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1 11:19:50

이근안

<colbgcolor=#000><colcolor=#fff> 이근안
李根安 | Lee Geu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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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38년 3월 21일 ([age(1938-03-21)]세)
경기도 양주군 (現 양주시)
신체 172cm, 90kg[1]
학력 한밭중학교 (졸업)
경동고등학교 (졸업)
병역 대한민국 공군 병장 만기전역
종교 불교개신교(예장합동개혁)
가족 배우자 신옥영, 슬하 3남[2]

1. 개요2. 일생
2.1. 경찰 시절
2.1.1. 고문 수법
2.2. 도피에서 심판까지2.3. 목회자로서의 행적2.4. 2010년 이후
3. 대중매체에서4.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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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경찰공무원, 前 목사. 독재정권에 영합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악랄하게 고문해 '고문기술자'로 불렸다. 노덕술, 하판락, 김태석일제강점기 친일 고문 경찰을 그는 군부독재 시기 고문 경찰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2. 일생

2.1. 경찰 시절

"고문은 예술이다."
- 이근안, 일요서울 인터뷰 발언#

1938년 경기도 양주군에서 태어나 경동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젊은 시절 공군 헌병으로 복무했다. 세는나이로 33살이던 1970년에 순경으로 경찰에 발을 들인 후 신분을 숨긴 채 줄곧 대공 분야에서 일하면서 1984년에 경감 승진까지 특진으로만 올라갔다. 순경이 14년만에 경감까지 올라갔으니 고문 기술이 특진의 비결이었던 셈이다. 당시 경찰에서는 "이근안이 없으면 대공 수사가 안 된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군사독재 시절의 대표적인 공안경찰(現 보안경찰)로, 재직 기간 내내 신원을 숨긴 채 민주화 인사와 무고한 사람들을 고문한 까닭에 그들 입장에선 '얼굴 없는 고문기술자'란 평판이 자자했다. 그에게 고문을 당한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90kg짜리 거구에 떡 벌어진 어깨, 구릿빛 얼굴, 핏발 선 눈, 굵은 목, 솥뚜껑 같은 큰 손을 지닌 우락부락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박 중령'과 '불곰'이라는 별명이 있었고 김철수라는 가명을 쓰기도 했는데 남영동 대공분실에 근무하던 1979년에 간첩 용의자가 현대중공업에 입사하자 본인이 저 가명으로 현대중공업에 위장취업하여 7개월간 노동자 생활을 하다가 검거했다고 한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 단체로 민주화청년운동연합이 있었고 현재 정치권과 시민 운동, 언론계 인사 상당수가 직·간접적으로 이곳 출신인데 민청련 의장으로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상징이었던 김근태를 전기 고문하는 등 많은 민주화 인사들과 무고한 사람들을 잔인한 방법으로 고문했다. 1979년 남민전 사건 관련자 이재문도 그를 비롯한 수사관들에게 고문받아 1980년 12월 대법원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뒤 1981년에 후유증으로 옥사했다.

경기도경찰국 공안분실장 시절 1986년부터 1991년까지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 당시 그를 경기도 화성경찰서로 발령 내서 대공용의점을 찾아보도록 했다고 하니 그가 한국 경찰 내에서 얼마나 촉망받는 엘리트였는지 알 수 있다. 하필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 당시도 엉뚱한 사람을 고문해 죽어나가게 한 일이 다수 있었음이 밝혀져 그가 여기에 한 획을 그었을 가능성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8차 문서 참조. 다만 그가 실제로 화성경찰서에서 근무한 적은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구체적인 근무 년도나 소속 부서 등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87년부터 민주노조 건설과 노동운동을 막기 위해 안보강사로서 삼성그룹 등 각 기업 직원연수회 등지에 안보강연을 125회나 나서기도 했다. 1979년 3월 17일에는 조선일보가 주는 청룡봉사상 충 부문도 수상했다. 신원이 드러날까 봐 이석우라는 가명으로 보도해 줬다고 한다. 물론 이 상을 추천한 것은 내무부일 테지만 이후에도 조선일보 측은 이 상을 취소하지 않았다. 이 수훈으로 경위에서 경감으로 1계급 특진했고 민투위 강도 사건을 중앙정보부조차 제치고 해결했다고 하는데 이 사건의 실체는 지금까지도 논란이 크다.

어쨌든 리즈 시절의 그는 이 사건으로 남민전이라는 거대한 비밀 결사를 낚아서 '훌륭한 공안경찰'이라는 칭송을 받게 되었다고 하니 판단은 각자 알아서 하길. 이후에도 정부의 비호를 받아 간첩검거 유공 4개를 포함한 16번의 표창을 받았으며 특히 1981년 '무림사건' 해결로 내무부 장관 표창, 1982년 '국가 안보 기여' 명목으로 21사단 표창을 각각 받았고 1986년 경찰의 날 당시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옥조근정훈장을 받았다.[3]

이미 1986년 1월 당시 고문 피해자 김근태는 이근안과 김수현 경감, 백남은 경정 등 고문 수사관들을 고소했으나 김근태도 당시엔 그의 이름조차 몰라 '성명불상의 전기고문 기술자'라고 써야 했는데 이마저도 1987년 1월 6일에 무혐의 처리되었다. 스는 조서 등을 작성할 때 국어사전을 항상 소지하였고 모르는 한자는 꼭 찾아서 썼다고 한다. 그가 직접 작성한 피의자 신문조서 및 진술서 등에 은, 는, 이, 가 같은 조사만 제외하고 전부 한자로 작성하여 이를 직접 본 법관들이 "이렇게 유식한 사람이 그런 몰염치한 고문을 행했을 리가 없다"며 고소가 기각당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다. 잘못 쓴 글씨가 있을 경우 대부분의 경찰은 그어 버리고 옆에 쓰거나 수정테이프 등을 사용했을 텐데 그는 새로운 종이에 처음부터 다시 썼다고 한다.

