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25 00:33:42

불천위


1. 개요2. 종류
2.1. 국불천위(國不遷位)
2.1.1. 왕실2.1.2. 비왕실
2.2. 향불천위(鄕不遷位)2.3. 사불천위(私不遷位)

1. 개요

불천위()는 유교 사회에 있었던, 덕망 있는 인물에게 주어지던 서훈의 하나로, 부조지전(不祧之典)이라고도 한다. 불천위는 고대 중국의 분봉제(分封制)에서 유래됐다. 주나라의 봉건제에서는 당시 최초로 토지를 받고 제후에 봉해진 사람을 태조로 삼아, 종묘에 모시고 불천위로 삼았다. 즉, 불천위는 특정한 가문을 규정하는 기준점이기도 하다. 영세토록 제사를 지내는 만큼 알아보기도 쉬우니.

본래 유교에서는 4대봉사(四代奉祀)라고 하여 제주의 4대 위(부, 조부, 증조부, 고조부)까지의 제사를 지내는 것이 기본이었고, 이게 넘어가면[1] 매안(埋安)이라고 하여 신위를 사당에서 옮겨 땅에 묻고 더 이상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이는 이론적으로는 예기의 대전과 주자가례에서 유래한다. 예기에 따르면 제후의 적장자는 제후의 지위를 물려받으며, 차남 이하는 별자가 된다. 이 별자의 차남 이하, 즉 본인도 아버지도 장남이 아니라면 본인과 그 후손들은 그때부터 이른바 5세즉천(五世則遷)의 원칙에 의해, 고조부까지의 제사만을 지내고, 그 이상은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주자가례는 제후에게 적용되던 이 원칙을 사대부에게 확대 규정하면서, 5대조 이상의 신위는 땅에 묻거나 최장방[2]이 집으로 모시도록 규정하였다.

아무리 제사를 중요시하는 유교 문화권이라고 해도 조상제사를 무조건 지낼 수는 없었다. 4대까지만 해도 8+@의 신위[3]를 모시는 것도 후손 입장에서는 간단치 않은 일인데, 무작정 5대조 이상 할아버지·할머니의 제사까지 다 지내기란 아무리 자손으로서 효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고 해도 너무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선을 정해두지 않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모셔야 할 조상이 많아지는데 후손들에게 갈수록 민폐.

게다가 유교적 이론에서는 사람의 귀신은 기가 뭉친 덩어리라고 보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기가 풀어져 귀신이 사라진다고 보았다. 따라서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해도 무방하였다. 또한 하필 4대까지인 이유는 전근대 대가족 사회에서는 집안 어른이 좀 장수했다면 4대손까지는 보고 죽었기 때문이다. 어느 선에서 잘라야 하는데, 고인이 대충 4대손까지는 보고 죽으니까 4대봉사를 하자는 식으로 관습적 합의가 된 것.

그러나 예외적으로 고인이 특별히 출세했던 위인이거나 덕망이 있는 경우 신위(神位)를 사당에서 빼 옮기지() 않고(不) 후손들이 대대로 계속 제사를 지내는 것을 허용했는데, 이것이 바로 불천위이다. 특히 국가에서 나라의 위인을 불천위로 지정하기도 했는데, 이는 그 집안의 대단한 영예로 간주되었다.

코로나 19 시대에 직면하여, 불천위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퇴계 이황 선생의 종가(진성 이씨 가문)에서는 이황 선생 450주기(2021년) 불천위 제사를 원격 화상으로 치르기도 했다.보고시가 종손을 비롯한 몇 명만 직접 제사를 올리고 나머지 직계, 방계, 외가 후손들은 줌(zoom)으로 불천위 제사에 참석했다고 한다.

2. 종류

가장 권위 있는 것은 중요한 인물[4]의 경우에 나라에서 지정한 것으로 국불천위(國不遷位)라 불렸고, 종묘에 배향된 배향공신의 경우 해당 인물의 가문에서도 불천위로 제사를 지냈다. 한편 지방의 유림들에 의해 결정된 향(鄕)불천위나 문중에서 자체적으로 유명한 조상을 기리는 사(私)불천위 등도 있었다. 후기에는 심지어 집안 사람들이 합심하여 추대하는 가(家)불천위도 있다. 어쩌다 한 집에 불천위가 둘 이상 있으면, 그 사당은 따로 만드는 것이 원칙이다.

