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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iki style="margin:-16px -11px" | }}} | |||||||
| 신민주연합당 (1991.4.9.~1991.9.15) | → | 민주당 (1991.9.16.~1995.9.4.) | → | 새정치국민회의 (1995.9.5.~1998.2.24.) | ||||
||<-2><tablewidth=420><tablealign=right><tablebgcolor=#009D68,#009D68><tablebordercolor=#D82634,#D82634><height=120><#fff><nopad> ![파일:민주당(1991년) 로고.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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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당 | |
| <colcolor=#fff> 영문 명칭 | <colbgcolor=#fff>Democratic Party |
| 한문 명칭 | 民主黨 |
| 등록번호 | 제56호 |
| 등록연월일 | 1991년 9월 16일 |
| 말소연월일 | 1995년 12월 21일 (개혁신당과 합당, 통합민주당 신설) |
| 선행 조직 | [[신민주연합당| 신민주연합당 ]], [[민주당(1990년)| 민주당 ]](1991년 9월 16일 신설합당) |
| 통합 정당 | (1995년 3월 7일 흡수합당) |
| 사무소 소재지 | |
| 서울특별시 마포구 토정로 318 (용강동 51-5) | |
| 대표최고위원 | 홍영기 / 5선 (5·6·8·13·14대) |
| 박일 / 5선 (8-10·12·14대) | |
| 원내총무 | 이철 / 3선 (12-14대) |
| 사무총장 | 장준익 / 초선 (14대) |
| 정책위의장 | 홍기훈 / 재선 (13·14대) |
| 국회의원 | 39석 / 290석 (13.44%) |
| 광역자치단체장 | 0석 / 15석 (0%) |
| 기초자치단체장 | 28석 / 230석 (12.17%) |
| 당 색 | 적색 (#D82634) |
녹색 (#009D68) | |
| 당원 수 | 949,299명[1] (1994년 12월 31일 기준)[2] |
| 1995년 12월 21일 기준 | |
1. 개요
| |
2. 연혁
2.1. 탄생 경위
1990년대에 한국 정치사상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두 개의 야당(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여당(민주정의당)과 합당하는, 이른바 3당 합당이 발생하였다. 이에 따라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이 탄생하였고, 제1야당이던 평화민주당은 고립되어 버린다. 한편, 통민당 인사 일부는 3당 합당에 반발하여 탈당하였고, 이들은 민주당(꼬마민주당으로 불림)을 창당한다. 이들에게는 노무현, 이기택 등 몇몇 스타 정치인이 존재했으나, 조직력의 현저한 약세를 절감하고 있었다.그리하여 평화민주당과 꼬마민주당은 야권 통합을 추진하나, 결국 결렬되어 1991년 지방선거를 따로 치르게 된다. 꼬마민주당은 '민주연합'이라는 단체와 통합하면서 임시전당대회를 통해 제2의 창당을 선언하였고, 평화민주당 역시 재야인사들을 영입하며 신민주연합당으로 당명을 변경함과 동시에, 전당대회를 열며 신당을 창당하는 듯한 형식을 취하였다.
그러나 두 당 모두 1991년 지방선거에서 패배하였다. 두 당 모두 강력한 여당에 맞서기 위해 야권통합이 필요함을 절실하게 느끼며, 그렇게 다시 합당을 추진한다. 마침내 1991년 9월 16일에 신민주연합당과 꼬마민주당이 신설합당하였고, '민주당'이란 이름의 정당을 등록하였다.[3] 당시 신민당(신민주연합당)과 꼬마민주당(민주당)의 당세는 거의 10:1에 가까웠지만, 당명을 민주당으로 하고 대의원 구성도 1:1로 했으며 김대중과 이기택이 공동대표를 맡는 등 신민당 측이 많은 양보를 하였다. 대신 법적 대표자는 김대중이 단독으로 맡았다.
