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6-05 17:22:32

이근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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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당신이 최고야?
이름 이근안(李根安)
출생 1938년 3월
출생지 경기도 양주군(現 양주시)
신체 172cm 90kg[1]
학력 경동고등학교
종교 불교개신교(장로회)
대한민국의 전 경찰공무원. 일명 "고문 기술자"로 불린 범죄자. 목사였으나 2012년, 면직되었다.
1. 프로필2. 고문 수법3. 도피에서 심판까지4. 목사 안수 후의 행적
4.1. 2010년 이후의 근황
5. 창작물에서의 묘사

1. 프로필

“고문은 예술이다”
- 이근안, 일요서울 인터뷰 발언#

군사독재 시절 공안경찰로 민주화 인사와 무고한 사람들을 고문고문기술자로 유명하다. 별명은 박중령과 불곰이며 김철수라는 가명을 쓰기도 했는데, 그에게 고문을 받은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90kg짜리 거구에 떡 벌어진 어깨, 구릿빛 얼굴, 핏발 선 눈, 굵은 목, 솥뚜껑 같은 큰 손을 지닌 우락부락한 모습이었다. 1979년 남영동 대공분실 근무 시절 간첩 용의자가 현대중공업에 입사하자 본인이 저 가명으로 현대중공업에 위장취업하여 7개월간 노동자 생활을 하다 검거했다고 한다. 비슷한 사람으로 노덕술, 하판락이 있다.

1938년 경기도 양주군에서 태어나 서울 경동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젊은 시절 공군 헌병으로 복무했다. 1970년 순경으로 경찰에 발을 들인 이후 신분을 숨긴 채 줄곧 대공 분야에서 일하면서 순경에서 시작해서 1984년 경감 승진까지 특진으로만 올라갔다. 고문 기술이 특진의 비결이었던 셈. 당시 경찰 내에서는 "이근안이 없으면 대공 수사가 안 된다" 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 단체로 민주화청년운동연합이 있었고 현재 정치권과 시민 운동, 언론계 인사 상당수가 직·간접적으로 이곳 출신인데 민청련 의장으로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상징이었던 김근태를 전기 고문하는 등 많은 민주화 인사들과 무고한 사람들을 잔인한 방법으로 고문했다. 남민전 관련자 이재문도 이근안을 비롯한 수사관들에게 고문받아 1981년에 후유증으로 옥사했다.

경기도 경찰국 대공분실장 시절 1986년부터 1991년까지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화성 연쇄살인 사건 당시 이근안을 경기도 화성경찰서로 발령 내서 대공용의점을 찾아보도록 했다고 하니 그가 한국 경찰 내에서 얼마나 촉망받는 엘리트였는지 알 수 있다. 그가 실제로 화성경찰서에서 근무한 적은 있는 것으로 보이나 구체적인 근무 년도나 소속 부서 등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87년부터 민주노조 건설과 노동운동을 막기 위해 안보강사로서 삼성그룹 등 각 기업 직원연수회 등지에 안보강연을 125회나 나서기도 했다.

1979년 3월 17일 리즈 시절에는 조선일보가 주는 청룡봉사상 충 부문도 수상했다. 신원이 드러날까 봐 이석우라는 가명으로 보도해 줬다고. 물론 이 상을 추천한 것은 경찰 당국일 테지만 이후에도 조선일보 측은 이 상을 취소하지 않았다. 이 수훈으로 경위에서 경감으로 1계급 특진했고, 그 외에 민투위 강도 사건을 해결했다고 하는데, 이 사건의 실체는 지금까지도 논란 중이다. 어쨌든 리즈 시절의 그는 이 사건으로 남민전이라는 거대한 비밀 결사를 낚아서 훌륭한 공안 경찰이라는 칭송을 받게 되었다고 하니 판단은 각자 알아서 하길. 이후에도 정부의 비호를 받아 간첩검거 유공 4개를 포함한 16번의 표창을 받았으며, 특히 1981년 '무림사건' 해결로 내무부 장관 표창, 1982년 '국가 안보 기여' 명목으로 21사단 표창을 각각 받았으며, 1986년 경찰의 날 당시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옥조근정훈장을 받았다.