글씨체도 좋은 편으로, 왕년에 고시생들에게 추천되었던 이른바 백강고시체의 교과서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백강고시체는 글씨를 빠르게 쓰면서도 날리거나 지저분하게 쓰지 않고 큼직큼직하고 알아보기 쉽게 글을 쓰는 필체로 제한된 시험 시간 내에 많은 양의 글을 빠르고 읽기 쉽게 써야 하는 고시 대비용으로 적합하다. 실제로 21세기에도 악필인 고시생들이 백강고시체를 연습해서 시험을 보는 경우가 많았다.

파일:attachment/이근안/Example.jpg

4번 문제로 나와 있는 모세의 반석은 그의 답변대로 민수기의 내용 중 20장에 해당하며 20장 12절을 언급하는 것으로 볼 때 여기서 인용한 성경은 공동번역 성경으로 보인다. 한편, 같은 민수기의 35장 16절은 다음과 같다. 만일 쇠연장으로 남을 쳐죽였으면, 그는 살인범이다. 그러므로 그 살인범은 반드시 사형을 받아야 한다.

그와 같은 고문기술자들은 경찰, 검찰, 안기부, 군 수사기관, 교정기관 등지에 셀 수 없이 많았고 특히 대공/방첩기관 소속 수사관의 경우 이름 등 신원조차 알 수 없는 경우도 많았으며 이름 대신 '상무', '부장' 등의 직책명으로만 지칭되기도 했다. 이것 때문인지 심진구나 홍성담 등 일부 고문 피해자는 고문수사관의 얼굴을 몽타주로 그려내 수배하고자 시도했지만 경찰에 잡히고 역사에 고문기술자라고 남은 사람은 그를 비롯한 극소수의 인물들 뿐이다. 게다가 이근안 단 한 명을 법정에 세우려고 수십년 동안 유가족과 민가협 등 각종 시민단체가 싸워야 했다.

2.1.1. 고문 수법


당시 고문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의 회고에 따르면 몽둥이로 구타당하는 것이 가장 견디기 쉬웠다고 말했을 정도로 그의 고문은 다양하고도 악랄했다. 잠 안 재우기는 물론,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기본적인 고문으로 시행하였고 날개 꺾기, 통닭구이도 그가 처음 개발한 고문이며 관절 빼기는 유난히 힘이 좋았던 그가 1인자였다고 한다.

고문이라고 하면 기껏해야 사람을 때리고 잠 안 재우는 마석도 식의 진실의 방이나 드라마 제5공화국이분을 많이 생각하겠지만 그건 굉장히 큰 착각이다. 진실의 방은 기껏해야 하이바 씌워 놓고 때리거나 전기충격기로 지지는 정도가 전부이고 제5공화국도 몽둥이 찜질이나 물고문이 전부이다. 하지만 그는 물고문과 전기고문은 물론이고 후술하겠지만 사람의 성기에 볼펜이나 샤프심(!)을 쑤셔넣거나 무릎 관절을 으깨서 뽑아 버리는 등 진실의 방 따위는 우습게 보일 기상천외한 가혹행위들을 서슴치 않았다. 일단 간첩 혐의로 잡혀오면 누명을 씌우기 위해 자백을 받아내려고 굵직한 몽둥이로 수없이 구타한 뒤 멍자국을 볼펜 등 뾰족한 것으로 찌르는가 하면 칠성판에 몸을 묶고 얼굴에 수건을 뒤집어씌운 다음 샤워기를 들이대서 숨을 못 쉬게 하는 물고문, 새끼 발가락에 전깃줄을 감아 전류를 흘려보내는 전기고문이 이어졌다. 고문당하는 사람들이 실신해 구토할 시 소금물을 먹이고 다시 고문했다.

보통 공안사건에서는 "고정간첩으로 활동해 왔다"는 거짓 자백을 하고 나서야 고문을 멈췄다고 한다. 그는 연행자들 앞에서 한 손으로 사과를 으깨어 보이면서 "내가 손대면 반드시 입을 열게 되어있다"든지, "남민전 이재문이가 죽어나간 곳이다"라고 말하는 등 위협적인 말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등 심리적인 협박에도 능했다.

언론인이자 정치가였던 민병두가 1981년 '학림 사건' 으로 그에게 고문을 당한 경험이 있다. 민병두는 당시를 회고하며 "고문 기술자로 악명 높은 이근안은 선데이 서울을 보면서 전기고문의 볼트(V) 수를 올렸다 내렸다. 나 역시 온갖 종류의 고문과 잠 안 재우기 등의 고문을 당하고 동료들의 소재지를 댔다."고 고백했다.

김근태는 당시 상황을 말하기를 "그때는 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럽고 치욕적이었다"고 하였는데 2005년 2월 7일에 여주교도소로 그를 면회 가서 용서하고 사과까지 받아냈으나 1주 뒤 자신의 홈페이지 '일요일에 쓰는 편지' 코너 기고문에서 "저 사죄는 사실일까?" 라는 식으로 혼란스러운 마음을 내비치기도 했다. 당시 고문에 대한 김근태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상세한 내용은 서울대학교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 문서 참고.
소리를 지른다고 강하게 전류를 통하게 하고, 신음 소리가 나지 않도록 혀를 이빨로 꽉 물었다고 혀를 빼라며 강한 전류를 또 흘려보내고, 참으면 참는다고 또 그러고 이들의 목표는 총체적인 혼란, 착란상태로 돌입했다.

