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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wiki style="font-size: .8em; word-break: keep-al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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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 |
<colcolor=#000080> 영문명 | <colbgcolor=#ffffff,#1c1d1f>Democratic Party (DP) |
한문명 | 民主黨 |
창당일 | 1955년 9월 18일 |
해산일 |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정변으로 해산) |
선행 조직 | , (사사오입 개헌 반대 세력 통합) |
주소 |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59번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길12) | |
참의원 | 13석 / 50석 (5.16 군사정변 직전) |
민의원 | 131석 / 233석 (5.16 군사정변 직전) |
대통령 | 윤보선 / 제2대 (1960.8.13. ~ 1962.3.24.) |
스펙트럼 | 반 독재 빅 텐트 (중도~극우) |
이데올로기 | 자유주의 보수주의 자유민주주의 민주화(반 독재) 내셔널리즘 |
당 색 | 남색 (#000080) |
당기 |
1. 개요
| |
창당발기인 대회 | 창당 당시 민주당 지도부 |
이승만의 장기 집권을 위해 제1공화국의 집권 여당인 자유당이 사사오입 개헌을 강행하자, 이에 반발한 제1야당 민주국민당과 자유당 내 개헌 반대파, 기타 재야 인사들이 '반(反)독재'를 기치로 단결하여 1955년 9월 18일에 창당했다. 이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이 몰락하고 들어선 제2공화국 하에서 치러진 5대 총선에서 개헌선을 훌쩍 뛰어넘는 대승을 거두었지만 신파와 구파로 나누어지고, 구파는 아예 신민당이라는 별개의 정당을 차리며, 장면 내각은 제대로 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며 국정운영의 난맥이 이어졌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집권 1년여 만에 5.16 군사정변으로 실각한 뒤 강제 해산되었다.[1]
강경한 반공 우익 성향의 이승만·자유당에 대항해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했다는 이미지와 오늘날의 민주당계를 창시한 정당으로 대우받는다는 상징성 때문에 활동 당시 진보·개혁 진영의 대표 격이었을 것이라고 오해할 수 있으나, 기본적으로 자유당처럼 철저한 반공을 내세운 보수 우익 정당이었는데, 4.19 혁명 이후 통일 운동이 급격하게 커지자 ‘반공임시특별법’과 ‘데모 규제법’ 입법을 추진하기도 했다. 집권기인 장면 내각 때에는 양원제를 도입, 광역단체장 직선제 도입, 언론의 자유 전면 보장, 교원노조 합법화 조치 등 사회자유주의적인 정책을 도입하면서, 자유당에 비해서는 많이 개혁적이기는 했지만, 신구파의 대립과 5.16 군사정변으로 매우 짧은 시기에 정권이 전복되면서 평가하기가 애매했다.
2. 역사
2.1. 창당과 통합
||<rowbgcolor=#000080,#191919><rowcolor=#fff> 사건 순서 ||<-4> 민주당(1955년)의 창당 과정 ||
1 | 민주국민당 (신익희, 조병옥, 정일형 등) | 흥사단계 (장면 등) | 자유당 탈당파 (현석호, 이태용 등) | 무소속 일부 |
2 | 1955년 9월 18일 민주당 창당 |
사사오입 개헌에 반발한 야당 세력이 모여 만든 정당이다. 한 정당에 여러 계파가 모여 있다 보니 창당 이후에도 이합집산으로 모인 계파와 과거 정당 출신들이 갈등을 벌였다. 구 한국민주당, 민주국민당 출신의 구파와 자유당 탈당파, 흥사단계 등 신파의 내부적 갈등이 대표적이다. 물론 정일형 박사처럼 한민당-민국당을 거쳐 신파에 가담한 사람들도 있다.