1980년 당시에도 이근안에게 고문을 당했다고 피해자들이 고소를 하기도 했으나, 이근안이 직접 작성한 피의자 신문조서 및 진술서 등에 은, 는, 이, 가 같은 조사만 제외하고 전부 한자로 작성하여 이를 직접 본 법관들이 이렇게 유식한 사람이 그런 몰염치한 고문을 행했을 리가 없다며 고소가 기각 당하기도 하였다. 이근안은 조서를 작성할 때 국어사전을 항상 소지하였고, 모르는 한자는 꼭 찾아서 썼다고 한다. 잘못 쓴 글씨가 있을 경우, 대부분의 경찰은 그어버리고 옆에 쓰거나 수정 테이프 등을 사용했을 것인데, 이근안은 새로운 종이에 처음부터 다시 썼다고 한다. 글씨체도 좋은 편으로, 왕년에 고시생들에게 추천되었던 이른바 "백강고시체"의 교과서적인 면모를 보여 준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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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안과 같은 고문 기술자들은 경찰, 검찰, 안기부, 군 수사 기관, 교정 기관에 셀 수 없이 많았고, 이름 등 신원조차 알 수 없는 경우도 많았다.[3] 그러나 경찰에 잡히고 역사에 고문 기술자라고 남은 사람은 이근안을 비롯한 극 소수의 사람들 뿐이다. 게다가 이근안 단 1명 법정에 세우려고 수십 년 동안 유가족과 민가협 등 각종 시민 단체가 싸워야 했다. 그래서 정의는 실현되었냐고 물을 수도 있는데 밑의 내용을 참조하자.

2. 고문 수법

당시 고문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의 회고에 따르면, 몽둥이로 구타하는 것이 가장 견디기 쉬웠다고 할 정도로 그의 고문은 다양하고도 악랄했다. 잠 안 재우기는 물론,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기본적인 고문으로 시행하였고 날개 꺾기, 통닭구이도 이근안이 처음 개발한 고문이며 관절 빼기는 유난히 힘이 좋았던 그가 1인자였다고 한다. 남성 피해자들을 가장 괴롭혔던 고문은 요도에 볼펜 심을 삽입해서 괴롭히는 요도 볼펜 심 고문이었다.

남성의 신체 구조상 요도가 여성에 비해 굉장히 길며 병원에서 수술 등의 이유로 소변 줄을 끼워본 경험이 있거나 방광염 증세가 있을 때 요도를 통해 내시경을 집어넣어서 방광 내부를 관찰하는 검사를 받아본 남성 위키러라면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소변 줄이나 내시경은 잘 들어가라고 젤을 발라서 넣는데도 고통이 심한데 이것들보다는 굵기가 가늘다고 하지만 볼펜심을 그냥 생 요도에 끼운다면 그 고통은 말할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소변 줄이나 내시경이 들어갔다 나오면 며칠 동안 소변을 보는 것 자체가 큰 고통을 동반한다.[4] 요도는 상처가 매우 쉽게 나기 때문에 출혈이 쉽게 생기고 감염도 쉽게 된다. 그래서 병원에서는 강한 항생제를 처방하기도 한다. 요도 안이 붓는다면 소변을 배출하기가 힘들게 된다. 소변이 방광에서 요도를 통해 배출되지 않으면 방광내압이 올라가고 급기야 신장으로 역류를 하게 될 수도 있는데 그러면 신장이 망가지게 된다.

일단 간첩 혐의로 잡혀오면 누명을 씌우기 위해 자백이 필요한데 온몸을 구타한 뒤 칠성판에 몸을 묶고 얼굴에 수건을 뒤집어씌운 다음 샤워기를 들이대서 숨을 못 쉬게 하는 물고문, 새끼 발가락에 전깃줄을 감아 전류를 흘려보내는 전기 고문이 이어졌다. 보통 공안 사건에서는 고정 간첩으로 활동해왔다는 거짓 자백을 하고 나서야 고문이 멈췄다고 한다. 또한 이근안은 연행자들 앞에서 한 손으로 사과를 으깨 보이면서 "내가 손대면 입을 열게 돼 있다" 는 등 위협적인 말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등 심리적인 협박에도 능했다.