현대 대한민국 정부에서 당연히 국(國)불천위를 따로 지정하는 일은 없고, 지방의 유림들에 의해 추대되는 향(鄕)불천위도 1960년대 이후 새로 추대되는 경우는 사라졌지만, 이른바 양반 명가에는 아직 조선시대 불천위의 영향이 남아 있다. '문중 종가에서는 1년에 제사를 수십 번 지낸다'는 말이 있는데, 그 근거가 바로 이것이다. 내력이 오래된 집안이라면 당연히 불천위로 모실 만한 조상도 많기 때문이다. 다만 이 중에는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우암 송시열, 학봉 김성일, 충무공 이순신 등 누구나 인정하는 레전드 급(…)도 있는 반면, 객관적으로는 위인이나 덕망 있는 선비라 하기에는 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문중에서 알아서 모시는 이른바 사불천위도 적지 않기 때문에, 모든 불천위가 권위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불천위 제사를 모시는 종가가 국내에 정확히 몇 집인지 파악한 통계는 없다. 일설에는 279위라고도 하고, 통산하여 국불천위는 200여 집안, 향·사불천위는 280여 집안이 받았다고도 하고, 일설에는 대략 1,000집 정도의 불천위(不遷位) 종가가 있는데 왕실과 관계된 집안이 절반 정도라고도 한다. 현재는 국·향·사불천위를 엄밀하게 구분할 근거도 없고, 자료도 대부분 사라져 모두 불천위라고 통칭하고 있다.

2.1. 국불천위(國不遷位)

2.1.1. 왕실

국가에서 지정한 것으로, 개국군주, 나라의 영토를 넓힌 왕, 전성기를 연 왕 등 나라 발전을 이끈 왕이나 왕족, 공신들이 뽑혔다.

국가급 불천위가 시작된 것이 확실히 확인되는 건 통일신라부터지만 그 전에도 있었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닌데, 초대 군주나 대왕 등의 칭호를 받은 왕들이 다른 왕들보다는 확실히 다른 대우를 받았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신라신궁이나 탈해왕의 사당에 대한 기록, 그리고 장수왕 이후 고구려의 왕궁이 평양에 있었음에도 동명성왕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국왕들이 졸본으로 행차했던 것이 그 예.

통일신라 대 혜공왕(765~780) 때 이르러서 5묘제에서 미추왕을 김씨 왕조의 시조로 삼고, 태종 무열왕문무왕의 2위를 삼국통일의 공을 감안해 불천위로 정하며, 혜공왕의 조부 성덕왕과 부친 경덕왕의 친묘(親廟) 2위를 합쳐 5묘로 삼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일반적인 종묘의 운영과는 다른 신라만의 독특한 방식이다.[5] 신라 왕계가 난리가 나는 하대 들어서 무열왕계가 아닌 선덕왕원성왕이 즉위했을 때도 무열왕과 문무왕의 불천위는 건들지 않았고, 애장왕 때 따로 별묘(別廟)를 세워 불천위였던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의 신위를 아예 따로 봉안하고 자신의 직계 4위인 고조부 명덕대왕, 증조부 원성왕, 조부 혜충대왕, 부친 소성왕을 5묘에 부묘했다.

불천위는 고려를 거쳐 조선 대에 정교하게 다듬어지는데, 그 결과가 종묘다. 5대가 지나면 신주를 묻는 게 아니라 정전에서 덜 중요한 영녕전으로 옮기고 불천위는 정전에 모두 몰려 있는데, 아무래도 조선이 한국 역사상 가장 유교가 융성하고 사회적 의무가 강했던 시기니 제사를 안 지내면 불효, 불충으로 찍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6]

다음은 조선 왕들의 불천위 표다.
재실 근거
1실 태조(太祖) 개국 군주
2실 태종(太宗) 국가 기틀 마련
3실 세종(世宗) 제도 정비, 영토 확장, 문화 중흥
4실 세조(世祖) 여진족 토벌, 왕권 강화
5실 성종(成宗) 사림 등용, 조선 전성기
6실 중종(中宗) 폭군 축출, 사림 중용
7실 선조(宣祖) 국가 보전, 족보 오류 수정
8실 인조(仁祖) 폭군 축출, 국가 보전
9실 효종(孝宗) 북벌, 서인 등용
10실 현종(顯宗) 영조의 요구
11실 숙종(肅宗) 대동법 전면 시행, 정국 안정
12실 영조(英祖) 탕평책, 조선 중흥기
13실 정조(正祖) 조선 중흥기, 문체반정

이상 13명이 불천위로 지정되었고, 나머지 정전에 있는 순조, 문조(효명세자, 추존), 헌종, 철종은 조선 멸망 당시 4대가 지나지 않아 영녕전에 옮기지 않았고, 고종황제순종황제는 조선이 멸망한 뒤까지 살았지만 정전에 자리가 남아 있어서 들어간 경우다. 만약 조선이 망하지 않고 계속 지속되었다면 순조도 불천위로 지정되었을 것이고, 헌종, 철종 등 덜 중요한 왕은 영녕전으로 갔을 것이다. 고종은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였으므로 역시나 불천위가 되었을 것이다.

