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3-12 15:36:21

중도

1. 일을 진행하는 중(中途)2. 정치적으로 한 쪽에 치우치지 않은 것(中道)3. 중앙도서관을 줄여서 부르는 말4. 대한민국 춘천시에 위치한
4.1. 관련 문서
5. 일본에서의 중도(衆道)6. 중국의 지명 중도(中都)7. 불교의 교리 중도(中道)

1. 일을 진행하는 중(中途)

보통은 '중도 하차하다' 정도에나 쓴다.

2. 정치적으로 한 쪽에 치우치지 않은 것(中道)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중도주의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중앙도서관을 줄여서 부르는 말

국립중앙도서관, 안산중앙도서관 등을 일컫는다. 또는 대학교에 대학 중앙도서관 이외에 단과대 도서관이라든가 하는 타 도서관이 있을 경우, 구분을 위해 중앙도서관 쪽을 '중도'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해당 문서들을 참조.

4. 대한민국 춘천시에 위치한

한반도 고대사를 뒤흔드는 유적들이 발견되는 지역.

1967년 의암댐 건설로 인해 만들어진 인공섬으로 강원도로 놀러오는 사람들에게는 주로 레저나 캠핑을 오는 관광지 중 하나로 알려진 곳이었다. 이 지역에는 1970년대 발견된 중도적석총과 같은 선사 시대 유적지들이 발견되어 예전부터 학계의 주목을 끌었던 곳이었으나 후속 발굴이나 탐사는 그다지 진행되지 않았었다. 그 후 2000년대에 강원도가 관광객 유치를 위해 동계 올림픽 유치는 물론 도 내 주요 관광명소에 테마파크들을 대대적으로 유치하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야심차게 유치한 테마파크가 바로 레고랜드였고 춘천역을 통해 교통편이 편한 중도에 레고랜드를 지을 계획이었는데...

2014년 공사 작업을 하던 중에청동기 시대 대규모 촌락 유적이 발굴되기 시작했다!(##) 이는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세계 중에서도 역대 최대 규모의 선사 시대 유적이다.

발견된 유적지의 규모가 워낙 커서[1] 고조선 시대판 경주시라고 불릴 정도로 대규모라사실 고조선 수도 학계와 강원도민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다. 학계를 비롯한 역사 관련 단체에서는 유물 보존을 위해 공사를 중단하라고 요구하였으나 강원도 개발정책의 핵심 중 하나였던 레고랜드 포기는 강원도나 부동산 투자자들 측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라 개발 강행을 외치는 상황이다. 일단 유적지를 최대한 보존하면서 레고랜드를 짓겠다는 입장이지만 여전히 갈등의 불씨는 남은 상황.

2015년 12월 들어서는 원삼국시대(철기 시대)로 추정되는 환호[2]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현재 발견된 것은 크기가 800m가 넘는데 이는 현재까지 발견된 한반도 환호 중 최대 규모다. 심지어 이건 발굴 작업이 진행된 일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2014년 발견된 비슷한 시기 이곳에서 고구려 귀고리[3]까지 포함하면 사실상 한반도 내에서 유일하게 석기 시대-청동기 시대-철기 시대-삼국 시대의 변천사를 한 번에 연구할 수 있는 최중요 유적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그리고 중도로 가는 선착장은 망했다. 사학계가 현기증 내는 소리가 들린다. 의암댐이 만들어지지 않아 수몰되지 않은 유적지가 더 발굴되었다면 한국 고대사를 새로 썼을 듯. 유네스코는 물론이고

그러나 현재는 이를 무시하고 레고랜드 공사가 강행이 되고 있는 상황이고, 레고랜드를 반대하는 사람들 또한 시위를 멈추지 않은 상황이다.

비슷한 사례로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일대에도 백제시대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이 곳에 청주테크노폴리스라는 신도시가 개발될 예정이라 시민들의 반발이 거센 상황이다.