17대, 19대, 20대 국회의원. 문화일보 정치부장을 지낸 정치인 민병두가 1980년대 '학림사건' 으로 그에게 고문을 당한 경험이 있다. 민병두는 당시를 회고하며 "고문 기술자로 악명 높은 이근안은 선데이서울을 보면서 전기고문의 볼트(V) 수를 올렸다 내렸다"며 "나 역시 온갖 구타와 잠 안 재우기 등의 고문을 당하고 동료들의 소재지를 댔다"고 고백했다.

김근태는 당시 상황을 말하기를 그때는 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럽고 치욕적이었다고 하였다. 일부에선 그럼에도 이근안이 체포되자 그를 감옥에 면회 가고 인간적으로 그를 용서하였다(동아일보 1999년 10월 29일 자)고 주장하지만 그런 적 없다. 당시 고문에 대한 김근태의 증언.[5]
소리를 지른다고 강하게 전류를 통하게 하고, 신음 소리가 나지 않도록 혀를 이빨로 꽉 물었다고 혀를 빼라며 강한 전류를 또 흘려보내고, 참으면 참는다고 또 그러고 이들의 목표는 총체적인 혼란, 착란상태로 돌입했다.

머리가 빠개질 듯한 통증이 오고 그 몰려오는 공포라니, 죽음의 그림자가 독수리처럼 날아와 파고드는 것처럼 아른 거렸습니다. 전기가 발을 통해서 머리 끝까지 쑤셔 댈 때마다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기고문은 담금질해서 뜨거운 불인두로 지져서 바싹 말라 바스락뜨리고 돌돌 말려서 불에 뛰기는 그런 것입니다. 전기고문은 핏줄을 뒤틀어놓고 신경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마침내 마디마디 끊어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 (1987년 나온 ‘김근태의 이근안에 대한 기억’)
1971년 어로작업 중 납북되었다가 늘 감시 속에 살았던 김성학 씨는 역시 1985년 12월에 이근안에게 전기고문을 당하여 척추 디스크가 다 녹아내려 장애인이 되었다. 참고로 김성학 씨가 어떤 사람이었냐면 국군정보사령부(AIU) 소속 북파부대[6]에서 군복무를 마쳤다. 김성학 씨는 침투, 폭파, 암살 등의 혹독한 특수 훈련을 받으며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죽어버리자고 대검으로 몸을 그은 적도 여러 번이었다고 하는데 결국 이겨내고 복무를 마쳤다. 이런 인간 병기 수준의 전사를 이근안은 납북되었다 돌아왔다는 이유 하나로 고문하여 굴복시켰다. 옛말에 매에는 장사가 없다고 하지만 작전 중 북한군에게 잡혔을 때 받게 될 모진 고문에도 견디도록 엄청난 훈련을 받은 사람을 육체적, 정신적으로 굴복시킬 정도라면 어느 정도 강도의 모진 고문을 가해야 할지 감히 상상하기가 불가능할 정도이다. 쉽게 말해서 북한군보다도 더한 놈

주로 당했던 고문으로는 의자에 앉혀 놓고 머리를 뒤로 젖히고는 얼굴을 수건으로 덮고 물을 따라 숨을 못 쉬게 하거나 거꾸로 매달아 놓고 몽둥이로 내려치는 방법으로 고문하였다고 증언하였다(조선일보 1999년 10월 29일자). 참고로 물수건으로 물고문을 하면 폐에 물이 안 남는다고 한다.[7]

