청룡영화상 | 각본상 | ||
제20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 최우수작품상 | ||
제20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 감독상 | ||
제20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 각본상 | ||
제2회 브라티슬라바 국제영화제 | 심사위원 특별상 | ||
2002 | 제59회 베니스영화제 | 감독상(은사자상) | 오아시스 |
제59회 베니스영화제 | 특별감독상 | ||
제59회 베니스영화제 | 경쟁부문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 | ||
제59회 베니스영화제 | SIGNIS상 | ||
제3회 베르겐 국제영화제 | 심사위원상 특별 언급 | 오아시스 | |
제3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 각본상 | ||
제22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 최우수작품상 | ||
제10회 춘사대상영화제 | 춘사대상 | ||
제10회 춘사대상영화제 | 감독상 | ||
제10회 춘사대상영화제 | 각본상 | ||
제1회 대한민국 영화대상 | 최우수작품상 | ||
제1회 대한민국 영화대상 | 감독상 | ||
제1회 대한민국 영화대상 | 각본각색상 | ||
제21회 밴쿠버 영화제 | 치프 댄 조지 인도주의상 | ||
2003 | 제39회 백상예술대상 | 영화부문 작품상 | |
제39회 백상예술대상 | 영화부문 감독상 | ||
제13회 브리즈번 국제영화제 | 넷팩상 | ||
제3회 대한민국청소년영화제 | 청소년이 뽑은 인기감독상 | ||
제15회 카스텔리나리아 국제청소년영화제 | 스리캐슬상 | ||
제8회 가르덴 독립영화제 | 관객상 | ||
2007 | 제1회 아시아태평양 스크린어워즈 | 최우수작품상 | 밀양 |
제6회 대한민국 영화대상 | 최우수작품상 | ||
제6회 대한민국 영화대상 | 감독상 | ||
제10회 디렉터스컷 어워즈 | 올해의 감독상 | ||
2008 | 제2회 아시아 필름 어워드 | 최우수작품상 | |
제2회 아시아 필름 어워드 | 최우수감독상 | ||
제10회 아시아영화평론가협회 | 각본상 | ||
제44회 백상예술대상 | 영화부문 감독상 | ||
2010 | 제63회 칸 영화제 | 각본상 | 시 |
제63회 칸 영화제 | 에큐메니컬상 특별언급 | ||
제19회 부일영화상 | 최우수작품상 | ||
제19회 부일영화상 | 각본상 | ||
제47회 대종상 | 최우수작품상 | ||
제47회 대종상 | 시나리오상 | ||
제30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 최우수작품상 | ||
제30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 각본상 | ||
제8회 대한민국 영화대상 | 최우수작품상 | ||
제8회 대한민국 영화대상 | 감독상 | ||
제8회 대한민국 영화대상 | 각본상 | ||
제4회 아시아태평양 스크린어워즈 | 감독상 | ||
제6회 대한민국 대학영화제 | 작품상 | ||
2011 | 제2회 올해의 영화상 | 최우수작품상 | |
제21회 트롬쇠 국제영화제 | 오로라상 | ||
제5회 아시아 필름 어워드 | 최우수감독상 | ||
제5회 아시아 필름 어워드 | 최우수각본상 | ||
제25회 프리부르 국제영화제 | 대상(황금시선상) | ||
제25회 프리부르 국제영화제 | 국제비평가연맹상 | ||
제47회 백상예술대상 | 영화부문 감독상 | ||
2012 | 제18회 클로트루디스 어워즈 | 각본상 | |
2018 | 제71회 칸 영화제 |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 | 버닝 |
제2회 신필름 예술영화제 | 신상옥 감독상 | ||
제25회 아다나 국제영화제 국제경쟁 | 최우수작품상(골든볼상) | ||
제27회 부일영화상 | 최우수감독상 | ||
제2회 핑야오 국제영화제 | 동서교류공헌상 | ||
제38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한국본부상 | ||
제55회 대종상 | 최우수작품상 | ||
제3회 프렌치시네마투어 | 에뚜왈 뒤 시네마상 | ||
제28회 오슬로 필름프롬더사우스 영화제 | 실버미러상 | ||
제7회 키웨스트 영화제 | 최우수외국어영화상 | ||
제12회 아시아태평양스크린어워즈 | 심사위원대상 | ||
제22회 토론토영화비평가협회 | 최우수외국어영화상 | ||
제44회 LA영화비평가협회 | 최우수외국어영화상 | ||
제3회 뉴멕시코영화비평가협회 | 최우수외국어영화상 | ||
제3회 뉴멕시코영화비평가협회 | 각색상 | ||
제1회 런던영화주간 | 최우수작품상 | ||
제1회 런던영화주간 | 감독상 | ||
제1회 런던영화주간 | 각본상 | ||
제18회 디렉터스컷 어워즈 | 올해의 특별언급 | ||
제1회 그레이터 웨스턴 뉴욕 영화비평가협회 | 최우수외국영화상 | ||
2019 | 제14회 오스틴영화비평가협회 | 최우수외국어영화상 | |
제4회 프랑스비평가협회 | 외국어영화부문 그랑프리 | ||