머리가 빠개질 듯한 통증이 오고 그 몰려오는 공포라니, 죽음의 그림자가 독수리처럼 날아와 파고드는 것처럼 아른 거렸읍니다. 전기가 발을 통해서 머리 끝까지 쑤셔 댈 때마다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읍니다.

전기고문은 담금질해서 뜨거운 불인두로 지져서 바싹 말라 바스락뜨리고 돌돌 말려서 불에 뛰기는 그런 것입니다. 전기고문은 핏줄을 뒤틀어놓고 신경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마침내 마디마디 끊어버리는 것 같았읍니다. - (1987년에 나온 <김근태의 이근안에 대한 기억>)

1971년 어로작업 중 납북되었다가 늘 감시 속에 살았던 김성학도 1985년 12월에 그에게 전기고문을 당하여 결국 척추 디스크가 다 녹아내려 장애인이 되고 말았다. 참고로 김성학이 어떤 사람이었냐면 국군정보사령부(AIU) 소속 북파부대[4]에서 군복무를 마쳤다. 김성학은 침투, 폭파, 암살 등의 혹독한 특수훈련을 받으며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죽어 버리자고 대검으로 몸을 그은 적도 여러 번이었다고 하는데 결국 이겨내고 복무를 마쳤다.

이러한 인간병기 수준까지 육성된 전사를 그는 납북되었다가 돌아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고문하여 결국 굴복시켰다. 옛말에 '매에는 장사가 없다'고 하지만 작전 중 북한군에게 잡혔을 경우 받게 될 모질고 혹독한 고문에도 견디도록 엄청난 훈련을 받았던 사람이었는데 현대는 훈련 과정에서 최대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철저한 감독과 지도 하에 훈련을 시행하지만 당대는 피훈련자의 안전과 생명은 신경도 쓰지 않았고 그 때문에 훈련 과정 및 병영 내에서의 사망사건 및 가혹행위도 만연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그 자체로 고문에 가까운 훈련과정을 마친 사람을 육체적, 정신적으로 굴복시켰을 정도였다면 얼마나 큰 강도의 모진 고문을 가해야 할지 도저히 상상하기 불가능할 정도다. 즉 악명높은 북한군보다도 더욱 악랄한 놈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애초에 죄가 없다는 걸 뻔히 아는 상태에서 누명을 씌우는 것이니 처음부터 풀려난다는 선택지 같은 것이 없었다. 쉽게 말해 극악의 답정너. 고문받는 입장에서도 적국에서 적군에게 고문받는 것과 자국에서 아군에게 고문받는 것은 차원이 완전히 다르다.

주로 의자에 앉혀 놓고 머리를 뒤로 젖히고는 얼굴을 수건으로 덮고 물을 따라 숨을 못 쉬게 하거나[5] 거꾸로 매달아 놓고 몽둥이로 내려치는 방법으로 고문하였다고 증언하였다(조선일보 1999년 10월 29일자). 참고로 물수건으로 물고문을 하면 폐에 물이 안 남는다고 한다. 흔히 일본 제국 경찰독립운동가들에게 행했다고 하던 '욕조에 머리 담그기' 식의 물고문은 숨이 막힌 피고문자가 결국 '커헉'하며 남은 숨을 토해내고 입을 열 때 입과 코를 통해 다량의 물이 들어가게 되는데 그 상황에서 사망해 부검되거나 생존하여 병원 진료를 받을 때 폐에서 물이 발견된다면 고문의 증거가 되기 때문에 6.25 전쟁 이후에는 잘 쓰지 않았다고 한다.

1983년 2월 사업체를 운영하던 함주명은 치안본부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63일을 구금당하며 이근안 외 경관 6명에게 43일간의 고문을 당하는 악몽 같은 나날을 보냈고 이후 15년간 옥살이를 해야 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진술했다.
한 일주일 동안 잠을 안 재우더군요. 사람이 일주일 동안 잠을 안 자면요, 몽롱한 정신 상태가 지속돼 마치 꿈처럼 모든 감각이 뒤떨어지고 먹먹해져요. 그런 후에 온몸을 개 패듯이 패요. 인간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잔인하게. 거의 실신 상태가 될 때까지... 이런데도 시인 안 해? 그러면서 퉁퉁 부어 옴쭉달싹할 수 없게 된 양 어깨를 볼펜심으로 쿡쿡 찌르는 거예요. 그래도 부인하면 사람 하나 딱 누울 만한 칠성판에 뉘어 놓고 사지를 찢어 5군데로 묶는 장치가 있어요. 그렇게 꼼짝할 수 없게 되면 이근안이 내 가슴 위로 올라타. 그리고 수건을 입에 덮어 씌운 다음 샤워 꼭지를 들이대면서 시인해! 시인해! 공기는 안 들어오고 물만 들어오는 거지. 그래도 시인 안 하면 새끼 발가락에 플러스 마이너스로 전류를 흘려보내요. 온몸에 전류가 흐르면 완전히 죽어나가게끔 돼요. 그때 희미하게 무슨 소리가 들리면 죽지 않으려고 손가락을 까딱까딱하는 거예요. 그럼 '그만, 풀어줘'. 그런 후 약간 정신을 차리면 조서 쓴 걸 보여줘요. 보면 다 엉터리로 조작돼 있지. 그럼 난 그렇게 간첩질하지 않았다고(원래 그런 적이 없으니까) 주장하면 또 고문이 시작되는 거예요. 이 새끼 아직 정신 못 차렸다면서. 안 당해본 사람은 몰라요. 이근안이 왜 고문 기술자인 줄 아세요? 딱 죽기 직전까지 고문하기 때문이에요. 죽지 않을 만큼 사람을 괴롭혀서 뭐든 시인하게끔 하는 지옥의 사자... 요즘도 내가 잠자다 깜짝깜짝 깬다면 믿겠어요?