한편 민주당 창당에는 이승만 정권에 참여했으나 권력투쟁 과정에서 밀려나있던 우익 정치인 장택상 전 국무총리와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농지개혁을 주도했으나 노선갈등으로 물러난 뒤에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혁신계(진보세력)의 조봉암도 참여하려 했다. 장택상과 조봉암은 사상적으로 정반대였지만, 사적으로는 대단한 절친으로 장택상이 조봉암은 혁신계지만 사상적으로는 투철한 반공주의자라고 보증하고 김성수도 호응하면서 민주당에 참여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김성수는 민주당 창당 직전 사망했고, 장택상의 보증에도 불구하고 장면, 조병옥, 김준연은 "사상이 의심스러운 조봉암은 안 된다"고 거부하면서 조봉암은 민주당에서 배제된다. 이렇게 되자 조봉암의 절친인 장택상도 민주당 창당에서 빠지고 자유당으로 돌아가버렸다. 한편 조봉암은 혁신계를 결집시켜서 독자적으로 진보당 창당에 나선다.
주요 지지기반은 서울과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등을 비롯한 도시 지역이었으며, 이는 농촌 중심인 자유당과 대비되는것이었다. 여촌야도라는 단어도 이승만때부터 나왔던것이었다. 물론 서울에서 지지세가 강했던것은 순전히 이승만의 자업자득이었던 면이 강했기는 했다.
2.1.1. 창당에 동원된 정당과 계파
2.2. 두 번의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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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민주당은 조봉암을 밀어주기보다는 신익희에 대한 추모표를 던져달라고[3] 유세했고 이승만이 당선되게 된다. 반면 진보당 창당을 추진하던 인사들은 자신들 쪽 부통령 후보 박기출을 사퇴시키면서까지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 장면을 밀어주었고, 2.4%p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장면이 승리해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58년 4대 총선에서는 서울, 부산, 대구, 인천, 대전, 광주, 수원, 마산, 목포 등을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 압승을 거두며, 개헌 저지선을 확보하였다. 이후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조병옥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으나, 선거를 앞두고 위암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수술을 받았지만 갑작스런 심장 발작으로 사망하면서 민주당은 두 번 연속으로 대통령 후보를 잃는 전례가 없던 아픔을 겪었다. 조봉암은 진보당 사건으로 인해 사형당했고, 이승만의 당선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대통령 선거보다 부통령 선거가 더 주목을 받게 된다. 부통령 선거 결과 이기붕이 장면을 압도적인 차이로 제치고 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시작하기전부터 부정선거가 치러졌던지라, 3.15 부정선거로 기록되었다. 4.19 혁명의 결과 이승만이 하야한다.
2.3. 제2공화국 시기
4.19 혁명 이후 치러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은 의석의 약 75%를 차지하는 압승을 거둔다.[4] 민주당은 제2공화국의 집권 여당이 되었다.그러나 민주당의 구파와 신파의 갈등은 더욱 악화되어 따로 원내교섭단체를 등록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1960년 11월, 민주당을 탈당한 구파 세력이 신민당을 창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래도 신파가 의석수를 늘려가며 사실상 집권여당으로써 역할을 했고, 1960년 지방선거에서 신민당을 누르는데 성공하여 정권이 안착되는가 싶었지만, 여전히 지지율은 상당히 낮은 상태였다.
계파 갈등에 더해 4.19 혁명 이후 통일 운동이 급진적으로 흘러가는 등 혼란이 가중되자 민주당 장면 정부는 ‘반공임시특별법’과 ‘데모 규제법’ 입법을 추진하기도 했는데, 혁신계(진보계)와 학생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쳐 실제 입법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5]
혁신계는 장면 내각 하에서 비로소 정치적 자유를 얻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장면 정권을 적대시했다.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기 두 달 전쯤에 나는 혁신 세력에게 강력한 경고를 했다.