2.2. 총선과 대선
신설 다음 해인 1992년 3월 24일에는 제14대 국회의원 선거[4]가 치러졌다. 민주당은 내부적으로 공천 갈등과 계파 싸움이 치열했음에도, 97석을 차지하며 어느 정도 선전했다. 그러나 부산직할시에서 출마한 노무현, 김정길 등은 전원 낙선하는 등[5] 지역구도의 벽을 뚫지 못했다.민주당은 1992년 5월 25~26일에 '민주당 대통령후보 지명 및 제1차 정기전당대회'개최하였다. 공동 대표최고위원선거는 최고 지도부에 의해 김대중과 이기택이 만장일치로 재선출되었다. 또한 제14대 대통령 선거 후보는 경선을 통해 김대중을 선출하였다.[6]
대선에 출마한 김대중은 "민주당은 13대 국회에서 수세·농지세 감면, 농어가 부채의 상환연기, 농·수·축협 조합장 직선제 도입 등 농민을 위해 일한 유일한 정당"이라면서 "3백64일 야당하다가 선거 날에만 여당하는 농촌 유권자들은 이제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30여년 간의 군정 기간중 가장 많은 차별과 천대를 받은 계층이 바로 여러분 농민들입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뭐가 좋다고 선거때만 되면 여당을 찍고 선거가 끝나면 후회를 하곤 합니까"라고 주장했다. 이미 30년 전인 1992년 대선 때부터 계급배반투표의 논리가 공식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후보가 유세장서 유권자 비판 1992년 대선 김대중 후보 표 잘못 찍어 제 발등도 찍었다, 민주당 유권자 책임 강조
선거 막바지에 초원복집 사건으로 인해 지역감정이 유발되고 민주자유당 지지층이 결집하면서, 김대중은 김영삼에게 190만 표 차로 패배하고 만다. 낙선한 김대중은 다음 날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고, 그 후로는 이기택이 단독 대표로 당을 이끌었다.[7]
2.3. 지선과 소멸
문민정부 초기에는 김영삼 대통령이 개혁에 의욕적으로 나서면서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여 반사적으로 지지율이 지지부진했다. 다만 1993년 6월 보궐선거와 1994년 8월 재보궐선거에서 취약지역인 강원도와 TK 지역에서 교두보를 마련하는 성과도 있었다.창당 초기에는 3당 합당의 여파로 원내에 민주자유당과 민주당밖에 없는 2당 체제였으나, 이듬해인 1992년에 통일국민당, 신정치개혁당, 새한국당이 등장하여 원내 5당 체제가 되었으며, 1994년에는 국민당과 신정당이 합당하여 신민당이 되었다. 민주당은 이들과 함께 야권 공조를 시도하였고, 재보궐선거에서 야권 단일 후보를 내세우기도 했다.
이기택은 오랫동안 당대표를 맡았지만, 꾸준히 동교동계와 반목하여 내분이 매우 잦았고, 김대중은 정계 은퇴를 선언했으면서도 어느 정도 당내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기택 대표가 장외 투쟁론을 주장할 때 김대중과 동교동계는 원내외 병행 투쟁론을 주장하기도 했고, 전당대회와 당 지도부 교체에 대한 이견들 또한 내분으로 이어졌다.
1995년 초에도 제3차 전당대회 개최를 두고 갈등이 심했으나, 극적으로 합의하면서 절충안으로 타협하였다. 전당대회는 예정대로 8월에 치르기로 하되 그 전에 임시전당대회를 개최하게 되었으며, 기존의 집단지도체제 대신 단일성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하였다. 총재는 이기택, 부총재는 김원기, 유준상, 조세형, 권노갑, 노무현, 한광옥, 신순범, 이부영을 선출하였다. 또한 새한국당[8], 통일시대국민회의와 야권 통합을 합의하여, 통일시대국민회의의 김근태를 부총재로, 새한국당의 이종찬을 상임고문으로 추대하였다.
1995년 3월 7일, 새한국당을 흡수하여 당세를 확장했고,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나섰다. 민주당은 조순 서울특별시장을 당선시키고 기초단체장과 광역의원 선거에서도 민주자유당을 앞서며 승리했지만, 이기택이 동교동계와 충돌을 감수하면서까지 공천한 장경우 경기도지사 후보가[9] 민주자유당
민주당은 지선에서 승리하고도 여전히 내분이 심했고, 동교동계에서는 분당 및 신당 창당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1995년 7월 18일에 김대중이 정계에 복귀하자, 동교동계 인사들이 집단 탈당하여 1995년 9월 5일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다. 민주당은 제2야당으로 전락하였다. 갈등이 얼마나 심했는지 동교동계는 모금해서 겨우 사들인 '평화민주당 김대중' 이름으로 등기된 당사까지 던져놓고 나갔다.