믿기지 않겠지만 진짜다. 이러한 고문 기술 덕에 그는 종종 다른 기관까지 출장 고문을 다니기까지 했다.

위의 글을 보면 알겠지만 이건 육체적, 정신적으로 버티고 말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신체가 기본적으로 가지는 미세한 반응을 상황을 끼워맞춰서 이용하고 계속해서 고문하고... 애초에 정부랑 짜고 치는 고스톱이나 다름없다.

김근태의 수기 <남영동>에 따르면 그가 코에 짬뽕을 부어 폐기종을 만들어 버리겠다고 협박했다고 하며 간첩 조작이 벌어진 오송회 사건 피해자들도 수사 과정에서 짬뽕 고문을 당한 적이 있다.

그의 고문을 받고 수많은 사람이 거짓 자백을 하여 간첩 누명을 쓰고 교도소에 수감되어야 했고 출소 후에도 민주화 전까지 경찰 및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으며 고문 후유증으로 불구가 되었으며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이들 중엔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까지 한 사람도 있었다. 그 악명 덕분에 초창기 딴지일보에서는 SM녀 사진에 이 사람 얼굴을 합성한 것을 자료 사진으로 쓰기도 하였다.

여담으로 사실 그의 고문 수법은 그가 최초가 아니었는데 그의 잔혹한 고문기술의 원조는 일제강점기 친일 경찰 출신으로 강우규 의사를 체포했던 '고문왕' 김태석이며 그 다음이 김태석과 같은 일제 친일 경찰 출신이었던 노덕술, 그 다음이 바로 이근안이다.

2.2. 도피에서 심판까지

파일:이근안수배전단.jpg
이근안 현상수배 전단
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1987년 6월 항쟁6.29 선언은 그의 인생을 바꿨다. 1987년 12월 10일 고문 피해자 김성학이 재정신청을 처음으로 냈고 1988년 12월 15일에 고문 피해자 김근태 전 민청련 의장이 재정신청을 냈다.

같은 해 12월 19일, 문학진 한겨레신문 사회교육부 기자가 김근태를 취재하던 중 '얼굴 없는 고문 기술자'의 실체를 알아내기 시작했다. 이후 경기도경과 치안본부로부터 신원을 확보하는 등 반나절 동안 취재한 끝에 당월 21일 '그 고문경관'의 얼굴 사진과 함께 한겨레에 실어 처음 보도한 뒤 '이근안'이라는 실명 석 자와 그의 고문 행각이 알려졌고 24일에 김기춘 검찰총장이 그에게 고문혐의를 적용해 수사를 지시하자[6] 사흘 후 그는 우편으로 사표를 내고 잠적하여 무려 10년 10개월 동안 도피했다.

잠적 당시 항간에서는 '자살설', '암살설', '밀항설', '성형설' 등이 나돌았고 변장술과 은신술로 모습을 감춘다는 소문도 돌았다. 검찰과 경찰은 이근안 전담 검거반을 조직했는데 이 반을 주도한 사람이 모래시계 검사로 유명했던 홍준표였다. 한편, 민가협은 1989년 2월 18일부터 '이근안 현상수배' 캠페인을 10년 동안 전개하기도 했다. 도피 10년 동안 그는 1989년 초까지 몰래 기차 여행을 하다가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원동 공무원 아파트에서 여행과 은거를 반복한 뒤 1990년 초에 은거만 했고 자수 전까지 서울시 동대문구 용두동으로 옮겨 숨기도 했다.

그 사이 1991년에 김근태를 고문한 공범 김수현 등 4명이 징역 2~5년 및 자격정지 5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당초 그의 불법체포감금죄 공소시효는 1992년 9월까지였으나 공범들이 재판을 받으면서 시효가 정지됐고 1993년 대법원 확정판결 후 1999년으로 시효가 연장됐다가 1998년 10월 '납북어부 간첩조작 사건' 관련자 재판 회부로 인해 시효가 2013년까지로 연장되었다. 1999년 10월 21일에 그와 같이 일했던 경기도경 대공분실 전/현직 경관 8명 중 6명이 징역 1~2년을 선고받자 그는 1주일 후 수원지방검찰청 성남지청에 자수하였고 이로써 그의 도피 행각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수사 과정에서 박처원 전 치안감과 동료 대공경찰들의 도피 가담 의혹도 제기되었고 은둔하는 동안 수도자처럼 성경을 5번이나 읽고 자서전과 컴퓨터 공부책, 일본어 교본 등 39권을 집필한 게 알려지기도 했다.

2000년 대법원에서 징역 7년을 확정받았는데 기존에 확인된 다른 혐의는 공소시효가 만료되었기에 한 사건만 처벌받은 것이다. 이후 여주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2006년 11월 7일 만기 출소하였다. 다만 1986년 수여된 옥조근정훈장은 출소 전 박탈되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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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교도소에서 출소하여 차량에 올라타는 이근안

출소 당시 그는 "사회에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 그 시대엔 애국인 줄 알고 했는데 지금 보니 역적이다. 세상사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출소의 변을 대신했다. 그런데 이 후회가 거짓말이라는 것이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졌다.