제10회 올해의 영화상 | 감독상 | ||
제16회 아메리칸 필름 어워즈 | 최고의 드라마영화상 | ||
제38회 벨기에 영화프레스연합시상식 | 대상 | ||
제16회 인터내셔널 시네필 소사이어티 어워즈 | 각색상 | ||
제21회 아시아영화평론가협회 | 감독상 | ||
제13회 아시안 필름 어워드 | 감독상 | ||
제13회 아시안 필름 어워드 | 공로상 | ||
제17회 피렌체한국영화제 | 코리아니 오리종티 | ||
제7회 MOOV 영화제 | 셈베네상 | ||
제45회 새턴상 | 최우수외국영화상 | ||
제5회 시네리브리 국제도서영화제 | 최우수 문학 각색작품상 |
5.1. 선정
제3회 씨네21 영화상[21] | |
1997년 | 올해의 영화상 초록물고기 |
2000 씨네21 선정 올해의 영화 | |
1위 | 박하사탕 |
2위 | 오! 수정(홍상수) |
3위 | 반칙왕(김지운) |
4위 |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류승완) |
5위 | 춘향뎐(임권택) |
5위 | 공동경비구역 JSA(박찬욱) |
2002 씨네21 선정 올해의 영화 | |
1위 | 생활의 발견(홍상수) |
2위 | 오아시스 |
3위 | 복수는 나의 것(박찬욱) |
4위 | 죽어도 좋아(박진표) |
5위 | 취화선(임권택) |
2007 씨네21 선정 올해의 영화 | |
1위 | 밀양 |
2위 | 천년학(임권택) |
3위 | 경계(장률) |
3위 | 우리학교(김명준) |
5위 | 숨(김기덕) |
2010 씨네21 선정 올해의 영화 | |
1위 | 시 |
2위 | 옥희의 영화(홍상수) |
3위 | 하하하(홍상수) |
4위 | 경계도시2(홍형숙) |
5위 | 부당거래(류승완) |
2018 씨네21 선정 올해의 영화 | |
1위 | 버닝 |
2위 | 살아남은 아이(신동석) |
3위 | 1987(장준환) |
4위 | 풀잎들(홍상수) |
5위 | 공동정범(김일란, 이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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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 와일드 보이즈 | ||
<colbgcolor=#a0522d> 2위 | 꽥꽥과 잉여인간 | ||
3위 | 팬텀 스레드 | ||
4위 | 버닝 | ||
5위 | 폴 상셰즈가 돌아왔다 | ||
6위 | 더 포스트 | ||
7위 | 밤의 해변에서 혼자 | ||
8위 | 살인마 잭의 집 | ||
9위 | 레토 | ||
10위 | 보물섬 |
한국영상자료원 2024년 한국영화 100선 | |
7위 | 시 |
- | 초록물고기 |
- | 박하사탕 |
- | 밀양 |
- | 버닝 |
6. 명예
6.1. 수훈
<rowcolor=#eee> 연도 | 수훈 | 형상 |
2002년 | 대한민국 문화훈장 보관문화훈장 | <colbgcolor=#eee> 파일:보관문화훈장 정장.png |
2005년 | 대한민국 근정훈장 청조근정훈장 | |
2006년 | 레지옹 도뇌르 훈장[22] Légion d'Honneur Officier | <bgcolor=#fff> |
이 전 장관은 예술가로서 문화부 장관으로 재직시 문화적 다양성을 지키는 스크린쿼터 유지에 기여하고 그가 만들어 온 영화를 통해 전세계에 끼친 문화적 공로를 높이 사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한다
프랑스 최고 영예의 명예 훈장
프랑스 최고 영예의 명예 훈장
6.2. 헌액
<rowcolor=#eee> 연도 | 헌액 |
2005년 | 리옹 뤼미에르 영화박물관 시네아스트 명예의 전당[23] |
2022년 | 뤼미에르영화제 오마주 인물 헌액 |
7. 영화제
<rowcolor=#eee> 연도 | 영화제 | 직책 |
2007년 | 제12회 부산국제영화제 | 심사위원회 위원 |
제8회 도쿄 필멕스 | 경쟁부문 심사위원 | |
제5회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 심사위원장 | |
2009년 | 제62회 칸 영화제 | 심사위원 |
2010년 | 제45회 카를로비바리국제영화제 | 국제경쟁부문 심사위원 |
2011년 | 제64회 칸 영화제 | 비평가주간 심사위원장 |
8. 연출 스타일
90년대 이후의 한국영화 문제작들이 수많은 캐릭터를 생산해냈지만 그 인물들 가운데 대다수는 그야말로 트렌드로 왔다가 트렌드를 타고 사라졌다. 그런데 유독 이창동의 인물들은 다들 주민등록번호와 주소가 정확히 찍힌 주민등록증 하나씩 지갑 안에 넣고 우리 주위에 섞여서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ㅡ 씨네 21 前편집장 조선희
ㅡ 씨네 21 前편집장 조선희
이념적으로나 배경적으로 그를 해석하려 한다면 할 말 없다. 그러나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목적이 뚜렷하다. 인간적이고 소박한 신념을 포장하지 않는다. 자의식 과잉도 없이 한국역사를 관통하는 소외된 자들을 다룬다. 완성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용기요, 현재로서는 유일한 감독이다. 그분의 생각과 발자취에 존경을 보낸다.