“자유당 시절에 혁신 세력의 보스였던 진보당의 조봉암 선생은 공산당과 내통하고 있었다는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했습니다. 혁신계 여러분들도 대부분 형무소 생활을 하거나 다른 고통을 받은 사실이 있습니다. 그때를 잊었습니까. 여러분에게 지금의 자유를 준 것이 어떤 정부입니까. 여러분이 마음껏 누리는 자유, 그런 자유를 보장해 주고 있는 정권을 무너뜨린다면 그 뒤에 등장하는 것은 군사 정권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 혁신 세력에게는 또다시 고난의 세월이 옵니다. 이빨을 보호해 주는 입술을 왜 찢고 있습니까.”
집권 여당의 대변인으로서 혁신 세력을 향한 경고는 당시 신문에도 보도되었다. 그러나 당시 혁신계 인사들은 이런 내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은 국민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국제적 보장 하의 영세 중립화 통일’, ‘선 통일 후 중립화’, ‘남북 군대의 무장 해제와 외군 철수’ 등 무책임한 남북통일 정책을 주장했다. 심야에 횃불 시위를 하면서 국민들을 선동하기도 했다. 이들의 과격한 주장과 시위는 정국의 안정을 바라며 공산당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국민들에게 극도의 불안감을 안겨 주었다. 혁신계는 통일사회당, 사회대중당 등으로 갈라져 민주당에 경쟁적으로 도끼질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김대중 자서전> #
결국 집권 1년차에 반공을 국시로 내건 5.16 군사정변이 터져서 1961년 5월 22일 국가재건최고회의 포고 제6호로 인해 해산되었다. 헌정이 재개된 이후로는 절차부심해서 1963년 대선에서 윤보선을 단일후보로 내세웠지만 석패했고, 의회권력도 단일화 실패로 결국 민주공화당이 차지하고야 만다.“자유당 시절에 혁신 세력의 보스였던 진보당의 조봉암 선생은 공산당과 내통하고 있었다는 누명을 쓰고 사형을 당했습니다. 혁신계 여러분들도 대부분 형무소 생활을 하거나 다른 고통을 받은 사실이 있습니다. 그때를 잊었습니까. 여러분에게 지금의 자유를 준 것이 어떤 정부입니까. 여러분이 마음껏 누리는 자유, 그런 자유를 보장해 주고 있는 정권을 무너뜨린다면 그 뒤에 등장하는 것은 군사 정권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 혁신 세력에게는 또다시 고난의 세월이 옵니다. 이빨을 보호해 주는 입술을 왜 찢고 있습니까.”
집권 여당의 대변인으로서 혁신 세력을 향한 경고는 당시 신문에도 보도되었다. 그러나 당시 혁신계 인사들은 이런 내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은 국민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국제적 보장 하의 영세 중립화 통일’, ‘선 통일 후 중립화’, ‘남북 군대의 무장 해제와 외군 철수’ 등 무책임한 남북통일 정책을 주장했다. 심야에 횃불 시위를 하면서 국민들을 선동하기도 했다. 이들의 과격한 주장과 시위는 정국의 안정을 바라며 공산당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국민들에게 극도의 불안감을 안겨 주었다. 혁신계는 통일사회당, 사회대중당 등으로 갈라져 민주당에 경쟁적으로 도끼질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김대중 자서전> #
3. 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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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4. 민주당계 정당의 시조
오늘날 대한민국의 양대 정당 중 하나이자 민주당계 정당을 대표하는 더불어민주당은 이 당을 본인들의 시작점으로 보고 매년 9월 18일 창당 기념일 행사를 연다.오랜 기간 동안 이합집산을 반복하며 역사적으오 여러 세력이 뒤섞였지만, 뿌리를 되짚어 올라가면 성질이나 계파 등 많은 요소와 ‘민주당’이라는 당명이 이 정당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창당 기념 행사를 통해 더불어민주당은 본인들이 이승만 - 박정희 - 전두환 정부에 맞서 싸웠던 '반독재 민주정당'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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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열린 첫 번째 기념 행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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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신익희 생가에서 열린 기념 행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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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열린 기념 사진전 |