2.3. 목회자로서의 행적

이미 도피생활 때부터 성경을 반복적으로 읽으며 개신교에 귀의했고 교도소 수감 중 교도소에 오던 목사에게 신학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개혁[8] 총회신학교 통신신학부 4년 과정을 밟은 그는 2008년 10월 30일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정식 목사가 되었다.[9] 그의 목사 안수에 대해 다음 아고라를 비롯한 진보 성향 사이트에서는 큰 논란이 빚어졌고 목사 안수 무효화 서명운동까지 일어났을 정도였다.

개신교에 귀의하여 목사가 된 배경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말했다.
무수히 많은 간첩들이 버젓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데도 공안 기능이 무너져 제대로 잡지 못한다. (중략) 감옥에서 믿을 수 있는 나라, 배신 없는 나라를 찾다보니 하늘나라를 찾게 됐고 그래서 예수쟁이가 됐다.

2010년 12월 국제외교안보포럼 강연에서.#

그야말로 공안수사관 시절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드러냈다. 기독교적 입장에서 봤을 때 정말 회개하고 구원받았다면 교도소 나와서도 저 따위 얘기는 당연히 아니고 되려 본인의 잘못을 뼈저리게 뉘우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어야 한다. 전혀 반성하는 모습을 안 보였다는 얘기다.

대표적인 고문 피해자인 김근태 의장의 회고에 따르면 어느 날 출소한 그와 마주쳤는데 그가 울면서 용서를 빌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우는 모습에서 너무나 가식이 느껴져 용서해주지 못했는데 그 일이 마음에 계속 걸린다고 했다.[10] 그런데 이후에 그는 설교 중에 자신이 김 의장을 고문했던 이야기를 꺼내며 "건전지 하나 들이대면서 겁을 줬더니 빌빌거리더라."고 비웃으며 본색을 드러냈다. 과거의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구하기는커녕 오히려 고문 받던 모습을 비하하고 놀리다니, 목사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자격조차 없다고 할 수 있으며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예수가 마지막에 얼마나 처절하게 고문당했는지 안다면 어떤 이유에서라도 고문을 합리화하지는 못한다.

거기다 한 술 더 떠 또 다른 기사가 나왔는데 2010년 1월, "나는 고문기술자가 아니라 애국자"라는 망언을 하여 세간의 분노를 샀다.# 사실 목사가 된 것 자체에 대해서 뭐라고 할 수는 없다. '박정희 모가지 따러 온 것' 으로 악명 높은 김신조도 목회 활동을 하고 있으니 최규식 서장의 가족들로서는 분노할 만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김신조나 기타 과거에 어떤 일을 하다가 목회자가 된 경우 적어도 과거와 결별하거나 과거의 잘못은 자신을 이 길로 인도하겠다는 하나님의 뜻[11]이라는 등 자신이 잘못했다고 말한다. 물론 신앙 고백으로 여길 만한 건덕지가 하나도 없는 헛소리다. 예를 들어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의 공범으로 처벌받은 이한상도 "삼풍백화점 사고는 영적인 전쟁의 한 사고였다"는 말을 하면서 해외선교를 하고 다닌 전적이 있다. 엄연히 자기 잘못으로 발생했거나 자기 자신의 의지로 행한 일에 대해 사과는 못할 망정 하나님을 방패 삼아 잘못을 회피하려는 모습은 전혀 옹호할 수 없는 행동이다. 그런데 그에게는 그런 것조차 없다.[12]

슬하에는 미장원을 하던 부인 신씨와 세 아들이 있었는데 <레이디경향> 2006년 12월호 기사 등을 토대로 하면 아버지가 도망 다니느라고 가정이 파탄나 장/차남이 회사를 그만두고 세 자녀 중 차남은 아버지가 복역하던 때에 지병인 당뇨로[13], 3남은 2011년 교통사고로 각각 사망했다.

그러나 가장이 고문경관 행적이 밝혀질 때 한 번도 그를 내쫓으려고 하지 않았다. 부미방 사건 관련자 문부식은 2002년 저서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에서 이런 행동의 원인이 '비도덕적 가족주의'에 있다고 주장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국가의 이름으로 저지른 죄를 집에 돌아가서 가족애로 씻고 그 다음날에도 이와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는 식이다. 게다가 극동방송 인터뷰에서 신씨는 남편에 대해 "애국자이니 국가유공자로 정해줘야 한다"는 발언을 하였으며 극동방송에서도 이근안을 두고 "열성적인 신자"라면서 "이제 용서해주자"는 두둔까지 해 주었고[14] 아예 목사가 된 뒤에는 종종 나와 찬양해 줬다. 이 때문에 정교분리, 공정보도 원칙을 기반으로 하여 운영되는 기독교방송은 자사 프로그램, 노컷뉴스 등에서 그가 언급되면 정말 작정하고 비판한다.[15]

그러나 김수현, 백남은, 김영두, 최상남, 정현규 등 남영동에서 같이 고문에 가담한 경찰관들은 실명이 공개되었음에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거나 솜방망이 처벌에 그치기도 했다. 하기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때 실제 수사 및 은폐를 명령한 박처원은 1987년 그의 변호인들이 보석 신청서를 내면서 김삼룡 일당 처단 등의 대공수사 공적을 언급했다.

