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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민간인 고문 사건 | 설인종 고문치사 사건 | 이석 치사 사건 | 이종권 치사 사건 |
1. 개요
1984년 9월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축제 기간에 캠퍼스를 배회하던 임신현, 손형구, 정용범, 전기동 등 외부인 4명을 (전기동씨는 방송통신대 학생이었던 것으로 알려짐) 정보기관의 프락치(정보원)로 의심하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각목으로 폭행한 사건.
이 사건은 '서울대 프락치 사건'으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피해자들이 프락치가 아니기 때문에 "서울대 민간인 감금 폭행 고문 사건"이 올바른 명칭이다.
2. 상세
▷당시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달라.
"가해자들이 잠깐 이야기 좀 하자고 해서 따라갔다. 내가 프락치라고 몰아세웠다. 계속 아니라고 하니까 교련복으로 갈아입히고 눈을 가렸다. 그때부터 폭행이 시작됐다. 돌아가면서 몇 시간 씩 나를 폭행했다. 가해자들은 우발적인 사건이었다고 하는데 나를 감금한 장소 창문을 미리 신문지로 다 가려놨더라. 물이 담긴 세면대에 머리를 쳐 박거나, 바닥에 눕히고 주전자로 얼굴에 물을 붓는 등 물고문도 했다. 이 과정에서 치아가 부러지고 전치 8주 부상을 입었다. 고문에 못 이겨 내 군대시절 상관이 시켜서 왔다고 아무렇게나 말했다. 고문 도중 실신해 2일 만에 풀려났다. 이틀간 식사도 못했다. 풀려나기 직전에야 빵을 주더라. 당연히 먹지도 못했다. 병원에서도 한동안 혼자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사건 발생 후 각 대학에 피해자들이 오히려 잘못한 것처럼 대자보가 붙더라. 당시 저는 방송통신대 법학과 3학년에 다니며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방송통신대 학생들은 서울대 법대에서 수업을 받기도 했다. 레포트 작성을 위해 서울대 모 교수님에게 책을 빌리러 갔다가 붙잡혔다. 가해자들에게 그 교수님에게 확인해보라고 했다. 교수님이 내 신분을 확인해줬는데도 믿지 않고 폭행을 계속했다."
"폭행을 당한 후 대인기피증이 생겨 고시공부를 포기했다. 이후 구청 공무원으로 일하다 퇴직한 후 보안원, 경비원 등으로 근무했다. 올해 만 64세인데 아직까지 결혼도 못했다. 다 그 사건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에 당한 일이라 후유증이 컸다. 사건 이후로도 제가 실제 프락치라는 음해를 계속해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고 피해자 중에는 현재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사람까지 있다."
"나는 당시 누가 누구인지도 몰랐고, 눈을 가린 채 폭행을 당했기 때문에 사건의 전말을 몰랐다. 판결문에 따르면 유 이사장은 피해자 소지품을 뒤져 신분을 확인하는 등 직접 프락치 색출작업을 했다. 유 이사장은 피해자들을 신문하면서 '계속 다른 말을 하면 나중에 두고 보자'는 등 협박성 발언도 했다. 가해자들은 유 이사장 앞에서 피해자들을 폭행했다. 유 이사장은 당시 서울대 복학생협의회 집행위원장으로 이들을 말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피해자 4명 중 가장 심하게 폭행을 당했다.
"당시 운동권 사람들이 전두환을 미워하지 않았나. 내가 전두환과 같은 전 씨라고 심하게 폭행했다. 정말 미개한 사고방식이었다."
"지난 1997년 유 이사장이 자기 책에서 '서울대 프락치 사건'이라는 명칭을 써서 소송을 걸었다. 피해자들은 프락치가 아니라 민간인들이었다. '서울대 프락치 사건'이 아니라 '서울대 민간인 고문 사건'이다. 판사가 합의를 권유하면서 유 이사장에게 사과하라고 하더라.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 이사장이 제게 사과했다. 진심어린 사과가 아니었다. 그 이후로도 소송 때문에 유 이사장을 만난 적이 있는데 사과는커녕 아는 체도 안 하더라."