5. 역대 지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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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000080,#7ffeff> 임시 곽상훈 | 초대 신익희 | 권한대행 곽상훈 | 제2-5대 조병옥 | 제6대 장면 |
}}}}}}}}}}}} |
||<table align=center><table bordercolor=#000080> 대수 || 직함 || 이름 || 임기 || 비고 ||
임시 | 의장 | 곽상훈 | 1955년 9월 19일 ~ 1955년 9월 20일 | |
초대 | 대표 | 신익희 | 1955년 9월 20일 ~ 1956년 5월 5일 | 서거 |
권한대행 | 곽상훈 | 1956년 5월 6일 ~ 1956년 7월 18일 | ||
제2대 | 조병옥 | 1956년 7월 18일 ~ 1956년 9월 28일 | ||
제3대 | 1956년 9월 28일 ~ 1957년 10월 18일 | |||
제4대 | 1957년 10월 18일 ~ 1958년 10월 30일 | |||
제5대 | 1958년 10월 30일 ~ 1959년 11월 27일 | |||
제6대 | 장면 | 1959년 11월 27일 ~ 1961년 5월 16일 | 5.16 쿠데타로 정당 해산 |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margin-bottom: -36px;" | 제1~2대 이석기 | 3대 오위영 | 제4대 유진산 | 제5대 김의택 | 제6대 이석기 |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 |
6. 출신 대통령
||<-7><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5ba6><tablebgcolor=#ffffff,#1c1d1f><bgcolor=#005ba6> 대한민국 대통령 ||
| ||||||
번 | 이름 | 대 | 임기 | 선출 방식 | 정당 | |
취임일 | 퇴임일 | |||||
2 | 윤보선 (1897 ~ 1990) | 4 | 1960년 8월 12일 | 1962년 3월 24일 | 제4대 대통령 선거 간선 79.09% | 무소속[7] |
7. 출신 부통령
부통령
대한민국 부통령 | ||||||
번 | 이름 | 대 | 임기 | 선출 방식 | 정당 | |
취임일 | 퇴임일 | |||||
4 | 장면 (1899 ~ 1966) | 4 | 1956년 8월 15일 | 1960년 4월 25일 | 제3대 대통령 선거 직선 46.40% | 민주당 |
8. 출신 국무총리(내각제)
국무총리
대한민국 국무총리 | ||||||
| ||||||
번 | 이름 | 대 | 임기 | 선출 방식 | 정당 | |
취임일 | 퇴임일 | |||||
4 | 장면 (1899 ~ 1966) | 7 | 1960년 8월 19일 | 1961년 5월 18일 | 장면 국무총리 후보자 임명안 간선 52.0% | 민주당 |
9. 역대 선거
-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
대통령 후보 신익희 사망- 부통령 후보 장면 46.43% 당선
- 1956년 지방선거
- 시장 0/6
- 읍장 1/30
- 면장 9/544
- 시의원 54/416
- 읍의원 57/990
- 면의원 231/16,051
- 특별시·도의원 98/437
-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 79/233 33.9%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대통령 후보 조병옥 사망부통령 후보 장면 17.5% 낙선-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
- 민의원 175/233 75.1%
- 참의원 31/58 53.4%
- 국무총리 후보 장면 117/225 당선
-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
- 대통령 후보 윤보선 208/263 당선
- 1960년 지방선거
- 특별시장·도지사 6/10
- 시장 12/26
- 읍장 23/82
- 면장 297/1,359
- 특별시·도의원 195/486
- 시의원 129/420
- 읍의원 142/1,055
- 면의원 2,510/15,376
9.1. 대통령 선거
9.2. 부통령 선거
부선