분당이 진행되면서 당세가 약해져 가는 와중에도 민주당은 갈등을 겪고 있었다. 김원기, 노무현, 조세형, 김근태, 김정길, 이부영, 제정구, 유인태, 김원웅 등은 민주당 내에서 '구당과 개혁을 위한 모임(구당모임)'을 결성하였고, 이들은 김대중의 신당에 반대하면서도 민주당에 대한 개혁을 요구하여, 동교동계가 주도했던 이기택 퇴진론에 동참하였다. 민주당은 이기택 측과 구당모임 세력으로 양분되어 전당대회를 두고 갈등을 겪다가, 이기택 총재가 백의종군을 선언하여 일단 봉합되었다. 이기택은 전당대회에 불출마하기로 하였고, 단일성 집단지도체제에서 다시 집단지도체제로 바꾸며 총재 대신 공동 대표최고위원을 선출하게 된다. 1995년 8월 28일 제3차 전당대회를 개최하여 홍영기와 박일이 만장일치로 공동 대표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결국 동교동계가 새정치국민회의로 완전히 분당하자, 민주당은 당세 확장을 위해 '반3김 통합'을 내세우며 야권 통합을 시도하였다. 당내 계파였던 '구당모임'은 더 이상 '구당모임'이라는 명칭은 부적합하다고 판단하여 1995년 9월 16일에 '통합과 개혁을 위한 모임(통합모임)'으로 변경한다. 또한 이기택계 쪽은 모든 정통 민주 세력과 연합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세우며 '정통민주연합'을 결성하였다. 두 계파는 통합 수임 기구를 구성하고 각각 9명씩 참여시키면서 통합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 후 시민운동 계열 인사들과의 합작을 모색하였고, 1995년 12월 개혁신당과 합당하여# 통합민주당으로 개편(신설합당)되었다. 후신 정당을 신설하면서 기존의 정당 등록은 말소되었다. 하지만 통합민주당은 당 로고를 그대로 활용하는 것은 물론 1996년 총선 공보물에서 '통합'을 빼고 민주당으로 표기하는 등 역사가 그대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3. 강령과 정책
강령
정치: 국민적 지지에 의한 민간 민주정부를 수립하고 국민이 신뢰하는 민주주의와 도덕정치를 구현한다.
인권: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어떠한 제도나 행위를 배격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한다.
외교안보: 세계평화와 공존 공영을 지향한다. 민족의 자존과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민주안보 민주외교를 적극 추진한다.
통 일: 평화공존 평화외교 평화통일의 3단계 통일방향을 추진한다. 겨레의 염원인 통일을 이룩하는 희망찬 민족사의 창조주역이 된다.
경 제: 자유경제 체제를 보장한다. 정의로운 경제질서를 확립한다.(부의 공정한 분배 중소기업의 우선적 발전)
사 회: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부당한 차별과 불균형을 해소한다. 진정한 국민화합에 서로 믿고 살수 있는 민주사회를 건설한다.
교육. 문화: 고유의 자율성과 창작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한다. 민주화와 통일시대에 걸맞은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민족문화를 창달한다.
정치: 국민적 지지에 의한 민간 민주정부를 수립하고 국민이 신뢰하는 민주주의와 도덕정치를 구현한다.
인권: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어떠한 제도나 행위를 배격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한다.
외교안보: 세계평화와 공존 공영을 지향한다. 민족의 자존과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민주안보 민주외교를 적극 추진한다.
통 일: 평화공존 평화외교 평화통일의 3단계 통일방향을 추진한다. 겨레의 염원인 통일을 이룩하는 희망찬 민족사의 창조주역이 된다.
경 제: 자유경제 체제를 보장한다. 정의로운 경제질서를 확립한다.(부의 공정한 분배 중소기업의 우선적 발전)
사 회: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부당한 차별과 불균형을 해소한다. 진정한 국민화합에 서로 믿고 살수 있는 민주사회를 건설한다.
교육. 문화: 고유의 자율성과 창작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한다. 민주화와 통일시대에 걸맞은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민족문화를 창달한다.
정책
민주적 기본질서 확립
민주안보 자주외교 태세를 확립한다.
상호 존중의 민족통일을 추진한다.
정의 경제를 실현한다.
중소기업 중심의 안전성장을 추진한다.
농민 수산업의 보호와 육성한다.
민주적 기본질서 확립
민주안보 자주외교 태세를 확립한다.
상호 존중의 민족통일을 추진한다.
정의 경제를 실현한다.
중소기업 중심의 안전성장을 추진한다.
농민 수산업의 보호와 육성한다.