민간인 감금 폭행 사건의 피해자 전기동의 2019년 증언
당시 사건을 다룬 기사. # # (경향신문, 1984. 10. 5. 10-11면)"가해자들이 잠깐 이야기 좀 하자고 해서 따라갔다. 내가 프락치라고 몰아세웠다. 계속 아니라고 하니까 교련복으로 갈아입히고 눈을 가렸다. 그때부터 폭행이 시작됐다. 돌아가면서 몇 시간 씩 나를 폭행했다. 가해자들은 우발적인 사건이었다고 하는데 나를 감금한 장소 창문을 미리 신문지로 다 가려놨더라. 물이 담긴 세면대에 머리를 쳐 박거나, 바닥에 눕히고 주전자로 얼굴에 물을 붓는 등 물고문도 했다. 이 과정에서 치아가 부러지고 전치 8주 부상을 입었다. 고문에 못 이겨 내 군대시절 상관이 시켜서 왔다고 아무렇게나 말했다. 고문 도중 실신해 2일 만에 풀려났다. 이틀간 식사도 못했다. 풀려나기 직전에야 빵을 주더라. 당연히 먹지도 못했다. 병원에서도 한동안 혼자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사건 발생 후 각 대학에 피해자들이 오히려 잘못한 것처럼 대자보가 붙더라. 당시 저는 방송통신대 법학과 3학년에 다니며 사법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방송통신대 학생들은 서울대 법대에서 수업을 받기도 했다. 레포트 작성을 위해 서울대 모 교수님에게 책을 빌리러 갔다가 붙잡혔다. 가해자들에게 그 교수님에게 확인해보라고 했다. 교수님이 내 신분을 확인해줬는데도 믿지 않고 폭행을 계속했다."
"폭행을 당한 후 대인기피증이 생겨 고시공부를 포기했다. 이후 구청 공무원으로 일하다 퇴직한 후 보안원, 경비원 등으로 근무했다. 올해 만 64세인데 아직까지 결혼도 못했다. 다 그 사건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에 당한 일이라 후유증이 컸다. 사건 이후로도 제가 실제 프락치라는 음해를 계속해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고 피해자 중에는 현재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사람까지 있다."
"나는 당시 누가 누구인지도 몰랐고, 눈을 가린 채 폭행을 당했기 때문에 사건의 전말을 몰랐다. 판결문에 따르면 유 이사장은 피해자 소지품을 뒤져 신분을 확인하는 등 직접 프락치 색출작업을 했다. 유 이사장은 피해자들을 신문하면서 '계속 다른 말을 하면 나중에 두고 보자'는 등 협박성 발언도 했다. 가해자들은 유 이사장 앞에서 피해자들을 폭행했다. 유 이사장은 당시 서울대 복학생협의회 집행위원장으로 이들을 말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피해자 4명 중 가장 심하게 폭행을 당했다.
"당시 운동권 사람들이 전두환을 미워하지 않았나. 내가 전두환과 같은 전 씨라고 심하게 폭행했다. 정말 미개한 사고방식이었다."
"지난 1997년 유 이사장이 자기 책에서 '서울대 프락치 사건'이라는 명칭을 써서 소송을 걸었다. 피해자들은 프락치가 아니라 민간인들이었다. '서울대 프락치 사건'이 아니라 '서울대 민간인 고문 사건'이다. 판사가 합의를 권유하면서 유 이사장에게 사과하라고 하더라.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 이사장이 제게 사과했다. 진심어린 사과가 아니었다. 그 이후로도 소송 때문에 유 이사장을 만난 적이 있는데 사과는커녕 아는 체도 안 하더라."
민간인 감금 폭행 사건의 피해자 전기동의 2019년 증언
피해자 4명은 각각 2~6일간[1] 감금되어 각목으로 구타당하고 물고문을 당했다. 피해자 4인 각각의 피해 기간 및 피해 내용에 대한 뉴스타운의 기사가 있다.
피해자 중 한 명인 손형구는 자신이 프락치라고 말했으나 나머지 3명은 끝까지 자신은 프락치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사건을 조사한 경찰과 법원은 피해자 4명이 프락치인지 여부를 확인하지 않았다. # 무엇보다 프락치 여부가 본 사건에서 중요한 게 아니다.