비슷한 사례로는 캄보디아에도 크메르 루주의 악명 높은 수용소 뚜올쓸라엥의 소장이던 깡 겍 이우와 제1차 라이베리아 내전에서 소년병을 이끌며 최소 2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조슈아 밀턴 블라히가 있는데 이들도 이근안처럼 숨어 살다가 갑자기 개신교 목사가 되어 회개했다고 주장했다. 그나마 깡 겍 이우는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2020년에 옥사했으나 밀턴 블라히는 파렴치하게도 자신이 학살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듯한 말을 남기며 자신의 만행으로 인한 피해자들에게 사죄를 구하러 다니고 있다.

2.4. 2010년 이후

2010년에는 <일요서울> 인터뷰를 통해 심문은 예술이다라는 망언을 하기까지 이르렀다. 이 인터뷰에서 자신은 고문기술자가 아니라 심문기술자라고 했으며 자기가 해 온 악행의 피해자가 있고 그에 대한 증언이 쏟아져 나왔는데도 인터뷰에서 아들이 몇 명이나 죽었건 도피 생활을 했다느니 하면서 자기합리화로 일관했다.

관련된 망언으로는 "애국은 남에게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지금 당장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똑같이 일할 것"이 있다.[16]

2011년 12월 30일 김근태의 사후 다시 주목을 받았다. 이때 그나 보수적인 여론에선 다시금 "김근태 본인은 이근안을 용서했었다"고 주장하며 실드쳤지만 정작 김근태의 아내 인재근은 이를 정면 반박하며 "실제로 남편은 생전 그를 용서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17]

결국 김근태의 사망으로 인해 그의 과거 전력이 다시금 세간의 화제가 되었는데 심지어 간증집회를 다니면서 김근태를 조롱했을 뿐 장례식에 조문조차 가지 않는 뻔뻔함을 보였다. 그래서 그를 목사 시켜 준 교단이 욕을 먹게 되자 결국 2012년 1월 14일,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개혁 측은 그의 목사직을 박탈했다. 이 사실은 2012년 1월 19일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이에 따라 그는 목사 신분으로, 2012년 1월 19일 자로 교단에서 면직되었고 한 번 면직된 이상 복직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교단에서 정식 목사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교계 내에서 그냥 하던 일은 계속 할 수 있다. 어차피 담임목사 같은 직위가 아니더라도 교회 내 간부로 일한다거나 전도사 등 다른 직위로 바꾸어서 간증 행위를 계속하고 다닌다거나 하는 등. 때문에 목사직 박탈만으로 장로회가 그에게 제대로 된 처분을 내렸다고 속단하기는 이르다. 실제로 교단 소속 종교인이 사고를 쳐서 처벌을 받더라도 이렇게 멀쩡히 활동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현행법상 목사사칭죄 같은 것은 없기 때문에 본인의 의지만 있다면 전광훈, 김기동, 박옥수, 이재록처럼 교단에서 쫓겨나도 새로 교단을 차려서 목사 일을 할 수도 있다. 같은 기독교인 가톨릭에서는 교황을 비롯한 사제가 사고를 친 교인을 파문시켜 버리면 파문이 거둬질 때까지는 절대로 신자로서 살아갈 수 없는 것과는 대조적이다.[18] 물론 이근안이라는 인물이 한 짓이 워낙 악랄했던 데다 결정적으로 반성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웬만한 교회에서도 불러주지 않았다.

한편 조선일보가 그의 근황을 은근슬쩍 애절하고 안타깝게 그려내며 옹호하는 기사를 써 빈축을 샀다.[19] 기사에 따르면 그는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보증금 100만 원, 월세 20만 원짜리 4평 단칸방에서 아내가 빌딩 청소와 폐지 수거로 번 돈으로[20] 겨우 연명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사족이지만 우연히도 이근안 부부가 단칸방으로 이사한 직후 김근태가 사망했다고 한다.

2012년 11월, 그가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행한 22일간의 고문과 만행을 다룬 영화 남영동1985가 개봉하였다. 그도 11월 22일 종로 피카디리 극장을 찾아 영화를 감상하였는데 신광영 동아일보 기자에게 "영화를 보니 물고문을 한다면서 샤워꼭지를 빼버리고 물을 퍼붓던데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내가 그거 보고 웃었어. (500mL 물병을 가리키며) 이 정도면 돼. 얼굴에 거즈를 올려놓고 마르지 않게 물을 조금씩 뿌려주면 거즈가 착 달라붙어 숨을 못 쉬는 거지."라며 자신의 고문 수법이 좀 다르게 묘사되었다고 인터뷰했다. 더불어 자신의 고문과 고문 피해자를 두고 "쥐어 박으면 안 되는데 그게 내 잘못"이라고 표현해 고문을 큰 범죄가 아니라 애들 장난처럼 가볍게 여기는 발언을 해서 논란을 일으켰다.

2018년 1월, 영화 1987의 열기 속에 CBS의 김정훈 기자가 취재를 시도했다. 실제로 짧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 취재 내용이 2018년 1월 9일 김현정의 뉴스쇼를 통해 방송되었다. 그간 행보대로 피해자에 대한 사과나 반성은 없고 자신에 대한 비판을 두고 "억울하다"고 주장했으며 그나마 생계를 꾸려나가던 부인이 요양병원에 입원해 홀로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는 근황도 전해졌다. # 정황상 아내가 아니라 경찰 연금도 박탈당하고 목사직도 박탈당해서 마땅한 수입이 없는 이근안 본인이 폐지를 주워서 근근히 살아갈 가능성이 크다.