4.1. 관련 문서

5. 일본에서의 중도(衆道)

슈도라고 읽는다. 정확히는 와카슈도(若衆道)의 약칭이며 일본에서 남성 동성애의 한 가지 형태로 전해진다. 헤이안 시대에 공가[4]스님[5]의 사이에서 유행했던 것이 점차 시대가 지나면서 전국 시대 무렵에는 무가에서도 당연시되었고, 이 즈음해서 높으신 분의 취미에서 일반인들도 즐길 정도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남색 풍습은 에도 시대에도 성행하며 당대의 일본 문학작품에서도 남색을 다룬 소설이나 그림들이 적지 않게 나오며 일본의 전통극인 가부키에도 중도를 소재로 다룬 작품들이 여럿 존재하지만 메이지 유신으로 성관념이 서구화되고 남색 풍습이 지탄의 대상이 되면서 사라졌다. 다만 현대에는 보이즈 러브오토코노코 등으로 간접적으로 슈도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카더라

전국시대에는 주로 신분이 높은 무사가 가신의 아들이나 전도유망한 젊은 이를 코쇼(小姓)로서 자신의 수발을 들게 했는데 대개는 다이묘의 중도의 상대는 이 코쇼였다. 대표적인 예가 오다 노부나가의 경우 마에다 토시이에모리 란마루.[6]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카게카츠, 다테 마사무네 등이 대표적인 예로 알려져 있다. 예외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를 행하지 않았는데, 히데요시 본인은 하층민 출신이라 이런 '높으신 분들의 취미'에 대해 처음부터 잘 몰랐기 때문이다. 대신 여색 자체를 즐겼다고 한다. 그리고 그 때문에 풍류도 못 즐긴다고 까였다(...). 심지어 이런 평판을 잠재우기 위해서 부하들이 일부러 미동 수십 명을 방에 넣어놓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들어가게 했다. 그러고 부하들의 기대대로(?) 정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미동 하나를 데리고 나갔다. 잠시 후 미동이 돌아오자 부하들이 일제히 총애를 받았냐고 물어봤는데 미동은 "누나가 있는지 물어보셨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불교 대형사찰의 경우 보통 치고(稚児), 즉 머리를 깎지 않고 절의 잡일이나 행사를 돕는 어린 소년들이 슈도가 되는 일도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이 둘은 전혀 다른 개념이고[7] 높은 귀족 자제 출신의 조치고(上稚児)나 재능이 뛰어난 주치고(中稚児)들은 애먼 일을 당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나 신분이 낮은 이른바 게치고(下稚児)는 자주 승려의 성욕 해소 대상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에는 전혀 이상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공식문서상에서도 이 슈도에 관한 이야기가 남아있는 경우가 있다. 또한 고대 그리스에는 스승과 제자의 동성애 관계가 존재했고 파라오 시대의 이집트로마 시대에도 귀족들의 취미 중 하나가 소년과의 동성애를 즐기는 것이었으므로, 이러한 소년애가 일본만의 독특한 현상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오히려 고대 그리스의 경우가 가장 동성애에 긍정적이었는데. 여성과의 섹스는 그냥 애를 만들기 위한 것일 뿐이지만 남성끼리의 섹스는 진정한 마음을 나누는 행위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에서 일본인의 성문화를 짧게 언급하며 "일본 성인 남성은 남색을 즐길 때에도 절대 수동적인 역할은 맡지 않으며, 여성의 입장에 놓이는 것은 반드시 소년이어야만 한다"는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그리스와 로마의 동성애 역시 '공', '수'의 역할은 철저히 사회적 지위와 신분에 따라 결정되었으며, 이를 어길 경우 사회적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로마 시대에는 동성애 자체는 금기시되지 않았으나 이렇게 '공'과 '수'가 바뀐 것은 대단히 모욕적인 행위로 간주했다. 서기 3세기 엘라가발루스 로마 황제가 암살당한 이유 중 하나가 로마 황제인 자신이 '수'의 역할을 맡았을 뿐 아니라 남성들에게 끊임없이 아양과 유혹을 하는 등, 당시 기준으로 추태를 부렸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에서도 성인 남성(공)과 소년(수)의 관계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어쨌거나 당시 조선인들의 눈에 매우 이상하게 보였던 풍습이었는데[8] 조선 통신사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이러한 풍습에 대해 기이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신유한이란 사람이 쓴 글(<해유록(海遊錄)>)을 보면, 신유한이 당시 일본의 유학자인 아메노모리 호슈와 대화하던 도중 이 동성애 문화를 언급한다. 신유한이 '남녀 간의 정욕이야 음양(陰陽)의 이치에 따라 당연한 것이지만, 세상에 어찌 음(陰)이 없이 양(陽)끼리만 서로 정을 느껴 즐거워할 수 있는가?'라며 의아해 하자, 호슈는 '학사께서는 그 즐거움을 아직 모르시군요.'라고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고. 이후 신유한은 '아메노모리 호슈조차 똑같이 저리 말하니, 일본의 풍속이 미혹(迷惑)함을 알 수 있다.'라며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사실 유학자적인 관점에서는 이상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는데, 아메노모리 본인은 유학자가 아니라서 "님이 맛을 못봐서 그럼ㅇㅇ" 드립이나 치겠는가. 좋다 나쁘다 평가할 건 아니지만 그냥 당시에나 지금이나 언제나 그랬듯이 일본 성문화가 로마나 그리스나 이집트 등 고대 문명들과 같이 독특했다고 보는 게 더 합리적이다. 애초에 유학과 눈곱만큼도 상관 없는 서양인 방문객들도 중도를 보고 몰라 뭐야 그거 무서워로 놀라곤 하였다. 물론 이 때 서양인들은 로마제국 때와 달리 성경에서 동성애 금지를 명시한 기독교도들이었으니 놀라는 것도 당연하다...