ㅡ 영화 감독 이윤기[24]
ㅡ 영화 감독 이윤기[24]
기본적으로 리얼리즘적인 연출을 고수하는 감독이다. 이창동 본인이 소설가 출신이기에 문학적 장치나 은유를 쓸때가 많으며 다소 완만하고 정적인 호흡과 거대한 격랑에 휘말리는 소시민 캐릭터, 관조적인 시선 등에서는 초기 허우샤오셴이나 에드워드 양 같은 대만 뉴웨이브의 영향도 일부 찾아볼 수 있다. 초창기에는 역사라는 소재가 대두되었다면 오아시스부터는 개인의 도덕이나 신념을 중심으로 관심사가 옮겨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26]
시나리오를 직접 쓰며 연출도 하지만, 촬영 때는 배우에게 직접 캐릭터를 창조할 것을 요구한다. 리얼리즘 영화를 만드는 만큼 억지스러운 연기는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거기다 배우 그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어도 안된다.
이런 연출 방식에 대해 이동진 영화평론가와의 인터뷰에서 직접 언급 한 적이 있는데
- 현장에서 구체적인 연기 지시를 내리지 않으신다고 들었습니다. 배우에게서 어떻게 연기를 뽑아내시나요.
"연기를 연출한다는 게 정말 어려운 거죠. 기본적으론 인간을 다루는 일이기 때문에 어렵다고 생각해요. 인간관계만큼 어려운 게 없잖아요. 제가 제일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내게 오만함이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제가 미리 정답을 갖고서 배우를 끌고 가지 않아야 한다는 거죠. 감독이 구체적으로 연기 지시를 하면 배우가 만들 수 있는 것을 한정 지을 위험성이 종종 생깁니다. 현장에선 사실 어디까지 배우에게 틀을 만들어주거나 열어줄 것인지 판단하는 게 어려워요. 늘 헷갈리고 실수하죠."
- 다시 찍을 경우, 왜 다시 찍는지 설명하시는 편인가요.
"저는 설명하는 편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문제는 배우들이 그게 설명이 아니라고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는 거죠.(웃음) 객관적인 연기 기준으로는 괜찮은데도 제가 아니라고 말하면 당황하겠죠. 내가 대는 이유가 모호하고 분명치 않으니까. 목소리가 너무 높다든지 포즈가 너무 길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고 애매모호한 느낌으로 이야기하니 당황스럽겠죠."
[부메랑 인터뷰] 감독 이창동이 작가 이창동과 다른 점,<이동진닷컴>,2007-05-22
"연기를 연출한다는 게 정말 어려운 거죠. 기본적으론 인간을 다루는 일이기 때문에 어렵다고 생각해요. 인간관계만큼 어려운 게 없잖아요. 제가 제일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내게 오만함이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제가 미리 정답을 갖고서 배우를 끌고 가지 않아야 한다는 거죠. 감독이 구체적으로 연기 지시를 하면 배우가 만들 수 있는 것을 한정 지을 위험성이 종종 생깁니다. 현장에선 사실 어디까지 배우에게 틀을 만들어주거나 열어줄 것인지 판단하는 게 어려워요. 늘 헷갈리고 실수하죠."
- 다시 찍을 경우, 왜 다시 찍는지 설명하시는 편인가요.
"저는 설명하는 편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문제는 배우들이 그게 설명이 아니라고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는 거죠.(웃음) 객관적인 연기 기준으로는 괜찮은데도 제가 아니라고 말하면 당황하겠죠. 내가 대는 이유가 모호하고 분명치 않으니까. 목소리가 너무 높다든지 포즈가 너무 길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고 애매모호한 느낌으로 이야기하니 당황스럽겠죠."
[부메랑 인터뷰] 감독 이창동이 작가 이창동과 다른 점,<이동진닷컴>,2007-05-22
영화 '시'에서 배우 안내상은 촬영이 시작되자마자 바로 퇴짜를 맞은 에피소드를 밝혔는데
감독님과 5년 만에 다시 만났다. <오아시스> 찍을 땐 연극하다가 건너온 거라 영화 쪽으론 너무 초짜였다. 촬영할 때 두렵고 떨리기만 했다. 이제 세월이 지났고 다른 경험도 쌓이고 하니 감독님께 나름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바로 깨졌다. (웃음) “지금 안내상씨는 본인의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안내상 씨가 윤정희 선생을 바라보면서 어떤 식으로 말할 것 같냐. 본인이 직접 느껴야 한다”고 하시더라. 난 ‘어떤 사람이 할머니한테 말을 걸 때 이런 식으로 하겠지’ 하고 설정해서 간 건데, 바로 지적받은 거다. 대체 감독님은 어떤 분일까, 너무 큰 가르침을 받았다.