3. 범인
피해자들은 서울대 공과대학 학생회장 조현수, 서울대 학도호국단 총학생장이었던 백태웅[2], 이정우[3], 윤호중[4] 등이 연루되었다고 주장했지만, 위에서 거론된 당사자들은 모두 당시 학생운동 지도부였을 뿐 폭행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당시 서울대복학생협의회 집행위원장이었던 유시민은 직접 물리적 폭행을 한 혐의가 없고 폭행을 지시하지 않았으나(유시민의 주장, 경찰은 그렇게 보지않았다) 고문실 안에서 폭행을 방관하였다는 죄목으로 함께 처벌받았다. 당시 사건을 현장에서 지휘·담당했던 김영복은 유시민은 폭행 사건 뒤 사태를 알았다고 주장했으며 유시민은 폭행을 지시하거나 가담한 사실이 없지만 당시 서울시경 고위 간부의 지시에 따라 신병 확보가 쉬운 유시민에게 혐의를 씌웠다고 주장했다. #[5]이 사건으로 유시민은 구속되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당시 재판이 끝나고 유시민이 재판정에서 구치소로 끌려갈 때 방송 카메라에 찍혔던 장면[6]이 유명하다. 끌려가던 유시민이 법원 건물 쪽에 대고 "전대가리 깨져라"라고 외친 장면인데 대부분 사람들은 "전대가리 개들아"[7]라고 외쳤다고 생각했지만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한 유시민이 2019년 4월 20일 KBS의 대화의 희열에 출연해서 저 장면이 영상 자료로 나오고 기자(신지혜)가 질문하자 "사실 개들아가 아니라, 저때 제가 좀 화가 나서 전뭐뭐뭐 깨져라라고 말한 거였는데, 잘못 알려진 거 같네요."고 말해서 진실이 공개되었다.[8]
2006년 유시민이 보건복지부장관으로 내정되었을 때 피해자 정용범의 모친이 기자회견에서 “사과 한마디도 없다”며 “장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다른 피해자 전기동도 2019년 언론 인터뷰에서 "판사가 합의를 권유하면서 유 이사장에게 사과하라고 하더라.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 이사장이 제게 사과했다. 진심어린 사과가 아니었다. 그 이후로도 소송 때문에 유 이사장을 만난 적이 있는데 사과는 커녕 아는 체도 안하더라."고 밝힌 바 있다.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내정되었을 때 해당 사건이 재조명되어 큰 곤욕을 치를 때 "당시의 모든 서울대 학생을 대신해서라도 사과 드린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 유명한 항소이유서에는 사과는커녕 피해자에 대한 언급 자체가 거의 없다.
월간조선은 2006년 2월호에서 이 사건으로 피해자들의 인생이 망가져 버렸다고 전하면서 "취재를 마치고 살펴본 柳의원의 이력서에서 유독 그의 좌우명이 눈에 크게 들어 왔다. 「남에게 폐 끼치지 말고 살자」"고 유시민을 비판했다.#
4. 여담
유시민의 첫 저서인 《아침으로 가는 길》(1986. 절판)이 이 사건의 내용과 판결문 등을 기록한 것이다. 유시민 본인뿐만 아니라 윤호중, 오재영(사회대 학생회장), 백태웅의 항소이유서도 수록했다.2022년 한동훈 법무부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언급되었다. 운동권의 민간인 고문 사건이 이 외에도 몇 개 더 있기는 하지만 이 사건이 가장 대표적이다 보니 이 사건을 염두에 두고 한 발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민형배: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이든 조국 전 장관 일가족에 대한 도륙이든 사과할 의사가 없다는 말씀이시죠?
한동훈: 노 전 대통령 사건에 대해서는 제가 알지 못하고 제가 관여한 바가 없고요. 조국 전 장관 사건은 제가 관여했는데요. 그것은 사과할 사건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민형배: 당시 검찰의 그런 행위에 대해서 사과할 의사가 있냐고 묻는 거예요.
한동훈: 위원님,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민형배: 네, 짧게 하세요.