4. 역대 당직자
4.1. 대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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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373A3C,#DDD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009d68> 제1·2대 김대중 이기택 | 제3대 이기택 | 제4대 홍영기 박일 |
| }}}}}}}}}}}}}}} | |||
1992년 5월 25~26일, 민주당 제1차 정기전당대회에서 만장일치로 재선출되었다. 또한 김대중은 민주당의 대선후보로 선출되었는데,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2위로 낙선하였다. 김대중은 다음 날인 1992년 12월 19일에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고, 사실상 이때부터 이기택이 단독 대표를 맡게 된다.
- 1993년 4월 8일 ~ 1995년 2월 24일
- 이기택 (대표최고위원)
- 1995년 2월 24일 ~ 1995년 9월 1일
- 이기택 (총재)
여전히 내분을 겪다가 극적으로 합의하였다. 이기택 총재는 백의종군을 선언하며 불출마하였고, 1995년 8월 28일 제3차 전당대회를 개최하여 홍영기와 박일이 만장일치로 공동 대표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결국 동교동계가 새정치국민회의로 분당하자, 당세 확장을 위해 개혁신당과 신설합당하였다. 이에 따라 기존의 정당 등록은 말소되고 통합민주당이 신설되었다.
4.2. 원내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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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초대 김정길 | 권한대행 김덕규 | 제2대 이철 | 제3대 김태식 | |
| 제4대 신기하 | 권한대행 원혜영 | 제5대 이철 | |||
| }}}}}}}}}}}} | |||||
- 1대 김정길(임명)(1991년 9월~1992년 4월)[11]
- 대행 김덕규(임명)(1992년 4월~1992년 6월)
- 2대 이철(임명)(1992년 6월~1993년 3월)
- 3대 김태식(선출)(1993년 3월~1994년 5월)
- 4대 신기하(선출)(1994년 5월~1995년 8월)[12]
- 대행 원혜영(임명)(1995년 8월~1995년 9월)
- 5대 이철(내정)(1995년 9월~1995년 12월)
4.3.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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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초대 김원기 | 제2대 한광옥 | 제3대 김덕규 |
| 제4대 최락도 | 제5대 김태식 | 제6대 장준익 | |
| }}}}}}}}}}}} | |||
4.4. 정책위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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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초대 류준상 | 제2대 장재식 | 제3대 김병오 | 제4대 홍기훈 | |
| }}}}}}}}}}}} | |||||
5. 선거 결과
5.1. 대통령 선거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D82634><tablebgcolor=transparent><rowbgcolor=#D82634><rowcolor=#fff> 연도 || 선거명 || 후보자 || 득표수 (득표율) || 결과 ||
| 1992년 | 14대 | 김대중 | 8,041,284 (33.82%) | 낙선(2위) |
5.2. 국회의원 선거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D82634><tablebgcolor=transparent><rowbgcolor=#D82634><rowcolor=#fff> 연도 || 선거명 || 지역구 (비율) || 전국구 (득표율) || 총 의석 (비율) || 결과 ||
| 1992년 | 14대 | 75 / 237 (31.65%) | 22 / 62 (29.17%) | 97 / 299 (32.44%) | 원내 2당 |
5.3. 전국동시지방선거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D82634><tablebgcolor=transparent><rowbgcolor=#D82634><rowcolor=#fff> 연도 || 선거명 || 광역단체장 (비율) || 기초단체장 (비율) || 광역의회의원 (비율) ||
| 1995년 | 1회 | 4 / 15 (26.67%) | 84 / 230 (36.52%) | 390 / 970 (40.21%) |
5.4. 재보궐선거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D82634><tablebgcolor=transparent><rowbgcolor=#D82634><rowcolor=#fff> 연도 || 국회의원 || 광역의원 ||
| 1991년 11월 | 0 / 1 | |
| 1993년 4월 | 0 / 3 | |
| 1993년 6월 | 1 / 3 | |
| 1993년 8월 | 0 / 2 | |
| 1993년 9월 | 0 / 2 | |
| 1993년 11월 | 0 / 3 | |
| 1994년 8월 | 1 / 3 |
6. 당가
| 민주당가 김병걸 작사 얼마나 긴 세월을 헤쳐왔나 비바람 불고 눈보라쳐도 함께 온 형제자매여 어찌 잊으리 끝내 보고야말 눈부신 햇살 온누리에 펄럭일 우리의 깃발. 아, 우리는 들었노라 삼천리 칠천만이 우릴 부르는 소리 아, 우리는 가노라 삼천리 칠천만이 손짓하는 곳으로 자유와 번영 복지와 통일의 큰 길로 역사를 이끄는 그 이름 민주당 세계로 뻗어가는 그 이름 민주당. |
7. 기타
- 민주당계 정당의 역사가 워낙 복잡하게 얽혀있어 여러 의견이 있지만, 현 민주당계 정당의 직접적 전신으로 언급될 수 있는 정당 중 하나이다.[13] 민주당계의 양대 계파로 오랜 기간 지속된 동교동계와 꼬마민주계(친노의 전신)가 결합했다는 점에서[14] 그 상징성이 크다.[15]
- 당시 영국의 외신은 1990년 창당된 민주당이 없어지고 1991년 민주당이 창당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다가 방송사고를 내는 바람에 그냥 자막으로 1990과 1991을 붙여서 보냈다고 한다.