[안내상] 나만의 신파, 정말 잘할 자신이 있다,<씨네21>,2011-05-19
[안내상] 나만의 신파, 정말 잘할 자신이 있다,<씨네21>,2011-05-19
위에서 안내상이 말한 ‘어떤 사람이 할머니한테 말을 걸 때 이런 식으로 하겠지’ 식의 연기가 배우들이 하는 보통의 메쏘드 연기다. 그러나 안내상 본인의 목소리로 안 한다고 퇴짜를 맞은 것. 그래서 이창동 감독이 늘 배우들에게 주문하는 한마디가 "연기 하지 마라" 이다. 참고로 이 영화에서 안내상이 맡은 역할은 싸이코나, 극단적인 캐릭터가 아닌 그저 학부모 역할이다. 학부모 연기를 하는데 본인 목소리로 안 한다고 지적한 것.[27]
그의 이런 연출 방식은 지독한 걸로 충무로에서 유명한데, 배우에게 이래라 저래라 식의 정확한 디렉션 없이, 밑도 끝도 없이 ‘다시’를 외치는 묘한 주문을 한다고. 같이 찍는 배우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고, 감독은 제대로 설명도 안 해주고 수십 번씩 다시 찍고, 찍은 뒤에는 "뭐가 더 나오겠냐."하며 억지로 OK한다고 하니 돌아버릴 지경. 설경구가 오아시스 촬영 당시에 일화를 밝혔는데 컷을 외치길래 무엇이 잘못되었냐고 묻자 배우 뒤에서 흔들리는 천막에 감정이 없어서 컷했다고. 충무로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전도연이 밀양을 찍다가, 배우 데뷔한 이래 처음으로 촬영포기 선언을 할 정도. 이런 밑도 끝도 없는 재촬영에 대한 에피소드의 원본인 스탠리 큐브릭 감독과 비슷한 성향을 보인다.
예를 들면 오아시스의 남자 주인공 '홍종두'을 개에 비유하며 설경구에게 말하길 "'암만 때리고 발로 차도 결국 주인 눈치 보며 슬금슬금 와서 꼬랑지 흔들어. 그게 홍종두야." 영화 시에서 손자 역할을 맡은 이다윗에게는 "한쪽 눈에는 분노를 담고, 또 다른 한쪽 눈에는 죄책감을 담아서 해보자." 등등
이런 식의 언급만 하고는 나머지는 배우가 직접 완성해줄 것을 주문한다. 그리고 만족할 만한 수준이 나올 때까지 계속 찍는다. 계속 ...[28] 거기다 도통 만족을 모르는 그의 성격 때문에 촬영장에서는 밑도 끝도 없는 자책을 한다니 그걸 바라보는 연기자는 멘탈 붕괴가 올 만하다.
그래서 그와 작업한 배우들은, 촬영을 하는 기간만큼은 그를 굉장히 미워한다고.[29]
이렇다보니 '버닝' 기자회견에서는 한 기자가 이창동에게 '변태 감독'이라며[30] 본인의 연출 스타일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다. 이에 대해 이창동은 "나의 연기론이랄까 이런 건 단순하다"라며 "그냥 뭘 만들어서 표현하지 말고 그 인물의 감정을 배우가 받아들이고 그 감정과 상황에 살아가는걸 요구할 뿐이다. '테이크가 많이 간다. 쥐어 짜서 극한에 몰아친다' 이런건 내 연기론하고는 반대되는 방식이다. 목표를 가지고 몰아붙이진 않는다. 배우 스스로 그 인물에 감정에 가져가기를 바랄 뿐이다"라고 해명 아닌 해명을 했다.[31] '버닝'의 경우에는 인물들을 어려운 상황으로 몰아붙이는 장면은 별로 없고, 지극히 일상적이지만 상황 자체는 미묘하기 때문에 배우들이 좀 더 자유롭게 접근하길 원했다고 한다. 특히 젊은 배우들과 작업했기 때문에 현장에서 권위적이지 않고 대화를 많이 하려고 했다고 하는데, 이건 유아인, 스티븐 연, 전종서 모두 동일하게 얘기하는 점이다.
그러나 영화가 개봉하면 예외없이 평단의 호평을 받는다. 영화의 흥행은 안 될지 몰라도, 배우들이 그전까지 가지고 있던 틀을 부수고, 새로운 면을 발산하도록 만든다. 스타가 아닌 배우가 되고 싶은 연기자들에게는 어쩌면 최고의 감독인 셈.