2021년 7월 30일 SBS 궁금한 이야기 Y의 '박처원 7000조 유산 사기사건' 에피소드 도중에 이근안 본인은 박처원의 수발을 들었단 이야기를 하며 나왔는데 모자이크 처리되었다.

2021년 8월 29일 퇴직금을 달라며 공무원연금공단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당연히 패소했다.# 판결문 범죄 생활로 도피하는 사이에 퇴직금 수령기간이 지난 것이라고 하니 결국 인생사 자업자득이다.

3. 대중매체에서

모바일 게임 아니마에서 '고문관 이그난' 이라는 인물(몬스터)이 등장하는데 전 국왕을 고문하여 반신불수로 만들었다는 걸 보면 이 인간을 패러디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현재 이 고문관이란 놈은 썩어가는 좀비가 되어 있다. 죽이면 제법 좋은 아이템을 주는 지라 아니마 유저들은 오늘도 이 몬스터를 후드려패는 중. 이제 이 게임을 하기 대단히 힘들어졌고 너무 오래 전 게임이지만 아직 apk 등을 통해 하는 사람들은 하고 있다.

배철수의 만화열전 고우영 삼국지에선 길평조조를 독살하려다 발각된 뒤 고문을 받는데 여기서 길평을 고문하는 이근이란 인물이 등장한다.

비교적 재미없는 전개로 이어졌던 배한성의 고전열전 수호지에서는 채경에게 보낼 봉물짐을 훔쳤던 백승을 심문할 때 남영동에서 나온 사람이라는 남자가 물고문을 한다. 자신이 물을 땅에 버리고 마시는 시늉을 벌이면서 말이다. 이 남자가 이근안을 연상케 한다. 이 부분이 전파를 탈 때 남영동1985가 극장에서 상영 중이었다.

만화가 김진태보글보글이라는 만화에서는 어쩐 일인지 카스트라토라는 이름을 예명으로 쓰는 악당으로 등장하는데 폭발 사고로 바지가 벗겨진 채 죽게 되고 그때 그의 본명 '이근안(40)' 이 밝혀졌다.

1996년에 만화가 김종섭이 제작한 메피스토라는 작품에서는 형사 사건 담당 오근안이라는 캐릭터가 나온다. 무슨 일인지 전기고문 대신 짬뽕 고문으로 범인을 조작하는 캐릭터다.[21] 부하 경찰이 사건 현장에서 다른 증거물이 나왔기 때문에 주인공이 범인이 아닐지 모른다는 의혹을 무시한다. 후일 주인공은 무죄로 풀려 나왔지만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변호사 등 자신을 망친 사람들에 대한 복수를 시작하는데 고문도 고문이지만 악명 높은 부패경찰인 오근안은 그 전에 재산을 빼돌려 해외 도피한 것으로 처리된다.

하지만 진실은 악마인 메피스토와 거래한 주인공이 오근안을 주인공과 생명의 끈을 같이 하도록 만들어 버린 다음 산채로 땅속에 파묻고 변호사 살해 혐의로 무기징역을 받은 후 감옥에 들어간 것이었다. 주인공이 감옥에 있는 동안 오근안은 땅속에서 죽지도 못하고 괴로워하게 된다. 오랜 세월이 흘러 가석방으로 출감한 주인공은 오근안을 마침내 죽이고 그걸 지켜보는 메피스토도 혀를 차는 게 결말이다.

남영동1985에는 '이두한'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배우는 이경영. 고문할 때마다 휘파람으로 클레멘타인을 부른다. 실제로 그는 영화에서 순화된 고문을 보고 망언을 해서 논란이 되었다.

영화 변호인에서 곽도원이 연기한 차동영 경감의 모티브다. 곽도원의 연기가 정말 살의를 불러 일으킬 정도로 무지무지 악랄하다. 고문 현장을 찾아낸 송우석을 두들겨 패다가 애국가가 나오자 곧바로 패는 걸 멈추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사실 그는 극중 차동영과 다르게 비뚤어진 애국심, 즉 국가도 아닌 오직 권력자, 고용인 개인에게만 충성했다. 극중 차동영은 그의 실제 행적이나 태도와 비교해 보았을 때 이나마도 극적으로 미화된 것이다. 그의 인터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사실상 고문을 개인적인 유흥이나 놀이 정도로 생각하고 즐겼을 것으로 추정되며 죄책감은커녕 추억처럼 되새김질하는 태도로 보아 정신적으로 분명히 문제가 있는 사이코패스에 가깝다.

2022년 이정재 감독의 영화 헌트에도 안기부 내에서 대학생들과 교수를 상대로 악랄한 고문을 하는 '이 선생'이란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사실상 이 역시 이근안이 모티브가 된 인물로 보인다.

4. 관련 자료

  • 저서
    •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고백 - 강남. 2013.
  • 영상 자료
    • 시사매거진 2580 제264회 (1999.10.31. MBC)
    • PD수첩: 특집-고문, 이근안 뿐인가? (1999.11.09. MBC)
    • 인물현대사: 국가에 충성한 죄? 고문기술자 이근안 (2004.04.02. KBS1)