그러니 헷갈리게 같은 이름으로 창당 반복하지 말자.[16]
8. 관련 문서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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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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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석 | 8석 | |||||
| 무소속 2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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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법정당원 9,483명, 일반당원 939,816명.[2] 중앙선거관리위원회(1996), 정당의 활동개황 및 재산상황 등 보고집[3] 그러나 꼬마민주당 박찬종, 김광일 전 의원과 고영구 전 부총재는 여기에 동참하지 않았다.[4] 해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이 자신과 거리를 두던 '정치발전연구회' 소속 정치인 중 일부를 공천 탈락시켜 논란이 되었다. 노승환은 이에 반발하여 탈당하고 불출마를 선언하였다.[5] 부산 해운대구가 지역구였던 이기택은 전국구로 옮겨 낙선을 면했다. 다른 꼬마민주당 출신 의원 중에는 장석화(서울 영등포갑)만 살아남았고 1990년 진천-음성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던 허탁도 낙선했다.[6] 경선 결과는 김대중 1,413표, 이기택 925표였다.[7] 다만, 당내 다수파는 동교동계였으므로 이기택의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8] 1992년부터 1995년까지 존재했던 정당으로, 보수정당 출신들이 세운 제3지대 정당이었다. 1992년 대선 당시 김영삼에게 맞서 대선후보 경선에 나섰다가 민자당을 탈당한 이종찬이 김현욱, 이영일, 장경우 등과 함께 1992년 10월 창당했다. 주로 민주자유당 내 민정계(민주정의당 출신)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우연이긴 하지만 이름이 신한국당과 비슷하다.[9] 동교동계가 밀었던 인물은 이종찬이었다. 그런데 내면을 보면 둘 다 민정계의 새한국당 출신이라는 점에서 도긴개긴이었다(...). 도대체 왜 충돌한 거야?[10] 제14대 대통령 선거 낙선으로 인한 정계 은퇴, 1993년 2월 15일 변경 등록.[11]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낙선으로 인한 사퇴.[12]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을 위한 탈당.[13] 실질적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법적으로 더불어민주당의 전신 중 가장 오래된 정당은 1995년 창당된 새정치국민회의이다. 이는 80년대 이전 정당은 국회 해산으로 인해 법적 후신이 단절되었고, 이후에도 분당과 합당 등으로 인해 계보가 꼬였기 때문이다.[14] 지역적으로는 호남과 PK를 위시한 영남의 결합.[15] 흥미로운 점은 이 당이 현재 보수정당의 법적 전신 중 하나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1995년 9월 DJ가 새정치국민회의로 분당하면서 잔류 인원은 개혁신당과 합당하여 같은 해 12월 통합민주당을 신설하였는데, 이 통합민주당이 1997년에 신한국당과 합당하면서 신설한 정당이 바로 한나라당이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2012년 새누리당으로, 2017년에는 자유한국당으로, 2020년에는 미래통합당으로 신설합당 후, 국민의힘으로 이름을 바꿔 오늘날에 이른다.[16] 전신 정당명 중 하나를 후신 정당명에 그대로 썼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자유민주연합, 자유선진당, 개혁신당 또한 합당하면서 같은 이름의 정당을 신설했다.[17] 이기택계 등.[18] 동교동계 등.[19] 안동옥 등.[20] 제정구 등.[21] 안동옥 등.[22] 정태근, 김성식 등.[23] 이종찬 등.[24] 동교동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