1983년 2월 사업체를 운영하던 함주명 씨는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63일을 구금당하며 이근안에게 43일간의 고문을 당하는 악몽 같은 나날을 보냈고, 이후 15년간 옥살이를 해야 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진술했다.
한 일주일 동안 잠을 안 재우더군요. 사람이 일주일 동안 잠을 안 자면요, 몽롱한 정신 상태가 지속돼 마치 꿈처럼 모든 감각이 뒤떨어지고 먹먹해져요. 그런 후에 온몸을 개 패듯이 패요. 인간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잔인하게. 거의 실신 상태가 될 때까지... 이런데도 시인 안 해? 그러면서 퉁퉁 부어 옴쭉달싹할 수 없게 된 양 어깨를 볼펜심으로 쿡쿡 찌르는 거예요. 그래도 부인하면 사람 하나 딱 누울 만한 칠성판에 뉘어 놓고 사지를 찢어 다섯 군데로 묶는 장치가 있어요. 그렇게 꼼짝할 수 없게 되면 이근안이 내 가슴 위로 올라타. 그리고 수건을 입에 덮어 씌운 다음 샤워 꼭지를 들이대면서 시인해! 시인해! 공기는 안 들어오고 물만 들어오는 거지. 그래도 시인 안 하면 새끼 발가락에 플러스 마이너스로 전류를 흘려보내요. 온몸에 전류가 흐르면 완전히 죽어나가게끔 돼요. 그때 희미하게 무슨 소리가 들리면 죽지 않으려고 손가락을 까딱까딱하는 거예요. 그럼 '그만, 풀어줘'. 그런 후 약간 정신을 차리면 조서 쓴 걸 보여줘요. 보면 다 엉터리로 조작돼 있지. 그럼 난 그렇게 간첩질하지 않았다고(원래 그런 적이 없으니까) 주장하면 또 고문이 시작되는 거예요. 이 새끼 아직 정신 못 차렸다면서. 안 당해본 사람은 몰라요. 이근안이 왜 고문 기술자인 줄 아세요? 딱 죽기 직전까지 고문하기 때문이에요. 죽지 않을 만큼 사람을 괴롭혀서 뭐든 시인하게끔 하는 지옥의 사자... 요즘도 내가 잠자다 깜짝깜짝 깬다면 믿겠어요?

믿기지 않겠지만 실화다. 이런 고문 기술 덕에 그는 종종 다른 기관까지 출장 고문을 다니기도 했다.

김근태의 수기 '남영동' 에 보면 이근안이 코에 짬뽕을 부어 폐기종을 만들어버리겠다라고 협박했다고 하며 간첩 조작이 벌어진 오송회 사건 피해자들도 수사 과정에서 짬뽕 고문을 당한 적이 있다.

그의 고문을 받고 수많은 사람이 거짓 자백을 하여 간첩 누명을 쓰고 교도소에 수감되어야 했고, 출소 뒤에도 민주화 전까지 경찰 및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으며 고문 후유증으로 불구가 되었으며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이들 중엔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 사람도 있었다. 그 악명 덕분에 초창기 딴지일보에서는 SM녀 사진에 이 사람 얼굴을 합성한 것을 자료 사진으로 쓰기도 하였다.

3. 도피에서 심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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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안 현상수배 전단 출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1987년 6월 항쟁과 6.29 선언은 이근안의 인생을 바꾸게 했다. 1987년 12월 10일 고문피해자 김성학이 재정신청을 처음으로 냈고, 1988년 12월 15일에 고문피해자 김근태 전 민청련 의장이 재정신청을 냈다.

같은 해 12월 19일, 문학진 한겨레신문 사회교육부 기자가 고문피해자 김근태 전 민청련 의장을 취재하던 도중 '얼굴 없는 고문 기술자'의 실체를 알아내기 시작했다. 이후 경기도경과 치안본부로부터 신원을 확보하는 등 반나절 동안 취재 끝에 당월 21일에 '그 고문경관'의 얼굴 사진과 함께 한겨레에 실어 처음 보도한 뒤 '이근안'이란 실명 석 자와 그의 고문 행각이 알려졌고, 24일에 김기춘 검찰총장이 그에게 고문혐의를 적용해 수사를 지시하자, 사흘 후 그는 우편으로 사표를 내 잠적하여 10년 10개월 동안 도피했다.

잠적 당시 항간에선 '자살설', '암살설', '밀항설', '성형설' 등이 나돌았고, 검찰과 경찰은 이근안 전담 검거반[8]을 조직하는 한편, 민가협은 1989년 2월 18일부터 '이근안 현상수배' 캠페인을 10년 동안 전개하기도 했다.