그런 이유로 내로라하는 탑스타들이 함께 작업하기를 원하는 대표적인 감독.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인터뷰에서 심심찮게 그의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고 밝히고 있다. 정우성, 하정우, 임수정, 안성기, 엄정화, 한효주 등등. 원빈 역시 출연하길 원해 이창동 감독의 영화만 몇 년째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9. 캐스팅의 대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DVD 코멘트 하는 것조차 꺼리지만 스스로도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캐스팅 능력.역할에 가장 적합한 인물을 고르는 걸로 정평이 나있다. 하지만 그의 영화 오디션은 까다롭기로 유명한데 영화에서 그냥 지나가는 단역도 꼼꼼하게 고른다고.[32] 너무 예쁘고 잘생기면 플러스 요인이 아니라 되려 평범하게 생기지 않아서 대부분 불합격. 박하사탕의 두 주연 배우였던 설경구 문소리는,연기도 연기지만 얼굴이 평범하게 생긴 것도 캐스팅의 주요 이유였다. 버닝의 주연인 유아인도 잘생긴 외모로 많이 알려졌음에도 버닝에서의 모습은 촬영현장에서 카메라를 빼면 아무도 유아인으로 못 알아볼 연기를 보여준다.
오디션장에서는 연기보다도 감정을 먼저 보는 편. 밀양에 유괴범 딸로 나왔던 송미림 양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오디션을 보다 거의 포기상태에서 뽑힌 케이스. 경남 양산에 중학교 선생님의 소개로 그 학교 학생들을 오디션 보다 뽑았다고 한다. 이 학생은 아주 원해서 나온 것도 아니고 반에서 몇 명 차출해서 나왔는데 합격한 것. 합격 이유가 눈물 연기를 시켰더니, 금세 코가 빨개지는 것을 보고 뽑았다고.
배우를 보는 안목이 탁월하다. 그전까지 크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영화에 출연한 후 본격적으로 영화나 드라마에 들어온 배우가 한 둘이 아니다. 아래는 그의 영화를 통해 데뷔했거나 주목받은 배우들이다.
- 송강호: 초록물고기 '판수' 역 / 이후 영화 '넘버 3', '쉬리' 등에 캐스팅
송강호의 데뷔작은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지만 그가 영화배우로서 데뷔작으로 꼽는 작품은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다.[33] 송강호가 출연한 연극 '비언소'를 보고 이창동 감독이 직접 캐스팅 했는데, 촬영 당시 출연 배우들[34]이 처음 만나 식사하는 자리에서 부담스러울 만큼 송강호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고. 그때 자신감을 얻은 송강호는 이 영화에서 인상 깊은 깡패 연기를 선보인다."이창동 감독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촬영 당시 한석규는 송강호를 자신의 소속사에 넣어주고, 다음 작품 넘버 3, 쉬리까지 동반 출연한다. 뿐만 아니라 이 작품을 통해 영혼의 파트너가 되는 봉준호 감독과도 첫 만남을 가지게 된다. 당시 영화 모텔 선인장의 연출부였던 봉준호 감독과 1987의 장준환감독이 이 영화 속 송강호의 연기에 반해서 사심으로 그를 현장에 초대해 이야기를 나눈 것. 정식 오디션은 아니었으나 이 만남 후 봉준호가 남긴 정성스런 음성메시지에 감동했던 송강호는 봉준호의 두번째 작품 살인의 추억의 주인공을 맡게 된다. 이러한 이유들로 송강호는 이창동 감독을 '일생의 은인'이라고 여긴다.[35]
- 정진영: 초록물고기 '셋째 형' 역 / 이후 영화 '약속'에 캐스팅
원래는 이 영화의 연출부였으나 이창동 감독의 권유로 출연한다. 정진영은 원래 배우보다는 연출에 뜻이 있었으나 초록물고기 촬영 당시 이창동의 권유로 배우로 전향한 케이스.
- 설경구: 박하사탕 '김영호' 역 / 이후 '공공의 적' '오아시스' 등에 캐스팅
설경구는 박하사탕 출연 전까지는 뛰어난 연극배우였으나 영화판에서는 그저 흔한 조연 연기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상술한 대로 한석규 캐스팅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주연으로 캐스팅된다. 박하사탕은 극장 개봉 전 2000년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에 선정된다. 그 당시 자신이 영화를 망쳤다는 생각에 무대 인사 할 때도 죄인된 심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고. 그리고 영화가 끝난 이후 2시간 30분 뒤에는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힐링캠프에서 술회했다.[36]
- 문소리: 박하사탕 '순임' 역 / 이후 '바람난 가족' '오아시스' 등에 캐스팅
문소리는 박하사탕에서 주인공 '김영호'의 첫사랑 역인 '순임'역으로 데뷔를 했다. 그 후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을 찍은 뒤, 오아시스로 충무로의 새로운 히로인으로 주목 받기 시작했다.