<rowcolor=#fff> 연도 | 선거명 | 후보자 | 득표 수 (득표율) | 결과 |
1956년 | 3대 | 장면 | 4,012,654 (46.43%) | 당선 |
1960년 | 4대 | 장면 | 1,843,758 (17.51%) | 낙선(2위) |
10. 관련 문서
11.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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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내각 | 민주당 (1960.8.~1961.5.) | ||
박정희 정부 | 민주공화당 (1963.12.~1979.10.) 유신정우회^[1]^ (1973.3.~1979.10.) | ||
전두환 정부 | 민주정의당 (1981.1.~1988.2.) | ||
노태우 정부 | 민주정의당 (1988.2.~1990.2.) → 민주자유당 (1990.2.~1992.10.) | ||
문민정부 | 민주자유당 (1993.2.~1996.2.) → 신한국당 (1996.2.~1997.11.) | ||
국민의 정부 | 새정치국민회의 (1998.2.~2000.1.) → 새천년민주당 (2000.1.~2002.5.) 자유민주연합 (1998.2.~2001.9.) 민주국민당 (2001.4.~2001.9.) | ||
참여정부 | 새천년민주당 (2003.2.~2003.9.) → 열린우리당 (2004.5.~2007.2.) | ||
이명박 정부 | 한나라당 (2008.2.~2012.2.) → 새누리당 (2012.2.~2013.2.) | ||
박근혜 정부 | 새누리당 (2013.2.~2017.2.) → 자유한국당 (2017.2.~2017.3.) | ||
문재인 정부 | 더불어민주당 (2017.5.~2022.5.) 더불어시민당^[A]^ (2020.3.~2020.5.) | ||
윤석열 정부 | 국민의힘 (2022.5.~2025.4.) 국민의미래^[A]^ (2024.2.~2024.4.) | ||
이재명 정부 | 더불어민주당 (2025.6.~현재) | ||
[1] 대통령이 임명하는 국회의원으로 구성되어 있는 교섭단체. [A] 비례대표 득표용 위성정당.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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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 반공임시특별법 통과 시도 (데모규제법) · 2대 악법 반대운동 · 특정외래품판매금지법 제정 ·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시안 국무회의 의결 · 민족자유통일연맹 통일촉진 궐기대회 개최 · 5.16 군사정변 · 군사혁명위원회 출범 (국가재건최고회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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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은 참의원(상원) 의석 수, 우측은 민의원(하원) 의석 수 |
[1] 이후 '반독재' 단일 야당 신민당 창당 전까지 민주당계 정당들은 이합집산을 반복하게 된다.[2] 대표적인 인물이 김영삼 전 대통령이다.[3] 당연히 사망한 후보를 향해 한 투표는 무효표 처리된다. 또한 당시 여론을 분석한 여러 자료에서 당시 민주당을 지지하던 유권자 중 신익희를 향한 기권표를 던지지 않은 상당수가 조봉암이 아니라 이승만을 찍은 것으로 나타났다.[4] 이승만의 자유당이나 박정희의 민주공화당, 전두환의 민주정의당도 달성하지 못했던 마의 3/4선의 의석을 확보한 것이다. 90년대 초반의 민자당이 이에 비견되는 의석비율을 확보하긴 했지만 선거로 이루어진 건 아니었고, 92년 총선에서 149석으로 쪼그라들았다.[5]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장면 총리는 인간적으로는 나무랄 데가 없었지만 대차지 못했다. 그런 점이 혼란기 지도자로서는 흠이었다. 하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굳건한 신념은 흔들림이 없었다”고 평하기도 했다.[6] 한편 더불어민주당이 1955년 민주당을 기념하는 것과 별개로 현재의 민주당 또는 민주당계 정당의 시초가 어디인가에 관해서는 1945년 한국민주당 혹은 김대중이 창당한 1987년 평화민주당,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라는 등 여러 의견들이 존재하나, 現 더불어민주당의 직접적 기원은 1987년 민주화 이후 창당한 평화민주당 또는 새정치국민회의라고 볼 수 있다.[7] 선출 당시 당적은 민주당이었으나, 제2공화국 헌법상 대통령은 당적을 보유할 수 없었기에 취임 직전에 탈당했다.[8] 민주당 신파[9] 민주당 구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