그 사이 1991년에 김근태를 고문한 공범 김수현 등 4명이 징역 2~5년 및 자격정지 5년을 각각 선고받았고, 김대중 정부 들어선 1998년에 재판시효가 2013년까지로 연장되었다. 이후 1999년 10월 21일에 이근안과 같이 일했던 경기도경 대공분실 전/현직 경관 8명 중 6명이 징역 1~2년을 선고받자, 그는 7일 후 수원지방검찰청 성남지청에 자수하면서 그의 도피 행각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수사 과정에서 박처원 전 치안감과 동료 대공경찰들의 도피 가담 의혹도 제기되었다.

2000년 대법원에서 겨우 징역 7년 형을 확정 받았는데, 기존에 확인된 다른 혐의는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한 사건만 처벌 받은 것이다. 그 뒤 여주 교도소에서 복역하다 2006년 11월 7일 만기 출소하였다. 다만 1986년 수여된 옥조근정훈장은 출소 전 박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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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교도소에서 출소하여 차량에 올라타는 이근안.

출소당시 "사회에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 그 시대엔 애국인 줄 알고 했는데 지금 보니 역적이다. 세상사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라고 출소의 변을 대신했다. 그리고 이 후회가 거짓말이라는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졌다.

4. 목사 안수 후의 행적

목사로, 12년 1월 19일 교단에서 면직되었고 한번 면직된 이상 복직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교도소 수감 중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개혁쪽 총회신학교 통신신학부 4년 과정을 밟은 이근안은 2008년 10월 30일 대한예수교 장로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정식 목사가 되었다. 전직: 물고문 전문가, 현직: 물 세례 전문가 나중에 "무수히 많은 간첩들이 버젓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데도 공안 기능이 무너져 제대로 잡지 못한다. (중략) 감옥에서 믿을 수 있는 나라, 배신 없는 나라를 찾다보니 하늘나라를 찾게 됐고 그래서 예수쟁이가 됐다" 고 2010년 12월 국제외교안보포럼 강연에서 언급했다. # 그야말로 공안수사관 시절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드러냈다.[9]

대표적인 고문 피해자인 故 김근태 의장의 회고에 따르면, 어느 날 출소한 이근안과 마주쳤는데 이근안이 울면서 용서를 빌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근안의 우는 모습에서 너무나 가식이 느껴져 용서해주지 못했는데, 그 일이 마음에 계속 걸린다는 것. 그런데 그 이후에 이근안은 설교 중에 자신이 김 의장을 고문했던 이야기를 꺼내며 "건전지 하나 들이대면서 겁을 줬더니 빌빌거리더라."고 비웃으며 본색을 드러냈다. 과거의 적들에게 용서를 구하기는커녕 오히려 고문 받던 모습을 비하하고 놀리는데 목사이기 이전에 신자로서의 자격조차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예수가 마지막에 얼마나 처절하게 고문당했는지 안다면 어떤 이유에서라도 고문을 합리화하지는 못한다.

거기다 한 술 더 떠 또 다른 가사가 나왔는데, 2010년 1월, "나는 고문기술자가 아니라 애국자"라고 주장하여 세간의 분노를 샀다. 사실 목사가 된 것 자체에 대해서 뭐라고 할 수는 없다. '박정희 모가지 따러 온 것' 으로 악명 높은 김신조도 목회 활동을 하고 있으니 최규식 서장의 가족들로서는 분노할 만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김신조나 기타 과거에 어떤 일을 하다가 목회자가 된 경우, 적어도 과거와 결별을 하거나 과거의 잘못은 자신을 이 길로 인도하겠다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신앙 고백을 한다고 하지만[10] 이근안은 그런 거 없다.