- 고서희: 박하사탕 '경아' 역 / 다른 작품: 살인의 추억에서 '여순경',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
- 전종서: 버닝 '신해미' 역
연기 경력이 전무했던 전종서는 '버닝'의 여자 주인공으로 데뷔하고, 데뷔작으로 칸 영화제를 통해 전세계에서 얼굴을 알렸다. 이후에 스릴러 영화 '콜'에 출연했고, 할리우드까지 진출해 영화 '모나리자 앤 더 블러드 문'의 주인공을 맡았다.
10. 여담
- 어릴 적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다.
대구 명덕국민학교 재학 당시 김수용 감독[37]이 연출한 '저 하늘에도 슬픔이' 라는 작품이다. '이윤복'이라는 한 어린이가 불우한 가정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며 적었던 일기가 책으로 출간 된 후 공전의 히트를 쳤는데, 그 일기책을 영화한 작품이다. 제작진은 특별히 실제 이윤복의 학교에서 촬영했는데(물론 배역은 아역배우가 했다.) 이창동 감독은 이윤복과 같은 반이었던 것.[38]
- 살면서 고생이 엄청 많았다고 한다. 어릴 때는 경제 활동을 하지 않는 이상주의 좌파였던 아버지 때문에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다고. 그의 단편 소설 '용천뱅이'에 나오는 '김학규'가 그의 생전 아버지 모습과 비슷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삼수 시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자살시도를 하려 한 적도 있다고.
- 단편 소설 '소지'가 성우 성병숙이 낭독한 오디오북으로 제작되었다.
- 친누나가 뇌성마비를 앓고 있다고 한다. 뇌성마비 장애인 캐릭터는 데뷔작 <초록물고기>에 이어, <오아시스>에서 집중적으로 다뤄졌다.
- 1984년 다섯살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었다. 당시 신일고 학생에 따르면, 아들을 잃은 후 학생들에게 자습을 시킨 다음 자신은 창문 밖 하늘만 바라보다가 나갔을 정도로 상심이 컸다고 한다. 그때의 상황과 심정은 그의 단편 소설 '불과 먼지'에 구구절절히 묘사되어 있다. 밀양에서 아이 잃은 슬픔에 대한 지독한 연출이 괜히 나온게 아닌 것.
- 충무로 내에서는 인격적으로 굉장히 존경받는 감독이다. 단역들에게도 90도로 인사하고, 촬영이 끝나면 감독이면서도 스탭들과 함께 조명을 나르는 것은 유명한 일화. 유명하지 않은 시상식에 초대 받아도 얼굴만 비추고 가는 게 아니라 식이 끝날 때까지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 자신은 상업적으로는 성공하기 힘든 작품을 하지만 상업적인 영화 감독들하고도 친분이 아주 두텁다. 그의 데뷔작부터 도움을 줬던 강우석 감독과는 막역한 사이. 강우석 감독은 이창동 감독의 영화에 투자를 하는 이유를 딱 한 줄로 설명했다. "그 사람이 좋아서."
- 참여정부의 정책통이자 실권자였던 김병준과도 친분이 있다고 한다. 중학교 동창이기 때문인데, 이로 인해 김병준은 이창동의 문화관광부 장관을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이창동과 같이 예술적 가치가 있고 희소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관료사회에서 때 묻히기보다는 본인이 좋아하고 하고 싶어하는 영화계에 있게 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이유.
- 개그맨 남창희가 이창동 얼굴모사를 하는데 상당히 비슷하다.
- 데드풀, 어벤저스는 잘 모르고 그런 영화는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발언을 했다고 해서# 일부 히어로 영화 팬들에게 눈총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런데 발언을 잘 보면 경쟁 영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묻는 기자의 단골 질문에 답한 것이다. 이창동은 그 영화들을 잘 모르니 대답할 수가 없고 다만 이 영화들의 흥행 강풍이 지나가길 바랄 뿐이다라는 취지로 말한 것이다.
- 배우 이중옥은 이창동의 조카이다.
- 〈오아시스〉에 대해,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비판적 논조로 평론한 일화가 유명하다. 한국 영화평론계 레전드 사건 중 하나로 꼽히며, 이창동 영화의 많은 팬들이 정성일에게 등을 돌리게 된 사건이기도 하다. 여담으로 당시 한예종 교수였던 이창동이 이 평론을 읽고 그날 강의를 휴강해버렸다고 한다. 그래도 버닝이 나온 이후로 여러방면으로 비평하고 언급하며 이창동 감독을 한국영화에 꼭 필요한 중요한 감독으로서 언급했다.
- 2010년 제63회 칸 영화제 각본상 수상은 한국영화 역사상 최초의 칸 영화제 각본상이다.