6. 중국의 지명 중도(中都)

중경(中京)이라고도 한다.

유명한 곳으로 금나라의 중도대흥부(中都大興府), 원나라의 중도(후에 대도로 개명)가 있는데 지금의 북경이다.

명나라의 중도는 초기 명나라에서 남경에 버금가는 수도로써 현 안휘성 봉양(鳳陽)현이다.[9]

현재는 하남성의 성도 정주(鄭州)의 별칭이기도 하다. 나고야?

7. 불교의 교리 중도(中道)

가장 기본적으로는 무아를 설명하는 개념으로 쓰인다. 대강 " '나'가 존재한다고 하면 상견이고,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 단견이다. 여래는 이 양극단을 떠나 중도에서 설한다"라는 묘사가 있다. 연기 참조. 이것을 사람을 지칭하는 '인무아'에서 확장시켜 '법무아'로 진입한다면, "저것을 물병이라고 불러도 안 되고, 물병이 아니라고 해도 안 된다.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부르겠는가?"라는 선문답이 완성된다. 그러나 꼭 이런 의미로만 쓰인 것도 아니어서, 석가모니는 수행을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 제자에게 '솜씨 좋은 악사가 악기의 현을 지나치게 팽팽하거나 너무 느슨하게 하지 않듯이, 딱 알맞는 정도로 수행하는 것이 좋다'라고 답한 바 있다.

[1] 925 가구 이상이 거주한 지역으로 최대 1만까지 거주했을 수도 있다. 게다가 학계에서 고조선의 유물로 추정하는 비파형 동검도 발굴되고 있다.[2] 취락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도랑.[3] 휴전선 이남에서 고구려 유물이 발굴되는 경우는 매우 희귀하다.[4] 천황을 직접 섬기는 일본 조정의 신하 겸 귀족이다. 후에 무로마치 시대사무라이 계급이 태두하면서 몰락하고 에도 시대 말기에 도막파를 지원하면서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5] 불교의 가르침에 여자를 범하지 말라는 것이 있어도 남성끼리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다는 이유로. 헤이안 시대 남색을 다룬 아키즈키 코의 BL 소설 <왕조 로망스>에 이런 모습이 잘 묘사돼있다.[6] 그러나 모리 란마루가 실제로 노부나가의 중도의 상대역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명확히 증명되지 않고 설만 존재한다.[7] 현대에는 신사나 절에서 대형 행사가 있을 때 임시로 동원되는 꼬꼬마들을 가리키며, 대체로 유치원~초등학생들이 얼굴에 하얀 칠을 하고 헤이안 시대의 복장을 입는 경우가 많다.[8] 조선에서도 남사당패블이 남자를 상대로 성을 파는 등 남색풍습이 아예 없던것은 아니었지만 일본처럼 고위층들도 거리낌없이 즐겼던 것은 전혀 아닌 마이너한 문화였다.[9] 다름 아닌 주원장의 고향(...).