[1] 젊었을 적 신체 사이즈이며 배가 불룩 나온 거구였다고 한다.[2] 이근안의 아들들 중 2남, 3남은 오래 전에 사망해 고인이 되었고 장남은 현재 생존 중이다.[3] 지금이야 무사고 근속 33년을 채우면 주는 훈장이지만 이 시절 이근안은 고문을 저지르며 정권의 입맛에 맞는 수사결과를 만들어냈기 때문에 군 경력을 합쳐도 33년을 채우지 않았음에도 유공이라는 명목으로 훈장을 수여받은 것이다.[4] 흔히 HID라고 불리는 육상북파공작부대. 참고로 영화 아저씨에서 원빈이 복무한 부대는 UDU로 해상북파공작부대다.[5] 참고로 그냥 물이 아니라 고춧가루를 타서 쓰기고 하고 짬뽕국물을 주전자에 넣어 들이부었다고도 한다. 이러면 고춧가루가 기도로 넘어가 폐기종이 생겨서 고문 이후에도 평생을 후유증으로 고생해야 한다고.[6] 이 때 박처원 전 치안감과 만나 접촉했다고 한다. 녹취록에 따르면 이근안은 자신의 가족을 과거 상관이었던 박처원에게 부탁했다. 박처원은 이후 카지노 업자로부터 10억원을 받아 이근안을 비롯한 고문경찰들의 가족에게 생활비 명목으로 나눠주었다.[7] 2006년에 상훈법이 개정되면서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비롯하여 154명의 서훈이 박탈되었는데 이근안 경감도 박탈되었다.[8]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예장합동)에서 1985년에 70명의 목사들이 분립하여 창립된 교단. 총회장인 정서영 목사가 한국장로교총연합회 회장에 당선되기도 했다.[9] 다행인 것은 이근안이 교회를 개척하여 담임목회를 한 적은 없다는 것이다. 그럴 만한 것이 이근안은 2008년에 목사가 되었는데 교단에서 담임목사의 정년은 만 70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년이 걸려서 담임 목회는 할 수 없었다.[10] 다만 김근태 의장은 보건복지부 장관 임기 중인 2005년 2월 7일에 이상락 전 의원(선거법 위반으로 인한 복역), 임익근 전 도봉구청(뇌물수수로 인한 복역), 김진 전 한국주택공사 사장(뇌물수수로 인한 복역)을 면회하려고 여주교도소에 방문했다가 '인간적인 연민'이 들어 이근안을 면회하러 들른 적이 있다. 당시 언론에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이 이근안을 용서했다.'는 내용이 보도되었고 이후 김근태 의장은 이근안이 만기 석방될 때 '여생은 건강함 속에서 보내길 바란다.'면서 덕담까지 해 주었지만 사과를 받은 후에도 이근안에 대해 완전히 의심을 버리지는 못했는데 어떤 목사에게 '이근안의 사과가 진심인지 아닌지는 신의 영역인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을 정리했다고 한다. 허나 그 의심은 합리적 의심이었음이 끝내 드러나고 말았다.[11] 비기독교인에게는 이 말 자체가 매우 어이없게 들릴 수밖에 없지만 기독교에서는 자주 쓰이는 레파토리다.[12] 심지어 킬링필드 당시 악명 높은 강제수용소 뚜올쓸라엥의 소장이었던 깡 겍 이우제1차 라이베리아 내전에서 가장 극악무도한 도살자였던 조슈아 밀턴 블라히조차 각각 회개하기 위해 목사가 되었다고 주장하거나 지속해서 과거의 만행을 후회한다는 말은 하고 있는데 이근안은 그런 극미량의 보여주기식 사죄조차 전혀 하지 않고 있다.[13] 정확히 말하면 일찍부터 당뇨를 앓다가 심장마비로 죽었다.[14] 그럴 만한 것이, 이사장 김장환은 박정희 대통령과도 친분이 있던 것은 물론 전두환 전 대통령과는 종교를 떠나서 상당히 막역한 사이였다.[15] 더군다나 이 방송국은 언론통폐합 과정에서 보도를 금지당하고 기자와 전속 성우 일부를 KBS에게 강탈당한 이력이 있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스탠스를 가진다.[16] 아이러니하게도 이와 비슷하지만 의도가 다른 발언이 중국에서도 있었다. 천안문 6.4 항쟁 때 인민해방군이 인민들을 공격할 순 없다고 시위대 무력 진압을 반대했다가 5년 동안 옥살이를 한 중국군 장군 쉬친셴은 20년이 지난 뒷날 홍콩 빈과일보와 인터뷰를 하며 다시 그 때로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하겠다며 죽어도 역사의 죄인이 되진 않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명색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경찰인데도 민주주의와 인권을 파괴하는 데 앞장선 이근안은 시민에 대한 고문을 애국으로 포장한 것이고 사회주의 국가의 장군이었던 쉬친셴은 국가 지도부의 잘못된 명령을 거부하고 시민을 지키기 위한 항명을 애국으로 여겼으니 시사점이 많다고 하겠다.[17] 위의 각주에서도 볼 수 있듯이 김근태는 이근안을 표면적으로는 용서했지만 사망하기 전까지도 그의 사과에 의구심을 품고 있었고 끝내 완전히 용서하지는 않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18] 천주교는 한국 전체가 하나의 통일 교회로 구성되고 사회의 호적처럼 전체가 공유하는 교적이 존재하기 때문에 한 번 파문당하면 다른 성당으로 옮기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물론 개인적으로 출입하며 기도야 할 수 있겠지만 교회 내 직함을 맡는다거나 활동은 어디서도 할 수 없다.[19] 뜬금없이 2023년 9월 중순에 갑자기 기사가 재조명받아 댓글이 대폭 달렸는데 보면 뜬금없이 서울대 프락치 사건들먹이는 게 양반일 정도로 댓글 수준이 가관이므로 기사만 보고 넘길 것을 권한다.[20] 2002년경부터 이래 왔다고 한다.[21] 물론 이근안은 둘 다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