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통합민주당 | → | 민주당 | → | 통합민주당 |
민주당 | |
다른 표기 | <colbgcolor=#fff,#191919>Democratic Party(DP), 民主黨 |
창당일 | 2007년 6월 27일 (중도통합민주당) |
당명변경 | 2007년 8월 13일 (민주당)# |
해산일 | 2008년 2월 17일 (통합민주당으로 합당) |
대표 | 박상천 |
원내대표 | 최인기 |
사무총장 | 김충조 |
정책위의장 | 김송자 |
의석 수 | 8석 / 299석 |
당 색 | 청록색 (#00736D, Blue Green) |
정책연구소 | 국가전략연구소 |
중앙당사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나루로 67 (여의도동) |
공식 사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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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민주당(民主黨)은 2007년 6월 27일 중도개혁통합신당과 민주당이 합당하여 만들어진 중도통합민주당이 같은 해 8월 13일 명칭을 바꿔 활동한 대한민국의 정당이다. 2008년 2월 17일에 해산되어 대통합민주신당과 통합민주당으로 신설합당하였다.중도통합민주당의 김한길계 세력(구 중도개혁통합신당)들이 대통합민주신당 참여를 위해 탈당하면서 잔류한 세력으로, 당사도 중도통합민주당 시절 건물을 그대로 썼다.
2. 역사
2.1. 김한길계 탈당
2007년 7월 말에 중도통합민주당에서 6명의 의원이 탈당하였고, 8월 3일에는 김한길 공동대표를 비롯한 19명의 의원들이 탈당하자, 중도통합민주당 이름으로 활동한 지 2개월이 채 안 되어 다시 합당 이전의 상태[1][2]로 돌아갔다.2.2. 2007년 대선
이후 2007년 대선 독자 주행을 감행했으나 국민중심당에서 탈당한더군다나 이인제의 대통령 출마에 불만을 품은 당 핵심 인사들의 이탈이 시작되었는데 11월 7일에는 신국환 의원의 탈당 및 대통합민주신당 입당이 있었다. 이인제 후보나 박상천 대표도 이런 상황을 알고 신당 측 정동영과 후보 단일화와 지분 나눠먹기를 협상하였으나 정동영은 (당연히) 7:3을 내세웠고 이인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실 대통합민주신당 입장에서는 7:3도 아까운 상황이다.[3]
이후 탈당 릴레이는 계속 이어졌고, 11월 23일에는 조순형 前 대표와 그 계파가 전부 이탈하여 이회창과 이명박 지지를 선언하는 상황에 온다. 설상가상으로 강원도당위원장 겸 강원도 선대위원장인 유재규 전 의원이 대선을 일주일 앞두고 탈당을 했고, 대선을 이틀 남긴 시점에서 구민주계의 기반인 목포시 지역구 국회의원인 이상열 의원과 김대중 대통령의 장남인 김홍일 전 의원[4]까지 대통합민주신당으로 이탈해서, 이 시기엔 이인제를 제외하면 민주당에 지역구 의원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5] 비례대표 의원[6]들은 탈당하면 의원직이 자동으로 상실하게 되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당에 남았다.[7]
그렇게 16대 대선 당시 후단협 수준의 내분[8] 속에 치러진 제17대 대통령 선거 민주당 후보인 이인제는 0.7%의 득표율을 보이며 6위로 낙선하였다.[9]
2.3. 통합민주당으로 합당
자세한 내용은 통합민주당(2008년) 문서 참고하십시오.결국 이런 내부적 한계와 17대 대선에서의 충격적인 결과로 독자적인 정당으로서의 역할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당 대표인 박상천은 대선 패배와 함께 쇄신위원회를 출범시켰고, 쇄신위원장이던 김민석은 조순형 전 대표의 복귀 떡밥을 던졌으나 묻혔다. 게다가 2008년 새해 첫 날부터 박상천 대표와 갈등을 빚던 김경재, 김영환, 김성순 전 의원들과 비례대표 의원 전원(4명)이 연합하여 박상천 대표의 용퇴를 주장했다. 여기에 대선 당시에 당을 떠나지 않고 잔류했던 원외 지역위원장 및 지방의원들도 힘을 실어주면서 여전히 대선 패배의 후폭풍에서 벗어나지 못 하는 모습만 보여주었다.
이제 곧 야당이 될 대통합민주신당이 세력 통합의 필요성+민주당계 정당이라는 공통점 등의 사유로 2008년 2월 17일에 대통합민주신당과 신설 합당하여 통합민주당으로 재출범했다. 사실상 새천년민주당-열린우리당으로 분당된 지 4년 3개월 만에 원상 복구가 된 셈.
3. 역대 지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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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민주당 대표 ▶ | }}}}}}}}}}}}}}} |
- 대표
- 4대: 박상천 (2007.8.3. ~ 2008.2.11.)
4. 당가
찬란한 새 아침이 이 땅을 비출 때면 희망찬 내일 밝게 열린다 우리 함께 달린다 너와 나 하나 되어 힘차게 나아가자 민주당 새 시대 새 희망 창조하는 민주당 새 시대 열어가는 새 희망 민주당 화합과 개혁의 정치를 우리가 이뤄나갈 때 밝은 미래와 희망의 나라 우리 앞에 열린다 정의와 평화를 이루어 힘차게 나아가자 민주당 새 시대 새 희망 창조하는 민주당 새 시대 열어가는 새 희망 민주당 |
5. 역대 선거 결과
5.1. 대통령 선거
연도 | 선거명 | 후보 | 득표수(득표율) | 결과 |
2007 | 제17대 대통령 선거 | 이인제 | 160,708(0.7%) | 낙선(6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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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교섭단체로 강등되고 2005년 당시 민주당으로 당명과 로고를 원상복구했다. 아마 2000년에 창당한 새천년민주당의 직접적인 후신 정당이라는 정통성 강조와, 대통합민주신당이 약칭을 민주신당으로 하려고 하자 그걸 막으려고 도로 민주당으로 복구한 듯하다.[2] 다만 중도통합민주당은 신설합당이었기에, 불과 8개월의 존속이었지만 기준은 2007년 6월 합당이 되었다.[3] 소속 국회의원만 해도 신당이 민주당보다 10배 이상이 많았다.[4] 06.12 의원직 상실.[5] 최인기 원내대표도 탈당만 안 했을 뿐이지 사실상 정동영 지지에 가까운 독자 행보를 펼쳤다.[6] 이 중에서 한 사람이 후일 더불어민주당-국민의힘 양당의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은 김종인이다.[7] 이는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으로 당선된 지방의회 비례 의원들도 마찬가지.[8] 물론 그 당시 새천년민주당은 원내 2당이자 집권 여당이었기 때문에 후단협 자체가 큰 이슈가 되었지만 이 당시 민주당은 지역 기반마저 대통합민주신당에게 빼앗겼고, 겨우 원내 4당에 불과했으니 언론의 관심도 제대로 못 받았다.[9] 정말 참패했다. 특히, 경상도 지역에서는 허경영 후보보다도 득표율이 밀렸다. 이는 그야말로 굴욕 중의 대 굴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