미장원을 하는 부인과 학교에 다니는 아들들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도망 다니느라고 가정이 파탄 났다고 한다. 그러나 극동방송 인터뷰에선 남편을 애국자이니 국가유공자로 정해줘야 한다고 하는 아내의 말이 명작이었다. 더불어 극동방송도 열성적인 개신교 신자라면서 이제 용서해주자는 두둔까지 해주었고 아예 목사가 된 뒤로는 종종 나와 찬양해준다. 이 때문에 정교분리, 공정보도 원칙을 기반으로 하여 운영되는 기독교방송은 자사 프로그램, 노컷뉴스 등에서 이근안이 언급되면 인간 말종 짓을 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정말 작정하고 까고 있다. 그것을 지켜보는 일부 개신교인들은 다만 안습...

그러나 김수현, 백남은, 김영두, 최상남, 정현규 등 남영동에서 같이 고문에 가담한 경찰관들은 실명이 공개되었음에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거나 솜방망이 처벌에 그치기도 했다. 하기야 박종철 사건 때 실제 수사 및 은폐를 명령한 모 씨의 경우는 나중에 월간조선에서 스스로를 김삼룡을 처단한 반공투사로 자처해서 충격과 공포를 가져왔다.

프리존 같은 곳에 나와 고문을 한 것을 대단히 자랑스러워하기도 했다.

캄보디아에도 크메르 루즈 고문 기술자 겸 아예 수용소장이던 꾸앙 껙 이우가 있는데 이근안처럼 숨어 살다가 갑자기 개신교 목사가 되어 회개했다느니, 자신이 잘못 없다며 이근안과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 있다. 그나마 여긴 2009년 40년 형을 먹여서 나이 100살이 넘어서야 나올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4.1. 2010년 이후의 근황

2010년 드디어 고문은 예술이다라는 망언을 하기까지 이르렀다. 이 인터뷰를 보면 자신은 고문기술자가 아니라 심문기술자라고 한다. 그리고 자기가 해온 악행의 피해자가 있고 그에 대한 증언이 쏟아져 나오는데도 인터뷰에서 아들이 몇 명이나 죽었건 도피 생활을 했다느니 하면서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다.

관련된 망언으로는 "애국은 남에게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지금 당장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똑같이 일할 것".

이쯤되면 원래부터 그렇지만 지금까지 안 죽은게 신기할 정도의 산업폐기물이다. 물론 이근안 말고도 군사독재 시절의 고문 경찰들이 많기야 하지만 저렇게 자신이 저지른 죄를 애국이라고 포장해서 자랑스럽게 떠벌이는 놈은 이근안밖에 없다.

2011년 12월 30일 김근태의 사망 이후 다시 주목 받았다. 이때 이근안 및 보수적인 여론에선 다시금 김근태 본인은 이근안을 용서했었다고 주장하며 실드 쳤지만 유가족인 배우자 인재근은 이를 정면 반박하며 실제로 김근태는 생전 그를 용서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김근태의 사망으로 인해 이근안의 과거 전력이 다시금 세간의 화제가 되어 그를 목사 시켜준 교단이 욕을 먹게 되자 결국 2012년 1월 14일,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개혁 측은 이근안의 목사직을 박탈했다. 이 사실은 2012년 1월 19일 각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그러나 교단에서 정식 목사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교계 내에서 그냥 하던 일은 계속 할 수 있다. 어차피 담임목사 같은 직위가 아니더라도 교회 내 간부로 일한다거나 전도사 등 다른 직위로 바꾸어서 간증 행위를 계속하고 다닌다거나 하는 등. 때문에 목사직 박탈만으로 장로회가 그에게 제대로 된 처분을 내렸다고 속단하기는 이르다. 실제로 교단 소속 종교인이 사고를 쳐서 처벌을 받더라도 이렇게 멀쩡히 활동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리고 국내법상 목사사칭죄 같은 것은 없기에 본인의 의지만 있다면 교단에서 쫓겨나도 새로 교단을 차려 목사짓을 할 수도 있다.