사실 생전에 나라 망해서 불천위에 지정되고 말고의 논의가 있을 수 없는 고종과 순종과 아예 임금 취급을 못 받은 연산군과 광해군을 뺀 23명만 놓고 보면 불천위에 지정 안 된 왕이 더 적고 우리 눈에는 이 사람은 왜 불천위에 지정되었나 싶은 왕도 많다. 그러나 아무래도 불천위를 지정할 때에는 해당 왕의 아들이나 손자가 재위중인 만큼 왕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높여서 간접적으로 자기 권위를 든든히 할 수도 있고 일단 또 그런 논의가 나오면 신하들 입장에서는 반대하기 어려우므로 불천위 지정은 쉬울 수 밖에 없다. 실제로도 왕이 죽자마자 불천위를 청하는 사례도 있었는데, 정조의 경우 겨우 순조 즉위년 11월에 불천위를 청하고 받아들이는 내용이 나온다. 죽은 지 반년도 안되어 불천위 청원이 나온 것.

2.1.2. 비왕실

임금 말고도 중요한 인물, 즉 왕자, 부마 등의 왕족이나 2품 이상의 시호를 받은 신하 중 주요 인물의 경우 나라에서 지정한 것으로, 그 집안의 대단한 영예로 간주되었다. 국불천위가 되는 것은 임금이라도 쉽지 않았던 판에, 양반 사대부에게는 하늘의 별따기였다.

공신이 아닌 경우, 특히 여성이 그 개인의 공적으로 인해 서훈을 받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는데, 음식디미방을 쓴 정부인(貞夫人) 안동 장씨 장계향(張桂香)이 국불천위를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2.2. 향불천위(鄕不遷位)

마을, 특히 마을의 유림들이 불천위로 추대한 경우로, 서원에서 제사를 지낼 때나 학파의 시조를 제사지낼 때 등이었다. 다만 조건이 아주 까다로웠는데, 시조나 중시조(中始祖)이면서 국가에 큰 공헌을 세우거나 높은 벼슬을 지내 가문을 부흥케 했으며 유림들 사이에서 덕망이 크고 학문이 깊은 것으로 알려져야 했다. 이렇듯 까다롭다 보니 지정되기가 쉽지 않았는데, 이이나 이황 등은 너나 할 것 없이 인정했지만 기대승이나 조식 등 오늘날에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더라도 당시에는 논란을 일으킨 경우 지정받을 수 없었다. 물론 지정되는 데 세월이 걸렸을 뿐이지 결국에는 불천위로 인정되었다.

2.3. 사불천위(私不遷位)

문중 단위에서 불천위를 지정한 경우로, 주로 시조나 중시조, 입향조, 고위 관직 출신 조상이 그 대상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지나치게 남발되어 신분제가 붕괴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불천위로 지정된 조상이 많을수록 그 가문은 명문가임을 증명하는 것과 마찬가지니, 족보를 위조하거나 갖은 이유를 들어 불천위로 지정했다.

사불천위 인물의 판단 기준은 개인마다 다른데, 시호는 물론 학자로도 크게 인정받지 못했지만, 문중 차원에서 자기 조상 가운데 한 분을 가문의 권위와 위신을 위해, 집안이 개인을 위해 정자를 짓고 서원을 세워 불천위로 옹립하기도 했다.#





[1] 그러니까 아버지가 사망해서 아들이 제사를 물려받으면, 아버지의 고조부가 4대봉사에서 빠진다.[2] 4대 이내의 자손 가운데 항렬이 가장 높은 사람[3] 부·조·증조·고조와 그 정실부인(妻)들까지 8명이고, 이 조상들 중에서 부인이 먼저 사망하여 재혼했다면 후처까지 신위를 같이 모시므로 더 늘어날 수도 있다. 거기다가 후손이 정실 소생이 아니기라도 하면…….[4] 왕이나 왕자, 부마 등의 왕족이나 2품 이상의 시호를 받은 신하 중 주요 인물.[5] 이에 대해서는 천자가 7묘, 제후가 5묘를 두도록 한 기존의 예법과의 절충이었다는 지적도 있다. 형식적으로나마 당의 제후국을 자처하고는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천자로써 행세하면서(외왕내제) 천자국 제도에도 맞고 제후국으로써의 제도에서도 벗어나지 않는 형식을 취했다는 것.[6] 조선 시기가 군약신강이네 뭐네 하지만 그건 아니다. 실제로 조선 왕들은 왕권이 강했다. 그런데 왜 군약신강이란 말을 들을 정도였냐면 왕권은 강한데 그걸 휘두르기에는 제약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 왕들은 마음만 먹으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권신조차 하루 아침에 역적으로 몰아 죽일 수 있었지만 연산군처럼 막 나가면 폐위당할 수 있던 것.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