▲ BFI London Film Festival 2018 인터뷰 |
10.1. 청룡영화상과 관련된 여담
자세히 보면, 2000년 이후로 청룡영화상 수상이 없는데, 이건 조선일보에서 주관하는 시상식이라는 이유로 2002년부터 출품을 거부해 노미네이트 자체가 되지 않고 있기 때문. 2010년대에 들어서는 청룡영화상이 대종상에게 열심히 빅엿을 먹여주면서, 다시 재출품을 할 가능성이 있지 않냐고 예상되으나, 2018년에도 출품을 거부했다. 청룡 측은 이에 오아시스, 밀양, 시, 버닝 등 이창동 작품들은 최우수작품상과 감독상 후보 심사에 제외했지만[39] 출연 배우들과 스태프들 부문의 후보 심사는 진행했다고 밝혔다.참고로 대종상에는 한 번도 참석한 적이 없다.[40]
11. 외부 링크
- 윤정희, "'시' 어려운 영화 아니다" [칸 인터뷰],<OSSEN>,2010-05-22
- 경계 이쪽과 저쪽, 그리고 파열음 - 이창동감독,<프레시안>,2003-02-22
- 로저이버트 "시" 리뷰
- 프랑코포니 글로벌 K-cinema 특강 및 대담2022년 9월 29일
12.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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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총리 겸 재정경제부장관 | <colcolor=#D6C94D> 김진표 → 이헌재 → 한덕수 → 권오규 | |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장관 | 윤덕홍 → 안병영 → 이기준 → 김진표 → 김병준 → 김신일 | |
과학기술부장관 → 부총리 겸 과학기술부장관 | 박호군 → 오명 → 김우식 | |
통일부장관 | 정세현 → 정동영 → 이종석 → 이재정 | |
외교통상부장관 | 윤영관 → 반기문 → 송민순 | |
법무부장관 | 강금실 → 김승규 → 천정배 → 김성호 → 정성진 | |
국방부장관 | 조영길 → 윤광웅 → 김장수 | |
행정자치부장관 | 김두관 → 허성관 → 오영교 → 이용섭 → 박명재 | |
문화관광부장관 | 이창동 → 정동채 → 김명곤 → 김종민 | |
농림부장관 | 김영진 → 허상만 → 박홍수 → 임상규 | |
산업자원부장관 | 윤진식 → 이희범 → 정세균 → 김영주 | |
정보통신부장관 | 진대제 → 노준형 → 유영환 | |
보건복지부장관 | 김화중 → 김근태 → 유시민 → 변재진 | |
환경부장관 | 한명숙 → 곽결호 → 이재용 → 이치범 → 이규용 | |
노동부장관 | 권기홍 → 김대환 → 이상수 | |
여성가족부장관 | 지은희 → 장하진 | |
건설교통부장관 | 최종찬 → 강동석 → 추병직 → 이용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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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1957년생으로 제22회 전주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았다.[3] 이창동의 영화들을 제작한 파인하우스 필름의 대표다.[4] 드라마 작가로 가시고기, 눈먼 새의 노래 등의 각본을 담당하였다.[5] 이창동처럼 문단에 등단했다가 영화감독이 된 케이스로는 유하 감독이 있다. 소설가 천명관 또한 이창동 같은 케이스에 속한다.[6] 참고로 그의 형제 세 사람은 모두 문화계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했었다.[7] 당장 아이들 공납금 낼 돈은 없어도 제사는 옆집에서 돈을 빌려서라도 지내는 집안이었다[8] 중종반정공신으로 청해군에 봉군. 호조참판 등 역임[9] 불천위 종가출신으로 그의 할아버지가 종손이다[10]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경북 교육감으로 출마한 이찬교 후보와 인연이 있다고 한다.[11] 문학과 지성사에서 출간[12] 이 영화의 조연출들이 지금은 유명한 감독들이 되었는데 이창동을 포함, '8월의 크리스마스'의 허진호, '인어공주'의 박흥식, '킬리만자로'의 오승욱, '행복한 장의사'의 장문일까지 조연출 5명이 훗날 감독이 되었다.[13] 1위는 8월의 크리스마스, 두 작품 모두 주연 배우는 한석규.[14] 이 경험은 시위에 참가했던 경험이 아니었다. 5.18 당시 경북대학교 사대 4학년이었던 그는 대구에서 친구들과 고스톱을 치고 있었다. 이후 자신이 희희낙락하며 놀던 그 순간,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학살이 일어났었다는 것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15] 반면 한석규는 박하사탕 대신 심은하와 함께 스릴러물 '텔 미 썸딩'에 출연했으나 좋은 평가를 듣지 못하고, 이후 2002년 '이중간첩'으로 복귀하기 전까지 3년을 쉬었다. 그 기간 동안 들어온 수많은 시나리오 중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었으나, 박하사탕을 놓친 것을 두고 두고 후회했다고 전해진다. 한석규가 시나리오를 꽤 보는 배우라는 것을 생각하면. 