한편 조선일보가 그의 근황을 은근슬쩍 애절하고 안타깝게 그려내며 실드를 치는 기사를 써 빈축을 샀다. 당연히 당해야 할 일을 마치 그가 희생양인 것처럼 그려내고 그가 너무 안타깝게 산다며 슬픈 가족사까지 밝혔지만 그렇다고 죄를 지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 경악스러운 것은, 이 기사의 댓글을 보면 찬성 순으로 봤을 때 이 인간 쓰레기를 쉴드 치는 댓글과 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근안을 비판하는 댓글은 찬성 수를 많이 받아 순위에 올라갔다가도, 한순간 사라진다.사이트 주인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지만 이에 찬성 수가 적은 최신 순 댓글란에서는 그야말로 세기말의 개판이 벌어지고 있다.

2012년 11월, 그가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행한 22일간의 고문 만행을 다룬 영화 남영동1985가 개봉하였다. 그도 11월 22일 종로 피카디리 극장을 찾아 영화를 감상하였는데, 동아일보기자에게 "영화를 보니 물고문을 한다면서 샤워꼭지를 빼버리고 물을 퍼붓던데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내가 그거 보고 웃었어. (500mL 물병을 가리키며) 이 정도면 돼. 얼굴에 거즈를 올려놓고 마르지 않게 물을 조금씩 뿌려주면 거즈가 착 달라붙어 숨을 못 쉬는 거지."라며 자신의 고문 수법이 좀 다르게 묘사되었다고 인터뷰 했다. 죄책감이고 뭐고 반성을 하지 않는 듯하다. 더불어 자신의 고문과 고문 피해자를 두고 쥐어박으면 안 되는데 그게 내 잘못이라고 표현해 고문을 큰범죄가 아니라 애들 장난처럼 가볍게여기는 발언도해서 엄청난 논란을 주고 있다.

2018년 1월, 영화 1987의 열기 속에 CBS의 김정훈 기자가 취재를 시도했고, 실제로 짧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 취재 내용이 2018년 1월 9일 김현정의 뉴스쇼를 통해 방송되었다.기사 링크 그간 행보대로 피해자에 대한 사과나 반성은 없고 자신에 대한 비난이 억울하다며 자기합리화하고 있다.

5. 창작물에서의 묘사

모바일 게임 아니마에서 '고문관 이그난' 이라는 인물(몬스터)이 등장하는데 전 국왕을 고문하여 반신불수로 만들었다는 걸 보면 이 인간을 패러디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현재 이 고문관이란 놈은 썩어가는 좀비가 되어 있다. 죽이면 제법 좋은 아이템을 주는 지라 아니마 유저들은 오늘도 이 몬스터를 후드려패는 중. 이제 이 게임을 하기가 대단히 힘들어졌고, 너무 오래 전 게임이지만 아직 apk 등을 통해 하는 사람들은 하고 있다. 그러나 아니마의 플레이 자체가 불가능해지며 이젠 영영 죽일 순 없게 되었다..

배철수의 만화열전 고우영 삼국지에선 길평조조를 독살하려다 발각된 뒤, 고문을 받는데, 여기서 길평을 고문하는 이근이란 인물이 등장한다.

비교적 재미없는 전개로 이어졌던 배한성의 고전열전 수호지에서는 채경에게 보낼 봉물짐을 훔쳤던 백승을 심문할 때 남영동에서 나온 사람이라는 남자가 물고문을 하는데,[11] 이 남자가 이근안을 연상케 한다.[12]

만화가 김진태보글보글이라는 만화에서는 어쩐 일인지 카스트라토라는 이름을 예명으로 쓰는 악당으로 등장하는데 폭발 사고로 바지가 벗겨진 채 죽게 되고 그때 그의 본명 '이근안(40)' 이 밝혀졌다.

90년대 초반 서울문화사에서 단행본으로 나온 메피스토라는 작품에서는 형사 사건 담당 오근안이라는 캐릭터가 나온다. 무슨 일인지 전기고문 대신 짬뽕 고문으로 범인을 조작하는 캐릭터다. 부하 경찰이 사건 현장에서 다른 증거물이 나왔기 때문에 주인공이 범인이 아닐지 모른다는 의혹을 무시한다. 후일 주인공은 무죄로 풀려 나왔지만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변호사 등 자신을 망친 사람들에 대한 복수를 시작하는데 고문도 고문이지만 악명 높은 부패경찰인 오근안은 그 전에 재산을 빼돌려 해외 도피한 것으로 처리된다.