한동훈: 과거에 민주화운동을 하던 경우에도 민간인을 고문하던 분도 계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일을 가지고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서 민주화 운동 전체를 폄훼하지 않지 않습니까? 그런데 과거에 있었던, 어떤 저희가 관여하지 않았던 특정한 사안을 들어서 어떤 기관 자체를 폄훼하고 그리고 그 기능 자체를 없애야 한다고 하는 것에 동감하기 어렵습니다.
2022년 5월 9일 한동훈 법무부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
한동훈: 노 전 대통령 사건에 대해서는 제가 알지 못하고 제가 관여한 바가 없고요. 조국 전 장관 사건은 제가 관여했는데요. 그것은 사과할 사건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민형배: 당시 검찰의 그런 행위에 대해서 사과할 의사가 있냐고 묻는 거예요.
한동훈: 위원님,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민형배: 네, 짧게 하세요.
한동훈: 과거에 민주화운동을 하던 경우에도 민간인을 고문하던 분도 계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일을 가지고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서 민주화 운동 전체를 폄훼하지 않지 않습니까? 그런데 과거에 있었던, 어떤 저희가 관여하지 않았던 특정한 사안을 들어서 어떤 기관 자체를 폄훼하고 그리고 그 기능 자체를 없애야 한다고 하는 것에 동감하기 어렵습니다.
2022년 5월 9일 한동훈 법무부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
5. 같이 보기
[1] 흔히 11일로 알려져 있었지만 사건이 발생한 총 기간이 11일인 것이고 4명이 동시에 감금된 것이 아니라 각각 따로 붙잡혀 감금되었다.[2] 유시민과 비슷하게 징역 1년을 살고 풀려났다. 노동운동가 박노해, 당시 대학원을 다니던 조국, 나중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되는 은수미 등 200여 명과 함께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을 준비하고 운영했다. 이 사노맹 사건으로 감옥에 갔지만 국민의 정부에서 특별복권된 후 미국 유학을 떠났다. 현재는 미국 하와이대학교 로스쿨 교수로 재직 중이며 유엔인권이사회의 강제실종실무그룹 의장을 지내는 등 인권문제로 폭넓게 활동하고 있다.[3] 서울대 수석 합격생이었으며 서울대 학생회장이 되었다. 이후 정계진출은 하지 않았다. 사법시험, 행정고시, 외무고시 모두 합격해서 일명 '고시 3관왕'으로 불리기도 했다.[4] 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 21대 국회의원 및 원내대표, 전 법사위원장.[5] 여러 언론 보도가 있으나, 그 누구도 유시민이 고문하거나, 또는 고문을 지시하는 장면을 직접 본 피해자는 없고, 그런 사실진술조차 없다.[6] 당시 뉴스에서 그 부분이 방송되지는 않았고 그냥 방송국에 남아 있던 걸 세월이 지나 민주화된 후 방송국이 공개했다.[7] 영상 속 음성은 "전대가리 깨들아"라고 들리는데 흥분해서 개를 깨로 발음했다고들 생각했다. 당시 영상 속 유시민의 눈빛만 봐도 매우 사나운 표정이었기 때문에 그 정도로 흥분한 상태에 발음 문제는 당연하다고 일반인들 모두 생각했다.[8] 2019년 12월 20일 주진우가 진행한 라디오 방송 "아닌 밤중에 주진우"에 출연했을 때도 다시 한 번 깨져라가 맞다고 말했는데 심지어 그 방송에서는 "전대가리"라고 노골적으로 말했다. 당시 너무 처참하고 절망적이어서 성질이라도 한번 질러 버리고 싶어서 그냥 전대가리라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징역 1년 6개월이긴 했지만 판결이 나오기 전에 사전구속 상태로 징역 6개월 정도 살았을 때라 딱 1년이 남았다. 1년을 감옥 속에서 더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너무 화가 나서 그거라도 했던 거라고 한다. 근데 실제로는 항소이유서를 쓰고 항소했고 1985년 6월 2심 선고에서 징역 1년으로 줄어들었다. 그래서 2심 이후에는 생각보다 남은 징역이 적었으며 3개월 정도만 더 살고 10월 초에 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