한석규가 고사할 당시, 이창동 감독은 직접 찾아가 한석규를 설득했으나 실패했다. 만약 그 때 한석규가 이 영화를 선택했다면, 한석규의 롱 런은 훨씬 길었을 것이다라는 예상도 있다. 물론 설경구라는 걸출한 배우는 훨씬 뒤에 발견했겠지만.[16] 위에도 적었지만 친동생이 대표로 있는 영화사로, 밀양으로 처음으로 크레딧을 올렸다. 사실상 이창동 소유의 영화사라 할 수 있다. 이창동 영화 이외엔 호러 영화 고양이: 죽음을 보는 두 개의 눈를 만들기도 했다. 이창동과 이준동이 제작에 관여했다고. 원래 이창동 감독은 제작에 자주 참여한다. 고양이 이전에도 그는 하정우 주연의 두 번째 사랑, 김새론 주연의 여행자들을 직접 제작했다. 파인하우스 필름은 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제작사로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해 고양이, 화이, 도희야를 제작했다.[17] 늘 그렇듯 칸 영화제 수상하고 나니깐 영화진흥위에서는 '오해'라며 해명하였다. 근데 그 해명 내용도 '우리가 0점 준 건 각본이고 상을 받은 것은 영화화된 각본이었다, 그러니까 오해없으시길'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로 횡설수설인 내용이었다.[18] 설경구·원빈·장쯔이, 이창동 신작 출연 '논의 중', <세계일보>, 2013-07-16[19] [단독]이창동 감독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만남..숱한 잘못된 말들,<스타뉴스>,2017-01-24[20] 처음에는 '한 여성을 사이에 둔 재벌 남성과 택배 기사의 엇갈린 삶을 그린 작품'으로 알려졌지만 공식 보도자료에는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 온 세 젊은이 종수, 벤, 해미의 만남과 이들 사이에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사건을 다룬 작품'으로 공개됐다.[21] 1997년 개봉작을 대상으로 이듬해 초에 시상식을 열었다. 씨네21은 이후로 시상식을 없애고 연말에 올해의 영화, 영화인을 선정해 특집기사에 싣는 방식으로 변경했다.[22] '레지옹 도뇌르 훈장'은 '영광의 군단'이란 뜻을 가진 프랑스 국가 최고 훈장으로, 1802년 나폴레옹 1세가 정한 것으로 문화, 종교, 학술, 체육 등 사회 각 분야에서 공적을 이룬 사람들에게 수여된다.[23] 한국인 최초이자 유일하다.[24] '멋진 하루' '여자, 정혜'의 감독[25] 출처-2016년 cine21 1077호 인터뷰[26] 역사에 대한 시선이 사라진 건 아니고 좀 더 은유적으로 표출하는 경향이 강해졌다.[27] 이 배역은 사실 다른 중년 연기자가 먼저 캐스팅 되었다가 안내상이 대타로 들어간 역할이다. 한마디로 학부모 역할이라도 자신이 원하는 수준이 안 나오면 배역을 교체한다는 뜻.[28] 류승완 감독은 이창동 감독이 배우들에게서 엄청난 연기를 뽑아내는 비결을 영화 '오아시스'에 배우로 출연하면서 배웠다고 밝힌 적이 있다. 비법은, '원하는 게 나올 때까지 찍는다'...[29] 윤정희는 예외. 윤정희가 대선배이기도 하지만 워낙 밝아서, 그 기운을 그가 받아들였다고 술회한다. 그러나 촬영장에 응원차 찾은 문소리를 비롯한 이전에 작업했던 배우들은, 그가 무릎을 치며 OK를 외치는 걸 보고 황당해했다.[30] 상당히 무례한 단어인 것으로 보이지만 영상을 보면 농담식이다. 즉 기자도 나쁜 의미로 말한 건 아니다.[31] 하지만 이게 가장 어려운 연기일 수 있다. 표현하는 것을 직업을 삼는 배우에게 표현하지 말고 그대로 느끼라는 것은 어려운 주문이다.[32] 일례로 영화 '밀양'에 등장하는 다방 레지 역은 진짜 다방 레지들이었다.[33]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결혼 자금 벌려고 아르바이트 하는 심정으로 촬영했다는 일화가 있다.[34] 한석규, 심혜진, 문성근 등 그 당시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영화 배우들이었다.[35] 이후 송강호가 브로커로 칸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뒤, 이창동 감독에게 ‘예전에 의정부 나이트클럽에서 첫 장면 찍을 때 이런 날이 올 줄 누가 알았을까요‘라고 문자를 했다고 한다. 이창동 감독은 ‘난 알고 있었다‘라고 답장했다고.[36] 상영이 끝나고 뒤풀이를 하는데 자신의 옆에는 강제규 감독, 또 다른 옆에는 박중훈이 앉아 있었다고[37] 영화 '갯마을'. '안개' 등을 연출하며 문예 영화의 뚜렷한 족적을 남긴 명감독이다.[38] 이윤복은 1990년 38살의 나이에 지병으로 세상을 떴다.[39] 모든 작품의 시나리오도 이창동이 썼으므로, 각본상 역시 심사에 제외했을 것이다.[40] 2018년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할 때도 동생인 이준동 대표가 받았고, 이창동은 해외 프로모션차 LA에 있었다. 물론 프로모션이 없어도 참석을 안 했을 거란 가능성이 높다. 그 전에도 참석을 안 했으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