하지만 진실은 악마인 메피스토와 거래한 주인공이 오근안을 주인공과 생명의 끈을 같이 하도록 만들어 버린 다음 산채로 땅속에 파묻고 변호사 살해 혐의로 무기징역을 받은 후 감옥에 들어간 것이었다. 주인공이 감옥에 있는 동안 오근안은 땅속에서 죽지도 못하고 괴로워하는 것. 오랜 세월이 흘러 가석방으로 출감한 주인공은 오근안을 마침내 죽이고 그걸 지켜보는 메피스토도 혀를 차는 게 결말.

남영동1985에는 '이두한'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배우는 이경영. 고문할 때마다 휘파람으로 클레멘타인을 부른다.

영화 변호인에서 곽도원이 연기한 차동영 경감의 모티브다. 곽도원의 연기가 정말 살의를 불러 일으킬 정도로 무지무지 악랄하다. 고문 현장을 찾아낸 송우석을 두들겨 패다가 애국가가 나오자 곧바로 패는 걸 멈추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장면은 필견.[13]


[1] 젊었을 적 신체 사이즈며 배가 불룩 나온 거구였다고 한다.[2] 백강고시체는 글씨를 빠르게 쓰면서도 날리거나 지저분하게 쓰지 않고, 큼직큼직하고 알아보기 쉽게 글을 쓰는 필체로. 제한된 시험 시간 내에 많은 양의 글을 빠르고 읽기 쉽게 써야 하는 고시 대비용으로 적합하다. 실제로 아직도 악필인 고시생들이 이 백강고시체를 연습해서 시험을 보는 경우가 많다.[3] 이것 때문인지 심진구나 홍성담 등 일부 고문피해자는 고문수사관의 얼굴을 몽타주로 그려내 수배코자 시도했다.[4] 과장 약간을 곁들이자면, 오줌을 처음 쌀 때는 숨이 턱 막히며 눈 앞이 잠깐이지만 하얗게 변한다.[5] 이 사건과 관련해서 알고 싶은 위키러서울대학교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 항목 참고.[6] 흔히 HID라고 불리는 육상북파공작부대. 참고로 영화 아저씨에서 원빈이 복무한 부대는 UDU로 해상북파공작부대다.[7] 흔히 일제가 독립 투사들에게 행했다고 하던 '욕조에 머리 담그기' 식의 물고문은 숨이 막힌 피고문자가 결국 '커헉'하며 남은 숨을 토해내고 입을 열 때 입과 코를 통해 다량의 물이 들어가게 되는데, 그 상황에서 사망해 부검되거나, 생존하여 병원 진료를 받을 때 폐에서 물이 발견된다면 고문의 증거가 되기 때문에 한국전쟁 이후로는 잘 쓰지 않았다고 한다.[8] 이 반을 주도한 사람이 모래시계 검사로 유명했던 홍준표 였다.[9] 기독교적 입장에서 봤을 때, 정말 회개하고 구원 받았다면 교도소 나와서도 저 따위 얘기는 당연히 아니고 되려 본인의 잘못을 뼈저리게 뉘우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어야 한다.[10] 사실 이것도 문제가 있는 발언인데, 예를 들어 과거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의 관계자로 처벌받은 삼풍백화점 사장도 삼풍백화점 사고가 영적인 전쟁의 한 사고였다고 개소리를 지껄이면서 포교를 하고 다닌 전적이 있다. 엄연히 자기 잘못으로 발생한, 또는 자기 자신의 의지로 행한 일에 대해 사과는 못할 망정 하나님을 방패 삼아 잘못을 회피하려는 모습은 전혀 실드를 쳐줄 수 없는 행동이다.[11] 정확히는 자신이 물을 땅에 버리고, 마시는 시늉을 벌이면서.[12] 이 부분이 전파를 탈 때 남영동1985가 극장에서 상영 중이었다.[13] 사실 이근안은 극 중 차동영과 다르게 비뚤어진 애국심도 아닌 오직 권력자, 고용인 개인에게만 충성했다. 어찌 보면 차동영보다 더 질이 나쁜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